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2. 사순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치유하도록 파송된 빛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육체의 눈을 뜬 그 사람은 나중에 영적인 눈까지 뜨고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경배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보아야할 진실을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빛이십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재앙을 통하여 인류가 보아야할 진실과 들어야할 메시지를 바로 보고, 알아들을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진리의 하느님,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주님의 의로움을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무상 16:1-13
  • 시편 – 23
  • 2독서 – 에페 5:8-14
  • 복음서 – 요한 9:1-41

사순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치유하도록 파송된 빛의 자녀들’입니다.  코로나19 국내 확진자가 발생한지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생명의 위협 속에서 모두가 두려워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근원지는 박쥐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중간 ‘숙주’를 거쳐 사람에게 전파됐을 것으로 분석합니다. 아직 정립된 치료법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공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일부 교회까지 가세하여 인류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해석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그다지 선(善)하거나 정의롭거나 진실해 보이지 않는 ‘과잉 해석’입니다.

지금은 그런 신앙적 해석들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라 상호 연대와 인류애로 이 재앙을 우선적으로 극복하는 일에 교회가 힘을 보태야 할 때입니다. ‘코로나19’라는 강도를 만나 고생하는 국민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다가가는 사회적 역할에 교회가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섬김이야말로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느덧 사순 4주일입니다. 성내천과 오금공원에는 개나리가 활짝 폈습니다. 나무마다 물이 한창 오르고, 벚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 사시는 곳에도 꽃소식이 들려오는지 궁금합니다. 1년 단위로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에서는 <전례독서>를 사용합니다. 개인의 취향대로 선택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치우침 없이 온전히 묵상하고 설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례독서>에 따르면 사순 3주일부터 5주일까지의 <복음서> 배정은 사순절이 본래 어떤 교육목적을 갖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본문들입니다.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사순 2주일부터 <복음서>로 낭독하도록 배정된 본문은 《요한복음》입니다. 배정된 본문들이 긴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순 2주일’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영적 대화였습니다. ‘새로 남’을 말씀하시는 물과 성령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순 3주일’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였습니다. ‘물’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구세주이심과 하느님을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순 4주일’은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갖고 있던 사람을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도 ‘실로암 연못’이라는 ‘물’이 등장합니다. 육체의 눈 뿐 아니라 ‘신앙의 눈’(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일의 소중함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사순 5주일’은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치료약도 없는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치료되는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부활’의 소망으로 초대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사순 3주일부터 5주일까지의 복음이야기는 죽은 것 같은(죽은) 사람들, 어둠과 절망 속에 살던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찾아가 만나주시고, 그들이(사마리아 여인, 눈을 뜬 사람, 라자로의 누이 마르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메시아)로 알아보고 고백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그 많은 복음이야기들 중에서 어째서 이 3개의 본문을 ‘가해’ 사순절 <전례독서>로 읽도록 배정한 것일까요? 그것은 ‘세례성사’ 때문입니다. ‘부활 밤 전례’에서 세례 받을 예비신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전통적으로 부활주일을 앞두고 있는 사순 3주간의 성찬례에서는 ‘세례 예비자들’을 위한 집중교육이 있어왔습니다. 이 세례 교육의 핵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 세례 고백의 핵심과 관련 있는 본문들이 교육목적으로 사순 3주일부터 5주일까지 집중적으로 배정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찬례 ‘특정문’도 ‘재의수요일부터 사순3주’까지 한 묶음이고, ‘사순4주일부터 성주간’까지가 한 묶음으로 배정되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좀 더 집중하게 하는 ‘특정문’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갖고 있던 사람을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7개의 표징들’ 중 하나입니다. 본문들에 ‘기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세메이온’(semeion)은 어떤 것을 ‘확인’시키고, ‘인증’하려고 주어진 일종의 ‘표징’(표지, 표적)란 뜻입니다. 쉽게 말해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입니다.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징(2:1-11),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징(4:46-54), 베짜타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징(5:1-9),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6:1-13), 물 위를 걸으신 표징(6:16-21),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신 표징(9:1-7),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11:1-44)입니다.

