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8. 연중2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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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3:12-23
  • 시편 – 시편 99
  • 독서 – 1데살 1:1-10
  • 복음서 – 마태 22:15-22

연중 2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삶으로 모든 것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소유임을 드러내시오’입니다.

연중 21주일부터 우리는 1독서로 《출애굽기》를 낭독해 왔습니다. 오늘로 《출애굽기》 독서가 끝납니다. 다음 주일에는 《신명기》를 낭독하며 모세의 죽음을 듣습니다.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를 노예로 붙잡고 있는 탈출할 ‘이집트’를 발견하자고 초대했습니다. 자유인인 우리가 가야 할 ‘약속의 땅’을 찾자고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 ‘여정’ 위에 있고, 그 길을 잘 걷고 있는지 성찰하자고 초대했습니다. 말이 초대였지 실제로는 숙제였습니다. 그 숙제를 잘 해냈습니까? 이것을 발견하고 찾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흔히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정의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믿음이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삶의 태도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믿음의 사람’이라 말하는 이는 자신이 인생에서 찾고 발견한 그것을 ‘몸’으로 충실히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 <전례독서>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모세의 중보기도’와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현’(神顯, 테오파니, theophany)을 전합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나이산으로 올라와 머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려는 훈계와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주시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라고 ‘장로들’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습니다(출애 24:14).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의 부재’(不在), 즉 그 ‘기다림의 시간’을 ‘헛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출애 32:1-6). 모세를 상징하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출애굽의 주체를 ‘거룩하신 하느님’에서 모세로 대체하는 크나큰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의 위기에 처했습니다(출애 32:7-10). 그때 모세가 나서서 ‘첫 번째 중보기도’를 바쳤습니다(출애 32:11-13). ‘거룩하신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로 일어난 ‘구원행위’와 ‘맹세’를 ‘기억’(記憶)시켜 드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상기’(想起)시켜 드렸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행하신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명성’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스라엘)에게 주신 ‘은총의 맹세’(약속)를 ‘기억’시켜 드렸습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하느님 편’에서 중보기도를 바쳤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출애 32:14).

모세를 십계명이 새겨진 ‘두 증거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출애 32:15-20). 진지 가까이 내려 온 모세는 무리가 수송아지를 둘러싸고 춤추는 모습을 봅니다. 격분한 나머지 거룩하신 하느님께 받은 ‘증거판’을 산 밑에 내던져 깨뜨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무효화’ 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계약이 무효화 되었기에 그 ‘증거판’은 단지 돌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깨뜨려버리는 일도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한 모세를 벌하지 않으셨고 나중에 새로운 증거판을 다시 주셨습니다(출애 34:4,29). ‘아론’은 그 일로 책망을 들었고, 수송아지를 둘러싸고 축제를 벌이던 이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출애 32:21-29).

이튿날 모세는 ‘두 번째 중보기도’를 바칩니다(출애 32:30-35).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용서를 간청합니다. 첫 번째 중보기도가 ‘거룩하신 하느님 편’에서 바친 기도였다면, 두 번째 중보기도는 ‘죄악을 저지른 이스라엘 편’에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심지어 용서해 주지 않으시려거든 주님이 기록하신 ‘책’(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까지 청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달라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거부하십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직접 벌하실 것입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재차 확인시켜 주십니다. 목숨을 건 그의 ‘중보기도’ 때문에라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만은 이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출애 33:1).

그러나 ‘거룩하신 하느님’과 범죄한 백성 사이의 ‘친밀한 언약 관계’는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으로의 ‘출발’을 명하셨으나 그들과 친히 동행하시는 일은 거절하셨습니다(출애 33:1-3). 거룩하신[‘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코데쉬’(קֹדֶשׁ)는 ‘떨어져 있다’, ‘구별되어 있다’라는 뜻의 ‘카도쉬’(קָדוֹשׁ)에서 유래]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을 거두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은총을 거두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천사’를 대신 보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고집이 센’(고삐를 잡히지 않으려고 목을 뻣뻣하게 하여 저항하는 소나 말처럼 구는) 백성이라 하느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다가는 도중에 그들을 진노로 멸종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출애 33:3,5).

이것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죄를 용납할 수 없는 분이며, 죄인은 ‘거룩하신 하느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모세만은 예외입니다(출애 33:7-11).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친구처럼, 친밀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그와 동행하실 것입니다(출애 33:11). 이것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더 깊이 다루어질 것입니다.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더는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을 것이고, 친히 동행하지도 않으실 것이라는 가슴 아픈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통곡’합니다(출애 33:4). ‘천사’로 대신한다는 말에 자신들이 누려온 특권이 사라졌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단장도 안 하면서 ‘슬픔’을 표현합니다. 일종의 ‘회개’입니다. 죄와 복을 동시에 원하는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했음을 증명하려면 모든 패물을 몸에서 떼어 버려야 합니다(출애 33:5). 그것을 보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의 표시’로 우상숭배를 떠올리게 하는 흔적인 패물을 몸에서 제거합니다(출애 33:6). ‘호렙산’을 떠난 다음 두 번 다시 붙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동을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더는 계시지 않는 처량한 신세가 느껴집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천막)을 가지고 진지 밖으로 멀리 나갑니다. 거기서 장막을 쳤습니다. 이름하여 ‘만남의 장막’입니다(출애 33:7-11). 누구를 만나는 장막입니까? 거룩하신 하느님입니다. 그 장막으로 모세를 찾아오시고 ‘친구’처럼 친밀히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는 않았지만, 모세를 통해서 지시를 받도록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제 모세의 ‘세 번째 중보기도’가 시작됩니다(출애 33:12-13). 그는 자신과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누구’를 보내신다는 것인지 확실히 알기를 원했습니다(출애 33:2). 그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이미 베푸신 은혜’를 온유하게 하지만 담대하고도 집요하게 상기시켜 드리며 기도로 나아갑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더 잘 알기를 원했습니다(출애 33:13). 그는 ‘만남의 장막’에서 하느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어 그들을 용서하시고 친히 동행해 주실 것을 담대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친히 ‘너’를 데리고 가서 ‘너’를 편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출애 33:14).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얼굴(관심과 사랑)이 그와 함께 가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실 것을 요청”했습니다(출애 33:15). 자신만의 은혜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만 친구처럼 개인적으로 동행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공동체)를 위한 ‘임마누엘’이 돼 달라는 온유한 기도입니다. 그는 자신보다 ‘민족 공동체’를 위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보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백성 전체와 친밀히 동행’해 주시는 삶을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정말이지 모세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은 ‘하느님의 동행하심’이 없이는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을 기도합니까? 예수님도 ‘주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주실 ‘복’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모합니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합니까? 하느님의 손에 들린 선물꾸러미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말입니다.

