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9. 연중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영원한 친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어린양, 그리스도) 착한 행실로 증언하시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통해 하느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인간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친교’를 맺도록 초대해 주셨습니다. 이 은총을 받은 우리도 ‘착한 행실’로 세상에 화해와 평화와 친교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시는 말씀과 성사로 우리를 구원하시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알고 경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9:1-7
  • 시편 – 40:1-11
  • 2독서 – 1고린 1:1-9
  • 복음서 – 요한 1:29-42

연중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영원한 친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어린양, 그리스도) 착한 행실로 증언하시오.’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교회력’으로 ‘연중시기’(年中時期)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인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까지 ‘연중시기’로 지키게 됩니다. 하지만 ‘연중시기’는 ‘특별 절기’(節氣)가 아닌 ‘일반 시기’라는 다소 ‘밋밋한’ 용어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러 모인 매주일 성찬례의 ‘기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용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현행대로 ‘공현 후 연중시기’라 부르기보다는 1965년 『공도문』처럼 ‘공현절기’라는 용어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사순절기를 앞두고 지내는 ‘연중시기’의 옛 이름도 ‘공현절기’였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공현 후 연중시기’에 배정된 ‘전례독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공회도 세계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개정 공동전례독서’(RCL)를 주일 성찬례에서 사용합니다. 교회력으로 ‘가’해인 올해는 《마태오복음》이 연중시기 <복음서>로 배정됩니다. <전례독서> 배정표에 따르면 연중 1주일인 ‘주의 세례주일’부터 사순절 시작 전 주일(보통 ‘연중 7주일’에서 ‘9주일’까지 있습니다. 이 주일은 ‘주의 변모주일’로도 지킬 수 있습니다)까지 《마태오복음》은 ‘빛(신성)의 드러남’이라는 ‘공현대축일의 주제’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성육신 하신 하느님, 메시아”시라는 ‘신성’을 증언하는 이야기들의 연속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내리신 진리의 큰 빛이 그 가르침을 만방에 힘차게 드러내시자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된다.”는 주제의 연속입니다.

특히 연중 5,6,7주일은 ‘산상수훈’의 연속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이들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어둠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빛의 전사’임을 증명합니다. 빛이신 주님의 초대에 신앙으로 응답하고 눈을 뜬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빛의 전사인지는 말의 고백이 아니라 그 완전한 행실을 통해 드러납니다(마태 5:48). 그 행실을 보면 그가 반석 위에 지은 집인지 아니면 기초도 없이 지은 집인지 알 수 있습니다(참고, 마태 7:24~27). 1독서와 시편도 ‘공현’(公顯, Epiphany, 나타나다, 드러나다) 주제를 드러내는 <복음서>와의 조화를 이루도록 배정됩니다.

이런 이유로 ‘공현일’ 이후에 맞이하는 주일을 현재처럼 ‘연중(年中)주일’로 부르기보다 ‘공현(公顯) 후(後) 주일’로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저는 주장해 왔습니다. 즉 ‘연중시기’(年中時期)에 속하는 ‘밋밋한’ 주일이 아니라 주제가 선명한 ‘공현절기’(公顯, Epiphany)에 속하는 주일로 지키자는 주장입니다. 다만 <전례독서> 배정표에서 서신인 2독서는 <복음서>와 무관하게 해당되는 책의 처음부터(복음서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도록 배정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준(准)계속 병행’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연중시기(공현절기) 동안 설교자는 서신인 2독서를 ‘공현’(公顯, Epiphany) 주제에 무리하게 결부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교우들이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준(准)계속 병행’을 제외하면 연중시기(공현 후 주일들, 즉 공현절기) <전례독서>는 모두 ‘공현’에 어울립니다. 차례로 오늘 <전례독서>를 보겠습니다.

1독서는 ‘야훼의 종의 두 번째 노래’인 《이사야》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1-39장, 40-55장, 56-66장).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배정한 1독서는 <제 2이사야>에 속합니다. 시대 배경은 유다 백성의 바빌론 귀양살이가 끝나갈 무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배반한 죄로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두 세대 이상을 바빌론에서 귀양살이 중입니다. 오랜 유배생활에 지쳐 더 이상 구원도, 하느님도 희망할 여력조차 없습니다. 총체적 절망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그들을 향해 제 2이사야는 ‘새로 될 일’(이사 40:9), 즉 ‘해방과 구원’(유배생활이 끝나고 귀국)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이사 40:1~2,13~14,16).

