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7. 연중3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모든 고난을 이겨내 생명을 얻으시오입니다.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한 주 앞두고 우리는 종말론적인 분위기로 채워진 전례독서들을 듣습니다. 하지만 전례독서가 진정으로 말하려는 바는 ‘종말’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지금 여기’입니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신뢰’ 속에서 오늘을 ‘참고 견디어 내는 꾸준함’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영원’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끝까지 참고 견디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늘 사람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빚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시옵니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며,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말라 3:19-20상
  • 시편 – 98
  • 2독서 – 2데살 3:6-13
  • 복음서 – 루가 21:5-19

연중 3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모든 고난을 이겨내 생명을 얻으시오입니다.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을 한 주 앞두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종말론적인 분위기로 채워진 전례독서들을 듣습니다. 자칫 심판, 파괴, 전쟁, 반란, 전염병, 박해, 투옥, 순교, 미움이라는 단어들 때문에 위축되고 우울해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례독서가 진정으로 말하려는 바는 ‘종말’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지금 여기’입니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오늘을 참고 견디어 내는 꾸준함’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영원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한 해의 마감(종말)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1독서는 ‘주님이 오시는 날’을 선포하는 《말라기》입니다. ‘그 날’은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러 오시는 날입니다. 어째서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러 오셔야 했습니까? 배경은 이렇습니다. 주전 538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유대인들의 귀향이 있었습니다. 귀향민들은 예루살렘에서 공동체 통일의 상징인 ‘성전재건’을 시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바빌론 포로생활동안 유다에 남아있던 가난한 유대인들, 사마리아인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에즈 4:1~5). 결국 성전 재건은 몇 년간 중단됩니다. 그 사이 귀향민들도 ‘선민’으로서의 공동체성보다 자기네 살 길을 찾기에 바빴습니다. 자칫 뿔뿔이 흩어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 시기에 ‘하깨’와 ‘즈가리야’ 예언자가 등장하여 유대 공동체 통일의 상징인 ‘성전’을 세우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에즈 5:1~2). 예언자들은 ‘성전’이 재건되면 모든 형편이 나아지고 하느님이 그들 가운데 머무시며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 선포했습니다(하깨 2:6~9,20~23; 즈가 2:10~17; 6:10~15). 마침내 주전 515년경, ‘즈루빠벨’의 주도하에 그들은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하였습니다(에즈 6:14~18). 에즈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도 성전의 신성함과 율법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되었음에도 귀향민들이 기대했던 복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하신 놀라운 변화, 즉 ‘예루살렘’이 하느님이 거하시는 ‘평화의 도시’가 되고 뭇 민족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그 영광스런 일들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성전 봉헌 후 50년이 지나자 귀향민들의 신앙은 차가워지고 나태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을 떠났습니다. 갈수록 성전 제사는 변질되어 형식만 남았고, 율법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불의가 판치고 가난한 이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무법천지와 같았습니다(말라 3:5,7~10). 하느님의 사람들(제사장들과 레위인들)마저도 불의한 자가 잘 되는 세상을 보면서 “공변되시다는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믿음 없는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말라 2:17; 3:14~16a). 믿음이 더 이상 생활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불의한 세상을 살면서도 하느님을 진정한 ‘주권자’로 섬기는 신실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생활과 인생에 힘이 되어주지 못하던 시기에 등장한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라기’(my messenger,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말라기》는 하느님께서 신실한 이들을 기억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불의한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진정한 ‘주권자’로 섬기는 이들의 이름이 ‘책’에 기록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소유로 삼으시고 자식처럼 아껴주실 것이라 선포합니다(말라 3:16b~17).

특히 《말라기》는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러 오실 것이라 선포합니다.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는 이들 때문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의인들 때문에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말라 3:5).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면 신실한 이들과 악인들 사이의 차이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한낮의 ‘태양’아래 그 무엇도 숨겨질 수 없듯이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오시는 그 날이 신실한 이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불기둥 대신 ‘승리(정의)의 태양’이 비쳐와 신실한 이들의 아픔과 상처들을 치유할 것이고,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우습게 여긴 악인들에게는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러 오시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승리의 태양’이 인류의 모든 역사를 바꾸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그 날이 오기 전 당신이 오실 길을 닦을(준비하도록) ‘특사’를 먼저 보내실 것입니다(말라 3:1;23~24). 그 특사는 ‘엘리야’로 묘사됩니다. 《루가복음》 기자는 그 엘리야가 승리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라고 밝힙니다(루가 1:17).