우리도 모세의 이 같은 ‘믿음’과 ‘깨달음’을 소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가장 큰 복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구별된 삶’(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도 다른 무엇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날마다 동행해 주심에 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어도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이 가장 가치 있습니다.

마침내 모세의 끈질기고도 담대한 기도가 거룩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느님의 동행하심만이 그들을 세상 모든 민족과 구별시킨다(출애 33:16)는 그의 온유한 기도가 딱딱하게 얼었던 거룩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들과의 언약 관계도 다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되어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너야말로 과연 내 마음에 드는 자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지금 네가 청한 것을 다 들어 주리라. – 출애 33:17

저는 오늘 성찬례를 봉헌하는 우리의 마음에 이 ‘한 말씀’이 들려오기를 축복합니다. 모세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울림을 일으키는 기도를 바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자,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는 음성은 모세의 기도에 감동하신 거룩하신 하느님의 사랑 고백입니다. “모세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이고, 나의 소유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만 모세의 ‘온유한 마음’에 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거룩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모세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인 우리 자신도 알아차리라고 채택된 독서임을 깨우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덕택에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동행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는(돌보아주시는) 자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잊을 수 없는 이름,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복된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청을 받아주시자 마치 ‘도장이라도 찍겠다’라는 듯 이렇게 간청합니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 출애 33:18

그는 하느님을 ‘알현’(謁見)하기를 원합니다. ‘존엄한 모습’은 히브리어 ‘카보드’(כָּבוֹד)를 번역한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영광’으로 번역합니다. 이 말은 ‘무겁다’라는 뜻의 ‘카바드’(כָּבַד)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무게’(weight)라는 뜻을 갖습니다. 요즘에는 가볍고 얇은 제품일수록 ‘고가’(高價)이지만, 고대에는 대체로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을 좋다고 여겼습니다. 가축이나 은과 금처럼 ‘재물’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하는데(창세 13:2; 31:1), 그 사람 집은 그런 것으로 채워져 무겁게 된 셈입니다.

여기서 발전하여 ‘카보드’는 ‘가치 있음’이라는 뜻으로 확장됩니다. 사람들은 ‘재물’ 말고 또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까? ‘권력’(힘), ‘명예’(지위, 고귀함), ‘권위’(위엄, 존엄) 등입니다(1열왕 3:13). 이것을 가진 사람을 ‘귀족’이라 부릅니다(이사 5:13). 따라서 ‘카보드’는 ‘재물’, ‘가치’, ‘권력’, ‘명예’, ‘권위’, ‘귀족’, ‘영화’(榮華), ‘아름다움’, ‘풍요’라는 많은 뜻을 갖습니다.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힘’을 가진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무엇’이 ‘카보드’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거룩하신 하느님께 사용될 때는 주로 하느님의 ‘임재’나 ‘성품’을 사람이 볼 수 있게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수반합니다. 가령, “야훼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었다”처럼 말입니다(출애 16:10). 특히 그 거룩하신 임재는 ‘불’처럼 인간이 다가가 만지거나 눈을 뜨고 대면할 수 없을 정도의 ‘반짝이는 밝은 빛’을 수반합니다(출애 24:17). 그래서 ‘카보드’(כָּבוֹד)는 ‘빛나는 광채’(찬란함, 화려함), ‘영광’(榮光)이라는 뜻도 갖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불멸의 생명’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말합니다(요한 1:14).

이렇게 모세는 ‘존엄한 모습’(영광)을 ‘알현’(謁見)하는 ‘신현’(神顯, 테오파니, theophany)을 요구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고픈 모세의 ‘열망’(절정경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마지막 경계’(거룩) 너머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기를 원했습니다. 사랑받는 자의 당당함입니다.