제 2이사야는 그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을 성취할 ‘야훼의 종’, 즉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제 2이사야에는 ‘야훼의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4개의 ‘시’(詩)가 있습니다(이사 42:1~9; 49:1~6; 50:4~11; 52:13~53:12). 그 중에서 세상을 위하여 ‘대신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사 50:4~11; 52:13~53:12)의 노래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야훼 종의 노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와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이 4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 중에서 오늘은 ‘두 번째 시(詩)’(이사 42:1~6)가 배정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만국 백성’의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을 위해 어떤 한 인물을 ‘당신의 ‘종’으로 예비하십니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를 ‘불러’주시고,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야훼의 종’, 즉 ‘메시아’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날 것입니다(3절). 하느님께서는 ‘야훼의 종’을 땅 끝까지 당신의 ‘구원’을 이르게 할 ‘만국의 빛’으로 뽑아 세워주실 것입니다(6절). 본문에 묘사된 이 ‘야훼의 종’이 예언자 개인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지의 문제가 좀 복잡합니다. 분명 전반부(1~6절)는 개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7절)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 초점이 바뀌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잡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야훼 종의 사명은 결코 ‘헛수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해방되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야훼의 종’인 예언자와 그들에게는 “땅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이르게 할 ‘만국의 빛’이 되는 더 큰 사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한 때 통치자들로부터 멸시를 받으며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은 왕들과 수령들로부터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과 만국 백성’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 ‘거룩한 사명’이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루가 2:32; 사도 13:47). 오늘 복음이야기가 증언하듯이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현실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바빌론의 노예로 유배생활’하던 옛 이스라엘처럼 한 때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한 때 ‘죽음의 그늘 밑’ 어둠의 세계에 붙잡혀 살던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한 때 ‘사탄의 종살이’하던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빛의 세계’로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누리도록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선택받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선택의 은총을 누리는 ‘빛의 자녀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는 그 크신 ‘구원의 은총’을 땅 끝까지 널리 전파해야 할 ‘빛의 사명’이 주어졌음을 1독서를 통해 깨닫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훼의 종의 두 번째 노래’(이사 42:1~6)가 ‘공현절기’에 어울리는 배정임이 증명됩니다. 특히 “이름을 지어주셨다”(1절)는 노래는 오늘 복음이야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들, 즉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6), ‘하느님의 아들’(요한 1:34), ‘라삐’(요한 1:38), ‘메시아’(요한 1:41)와 상응합니다.

Art by Eva Campbell – EvitaWorks.com

사실 《요한복음》 1장에는 위의 그 호칭들 말고도 예수님에 대한 많은 호칭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한꺼번에 빛나고 있습니다. 이 호칭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를 말씀해줍니다. 문맥에 따라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말씀’(1절),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1절), ‘하느님과 똑같은 분’(1,18절),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3,10절), ‘생명을 주시는 분’(4절), ‘참 빛’(9절), ‘외아들’(14,18절),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분’(14절), ‘그리스도’(17,41절), ‘하느님의 어린양’(29절, 36절),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33절), ‘하느님의 아들’(34절), ‘라삐’(38절), ‘메시아’(41절),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45절), ‘나자렛 사람’(45절), ‘이스라엘의 왕’(49절), ‘사람의 아들’(51절).

어째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많은 호칭들을 쏟아낸 것일까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위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첫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머문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은 ‘감사’와 ‘탄원’으로 이루어진 <40>입니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전반부(1~11절)인 ‘감사’ 단락만을 ‘성시’로 배정했습니다. 전체적으로 1독서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6절b)는 ‘야훼 종의 노래’가 시인을 통해서도 응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인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옵니다(7절).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의 일’을 감사하는 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공동체 앞’에서 선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먼저 시인은 하느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진술합니다(1~3절). ‘죽을 병’(죽음의 위협)에서 ‘회복’된 것을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바쳐 올립니다(1~3절a).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그가 ‘살아났다’는 것은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하느님을 향한 그의 ‘끈질긴 믿음’을 증명해 줍니다(3절b). 또한 그의 ‘회복’은 ‘공동체’에게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3절b).