‘주님이 오시는 날’을 선포하는 《말라기》가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이야기와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인생을 치유할 ‘승리의 태양’이심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신 참 하느님이 예수님이심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고 불의한 시절을 끝까지 견딘 신실한 이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 ‘영혼의 치유’, 즉 ‘구원’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끝까지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딘 이들도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과 ‘상응’합니다.

1독서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합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믿고 깨어 기다리고 있습니까? ‘불의한 세상’을 살면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견디는 우리를 하느님은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 기록하시어 주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자식처럼 아껴주십니다. 더디 오시는 것 같아도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시어 정의를 바로 잡으시고, 우리의 모든 아픔과 상처들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과 기쁨을 가져다주시러 주님은 날마다 점점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그 믿음과 기다림 속에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은 ‘하느님의 주권’을 찬미하는 <98>입니다. 98편은 ‘신년축제’에서 우주의 왕으로 즉위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찬미할 때 사용한 시편들에(95~100편) 속합니다. 시인은 인간의 목소리와 악기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도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가문에게 베푸신다고 약속하신 사랑과 진실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정의’를 만백성 앞에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자비롭고 위대한 왕이심을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온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시고 만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리러 오십니다. 여기서 전례독서들과의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오신 ‘메시아’(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말라기》와 《시편》에서 선포하는 그 승리와 정의, 사랑과 진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의 찬미를 바치러 오늘도 성당에 찾아 나왔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왕이심을 드러내십니다.

2독서는 사도 바울로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라는 그의 교훈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모든 고난을 이겨내 생명을 얻으시오’라고 증언하는 <전례독서> 주제와의 연결이 빛납니다.

먼저 사도 바울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생활을 해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라’고 명령합니다. 바울로는 자신이 복음 전파 사역을 수행하면서도 결코 공짜 밥을 먹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밤낮으로 몸소 수고하며 노동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워나갔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은 앞으로 복음전파자가 되어야 할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자신을 본받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로가 다른 봉사자들로부터 복음전파를 위한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명령은 그만큼 데살로니카교회 안에 게으른 생활을 하면서 민폐를 끼치는 이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갈등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또 바울로가 가르친 복음의 진리에 굳건히 서서 자신이 전해 준 ‘전통’에 충실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이 이러한 바울로의 명령을 따라야 할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 있는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2데살 1:7b~10; 2:1)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명령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자칫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의 등불’이 우리 속에서 희미해질 수 있으니 오늘 마음의 등불을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가 물려 준 전통에 귀를 기울이면서 꾸준히 복음 전파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전파’,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작은 묵시록’이라 불리는 《루가복음》 21장에서 배정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이 외에도 ‘작은 묵시록’이라 불리는 다른 두 평행 본문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24장, 《마르코복음》 13장입니다. 대부분의 신약성서학자들은 《마르코복음》 13장이 원(原) 자료라고 봅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나 《루가복음》 기자는 이것을 가져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고난’ 속에 있던 ‘당시 교회 상황’에 맞게 자신의 신학을 첨가하여 본문을 편집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이 당시로서는 소수에 불과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 기록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하는 ‘예루살렘 성전파괴’는 ‘서기 70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흔히 《루가복음》은 대략 85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루가복음》 기자가 서기 30년경의 사건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그대로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과거 역사에 대한 루가의 신학적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로 《루가복음》 기자는 《마르코복음》에 비해 이야기를 좀 더 매끄럽고 부드럽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루가복음》 기자는 본문을 편집했을까요? 사실 이것이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한 가지 목적입니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고난’ 속에 있던 ‘당시 교회를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다가올 ‘미래’를 알려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당시)의 모든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라는 격려입니다. 이 일차적인 목적을 우리는 말씀 나눔 끝까지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이상한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빠질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낸 ‘성주간’에 해당합니다.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5~6절)는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입니다. 후반부(7~19절)는 제자들이 ‘재난의 시기와 징조’를 묻자 예수께서 ‘묵시적’으로 대답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 루가 21:5a

