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 주의 봉헌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주의 봉헌축일’입니다.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이 사건의 의미를 ‘양초’에 담아 봉헌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표지’(標識)로 ‘양초’를 사용해 왔습니다. 양초는 스스로를 태우는 자기희생을 통해 빛을 내고 어둠을 물리칩니다. 양초가 빛을 내는 이 모습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바치신 예수님과 겹쳐집니다. 비록 오늘은 율법에 따라 부모에 의해 성전에 봉헌되지만, 훗날 성인이 되어서는 자발적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자신을 봉헌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빛의 자녀들이 되라는 거룩한 초대를 받습니다. 오늘 축복한 양초는 전례와 가정기도에서 ‘주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표지로 사용합니다. 봉헌된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자신도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임을 기억합니다. 축복한 양초를 밝히고 기도하는 가정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평화와 기쁨으로 환해지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 오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전에 봉헌되셨나이다. 겸손히 비오니, 우리도 정결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말라 3:1-5
  • 시편 – 24:7-10
  • 2독서 – 히브 2:11-18
  • 복음서 – 루가 2:22-40

오늘은 ‘주의 봉헌축일’입니다. 해마다 2월 2일에 옵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쉽게 말해 아기 예수가 ‘하느님의 소유’라는 신앙을 표현한 숭고한 날입니다. 이 날 교회는 한 해 동안 성당과 가정 기도에 사용할 ‘양초’도 축복하고 나눕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교회는 해마다 ‘주의 봉헌축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그것도 다른 날이 아니라 ‘2월 2일’에 기념하는 것입니까? 또 다른 물건도 있을 터인데 꼭 ‘양초’를 ‘축복’하여 나누는 것입니까? 차례로 대답해 보겠습니다.

우선 교회력으로 ‘주의 봉헌’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성가정’이 ‘율법’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첫아들’은 하느님께 봉헌한 뒤 ‘성전’(성소)에서 쓰는 돈인 ‘은 5세겔’을 ‘속전’(贖錢, 속량, 대속)으로 내고 물러내야 했습니다(출애 13:1~2,13~15; 34:20; 민수 18:16). ‘5세겔’은 어느 만큼의 가치를 갖는 돈일까요? 열흘 치 이상의 임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액수입니다. ‘성가정’이 정말 그런 ‘속전’(贖錢)으로 물러낸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봉헌금만을 드린 것인지는 ‘루가’가 침묵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리아와 요셉도 그렇게 하고서 ‘첫아들’을 물러냈을까요? 이 점을 침묵하는 ‘루가의 의도’는 말씀 나눔 중간에서 다룰 것입니다.

또 ‘율법’에 따르면 아들을 낳은 산모는 ‘40일’, 딸을 낳은 산모는 ‘80일’ 동안 ‘부정(不淨)한 상태’가 됩니다(레위 12:1~8). 그 동안은 집에만 있어야 하고 ‘성소’(공동체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산후조리’에 대한 ‘법적 보장’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번제’(1년 된 양 한 마리)와 ‘속죄의 제물’(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을 가지고 사제에게 ‘정결례’(淨潔禮)를 행하러 갑니다.

사제는 ‘각각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쳐 ‘산모의 부정’(不淨)을 깨끗이 하고, ‘공식적으로 공동체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합니다. 사제의 ‘공적 확인’을 통해 ‘공동체로 복귀’하게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던 셈입니다. <성공회기도서>에도 이 전통이 ‘출산감사예식’으로 실려 있습니다. 물론 ‘부정(不淨)을 씻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산모를 건강하게 지켜주신 은총’을 ‘공동체가 함께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루가복음》은 율법의 이 같은 규정을 지키기 위해 ‘성가정이 성전에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교회는 그 날짜를 정할 때, 아기가 ‘아들’이기에 ‘40일’에 착안했습니다. 따라서 ‘성탄일부터 40일’째인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정결례’(淨潔禮)를 치른 날입니다. 동시에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여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라는 신앙’을 ‘모본’으로 드러낸 날입니다.

분당교회 양초축복식 준비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한 해 동안 성당에서 봉헌되는 전례와 가정 기도에서 사용할 ‘양초’를 축복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라 증언합니다(요한 1:9). 전통적으로 교회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표지’(標識)로 ‘양초’를 사용해 왔습니다. 양초는 스스로를 태우는 자기희생(보통 이런 식으로 의미주기 합니다)을 통해 빛을 내고 어둠을 물리칩니다. 양초가 빛을 내는 이 모습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바치신 예수님과 겹쳐집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오늘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표지인 양초를 축복하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오늘은 부모가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의지’가 아니라 ‘부모에 의해’서입니다. 하지만 훗날 성인이 되어서 예수께서는 ‘자발적’(자기의지)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실 것이기에 양초 축복은 자연스럽습니다.

