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2. 대림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대림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이제 대림초의 모든 불이 밝혀졌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아기예수의 성탄을 축하하고 다시 오실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우리들도 성인 요셉과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은총으로 마리아를 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이제 우리도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7:10-16
  • 시편 – 80:1-7,17-19
  • 2독서 – 로마 1:1-7
  • 복음서 – 마태 1:18-25

대림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학부 1학년 1학기 때 일입니다. 당시 신영복 선생님은 가석방 상태였습니다. ‘한국문화와 사상’이라는 강의로 우리를 처음 만나셨습니다. 강의 중에 들려주시던 ‘옥살이 일화’(逸話)들은 언제나 동기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습니다. 그 때 들은 인상 깊은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이 ‘에피소드’(逸話)가 《처음처럼: 신영복의 언약》이라는 책에 실린 것은 훨씬 훗날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최초의 ‘독자’(讀者)였던 셈입니다. 말씀 나눔을 준비하면서 이 ‘일화’가 실린 책의 꼭지를 찾아보았습니다. 별반 차이가 없어서 제 입맛 따라 ‘윤색’(潤色)하여 나눕니다.

제가 묵상집을 낼 때 선생님이 써 주신 《사도들의 편지》 제자(題字)입니다

선생님은 ‘옥살이’를 자신의 진짜 ‘인생대학’이었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큰 ‘대’(大), 옳을 ‘의’(義)자를 쓰는 ‘정대의’라는 젊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큰 도리(대의는 그 뜻입니다)를 위해 살라’고 지어 준 ‘이름’일 것이라 넘겨짚었습니다.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는 벌써 전과(前科) 3범 신세였습니다. ‘대의’라고 부를 때면 그 이름을 지어주셨을 그의 아버지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하셨습니다. 한번은 그로부터 ‘이름의 내력’(來歷)을 들었습니다.

그는 첫돌 전에 버려진 고아였습니다. 그가 발견된 곳은 광주(光州) 도청 근처 ‘대의동’(大義洞) 파출소 옆이었습니다. 아기를 보육원(고아원)에 맡기려면 ‘이름’이 있어야 했습니다. 우선 ‘이름’ 두 글자는 그가 발견된 동네인 ‘대의’에서 왔습니다. ‘성’(姓)은 마침 그날 당직을 섰던 ‘정순경’의 것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내력이었습니다. 그 일로 선생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름을 지은 방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대의’(大義)라는 ‘문자’를 통해 그의 인생을 읽으려 했던 선생님의 섣부른 ‘관념성’(사고의 틀, 인식체계)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선생님은 자신의 관념성을 근본부터 반성하였다고 회상하셨습니다.

제가 묵상집을 낼 때 선생님이 써주신 《하늘의 노래》 제자(題字)입니다

자신의 추상적 사고와 논리에 속아 넘어가는 빈약한 관념성이 어디 선생님에게만 일어난 일이었겠습니까? 그 ‘일화’를 들은 지 벌써 삼십 여년이 가까워지는데 그 동안의 공부를 통해 사유체계가 탄탄해졌다고 말씀드릴 자신은 없습니다. 이참에 선생님과 관련한 제 개인적인 ‘일화’ 한 토막을 더 나누겠습니다. 저는 신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처음 출발한 ‘서도반’(書道班) 동아리 창립 멤버이자 회장을 지냈습니다. ‘동아리 이름’을 지으면서 동기들끼리 ‘서예반’(書藝班)이라고 할지 ‘서도반’(書道班)이라고 할지를 두고 옥신각신 했습니다. ‘서도’(書道)라는 일본식 ‘이름’을 쓸 수 없다며 거창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동기도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우습게도 ‘서도반’이라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부지런히 ‘필법’(筆法)을 배우고 익혀가는 단계이지 ‘예술’ 하는 동아리는 아니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제가 ‘회장’을 지냈다고 ‘필법들’을 다 배우고 익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필법 연습은 안 하고 밖에서 다른 놀이에 더 바빴습니다. 필법으로 칭찬 받기는 선생님의 애제자이자 제 동기인 연수리교회 장종찬 요한 사제가 제일이었습니다. 아마 그 때 연습했던 선생님의 필법지를 제일 많이 갖고 있는 제자도 그와 저 일 겁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선생님께 필법들을 끝까지 다 배우고 익혀서 선생님의 ‘어깨동무체’(연대체)를 가장 가깝게 흉내 낼 수 있는 유일한 제자는 장신부님입니다. 우리 사목실에도 장신부님이 쓰신 ‘나무야 나무야’가 있지요.