광야의 불타는 떨기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처음 모세에게 발현하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신발’을 벗고 지구의 피부인 ‘대지’와 맨살을 접촉함으로써 당신과 재결합(연결)하자고 초대하신 바 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습니다(출애 3:6).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닙니다. 이미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본 적도 있습니다(출애 16:10; 24:16-17). 하느님의 사랑 고백과 기도의 응답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도달한 삶의 경지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 깊은 차원에서, 궁극적으로 주님을 ‘알고자’(체험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성찰해 봅니다. 지금껏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돌아보면 많은 신앙 체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모세처럼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롯이 ‘하느님 체험’을 원합니까? 모세에게는 누구보다도 많은 하느님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더 깊이(궁극적으로) ‘알기를’(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신앙의 신비’란 그런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체험하면 할수록 더 깊이 ‘알기를’(체험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을 더욱 목말라’합니다. 정말이지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완전한 체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주마저도 품고 계신 무한하신 분이고 우리는 티끌만도 못한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느님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더 깊은 ‘하느님 체험’을 갈망하기보다 재물을, 권력을, 명예를, 성공을, 성취를, 개인적인 축복을 갈망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신앙은 영원하지도 못할 그런 부차적인 일에 붙들린 삶이 아닙니다. 신앙은 ‘궁극적’이고 ‘본질적’이며, ‘영원한 세계’에 관한 일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그런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열망’을 기뻐하셨습니다.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실 것인지 약속하십니다(출애 33:19-23). 우선,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든 선한 모습’(영광)을 체험할 것입니다(출애 33:19a). ‘선한 모습’, 이것이 모세가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현’(神顯, 테오파니, theophany)앞에서 첫 번째로 체험할 일입니다.

‘선한’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투브’(טוּב)입니다. ‘가장(참다운) 선하고, 좋고, 아름답고, 옳고, 기쁜(행복한) 상태’를 뜻하는 ‘토브’(טוֹב)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모든 선하신 모습’(영광)을 체험한 모세 역시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고(최상)의 상태’에 들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결핍되거나 모자람이 전혀 없이 가장 기뻐하고, 만족하며, 좋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느님은 ‘모세와 함께하신다’라는 ‘표’로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실 것입니다(출애 33:19b). 이름을 선포하는 일이 어째서 중요할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름’을 갖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를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존재 자체와 동일시’됩니다. 또한 어떤 대상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라는 것은 ‘지배권’을 가질 뿐 아니라 이름에 맞는 역할을 그 대상에게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도 ‘이름’은 존재 자체의 ‘본질’과 ‘특성’을 드러낸다고 믿었습니다. 한 존재를 그런 본질과 특성을 갖도록 만들어내는 어떤 신비한 힘이 ‘이름’ 속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이름을 알면’ 그 존재의 본질과 특성을 알 수 있기에 지배하거나 조종할 힘을 갖는다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이름은 ‘비밀’로 감추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신들의 ‘이름’은 그 신성의 본질과 특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거룩하신 하느님은 모세에게 ‘야훼’(주님)라는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자신을 열어젖히신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모세를 ‘친구’처럼 친밀하게 여겼고, ‘신뢰했다’라는 뜻입니다. 모세와 평화 속에 있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이제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든 ‘선하심’을 체험할 것이고, 하느님의 ‘이름’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누릴 그 모든 은총은 자신의 성품이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사랑’(긍휼) 때문입니다(출애 33:19c). 그렇습니다.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친구처럼, ‘선하심’과 ‘이름’과 ‘사랑’도 체험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감히 ‘신의 영역’을 사모한 모세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존엄하신 모습’(영광)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완전히 선하시고’, ‘완전히 사랑’이신 분입니다.

사실, <성경>에 계시 된 거룩하신 하느님의 다른 신성(神性)들, 가령 ‘공의’와 ‘진노’조차도 이 신성의 다른 측면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전적으로 선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자신 안에 품고 계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바울로처럼, 사도 17:24-28) 이 ‘진실’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거룩하신 하느님의 본질과 특성을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 출애 33:20

아무리 모세의 열망이 강렬하다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느님은 ‘얼굴’(전면)만은 보여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판관 6:22-23; 이사 6:5). 마치 햇빛 앞에서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얼굴’은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하느님의 ‘완전한 거룩’(충만), 인간의 눈이 감당할 수 없는 ‘완전한 영광’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피조물인 그가 견딜 수 있고, 감당해 낼 수 있는 만큼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현’(神顯, 테오파니, theophany)이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그것도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서만 말입니다.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 – 출애 33:23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열망에 응답하시기 위해 세밀히 준비하십니다(출애 33:21-23a). 모세는 다른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특별히 마련하신 ‘바위’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존엄하신 모습’(神顯, 테오파니, theophany)이 지나갈 때,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바위굴’(바위틈)에 집어넣고 ‘손바닥’으로 가려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모세는 눈사람처럼 녹지 않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서 제한적으로나마 하느님의 ‘신현’(神顯, 테오파니, theophany)을 뵈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보호 속에서 ‘모세의 열망’(절정경험)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목숨을 걸고 공동체를 위해 간구하는 모세를 향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모세의 중보기도’와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현’(神顯) 이야기를 듣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기도의 사람 모세처럼 거룩하신 하느님 체험에 몰두하라는 뜻입니까? 교회 전통은 모세처럼 특별한 ‘절정경험’을 체험한 기도의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전해줍니다. 오늘날도 하느님은 당신과 하나가 되려는 이들이 바치는 ‘거룩한 열망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절정경험’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이미 교훈했듯이 어떤 하느님 체험도 궁극적이지 않고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고린 13:12). 다시 말해 인간의 어떤 절정체험도 ‘희미’하고, ‘불완전’합니다. 심지어 기도의 사람 모세마저도 자신이 원했던 만큼이 아니라 단지 거룩하신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만큼만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억할 진실(이유)은 이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현’(神顯)의 요구마저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민족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민족 공동체’를 향한 그 같은 ‘사랑’에 감동하셨습니다. 민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산제물’로 바치는 그 태도에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신현(神顯) 이야기에 담긴 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모세처럼 단지 몇 사람만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특별하신 보호 속에서 개인적으로 존엄하신 하느님을 만났다고 들려줍니다. 그 체험은 그들에게 경이로웠습니다. 특히 엘리야의 경우는 모세와 같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열왕상 19:8-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말씀을 몇 사람에게 제한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무엇을 증언합니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외적 표현)이시기 때문입니다(골로 1:15-1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셨기 때문입니다(골로 1:18).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골로 2:9). 예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 요한 14:6-7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 요한 14:9

이처럼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며(요한 10:30), 예수님을 본 사람은 영광스러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성육신 하느님(필립 2:7),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본 사람들(특히 사도들)이 죽었습니까? 분명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은 없다”(출애 33:20)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참으로 죽었습니다. 누가 죽었단 말입니까? 그들의 ‘옛자아’(이기적인 자아, 옛사람)말입니다.