일산교회 양초축복식 모습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타나시오 사제 얼굴이 참 선해 보입니다

사제는 ‘축복한 양초’로 제대를 밝히고 교우들에게 양초를 나누어 줍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빛의 자녀들’이 되라는 거룩한 초대입니다. 더욱이 사제가 ‘그리스도의 표지’인 축복한 ‘양초’를 건네는 이유는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언자 시므온과 아기 예수의 만남’에 근거합니다. 이 만남의 의미는 설교에서 함께 나누겠습니다.

‘즈가리야의 찬미처럼’(루가 1:68-79), 성모께서는 참 빛을 품에 안으시고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이들에게”(루가 1:79) 찾아가셨습니다. ‘성전’에 있던 ‘시므온’은 그 ‘참 빛’을 마리아로부터 두 팔에 받아 안고 ‘구원의 찬미’를 바쳤습니다(루가 2:29~32). 우리도 ‘주님의 궁궐’(말라 3:1)인 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의 표지’인 축복한 ‘양초’를 기쁨으로 나누어 받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시므온’이 됩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아 안고 ‘시므온’처럼 예언자가 되어 그의 ‘송가’를 현재화합니다(루가 2:29~32). 그런 다음 순행합니다. 순행하는 이유는 시므온의 찬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한 구원의 빛’이시고, ‘빛을 영접한 우리에게는 영광’임을 몸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넙성리교회 양초축복식입니다

올해도 ‘임마누엘 그리스도의 표지’인 축복한 ‘양초’를 정갈한 마음으로 성당과 가정에서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축복한 양초’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드러내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전례와 가정 기도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전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스스로를 태우며(희생하며) 어둠을 밝히는 양초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도 하나로 포갭니다.

고요히 ‘참 빛’을 ‘선물’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기립니다. 우리 역시 참 빛으로 세상을 비추시는 그리스도를 닮아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리라 다짐합니다.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사는 이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빛’을 발하는 ‘착한 이웃으로 살리라’ 오늘도 마음을 세웁니다. 그렇게 ‘빛의 전사’로 사는 삶이 하느님이 받으시는 ‘봉헌’입니다. 나 혼자 밝히는 ‘종지만한 빛’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연대’하여 ‘함지박만한 빛’이 된다면 두려울 게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연대’하여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봉헌의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참 빛’을 주신 하느님의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하느님께 봉헌되신 거룩한 날입니다. 성가정처럼 우리도 온 누리의 진정한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온전히 되새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전례 이해를 가지고 이제 말씀 나눔을 하겠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은 하면서도 가진 재력 정도가 사람대접의 기준이 된지 오래입니다. 인간이 어느새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되는 것 같아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런 세상에서 힘(생산력) 없는 약자들은 무시당하고 홀대 받기 쉽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역사입니다. 비록 타락한 세상은 약자들, 즉 아기들과 가난한 이들과 노인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그들이 사랑받고 존중받는 새 세상을 꿈꿉니다. 하느님 나라 말입니다. 그 세상에서 아기들은 고단한 세상에 ‘위안’을 가져오는 존재들로 축복을 받고, 가난한 부부는 ‘다시 미래를 꿈꾸도록’ 격려 받으며, 노인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 특별한 ‘통찰력’으로 희망을 증언하는 위대한 ‘예언자’로 추앙받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어디서 먼저 생생히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까? 그곳은 바로 주님의 궁궐인 ‘성전’(교회)입니다.

‘성전’,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모이는 성전은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곳’입니다. 세상에 없는 한 가지가 있는 곳입니다. ‘사랑’ 말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전(교회)은 ‘사랑’ 말고 세상에 있는 것이 다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사랑’을 찾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에서 더 이상 ‘사랑’을 찾지 않습니다. 비극입니다. 한 때는 길을 잃어버린 세상에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세상에 길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전에 모인 우리는 ‘처음’(시작)을 목격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갓난아기’와 ‘가난한 부부’와 ‘두 노인들’과의 ‘거룩한 만남’을 목격합니다. ‘마지막’을 상징하는 두 노인이 ‘처음’을 상징하는 ‘아기’를 ‘성전’에서 만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마지막’(노인)이 ‘처음’(갓난아기)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과거’(노인)가 ‘미래’(갓난아기)를 만나 생의 통합을 노래하는 거룩한 현재임을 발견합니다. ‘처음’(갓난아기)이 ‘마지막’(노인)을 만나 참된 기쁨을 선물해 주는 거룩한 공간임을 발견합니다. ‘미래’(갓난아기)가 ‘과거’(노인)를 만나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거룩한 공간임을 발견합니다.