그러면 저는 무엇을 잘 했냐고요? 저는 선생님이 학교에 정착시킨 ‘땅 탁구’의 ‘달인’이었습니다. 테니스처럼 땅바닥에서 하는 넓은 탁구 경기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땅 탁구’는 학교에서 제가 제일이었고 선생님도 저에게는 상대가 안 되셨습니다. 실제로 3학년 때 선생님의 글씨를 상품으로 내걸고 열린 ‘교내 땅탁구 복식대회’에서 우승한 사람도 접니다. 상품은 저와 짝을 이루었던 1년 후배에게 양보했지요. 대신 선생님께 다른 선물을 받았습니다. 자녀들이 태어나자 선생님이 차례로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웃을 일깨우고(鐘民), 이웃과 삶의 은총을 나누며(惠民)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요즘도 장신부님을 만나면 선생님 흉내를 내며 그 때의 추억에 잠기곤 합니다. 서예를 자신의 사회학과 인간학으로 삼고 사셨던 선생님입니다. 필법을 가르치시다가도 글씨를 잘 쓰려하기보다 먼저 바른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른 사람이 되는 일은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끌어안고 여럿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달성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언제든 찾아가 선생님 방의 문을 두드리면 ‘이름’을 부르며 환대해 주시고, 실수하더라도 빙그레 웃으시며 ‘괜찮아, 괜찮아’라고 다독여 주시던 그 손길이 그리운 요즘입니다.

자, 무슨 말씀 드리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이름’들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요? 눈치 채셨습니까? 지금 불리는 그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습니까? 그 이름이 마음에 드십니까? 자기 이름값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잉태할 때의 태몽은 무엇이었다고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가요? 이름이 그 태몽과 관련 있습니까?

오늘 배정된 전례독서들에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차례로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1독서 《이사야》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입니다(14절). 《시편》으로 노래한 <80편>은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 하리이다”입니다(18절). 2독서 《로마서》는 “그 이름을 위하여”입니다(5절). 그런 구절이 없다고 어리둥절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로 번역했습니다만 그리스어 원문에는 분명 ‘그 이름을 위하여’(on behalf of the name of Him)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인 《마태오복음》은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입니다(21절). 이렇게 전례독서들은 인류의 ‘구원’과 ‘자유’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태어날 ‘메시아이신 임마누엘’ 아기의 ‘이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존귀한 이름은 ‘예수’입니다.

드디어 대림초의 모든 불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두 걸음만 내딛으면 ‘성탄절’입니다. 전례독서들뿐 아니라 ‘본기도’도 예수 그리스도 탄생 예고와 탄생의 신비 직전의 이야기로 생생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2독서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전 과정’과 ‘목적’까지 들려줍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임을 상기시킵니다. 내 어머니의 ‘태몽’이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내 ‘이름’을 어떤 의도로 누가 지어주었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진실은 우리 모두가 ‘복음’을 전파하도록 ‘주님께 부름 받은’ 존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평화의 일꾼들”이라는 자각입니다.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1독서는 복음이야기와 상응하여 ‘임마누엘의 징조’를 예언하는 《이사야》가 배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본문을 ‘임마누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대표적인 <구약> 말씀 중 하나라고 해석합니다. 예언이 선포된 본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봅니다. 참고로 구약학계에서는 《이사야》를 제 1이사야(1~39장), 제 2이사야(40~55장), 제 3이사야(56~66장)로 구분합니다.

솔로몬 왕의 사후 통일왕조는 둘로 분열됩니다(기원전 931년).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입니다. ‘제 1이사야’ 예언자(기원전 742-701/700)는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오늘날의 이라크 북쪽에서 시작된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적극적으로 ‘서진’(西進)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정복한 지역마다 아시리아의 ‘국가 신’(神)을 최고로 섬기게 했고(고대에는 모든 전쟁이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적극적인(강제적인)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 훗날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향민들’로부터 멸시를 당한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 강제 이주민 정책의 희생자들입니다.

