2020. 1.26. 연중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 속에서 일치하며 기쁨으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구원과 희망의 빛이신 예수님이 첫 제자들을 불러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심을 묵상하며 우리도 어둠 속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구원과 희망의 표지가 되기를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제자들처럼 땅의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더 큰 가치를 위해 우리의 삶이 쓰임 받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우리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복음을 전하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9:1-4
  • 시편 – 27:1,4-9
  • 2독서 – 1고린 1:10-18
  • 복음서 – 마태 4:12-23

연중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 속에서 일치하며 기쁨으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1독서는 ‘평화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실 메시아 탄생의 기쁨’을 예언하는 《이사야》입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1절)라고 선포합니다. 그 ‘빛’은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평화’와 ‘정의의 나라’를 세울 ‘아기의 탄생’을 말합니다(이사 9:5~6; 사무하 7:4~17). 우리는 지난 성탄밤 설교에서 그 아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이 ‘성탄’ 관련 본문을 ‘연중시기’(年中時期)에 배정한 이유는 복음이야기에서 전하듯이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전도활동의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선포된 본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봅니다. 참고로 구약학계에서는(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제 1이사야(1~39장), 제 2이사야(40~55장), 제 3이사야(56~66장)로 구분합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의 사후 ‘통일왕조’는 둘로 ‘분열’됩니다(기원전 931년).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입니다. ‘제 1이사야’ 예언자(기원전 742-701/700)는 ‘남왕국 유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霸權)은 오늘날의 이라크 북쪽에서 시작된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적극적으로 ‘서진’(西進)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정복한 지역마다 아시리아의 ‘국가 신’(神)을 최고로 섬기게 했고(고대에는 모든 전쟁이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적극적인(강제적인)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

아시리아의 ‘서진’ 정책에 맞서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반(反)아시리아 동맹’을 결성했습니다(2열왕 16:5). 기원전 8세기 후반, ‘반(反)아시리아 동맹’의 ‘맹주’(盟主)역할을 한 나라가 ‘시리아’(수도는 다마스커스, 아람 왕국이라고도 불립니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수도는 사마리아, 에브라임 왕국이라고도 불립니다)입니다. 그들은 ‘남왕국 유다’를 ‘반(反)아시리아 동맹’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2열왕 16:5~9).

그 당시 ‘남왕국 유다’의 왕은 ‘아하즈’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12번째 왕이었으나 《역대기》는 남왕국 유다의 가장 악한 왕으로 그를 평가했습니다. 그런 평가를 받는 이유가 이제 설명될 것입니다. 그는 ‘반(反)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결성한 ‘반(反)동맹’ 사실을 ‘아시리아’에 알리며 그쪽으로 붙었습니다. 이 일로 기원전 733년 ‘시리아 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남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습니다(이사 7:1). 이름 하여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입니다. 그들은 ‘아하즈’를 폐위시키고, 자기들이 믿을 만한 사람(타브엘의 아들)을 새 왕으로 세울 계획이었습니다(이사 7:5~6).

남왕국 유다는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면초가’에 놓였습니다(2열왕 16:5). ‘아하즈’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은 ‘어둠의 공포’에 사로잡혀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이사 7:2). 유다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그 시기에 하느님께서 ‘제 1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아하즈’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이사 7:4, 관련 설교는 2019.12.22. 대림4주일을 참고하십시오). 연합군의 ‘계략’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이사 7:7). 하느님께서 ‘구원을 위해 역사에 직접 개입’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징조”를 몸소 보여줄 터이니(이사 7:14) 아하즈에게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 순종’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하지만 아하즈는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아시리아’에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요청합니다(열왕하 16:7~8).

기원전 732년 ‘아하즈’의 간청을 받아들여 ‘아시리아’ 제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후원국으로 ‘출병’(出兵)합니다. 그는 ‘시리아 왕국’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왕 ‘르신’을 처형했습니다(열왕하 16:9). 또 ‘베가’가 다스리던 ‘북왕국 이스라엘’도 침공합니다(열왕하 15:29). 그는 다른 지역이 아니라 ‘곡창지대’를 형성하던 이스라엘 북쪽의 ‘갈릴래아 호수’ 일대를 침공했습니다. 그 일대는 ‘즈불룬’(Zebulun)과 ‘납달리’(Naphtali) 지파가 여호수아로부터 ‘약속의 땅’에서 분배받은 지역입니다. ‘제 1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이사 8:21~23) 졸지에 그 일대에 살던 두 지파가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곡식은 수탈당하고 주민들 중 일부가 아시리아에 ‘노예’로 끌려갔습니다(열왕하 15:29).

《성경》에 그런 기록은 없지만 정복지에 적극적인(강제적인) ‘이주민 정책’을 펼친 아시리아의 특성상 그 일대(즈불룬과 납달리)엔 ‘다른 민족’이 옮겨와 살게 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이 주신 그 ‘약속의 땅’이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방인의 갈릴래아’라 부르게 된 시작입니다. ‘약속의 땅’ 북쪽 지역이 심각하게 ‘황폐화’되고 이방 나라인 ‘아시리아 제국에 편입’되고 말았습니다.