《루가복음》 2장은 세 차례에 걸쳐 ‘율법’에 충실한 성가정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처음은 팔 일째 행해진 아기 예수의 ‘할례’이고(21절), 두 번째는 ‘성인식’을 앞둔 12살 예수의 성전 방문(42절)이며, 세 번째는 오늘 복음이야기가 전하는 ‘첫아들에 대한 의무’와 ‘산모의 정결례’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할례’와 ‘성인식’과 ‘첫아들의 의무’는 모두 ‘언약’, 즉 ‘율법의 아들’이 되는 절차입니다.

‘성가정’이 오늘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서였고(출애 13:1-2,14-15), 다른 하나는 산모의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레위 12:1-8). 이 일은 당시 유다인들의 전통이며 의무였습니다.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머물다 성전으로 올라갔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머물다 올라갔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이유부터 살핍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처음 난 것’은 하느님께 바쳐야합니다(출애 13:2, 12~15; 34:19~20; 민수 3:17). 처음 난 것을 봉헌함으로써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표현합니다. 그 기원은 ‘출애굽’과 관련 있습니다(민수 3:11~13). 다만 사람의 경우에는 첫아들 대신 다른 제물이나 ‘속전’(贖錢)을 내고서 물러낼 수 있었습니다(출애 13:13; 민수 3:11~13; 18:15~17). 마리아와 요셉도 그렇게 해서 ‘첫아들’을 물러내면 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루가복음》 기자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루가가 의도한 것은 이 아기는 다른 이스라엘 가정의 첫아들처럼 “값을 지불하고 되찾을 수 없는”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 특별한 분’임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장차 있게 될 이 아기의 죽음이 하느님께 봉헌되는 어린양으로서 모든 인류를 ‘대속’(代贖)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에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가정’이 예수님을 물러내지 않고 온전히 봉헌한 일은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한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1사무 1:11, 21-2:11). 사무엘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 성별되어 한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실 분임을 생애 초기부터 루가가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루가는 예수님이 누구(어디)에게 속하는지를 처음부터 분명히 하는 데, 그 절정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 루가 2:49

두 번째 이유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산모는 ‘정결례’를 치러야 성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레위 12장). 아들을 낳으면 40일, 딸을 낳으면 80일 동안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출산을 부정하다고 본 점에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피는 곧 모든 생물의 생명이다”(레위 17:14)고 여긴 고대의 사고와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출산할 때 생명이 깃든 피를 쏟음으로써 산모가 하느님이 주신 생명력의 일부를 잃어버렸다고 여긴 셈입니다. 따라서 산모는 ‘산후조리’ 기간을 갖는 일뿐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이신 분과 연결됨으로써 손상된 생명력을 회복할 필요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딸을 낳았을 때 더 오랜 기간 산후조리를 ‘율법으로 보장’했다는 점입니다. 자녀는 ‘노동력’과 직결되던 시절이었기에 딸을 낳은 산모의 심리를 더 배려한 때문이었을까요? 아무튼 생명의 존엄, 연결과 회복, 이것이 ‘정결례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기록된 ‘부정하다’는 말씀은 흔히 오해하듯이 더러워졌다거나 여성차별이 아닙니다.

‘정결례’는 제물을 필요로 합니다. 가난한 집 산모는 본래 규정된 제물(‘번제’로 드릴 일 년 된 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드릴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 대신에 그보다 ‘작은 제물’(집비둘기 한 쌍이나 산비둘기 한 쌍을 구해서, 한 마리는 ‘번제’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고려한 이 규정을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제물’을 준비합니다. 참고로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루가복음》 기자는 구약에 기록된 ‘정결례’ 제물 규정을 다르게 해석한 점도 발견됩니다(레위 12:8).