이 ‘표징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계시하시는’(나타내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표지’(표적)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고 펼쳐지고 있음을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간단히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시’입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영적으로 눈이 먼 죄인임을 스스로 증명하며 멸망의 길을 갑니다.

10월 중순, 그러니까 ‘건기’에서 ‘우기’로 넘어가는 초막절 축제가 끝난 다음날입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정오 무렵 예루살렘 성전을 급히 빠져나오신 예수님 일행은 갈릴래아를 향해 가시기 위해 비탈을 내려와 ‘실로암 연못’(열왕하 20:20; 역대하 32:2-4,30; 이사 8:6; 22:9)이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구걸하던 장애인들이 몰려 있곤 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기 위해 ‘실로암 연못’에서 ‘정결례’를 행하던 사람들에게 자비를 간청하곤 했습니다. 그 길 가에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가련한 사람’은 우리 ‘인류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인류도 아담의 죄 때문에 ‘나면서부터 영적으로 눈먼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으로 ‘하느님의 형상’이 ‘손상된’ 인류도 ‘하느님과의 사귐’을 잃고 ‘어둠 속’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5). 그는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앓았기에 ‘완전한 어둠’에 속했습니다. 자신이 ‘빛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 ‘완전한 저주’, ‘완전한 불행’입니다.

‘실로암 연못’을 향해 가시던 예수님은 그 ‘시각장애인’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불행한 사람(제자들은 죄인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을 보고서 ‘원인’을 따졌습니다. 누구 잘못이냐며 비난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불행’을 ‘도덕적 관점’에서 고찰한 셈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로 논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질병’(고난, 역경)을 ‘죄의 결과’라는 ‘인과적 관점’을 갖고 바라보았습니다(출애 20:5; 34:7; 민수 14:18; 에제 18:20). 그런 관점이라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었으니 도대체 언제 죄를 지었다는 말일까요? ‘윤회’나 ‘영혼의 선재’를 말하려는 것일까요? 마치 코로나19를 두고 ‘하느님의 심판’ 운운하는 철부지 성직자들 같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의 원인’이나 찾고 있는 제자들의 그런 ‘허탄한 물음’을 물리치십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하실 ‘은총의 일을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그에게 다가가고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오늘 《시편》으로 노래한 <23편>처럼, 그와의 만남을 통해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 목자’이시고, 하느님의 일을 하러 세상에 오신 분임을 ‘드러내실’(계시하실) 참입니다. 한마디로 당신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드러내시려고 하십니다. 그것이 그에게 다가가신 이유입니다. 그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 주님이 다가가신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주님의 자비입니다. 사실 ‘성육신’이 그렇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께서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인류’(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인생들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은총과 자비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이지만 고대 사람들은 ‘침’에 ‘치유 효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믿고서 그 행동을 하신 걸까요? 그건 제가 예수님이 아니어서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행동은 《구약성경》의 어떤 사건이 연상됩니다. 아담을 창조하시던 하느님의 사랑과 수고로운 손길을 떠올리셨다면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창세 2:7).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죽은 것 같은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보내십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인데 본래 ‘기혼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구약성경》의 어떤 인물이 연상됩니다. 누구입니까?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도 예언자 ‘엘리사’로부터 “요르단 강으로 가서 7번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될 것이오.”라고 ‘보냄’을 받습니다(열왕하 5:10). 흥미로운 점은 처음부터 거부했던 나아만 장군과 달리 그는 예수님의 치유 행동과 ‘실로암 연못’으로 가라는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자칫 우리는 그의 ‘믿음’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는 분명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실로암 연못’까지 가자면 족히 몇 백 미터의 비탈길을 계속 내려 가야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믿음’은 적극적이고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는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믿음의 도전’을 감행합니다.