사람들은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성전은 ‘헤로데 성전’이라 불립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탄생하던 당시 유대 땅의 왕이었던 ‘헤로데 대왕’이 증개축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1독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즈루빠벨’이 소박하게 세운 제 2성전을 엄청난 크기로 증개축 했습니다. 그가 바깥뜰을 넓히기 위해 밑에서부터 쌓아올린 거대한 돌들의 일부가 여전히 ‘서쪽 벽’(western wall, 통곡의 벽)의 형태로 오늘날도 남아있습니다. 지난번 성지순례 갔을 때는 초막절이 막 끝난 다음이었는데도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가족단위로 그곳을 방문하여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이 있던 그 때까지도 ‘헤로데 대왕’ 때 시작된 성전 바깥뜰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까지 걸린 기간이 46년이라고 말합니다(요한 2:20). 기록에 따르면 그 성전의 총 공사기간은 80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완성 때는 주후 65년경으로 헤로데 대왕의 증손자(헤로데 아그리빠, 사도 25:13)가 분봉왕으로 있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불과 5년만인 주후 70년, ‘유대독립전쟁’을 진압한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헤로데 성전’을 바닥까지 철저히 파괴해 버립니다. 이런 비극을 전혀 예상할리 없는 ‘헤로데’(헤로데 대왕)는 엄청난 크기로 성전을 증개축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고고학자들도 헤로데가 증개축한 성전이 예수님 당시 고대근동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을 것이라 평가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의미를 갖는 곳입니까? 그들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지상의 중심’이라 믿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예루살렘은 유다 사회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추’였습니다. 특히 ‘성전’은 하느님이 임재하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는 ‘중심 위치’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서기 30년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작정하십니다. 거기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세 차례나 예고하셨습니다. ‘수난’입니다. 다시 말해 ‘중심’이라 불리는 그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곳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루살렘’(성전)을 차지한 성전체제의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곳입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루가 19:28) 예수님은 공생애를 마감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전’에서 보내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성전정화 사건’이 있었고(루가 19:45~46), 유다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의 ‘논쟁’도 성전에서 있었습니다(루가 20장).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말입니다. 그들은 당대에 하느님을 잘 섬긴다는 자칭 의인들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대변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맞서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고발’과 ‘공격’을 결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논쟁에서 탁월함을 보이셨습니다.

흥미롭게도 논쟁에 지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위안’(慰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헌금궤 앞을 지나던 ‘가난한 한 과부’였습니다(루가 21:1~4). 자신의 모두를 털어 넣은 과부의 봉헌은, 완전한 희생제물로 자신의 전부를 봉헌하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예시’(豫示)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의 봉헌에 주목하셨고 그 여인의 행동에 감동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에만 주목했고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 루가 21:6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지상의 중심’이고, ‘성전’은 하느님이 임재 해 계신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 성전이 ‘파괴 된다’는 예언은 ‘유대 민족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말이 새나가서 ‘성전당국자들’ 귀에 들어갔다가는 큰일 날 소리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과월절 축제를 앞둔 그 시점에 ‘성전파괴’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야할 이유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틀째 되던 날 이미 밝히셨습니다. ‘성전정화’ 사건입니다(루가 19:45~46). 본래 그들이 성전에서 지키던 제의와 과월절 축제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들을 ‘선택’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고, 그 구원의 정신을 다시금 구현하고자 지키는 축제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성전에서의 축제(제의)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려야할 자유와 해방에 더 이상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축제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타락과 부패, 억압과 착취에 기여하는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습니다(루가 19:46).