세상에 내리신 ‘참 빛’, 그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루가 2: 28-32) 그들의 ‘어두운 자아’가 죽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외적 표현)이신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 미움에 사로잡힌 그들의 ‘옛자아’가 죽었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드신 ‘예수님의 손길’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았을 때 그들의 ‘이기적인 자아’가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용서’를 보았을 때 죄악에 물든 그들의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은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가가는 이들은 자기 안의 ‘어둠’을 보고 모두 변화됩니다. 우리를 위해 수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고 있는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큰 찔림’을 받습니다(이사 53:5). 고난의 십자가가 우리 가슴에 스며들어올 때 미움과 탐욕과 분노의 자아가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한량없는 영광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뵙기를 사모하는 주님의 ‘존엄하신 모습’(영광)은 십자가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요한 20:29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이 ‘기쁨의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그리스도’로 믿고 따릅니다. 수난의 표시인 ‘십자가’를 보는 순간, 우리를 향한 그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얼굴’이 마음에 흘러들어와 감사의 눈물이 흐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솟아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있었던 모세의 영광스러운 체험마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모세’에게가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요한 1:14). ‘구약’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광(존엄하신 모습)을 시나이산, 성막,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타내셨지만, ‘신약’에서는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성령’을 통해 주님의 영광스러운 ‘계시’ 안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2고린 3:17-18).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주님)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에 ‘완전’에 이르게 됩니다(골로 2:10). 주님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어 예수 그리스도와 점점 더 닮아가도록 날마다 빚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입니다(골로 1:18; 에페 1:2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에페 1:23).

따라서 하느님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모세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완전한 구원’(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의 회복)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의 행복을 선언하신 하느님, 교회의 머리이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다음의 말씀을 잘 새겨두십시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 요한 1:14

어느 때보다도 모세처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모세처럼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며, 민족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기를 축복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하신 그 은총, 즉 우리 안의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잘 새겨두십시오. 우리도 사랑의 삶을 실천함으로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여주는 복 있는 인생이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널리 전하는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99편>은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 ‘거룩하신 하느님의 임재’를 찬미합니다. 앞서 나오는 시편들(47, 93, 96-98편)처럼, 우주의 왕이신 ‘하느님의 왕권’을 찬미하는 ‘신정시’(神政詩, theocracy)입니다. 세 번씩이나 왕이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되풀이하여 찬미합니다. 우리가 감사성찬례에서 바치는 ‘쌍투스’(Sanctus, 거룩하시다, 삼성경)가 여기서 유래합니다(이사 6:3; 묵시 4:8). 하느님의 여러 속성 중 ‘거룩’을 강조한 목적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우리 역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시인은 ‘하느님의 왕권’(통치)를 선언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왕권(통치) 앞에서 뭇 민족은 떨고, 온 땅은 흔들립니다(1절). 왜냐하면 왕이신 하느님은 ‘거룩하시기’(인간뿐 아니라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되신 분) 때문입니다(3절). 그 ‘거룩하신 왕’ 앞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땅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만백성은 주님의 높고 두려운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온 땅에 계시지만 특별히 예루살렘 성 ‘시온’에 임재하여 계십니다(2절).

그러나 ‘능력의 왕’이신 거룩하신 하느님은 단순히 ‘거기’[지성소 ‘거룹’(cherubim, 1절)들의 날개 아래 마련된 계약궤, 열왕상 8:6-7]에 임재하여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그 통치는 독단적이지 않습니다(4절). ‘정의’와 ‘공평’은 단지 구호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과 당신의 백성들 안에서 ‘정의’를 집행하셨습니다(4절).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모든 불의한 제도를 무너뜨리시고 ‘올바른 법’을 세워주셨습니다(4절). 앞으로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4절).

그 ‘거룩하신 통치’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5절). 하느님을 높이고 겸손히 하느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발판’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1절에서 언급한 ‘계약궤’(역대상 28:2)를 말합니다. 또 예루살렘(애가 2:1)을 말하며, 땅 전체를 말합니다(이사 66:1; 마태 5:35; 사도 7:49). 그러고 보면 ‘거룩하신 하느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어느 곳이나 하느님의 나라(하느님의 통치)입니다. 따라서 예배야말로 거룩하신 하느님의 주권을 높이고(복종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임재(臨在)에 가장 적절하게 반응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그 예배자의 대표로 ‘모세’, ‘아론’, ‘사무엘’을 꼽습니다(6절). 그들은 거룩하신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들’(사제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자비하신 분’임을 ‘계시’하셨습니다(6절). 오늘 1독서 《출애굽기》에서 들은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통해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7절).

시인은 찾는 사람들에게 응답해주신 거룩하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8절).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벌하셨으면서도 그들이 기도하면 죄를 용서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8절).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거룩하신 하느님은 ‘징벌’과 ‘용서’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이미 멸망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죄지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예배’해야 합니다(9절).

