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15. 연중2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환대의 식탁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수용과 용서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을 전하는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계기는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식탁을 같이 하신다는 당대 종교지도자들의 비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수용과 용서가 ‘먼저’ 베풀어졌기에 환대의 식탁을 차리신다고 답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베풀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진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거룩한 가족답게 서로 사랑하며 복음의 삶을 살아내도록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선한 목자시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죄를 용서받아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2:7-14
  • 시편 – 51:1-10
  • 2독서 – 1디모 1:12-17
  • 복음서 – 루가 15:1-10

연중 2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환대의 식탁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수용과 용서입니다.

도봉교회에서 사목을 배울 때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강촌기도원’으로 여름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때는 아직 프란시스 수도원이 강촌으로 이사 오기 전이어서 그렇게 불렸습니다. 우리 송파교회 교우가 교구에 기증한 땅이 지금의 프란시스 수도원과 성 요한 피정의 집이 되었습니다. 당시 제 아들 녀석이 5살이었는데 함께 데리고 수련회에 갔습니다. 필요한 용품이 있어서 아들을 태우고 발산리 농협 마트로 잠깐 나왔습니다. 물건을 사서 금방 나올 거니까 기다리라 말하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정말 금방 물건을 사서 돌아왔는데, 분명 차에 있어야 할 아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혼돈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별의 별 상상이 다 되었습니다. 근처 가게를 샅샅이 뒤지며 소리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경찰에 신고하러 가려고 차를 세워 둔 농협 앞으로 다시 갔습니다. 그 순간 아이스크림을 들고 농협 마트에서 나오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사는 동안 그 때처럼 기뻤던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잠깐 동안의 잃어버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기쁨’이 핵심어로 빛나고 있습니다. 전례독서들에는 기쁨이 어떻게 스며들어가 있습니까?

“금 송아지를 경배하다”, Nicolas Poussin, https://en.wikipedia.org/wiki/The_Adoration_of_the_Golden_Calf

1독서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가 중보자로 기도하는 《출애굽기》에서 배정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하느님 백성이 걸어야 할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복음이야기에 등장하는 길 잃은 양처럼, 잃어버린 은전처럼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향하여 ‘진노’를 터뜨리려는 순간 모세는 ‘중보자’로 나섭니다. 모세의 ‘애원’을 들으신 하느님은 ‘재앙’을 내리려던 마음을 바꾸십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회개하기 전인데도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먼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모세의 마음은 그런 하느님 때문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이렇게 해서 1독서는 모든 인생들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이야기의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자비와 기쁨의 식탁’으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이야기의 배경역할을 합니다.

《시편》은 ‘참회시’로 유명한 <51편>입니다.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바치는 찬미입니다. ‘알레그리’(G. Allegri, 1582~1652)가 이 시편에 곡을 붙인 <참회의 노래>(Miserere mei Deus,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는 교회음악에서 전설처럼 회자됩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36Y_ztEW1NE) 배경은 예언자 나단의 고발, 정확히는 ‘하느님의 고소’ 앞에서 파렴치한 ‘다윗 왕’이 무너져 내린 사건(삼하 12:7~15)입니다. ‘하느님의 고소’(告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죄가 “하느님을 얕보며” 저질러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악행은 단지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악행’으로 언제나 가장 ‘침해’를 당하는 분은 그 사람의 생명을 세상에 내신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암몬과 아람 군을 물리치고 최대 통치영역을 확보합니다(삼하 10:1~19). 그러자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벗어나” 점점 ‘오만’(傲慢)해졌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길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야전사령관으로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는 예전처럼 부하들과 함께 전장(戰場)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전쟁 중인데도 혼자 ‘왕궁’에서 빈둥거리다 그만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삼하 11:2~27). 충성스런 부하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찾아왔습니다. ‘나단’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사무엘처럼 왕을 지명하여 기름을 부어 세우고, 왕에게 조언을 하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그 권한을 견제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 나단이 그에게 찾아와 ‘정의감’에 호소하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삼하 12:1~4). 다윗은 자기를 빗대어 하는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호기롭게 ‘사형’을 언도합니다(삼하 12:5). 그 순간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삼하 12:7)라는 ‘전광석화’ 같은 ‘책망’이 들려옵니다. 다윗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해냈다”고 여겼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순간 그는 갈등합니다. 예언자 하나쯤은 얼마든지 없애버릴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하느님은 다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왕좌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삼하 12:13)라고 ‘자백’합니다.

