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5. 부활3주일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이경호 베드로 주교님께서 설교하십니다.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3:12-20
- 시편 – 4
- 2독서 – 1요한 3:1-7
- 복음서 – 루가 24:36-48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송파교회 교우 여러분! 참으로 반갑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봄비로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듯 부활의 생명과 기운이 여러분의 삶과 송파교회 위에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송파교회는 1988년 봄에 강남교회에 출석하던 교우들을 중심으로 기도모임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1988년 5월 26일 잠실의 청도 프라자 빌딩 4층을 임대하여 성전으로 꾸미고, 10월 성당축복식을 가졌고, 1989년 다시 잠실본동의 한교빌딩을 임대하여 성당축복식을 가졌고, 개척한지 1년 만에 본교회로 승격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성장이었지요, 그리고 한 번 더 이전을 했다가 2013년 지금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설립 3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송파교회를 섬겨 오신 모든 신부님들과 신자들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한 때 이런 저런 일도 아픔도 어려움도 겪었지만 송파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가실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비전을 생각합니다. 애단 신부님과 교우 여러분들이 힘을 모으고 협력하여 멋진 주님의 교회를 일구어 가시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체험이 어떤 것인지를 묻게 합니다. 사실 제자들도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다가오시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 하시자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고, 그들을 사로잡았던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졌다”고 전합니다. 이런 설명들은 너무도 단순하여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복음서와 바울서신에서 부활에 관련된 부분을 읽으면 초기의 기록일수록 몸의 부활에 대한 기록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기록일수록 점점 몸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맨 처음 부활 소식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헛것을 보았거나, 유령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여인들이 전하는 부활의 이야기를 부질없는 헛소리로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보다 분명하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전하려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물으셨고,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고 전합니다.
유대교 문헌에서는 ‘천사는 먹지 않는다.’고 표현하는데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셨으니 진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몸의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와 같이 몸을 가지고 사셨던 역사적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도 살과 뼈를 가지신 분임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초대 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 특히 ‘가현설’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지주의에서 창조는 [연속적인 유출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출이 거듭됨에 따라 그것은 영(신)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영(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 바로 물질입니다. 결국 영은 선하지만 그 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은 악하다고 여겼습니다. 물질은 악하기 때문에 영적인 신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악한 육체에 거할 수 없으며, 그는 신으로부터 많은 유출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고, 기껏해야 천사 계급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확대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는 주장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은 육체의 껍데기 – 즉 가면을 쓰고 죽은 척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쇼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육체성을 부인하면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힘을 잃습니다.
이런 영지주의-가현론에 대항하기 위해서 초대교회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과 몸의 부활을 아주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려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학적인 관점이나 실증주의적인 관점에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을 믿는 것은 단순히 이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시고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사를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핵심 증언입니다. 부활사건은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시편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바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이야기는 세상의 그 어떤 힘이나 권력도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가둘 수 없다.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몸이 소생하는 기적적인 사건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나라의 질서와 가치를 따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노라는 고백이고 선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부인했고 배반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현장에서 모두 도망쳤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이 원했던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임당하는 분은 그들이 원했던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죽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꿈과 희망, 미래도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셨지만 제자들은 깊은 좌절과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불안과 두려움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좌절과 절망의 끝자락에서 제자들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가?
주님과의 관계는 이 죽음으로 끝이란 말인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을 보여 주셨던
그분의 가르침, 치유 그리고 그 사랑의 삶은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우리들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참 생명의 삶,
참 사랑의 삶,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은 없단 말인가?
제자들은 이런 물음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깊이 성찰하고, 그 십자가 죽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만이 누리는 은총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자아가 죽고 참 나가 다시 살아나는 구원의 은총이었습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었습니다.
이런 부활체험- 사랑체험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다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처럼 사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지요.
이 놀라운 체험은 주님이 당하신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를 직시할 때 그곳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상처를 보면서 자신의 배반과 상처,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상처와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함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과 은총은 흘러 왔습니다.
사실 외적인 조건이나 상황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로마 총독과 군대, 헤로데 왕, 대사제와 율법학자들과 같이 어둠의 세력들이 현존했고, 강력한 힘으로 위협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과 겁에 질려 떨던 비겁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열렸고,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부활체험- 사랑의 체험은 제자들로 하여금 저마다 홀로 살지 아니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삶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함께 찬송을 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일을 즐거워했습니다. 서로 빵과 떡을 나누면서 기뻐했고, 서로를 섬기는 삶으로 행복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제자들은 이렇게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물질을 함께 나누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랑의 친밀함은 한마디로 내가 너를 위해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친밀함은 너를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삶입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고, 점점 가난해지면서도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삶은 로마 제국이 추구했던 질서, 가치, 삶의 방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새로운 대안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이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를 이끌어 온 힘이고, 생명력입니다.
우리 성공회의 부족함은 바로 이런 친밀한 관계 – 거룩한 친교입니다. 대부분의 성공회 신자들은 선하고 예의도 바르고 매우 합리적인 분들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분들이 적당한 선에서 관계를 맺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아주 좋은 관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적당한 관계에서는 복음의 사건, 은총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부활의 공동체라면 서로의 약점이나 상처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마음을 열 때 우리의 친밀함은 더욱 깊어지고 그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공동체 안으로 흘러옵니다.
우리가 좀 더 깊은 영적인 나눔과 교제, 친교를 통해서 이 친밀함을 경험할 때 우리 교회는 부활의 공동체로서 활력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송파교회가 그런 교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설교 후에는 견진예식을 합니다. 견진예식은 무엇보다도 성령 안수이고, 기름으로 축성하는 예식입니다. 오늘 견진을 받는 분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들을 더욱 굳건하도록, 강하게 하시고, 쓸모 있게 만들며, 견딜 수 있는 힘을 구합니다. 그래서 견진을 받으시는 분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더욱 강건하게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성령의 은총 안에서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 견진은 성숙한 신앙인 제자로 살아가겠노라는 고백이고 선언입니다. 한마디로 신실한 신앙인-제자로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책임진다는 것인가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고 성장하려는 노력,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은 교회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 역할과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에 맡은 책임을 감당할 때 여러분의 믿음은 자라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이런 부활 체험을 하고 새로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송파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2018. 4.15. 부활 3주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이경호 베드로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