그 ‘강도’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언뜻 듣기에는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그들은 단지 깃털이고, ‘몸통’은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같은 유다 사회의 특권층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정치, 종교, 경제의 최대 수혜자들입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치,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했습니다. 도시 전체의 경제가 ‘성전’에 의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해마다 3차례 의무적으로 ‘성전’을 순례하여 축제를 지키도록 명령합니다(출애 23:14~17).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다른 축제들도 지켜졌지만, 이 세 축제는 근본적으로는 ‘출애굽’과 연결된 사건이기에 더욱 특별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해마다 3차례나 순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내국인이라면 해마다 1번은 성전에 올라오도록 가르쳤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살던 일명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평생 1번은 성지를 순례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물론 평생의 꿈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그 도시가 축제기간이 되면 30만 명까지 인구가 치솟습니다. 안팎에서 찾아든 순례자들 때문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순례자들이 축제기간 동안 유입되면 ‘물’과 ‘숙박’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물’은 식수로도 중요했지만 ‘정결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한편, 그 많은 순례자들은 도시에 ‘부’(富)를 가져왔습니다. 축제기간 숙박비로 많은 돈을 썼고, 기념품도 샀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주요도로는 그야말로 도시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한마디로 ‘헤로데 성전’은 예루살렘에 엄청난 ‘수익’을 발생시켰습니다.

특히 ‘대사제들’(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진짜 몸통)은 해마다 열리는 연속된 ‘축제들’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습니다. ‘부’(富)를 축적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희생제물’ 거래입니다. 순례자들은 성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정결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연 ‘희생제물’이 필요합니다. 멀리서부터 ‘희생제물’을 가져올 수 없으니 ‘현지조달’ 해야 합니다. 이 현지조달에 ‘성전상인들’과 ‘대사제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부’(富)를 축적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성전세 환전’입니다. 로마제국은 ‘세리’를 통해 제국의 통치에 필요한 ‘세금 징수’를 했습니다. 세금에는 ‘속주세’(屬州稅)와 기타 ‘직접세’(인두세, 토지세, 소득세)와 간접세(관세, 통행세, 판매세)가 있었습니다. 이 세금 외에도 20세 이상의 유대 성인 남성이라면 일종의 ‘종교세’(성전세, 십일조 등)를 성전에 내야했습니다.

‘성전세’는 율법에 따라 반 ‘세겔’을 내야하는데(출 30:11~16), 오늘날로 치면 성인 이틀 분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성전세’로 통용되던 ‘세겔’은 ‘띠로’에서 주조된 ‘동전’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의 공식 통용 화폐 이름은 ‘세겔’입니다. 그 동전에는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십계명에 어긋났지만 ‘무게’가 정확하고, ‘순은’(銀)에 가깝다는 이유로 율법학자들은 공식화폐로 인정했습니다. ‘성전세’는 ‘거주지’에서 제사장들이 거두었고(마태 17:24~27), ‘종교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의 땅을 제사장들은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의 경우는 ‘세겔’로 ‘환전’해서 직접 성전에 내야 했습니다. 안 내고도 낸 척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평생에 1번 순례까지 온 이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면서 거짓말 할리는 없습니다. 더욱이 ‘성전세’는 율법의 명령입니다. 여기에도 ‘환전상’과 ‘대사제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순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헌금’도 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과 순례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엄청난 양의 성전세와 십일조, 구제 헌금이 성전 경내 ‘여인의 뜰’에 있던 ‘성전보물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축제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사제 가문’의 막대한 ‘부’(富) 축적의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또 하나의 ‘몸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거룩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백성은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며 신뢰했고, 존경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그들은 ‘변질’되었습니다. 대사제 가문의 ‘이권 개입’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부과하고(마태 23:4), 말솜씨를 부려 가난한 이들을 ‘착취’했습니다(마르 12:40). 그들도 돈을 좋아하던(루가 16:14~15) ‘위선자들’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마태 23:2~39).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마지막 ‘몸통’은 ‘산헤드린’(최고법정, 최고의회)의 ‘원로들’입니다. 그들도 대제사장 가문과 한 통속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사두가이파’ 출신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주전 2세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을 쥐고서 세력을 키웠던 이들로 ‘제사장 조직이 정치화된 당파’입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 하고는 거리를 두었지만 ‘로마제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산헤드린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산헤드린의 ‘의장’이 바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현실 종교, 정치의 실세들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논쟁에 지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위안’(慰安)한 사람은 헌금궤 앞을 지나던 ‘가난한 한 과부’였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루가 21:1~4). 예수님은 그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봉헌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상징되는 당시 ‘기득권세력의 착취’를 싸잡아 정면으로 비판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봉헌’이라는 거룩한 명목으로 과부의 돈과 가산을 ‘등쳐먹던 특권층들’ 말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체제’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려야할 자유와 해방에 기여하기 보다는 타락과 부패,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었습니다. 특권층만을 위해 봉사하는 ‘성전’이라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좁게는 ‘성전정화 사건’이었고, 넓게는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종말’을 예고하신 사건입니다. 겉모습이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이라 하더라도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성전’을 하느님은 ‘혐오’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서기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기능을 상실한 그런 성전은 무너지게 하시고 당신 자신을 인류를 위한 진정한 성전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묵상해 봅니다. 나에게서 무너져야할 ‘예루살렘 성전’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 제게서 무너져야 할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무너져야할 그 ‘성전’을 자기 ‘바깥세상’으로만 한정해서 볼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나오는 고집, 아집(집착, 세계관), 성질머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옛 자아….’

