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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2020. 4. 19. 부활2주일

토마는 어떻게 합니까? 그가 정말 만졌을까요? 만졌을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의심하는 토마’에서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보는 토마를 그렸습니다. 가장 거룩한 순간을 가장 속되게 표현하고 말았습니다. 예술이 그만 ‘상상력’을 상실하고 무미건조한 과학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과학도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데도 말입니다. 토마는 주님의 그 위대하신 배려 앞에서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2020. 4. 14. 부활 8일부 화요일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름’은 ‘한 존재의 영혼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한 존재를 향한 ‘인정’과 ‘존중’과 ‘사랑’과 ‘수용’을 뜻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한 존재의 필요에 응답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과 ‘존중’과 ‘사랑’과 ‘수용’이라는 ‘영혼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맙게도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시편》에서 찬미한 것처럼(시편 33:20-22), 우리의 그러한 필요에 가장 잘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몹시 그리운 이름을 간직한 어머니들이 계십니다. 이틀 후, 4월 16일이면 ‘세월호 참사 6주기’입니다. 그 곱고 아까운 이름들을 가슴에 간직한 어머니들을 기억하며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시편》 시인처럼 기도로 들어갑니다.

2020. 4. 13. 부활 8일부 월요일

이제 나이가 들어서는 굳이 손바닥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토마처럼 옆구리를 보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단지 주님이 저를 바라보는 그 다정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눈빛’은 항상 가장 강력하게 상대방의 ‘영혼’에 자신을 새겨주기 때문입니다.

2020. 4.12. 부활대축일

오늘은 인류에게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첫날’입니다. 생명의 창조주께서 극악한 ‘죽음의 권세’를 부수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신 날입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왕께서 인류의 적인 ‘마귀’를 영원히 패배시키시고 사흘 만에 승리자로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영원한 승리자’로 무덤에서 나오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입니다. 시체를 지키려고 무덤 문을 ‘돌’로 막고, ‘봉인’까지 하여 지켰어도 만물에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를 결코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듯이 무덤의 돌은 약속의 날이 되자 무게 값도 못했습니다.

2020. 4. 10. 성금요일(주의수난일)

오늘은 장례를 치렀습니다. 말씀 나눔을 늦게 올리는 이유입니다. 저는 상주였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말입니다. 사실 이미 39일 전에 모두에게 ‘부고’(訃告)를 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고’를 받고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여의치 않아 못 오셨습니다. 하지만 상주인 저는 지켜야지요. 소홀히 할 수 없지요. 저와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니까요. 아니 저와 여러분을 가장 사랑해주신 분이니까요!

2020. 4. 9. 성목요일(성찬제정일)

‘성삼일’은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살던 우리를 깨우는 ‘결정적인 시간’입니다. 그런 삶이 편하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우리의 영혼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도록 돕는 ‘궁극적 변화의 시간’입니다. ‘본래적 존재의 의미’를 묻는 현존재인 우리 자신에게 ‘궁극적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주는 ‘구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사건에서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파악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여주는 세상과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2020. 4. 8. 사순 37일(수요일)

오늘도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유다처럼 선택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지 아니면 예수님처럼 선택하고 빛의 세계로 들어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자신하진 마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유다처럼 자신의 욕망대로 선택하기 쉽습니다. 육체의 생명과 안락, 세상적인 출세와 성공, 권력과 명예를 갖는 일 등등.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나의 이기심과 탐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선택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자기부인’, ‘자기죽음’, ‘자기봉헌’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왔습니다.

2020. 4. 7. 사순 36일(화요일)

하느님이 보시는 우리 인생도 그렇겠지요. 각자 피어나는 시기는 다릅니다. 우리는 바람과 비에 젖고 흔들립니다. 예수님처럼 거절당할 때도 있고, 오해받을 때도 있으며,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앙의 줄기를 곧게 세우고 저마다의 시간에,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따라 ‘사랑’으로 피어나는 일은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예수님도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수난’에 나서실 때 몹시 흔들리셨습니다. 바람과 비에 몹시 젖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시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사랑의 꽃잎을, 사명의 꽃임을 따뜻하게 피워내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밀알 하나가 되시어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