‘그날도’ 예루살렘 성전 경내는 율법의 의무를 이행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평범해 보이는 ‘성가정’을 ‘주목’하거나 ‘궁궐의 진정한 주인’인 ‘아기’에 대해 증언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듯합니다. 심지어 성전 사제들도 이 ‘특별한 아기’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부자들의 예물에 마음이 빼앗겨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참된 예물을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눈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증언’이 사실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필요합니다(신명 19:15). 놀랍게도 하느님은 천사들과 목자들 말고도 이 아기에 대해 증언해 줄 성령 받은 두 사람을 미리 예비해 두셨습니다. 성전 안에 있던 ‘단 두 사람’만 이 성가정과 아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예언하도록 영감 받은 ‘예언자들’입니다. 둘 다 ‘기도의 삶’을 살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구세주를 만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 중 첫 번째는 ‘시므온’입니다. 그는 그날 왠지 서둘러 성전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것 자체로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주 성전에 올라가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오래도록 기다리던 노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처럼 메시아와 그 시대의 실현입니다(이사 40:1~2; 49:13; 52:9). 더욱이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십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성령께서 알려주신 일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인데 그는 아직 거기까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서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성전’ 경내 첫 구역인 ‘여인의 뜰’에 들어간 ‘시므온’은 밀려드는 군중들 사이를 천천히 걷습니다. 그러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한 부부가 조심스레 ‘여인의 뜰’로 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요셉’은 그 뜰을 지나 오직 남자만 제물을 바치러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인의 뜰’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 순간 다른 이들은 볼 수 없었을지 모르나 시므온의 눈에는 그 부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오묘한 ‘빛’이 선명하게 감각되었습니다. 백발이 지난 그에게 여태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는 바로 이 순간을 《말라기》 예언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말라 3:1하

《시편》도 이 순간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 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 시편 24:7

시므온의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바로 저기 오신다.

그의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부부에게로 향합니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이상한 의심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들은 “바로 저기 오신다”는 음성은 틀림없는 성령의 지시입니다. 그가 더 가까이 가자 그 빛은 부모가 아니라 품에 안고 있는 아기로부터였습니다. 다시 성령의 음성이 내면에서 들렸습니다.

이들이 바로 약속된 가정이다… 이 ‘아기’가 그리스도(메시아)시다!

시므온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오, 하느님, 맙소사! 그리스도(메시아)가 ‘아기’라니요!

시므온은 약속하신 그리스도(메시아)를 지금껏 다르게 상상해 왔습니다. 갑옷을 입은 힘센 남자이거나 어떤 초인적인 모습을 상상 했습니다. ‘하지만… 아기라니…’ 그 순간 성모 품에 있던 아기가 꼬물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자 시므온의 내면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시므온은 팔을 벌려 성모와 눈을 마주치면서 환하게 웃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시므온의 품에 선물처럼 인도됩니다. 그는 ‘구원’을 가슴에 받아 안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는 성모로부터 아기를 받아 안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기도와 찬양을 바쳐 올립니다. 그의 감격과 노래가 우리 교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는지는 ‘성무일과’ 속에 녹아져 있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 루가 2:29~31

시므온은 자신이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갓난아기를 통해 실현되었다며 ‘평안’을 노래합니다. ‘지금 이 순간’, 정말 수도 없이 상상해 왔습니다. 비록 자신이 상상한 대로는 아니었지만 그의 기도가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노래입니다. 그가 눈으로 본 것과 목자들이 본 것은 일치합니다(루가 2:15,17). 나중에 예수님은 자신을 보았던 이들의 행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루가 10:2-24

이 아기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베푸신 ‘구원’(메시아)입니다. 이방인들마저도 이 ‘빛’을 자신들의 빛(메시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욱이 이제 이 아기 때문에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이사 60:1~3).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므온처럼 사람들 속에 빛나는 하느님의 형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그런 눈을 가졌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성탄 이야기에서 들었듯이, 최근 이 가정에는 아기의 탄생을 둘러싼 이상한 일들이 있긴 했습니다. 출산한 그날 새벽 낯선 목자들이 그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밤하늘에 나타난 천사로부터 구세주가 탄생했으니 가보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목자들은 아기에 대해 천사가 한 말을 친절하게 전해 주었습니다(루가 2:8~12, 17)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별로 놀라워하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목자들은 거짓말도 잘 하고, 잘 씻지도 않으며, 냄새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직 마리아만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요셉의 마음도 움직였습니다. 왠지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이 노인의 고결한 기도와 노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기는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처럼, 시므온의 기도와 노래 속에 드러난 구원사의 지평 앞에 그들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가정을 축복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느님의 가정이 겸손히 예언자의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놀라움과 감격 속에 조용히 서 있는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 루가 2:34-35

