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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16. 사순 24일(화요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47:1-9, 12
  • 성시 – 시편 46:1-8
  • 복음서 – 요한 5:1-3, 5-16

지난 사순 4주일 복음 이야기에서 성경에 기록된 가장 큰 사랑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 요한 3:16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이라는 말속에는 당연히 ‘우리 자신’이 포함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헤매며 멸망으로 치닫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말씀’, ‘참 빛’이신 ‘외아들’을 이 세계 속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성육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육신하신 그 외아들을 통해 인류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참 빛’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이 어두운 세상 속으로 들어오시어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그 말씀, 참 빛이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은총’으로 멸망으로 치닫는 인류를 ‘새로 나게’ 하시어 부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분을 그리스도로, 외아들로,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고 ‘아버지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초대에 ‘응답한’ 이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거룩한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그 거룩한 초대, 그 사랑의 초대에 마음을 연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 속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께서는 ‘내가’ 찾기도 전에 오래전부터 ‘나’를 보고 계셨고, 내 모든 이야기를 알고 계셨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해’ 비참한 처지의 ‘나’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나’를 ‘성령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길을 잃고 어둠 속에 헤매는 ‘나’를 ‘성령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빛이 절실히 필요한 ‘나’, 영혼의 치유가 절실히 필요가 ‘나’를 ‘성령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특별히 ‘나’를 ‘성령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작정하신 구원의 시간이 꽉찬 어느 날, 희망 없이 살던 인생, 익숙한 절망 속에서 체념한 채 살아가는 ‘나’를 ‘성령을 통해’ 찾아오신 ‘참 빛’이 물으셨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그 말씀은 ‘희망’으로의 초대였습니다. ‘영원’으로의 초대였습니다. 내가 다시 ‘믿음’을 길어 올리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셨습니다. 찾아와 건네시는 그 말씀에 영혼이 병든 나, 절망에 익숙한 나, 체념에 익숙한 나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핑계를 대며 머뭇거렸습니다. ‘희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치유’는 불가능하다고, ‘영원한 생명’은 불가능하다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분, 참 빛이신 예수께서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게 필요한 모든 은총을 먼저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써 치유의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 내 영혼을 이미 치유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전혀 뜻밖의 은총, 뜻밖의 선물이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진실을 나중에야 ‘성령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영혼이 회복된 내 눈을 열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 빛’이신 분임을 ‘성령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이신 아버지께 이르는 ‘길’임을 ‘성령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신 ‘진리’이심을 ‘성령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성령을 통해’ 똑똑히 믿게 되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나라, 즉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가져오시고 시작하신 분이 예수임을 ‘성령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성령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

나와 여러분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진실은 오늘 복음 이야기에 담겨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이 진실에 대한 본보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소망 없이 멸망으로 치닫는 인류, 특히 우리 자신에게 먼저 찾아와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베짜타’(두 샘의 집, 개역성경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베데스다’라고 번역했습니다)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연못 가에 모여든 수많은 병자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종교지도자들까지 포함하여) 상태’를,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입니다(요한 1:10).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바로 행하지 못하는 ‘다리 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반응하지 않는 ‘마비된 사람’(중풍병자)입니다.

인류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인생길의 참 진리를 외면한 채 어둠 속에서 헤맵니다. 삶의 조화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돈, 이념, 권력, 명예, 성공) 치우쳐 살아갑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선’과 ‘정의’와 ‘진실’보다 ‘악’과 ‘불의’와 ‘거짓’을 더 좋아합니다. 유사 이래로 가장 찬란한 과학 문명을 이룩한 현세대라고 자랑합니다. 그 과학기술 덕택에 평균수명까지 연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세대는 손톱만큼도 ‘죽음’을 이 세상에서 없애지 못했습니다. 손톱만큼도 ‘욕심’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화성까지 탐사를 시작했다는 과학기술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룩해낸 과학기술 때문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갈수록 커지는 기후 대재앙으로 절망적인 아픔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여전히 참 빛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상징하는 그곳에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이제라도 인생길의 참 진리이신 분께 마음을 열면 인류에게는 전혀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온전해지는 살길이 열릴 것입니다. 가능성 없던 우리 자신이라는 세상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참 빛의 은총으로 살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수많은 병자 중에 ‘삼십 팔 년’이나 앓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삼십 팔 년’이라는 세월이 상징하는 바는 그만큼 ‘절망적인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는 거의 한평생을 병에 시달려온 사람입니다.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류’를 상징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사랑의 하느님께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상징하는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 참 빛은 ‘연민’으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를 ‘은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어떤 ‘믿음’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만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그의 처지가 절망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아니, 예수의 연민이, 예수의 사랑이 너무 컸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절망하는 인류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극진한 사랑, 극진한 연민! 그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예수께서는 단지 그를 불쌍히 여기셨고, 한 말씀으로, 은총으로, 그를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일로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를 치유하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는(인류에게는) 그들처럼 한가하게 안식일 규정이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베짜타’가 치유가 필요한 ‘세상’이고, 연못 가에 모인 ‘시각장애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마비된 사람’과 수많은 병자가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인류’라는 사실을 발견하셨다면 잘하셨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극진한 은총과 사랑’으로 찾아가 만나주시고 온전하게 하신 삼십 팔 년이나 된 그가 ‘우리 자신임’을 발견하셨다면 더 잘하셨습니다.

사순절, 자신을 ‘갱신’하는 여정 위에 있습니다. ‘자기’ 갱신이라는 말씀에 압박감이 몰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수고하고 애쓰는 ‘자기 갱신’보다 주님의 ‘극진한 사랑’과 ‘은총’이 먼저 베풀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온전해지기를 원하느냐?

우리는 단지 육체뿐 아니라 영혼이 온전해지기를 원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 인류를 온전함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우리를 의탁합니다. 아니, 주님께서 벌써 우리 안에 은총으로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읍니다. 죄의 삶을 버리고 온전하게 된 치유의 은총을 이어가도록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죄를 버림으로써 이미 받은 그 ‘극진한 사랑’과 ‘은총’을 완성하는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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