그렇습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왕이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존재와 행동 전체의 본질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능력은 ‘거룩한 능력’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며, 하느님의 지혜는 ‘거룩한 지혜’이고, 하느님의 자비는 ‘거룩한 자비’입니다. 무엇에든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함께 합니다.

그러면, 이 시편이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 《출애굽기》의 응답으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되새겨주기 위해서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에서 보았듯이 고대에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 성막, 예루살렘 성전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을 왕으로 통치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당신이 거하시는 집으로 택하셨습니다(1고린 3:9-17).

그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모든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왕 앞에 다가가는 신하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당신과 관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아버지로 우리가 당신과 관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께서도 주의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왕이신 하느님”이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원문대로 하자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찬미하며 우리 역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독서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사도 바울로가 최초로 쓴 서신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데살로니카교회’는 필립비교회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워졌습니다(사도 17:1-4). 큰 상업 도시였기에 여러 철학과 종교가 번성했습니다. 바울로는 그곳에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시기와 공격을 받았습니다(사도 17:5-9). 교우들의 도움으로 박해를 피해 급히 ‘베레아’로 피신했다가(사도 17:10) ‘아테네’를 거쳐 ‘고린토’에 이르렀습니다(사도 17:16-18:1).

바울로의 2차 선교여행

‘고린토’에 머물던 바울로는 자신이 복음을 전파해 만들어낸 그 작은 공동체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자녀’를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는 어머니, 아버지의 심정이었습니다(1데살 2:7,11-12a). 자신의 수고가 허사가 될까 봐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1데살 3:5). 사실, 그는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그 작은 공동체를 방문하려 했지만, 사탄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1데살 2:17-18). 대신 초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상황을 알기 위해 ‘디모테오’와 ‘실라’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1데살 3:1-5; 사도 17:14-15).

바울로는 그들을 ‘고린토’에서 다시 만났습니다(사도 18:5). 그들로부터 그 작은 공동체가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1데살 1:2-10; 2:13; 3:6-10). 그는 그때의 심정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정말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 – 1데살 3:8

이렇게 자신이 느끼는 ‘기쁨’을 전달하고(1데살 2:19-20), 그 작은 공동체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격려하기 위하여 서신을 ‘고린토’에서 기록했습니다. 특히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한 언급이 많기에 ‘재림의 서신’이라는 별칭도 있습니다. 심지어 각 장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언급으로 끝날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바울로는 그 작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성적인 문제)을 개선하도록 답변하면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1데살 4:3-8).

오늘 배정된 단락은 교우들을 향한 인사와 감사(1-4절), ‘복음’이 일으킨 ‘삶의 변화’와 교회인 그들 삶이 세상에 끼친 ‘영향력’(5-10절)입니다. 바울로는 복음이 일으킨 변화와 영향력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살아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 1데살 1:9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일어난 회심과 행동의 변화에 대해 놀라워했습니다. 사실, 복음을 통해 변화된 한 사람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를 알리는 최고의 선교사이자,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개종자를 얻지 못하고 쇠락하고 있는 현재의 교회들을 볼 때 사제로서 몹시 부끄럽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보고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1데살 1:10). 이것이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구별되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서 ‘주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이라고 여길까요? 우리는 매 순간을 구원하러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우리는 거룩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산다면 지금 여기 나의 태도는 어때야 합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다울 수 있기를 기도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세상 모든 것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돌려 드려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고대부터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과는 달리 ‘유일신’(일신교)이라는 독특한 신앙문화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페르시아제국, 그리스제국 시절뿐 아니라 로마제국 당시도 이스라엘은 이 신앙을 이유로 타문화로의 동화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제국은 이 골치 아픈 지역을 ‘분할 통치’하는 교묘한 정책을 폈습니다. 예루살렘이 위치한 유대 땅은 로마의 ‘속주’(屬州)로 삼아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다스렸고, 그 외의 지역들에는 ‘분봉왕’(分封王, client king, 꼭두각시)을 세워 다스렸습니다. 비록 식민지였지만 민중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던 5개의 당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헤로데당, 혁명당, 에쎄네파입니다. 《마태오복음》 22장에는 바리사이파, 헤로데당, 사두가이파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 속 어딘가에 희미하게라도 ‘혁명당’도 등장합니다. 복음 이야기에서 그들은 당시로서는 ‘곤혹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을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로 자처했습니다(1열왕 2:35). 특히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가문(제2경전 마카베오 참고)이 ‘시리아’의 식민통치에 맞서 유대 독립을 쟁취하자 정치 전면에 뛰어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을 쥐고서 세력을 키웠던 이들로 제사장 조직이 정치화된 당파입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성경으로 받아들였고, ‘예언서’와 ‘성문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모세오경은 여기를 참고하세요). 오경에 기록되지 않은 율법은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후세계와 영적 존재도 부정했고(마태 22:23-33), 현실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거부했습니다. 종교적 실세였기에 유대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헤로데 왕권과는 거리를 지켰고, 로마제국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기득권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힘을 잃고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리사이파’도 사두가이파가 정치 전면에 나서던 기원전 2세기 때 등장합니다. 그들은 헬레니즘화의 물결을 타파하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민(選民)답게 성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시작된 당파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는 관점은 사두가이파와 달랐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문서와 구전으로 양분되어 전해진다며 사두가이파와 맞섰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율법준수를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가르침을 거의 문자적으로 지키는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엄격한 율법준수와 함께 중산층을 포섭했기에 유대교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율법준수의 방해자로 비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공공연히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마태 21:31). 특히 바리사이파는 유대민족이 로마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反)로마’ 성향의 당파입니다.

