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4. 사순 24일(화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47:1-9, 12
  • 성시 – 시편 46:1-8
  • 복음서 – 요한 5:1-3, 5-16

사순 24입니다. <전례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전합니다. 오늘도 어제 복음이야기처럼 소망 없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새로워진 이야기입니다.

1독서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 중 예언자 에제키엘은 환상을 봅니다(에제 40:1). 그는 환상 중에 하느님의 권능(천사)에 이끌려 이스라엘 땅으로 갑니다. 오늘 본문도 그 연속입니다.

아시다시피 ‘물’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는 ‘성전’에 있는 자신을 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흘러나온 그 ‘물’은 동쪽으로 흐르면서 ‘강’을 이룹니다. 오늘 《시편》에서 노래하듯이 강물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즐겁게 합니다(시편 43:4). 그 강물은 흐르고 흘러서 죽음의 물이라 불리는 ‘사해’까지도 ‘생명의 물’로 바꿉니다(에제 47:8). 그 ‘강’이 흘러들어가는 곳 어디나 ‘생명’이 넘칩니다(에제 47:9). 종국에는 기적적으로 ‘낙원상태’를 회복합니다(에제 47:12; 묵시 22:2). 이렇게 예언자 에제키엘은 오직 하느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로 절망하는 동족들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낙원’의 모습을 ‘희망’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찬미했듯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높으신 일을 이루셨습니다(시편 46:8).

그리스도교는 ‘죽음’에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느님이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었고, 죽음의 고통으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할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를 통해 온 세상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할 사명자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께서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표징’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살린 이 일로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를 치유하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절로는 여름에 해당하는 ‘오순절’(어느 명절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12개의 ‘성문’이 있었습니다. ‘양의 문’은 예루살렘 북쪽 성벽의 동쪽 끝에 있었고, 제물로 쓰일 희생양들이 다니는 ‘문’이 있었습니다(느헤 3:1; 2:39). 원문에는 ‘문’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양의’라는 단어만 있는데 ‘문’이라는 말을 보충해서 읽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 근처에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꽤 넓었습니다. 가로 100m, 세로 60m 길이의 직사각형 형태로 ‘다섯 개의 행각’(기둥)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행각’(기둥)은 벽은 없고 지붕만 있는 ‘정자’(亭子) 같은 형태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스토아’라고 하는 데 스토아 철학이란 명칭도 여기서 생겨났고, 길거리의 임시 매점을 뜻하는 ‘스토아’(store)도 여기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네 개의 ‘행각’(기둥)은 연못을 둘러싸고 있었고, 중앙에 연못을 둘로 가르는 ‘행각’(기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연못에 세워진 다섯 개의 행각이 ‘모세오경’을 상징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서울대성당 안의 12개의 기둥이 12사도를 상징한다고 의미주기 하듯이 말입니다.

1독서 《에제키엘》에서 들었듯이. 팔레스타인은 ‘물’이 귀한 땅입니다. 본래 이 연못은 빗물을 모아놓는 용도이지만 바닥에 두 개의 샘이 있어서 샘물이 솟아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히브리 말’(당시 일상어인 아람어)로 ‘베짜타’입니다. ‘베짜타’는 ‘두 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사본마다 이 연못의 이름이 다릅니다. 개역성경에는 ‘베데스다’라고 했는데 그 때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행각에 병자들이 소란스러운 모습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전해줍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 요한 5:4

사본에 따라 이 구절이 없기도 합니다. 공동번역에는 괄호로 처리했습니다. 연못은 일종의 ‘간헐천’인 셈입니다. 이 ‘민간전설’을 믿고 행각 주변에 ‘병자들’,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물’이 출렁이는 그 결정적인 순간만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유대인들의 상태’를,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입니다(요한 1:10).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바로 행하지 못하는 ‘다리 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반응하지 않는 ‘마비된 사람’(중풍병자)입니다. 인류도 인생길의 참 진리를 보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맵니다. 삶의 조화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돈, 이념, 권력, 명예, 성공) 치우쳐 살아갑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선’과 ‘정의’와 ‘진실’보다 ‘악’과 ‘불의’와 ‘거짓’을 더 좋아합니다.