‘배은망덕’하게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얕보며” 저지른 ‘죄 값’은 무엇입니까? 그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미 선고(宣告)한 것처럼 ‘사형’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레위 24:19~22). 이처럼 ‘나단’의 책망 후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지은 ‘시’(詩)가 <51편>이라 전해집니다. 그는 깊은 죄책감 속에서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기억”했습니다. 회개하는 이에게 베풀어지는 ‘용서와 기쁨과 즐거움’을 간청했습니다. 비록 그의 집안이 ‘죄의 형벌’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삼하 12:19; 13:28~29; 16:21~22; 18:14~15; 열왕상 2:24~25), 자비하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바친 기도는 그를 새로운 삶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분명 허물 많은 왕이었으나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한 인생’이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하였으며, <복음서>조차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배은망덕한 다윗 왕의 ‘참회’처럼, 우리도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불편한 진실’, 어두운 곳을 ‘인정’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한 존재’가 우리 ‘자신’임을 ‘시인’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오늘’ 기억합니다.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시는 하느님을 ‘오늘’ 기억합니다. 이렇게 해서 <51편>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기쁨의 주인공들을 전하는 복음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2독서《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배정했습니다.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인 사도 바울로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증언합니다. 연중 24일부터 연중 30주일까지 2독서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둘째 편지》에서 배정합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하느님이 먼저 베푸시는 ‘자비’를 받아들이고 거룩한 식탁에 돌아온 이들의 기쁨을 강조하는 복음이야기와의 연결이 빛납니다. 사도 바울로가 누리는 기쁨에 대해서는 복음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을 전하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루가복음》 15장에는 3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잃었던 양 한 마리’, ‘잃었던 은전 한 닢’, ‘잃었던 둘째 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들을 좋아합니다. 하나같이 ‘잃었던 것을 되찾은 기쁨’이라는 주제가 관통합니다. 백 마리 중의 하나, 열 닢 중의 하나, 둘 중의 하나 이런 식으로 점점 그 하나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비유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이 비유들 끝에서 우리는 온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하나가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점입니다. 잃어버렸으니까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도 하느님(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느님(예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가르치고자 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3개의 비유 중에서 2개를 들려줍니다. ‘잃었던 둘째 아들’의 비유는 올해 ‘사순 4주일’(2019. 3.31. 관련 설교는 여기를 클릭)에 이미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상황입니다(1~3절). 두 번째는 비유의 내용입니다(4~6절, 8~9절). 끝으로 회개를 강조하는 ‘루가’가 비유에 덧붙인 ‘적용문’입니다(7, 10절).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복음이야기로 ‘제자도’를 들었습니다(루가 14:25~33, 관련 설교는 여기를 클릭). 그렇게 강력한 ‘제자도’를 들었음에도 사람들은 예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셨고 ‘음식까지 함께’ 나누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루가’가 말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법’을 기준으로 해서 ‘죄’를 말합니다. 법을 어기고 죄 값을 치르러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죄인’(범법자)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어떻게 불립니까? ‘의인’이라 불리지 않고 ‘준법자’라 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유대 땅에서는 어땠을까요?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에 따라 ‘의인’ 또는 ‘죄인’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우선 율법에 따르면 모든 직업이 신성한 것은 아닙니다. ‘고리대금업자’나 ‘세리’는 사기성 직종에 종사하는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특히 ‘세리들’은 정한 것보다 더 거두어 착복하고 동족을 억압했기에 직업상 죄인을 넘어 로마의 식탁에 참여하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 먹고 사느라 ‘안식일 법을 준수’할 수 없었던 ‘목자’나 ‘어부’도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일에 특성상 ‘정결법’을 지킬 수 없었던 ‘오물처리꾼’이나 ‘백정’도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의사’도 직업상 죄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유는 부자는 우대하면서 치료비를 낼 수 없는 가난한 처지의 사람들은 소홀히 하고, 또 병으로 부정하게 된 몸을 만져 치료해 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더욱이 율법에 따르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사람도 있습니다. ‘사생아’, ‘앉은뱅이’, ‘시각장애인’ 같은 ‘장애인’입니다. 유대민족이 아닌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 심지어 여자도 태생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일 뿐 아니라 직업상으로 율법 규정을 충실히 이행할 여력이 없던 이들은 모두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실 몇몇 부류를 제외 하면 얼핏 보기에도 ‘사회적 약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안식일 법’이나 ‘정결법’처럼 율법 규정을 잘 지키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대사제들은 당대의 ‘의인’이라 자부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많은 권한을 누리던 권력자들입니다. 여간해서는 죄인이라 불리던 사람들 집에는 가지 않았고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랍비라고 소문난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시고, 또 그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환영하실 뿐 아니라 함께 음식까지 나누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식 밖의 행동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율법해석을 내놓곤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 설명해 주시는 하느님은 그들이 간직한 ‘하느님 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들은 의인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시는 심판관 하느님 상을 간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비의 하느님 상’을 가르쳤습니다. 기득권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사회 근간을 뒤흔드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죄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정말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613개나 되는 율법 규정으로 족쇄가 채워져서 ‘죄인의 자리’를 벗어날 엄두조차 낼 수 없던 그들입니다. 다시는 하느님께 용서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자포자기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 사이에 예수라는 분이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들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들의 숨을 조르던 613가지 율법 규정들의 핵심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헐어버리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숨통이 트였겠습니까?