아시리아의 ‘서진’ 정책에 맞서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반(反) 아시리아 동맹’을 결성했습니다(2열왕 16:5). 이 때 ‘반(反) 아시리아 동맹’의 ‘맹주’(盟主)역할을 한 나라가 ‘시리아’와 ‘북 왕국 이스라엘’(사마리아, 에브라임 왕국)입니다. 그들은 ‘남왕국 유다’를 ‘반(反) 아시리아 동맹’에 가담시키려 했습니다(2열왕 16:5~9). 그 때 유다의 왕은 ‘아하즈’(야훼께서 붙잡으셨다는 뜻입니다)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12번째 왕이었으나 《역대기》는 남왕국 유다의 가장 악한 왕으로 그를 평가했습니다. 그는 ‘반(反) 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반 동맹’ 사실을 알리며 아시리아 쪽으로 붙었습니다. 이 일로 기원전 733년 ‘시리아’ 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습니다(이사 7:1). 이름 하여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입니다. 그들은 아하즈를 폐위시키고, 자기들이 믿을 만한 사람(타브엘의 아들)을 새 왕으로 세울 계획이었습니다(이사 7:5~6).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면초가’에 놓였습니다(2열왕 16:5).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은 공포에 사로잡혀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이사 7:2). 유다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바로 그 시기에 하느님께서 제 1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아하즈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진정하여라. 안심하여라. 겁내지 마라. … 정신을 잃지 마라. 그들은 연기 나는 두 횃불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 이사 7:4

하느님께서는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 왕의 ‘계략’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이사 7:7). “연기 나는 횃불 끄트머리”라는 은유가 재미있습니다. 다 터버리고 연기만 남은 상태인 횃불 끄트머리처럼 ‘두 왕들의 운명도 이미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이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그 운명도 더는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이사 7:9).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실 것이니 아하즈에게 ‘믿음’을 갖고 ‘순종’하라는 촉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말씀들(이사 7:4~9)은 아하즈에게 ‘잘못된 결정’(이것이 무엇인지는 아래에 나옵니다)을 내리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이 몸소 ‘돌보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하즈는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하느님이 몸소 행동하시도록 ‘의탁’해야 했습니다. 제 1이사야는 소용돌이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시온산)이 구원 받는 길은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데 있다’고 초지일관 선포했습니다(이사 28:16; 30:15; 31:4~5). 그는 사회적 약자들(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을 향한 의무인 ‘정의를 실천하라’고 유다 귀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마음이 떠난 그들의 ‘형식적 제사’를 책망했습니다(이사 1:10~17).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당시 사회상을 꾸짖었습니다(이사 3:13~15; 5:8~24; 10:1~2).

아하즈가 제 1이사야 예언자에게 귀 기울였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이미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계획은 외교적 수완, 즉 ‘외세’(外勢)와의 동맹입니다. 어떤 외세입니까? ‘아시리아’에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참이었습니다(2열왕 16:7~8; 이사 7:12).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아시리아의 패권’을 인정함으로써 살아남으려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시리아의 ‘국가 신’(神)을 의지할 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혐오하시는 ‘우상숭배’로 가는 길입니다. 사실 아하즈는 하느님이 끔찍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겨왔습니다(2열왕 16:2~4; 2역대 28:2~4). 친자식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 자신의 외교적 수완과 세상의 지혜만을 믿었습니다. 심지어 ‘성전’의 금은들(성물)을 갈취하여 ‘아시리아’에 ‘뇌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2열왕 16:8).

하느님은 그런 아하즈에게 ‘믿음의 순종’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이사야를 시켜 ‘기회’를 주십니다.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 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하여라. – 이사 7:11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미 주신 ‘구원의 약속’(이사 7:4~9절)을 그가 ‘믿을 수’ 있도록 ‘징조’들을 보여 달라고 하면 다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징조’를 보여주시겠다는 ‘제안’입니다. 아하즈가 그 제안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 이사 7:12