이어서 시인은 당신의 백성을 생각해 주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노래합니다(4~5절). 고난의 시간을 겪을 때 모두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고백합니다(4절). 그는 우상에게 빌어보라는 유혹을 거절하고 오로지 하느님만 신뢰했습니다(4절). 자기 계획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그를 하느님께서 마침내 회복시키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과 공동체의 삶에 개입해 오셨던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하나하나 기리려 합니다(5절). 하지만 하느님께서 행하신 은총의 일들은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습니다(5절).

생각이 여기에 미친 시인은 자신과 공동체를 생각해 주시는 은총의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러 성소에 올라갑니다(6절). 짐승이나 곡식 같은 ‘특별 예물’과 번제나 속죄제 같은 ‘희생제사’를 감사 찬미와 함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6절). 자신의 개인적인 감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갖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은 그의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주십니다(7~10절). 그것은 하느님의 뜻(법, 계명)을 삶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7절). 그 법(뜻, 계명)은 두루마리에 적혀있고, 자신의 마음에도 간직되어 있습니다(8절). 그 뜻(법, 계명)은 한마디로 공동체 속에서 ‘정의’를 선포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9절).

놀랍습니다. 특별 예물봉헌이나 희생제사가 제사장이나 감사하는 시인 자신에게는 기쁨일지 몰라도 하느님께는 진정한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반기시는 일은 개인의 감사를 넘어 삶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입입니다. 제사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법,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는 일이요, 마음에 간직된 그 법(뜻, 계명)에 순종할 뿐 아니라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인 정의를 실천하는 일’입니다(10절). 이처럼 시인의 고백 속에는 ‘정의’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제물이나 바쳐 하느님의 ‘환심’을 사려는 타락한 제사의식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습니다. 사회의 공정과 정의는 외면한 채 교세 키우기에만 여념이 없는 이 땅의 교회들의 귀가 열려 다시 새겨들어야 할 엄중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시인의 노래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7절).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뜻’(계명, 법)을 마음에 간직하고 기뻐하셨습니다(8절). ‘하느님의 정의’를(9절),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구원’을(10절),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10절)를 숨김없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행하는 시인의 이 같은 ‘공개적인 증언’은 1독서는 물론 오늘 복음이야기와도 상응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계시’를 ‘공개적으로 증언’합니다. ‘안드레아’도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증언’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후에도 하느님께서 인자와 사랑으로 자신을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을 고백하면서 감사 단락을 마무리합니다(11절).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입니다. ‘연중시기’ 2독서는 <복음서>처럼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는 ‘준(准)계속 병행’ 독서입니다. 이런 배정 원칙 때문에 연중시기 2독서는 해당 주일 다른 전례독서와 주제 연결이 다소 느슨하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가’해 ‘연중시기’(공현후 절기와 성삼위일체 후 주일부터 왕이신 그리스도주일까지) 동안 낭독하는 2독서는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고린토전서, 로마서, 필립비서, 데살로니카전서, 에페소서)에서 배정됩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은 <전례독서> 주제인 ‘영원한 친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어린양, 그리스도)을 착한 행실로 증언하시오.’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 1고린 1:5~6

‘고린토’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항구도시입니다. 로마 제국의 아가야 주의 수도이며 총독의 주재지이기도 했습니다.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무역이 활발했고 상업적으로도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도시의 부를 쫓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구는 50만 명이 넘었고, 종교들도 성행했습니다. 특히 성적인 부도덕성과 사치가 널리 퍼져 있던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2차 전도여행 동안 아테네에서 이곳으로 건너왔습니다(사도 18:1). 그 때가 서기 50년경입니다. 그는 고린토에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사도 18:11~18).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에 있을 때(서기 56년경)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고린토를 떠난 후 고린토 교회 공동체는 크게 성장했으나 어느 덧 그 도시의 분위기에 물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교회가 ‘분열’로 인한 갈등을 겪으며 ‘파벌’(派閥)까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1고린 1:10~4:21). 이것이 바울로가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입니다. 교회의 분열과 파벌이야기는 다음주일 2독서로 다루어지니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무튼 바울로는 교회 안에 생긴 중대한 폐해들을 질책하고 고린토 교회가 바울로에게 제기한 일련의 질문들을 답변해 가면서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서신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내용들입니다.