‘제 1이사야’는 이렇게 된 진짜 이유를 하느님께서 ‘즈불룬’과 ‘납달리’ 지파를 ‘천대’(賤待)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이사 9:1). 그들이 ‘천대’를 초래한 이유는 ‘우상숭배’였을 것입니다. 언급한 대로 그 지역은 ‘곡창지대’였습니다. 농사에는 ‘자연현상’, 즉 ‘기후와 땅’이 절대적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자연현상’을 ‘신(神)들’이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신들’은 특히 변덕스럽기 때문에 마음을 달래서 농사가 잘 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자연현상과 관련한 다채로운 ‘우상숭배’(기후의 신 바알, 바알의 아내이자 풍요와 전쟁의 여신 아세라, 곡물의 신 다곤, 다산과 전쟁의 여신 아스도렛 등등)가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곡창지대’에 정착한 ‘즈불룬과 납달리’ 지파는 하느님이 혐오하시는 ‘가나안 우상숭배’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향민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당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시작도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기원전 722년) 그 땅에 강제적인 ‘이주민 정책’을 펼친 결과입니다(열왕하 17:6,24). 구약 후대에 그 두 지파가 살던 땅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듯이 간단히 ‘갈릴래아’로 불렸습니다.

이렇게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반(反)아시리아 정책’(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은 ‘약속의 땅’ 북부 지역을 ‘캄캄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시리아’에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 남왕국 유다 왕 ‘아하즈’의 ‘외세 의존 정책’은 ‘약속의 땅’ 북부 지역을 심각하게 ‘황폐화’시키고 자기 동족을 ‘캄캄한 어둠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남왕국 유다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 불리게 된 한 줄 요약입니다. 더욱이 그는 아시리아의 국가종교, 즉 ‘우상숭배’를 끌어들였습니다(2열왕 16:10~18). 이것도 그가 남왕국 유다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 불리게 된 한 줄 요약입니다.

1독서의 시대 배경을 이해했으니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북왕국’이 큰 위기를 겪자 ‘남왕국 유다 백성’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그들 역시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시리아는 유다마저 얼마든지 먹어치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어둠의 구름’, ‘죽음의 그늘’이 점점 약속의 땅 전체를 뒤덮을 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이 상황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았습니다. ‘제 1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그 상황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제 1이사야는 ‘어둠의 구름’, ‘죽음의 그늘’로 뒤덮인 그 지역에서 찬란히 빛나는 ‘큰 빛’을 봅니다. 그 빛이 사람들의 마음을 ‘무한한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다시 말해 ‘평화의 왕 메시아가 오시어 억눌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완전한 평화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실 것’이라는 ‘희망의 노래’입니다(관련 설교는 2019.12. 24. 성탄 밤을 참고하십시오).

전에는 그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을 천대하셨으나 장차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외국인들의 지역(이방인의 갈릴래아)을 귀하게 여기실 날이 오리라.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 이사 8:23~9:1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천대’하시어(이것이 진짜 이유입니다. 아시리아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아시리아로부터 억눌림을 당하던 백성들의 괴로움의 구름과 절망의 그늘이 걷힐 날이 옵니다. 마치 ‘천지창조의 첫 날’처럼 ‘어둠 속, 캄캄한 땅에 살던 그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옛적에는 하느님께서 ‘즈불룬’과 ‘납달리’ 지파의 땅을 ‘천대’받도록 내버려두셨으나, 장차 ‘서쪽 지중해’(마태오는 여기를 갈릴래아 호수로 가는 길로 바꿉니다)로부터 요르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들’(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갈릴래아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귀하게 여기실 날’이 올 것이라 ‘희망을 노래’합니다.

이어서 제 1이사야는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과 승리’를 노래합니다(2~4절). ‘메시아’는 천대 받고 억눌린 당하던 그들에게 ‘무한한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2절). 한마디로 세상의 ‘전복’(顚覆)이 일어납니다. ‘성모 마리아’가 부른 ‘마니피캇’(Magnificat)이 생각납니다(루가 1:46~55). ‘추수’할 때의 ‘기쁨’처럼, ‘전리품’을 나눌 때의 ‘즐거움’처럼,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직장인들이 ‘초과성과급’을 받는 일에 비길 수 있을까요? 월드컵 축구 전사들이 ‘우승상금’을 받는 일에 비길 수 있을까요? 하기야 그런 기쁨과 즐거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오실 메시아’는 ‘무한한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에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펼치시는 ‘하늘나라 전도활동’을 ‘혼인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9:14~15). 세상에서 ‘혼인잔치’처럼 기쁘고 즐거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묵시록》도 우리(교회, 신부新婦)의 구원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할 정도합니다(묵시 19:5~10).

특히 《이사야》는 ‘미디안’에 대한 ‘판관 기드온’의 위대한 ‘승리’를 언급하며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가 가져다주실 ‘기쁨’과 ‘즐거움’을 비유합니다(판관 7:16~25). 기드온의 300용사가 ‘미디안 족속’에게 거둔 승리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고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처럼 ‘오실 메시아’는 이방 민족에게 종살이하고, 강제 노동의 멍에를 메며, 채찍에 혹사당하는 그들을 ‘완전히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3절). 더 이상 군화도, 군복도 필요 없어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4절). ‘완전한 승리’를 거두어 전투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원수’(敵)에 대한 ‘완전한 승리’입니다. 정말이지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가 이루실 구원과 승리는 완벽’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없고 ‘평화의 세상’입니다. 존 레논(John Lennon)이 〈Imagine〉을 부르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이사야》가 부른 노래입니다. 《성경》은 정말 놀라운 ‘영감(靈感)을 주는 책’입니다.