복음서 후반부(7~19절)는 ‘재난의 시기와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은 21장 끝에 가서야 나옵니다(29~38절). 이제 성전을 나오신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하고 계십니다. 성전이 세워진 ‘성전 산’과 ‘올리브 산’ 사이에는 ‘키드론’ 골짜기가 있습니다(요한 18:1).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 있는 ‘게쎄마니’ 정원(동산은 잘못된 번역입니다)에서 기도하시다 붙잡혀 가십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따르면 배에서 내보냈던 비둘기는 금방 딴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옵니다(창세 8:11). 그것으로 노아는 물이 줄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레 후에 비둘기를 내보내자 아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올리브 이파리’는 땅에 찾아든 ‘평화’를 상징합니다. 주변국들에게 외침에 시달린 유대인들은 ‘메시아’야 말로 그들이 바라던 ‘평화’를 그 땅에 가져올 인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임금’으로 오신 예수님이 다른 곳이 아니라 ‘올리브 나무’가 지천인 그 산에 계셔야 했던 진짜 이유입니다.

또 올리브 산에는 ‘게쎄마니’ 정원이 있었습니다. ‘게쎄마니’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번역(루가 22장 43~44절)이 생략되어 있지만 《개역개정 성경》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전합니다(루가 22:44).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마치 ‘올리브 기름’을 짜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십자가 수난을 앞두신 ‘그리스도’(메시아)께서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온 몸의 진액을 따 짜내고 계십니다.

‘성전’을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제자들의 마음에 두 가지 질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시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무렵에 나타날 ‘징조’(sign)입니다. 한마디로 ‘언제’와 ‘어떻게’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성전파괴’ 예언을 하실 때 그들의 머릿속에는 옛날의 한 사건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바빌론 제국’이 무너뜨리고 선조들을 포로로 데려 간 일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역사의 종말입니다. 자기종교와 민족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입을 뗐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 루가 21:7a

먼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그들 입장에서는 역사의 종말이기도 한) ‘재난의 시기’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예루살렘 성전의 멸망뿐 아니라 역사의 종말)은 오직 ‘아버지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3:32; 마태 24:36). 그렇지만 역사에서 이 권한을 넘본 어리석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종말이 맞는 ‘날짜’를 특정했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문자적으로 집착했습니다. 가령 구원받을 사람을 ‘십사만 사천’ 명으로 ‘제한’하여 주장하는 이들입니다(묵시 14:1). 그러나 날짜를 특정하거나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문자적으로 집착한 이들은 실패했고,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황금문 앞에서 바라본 올리브산 전경, 아래 쪽에 만국교회가 보이고 그 성당 바로 옆이 게쎄마니 정원, 올리브 산 중턱 황금색으로 빛나는 막달라 마리아 기념 성당도 보입니다

다른 한편, 제자들이 묻던 그 ‘언제’(역사의 종말)를 예수께서 특정 날짜로 확정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권한’으로 못을 박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위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무너져야할 그 ‘예루살렘 성전’을 ‘바깥세상’으로만 한정해서 볼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성전’이 가리키는 속뜻은 우리의 ‘옛 자아’를 말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은 어찌 보면 우리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종말의 순간’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시게 하는 순간, 즉 성령이 오시는 그 순간은 우리의 ‘옛 자아’가 ‘마음의 왕좌’에서 내쫓기는 ‘종말의 순간’입니다. 그 종말은 먼 훗날이나 우리 종생(終生)의 순간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야 합니다. 사실 마음의 세계에서 무너질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종말’을 맞이해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집’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종말’은 ‘새로운 시작의 처음’이기도 합니다.