오늘 낭독한 본문은 ‘분열’과 ‘파벌’로 경쟁하는 그들에게 ‘일치를 호소’하는 서두입니다(1~9절). 먼저 바울로는 그 당시 유행하던 편지 방식으로 은총과 평화를 빌며 서두를 시작합니다(1~3절). 고린토 교회의 ‘분열과 파벌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 같은 인사는 참 역설적입니다. 그만큼 그는 고린토 교회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목자였습니다. 그는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성도)인 ‘교회’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그들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임을 명백하게 호소합니다(2절).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오직 그 ‘이름’ 안에 갈등과 분열에 처한 그들을 ‘일치’시키는 유일한 힘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사말을 시작한 후에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바칩니다. 바울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의 풍성함을 언급합니다(4~5절).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5절) 특히 그들은 모든 ‘은총의 선물’, 즉 ‘은사들’을 받아 영적으로 크게 풍성해졌습니다(7절). 그러나 자신들이 이미 완성되었다거나 목표점에 도달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고(7~8절),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을 부르시어 하느님의 아들과 ‘친교’(코이노니아, 교제, 상통)를 맺게 해 주신 신실하신(진실하신) 하느님께 그 삶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절). 다시 말해 그들이 그와 같은 은총을 받은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길을 충실히 잘 걸어가기 위해서입니다(8절). 그 ‘충실함’에 대한 보상은 이 지상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영원토록 ‘친교’를 나누는 ‘영원한 생명’입니다(9절). 우리 모두가 그리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복음이야기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첫 번째 제자 그룹을 전하는 《요한복음》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의 세례 이야기를 찬찬히 비교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차이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마태오복음》을 중심으로 세례 이야기를 보았으니 오늘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차이점들을 먼저 언급해 보겠습니다.

첫째,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가 본 어떤 광경 때문에 자기한테 오시는 예수님을 즉각적으로 선포합니다.

보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 요한 1:29b

공동번역 성경에는 원문에 있는 ‘보라’가 빠져 있습니다. 이 구절이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설교자에게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이 본 그 광경이 ‘세례 때’ 본 과거의 것인지, 아니면 ‘세례 사건 없이 지금 현재’ 보고 있는 것인지가 명확치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아래에서 다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이든지 간에 세례자 요한은 자기한테 오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한테 오시는 예수님을 위대한 ‘지혜의 스승’이나 ‘윤리 교사’로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화목제물)로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성취하실 가장 위대한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인류를 괴롭히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 인류의 평화도, 영원한 생명도, 하느님과의 친교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使命)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이 같은 ‘믿음의 진술’은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선포(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서문’(요한 1:1~18)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 요한 1:6~8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선포할 때 ‘세례자 요한’은 무엇을 염두에 두었을까요? <구약>에는 타인을 살리기 위해 제물로 쓰이는 ‘희생양’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사악 대신 번제물로 드려지는 ‘수양’ 이야기를(창세 22:13)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희생양’은 ‘과월절의 시작’인 ‘출애굽’에서입니다. 이 전통은 출애굽 전 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 새끼 양’을 잡던 ‘의식’(儀式)에서 유래합니다(출애 12:1~13). 이 ‘구원의 의식’(儀式)은 반드시 지켜야할 전통으로 수천 년을 전해 왔습니다. 해마다 ‘과월절’이면 율법이 명령하는 요구를 따르기 위해 성전에서는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 새끼 양’들이 수도 없이 차례로 희생되었습니다. 사제들은 그 희생된 어린양의 ‘피’를 받아 제단에 부었고, 내장과 기름기는 번제로 바쳤습니다. 나머지 고기는 희생물을 바친 사람이 집으로 가져가 식구들과 ‘과월절 만찬’을 했습니다. 따라서 축제기간 희생양의 피는 강물처럼 키드론 골짜기를 따라 흘러갔고, 번제물의 냄새는 예루살렘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이처럼 ‘어린양’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희생당하는 ‘대속의 상징’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도 ‘양’은 속죄 제물로 희생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53:6)도 이 ‘희생양’ 전통에 서 있습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은 그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고 선포합니다. ‘없애다’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아이로’입니다. 이 말은 ‘들어올리다’(lift), ‘가져가다’(take), ‘운반하다’(carry)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제거하다, 치워 없애다’입니다.