어째서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그들을 선대해 주시는 것일까요? 그 약속의 땅 일대에 살던 두 지파의 백성들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가장 먼저 약탈과 파괴와 고난을 겪은 일종의 희생양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우상숭배의 죄악’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돌이키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들은 가장 먼저 ‘메시아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 1이사야’가 부른 ‘희망의 노래’는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1이사야의 본기지인 ‘예루살렘’마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지 130여년 만에 ‘바빌론 제국’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다 주민들은 포로 신세가 되었고, 약속의 땅 전체가 ‘어둠의 구름’, ‘죽음의 그늘’로 뒤덮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제 1이사야가 부른 그 ‘희망의 노래’가 성취될까요?

그리스도교는 《이사야》의 예언이 ‘참 빛’으로 ‘성육신’하시고 공생애 동안 ‘하늘나라’(하느님 나라)를 전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대대로 선포해 왔습니다. 그래서 ‘복음’(福音,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야기에서 ‘마태오’는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래아 전도활동’을 통해 ‘분명히 성취되었다’고 인용합니다(마태 4:15~16). 더욱이 복음이야기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그 갈릴래아가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무엇’은 복음이야기에서 다룰 것입니다. 실제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께서 ‘하늘나라 전동활동’을 펼치신 대부분의 지역은 이스라엘 북부 지역인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한 때 ‘천대를 받던 지역’이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억눌림을 당하던 백성들’이 ‘귀한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갈릴래아에 살던 ‘그 백성들’이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누구’를 ‘상징’하는지도 복음이야기에서 다룰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무한한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2절), 종살이로부터의 자유, 강제 노동의 멍에를 벗어버림, 혹사당하는 채찍에서 해방됨(3절), 모든 적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4절)는 《신약성경》이 증언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십자가에서 일어났다’고 그리스도교는 믿을 진리로 선포해 왔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병과 저주’, ‘죄와 죽음’, ‘악과 사탄’의 압제로부터 ‘완전히 해방’하시고 ‘구원’하셨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세례성사’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에페 2:6)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직 지상에 있기에 때때로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어떤 시련이든지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라고 선포합니다. 이 모든 ‘승리의 기쁨과 즐거움’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완전한 승리’와 ‘평화’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1독서는 지금이 ‘공현절기’임을 알려주는 배정입니다.

《시편》은 ‘빛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을 간구하는 <27편>입니다. 전반부(1~6절)와 후반부(7~14절)가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주석가들은 본래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두 편을 한 데 묶어놓았다고 주장합니다. 총 14절까지 있는데 오늘은 1절, 4절부터 9절까지만 배정했습니다. 이런 식의 배정은 전체 맥락을 설명해야 하는 설교자로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1절)이라는 찬미와 “당신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이 몸을 저버리지 말아주소서”(9절)라는 찬미가 <복음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하긴 합니다. 그래도 전체를 성시로 배정하는 것이 더 좋을 걸 그랬습니다.

전반부(1~6절)는 ‘성전에서 하느님의 임재(臨在)를 간청하는 시인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피난처’라고 찬미합니다.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온 ‘구원의 하느님’을 향한 ‘확신’입니다(1~3절). 이어서 하느님이 ‘임재’(臨在)하시는 ‘성전’에 대한 자신의 강한 소망을 표현합니다(4~6절).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 시편 27:4

시인은 ‘빛이요, 구원이며, 생명의 피난처’이신 주님이 계신 ‘성전’에 사는 것이 자신의 ‘단 하나의 기도 제목’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소원은, 마치 1독서의 즈불룬과 납달리 주민들처럼, ‘그의 삶이 위협에 놓여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성전’이 ‘빛과 구원이신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에게 ‘성전’은 ‘빛’이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자 하느님께서 마치 얼굴을 마주하듯이 ‘인간을 만나’ 주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성전을 ‘사모’합니다.

후반부(7~12절)는 ‘애타게 도움을 간청하며 탄원하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나를 찾으라.”(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신실하신 주님을 찾고(예배하고), 애타게 도움을 간구합니다(7~10절). 지금까지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이 이제도 자신을 도와주실 것을 간구합니다(9절). 이렇게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해하려는 ‘원수들’이 엿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11~12절).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처럼,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는 ‘고난’ 속에 있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애타게 간청하는 ‘믿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살아생전 자신에게 베풀어질 변함없으신 하느님의 은덕을 높이고 확신하는 기도로 노래를 마칩니다(13절). 시인의 ‘필사적인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사제를 통해 그를 ‘위로’하십니다. 그 ‘위로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 – 시편 27:14

이 말씀은 새해를 출발하며 지금 하느님의 현존 앞에 모인 우리 모두를 향한 축복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시편 130:7) 우리도 믿음으로, 희망으로 하느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하느님의 약속’ 중 많은 일들이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그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이 그랬으며, 바빌론 포로에서 귀향하는 일이 그랬고, 무엇보다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 탄생의 약속’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약속’을 틀림없이 ‘성취’해 오셨습니다.

여기서 한 발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인은 “주님의 성전에서 눈을 뜨고, 주님을 뵙는 것이 단 하나의 소원”(시편 27:4)이라 노래합니다. ‘마태오’는 이 노래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나라 전도활동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마태 4:15~16). 시인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천대와 억눌림의 땅에 살던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현실’이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참 성전’이신(요한 2:19~21; 묵시 21:22) 하느님께서 ‘성육신’하시어 당신의 나라에 오셨고(요한 1:11),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로 찾아 가셨습니다(마태 4:23). “어둠 속에 앉아 있던”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큰 빛’, ‘참 성전’이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시인처럼 필사적으로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둠의 구름 속,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그들에게 ‘참 빛’이 비쳤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야기입니다.