언뜻 듣기에 무척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핑계였습니다. 그는 ‘경건한척’ 하면서 하느님이 내미시는 손길을 뿌리칩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과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신실히 믿지도 않으면서 ‘겸손한척’ 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의 마음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는 이미 ‘아시리아’(아시리아의 국가 신)를 의지할 ‘계획’(뜻)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뜻)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아하즈의 삶의 태도는 여러 면에서 오늘 복음이야기의 ‘요셉’과 비교됩니다. 요셉은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 자신의 계획과 뜻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선택’했습니다. 이사야도 아하즈가 ‘다른 결심’(선택)을 하였다는 것을 꿰뚫어 봅니다. 더 이상 다윗 왕실에서는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합니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 이사 7:13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은 하느님이 늘 기준으로 삼으시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후대의 왕들은 몇 사람을 빼놓고는 하나같이 썩은 왕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낙망한 이사야의 ‘마음’을 ‘조율’해 주십니다. 그러자 예언자는 다시 ‘희망’의 마음을 되찾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사 7:14

이것이 하느님께서 유다를 구원하시겠다는 강력한 ‘징조’(희망의 빛)입니다. ‘처녀’로 번역한 히브리어 ‘알마’는 성적으로 성숙하여 결혼 적령기에 이른 ‘젊은 여성’을 말합니다. ‘임마누엘’(עִמָּנוּאֵל)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가련한 육체를 입고 우리들 사이에 스스로 내려오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처녀의 몸을 빌려 가장 작고 연약한 존재인 ‘아기’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몸소 보여주시는 ‘징조’에 담긴 의미입니다. 따라서 태어날 아기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처녀’가 누구인지, 이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사야》뿐 아니라 <구약성경> 어디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본문에 따르면 민족의 혼란기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느님의 약속처럼 유다의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이사 7:15). 처녀는 아들을 낳고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아기에게 지어 줄 것입니다. 그 아기가 아직 어릴 때 유다를 쳐들어 온 두 왕의 땅은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이사 7:16. 참고, 2열왕 16:9).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기념성당 내부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동굴 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굴 바닥에는 예수 탄생 지점을 표시하는 구멍이 있는 데 둘레에 14개의 꼭지점을 가진 은색의 별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별을 ‘베들레헴의 별’이라고도 합니다. 성지 순례 갔을 때 3시 전에 입당했기에 저기에 손을 대고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녀온 이야기도 한번 올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되어 온 구절 중 하나입니다. 특히 ‘임마누엘’이라는 ‘아기’를 두고서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아기가 ‘이사야의 아들’이나 아하즈의 아들인 ‘히즈키야’, 또는 그 당시의 ‘아기’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렇게 될 경우 이 예언은 먼 미래에 일어날 ‘메시아 예언’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그 당시의 시대상, 즉 ‘역사성’과 연결될 뿐입니다. 이런 해석이 문제가 있는 이유는 ‘이사야’에게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고, 그가 또 아기를 가지려면 ‘처녀장가’를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일부다처제’가 되기에 이사야의 아들은 전혀 개연성이 없습니다. 더욱이 ‘히즈키야’일 수도 없는 것이 ‘임마누엘’ 예언이 선포되던 기원전 733년 그는 이미 10대의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2역대 29:1).

그러나 신학자들의 이런 논란 이전에 그 예언을 해석한 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입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는 ‘임마누엘’ 징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으로 성취되었다고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이미 기록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임마누엘 징조’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예언이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이것이 가장 대중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이 해석도 제 1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에 대해서는 잘 설명되나 이어지는 두 구절(15, 16절)의 ‘역사성’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임마누엘 징조’를 ‘이중적인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즉 ‘예언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결합시키는 관점입니다. 우선 ‘처녀’(동정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마태 1:22~23; 루가 1:27,34~35). 하지만 그 당시의 ‘어떤 인물’과도 분명 연관되어 아하즈에게 징조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결국 ‘임마누엘 징조’는 남왕국 유다가 두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약속입니다. 동시에 장차 ‘동정녀’(처녀)에게서 나실 메시아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렇게 제 1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 징조’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예언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이중적 관점이 건강한 신학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신 하느님께 불순종한 유다의 최후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하즈는 자기 고집(뜻, 계획)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국난을 피했습니다. 아하즈가 바라던 대로 ‘시리아’(아람 왕국)와 ‘북 왕국 이스라엘’(에브라임 왕국) 동맹군은 예루살렘에서 물러갔습니다(2열왕 16:9). 그 대신 아시리아에 막대한 조공(朝貢)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조건으로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막대한 경제적 출혈을 감수해야 했습니다(2열왕 16:7~8). 더욱이 유다 지역에 아시리아의 국가종교, 즉 우상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2열왕 16:10~18).