‘헤로데 당’은 헤로데 왕조를 중심으로 팔레스틴 전역의 지배권을 꿈꾸던 당파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들은 헤로데 대왕(기원전 37년 ~ 기원후 4년)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주전 4년~ 주후 39년)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처형했던 헤로데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마르6:14-29). 그는 로마의 하수인이자 허수아비 ‘왕’으로(사실은 영주)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를 다스렸습니다. 황제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아 통치했기 때문에 ‘소요’로 로마제국이 개입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무척 애썼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정치적으로 ‘친(親)로마’ 정책을 펴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던 당파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이 야합(野合)하여 벌이는 교묘한 ‘술책’입니다. 종교와 정치가 만든 이상한 동료애입니다. 복음서에는 현실 정치나 종교적 입장을 두고 우호적이지 않던 그들이 두 번 ‘야합’(野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공동 목적에서였습니다. 한번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준 후이고(마르 3:1-6), 다른 한 번은 오늘 복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있기 불과 사흘 전, 그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시 한 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찾아낸 술책은 ‘세금’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생활비인 세금은 국정 운영의 근간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세’와 ‘십일조’ 같은 종교적 의무의 세금을 예루살렘 성전에 냈습니다. 또 로마제국의 속주(屬州)였기에 속주세와 기타 직접세(토지세, 인두세, 소득세)를 냈고, 관세, 통행료, 판매세와 같은 여러 종류의 간접세도 냈습니다. 종교세를 제외한 세금은 로마 관리들이 직접 거두어들였는데, 세리는 그 말단에 속합니다. 밥벌이하는 유대 성인 한 명이 내야 하는 세금을 합치면 수입의 약 30%에 육박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거운 세금은 반란의 불씨가 되기 쉬운 법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세금’은 ‘악정’(惡政)의 주요 근거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위민’(爲民), 또는 ‘여민’(如民)한다는 정치지도자는 세금 때문에 저항이 생기지 않도록 애를 씁니다. 신약학자들은 사도행전에도 ‘세금’(인두세) 걷는 것을 저항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사도 5:37). 소위, ‘혁명당’의 뿌리가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도 그 후예였던 ‘시몬’이 있었습니다(마르 3:18).

혁명당(열혈당: 피가 뜨겁다는 뜻)은 이스라엘이 선민(選民)이기에 오직 유대인만이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 당파입니다. 한마디로 ‘민족주의자들’입니다. 로마와 가까이 지내는 유대인을 민족의 적으로 경멸했고,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그 경멸의 대상에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로마제국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을 임명하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 자행되는 비리는 로마제국을 향한 원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제사장들은 ‘성전세’와 ‘십일조’라는 ‘종교세’를 징수하고, 못내는 이들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신약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하던 민중들이 땅을 빼앗긴 민중들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악정(惡政)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당연히 ‘혁명당’을 지지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혁명당원을 체포하면 그 저항의지를 말살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지실 때, 양옆에 달린 이들도 그냥 강도가 아니라(십자가는 당시 국사범 처형도구였기에) 혁명당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하는 신약학자들도 있습니다. 또 기원후 39년, 자신을 신으로 자청한 ‘칼리굴라’ 황제는 제국 전역의 성전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게 했습니다. 유대인은 황제를 우상화하는 종교정책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습니다. 게다가 이런 종교적인 이유 말고도 ‘무거운 세금’ 문제가 유대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직할지였던 유대 땅의 장관인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로마제국에 정복당한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으로 수입의 10%) 대신 예루살렘 성전 창고에서 17달란트의 금화를 몰수합니다. 이 일에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경 진압한 것이 ‘혁명당’이 주도한 ‘유대 독립전쟁’(기원후 66년~73년)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혁명당원은 ‘성전세’로 민중들을 수탈한 대제사장들을 집단살해하고, 성전세 채무 문서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제사장들의 착취와 그 배후인 로마제국에 대한 분노를 그런 식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독립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지난주 들었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 파괴’(기원후 70년)입니다. 그 때 파괴되고 남아있는 서쪽 벽을 흔히 ‘통곡의 벽’이라 부릅니다. 유대인이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디아스포라’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에 대한 다른 당파들의 견해는 어땠을까요? 헤로데 당과 사두가이파는 친(親)로마였기에 세금 징수를 찬성했습니다. 반면에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금 징수를 찬성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공공연히 ‘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인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심도 상하고, 하느님이 주권자시라는 신앙에도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세금을 내지 않았느냐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기쁜 일은 아니었지만, 주권을 잃은 ‘속주민’(屬州民)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무거운 세금도 고역스러웠지만, 세금을 낼 때 사용하는 특정 ‘은화’, 즉 ‘데나리온’도 문제였습니다.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였던 ‘데나리온’은 특별한 방법으로 주조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내보인 데나리온은 아마도 당시 로마의 2대 카이사르(황제의 호칭)인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37)의 은화였을 것입니다.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옆얼굴과 함께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장엄한 아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황제를 신격화한 문구입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로마 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선물 받은 칭호로 신성한 사람, 존엄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뒷면에는 ‘평화의 화신’이라는 의미로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의 좌상과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즉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로마 관리가 걷는 직접세 중에서도 ‘인두세’는 이 ‘데나리온’으로만 내야 했습니다. 인두세는 우리가 1년에 한 번씩 내는 ‘주민세’에 해당합니다. 어린이나 노인만 빼고 12살에서 65살까지의 주민이면 누구나 내야 했습니다. 로마는 이를 부과하기 위해 14년마다 한 번씩 정규적으로 ‘인구조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인두세는 전액 로마 황실 금고로 들어가는 재원이었습니다.