그 믿음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가서 얼굴을 씻었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나아만 장군처럼 단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한 상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주제에 따르면 그는 ‘새로 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전혀 볼 수 없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기적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재창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길 안에서, 성령 안에서 ‘재창조’되었습니다. ‘완전한 절망’, ‘완전한 저주’, ‘완전한 불행’의 대명사로 불리던(게다가 그는 거지였습니다) 인생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인생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세례를 앞둔 예비 신자들에게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도 ‘세례의 은총’을 떠올립니다. 우리 역시 대부모님(보증인)과 함께 ‘성천’으로 인도되어(보냄 받아) 사제로부터 씻김을 받았습니다. 머리 위에 물을 세 번 부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세례를 통해 우리는 ‘재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2독서 《에페소서》가 교훈하듯이 ‘세례’를 통해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에페 5:8). 사탄과 세상의 악한 권세와 죄의 욕망에 붙잡혀 살아온 인생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저주의 어둠에 감싸인 인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은총의 빛에 감싸인 인생으로 새로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파송’이 일으키는 은총입니다. 실로암은 기혼샘으로부터 ‘보냄’ 받은 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실로암 연못에서 씻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려보내주신 피와 물을 상징하는 ‘성천’에서 씻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났습니다. 성령께서 참된 양식, 참된 음료로 축성하시어 사제를 통해 보내주신(건네주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생명양식으로 받아 모시고 영생의 길을 걷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사실은 표징)을 두고 일대 소동이 일어납니다. 먼저 그가 ‘시각장애인’일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 사람들과 그가 ‘거지 노릇’할 때 본 사람들이 그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에 빠집니다. 그의 머리칼, 얼굴생김새, 걸친 옷, 신발, 다른 것은 전부 다 그대로인데 딱 한군데만 달라졌습니다. 그 순간 그가 나섭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 요한 9:9b

자신이 그들이 알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라고 묻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치유가 일어난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합니다. 특히 ‘예수’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고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누가 알려주었을까요? 옆에 사람이 알려주었을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 사람도 모른다고 대답합니다(12절).

이제 사람들이 그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기나긴 ‘심문’의 시작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낌새를 차렸듯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징조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그에게 눈을 뜬 경위를 ‘심문’합니다. 눈 뜬 사람은 처음보다(11절) 치유과정을 좀 축소해서 말합니다(15절). 안식일에는 노동을 금지하는 데, ‘진흙을 개는 일’은 노동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식일법’에 저촉되는 부분을 빼고 단지 “진흙을 발라주신 뒤에 얼굴을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안식일법을 어긴 ‘죄인’이 그런 기적을 행했다는 점 때문에 ‘예수’의 정체성을 두고 ‘분열’이 생겼습니다. 다시 그들은 눈 뜬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심문’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 요한 9:17

이 대답은 분명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갑자기 상부구조와 연결됩니다. ‘유다인들’이 그 뜻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기득권자들인 종교당국자들을 말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다그치듯이 ‘심문’합니다. 그의 부모는 자기 아들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지만 누가 눈을 뜨게 하여주었는지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부모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 요한 9:22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다소 동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의 교회 상황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이것은 다시 아래에서 언급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의 부모는 다소 빈정대는 투로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유다인들은 황급히 그를 다시 불러 심문합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하며 그의 동의를 받아내겠다는 투로 몰아세웁니다. 그는 자신을 제한하려는 ‘유다인들’에게 당당히 맞섭니다.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한 가지를 똑똑히 대답합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은 것은 내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 요한 9:25

유다인들은 당황스러움을 느낍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받을 기세로 질문공세를 퍼붓습니다. 그 순간 그는 묘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전을 지키며 거룩한 사람 행세를 하는 그들이 자신에게 매달리는 모습에 재미를 느낄 정도입니다. 그는 다소 허둥대는 그들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역공을 펼칩니다.