더욱이 위대한 복음전도자 사도 바울로는 ‘한평생 주님의 성전에 머물고픈 소원’(시편 27:4)을 가진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그 ‘성전’을 더 이상 ‘우리 밖’에서 찾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성전’ 삼고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1고린 3:16~17; 6:19~20).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함께 계시는 ‘성전’(하느님의 자녀)이 되었습니다(2고린 13:5). 사도 요한도 우리가 ‘참 빛’을 모신 ‘성전’이라고 가르쳤습니다(요한 1:9~12; 14:23). 《마태오복음》 기자도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이 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마태 28:20).

사도들의 후예인 성공회도 우리가 ‘말씀의 성육신’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성체성사’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우리가 ‘살아있는 성전’이라고 명백히 가르쳐왔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외부의 어떤 특정 건축물에서만 주님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누구나 ‘성전’입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동방에서 온 구도자들의 방문을 받은 ‘그 집’이, 영광으로 빛났던 이유는 ‘그 안에 아기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마음 안에 모신(마음이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빛과 기쁨의 하늘나라를 세운) 사람이 ‘성전’입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성전답게 몸과 마음을 돌보고 가꾸어야 합니다. 돌보고 가꾸는 일은 ‘기도생활’이고, ‘말씀’을 따라 ‘착한 행실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모신 거룩한 성전의 삶입니다.

이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성전)이 되었습니다. 세례 때 ‘초’를 건네받으며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시오. 그대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체성사’ 뿐 아니라 ‘말씀의 성사’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빛’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인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이 사랑으로 밝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빛의 자녀’인 우리를 통해 ‘세상의 어둠이 걷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빛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가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고 있습니까? 빛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가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닮은 사람들이 모인 ‘사랑 가득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요히 빛을 내는 ‘제대초’를 바라보며 오늘도 주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 노래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엄중한 ‘성시’입니다.

2독서는 ‘일치를 호소하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입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은 ‘교회,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 속에서 일치하며 기쁨으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이라는 전례독서 주제와의 연결이 빛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 1고린 1:17a

지난주에 2독서 배경 설명을 했으니 오늘은 바로 핵심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로는 ‘에페소’에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토교회가 ‘분열’로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파벌’(派閥)까지 생겼다(1고린 1:10~4:21)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11절). 큰일 났습니다. 하늘나라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인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분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교훈하신바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어느 동네나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지탱하지 못한다. – 마태 12:25

‘파벌’이 생긴 유래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고린토가 인구 50만이 넘는 대규모의 항구도시이다 보니 모여든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속담에 “까마귀라도 내 땅 까마귀라면 반갑다.”가 있습니다. 고린토에 모여든 신자들도 같은 교회공동체에서 친교하다 온 사람끼리는(혹은 동향끼리는) 좀 더 가깝게 지냈을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자 교회 안에 ‘파벌’(派閥)이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에는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하며 떠들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회공동체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을 특정 사도의 제자’(특정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라고 추켜세우면서 그 사도의 가르침(세례)을 다른 사도의 가르침(세례)보다 선호했습니다. 꼭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분열상을 보는 듯합니다. “나는 정교회인이다”, “나는 천주교인이다”, “나는 성공회인이다”, “나는 루터교인(침례교인, 감리교인, 장로교인, 순복음교인 등등)이다.”

‘베드로’의 경우는 확실치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바울로’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던 ‘아폴로’(사도 19:1)의 경우는 분명 고린토에서 활동했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 대립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로가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교훈합니까? 오늘의 분열된 그리스도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말씀이 제시됩니다.

바울로는 ‘같은 말’(의견), ‘같은 생각’, ‘같은 마음’(뜻)으로 ‘굳게 단합’(일치)할 것을 호소합니다(10절b).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하면서 그들이 ‘사랑의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명백히 선언합니다(10절a).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르침과 세례를 베푼 ‘특정 사도’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12절). 오히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의 그리스도께’ 속해 있을 뿐입니다(13절). 그들은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파벌’로 갈라져 대립하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그들의 주님(주인)이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 죽음’ 위에 세워진 교회를 ‘파벌’로 분열시키는 이는 “그리스도를 갈라지게” 하는 자입니다.

동시에 바울로는 그들이 자랑하는 ‘세례’를 상기시키면서 ‘일치’를 호소합니다(13절). ‘세례의 주인’도 다른 사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사랑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도 바울로에게 있어서 ‘세례’는 ‘일치를 호소’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하지만 고린토 교우들 중 몇몇이 내세우는 것만큼 바울로에게 있어서 ‘세례’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17절). 특히 ‘특정 사도’(가령 베드로)가 베푼 세례(또는 가르침)를 더 ‘신성’(神性)하게 여기면서 ‘세례도 같은 세례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이들 때문에 바울로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로마가톨릭이나 정교회로부터 ‘사도 계승권’ 시비를 당하는 저 같은 성공회 사제에게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이 얼마나 속 시원한지 모릅니다. 사실 이것은 바울로의 ‘사도성’을 가지고 시비하던 일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사도 바울로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냐면 이 ‘참을성’ 많고 ‘이성적인 양반’이 그만 ‘말실수’를 할 정도였습니다(14~16절). 자신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말고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말입니다(14절). 그러다가 자신의 말실수를 알아차리고 얼른 주워 담으며 ‘스테파나 집안사람들’을 언급합니다(16절). 그러면서 자신의 ‘사명’은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임을 재천명(闡明)합니다(17절a). 특히 자신은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말재주’(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17절b).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고 명백히 밝힙니다(17절c). 다시 말해 그들이 받은 ‘세례’가 상징하는 사랑의 사건,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라’는 호소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관심을 다시금 복음의 본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에 집중시킵니다(18절).

