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 서울 교구장 주교 사목교서
신자에서 제자로!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리라!”(이사 41:10)
사랑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 여러분!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삼일운동 백 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 대한성공회가 이 사회에 희망찬 복음의 빛을 비추고 사랑의 온기를 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국의 독립과 인류의 평화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아낌없이 바쳐온 신앙 선조들의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계승이 되어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 가는데 귀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는 사회에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갈 길을 제시하는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시대상황에서 교회에 거는 사회의 기대를 온전히 수용하고 복음의 진리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최근 몇 년 간 우리 사회에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들의 고통,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어린 희생은 우리 교회가 깊이 고뇌하여 영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해야 할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대한성공회는 일찍이 129년 전 병원과 학교, 고아원의 설립부터 시작하였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나눔의 집 선교 등을 실천해 온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기에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 여러분!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욱 건강해지고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신앙이 성숙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해 진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신자가 되고 개인이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구하는 차원을 넘어 각자가 하느님의 편에 서고 하느님의 길을 가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길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이고 진리의 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대한성공회는 외형적으로 화려하고 큰 모습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해 왔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울교구는 지난 한 해 동안 ‘신자에서 제자로!’라는 표어로 사목을 수행했습니다. 교회 성장과 신앙 성숙은 결국 모든 신자들이 제자로 살아갈 때 성취될 수 있다는 뜻에서 그리 하였습니다. 몇몇 교회에서는 그 취지를 살려 모든 교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교회의 비전을 세우기 위해 지혜를 모았고 마음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 제자화 운동은 우리 서울교구, 아니 대한성공회 전체에 파급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가 동참해야 하고 모든 교인들이 제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도 교구 표어를 작년과 같이 ‘신자에서 제자로!’로 정했습니다. 제자화 운동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제자화 운동은 ‘건강한 교회 만들기’로 구현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교세 성장이 정체되어 있고 미래 세대에 신앙 전수가 원활치 않기 때문입니다. 새 신자의 전도와 미래세대에 대한 신앙 전수는 우리가 당면한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몇몇 사람들의 특별한 사목 기술이나 능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모름지기 우리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체질로 개선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체질이 건강하게 개선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매우 체격이 크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허약하면 주변을 혼란케 합니다. 반면에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나 체격이 지나치게 외소하면 외적인 충격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좋은 체질을 배양한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나 외적으로 균형을 갖추는 일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핵심은 신앙으로 활력을 얻고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는 ‘내’ 안에 머물지 않고 주변에 시선을 돌려 이웃의 고통과 희망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자기주장에 머물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주님의 뜻을 구합니다. 교구가 지난 몇 년 동안 진통을 겪은 까닭은 남의 허물과 실수를 지적하고 정죄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올 한 해는 교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전체 교회에서 ‘건강한 교회 만들기’를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교회 문화와 기풍이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교회입니다. 외로운 이들, 영적인 보금자리를 찾는 이들에게 따듯한 둥지가 되어주는 교회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쉽게 공동체에서 소속감을 얻을 수 있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서로가 격려하여 모임에 충실하고 모임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모임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영적인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면, 따뜻한 영적인 교감을 나누면서도 추상같은 진리의 동반자를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함께 땀 흘리며 보람의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안에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문화와 기풍이 각자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제자로 거듭나도록 도울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충실한 제자를 양육합니다. 또한 충실한 제자가 건강한 교회를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를 보고 희망을 발견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제자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체질이 바뀌기 위해서는 먼저 변화가 요구됩니다. 각자의 태도 변화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부르시면서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떠나라!” 또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모세를 부르실 때, 이사야를 부르실 때, 예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머물던 곳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지녀온 삶의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암흑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속에 머물 때는 쉽게 버리던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올 한해 주제 성구는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리라!”(이사 41:10)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절망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느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침체와 안일의 둥지에서 벗어나 변화와 성장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서와 교회의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제자들은 한 결 같이 이 말씀을 믿고, 새로운 믿음의 길을 떠났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제자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주십니다. 아니,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풍파와 환란이 두려울 수 없습니다.
존경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 여러분!
저는 지난 여름에 서울교구를 더욱 건강한 교구로 만들기 위하여 성직자 인사를 ‘선교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드렸습니다. 비록 미흡하고 초보적이지만 실천해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모두 여섯 차례 성직자와 신자 대표자들과 간담회를 했고 거의 모든 성직자들과 개별면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구의회에서 다시 한 번 천명했습니다. 그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그리고 기필코 선교적 인사제도가 성공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협조를 다시 한 번 당부 드립니다. 아울러 새 신자 양육과 교회학교를 위한 지원, 그리고 영상 홍보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를 하려고 합니다. 언제든지 서로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올 8월이면 평신도 사역자 과정도 3기 졸업자들을 배출합니다. 신자 사역과 성직 사역이 조화를 이루어 좋은 결실을 맺기 바라며, 나아가서 모든 신자들의 달란트가 하느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교로 선출되고 승좌한 이래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러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되어 가고 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굳는 법입니다. 여러 주장들과 의견들이 일치되지 않아 진통을 겪었지만 모두가 하느님의 몸인 교회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제자화’와 ‘건강한 교회 만들기’에 마음과 지혜를 모아주십시오. 성령께서는 이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편에 서기를 바라기 보다는 우리가 주님의 편으로 다가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넓은 품으로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2019년 1월 1일 거룩한 예수 이름 축일에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구장 이경호 베드로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