세금도 내기 싫지만, 이 은화를 사용하여 인두세를 내거나 일상에서 통용하는 일은 유대인에게는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십계명 위반’입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신성한 존재’라는 칭송의 문구를 새겨넣음으로써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는 첫 번째 계명을 위반한 동전이기 때문입니다(유일신 신성모독). 또 ‘거짓 신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기에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을 위반한 동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동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죄에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는 혁명당처럼 극단적인 저항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끔찍한 동전이었지만, ‘속주민’이 감당해야 하는 울분이었고, 당시 권력의 상징인 동전이었습니다.

세금(인두세)을 ‘핫 이슈’로 채택한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은 다시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다가왔습니다.

선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 마태 22:16b-17

참 천연덕스럽게 말도 잘합니다. 아첨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경계를 풀게 할 목적이지만 악의에 찬 말입니다. 그 논쟁의 장에 ‘군중들’(민중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역시 로마를 몹시 싫어했고, 세금 내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런 동전으로 환전해 세금을 내라는 것 때문에 군중들은 자주 소요를 일으켜 자신들의 혐오를 드러내곤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 입에서 세금 내는 일을 승인하는 대답이 나올 때는 가만 있지 않을 참이었습니다.

더욱이 군중들이 모여드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또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결국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로마인들입니다. 지난 정권들에서 경찰지도부가 보였던 태도처럼, 그들은 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군중들은 모였다 하면 소요를 일으키기 쉬웠고, 그런 경우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유대인 최고 명절인 ‘과월절 축제’ 기간을 앞두고, 몰려든 순례 객들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과월절 축제 기간은 로마를 대항하여, 특히 세금 문제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일 년 중 가장 유력한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각 당파와 백성들 사이에서는 세금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세금은 어떤 추상적인 논쟁이 아니라 올가미를 씌울 수 있는 대단히 완벽하고 교묘한 ‘올가미’였던 셈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라고 하면,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밀고할 것이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몰아 ‘국사범’(정치범)으로 체포할 것입니다.

반대로 “세금을 내라”라고 하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숭배를 인정했다며 거짓 교사라 비난할 것입니다. 또 군중들 속에 끼어 있는 ‘혁명당원들’은 예수님을 민족의 배반자라며 암살을 감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막힌 함정을 팠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악어논법’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집트의 전설에서 비롯됩니다. 옛날 이집트의 한 어머니가 나일강에 목욕을 갔다가 한눈을 파는 사이 아이를 악어에게 빼앗겼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악어에게 아이를 돌려달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악어는 자신이 아이를 돌려줄지, 돌려주지 않을지 맞추면 돌려주겠다고 조건을 답니다. 난처하고 억지스런 물음입니다. 어머니가 돌려줄 것이라 말하면, 악어는 틀렸다면서 잡아먹을 것입니다.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 말하면, 돌려주려 했는데 답이 틀렸다면서 잡아먹을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아이는 잡아먹히는 셈입니다. 뭐라고 답을 하던 악어에게 유리한, 즉 아이를 잡아먹기 위한 속임수입니다. 결국 악어는 아이를 삼키며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악어논법을 알아차리신 예수님은 지혜를 발휘해서 그 올가미로부터 빠져나오십니다. ‘동전’(우상숭배)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동전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건넵니다. ‘위선자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이라 자부했지만, 그들은 동전을 갖고 다녔다는 뜻입니다. 십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들의 가르침대로라면 ‘데나리온’은 하느님을 순수하게 경배하는 사람이라면 갖고 다닐 수 없는 동전입니다. 동시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다른 동전도 아니고 ‘데나리온’을 가져왔다는 것은 이 세금 논쟁이 ‘인두세’라는 점을 알려주는 힌트입니다. 그들은 이미 인두세를 낼 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질문할 필요도 없던 질문을 던진 셈입니다. 간사하고 악독합니다.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 마태 22:20

동전을 건네받으신 예수님은 물음으로써 물음에 대항합니다. 이제는 공이 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허공에서 빛나는 은화를 보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 마태 22:21

이에 예수님은 똑똑히 대답하십니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 마태 22:21b

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들에게 날리신 ‘회심의 한 방’, 즉 ‘카운터 펀치’입니다.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이고, 제한적이며, 엄밀한 대답입니다. 당시에 ‘카이사르’(황제를 가리키는 칭호)는 로마제국의 주인입니다. 그 주인이라는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형상)을 새겨서 사용하도록 명령한 돈이 ‘데나리온’입니다. 오로지 황제에게 속한 황제만의 전유물입니다. 따라서 황제에게 돌려주는 일이 당연합니다. 한마디로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황제의 것입니다.