지금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경배하고 있겠지요. 물론 지금의 성당은 비잔틴 시대 이후의 건물이지만 상술이라고 말하기 전에 꼭 한번 성지를 다녀오시기를 권합니다.

놀랍게도 그 시기 제 1이사야 예언자는 이 모든 일을 예견했습니다. 아하즈의 요청으로 아시리아가 후원국을 자처하며 북왕국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출병했을 때(2열왕 15:29), 그것은 유다를 도와주러 오는 것이 아님을 꿰뚫어보았습니다. 나중에 제 1이사야는 하느님이 아시리아를 채찍으로 사용하시어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셨다는 ‘통찰’(洞察)을 전했습니다. 아시리아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쓰신 ‘심판의 도구’라는 통찰입니다(이사 10:5~6). 제 1이사야는 ‘벌거벗은 차림’으로 다니면서 하느님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으면 유다도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망하고, 그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 예고했습니다(이사 20:1~6). 그 예언대로 불과 130여년 만에 유다는 ‘바빌론 제국’에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를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 ‘아하즈’ 같은 불순종의 모습은 없는지 성찰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아시리아)과 짝하고, 세상(아시리아)을 의지하려는 태도는 없습니까? 순전한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말로만 그런 척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례를 통해 이미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자기 계획대로만,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모습은 없습니까? 대림 4주일, 아하즈 같은 우리 안의 불순종의 태도들이 돌이켜져서 온전한 ‘임마누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은 주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도하는 <80>에서 발췌했습니다.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 부르며 확고한 믿음을 고백합니다(1절, 참고, 창세 49:24; 시편 23:1; 이사 40:11; 에제 34:17). ‘요셉 가문’,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나쎄 가문’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북쪽 지역의 주요 세 지파를 언급하면서 “힘을 떨치고 오시어 우리를 도와주소서”(2절)라고 ‘목자’이신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이 구절 때문에 학자들은 본 시편이 기원전 722년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 시기는 1독서 《이사야》에서 언급한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사면초가에 놓인 때입니다. 따라서 멸망 직전에 놓인 북왕국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남왕국 유다의 백성들이 같은 민족으로서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한 ‘운명공동체’라는 ‘민족의식’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원수로 살던 ‘아하즈’ 왕 시절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예배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이런 공동체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가 ‘민족’입니다. 제발 오늘 성찬례에 참여하여 기도하는 성공회 신자들은 이런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아론의 축복문’(민수 6:24~26)처럼 반복되는 후렴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주시면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3,7,19절) 이 후렴구를 통해 공동체 예배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얼굴’은 당연히 하느님의 기쁨, 호의, 특히 환심(歡心)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이 손수 빚으신 작품이라는 믿음 위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간청합니다. 하느님이 노여움을 푸시고 당신의 소유인 민족에게 기쁨과 호의와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관성은 “우리를 살려주소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 하리이다.”에 있습니다.

2독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사명을 띤 사도로 증언하는 바울로의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편지 첫머리에 자신에 대해 잘 소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로부터 사도직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지, 그가 쓰고 있는 편지의 권위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요약합니다. 그에게 사도직을 주신 분은 로마에 있는 교우들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히 바울로는 <히브리 성서=구약>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다는 초대교회의 해석과 믿음을 인용하여 ‘복음의 핵심’을 진술합니다. 특히 이 부분(2~4절)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전 과정과 목적까지 들려줍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참 인간, 참 하느님이신 분으로 공통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교우들도 널리 퍼져 있던 이 공통된 신앙고백을 즉시 인정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로는 자신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로마의 교우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포합니다(6절). 이 축복의 선포를 들은 로마의 교우들도 어서 속히 사도 바울로를 만나길 원했을 것입니다(7절).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관성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5절)에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그 이름을 위하여”(on behalf of the name of Him)입니다.