‘사도 요한’도 분명 이 전통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의 죽음을 ‘과월절 희생양’이 도살되는 시간과 관련지었습니다(요한 19:31~36). ‘과월절 희생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되던 그 시간에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참된 ‘과월절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입니다(요한 1:29,36).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 사람들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는 속죄의 죽음이요,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시켜주는 희생의 죽음이었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욱이 참된 과월절 희생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주적인 힘을 가진 단 하나의 ‘죄’는 무력화되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로의 증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우주적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다른 축제일이 아니라 ‘과월절’을 택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도 ‘그림자’에 불과한 ‘과월절 희생양’ 전통을 ‘참된 실체’인 ‘당신의 죽음으로 최종적으로 끝내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공관복음>이 전하는 ‘성전정화 사건’(마르 11:15~19; 마태 21:12~13; 루가 19:45~46)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 루가 19:46

예수님은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나무라셨습니다. ‘강도’(強盜)는 힘으로 남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 도둑을 말합니다. 그 ‘강도’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언뜻 듣기에는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지만 그들은 단지 ‘깃털’일 뿐입니다. ‘몸통’은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같은 유다 ‘사회의 특권층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정치, 종교, 경제의 최대 수혜자들입니다(관련 글은 2019.11.17. 연중 33주일 복음해설을 보십시오).

그 ‘강도의 몸통들’이 빼앗아 가는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의식(意識) 수준’에서 ‘돈’을 떠올리셨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돌아보고 제가 내린 결론은 ‘생명’입니다. 정말이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 ‘강도의 몸통들’은 계속해서 ‘생명’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전 뜰 한 귀퉁이에는 ‘제물’(祭物)로 사용될 ‘소’와 ‘양’과 ‘비둘기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의식(意識) 수준’이라면 제물로 바쳐질 그 ‘무고한 희생’을 가엾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끔찍한 희생을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십자가 희생) 동물들의 무고한 희생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인간의 구원 뿐 아니라 이처럼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동물들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나중에 교회는 이 ‘과월절 전통’을 ‘재해석해’ 성찬례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직접 양을 도살하는 끔찍한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상징을 성찬례 순서로 받아들여 찬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아담 이후 ‘인류의 모든 죄를 없애는’ 과월절 전통의 참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찬미하는 우리 자신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를 일상에서 얼마나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우리 역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들을 통해 이웃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하도록 자신의 소중한 것,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봉헌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와 교회를 보면, 자기헌신과 자기희생보다는 무임승차 하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느 나라나 사회든 헌신과 희생 없이 기초를 잡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마다 그런 분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는 것과 실제로 자기 삶을 교회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해 몸으로 헌신하고 서로를 위해 짐을 나누어지는 일을 감수할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헌신과 봉사를 합니다. 그 모든 헌신과 봉사가 자기만을 위하려는 이기적인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보자면, 별거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헌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헌신은 건물이나 어떤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 주님이 친히 세우신 하늘공동체를 위해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서 그 헌신을 마지막 날 기억해 주시기를 아침마다 기도합니다.

둘째,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간 건 맞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는 명쾌한 증언이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기껏 ‘주의 세례축일’로 말씀 나눔을 했는데 좀 허탈하기까지 합니다. 어째서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기록한 것일까요? 세례 사건을 전하는 <공관복음>이 사실일까요? 아니면 세례 사건을 전하지 않는 《요한복음》이 사실일까요?

저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공관복음>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요한복음》의 관점입니다. <공관복음>의 관점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공관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면 오늘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그 후에 일어난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몇 주가 지난 다음에 다시 돌아오시는 중에 있던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을 참고해 말씀드리면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고, 그 모든 유혹을 이기고 다시 돌아오시는 중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세례 받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없고 세례자 요한이 일종의 회상처럼 과거 이야기를 떠올리며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어린양’, 즉 ‘메시아’라고 증언하는 중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그 자체에 충실한 방식인데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볼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야기는 ‘세례 사건 없이 지금 현재’ 보고 있는 ‘광경’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럴 경우 <공관복음>의 보도들과 명백한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어느 보도가 진실인지를 두고 논란이 생깁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음에도 받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 기자에게는 분명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사이에 있었던 경쟁과 대립이라는 갈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세례를 베푼 사람과 받은 사람 중 누가 더 위대하고 큰 사람인가라고 질문하면 당연 세례를 베푼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는 <공관복음> 기자들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 기자들은 세례자 요한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도록 하는 장치를 사용합니다. 마르코와 루가는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루가 3:16)라고 세례자 요한 스스로 증언하게 합니다. 마태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마태 3:11)라며 세례자 요한으로 하여금 지극한 겸손을 표현하게 합니다.