그 이야기를 벌써 해드렸는데 그 때에는 듣지도 않더니 왜 다시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 요한 9:27

놀랍습니다. 그의 대답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들립니다. 게다가 유다인들을 다소 비꼬는 말로 들립니다. 유다인들은 그의 대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규정합니다.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르겠다고 쏘아붙입니다.

그러나 이제 눈 뜬 그 사람은 물러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어떻게 그런 기적을 행하신 분이 어디에서 오신 분인지 모를 수 있느냐면서 핀잔을 줍니다. 말하자면 그런 기적을 행하신 분이라면 당연히 ‘하늘’(하느님)에서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놀랍습니다. 눈을 뜨고 있던 유다인들은 어둠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데 눈을 뜬 그 사람은 점점 더 밝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 이 명백한 사실을 의심하는 유다인들에게 그는 자신이 깨달은 통찰을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 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요한 9:31-33

그는 오랜 세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왔지만 참 지혜롭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논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그는 ‘우리는 알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이중적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적’이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기도 응답을 받는 사람이면 그는 결코 ‘죄인’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전에 없던 일’(가령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주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그는 ‘예언자’ 이상인 분이 틀림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는 유대교인들과 대조하여 그리스도교인인 《요한복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진정한 ‘진리’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그들은 ‘어둠’에 속했습니다. 그들도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이신 분이 ‘성육신’하심으로써 세상에 가져오신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현실을 똑똑히 봅니다. 참 빛이신 분이 세상에 오시어 탄생시키는 ‘하느님 나라의 새 백성’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진실을 말하는 그를 위협하며 ‘회당’ 밖으로 내쫓습니다. ‘회당 밖으로 내쫓았다’는 구절은 교회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1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회당에 출석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서기 90년 얌니아회의) 회당에서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대항해 함께 투쟁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면서 말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로 믿으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바로 그런 분열과 갈등의 시대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디어 이야기의 결론부에 도달했습니다. 그 사람은 진실을 말한 죄로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더 큰 공동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다시 그를 찾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언제나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 요한 9:35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 예언서에 등장합니다(7:9-14). 《다니엘》에서는 그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다른 전통이 형성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최후심판’(종말심판)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세계 통치권’을 넘겨받으실 그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다니엘이 본 환상이 예수님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위탁과 전권을 받아서 몸소 ‘최후심판’(종말심판)을 주재하십니다(마태 25:31-46).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부르십니다(마르 2:10, 28; 마태 8:20,31; 9:31; 10:33-34; 11:19). 《요한복음》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은 《요한복음》이 선호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믿는다’(그리스어로 피스튜오)는 것은 지적인 차원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이고 철저한 신뢰, 즉 ‘전존재의 완전한 의탁’을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 요한 9:36

그 순간 예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 요한 9:37

지난 주일에 들었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생각납니다(요한 4:26). 《요한복음》에서 ‘보는 일’은 ‘믿음’을 불러옵니다. 보면 믿게 됩니다. 그래서 ‘와서 보라’는 주제를 《요한복음》은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주님을 보면서,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그의 마음에 빛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 요한 9:38

진실을 말하다 쫓겨난 그 사람은 이제 ‘영적인 눈’까지 밝아집니다. 영적인 눈이 밝아졌다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꿇어 엎드렸습니다.” ‘꿇어 엎드리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프로스퀴네오’는 ‘절하다’, ‘경배하다’, ‘예배하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을 향한 예배’에만 사용되는 단어인데(요한 4:20-24; 12:20), 지금 여기에 쓰였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요한 14:7-9; 20:28). 그가 유다인들(종교지도자)이 볼 수 없었던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 9:39

대반전의 선포입니다. 비로소 예수께서 당신을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신 이유가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종말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곁에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몇이 자신들은 눈이 멀지 않았다고 예수께 대들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들이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항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참 빛이신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 없이도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는 그 ‘교만한 믿음’ 때문에 오히려 ‘진실’(진리)을 보지 못하는 ‘죄의 어둠’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진실을 본’ 그와 어깨동무를 하시고 천천히 제자들과 함께 ‘실로암 연못’으로 다시 내려가십니다.