더욱이 제국 안의 백성들이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카이사르를 제국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황제의 종’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데나리온에 새겨진 그 문구는 카이사르와 또 자신을 카이사르의 종이라고 믿는 사람 외에는 아무에게도 해당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그 글귀는 자신을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라고 믿고 경배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동의 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들은 이미 그 ‘데나리온’을 지니고 사용했기에 자신들이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공공연히 시인한 셈입니다. 그렇기에 카이사르가 세금(인두세)으로 데나리온을 요구하면 자신들이 이미 시인했듯이 내면 될 일입니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 대답으로써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가 사실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임을 꿰뚫으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 동전에 ‘신성한 사람’, ‘대제사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겉보기에는 정치적 복종의 행위로서 특정한 세금을 허락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이 카이사르에게 내는 세금은 ‘종교적 충실성’의 표시이기도 하다는 점을 예수님은 간파하셨습니다. 누구를 섬기는 충실성의 표시입니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입니다. 한마디로 그 저주받은 것을 너희가 ‘신의 아들’이라 믿는 카이사르에게 되돌려주라는 불호령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몇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이것이 바로 ‘카운터 펀치’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나가떨어졌습니다. 과월절 축제를 맞아 성전에 순례 온 유다인들도 경탄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주님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주님의 것”(시편 24:1)이라고 노래하던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 동전은 카이사르가 ‘주인’이라는 뜻으로 형상과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황제가 달라고 하면 그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의 것이 아닌 다른 것들’, 즉 그가 새겨져 있지 않은 것들, 동전이 아닌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카이사르에게 속하지 않은 또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카이사르 말고 하느님께서 ‘주인’이시라는 ‘표’가 되어 있는 또 다른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면 돌려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안을 두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예수님이 데나리온을 가지고 하신 말씀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이 말씀은 ‘성과 속’의 이분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것은 카이사르의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통합적 관점에서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 동전은 카이사르의 것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카이사르의 형상과 그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전은 분명 ‘황제의 목적’에 따라 황제가 만들었습니다. 동전의 ‘앞뒷면’은 그야말로 황제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꽤 좋은 ‘표시’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예수님이 그 동전이 황제가 의도하는 목적을 충실히 반영할 정도의 탁월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주님, 무엇이 하느님의 것입니까?” 어떤 것이 누군가의 소유라면 거기에 그 사람의 것이라는 어떤 ‘표식’(형상, 얼굴, 문구,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하느님의 소유’라면 ‘하느님의 것’이라는 ‘표식’(형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표식’(형상, 모양)을 새겨서 만드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형상’이 찍혀있어서,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 ‘카운터 펀치’를 통해 지금 어디로 가시려는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려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말씀의 ‘손가락’이 지금 어디를 가리키는지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 창조 이야기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 창세 1:26-27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 특성을 ‘언어’나 ‘도구의 사용’, ‘협력하는 인지적 능력’이나 ‘직립보행’과 같은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라는 점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특성으로 선포합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받았을 때 우리 영혼에는 “너는 내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도장’과 십자가의 표식이 새겨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표’ 브랜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동전들입니다. 상품마다 만든 회사명이 찍혀있습니다. 결함이나 결점이 있으면 그 회사에서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인장)이 찍혀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유주이십니다. 감사성찬례는 바로 이것의 재확인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쓰여 있고, 새겨진 모든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자신의 형상이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돌려드리는 ‘산제사’가 바로 감사성찬례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잘 바치고 있습니까?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각각의 <전례독서>마다 새겨야 할 결론을 말씀드렸으니 오늘은 복음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교우 여러분,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시편 24:1a). 우리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드려야 합니다.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과 속주민은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이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황제가 자신의 ‘주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야 만이 하느님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표시가 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삶의 괴로움은 대부분 자신이 주인 노릇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주인이 아닌 엉뚱한 것을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인지(세상인지)? 아니면 하느님인지? 우리 ‘믿음의 태도’를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카이사르도 분명히 ‘신’(神) 행세를 했습니다. 모양만 바꿨다 뿐이지 오늘날은 돈이, 권력이, ‘신’(神) 행세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신’(神)의 자녀입니까? 우리는 어느 ‘신’(神)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모든 인생의 하느님 되심!”, “모든 인생의 주인 되심!”, “카이사르마저도 하느님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카운터 펀치’에 담은 설교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궁극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라고, “오직 하느님께 가장 충실해야 한다”라고 예수님은 적들 앞에서 당당히 설교하셨습니다. 이것이 적들의 올가미 앞에서 예수님이 당당히 선포하신 설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말씀처럼 십자가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이 시간, “너희가 그 동전을 황제의 것이라며 그에게 바쳐왔다면, 너희 자신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너희는 자신을 누구에게 바치고 있느냐?”라고 물으신 주님 앞에서 고요히 침묵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야 할 이 ‘세상의 것’과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하늘의 것’을 찾기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서 머리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카이사르의 것이고, 하느님께 물어서 들은 ‘한 말씀’(대답)만 진정으로 하느님이 받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존재의 창조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을 통해 존재가 빚어져 가는 과정 역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예수님은 오늘 너무나 단순하게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속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외에 우리에게 궁극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 외에 우리 자신을 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권세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 그것이 ‘빛’이든 ‘어둠’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실패’든, 우리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이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담겨있고,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이고,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며, 지금도 하느님이 빚어 가시는 존재라는 점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똑바로 관찰하고, 충성의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복잡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현실에서 직면하는 ‘특정 문제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가 마음에 새길 수 있는 ‘탁월한 출발점’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은유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화폐’(동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드러내십시오.

우리는 하느님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의 주인이시고, 당신의 형상이 새겨진 모든 것들 위의 통치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다른 질서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이웃을 ‘연민’으로 대하며, 의로움을 따라 살도록 이끌어주시는 힘은 ‘하느님의 형상’(성령, 하느님 자신)입니다. 이 하느님의 형상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궁극적 충성을 명령하시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이들을 그 마음에서 인도하시는 힘은 ‘하느님의 형상’(성령)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종국에는 궁극적 의미, 궁극적 가치와 연결되도록 이끄시는 힘도 우리에게 새겨진 ‘하느님의 형상’(성령)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 안에 ‘영원한 생명’이 거하심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서지고 구원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온 세상은 여전히 창조주 하느님의 숨결과 구원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확신 속에서 오늘도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십시오. 거룩하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십시오. 바로 그대 자신을 말입니다. 어둠도 빛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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