끝으로 ‘그리스의 십자가 사랑’만이 분열된 그들을 ‘하나’로 모으고,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하는 ‘하느님의 신비’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18절).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이치’(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를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합니다(18절). 사실 당시에 ‘십자가’는 처형 도구였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치욕스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신다고 선포하니 사람들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18절). 그렇게 ‘치욕스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니 그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선포하니 사람들은 ‘허튼 소리’라고 비웃었습니다(사도 17:32; 1고린 1:23). 그 ‘치욕스런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선포하니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핍박’하였습니다(1고린 1:23).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과학시대, 4차 과학혁명이 가져올 미래의 풍요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뜻하는 ‘십자가’가 ‘이치’(지성)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신’(神)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었다’는 말도 우습게만 들립니다. ‘신’(神)께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신’(神)이 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로와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그 치욕스런 ‘사랑의 십자가’만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8절). 죄에 붙잡혀 멸망을 향해 가는 인간들에게 하느님께서 다가오시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피조물들을 향한 ‘유일한(가장 귀한) 사랑의 방법’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다른 방법을 생각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행하시는 방법은 항상 최고이고,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참사랑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죄로 오염’되어 ‘죽음의 길’을 가는 인간의 생명은 ‘흠 없는 신(神)의 생명’만이 ‘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 방법을 ‘어리석은 생각’이라 ‘빈정’거려도 하느님은 십자가만을 내세우십니다(1고린 1:19~25).

‘십자가’에 담긴 이런 ‘사랑의 의미’를, 외아들을 주시어 ‘화목제물’로 삼으신 그 ‘구원의 의미’를 깨닫고 보니 바울로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 위에 우뚝 선 사도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십자가 복음 위에 더욱 굳건히 서 가야 합니다.

우리 성당 제단 십자가. 머리와 팔과 옆구리에 우리를 사랑하신 흔적이 그대로 보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 사명을 성취’해 가시는 《마태오복음》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하늘나라 전도활동’을 시작하시고, 첫 제자들을 부르시며, 하늘나라의 빛을 온 세상에 두루 비추십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 마태 4:12~13

그 시기는 세례자 요한이 ‘잡힌’(체포) 다음입니다. 우리는 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마태 14:3~12). 헤로데 대왕이 무고한 유아들을 학살한 것처럼,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의로운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가공권력이 저지른 폭력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명’(黎明) 역할을 했던 민중의 지도자가 사라졌습니다. 그 지도력의 부재 상태에서 진짜 ‘태양’이신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솟아올랐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갈릴래아가 요한을 체포해 참수한 헤로데 안티파스가 영주로 다스리던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를 전혀 겁내지 않고 호랑이 굴로 들어가신 셈입니다.

베드로 집터 위에 세운 기념성당입니다. 팔각형의 배 모양입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갈릴래아’에 있는 ‘가파르나움’(나훔의 동네, 위로의 마을)은 ‘자기 마을’로 불릴 정도로(마태 9:1)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점’이자 ‘하늘나라 운동의 본부’입니다.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 해안에 있는 가장 큰 상업도시이자 항구가 있던 곳입니다. 특히 ‘바다로 가는 길’(해안 길)이라 불리는(이사 8:23) 고대 도로가 지나고 있어서 ‘세관’도 있었고, 빈번히 드나드는 배들을 통해 갈릴래아 전체로 소식이 퍼질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가파르나움’의 누구 집에 가서 사셨는지는 모릅니다. 주석가들은 베드로의 집(또는 그의 장모의 집)이라 주장하지만 알 수 없습니다(마르 1:29~31). 지난 성지순례 때 가보니 베드로의 집터 위에 배 모양의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옆에는 제법 큰 규모의 ‘회당’ 유적도 남아있었습니다(루가 7:5).

베드로 기념성당 바로 옆에 있는 회당 유적입니다.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예전 증축하기 전 서울대성당 규모 정도요.