물론 ‘옛 자아’를 무너뜨리는 일, 즉 자기를 ‘비우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무너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수행’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바에 따르면 고통스럽지 않으면, 괴롭지 않으면 우리는 진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자아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지금의 자아가 괴롭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주님께 묻고 듣습니다. ‘옛 자아’를 진짜 ‘무너뜨리기’(비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옛 자아의 진짜 ‘종말’을 맞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새 자아’로 다시 빚어지고, ‘새 인간’으로 다시 세워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무너뜨림’의 기도, ‘자기 비움’의 기도를 감행하여 ‘옛 자아의 종말’을 맞이하려는 ‘용기’는 어디서부터 옵니까? 《시편》에서 노래하듯이 주님의 ‘사랑’(은총)에 대한 ‘신뢰’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의 사랑에 완전히 휩싸일 때입니다.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위험하지 않고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정직하게 자기의 진실을 대면하고 실토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세워지고 빚어지는 숭고한 삶의 시작은 ‘사랑의 주님만’이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즈음해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 루가 21:7b

‘재난의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묵시문학적’ 색채를 띠고 이어집니다(8~19절). 대부분의 신약성서학자들은 마태오나 루가에 기록된 ‘작은 묵시록’의 원(原) 자료가 《마르코복음》 13장이라 주장한다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이것을 가져다 ‘박해’와 ‘고난’ 속에 있던 자신들의 교회 상황에 맞게 자신의 신학을 첨가하여 편집했습니다. 따라서 원(原) 자료인 《마르코복음》의 기록 연대를 먼저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의 기록 연대를 주후 70~73년경으로 잡습니다. 그 시기는 ‘로마의 대화재’(주후 64년)로 야기된 그리스도인 박해가 이어지던 시절입니다. ‘유대독립전쟁’(주후 66~73년)으로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시절입니다. 시절이 몹시 혼란스럽고, 삶이 고난스러우면 어서 ‘현(現) 세상’이 끝나고, ‘새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하곤 합니다. ‘종말론’입니다. 교회도 이 종말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르코복음》 기자는 박해와 고난 속에 있던 교회에게 ‘사후(事後) 예언’ 형식으로 자신들의 현재에 대해 신학적인 대답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복음》을 기록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물론 《루가복음》도 주후 80년경에 기록되었기에 ‘마르코교회 공동체’가 처해 있던 종말론적 시대상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런 일(그들 입장에서는 역사적 종말)을 앞두고 일어날 ‘전반적인 흐름’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습니다. 위에서 저는 주님이 말씀하신 무너져야할 그 ‘예루살렘 성전’을 ‘바깥세상’으로만 한정해서 볼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이 가리키는 속뜻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옛 자아’를 말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재난의 시기’는 자신의 고집스러운 ‘옛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왕좌’에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려는 ‘옛 자아’를 내쫓고, ‘주님’이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시게 하는 순간, 즉 성령이 오시는 그 순간이 ‘종말의 시기’라고 언급했습니다. 그 ‘재난의 시기’는 멋 훗날이나 우리 ‘종생’(終生)의 순간이 아니라 자신의 고집스러운 ‘옛 자아’가 무너지는 ‘오늘’로 볼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질문한 ‘재난의 징조’ 역시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러 오실 때, 다시 말해 성령(진리, 진실)이 우리에게 오실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 하고 떠들더라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 – 루가 21:8

 