‘성모송가’(루가 1:51~53)와 유사한 시므온의 이 예언은 《이사야》 예언서의 인용입니다(이사 8:14~15; 28:16). 메시아이신 아기를 통해 실현될 미래입니다. 참 가슴 아픈 예언입니다. 아기가 무엇을 넘어뜨리고, 무엇을 일으킨다는 말입니까?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연중시기(공현절기)를 지나는 우리 안에서 넘어뜨려지고 일으켜져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자신은 너무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 묻고 들은 음성은 이렇습니다. 내 ‘생각’은 무너뜨리시고, ‘마음’은 일으켜 세우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뜨리십니다. 하느님을 독차지하려는 신관, 선민의식, 안식일로 대변되는 율법관, 역사와 자연, 이웃을 바라보는 세계관,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줄 정치∙군사적 메시아관 등. 그들의 ‘편견’, ‘판단’, ‘평가’를 무너뜨립니다. 한마디로 ‘머리’를 잘라버림으로써 그들 자신을 무너뜨리십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은 일으켜 세우십니다. 사랑을, 연민을, 자비를, 회개를, 감사를, 희망을, 믿음에 무감각해진 그들의 마음, ‘감수성’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가슴)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혹시 생각만 살아있고 마음은 죽어있지 않습니까? ‘감수성’은 살아있습니까? 옳은 일을 하는 이들의 고난을 아픔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살아있는 마음은 아픔에 반응합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에 붙잡혀 쌓아올려진 ‘죽은 생각’은 무너뜨려주시고, 하늘나라 가치들에 반응하는 ‘살아있는 마음’으로 일으켜 세워지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더욱이 뒤에 나오는 시므온의 예언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는” 그 일이 성모에게는 어떻다고 합니까? 영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애통함’입니다. 얼마나 아픈 예언인지 모릅니다. 아기는 장차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의 ‘영광’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 들어오시어 ‘평화’가 되는 ‘십자가의 일’을 하실 터인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성모에게는 그토록 힘들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성모는 무참히 죽어가는 아들의 절규를 지켜보아야했습니다.

이처럼 시므온의 예언은 아기를 받아 안고 바친 기도와 노래, 또 부부에게 해 준 축복의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만약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장차 이 아기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목수가 되어 당신 집 살림이 필 것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말을 했다면 얼마나 받아들이기 쉬웠겠습니까? 예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는 아들을 반대하는 유다백성들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아들은 사람들의 어둠을 드러나게 하시는 빛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이 가슴 아픈 예언을 들은 성모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루가복음》 기자는 이미 성모께서 목자들이 전해 준 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전해줍니다(루가 2:19). 성모는 이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 속 깊이 새겨 간직했을 것입니다.

이제 복음이야기의 자리는 ‘봉헌 예식’으로 옮겨집니다. 그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 하느님의 예비하신 또 한 명의 ‘예언자’가 반가운 얼굴로 지팡이를 짚고 다가옵니다. 《루가복음》은 그녀를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 혈통을 이어 받은 나이 많은 예언자 ‘안나’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성가> 178장과 179장은 그녀를 기리는 것을 잊었지만 분명 그녀는 시므온과 짝을 이루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홀로 되었지만 ‘성전’(정확히는 여인의 뜰)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84년 동안 하느님을 섬겨왔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성전’을 출입하며(정확히는 성전에서 살며) 하느님을 섬겨왔다는 말뜻은 영적으로 ‘온전히 다듬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평생토록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이었다는 뜻입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삶의 내용은 온통 하느님’이었음을 말해줍니다. 태극기 부대가 아니라 품격 있는 노인의 표상입니다.

‘안나’ 예언자의 기도 제목은 시므온처럼 ‘하느님이 어서 역사에 개입하시어 예루살렘이 구원되는 날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도 안나 예언자처럼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은 과연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라고 자녀들과 이웃들이 증언해 줄 수 있는 삶입니까? 하느님의 구원을 알아차리고 그 구원을 만나고 있습니까?

‘안나’ 예언자는 그 날도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군중 속의 일부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나아가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침침한 눈으로 살아온 그녀였지만 ‘봉헌예식’이 진행되는 한 곳에서 ‘빛’이 발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예식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성가정’ 곁으로 다가온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펴집니다. 성모 품에 안긴 아기를 보더니 ‘기쁨의 미소’가 안면 가득 번져갑니다. 그녀 역시 시므온처럼 이 아기가 주님의 ‘구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바치며 ‘어깨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주위 사람들에게 “어서 와서 보라”며 아기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자신의 증손자라도 되는 냥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손짓합니다. 이 아기가 ‘새로운 출애굽의 시작’이 될 것이고, 포로 된 백성들을 위한 ‘하느님의 생생한 구원’이 될 것이라 증언합니다. 이 위대한 증언으로 아기예수의 성전봉헌 예식은 끝이 납니다.