중요한 것은 ‘마태오’가 이 일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공생애를 ‘죄’와 ‘죽음의 폭력’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 세상을 향한 ‘구원의 큰 빛’이라고 《이사야》를 인용해 해석했습니다. 예언의 배경과 의미는 1독서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갈릴래아 지역’과 ‘그 백성들’이 문자적 의미를 넘어 ‘무엇’과 ‘누구’를 상징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남부의 ‘유대’, 중부의 ‘사마리아’, 북부의 ‘갈릴래아’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나자렛, 막달라, 가나, 티베리아, 가파르나움이 ‘갈릴래아’에 있는 ‘지명’(地名)들입니다. 1독서를 다룰 때 짧게 언급했듯이 ‘갈릴래아’는 예수님 당시까지도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여전히 ‘비하’되고 있었습니다(마태 4:15~16; 마르 14:70). 마치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이들이 ‘전라도 빨갱이들’이라고 ‘조롱’하듯이 말입니다. 그 지역의 역사적 유래도 1독서에서 짧게 언급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당시 상황까지 좀 더 포괄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리적으로 ‘갈릴래아’는 ‘비옥한 곡창지대’입니다. 그 이유로 주변 강대국들은 그 땅을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특히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 제국은 ‘갈릴래아’ 지역을 침공해 곡식들을 수탈하고, 주민들 중 일부를 아시리아로 끌고 갔습니다(열왕하 15:29). 그 지역을 아시리아로 ‘편입’하고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킵니다. 그러더니 10년 후인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아예 멸망시키고 ‘사마리아’에 살던 원주민들 중 일부를 끌고 갔습니다. 이번에도 그 땅에 ‘다른 민족들’이 들어와 살게 하는 ‘이주민(혼혈) 정책’을 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고, 독립의 꿈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제 갈릴래아 뿐 아니라 북왕국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아처럼 버려졌습니다. 그 지역 주민들은 하느님의 선민인 이스라엘로서의 정체성을 살려가는 일 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나 종교와도 싸워야하는 ‘한(恨)’ 많은 지역으로 변합니다. 같은 민족인 남왕국 유다로부터도 점점 더 고립되어 갔습니다. 바빌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에즈라’가 유다 지역의 총독이 된 뒤에는 여러 민족들(이방인들)이 모여 살던 갈릴래아나 사마리아의 상황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사제이자 율법학자인 ‘에즈라’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이방인)과 구별되는 ‘선민’(選民)이라는 ‘율법중심의 종교적 순수성’과 ‘순수혈통’을 보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그리스제국, 그의 사후 갈라진 왕조들 포함), 로마제국으로 고대근동의 패권이 바뀌었지만 ‘갈릴래아의 처지’는 별반 달라질 게 없었습니다. 그 지역은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기득권자’(대지주들)에게 살림이 거덜 난 ‘가난한 이들’(소작농)이 찾아드는 지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갈릴래아 지역의 ‘가난한 소작농’들은 ‘대지주들’의 착취에 ‘항거’해 자주 ‘봉기’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기득권자들인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못했던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더욱이 ‘갈릴래아’는 로마제국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하던 ‘혁명당원들’(열혈당원, 젤롯당원)이 숨어살던 곳이었습니다(루가 13:1).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혁명당원’ 출신의 ‘시몬’이 있었을 정도입니다(마르 3:18; 마태 10:4; 루가 6:15; 사도 1:13). 그들은 ‘암살자’로도 활약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살던 대지주들, 즉 대사제나 귀족 같은 기득권자들은 ‘혁명당원’을 두려워했습니다. 한마디로 ‘갈릴래아’라고 하면 ‘유다의 기득권자들’ 눈에는 ‘골칫거리’, ‘불순분자’, ‘반란자’와 동의어처럼 쓰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조롱’의 말을 퍼뜨렸습니다.

예로부터 갈릴래아는 저주받은 곳이고,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이방인의 갈릴래아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선동에 넘어갔고, ‘갈릴래아 사람들’을 ‘천대’했습니다.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이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느냐?”며 필립보의 전도를 비웃고 무시한 장면이 나옵니다(요한 1:45~46). 또 예수님을 변호하려는 ‘니고데모’에게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라고 핀잔을 줍니다(요한 7:52). 이렇게 예수님이 자라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갈릴래아’는 ‘수탈’과 ‘절망’, ‘멸시’와 ‘천대’, ‘약자’와 ‘소외’의 대명사였습니다. 달리 말해 가난하고 소박하며 죄의식을 느끼던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1독서에서 들었듯이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갈릴래아’가 귀하게 여김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는 ‘빛의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 아기’를 주실 터인데(이사 9:5), 그 아기는 어둠과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될 것입니다(이사 9:1). 특히 ‘평화의 왕’이라 불릴 그 아기는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고 국권을 강대하게 하며, 끝없는 평화를 이루고,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이사 9:5~6). 한마디로 가장 먼저 고난을 겪은 그 지역 주민들이 ‘평화의 왕’을 통해 사람대접 받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이사 9:2~4).

《마태오복음》 기자는 이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공생애 전까지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자라나시고 건축노동자로 살아가신 일은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큰 빛’을 비추신 일이라고 말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가파르나움에 가서 사신 일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메시아 사명의 성취’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갈릴래아 지역에 대한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반복해서 한 것일까요? 그것은 갈릴래아가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온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서 갈릴래아는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지역이 되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대 지역’을 ‘사명의 출발지’로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대’와 ‘억눌림’을 당하던 어둡고 캄캄한 땅 ‘갈릴래아’에서 자라나셨고, 거기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의 참 빛’이 ‘동방’에서 온 ‘구도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유다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해 ‘갈릴래아에서 솟아올랐음’을 의미합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갈릴래아 호수. 저 호숫가 어디쯤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중심의 종교적 순수성’과 ‘민족적 순수혈통’을 자랑하는 ‘유대 지역’이 아니라 ‘온 세상’을 상징하는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갈릴래아’에서 ‘하늘나라’(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십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에 ‘의롭다’고 자처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이 살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며 ‘구원의 빛’이 필요한 사람들이 살던 땅에서 하늘나라 운동을 시작하십니다. 고대로부터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유대 지역’이 아니라 ‘변방인 갈릴래아’에서 ‘하늘나라(하느님 나라) 전도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의 ‘첫 일성’(메시지)을 분명히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 마태 4:17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의 중심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성육신’하신 이유이자 ‘공생애 사역의 한 줄 요약’입니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자’는 초대입니다. 이제 이 메시지를 듣는 인류는 그들 가운데 오신 ‘하늘나라 초대’ 앞에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빛과 기쁨의 하늘나라를 세우는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장악한 캄캄한 ‘어둠의 나라’에 속해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조화’(造化)인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당신을 통해 ‘빛의 잔치인 하늘나라’(하느님의 통치)로 ‘변화’될 수 있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이 ‘하늘나라’는 ‘이미 여기’(우리 마음과 지혜의 눈을 뜨고 만나는 세상)에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론적인(세상 끝날에 완성되는) 면이 있습니다.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이 메시지를 듣고 ‘삶의 방향’(목적)을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아서서 그 주권적인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 것이 ‘회개’입니다.