하지만 별로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나 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애당초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았다’는 이야기를 생략합니다. 한마디로 ‘세례는 안 돼!’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가 어떤 점을 동의할 수 없었기에 그런 것일까요?

우리가 지난주에 다루었다시피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특히 마르코와 루가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1:4; 루가 3:3)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것마저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거절했습니다. 나아가 세례자 요한의 입술로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하느님의 어린양(29, 36절), 하느님의 아들(34절)]이신지를 직접 증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30절). 더욱이 《요한복음》 기자는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 정도가 아니라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셨다”(요한 1:1)라는 ‘선재’(先在, pre-existence) 사상을 전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공관복음>처럼 《요한복음》 기자도 ‘두 종류의 세례’는 묘사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 선포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위대함을 드러냄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사이의 경쟁과 대립을 《요한복음》은 끝냅니다.

셋째,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본 사람도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 자신이라는 점이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독특함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에게 가게 하신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라”(31절)는 ‘증언의 사명’(使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분이 누구신지 이름도, 출신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받은 ‘표징’(sign)은 딱 하나였습니다.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33절). 그 밖의 다른 표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방에서 온 구도자들이 ‘그 별’이라는 하나의 ‘표징’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은 버렸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기자는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 베푸실 ‘하느님의 아들’, 즉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하느님의 방법’(31~34절)이었다고 전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세례 받는 장면을 묘사하는 모든 성화에는 ‘비둘기’가 등장합니다. 그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는 하나의 중요한 ‘장치’입니다. 우리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세례자 요한’이 됩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그림 속에 있는 ‘비둘기’를 보면서 우리의 세례가 갖는 의미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으로 우리와 연대하셨기에 우리의 세례도 효력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던 순간에도 ‘성령이 강림’하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도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의 그 엄청난 의미에 대해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 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 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 로마 6:3~5

마지막으로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는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도 없습니다. 대신에 《요한복음》 기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세례자 요한이 ‘증인’으로서(요한 1:6~8; 요한 5:33~35) 예수님을 자세히 ‘증언’합니다(요한 3:28~30). 사실 《요한복음》은 ‘증인의 증언’에 기초한 ‘믿음’을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요한 1:41; 45; 3:11; 31~36; 4:39; 5:32,36~39; 8:14,18,26,31~32,51; 9:17,33,35~39; 17:20; 20:18, 29). 예수님이 제자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요한 20:29

《요한복음》 자체도 예수님의 ‘제자’이자 ‘증인’인 사람의 기록이기에 그 ‘증언’은 믿을 만하다고 전해줍니다(요한 21:24). 우리는 그 ‘증언’에 우리의 운명을 걸었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중 두 사람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모셔온 스승을 포기하고 삶의 자리를 옮길 참입니다. 불교식 용어로 표현하자면 ‘진리’를 위해 ‘세상의 인연’을 미련 없이 버릴 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것처럼(요한 3:30) 상황변화의 시작점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였고, 다른 한 사람은 훗날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로 불린 이 책의 저자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뒤돌아서셨고’ 따라오는 자신들을 ‘보셨다’”(38절)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현장에 함께’ 있던 ‘증인’이나 할 수 있는 세세한 동작 묘사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돌아서다’는 동작은 ‘관계가 더 깊어진다.’는 몸짓입니다(요한 20:16). ‘보셨다’는 말씀은 ‘특별한 관심’으로 ‘응시’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려 한다는 뜻입니다. ‘뒤돌아서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 요한 1:38a

인간 삶의 핵심을 건드리는 이 직접적인 ‘한 말씀’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최초의 말씀’이기에 의미가 아주 깊습니다. 사실 각 <복음서>가 전하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마태 3:15; 마르 1:15; 루가 4:18~21)은 그 복음서 전체의 ‘핵심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의 입술에 담은 ‘최초의 말씀’은 당신을 따라오던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선포됩니다. 동시에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너희는 무엇을 구하느냐?)는 말씀은 ‘복음’을 듣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향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주목할 점은 ‘누구를 찾느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메시아’시라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 즉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자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을 ‘찾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본문에 ‘바라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제테오’도 ‘찾다’, ‘수색하다’, ‘소망하다’, ‘애쓰다’는 뜻입니다.

우리 경험의 핵심을 건드리는 이 직접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과연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까?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힘써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영광만을 힘써 추구하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요한 7:18; 1요한 2:16).