1독서 《사무엘상》의 말씀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주의 영이 크게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무엘’은 봐야할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그랬을 정도라면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 사무상 16:7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차립니다. 우리도 속마음을 들여다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고 있으니 마음자리를 바르게 해야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기름부음을 통해 주의 영을 받은 다윗처럼 ‘세례’를 통해 ‘진리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교훈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 에페 5:8-9

이렇게 사도 바울로는 세례가 무엇인지, 세례를 통해 빛이 된 사람, 빛의 자녀가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세례식’에서 우리는 ‘세례초’를 선물 받습니다. 세례초는 우리 속에 ‘빛을 간직했다’는 상징이고,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그 빛을 꺼버린 채 이전처럼 똑같이 ‘어둠’처럼 지낼 때도 있습니다. 자기 한계와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어둠 속을 거닐 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보니 자신은 빛의 자녀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우리는 다시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 들어가 ‘불’을 켜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방이 1주일이든, 한 달이든, 몇 개월이든, 몇 십 년이든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는가는 상관없습니다. 성냥이든 라이터든 무엇이든 ‘불’을 켜는 바로 그 순간 방은 환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내면의 빛’은 다시 켜집니다.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고자 마음먹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내면은 다시 밝아집니다. 내면의 어둠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어둠도 물러갑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부활주일과 4월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에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치유의 빛’을 필요로 합니다. 이 재앙을 통해 인류가 ‘보아야할 진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의학자는 의학적 관점에서, 경제학자는 경제적 관점에서 코로나19가 몰고 온 어두운 밤(위기상황)을 해석하고 처방전을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이 재앙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여실히 봅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된 상호의존적 공동체’임을 여실히 깨닫습니다. 공동체의 소중함을 재발견합니다. 나의 안전과 생명이 너의 안전과 생명에 의지하고 있는 ‘상호 돌봄’이 필요한 ‘관계의 고리들’임을 깨닫습니다.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해 그 전보다 훨씬 폭넓게 보아야한다는 진실을 깨닫습니다. 우선 멈추어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분명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의 재앙이 ‘선’과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고 돈을 쫓아 살아온 결과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생태계’를 파괴해 온 인간의 ‘탐욕’(인간중심주의)에 의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로 인해 서식지를 잃어가는 동식물의 역습이 ‘전염병’ 같은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전부터 줄 곧 경고해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의 재앙이 인간이 초래한 일이라면 이 재앙을 바꾸는 일도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습니다. 괜히 선하신 하느님을 끌어들여서 ‘심판의 하느님’ 운운하기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 잘못했다면 바로 잡는 일도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지구생태’를 살릴 수 있는 작은 실천들에 더욱 마음을 기울이도록 교회가 ‘생태운동’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오늘도 ‘참 빛’이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내면의 빛’을 당기어 주십니다. 마음과 영혼의 눈을 치유하시어 ‘선’과 ‘정의’와 ‘진실’을 보게 하시며, ‘선’과 ‘정의’와 ‘진실’ 편에 서라고 용기를 북돋아 파송하십니다. 성찬례의 마지막 순서는 파송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빛’으로 ‘파견’하십니다.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상처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차별로 고통 받는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착한 이웃’이 되고 그들을 회복시키며 세상을 치유하라고 파송하십니다.

사순 4주일입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빛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악과 불의와 거짓의 어둠이 물러가고 국민들의 눈이 ‘선’과 ‘정의’와 ‘진실’을 향해 밝아지기를 기도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만일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2독서 《에페소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 땅에 ‘선’과 ‘정의’와 ‘진실’을 ‘현실화’하는 교회가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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