‘빛의 잔치’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혈통’(특정 민족, 사람의 욕망, 아래로부터 남)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즈라의 후예라 자처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틀렸습니다. 오로지 ‘영적으로(하느님에게서, 물과 성령으로, 위에서부터) 다시 나야’ 합니다(요한 1:13; 3:1~8).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마음 안에 하늘나라를 세우라’는 초대에 응답해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육신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성실하게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나 ‘참 기쁨의 하늘나라’에 들어가 삽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빛’을 소유합니다. ‘죄의 어둠 속’에 앉아 있지 않고 ‘빛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지 않고 ‘자유인’으로서 ‘생명의 찬가’를 부릅니다. 오늘 《이사야》가 노래한 것처럼, ‘승리의 기쁨’을 누립니다. ‘빛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빛 속’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관점’을 선물 받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것과 비슷합니다(마태 3:2).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면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이 메시지가 성취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마을로 알려진 가파르나움의 베드로 집터 위에 세워진 기념 성당 제대입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방문했는데 미사 시간과 겹쳐 못 들어갈뻔 했는데 좀 기다렸다가 후다닥 들어가서 한 컷 건졌습니다.

마태오는 ‘그 성취의 과정’을 자신의 <복음서>에서 차례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마태오는 그 ‘성취의 첫 과정’으로 예수께서 당신과 함께 할 ‘첫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변방’인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온 세상’(마음의 왕국)을 ‘빛의 나라’(하늘나라)로 변화시킬 당신의 ‘첫 제자들’이 차례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서 받아주기를 간청하는 법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정반대입니다. ‘큰 빛’이신 주님이 ‘다가온 하늘나라 전도활동’을 위해 ‘어둠 속’에 있는 ‘어부들’,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살고 있는 ‘어부’들을 친히 찾아가십니다. 사실 ‘주도권’은 항상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다 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부르십니다. 어부들의 영혼이 갑자기 ‘확’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순 없을 것이지만 사람들을 낚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처음에 그들은 단지 빨라진 심장박동을 느낀 것이라 여겼습니다. 돌아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장이 하나가 아님을 비로소 느끼게 해준 순간이었습니다. 몸에 심장이 있듯이 ‘영혼’에도 심장이 있다는 말을 진실로 체험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영혼의 심장을 예로부터 사람들은 ‘사랑’, ‘희망’, ‘믿음’이라 불렀습니다. 코끝의 호흡에 의지한 사람에게는 ‘영혼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를 살아있게 합니다. 그 약속의 음성을 듣던 순간 이 모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기에 그들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 즉시 따라나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큰 빛’이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찾아오신 ‘하늘나라의 빛’이 강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가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 기념성당 내부모습입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이 ‘부조’ 작품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순례자들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한 컷 했는데 저보다 더 오래 기다렸다 집터 바닥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네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부르십니다. 어부들의 영혼이 갑자기 ‘확’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순 없을 것이지만 사람들을 낚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처음에 그들은 단지 빨라진 심장박동을 느낀 것이라 여겼습니다. 돌아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장이 하나가 아님을 비로소 느끼게 해준 순간이었습니다. 몸에 심장이 있듯이 ‘영혼’에도 심장이 있다는 말을 진실로 체험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영혼의 심장을 예로부터 사람들은 ‘사랑’, ‘희망’, ‘믿음’이라 불렀습니다. 코끝의 호흡에 의지한 사람에게는 ‘영혼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를 살아있게 합니다. 그 약속의 음성을 듣던 순간 이 모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기에 그들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 즉시 따라나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큰 빛’이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찾아오신 ‘하늘나라의 빛’이 강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구원의 빛으로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 정신은 앞으로 묵상하게 될 ‘산상수훈’에서 제시될 것입니다.