이제 복음서를 다룰 차례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전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탄생 경위(기원, 시작)을 전하는 두 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오복음》이고(마태 1:18~25), 다른 하나는 《루가복음》입니다(루가 1:26~39). 물론 두 <복음서>가 묘사하는 ‘탄생 경위’는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세세히 살피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마태오복음》 기자의 관점만을 언급할 터인데 《루가복음》 기자의 관점은 이것을 참고하여 스스로 터득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오복음》 기자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경위’는 남성인 요셉이 ‘주도적’(높이 드러남)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대식’입니다. 하향식인 히브리 ‘족보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특히 ‘족보이야기’는 예수님의 ‘다윗 자손 신앙’에 근거합니다. 잉태 소식도 ‘생시’(生時)가 아니라 ‘꿈’에서입니다. 요셉은 꿈에 ‘현몽’(現夢)한 주의 천사로부터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여기에 《마태오복음》 기자는 예수의 탄생이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임을 증언하기 위하여 《이사야》 예언(이사 7:14)을 삽입 합니다.

한편 오늘 2독서 《로마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두 <복음서> 기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께서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예수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보다는 그 탄생의 목적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주목한 사도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신앙이 1세기 중반 훨씬 이후에 발전되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야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존재하는 이런 명백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수 탄생 경위’에 담긴 본질적인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두 <복음서>가 전하듯이 하느님께서 이 아기의 탄생에 아주 깊이 관여하셨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과 <서신들>이 증언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겠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서기 80년 경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세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셈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를 장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회당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적대감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유대인 회당이 존재하는 전 지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 기자는 1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불명예스런 소문’에 대항해야 할 2차적인 책무가 있었습니다. 그 소문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는 아버지를 알 수 없는 ‘혼외 자식’이라는 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 군인에게 강간당해 낳은 자식이라는 소문일지도 모릅니다. 《마태오복음》 공동체는 이 ‘불명예스런 소문’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마태오는 이 2차적 책무를 어떻게 실행해 냅니까? 그는 《루가복음》 기자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으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신분을 묘사합니다. 그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꿈’입니다(20절). 어떻게 ‘꿈’이 불명예스런 소문을 차단하고 예수님의 신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한 사이입니다. 당시 약혼한 신랑 신부는 동거하지 않고 일종의 ‘준비기간’을 갖습니다. 그 준비기간 동안 신랑은 신부 가족에게 지불할 ‘지참금’을 마련합니다. 신부는 결혼생활에 필요한 신부수업을 합니다. 물론 ‘지참금’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준비기간이 짧아질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위기상황입니다. 성탄 이야기를 하면서 《루가복음》은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안 요셉의 태도에 대해 침묵합니다. 하지만 《마태오복음》은 요셉의 속마음까지 생생하게 묘사해 줍니다. 그 만큼 《루가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보다 《마태오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불명예스런 소문’이 더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일처리를 하려고 했습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마태오복음》은 요셉을 어떤 사람으로 묘사합니까?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 묘사합니다. 이것은 ‘의’를 중요시하는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대단한 ‘찬사’입니다(마태 3:15, 5:6, 6:33, 10:41, 21:32, 25:37~40). 또 그는 약혼 관계에 있는 마리아를 간음죄로 고발하는 대신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작정했습니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피해 속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분명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정작 그는 ‘법대로’하지 않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마리아를 임신시킨 아이의 아버지처럼 마리아도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법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어째서 《마태오복음》 기자는 요셉에게 그런 찬사를 붙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요셉이 율법마저도 넘어선 ‘자비’를 실천하려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마태 9:13; 12:7). 더욱이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마리아의 잉태에 대한 ‘불명예스런 소문’에 대항할 수 있는 ‘확고한 근거’를 확보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 확고한 근거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꿈’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요셉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엔씨메오마이’(ἐνθυμέομαι)는 ‘반성하다’, ‘숙고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정말이지 그는 의심하며 숙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잠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하느님이 ‘개입’하십니다. 사실 《성경》에서 ‘꿈’은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주의 천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격려합니다. 한 마디로 하면 “마리아를 포함하여 아기를 너에게 의탁하니 잘 부탁한다”입니다. 정말이지 ‘꿈’은 요셉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반하여 자신의 뜻과 계획을 수행하는 것을 막는 하느님의 거룩한 개입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요셉의 계획(뜻)은 실패합니다. 분명 요셉은 마리아가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개입하시는 수단인 꿈에서 ‘진실’이 밝혀집니다. 이것이 그 ‘불명예스런 소문’에 대항하는 ‘확고한 근거’입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짓도록 친히 ‘작명’까지 해 주십니다(21절). 그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표현으로 ‘야훼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영원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기적인 나’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 옛날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선조들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새 계약의 여호수아’는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사탄으로부터, 이기적인 나로부터 구원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더구나 《마태오복음》 이야기 뒤에는 ‘칠십인 역 성경’으로 번역된 제 1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예언 말씀이 뒷받침 되고 있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마태 1:23