이것이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이유였습니다. 당시 율법 체제 하에서 ‘전혀 희망을 꿈꿀 수 없었던 그들’이었습니다. 밑바닥 인생들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용서를 꿈꿀 수 없었던 가련한 인생들’에게 용서의 문을 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그들 편이 아니다’라고 절망했는데, 오히려 그들을 돌보기 위해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그런 행동이 불편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입니다(참고, 루가 5:30). 그들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못마땅해’ 합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 루가 15:2

본문에 기록된 ‘동사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선 ‘못마땅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디아고귀조)는 ‘불평하다’, ‘투덜거리다’, ‘중얼거리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 시제는 그 때까지도 ‘계속 진행 중인 행위’를 나타냅니다. 단지 한 번이 아니라 ‘항상’, ‘지속적으로’ 불평하고 못마땅해 했다는 뜻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한 동사들은 어떻습니까? ‘환영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프로스데코마이)는 ‘받아들이다’, ‘기다리다’, ‘기대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까지 느껴지는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다’로 번역한 그리스어(시네스씨오)는 ‘함께 먹다’ 뿐 아니라 ‘교제하다’, ‘사귄다’는 뜻으로 확장됩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내뱉은 ‘죄인’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십시오. 이 단어는 우리를 너무나 중요한 ‘통찰’(洞察)로 이끕니다. 고요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환영하고 함께 음식까지 나눈다.”고 불평했습니다.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누구랑 같이’ 먹어야 합니까? 예수께서 ‘누구를’ 기다리시고, ‘누구랑’ 교제해 주셔야 합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 마치 다른 종류의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합니다. 대단한 ‘착각’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다른 종류의 사람은 이 세상에 애초부터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렇게 교훈한 바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 로마 3:23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종류의 사람이란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거물들’(자칭 의인이라는)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루가 14:1~6). 그러나 그 식사는 그들이 다른 종류의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 역시 ‘죄인들’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며, ‘정죄’하기 전에 자신들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누구를 잔치에 초대해야 할지 말씀하시면서 이미 ‘참된 환대의 식사’를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루가 14:13~14).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친 대로 실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짜 충격 받은 이유는 예수께서 그 행동을 단지 한 번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셨고, 자신들이 경멸하는 죄인들을 좋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비난에 예수께서는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대변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어떤 사람’입니다(4~7절; 마태 18:12~24). 본문에 ‘누가’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안쓰로포스’입니다. 단지 ‘인간’(human being), ‘사람’(person, man)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목자’란 뜻이 아닙니다. 양들과 함께 증장하기에 우리는 그냥 쉽게 ‘목자’일 것이라 ‘일반화’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목자’는 아닙니다. 차라리 “너희 가운데 누가”를 ‘양들의 주인인 어떤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주인이 ‘목자’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비유 끝에서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아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목자보다는 ‘양들의 주인’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목자’이자 ‘주인’인 어떤 사람으로 전제하고 말씀 나눔을 진행하겠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본 그림 중의 한 장면일 것입니다. 그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세리들과 죄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인류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먼저, ‘잃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폴뤼미’는 ‘완전히 파괴될 지경이 되다’,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이 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양은 조심성도 없고, 길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만큼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목자가 있는 자리로 알아서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무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제 멋대로 가버립니다. 한마디로 목자가 찾아 나서지 않으면 그 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입니다.