제 경우에는 대답할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까? 뱀이 그들을 꾀었습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 창세 3:4~6

뱀의 유혹 속에 에덴동산에 있던 그들이 ‘바라고 찾던 것’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바라는 것, 그들이 찾던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자꾸만 이 《창세기》의 그림자가 아른 거립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느님 눈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야 했습니다(창세 3:8,10). 그 때 하느님께서 그들을 ‘간절히’ 찾으며 부르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 창세 3:9

지금 하느님이 ‘사람’을(나를) 찾고 계십니다. “너,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너,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느냐?”라고, “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어 오십니다. 궁극적으로 이 물음은 “너는 누구냐?”입니다. 어디 그 물음이 한 개인에게만 해당하겠습니까? 우리 가정을 향해,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서로를 불신하며 반목하는 이 나라를 향해 지금 하느님께서 “너희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자칭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대립하는 이 사회를 향해 지금 하느님께서 “너희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진정한 의미의 좌파도 우파도 아니지만 ‘총칭’ 좌파와 우파로 갈리어 투쟁하는 이 땅을 향해 지금 하느님께서 “너희는 누구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과연 이 나라는, 우리 사회는, 이 땅은 하느님의 이 물음 앞에서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신뢰와 화합, 사랑과 용서, 정의와 평화는 정말 ‘사전’(事典)에만 있는 단어일까요?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느님의 물음은 언제 읽어봐도 우리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한 말씀’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 기자는 《창세기》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을 두 제자의 입에 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 요한 1:38b

‘라삐’는 아람어로 ‘선생님’(나의 존경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가르침을 요청하는 표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들었지만 아직 그들에게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랍비’(율법교사)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에게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는 ‘지혜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요청하는 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돌려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라. – 요한 1:39

예수님은 그들을 당신 삶의 공간으로 초대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자’는 초대입니다.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신 곳을 봅니다. 《요한복음》에서 ‘보는 일’은 예상치 못한 다른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가령 ‘실로암’에 가서 씻고 다시 보게 된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요한 9:1,7). 그는 보게 되자 예수님을 믿게 되고, 경배하게 됩니다(요한 9:37~38). 이처럼 ‘보면 믿게’ 되고, ‘보면 따르게’ 됩니다.

그 두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묵고 계시는 곳’을 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과 함께’ 그 날을 지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 나라 운동’에 동참할 제자들과 ‘어울리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사실 《요한복음》 기자는 ‘함께’를 강조합니다. ‘함께 지내며’ 자신들의 ‘오감’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합니다. 그 체험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다음에 일어난 사건에서 알 수 있습니다(40~42절). 그들 삶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따르는 엄청난 ‘영적 도약’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단지 ‘호기심’에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호기심은 이내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41절). 그들은 인생일대의 기회를 붙잡은 진정으로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그 곳’이 어디인지는 ‘비밀’에 붙입니다. 대신 ‘오후 4시쯤’이라는 ‘시간’만은 똑똑히 알려줍니다. 이렇게 그가 시간까지 기억해 낸 걸 보면 그 날의 체험이 그만큼 자기들 인생에서 ‘결정적’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장소’를 신성시할까봐 그랬을까요? 실제로 종교마다 전해 내려오는 ‘성지’(聖地)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곳’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를 묵상하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장면에 생각이 가 닿았습니다(요한 4:5~24). “‘과거’(그리짐 산)와 ‘현재’(예루살렘) 중 어디가 더 신성한 곳입니까?”(요한 4:20)라고 묻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런 ‘특별한 장소’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하십니다(요한 4:21,23~24).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요한 4:23). 이 대화를 참고해 볼 때, 《요한복음》 기자가 ‘그 곳’을 알려주지 않고 ‘시간’만 알려준 이유는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는 그 결정적인 곳’, ‘영적 도약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새로운 인식의 차원이 열리는 그 곳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곳’은 어디 멀리 가서 찾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의 삶의 자리’가 얼마든지 ‘그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에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특별히 지금 여기, 즉 우리가 함께 모여 ‘성령’ 안에서 봉헌하는 이 ‘성찬례’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는 ‘영적 도약’이 일어나는 ‘그 곳’이어야 합니다.

