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7. 사순 27일(금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지혜 2:1, 12-22
  • 성시 – 시편 34:15-22
  • 복음서 – 요한 7:1-2, 10, 25-30

사순 27일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초막절’ 축제 기간에 있었던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 두려움을 느끼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물러나셨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는 ‘악마의 도구’입니다. 그럴 때 가져야 될 자세가 무엇인지 말씀 나눔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순 24일(관련설교는 여기를 보십시오) 이래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표징 이후의 ‘안식일 논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표징’이란 예수께서 ‘삼십팔 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입니다. 치유는 기쁜 일이지만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게다가 그 일을 행하신 분이 유다인들(종교당국자들)이 시기하던 ‘예수’라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들과의 논쟁에서(관련설교는 여기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은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똑똑히 증언하십니다(요한 5:19-47). 그러자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법’을 어기셨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감히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 ‘신성모독자’라며 죽이려 들었습니다(요한 5:18).

그 논쟁 이후로 예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찾아다니셨습니다. 1독서 《지혜서》에서 들은 것처럼(지혜 2:17-20), 유다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방으로는 다니고 싶지 않아서’라는 설명은 무슨 뜻일까요? 그 횡간의 뜻은 예수님도 ‘죽음이 두려웠다’는 뜻 아닐까요?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요.

갈릴래아 지방으로 물러나신 예수께서는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내면에 일어난 자신의 두려움에 정직하게 직면하셨을 것입니다. 복음이야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지만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신 분이기에 인간적 상상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두려움’에 직면하고, ‘해소’하신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오늘 《시편》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바치시면서 하느님께 탄원하셨을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는 그 ‘두려움의 정체’를 확인하십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거짓된 감정’입니다. 사실 ‘사랑’ 이외의 그 어떤 감정도 악마가 사용하는 내면의 속임수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 1요한 4:18

‘참 사랑’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인처럼(시편 34:15,17-20,22) 기도 속에서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신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사명’을 위해 일어서십니다. 내면에 일어난 그 ‘두려움’이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을 악마의 도구인 ‘두려움’이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일어서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찾아다니시며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십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신지 4개월여가 지났습니다. 어느 덧 계절이 건기에서 우기로 들어가는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유다인들은 1년에 10번 정도 명절 축제를 지켰습니다. 대표적인 명절 축제가 ‘넷’이 있는데 《요한복음》에 다 나옵니다. ‘봄’에 지키는 ‘과월절’(요한 2:13), ‘여름’에 지키는 ‘오순절’(요한 5:1), ‘가을’에 지키는 ‘초막절’(요한 7:1,10,14), ‘겨울’에 지키는 ‘봉헌절’(요한 10:22) 축제입니다. 특히 ‘과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은 유다인이 조상대대로 지켜 온 성대한 축제였습니다.

‘초막절’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빛’은 결코 가려지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호시탐탐 예수님을 처단할 기회를 엿보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찾아다녔습니다(요한 7:11). 예수께서는 축제 기간 중간쯤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요한 7:14). 마치 ‘죽음의 두려움’은 이제 당신을 막아설 수 없다는 듯이, 아니 그 어떤 음모나 위협도 상관없다는 듯이 예수께서는 정말 담대하게, 열정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완전한 사랑’ 속에 살아가는 분의 모습입니다. 군중 속에 끼여 그 가르침을 듣던 유다인들(종교당국자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듯 아는 것이 많을까? – 요한 7:15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천명하십니다(요한 7:16). 그러면서 어찌하여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그들에게 되묻습니다(요한 7:19) 그 이야기를 듣던 ‘군중들’은 ‘신경이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며 ‘누가 예수님을 죽이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군중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습니다(요한 7:12). 예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에 사람 하나를 온전히 고쳐 주신 일로 그런 ‘죽음의 위협’이 ‘당국자들’(유다인 종교지도자)로부터 진행되고 있다고 ‘폭로’하십니다(요한 7:23).

오늘 복음이야기는 이런 배경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의 ‘폭로’를 들은 군중들 사이에서 ‘분열’이 더욱 가속화합니다. 특히 그 자리에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의 폭로가 사실임을 증언합니다(요한 7:25). 초막절을 지키러 온 다른 지역 출신의 유다인들은 몰랐지만 유다에 살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잡아가지 않는지 의아해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렇게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데도 말 한 마디 못하는 것을 보면 혹시 우리 지도자들이 그를 정말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아닐까? – 요한 7:26

그러더니 군중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출신’을 두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각자의 전통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전통과 다르다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그룹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몰라야 한다.”(요한 7:27)는 ‘그리스도 상’(像)을 전통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그리스도’는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성전에 나타날 것이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말라 3:1; 참고 다니 7:13-14). 예수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다고 그들은 여겼습니다. 예수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 6:42).

반면에 어떤 그룹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요한 7:47; 이사 9:6-7; 미가 5:2)이라는 ‘그리스도 상’(像)을 전통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전통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들이 아는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알기로 예수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요한 6:42).

그런데 그들의 말은 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에(요한 6:38,41,42,50-51,58) 그들은 예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독생자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요한 3:16) 요셉이 아니라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20; 루가 1:28,35,37). 또한 예수께서는 ‘나자렛’에서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자라나신 분이지만(마태 2:19-23; 루가 2:39), 그 출생은 유다 ‘베들레헴’이고,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1-18; 루가 2:1-20).

그들은 자기 전통이 전해준 ‘피상적인’(겉모양, 육적인) ‘그리스도 상’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요한 7:24). 그 피상적 이해는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정녕 따로 계신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다. – 요한 7:28-29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가르침을 듣던 군중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두고 소란이 크게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참된 진리’를 선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 모든 전통들을 ‘한 줄’로 요약 정리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기원과 활동이 하느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단지 ‘겉모양’, 즉 육적인 모습뿐이었습니다(요한 7:24). 예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원이 하느님이시고, 그 활동의 기원 역시 하느님임을 명백히 선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결국 그 한 줄 요약이 유다인들의 ‘연약한 본성’ 속에 있던 ‘공격성’을 또다시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을 운운하며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군중들 속에는 예수님에 대해 ‘좋은 분’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 7:12).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하느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시간표’를 읽는 눈이 있으셨습니다. ‘기도’ 속에서 사랑의 하느님과 소통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의 힘’으로 ‘십자가 수난’이라는 ‘당신의 때’가 이르기까지 ‘사명의 고삐’를 결코 느슨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복음이야기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움’에 직면하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두려움은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을 막아서는 ‘악마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를 정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 속에서 두려움에 담대히 맞서야 합니다. 그 두려움은 자기 밖에서 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두려움은 내부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균열’이 갈 때, 하느님이 주신 ‘사명의 빛’이 ‘희미’해 질 때 그 두려움은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음을 ‘기도’로 확인하신 예수께서는 자신 안에 있는 ‘사명의 빛’이 두려움 때문에 희미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그 ‘사명의 빛’은 조금도 감해지지 않았기에 담대히 진실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죽음의 두려움에 굴복당하셨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를 위한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하느님을 신뢰하고, 기도 속에서 자기 두려움에 용기 있게 직면할 때 사명을 완수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공동체를 위한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기도의 힘’을 통해 우리는 인간적인 음모가 아무리 치밀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시간표’를 넘어설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시편》 시인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인생의 ‘사명’을 발견했습니까? 나는 무엇에서 ‘두려움’을 느낍니까?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합니까? 주님께 간청하십시오. 그 두려움에 직면할 용기와 그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분명코 ‘자기 사명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트랙백 & 핑백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