이처럼 신영복 선생님의 책 《변방을 찾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변방(邊方)이 열혈(熱血)의 중심’으로, ‘변방이 희망의 중심’으로, ‘변방이 새로운 창조의 중심’으로 바뀌는 놀라운 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야말로 진정으로 ‘영혼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열혈(熱血)의 중심’이고, ‘희망의 중심’이며, ‘새 창조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홀로 그 일을 이루시지 않고, 하늘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협력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변방의 어부’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이 ‘앞서가신 발자취를 뒤따라감’으로써 언젠가 그들은 ‘하늘나라 빛’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악을 물리치는 ‘빛의 사도’, 즉 ‘어둠의 바다’, ‘죽음의 바다’에 빠져 헤매는 사람들을 낚는(건져 올리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갈릴래아에 살던 ‘그 백성들’은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누구’를 상징할까요? ‘우리 자신’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우리는 ‘죄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고’, ‘죽음의 그늘 아래 머물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빛의 자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제로부터 ‘세례 초’를 건네받던 그 ‘세례성사’를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시오. 그대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라는 축복을 받은 우리입니다. 자신이 ‘어둠 속’에 앉아 있지 않고, ‘죽음의 그늘’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진정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스런 가족관계’를 방해하는 모든 일들을 말합니다. 그 일들을 자기 ‘밖’에서 아니라 ‘마음’에서 찾아보십시오.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나의 지성적인 면, 감성적인 면, 의지적인 면을 돌아보십시오. 자신을 세례성사한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면서도 ‘어둠 속’에 ‘여전히’ 앉아 있거나 ‘죽음의 그늘’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가는 이들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는 ‘잘난 척 자기를 높이고 자랑함’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에 다시 방치합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 ‘소유에 대한 탐욕’, ‘더 많은 소비 욕구에 끌려감’으로써 ‘죽음의 그늘’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갑니다. ‘나태한 생활습관과 태만한 태도’를 고집함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에 다시 방치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냄으로써 ‘죽음의 그늘’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갑니다. 타인의 행운을 ‘시기’하고 ‘미워함’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에 다시 방치합니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 ‘침묵’하거나 ‘거짓’을 말함으로써 ‘죽음의 그늘’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갑니다. 첫 제자들이 응답한 것처럼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향해 따라나서지 않고 ‘머뭇거림’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에 다시 방치합니다. ‘영원한 가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해야 하는 순간에 ‘이해득실을 따짐’으로써 ‘죽음의 그늘’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갑니다.

이렇게 여전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죽음의 그늘’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가는 우리의 마음마다 주님은 지금도 ‘사랑의 빛’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어 자신의 ‘불편한 진실들’을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불편한 진실들’을 비추어주심이 ‘책망’이나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임을 깨닫는 순간 마침내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 존재가 그 분의 ‘자비’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진정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늘보좌를 떠나 사람이 되신 아기 예수의 ‘겸손’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잘난 척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며’ 살아온 자신을 회개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비천한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의 ‘가난’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 ‘소유에 대한 탐욕’, ‘더 많은 소비 욕구’에 끌려 살아 온 삶을 회개합니다. 찾아오는 ‘병자들’을 마다하지 않고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신 예수님의 ‘부지런함’이 우리를 비출 때 ‘나태한 생활습관과 태만한 태도’를 회개합니다.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들에게 ‘헌신’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비출 때 ‘불평과 원망’, ‘시기와 미움’의 삶을 회개합니다. 무장을 갖추고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진실’이 우리를 비출 때 ‘침묵’하거나 ‘거짓’을 말하며 살아온 삶을 회개합니다. 모욕과 조롱, 채찍과 손찌검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끝까지 참고 견디신 그 ‘인내’가 우리를 비출 때 작은 ‘모욕’에도 ‘원한’을 품었던 삶을 회개합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골고타’(해골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항상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형리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용서’가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소설 《벤허》의 주인공처럼 마음에 품었던 ‘복수의 칼’을 버립니다. 그 ‘성실하심의 빛’, 그 ‘용서의 빛’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견디는 힘을, 원수를 사랑하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삶을 묵상하는 일이 때때로 관계에서 교만하고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중대한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를 비추시는 ‘사랑의 빛’ 덕택에 우리는 회개하며 다시금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묶임에서 자유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다가온 하늘나라’를 위해 변방에서 첫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어떻게 전도활동을 이어가십니까?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 마태 4:23

변방이 ‘열혈(熱血)의 중심’으로, ‘희망의 중심’으로, ‘새 창조의 중심’으로 바뀌는 예수님의 3대 사역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고’, ‘전도’하시며, ‘치유’하십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뜨거운 피’(熱血)를 간직하시고 몸소 제자들과 함께 온 갈릴래아를 두루 찾아다니십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시며 절망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십니다.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에게 ‘생명’과 ‘건강’과 ‘평화’를 주시는 ‘새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하늘나라를 세우시고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 속으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일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십니다. 특히 ‘치유’ 사역은 예수님의 메시지처럼 ‘하늘나라(하느님의 다스리심)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이 3대 사역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교회인 우리에게 이렇게 명백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마태 5:14,16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한 때 ‘어둠’에 속했고, ‘죽음의 나라’에 속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 필요한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기쁨의 하늘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럴만한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갈릴래아처럼 빛이 필요한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우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참 빛으로 따름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왔고 주님께 빛과 기쁨까지 선물 받았습니다.

오늘도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하늘나라에 들어가자고 초대하십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조롱과 멸시받는 ‘갈릴래아’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우리 내면에도 아직도 빛이 필요한 자기 패배적인 ‘갈릴래아’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이런 어둠과 죽음에 붙잡힌 세상, 자기 패배의 우울을 겪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해방하시고 하늘나라에 참여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이치를 참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참 평화의 ‘하늘나라’(하느님의 다스리심)를 살게 하십니다. 더욱이 아직도 어둠과 죽음에 붙잡혀 살아가는 이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하늘나라의 일을 함께 하자고 지금도 우리를 ‘일꾼’(제자)으로 부르십니다.

부디 우리는 ‘빛의 자녀’로 부름 받은 이 정체성을 명심합시다. ‘마음 안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기울입시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일’에 성실합시다. 사도 바울로의 당부처럼 ‘사랑의 십자가로 더욱 일치’합시다. 우리를 통해 빛과 기쁨의 하늘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