엄청난 ‘영적 도약’이 일어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갑니다. ‘복음’은 형제와 친척에게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이 짧은 단락에 ‘시몬’(이 이름의 히브리어 어근은 ‘듣다’라는 ‘쉐마’에서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 응답하셨다, 눈여겨보셨다 뜻이 담겨 있습니다)이라는 이름이 무려 ‘다섯 차례’나 언급됩니다. 우선 그는 안드레아의 형 ‘시몬 베드로’로 불리고, 그 다음부터는 본래 이름인 ‘시몬’으로 불립니다. 우리말 ‘베드로’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페트로스’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마태 16:18) ‘반석’(거대한 바위 덩어리)이라는 뜻보다는 그 ‘반석’에서 ‘분리된 작은 돌’(a stone)이라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페트로스’의 여성형인 ‘페트라’가 예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반석)에 해당합니다(1고린 10:4; 마태 16:18). 참고로 구한말 들어온 초창기 선교사들은 ‘베드로’ 대신 가차(假借)로 ‘피득’(彼得)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시몬에게 명쾌하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 요한 1:41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놀랍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첫 번째 제자가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동생 ‘안드레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공관복음>의 자료가 된 전통보다(마태 16:13~19) 더 ‘정확한’ 독립적인 전승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메시아’, 이것은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수님에 대한 네 번째 ‘호칭’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 라삐, 그리고 지금은 ‘메시아’입니다. 물론 모두 이스라엘 중심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중에서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호칭들을 종합해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완전한 계약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는 ‘증언’입니다.

안드레아는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 갑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그 이름의 뜻처럼 눈여겨보십니다. 그만큼 관심을 갖고 집중해서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 – 요한 1:42b

놀랍게도 예수님은 ‘시몬’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십니다. 예수님이 불러주신 그 이름은 그를 지배해 온 ‘가족’이라는 ‘근본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가족은 ‘구(舊)세계’, 즉 ‘낡은 질서’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현재의 그를 ‘옛 세계와의 연결’ 속에서 불러주신 다음, ‘게파’(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게파’는 예수님 당시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를 향해 이름 붙여주기 대회라도 열린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2개(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 따르던 두 제자가 예수님께 2개(랍비, 메시아), 예수님이 시몬에게 1개(게파)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게파’(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그를 ‘새 시대의 사람’으로 불러주셨다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이름’처럼 만들어 가실 것이라는 상징입니다. 분명 ‘게파’는 그의 현재 모습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갖추게 될 미래의 모습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다시피 그는 나서기 좋아하고 충동적이며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예수님은 그를 그의 이름처럼 빚어 가실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바위’ 같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의 미래 모습을 내다보시고 ‘바위’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셈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인간의 ‘전모’(全貌)를 제공받습니다. ‘참 빛’이신 분 앞에서 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환희 드러납니다. 과거에 그가 누구였고, 현재 누구이며, 장차 예수 그리스도라는 창조주를 통해 어떤 사람으로 빚어져 갈 것인지를 듣습니다. 사실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서문에서 “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한 1:9)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줄 ‘참 빛’(만국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누리도록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선택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선택의 은총을 누리는 ‘빛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는 그 크신 ‘구원의 은총’을 땅 끝까지 널리 전파해야 할 ‘빛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착한 행실’(정의로운 생활, 때로는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며)로 전파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썩어 없어질 것을 구하던 삶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토록 친교를 나누는 복된 삶으로 들어오도록 ‘착한 행실’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우리 삶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세례자 요한’처럼 ‘진실’을 ‘증언’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안드레아’처럼 ‘참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베드로’처럼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든든한 ‘바위’가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영화롭게 하시려고 ‘참 빛’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인간을 자신들의 근원인 하느님과 다시 ‘연합’시키려고 ‘참 빛’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영원한 말씀이 ‘참 빛’으로 성육신 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구원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참 빛’으로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믿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영원한 말씀의 성육신은 지금도 인간을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하시는 길이십니다. 인간을 자신들의 근원인 하느님과 다시 연합시키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하느님으로 믿는 믿음은 그 사람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며 그 결합이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옵니다. 이 일을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고 견디셨습니다. 이 성육신의 진리를 ‘확신’하는 이들은 ‘사랑’이라는 ‘착한 생활’로 자신이 영원한 말씀이신 분께 속한 ‘빛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이신 하느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진리임을 함께 모일 때 ‘사랑의 삶’으로 ‘증언’하고, 각 자의 삶의 자리마다에서 ‘사랑의 삶’으로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친교를 완성하’러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증언의 삶’을 우리교회가 잘 완성해 가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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