예수님은 먼저 ‘거짓 그리스도’(메시아)의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평화를 가져 올 그리스도다!”, “이제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가 되었다”라고 떠들어대면서 사람들을 홀릴 것입니다. 분명 일차적으로 그들은 유대독립을 위해 ‘성전’(聖戰)에 나서자고 선동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수천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성전’(聖戰)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이들이 여전합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런 ‘성전’(聖戰)에 참여하지 말라고 교훈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런 ‘성전’(聖戰) 선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는 ‘거짓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우리는 진짜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봉헌’(희생)하지 않고 군림하는 자칭 ‘그리스도’들은 결코 ‘사랑의 예수님’을 대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 ‘오늘’ 악에 침묵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우리가 깨달아야할 진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 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속지 않아야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가장 잘 속아 넘어갑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내 생각’, ‘내 신앙’에 우리는 가장 잘 속습니다.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다’는 ‘그리스도’나 ‘믿다’라고 하는 그 말의 ‘개념들’(논리)에 우리는 속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개념’들은 언뜻 듣기에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 같고, 또 손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말, 그 ‘논리’에 스스로 잘 속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종말’이 있기 전 ‘전쟁과 반란’(난리)의 소문, ‘큰 지진’, ‘기근(흉년)과 전염병’, ‘천체의 변화와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 상기시켜주십니다(9~11절). 여기 언급된 일련의 ‘재난들’은 ‘종말의 징조’를 알리기 위해 ‘묵시문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소재들입니다. 사실 거짓 그리스도, 전쟁과 난리, 지진, 기근과 전염병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도 인간의 역사를 계속해서 채워온 불행한 사건들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불행한 사건들이 연속되었지만 여전히 역사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일련의 ‘종말의 징조들’ 역시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깥세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날’이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시러 오는 ‘오늘’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늘’ 들어오시면, 다시 말해 ‘진실’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성전’에 ‘오늘’ 당도하시면, 내 안에서 벌어지는 ‘징조’들이 분명 있습니다.

‘실상과 허상’, ‘진상과 망상’이 ‘대판거리’로 싸우는 ‘전쟁과 반란’(난리)의 상태가 됩니다. 그동안 자신을 안전하게 구축해왔던 ‘토대’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큰 지진’의 상태가 됩니다. 자신을 지탱해 왔던 ‘기존의 인식’(관점)들이 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큰 지진’의 상태가 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즐겨 먹어왔던 ‘음식들’(돈, 권력, 명예, 성, 마약, 술 등등)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기근(흉년) 상태’가 됩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음식들이 진짜 먹어야할 참 양식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상태’가 됩니다. 더 이상 그런 가짜들로부터는 먹을 수 없음을 깨닫는 ‘마음의 기근 상태’가 됩니다. 그런 가짜들이 더 이상 ‘인생문제’의 영원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마음의 기근 상태’가 됩니다. 《루가복음》이 전하는 ‘되찾은 작은 아들처럼’(루가 15:11~32) 말입니다.

《루가복음》이 전하는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심한 ‘흉년’이 들자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쥐엄나무’ 열매가 자신이 먹어야 할 ‘양식’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방탕하게 살며 먹어온 그 음식들이 자신이 먹어야할 참된 음식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진짜 먹어야할 음식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많을 뿐 아니라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다는 것을 상기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회복과 구원의 시작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늘’ 들어오시면, ‘진실’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성전에 ‘오늘’ 당도하시면, 우리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즐겨 먹어왔던 ‘음식’들이 먹을 수 없는 가짜였음을 깨닫습니다. 더 이상 그런 가짜들로부터는 먹을 수 없음을 깨닫는 ‘마음의 기근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먹어야할 ‘참된 양식’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찬례는 바로 이 ‘참된 양식’을 받아 모시는 순간이고, ‘기근’(흉년)에 시달리던 우리 영혼을 살리는 ‘한 말씀을 듣는’ 순간입니다.