‘양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주인’(목자)의 심정은 어떨까요? 맹수의 밥이 될 지도 모를 잃어버린 양 못지않게 ‘애간장’이 타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다시 말해 그 양을 찾아내기까지 ‘목자(주인)의 생명’도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만일 ‘주인’(목자)이 그런 심경이 되지 않았다면 단단히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관계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목자’(주인)가 ‘양’을 잃어버리거나 찾아나서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이상합니다. ‘목자’(주인)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광야)에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헤맵니다. 이런 이상함을 막기 위해 합리적인 생각을 동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목자’(주인)가 ‘아흔아홉 마리’를 안전한 곳(마을의 공동우리)에 가두어 두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 잃어버린 그 ‘한 마리’가 ‘주인’(목자)에게 너무나 ‘특별’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상상입니다. 비유의 요점은 멀쩡한 아흔아홉 마리나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목자’(주인)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 한 마리가 목자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도 아닙니다. ‘참 목자’(그래서 주인인 사람)에게 있어서 양들은 다 특별합니다. 요점은 그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참 목자’(주인)의 ‘적극적인 행동’에 있습니다. 되찾은 그 한 마리 덕분에 ‘기뻐하는 주인(목자)의 심정’이 진짜 요점입니다. 흔히 ‘탐욕’에 찌든 인간들이 중요시하는 ‘비율’이 아니라 잃었던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길 잃은 양’으로 비유된 ‘우리’ 인간의 처지와 ‘하느님의 심정’을 발견합니다. 제 2이사야 기자는 ‘고난받는 종의 넷째 노래’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 이사 53:6a

이스라엘의 ‘목자’라 자칭하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참 목자)일 수 없습니다. 약한 양들을 튼튼히 먹이지도 않았고 병든 양들을 치유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마저도 길을 잃은 양처럼 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같이 길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나는 처지의 양들에게 하느님은 《에제키엘》을 시켜 선포하십니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 그가 내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리라. – 에제 34:16~23

예수님은 《에제키엘》의 예언을 성취하십니다.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당신께로 돌아온 죄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난” 사람들을 ‘애간장’이 타서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입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온 죄인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실 수밖에 없는 ‘애간장이 타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참 목자’이시자, ‘주인’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인 우리가 당신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주인’이십니다. 찾도록 찾아 헤매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누구의 가르침과도 달랐습니다. 더욱이 지금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신 그 ‘하느님’이 바로 ‘당신’이심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비유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진실’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게 되자 ‘주인’(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 루가 15:5

이 짧은 구절에 그 한 마리 양을 되찾은 ‘주인’(참 목자)의 심정이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니, 인생들의 ‘참 목자’(주인)이신 ‘예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인’(목자)은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멥니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찾으셨을 때 기뻐서 똑같이 대해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를 당신 품에 안으시고 빙긋이 웃으시며 등을 토닥여 주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 루가 15:6

여러분이 듣기에는 어떻습니까? 정말 이렇게 유난스럽게 좋아할 목자가 있을까요? 현실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양을 잘 돌보지 못했다며 동네 사람들한테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참 목자’, 즉 ‘주인의 기쁜 심정’을 드러내려는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그만큼 ‘주인’(참 목자)이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루가’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신 일’은 잃어버린 자들을 되찾았을 때에 맛보는 ‘기쁨의 표현’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비유의 의미를 이렇게 밝혀 주십니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 루가 15:7

