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3. 사순 23일(월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5:17-21
  • 성시 – 시편 30:1-5, 8, 11-12
  • 복음서 – 요한 4:43-54

사순 23일입니다. 사순 4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며 출발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새로움’, ‘변화’, ‘새로운 삶’, ‘거듭 남.’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금주간부터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사순 여정을 걸어야 하는지 교회는 친절히 안내합니다. 아마 <기도서>를 가까이 하면서 성찬례에 참여해 오신 분들은 사순 4주간부터 ‘성찬례 특정문’도 새로운 배정임을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새로움’(변화)을 말하려면 우리가 그동안 성찬례에서 사용해 온 절기 특정문부터 새로워져야겠지요. <전례독서>도 이 주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1독서 《이사야》는 흔히 ‘제 3이사야’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예언합니다. ‘영광스러운 회복의 새 시대’를 예언합니다(이사 60:1~22; 61:1~11; 62:1~12; 65:17~25). 하느님께서 시온을 모든 민족 위에 높여주시는 ‘아름다운 구원의 새 시대’를 노래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이 옵니다(이사 65:17). 그 회복과 구원의 새 시대는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몸소 우리에게 ‘오시는 날’ 성취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주님의 풍성한 은혜로 ‘새롭게 변화’(거듭남)되는 일이 항상 우선입니다. 사실 내 마음이 변화되면 이미 세상은 새 세상입니다.

《시편》은 ‘성전 봉헌가’라는 제목이 붙은 <30편>에서 배정했습니다. 이 시(詩)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봉헌절 축제’와 관련 있습니다(요한 10:22-30).

기원전 2세 중엽,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리아 왕’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잔악한 박해자 ‘안티오쿠스 4세’입니다(마카베오상 1:1-10). 그는 유대 민족에게 ‘그리스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일환으로 ‘유대교 행사’(할례와 안식일)를 금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합니다(기원전 168년).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도 금하고 거기에 ‘제우스’ 신상(神像)을 세웠습니다(다니 8:11-12; 마카베오상 1:54). 이 일이 나중에 ‘마카베오 혁명’의 계기가 됩니다(마카베오상 2:1-28).

‘마카베오’는 ‘훼손된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를 드렸는데(기원전 165년),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 봉헌’한 이 날을 오늘날까지 ‘봉헌절’(하누카) 축제로 8일간 지킵니다. 이 ‘봉헌절 축제’ 때마다 <30편>을 찬미했기에 ‘성전 봉헌가’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성전이시고(요한 2:19-22),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가 성전이라고 고백합니다.

전체적으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 받은 사람이 바치는 ‘감사 찬미’입니다. 특히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5절)는 구절에서 금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배정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밤과 부활의 아침’, ‘눈물의 밤과 기쁨의 아침’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드러내는 멋진 ‘시적 이미지’입니다. 한마디로 ‘새로움’입니다. 언제나 ‘아침’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을 향한 인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고난’, ‘슬픔’ 속에 있든지 분명코 주님이 ‘기쁨의 춤’으로 ‘새롭게’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11절a).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을 갈아입히실 것입니다(11절b).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 찬미’가 솟아오르도록 새롭게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고쳐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하는 인생에 ‘죽음의 밤, 눈물의 밤’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야기도 인류에게 ‘새로움’(변화, 거듭남)을 가져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기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세메이온’(semeion)은 어떤 것을 ‘확인’시키고, ‘인증’하려고 주어진 일종의 ‘표지’(표징, 표적)란 뜻입니다. 쉽게 말해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개의 표징들’이 선별되어 있습니다.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징(2:1-11),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징(4:46-54), 베짜타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징(5:1-9),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6:1-13), 물 위를 걸으신 표징(6:16-21),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신 표징(9:1-7),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11:1-44)입니다.

이 ‘표징들’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계시하시는’(나타내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표지’(표적) 역할을 합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나라, 즉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고 펼쳐지고 있음을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간단히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 7개의 표징은 종국에는 이 표징들을 넘어서는 진정한 표징, 즉 제 8의 표징으로 향합니다. 그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표징”입니다(요한 11:25; 20-21장).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가나에 가십니다. ‘가나’는 ‘새로움의 출발인 첫 표징’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고관의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더욱이 방문도 하시지 않고 ‘고관의 믿음’을 통해 ‘말씀 한마디’로 ‘원격’으로 치유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나라, 즉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시작하신 분임을 드러내줍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첫 번째 표징’을 통해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이 ‘두 번째 표징’을 통해서는 ‘고관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 ‘표징들 너머’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인들은 그 표징들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영적으로 눈이 먼 죄인임을 스스로 증명하며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릅니까?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 요한 4:48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연약한 본성)를 책망하십니다. 사실 오죽이 믿기 어려우면 기적까지 요구하겠습니까?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도 주님을 믿는 것처럼 복된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관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마치 ‘시로페니키아 여인’처럼(마르 7:24-30)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하였습니다(49절). 더욱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50절). 이 전에는 그가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아야 믿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다음에는 그런 것을 보지 않고도 오직 ‘한 말씀’만으로도 믿는 단계로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연약한 마음’(본성)에 일어났을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 확신과 의심,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이 마음에서 교차하는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확신, 희망, 삶을 선택했고, ‘기쁜 소식’(복음)을 갖고 마중 나오는 종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사순 4주간을 ‘새로움’, ‘변화’, ‘새로운 삶’, ‘거듭 남’에 초점을 맞추어 출발합니다. 그 무엇보다 ‘새로움’이 필요한 영역은 우리의 ‘연약한 본성’, 즉 ‘마음’입니다. 부디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주님이 풍성하신 은혜 안에서 날마다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이 여정 끝에는 ‘존재의 변화’를 맞는 ‘나비’가 바로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 당신의 사랑과 자비는 끝이 없으니 오늘도 저를 새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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