그들 중에 ‘삼십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습니다. 그가 거기 와 있은 지 ‘삼십팔 년’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절망적인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는 거의 한평생을 병에 시달려온 사람입니다.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상징합니다. 인류도 그처럼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자신들을 모든 묶임과 구속과 무기력으로부터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실 ‘구세주’를 갈망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하느님께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곳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거기서 특별히 삼십팔 년이나 앓고 있던 병자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셨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요한 5:6

‘온전케 되기를 원하느냐?’는 뜻입니다. 은총으로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를 듣던 그의 처지를 묵상해 보면 정말 비극 그 자체입니다. 민간전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병자들 사이에서 ‘저 사람이 나보다 오래 여기 있었으니 양보해야지…’ 이럴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는 “선생님, 이젠 다 글렀습니다. 저는 그냥 이대로 지내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요한 5:7

모두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누가 자신을 배려해주겠느냐는 어조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그의 손을 붙잡습니다. 이미 치유가 되었다는 투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 요한 5:8

오랫동안 앓아 온 그였습니다.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그의 몫입니다. 다시 말해 그 말씀대로 ‘일어나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선택은 그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순간 그는 일어났습니다. 어느 새 병이 나았습니다. 요를 걷어들고 걸었습니다. 분명 그는 예수께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향한 어떤 ‘믿음’도 볼 수 없습니다. 아니 예수께서 그에게 어떤 믿음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를 살리는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그 길로 그는 예수께 감사하다는 말씀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어쩜 그리 배은망덕한지 모릅니다. 최소한 예수께 감사의 인사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유대인들의 상태를,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류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시고 철따라 우로를 내려 먹여주시는 데도 감사하지 않는 인류 말입니다. ‘요’를 들고 가는 그에게 ‘유다인들’(아마도 바리사이파나 종교당국자들)이 나무랐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까 요를 들고 가서는 안 된다. – 요한 5:10

십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고 명령합니다(출애 20:8-11).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 중 짐을 옮기는 일은 금지입니다(느헤 13:19; 예레 17:21). 그러니까 ‘요’는 짐에 해당합니다. 유다인들은 그의 사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책임을 전가하는 말을 합니다.

나를 고쳐주신 분이 나더러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 요한 5:11

유다인들은 “너더러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따집니다(12절). 다시 말해 “누가 십계명을 어기게 만들었느냐?”는 뜻입니다. 그들은 “누가 병을 낫게 해주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일어난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율법을 어긴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태도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율법준수’보다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은 그 사람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자리를 뜨셨고, 그 곳에는 많은 사람이 붐볐기 때문입니다(13절).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얼마 뒤에 성전에서 일어납니다.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성전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달려와 손을 잡습니다. 그를 알아 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 – 요한 5:14

고대 유대인들은 ‘질병’(고난, 역경)을 ‘죄의 결과’라는 ‘인과적 관점’을 갖고 바라보았습니다(출애 20:5; 34:7; 민수 14:18; 에제 18:20).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그런 암시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질병이 그런 것은 아니니 우리 주변에 있는 병자들을 대할 때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이러한 관점으로 성찰할 필요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더욱 흉한 일’을 겪을 수 있으니 죄를 짓지 말라고 충고하십니다. 우리도 반복적으로 짓는 죄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인들에게 가서 자기 병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일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병 나은 그 사람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난처해 지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그 유명한 ‘안식일 논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요한 5:17-18). 오늘 본문은 거기까지 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시편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크고 높으신 일을 행하셨다고 찬미합니다(시편 46:8). 우리 영혼이 예수님 덕택에 꽃처럼 피어났고 열매를 맺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참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 됩니다. 죽음의 고통으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할 사명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읍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흘러가도록 손에 손을 잡고 살아가는 ‘강물’이 될 것을 다짐하며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우리 안에 흐르는 생명의 강물 같은 기쁨을 이웃과 나누겠습니다. 아멘.

트랙백 & 핑백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