여러분, 거기 있던 군중들이 ‘시므온’과 ‘안나’ 예언자의 증언을 귀담아 들었을까요? <복음서>는 침묵합니다.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배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시므온과 안나에게 구세주를 살아생전 만날 것이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 구세주를 약속하고 용서와 축복과 새 힘을 약속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서둘러 끝이 납니다.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 루가 2:39

어딘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당혹스러워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아기는 다시 잠들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놀라 당황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성가정’에는 엄청난 일들이 있었습니다. 천사들과 목자들 말고도 시므온과 안나 예언자의 예언과 증언도 있었습니다. 이런 증언과 예언을 들었지만 마리아와 요셉이 온전히 알아들었을까요? 아마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온전히 알아들을 때까지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는 ‘침묵’, 즉 ‘절제’가 필요합니다.

성가정은 ‘나자렛’으로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사실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은 성가정만이 아닙니다. 성탄이 끝나고 목자들은 들판으로 돌아갔고, 천사들은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마태오복음>에만 등장하는 구도자들인 동방의 박사들도 자기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고향이나 어딘가로 돌아가지 않은 또 다른 한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어딘가로 돌아가시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나자렛에 돌아온 성가정의 몇 년은 평안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두 사람과의 만남을 가슴에 간직했습니다. 그 감격스런 만남과 기도와 노래, 예언과 증언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가슴’에 새겼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종의 ‘심화학습’을 진행했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도 마음에 새기고 그 의미를 심화학습 해야 합니다. 인생살이에는 깨달음이 삶으로 나오는 과정이 있고, 내적으로 깨우쳐야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적으로 깨우치기도 전에 삶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다 보니 어설픈 이야기, 어설픈 실천이 됩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자렛 예수’에게도 무명의 30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루가복음》은 나자렛으로 돌아간 아기예수의 성장을 이렇게 전합니다.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 루가 2:40

2독서 《히브리서》처럼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참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모든 것을 경험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히브 2:14,17).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성탄) 우리도 날마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에게서도 이 두 가지가 자라야합니다. ‘몸’이 자라고 ‘지혜’가 자라야 합니다. “몸이 자란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자란다는 뜻입니다. “지혜가 자란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시어 인류를 위한 영원한 대속을 이루신 ‘대사제 예수님’처럼(히브 2:14,17), 우리도 자신의 ‘성탄’을 넘어 ‘수난’과 ‘부활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찬례가 봉헌되는 이 성전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격려되고, 소통이 깊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설교 처음에 ‘성전’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곳’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성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성전 안에서 아기, 부부, 노인으로 상징되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만납니다. 성전 안에서 모든 아기들은 환영을 받습니다. 성전 안에서 모든 어린이들은 하느님의 계획이 함께하는 소중한 존재로 존중 받습니다. 성전 안에서 모든 어린이들은 하느님이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하나의 표지’가 됩니다. 성전 안에서 한 가난한 부부는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의도’를 발견했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성전 안에서 살면서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발견한 이들은 노인이 되어서도 그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서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언젠가 하느님이 그들을 ‘본향’(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으로 부르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린이가 무시당하고, 젊은 세대들은 미래를 꿈꿀 수 없을 만큼 일상에 압도당하며, 노인들은 갈 곳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돈을 사랑하다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에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은 바로 ‘구원’(사랑, 소통)입니다.

오늘 성가정은 ‘율법에 순종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가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납니다. 거기에서 구원의 이야기가 아기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는 구원의 이야기, 지혜의 이야기, 소통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돈을 최고로 여기는 세상과 달리 아기, 어린이, 젊은이, 노인 모두가 존경 받고 명예롭게 되는 거룩한 집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공급받는 생명의 공간입니다. 모든 세대가 ‘참된 양식’을 공급받는 ‘밥집’입니다. 이 교회에서 힘을 얻은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되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는 소중한 존재들임을 퍼뜨려야 합니다.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사는 이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빛’을 발하는 ‘착한 이웃’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빛의 전사’로 연대하는 삶이 하느님이 받으시는 봉헌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성전에 봉헌되신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손잡고 그렇게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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