DIVINE SERVANT, at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그렇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왕좌’에 당도하시면 우리 마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예수의 영이 이기적인 옛 세상의 세계관을 ‘전염’시키는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마음의 하늘에서는 ‘깨달음’이라는 새로운 별들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탄생하고 영생의 빛으로 가득 차는 상태가 됩니다. 사실 이런 ‘종말의 징조들’은 우리 자신이 ‘새로 빚어지고 탄생하는 시작’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그런 ‘종말의 징조들’, 즉 ‘어둠’이 가장 깊었을 때가 ‘새벽’이 가장 가까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종말’을 예고하는 이러한 일련의 ‘징조들’이 일어나기 전, 그들이 잡혀서 ‘박해’와 ‘투옥’과 ‘핍박’과 ‘미움’이라는 고난도 겪을 것이라 알려주십니다(12~16절). 여기서 ‘루가’는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교회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독립전쟁’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성전과 회당예배에 참여할 정도로 관계가 괜찮았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독립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고,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을 비난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과 박해와 핍박과 투옥을 당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로마 제국 치하에서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미리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성령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그들’(제자들을 포함하여)과 함께 하시어 언변과 지혜를 주시어 복음을 증언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 21:13~15; 마태 24:11). 복음서 중에서 ‘성령’을 유독 강조하는 ‘루가’이지만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넘겨서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도록 그들을 친히 보호하실 것입니다(루가 21:17~18). 종국에는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그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딘 그리스도인들은, 해산하는 산모처럼,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루가 21:19).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주님은 분명 그리스도인들(제자들까지 포함하여)에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루가 21:18).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까? 교회사는 무엇이 진실이라고 증언합니까? 정말 그 약속의 말씀대로 되었습니까? 당장 《루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만 보아도 주님의 말씀은 무색해집니다. ‘스테파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다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사도 7:54~60). ‘베드로’와 ‘바울로’ 뿐 아니라 일흔두 제자는 ‘해’(害)를 받았고, 그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로마 박해시절에 순교했다고 교회사는 전합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머리’가 날아갔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핍박’(테러)을 당하며 ‘순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너무나 공허하게 들립니다. 정말이지 주님의 약속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어째서 주님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것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우리가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여기에는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있는 셈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첫 번째 수난 예고’ 때 이미 당신을 따르는 일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 뿐 아니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루가 9:23~24). 그렇다면 자기모순, 자가당착처럼 들리는 이 말씀들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합니까? 제가 믿기로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란 주님의 약속은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본질인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언젠가 부활하여 ‘영원’을 차지할 ‘새 몸’에 대한 약속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즉 ‘신앙’으로 인한 ‘박해’와 ‘투옥’과 ‘핍박’과 ‘미움’이라는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보장하십니다.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 루가 21:19

이렇게 예수께서는 ‘승리의 태양’이신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을 본받아 ‘참고 견디는’ 이에게 ‘생명’이라는 ‘최종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약속하실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렇게 참고 견디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간’에 ‘지금 여기서’부터 성찬례를 통해 참여합니다. 이미 시작된 산모의 빈번한 진통 후에 결국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어떤 재난과 고난이 불어 닥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영원한 생명)도 분명코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 시기와 그 징조 물음을 기록한 《루가복음》 기자가 박해와 고난 속에 있는 당시 공동체에게 전하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공포가 아니라 ‘구원의 희망’을 드높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잘 살아가도록 격려하려는 목적입니다. 실제로 《루가복음》 기자는 미래의 종말보다는 ‘늘 깨어 기도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자신의 ‘작은 묵시록’을 끝내고 있습니다(34~35절).

이 메시지를 깨달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마음의 왕좌에서 ‘옛 자아’를 내쫓고 ‘마음의 왕좌’를 ‘주님’(성령)이 차지하시게 하는 ‘오늘의 종말’과 ‘징조들’을 알아차리는 일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안개처럼, 이슬처럼 사라질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집단들처럼 어차피 세상은 끝날 것이라면서 ‘현실도피’로 살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묵시는 항상 ‘현재’에 주목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참고 견디신 예수님을 모본으로 하여 우리는 ‘오늘’을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오늘’ 주님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서로 격려하고, 사랑과 선한 일을 오늘 꾸준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삶의 자리마다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오늘’ 일구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오늘 참여할 것입니다.

이 시간 성찬례를 이끄시는 성령께 우리 모두를 의탁합니다. 부디 성령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끝까지 참고 견디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늘 사람으로 빚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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