‘예수’라는 이름 외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추가됩니다. ‘예수’가 개인적인 이름이라면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아기의 통치자로서의 직함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오복음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약속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꿈에 일어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습니다.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요셉은 아기를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기꺼이 떠맡습니다. 이렇게 《마태오복음》 기자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다윗의 자손’인 요셉에게(20절) 예수께서 양자로 받아들여졌으며, 결과적으로 ‘다윗의 후손’의 족보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태오복음》 임마누엘 성탄이야기의 이면에 있는 진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맡기고 의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아하즈는 하느님께 불순종하며 고집스럽게 자기 계획대로,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태도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그런 태도 때문에 민족 전체가 비극에 처해집니다. 우리에게 아하즈 같은 그런 불순종의 마음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며 요셉 같은 순종의 마음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한 운명공동체라는 민족의식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남왕국 유대백성들처럼 북녘 동포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아하즈의 태도에 낙망한 이사야의 마음을 하느님은 조율하시고 다시 ‘희망의 빛’을 향해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수십 년 동안 분단체제 극복과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힘써 온 많은 이들이 최근의 국제정세로 낙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국민들의 마음도 하느님이 조율해 주시고 희망의 빛을 향해 다시 일어서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희망의 빛을 향해 일어선 이사야는 ‘메시아이신 임마누엘’ 아기를 예언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예언한 그 분은 ‘인간’의 본성을 가지셨으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속성을 가지신 분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독서와 복음이야기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전해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인류의 ‘구원’과 ‘자유’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태어날 ‘메시아이신 임마누엘’ 아기의 ‘이름’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 묵상을 해 왔습니다.

특히 복음이야기의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맡기고 의지하셨던 분들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우리의 신앙관에 도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목자’라고 고백하며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의탁’(依託)한다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우리의 전통적인 신앙에 도전이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고백하며 가장 연약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완전히 ‘의탁’(依託)하실 참입니다. 가장 연약한 아기가 되어 요셉(마리아)의 믿음에, 희망에, 사랑에, 순종에 자신을 의지하실 참입니다. 먹을 것을, 입을 것을, 잠잘 곳을, 양육을, 교육을, 신앙을, 희망을, 사랑을, 관계를 말입니다.

언뜻 듣기에도 그 ‘의탁’(依託)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 뜻, 자기 계획을 내려놓고 가장 연약한 존재로 오시는 하느님(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계획)을 온 몸으로 받아 안는 ‘선택’(순종)을 했기에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물론 그 선택(순종)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선택(순종)은 하느님을 향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선택(순종)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선택(순종) 덕택에 온 인류는 ‘구원’과 ‘자유’와 ‘평화’의 임마누엘을, 우주의 왕이신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줍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과 하느님 없이 혼자 살아가는 인생은 삶의 선택과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대림 4주일이며, 성탄절을 두 걸음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림절기 동안 마리아와 요셉처럼, 하느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맡기고 의지할만한 그런 마음의 집을 잘 지으며 살아 왔습니까? 주님이 자신의 존재를 맡기고 의지할만한 그런 마리아와 요셉으로 변화되어 오셨습니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맡기고 의지해 오셨습니다. 언제요? 주님이 언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맡기셨고, 의지해 오셨는지 모르시겠다면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보십시오(마태 25:34~40).

예수 탄생 기념 성당으로 들어가는 ‘겸손의 문’, 높이가 1.2m 정도여서 성인들은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들을 주님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아드리는 중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안아줄 때 우리는 주님을 안아드리는 중입니다. 특히 ‘아기예수’라는 말에 담긴 상징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물론 그런 일을 기꺼이 감당하다보면 마리아나 요셉의 경우처럼 고난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분명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의탁’(依託)해 오시는 주님을 업고 가는 영광의 때이기도 합니다. 부디 이 신비를 성령 안에서 깨우치시어 ‘임마누엘’을 온전히 성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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