예수님은 분명 ‘회개’의 필요성을 말씀하십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라 하셨지만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로마 3:23). 흥미롭게도 학자들은 이 말씀을 루가가 덧붙인 ‘적용문’이라 분석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없어도 비유는 그 자체로 ‘완결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 없이도 청중은 그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있고, ‘진짜 주인’(참 목자)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 누구나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루가’는 이 비유를 다소 무리하여 ‘회개’와 연결시켰습니다. ‘무리’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구출되기 위해 스스로 ‘회개했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 비유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주인(참 목자)의 행동’과 그 ‘심정’(애간장이 타들어감과 기쁨)만이 전체 비유에서 돋보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딸이 결혼하면 ‘지참금’을 주어서 보냅니다. 혹시라도 남편에게 소박을 맞으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비상금’입니다. ‘지참금’은 주머니에 넣어 집안에 보관하기도 하지만 은사슬로 꿰어 자신이 결혼한 여성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머리 장식’(裝飾)으로도 쓰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여인이 은사슬에 달린 ‘은전’(드라크마, 노동자 하루품삯에 해당)을 세어보니 한 닢이 없어졌습니다. 여인도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주인’처럼, 그 잃어버린 ‘은전 한 닢’ 때문에 ‘애간장’이 타들어 갑니다. 비록 생명이 없는 ‘은전’이지만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향한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대가 그 ‘은전들’ 속에 담겨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들은 창문이 없거나 있다 해도 아주 작은 형태였기에 실내가 어두웠습니다.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샅샅이(조심스럽게) 뒤집니다. 마침내 은전 한 닢을 찾아냅니다. 찾은 다음에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같이 기뻐하자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은전을 찾으려 애쓰는 ‘여인의 적극적인 행동’과 그 ‘심정’(애간장이 타들어감과 기쁨)만 돋보이지 그 은전이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루가’는 이 비유를 ‘회개’와 연결하여 ‘적용문’을 적어놓았습니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루가 15:10

분명 이 비유들에 따르면 ‘양’이나 ‘은전’은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잃어버렸다가 되찾아지고,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루가’는 이 비유들을 옮겨와 자신의 복음서에 편집하면서 잃었다 되찾은 한 마리 양과 은전 한 닢이 ‘세리들’과 ‘죄인들’이라 적용했습니다. 그들을 ‘죄인’이었다가 ‘회개한 사람’이라고 적용했습니다. 동시에 ‘죄인들이 회개’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회개의 요청’으로 각각의 비유 ‘적용문’을 추가하였습니다. 회개가 필요한 그 죄인들에는 ‘우리들’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루가’가 본래의 비유에 자신이 해석한 ‘회개 요청문’을 추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루가의 신학적 성향’ 때문입니다.

‘루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죄인들의 회개’를 자주 강조합니다(루가 3:3,8; 5:32; 10:13; 11:20,21; 13:3,5; 15:7,10; 16:30; 17:3~4; 24:47; 사도 2:38; 3:19; 8:22; 17:30; 26:20). ‘인생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예수님, 성령) 죄인인 우리, 길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내셨을 때(찾아오셨을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회개’입니다. 결국 ‘루가’는 잃어버린 사람들, 즉 죄인들을 찾기 위하여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죄인들이 회개하도록(돌아오도록)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잃어버린 사람들을 되찾으셨을 때, 죄인들이 회개했을 때, 하늘에서 당신의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신 일’은 바로 그 ‘하늘의 기쁨’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생생한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죄 사함’의 기쁨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징입니다. 회개한 모든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의 잔치’를 미리 보여주는 ‘구원 사건’입니다. 사실 이 비유들 포함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주제는 주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루가’는 무리했습니다. 본래의 비유에 나타난 핵심은 ‘회개의 요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회개를 요청’하시기 위해 비유들을 말씀하셨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칭송을 들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비유들은 ‘하느님’(예수님, 하느님의 나라)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비유입니다. ‘회개의 요청’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평가와 판단과 정죄를 뛰어넘는 ‘대자대비하신(초월적인) 하느님’, 잃은 것을 찾아 나서고 반드시 찾고야 마는 ‘주인이신 하느님’(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주인(목자)과 여인의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심정’을 명백히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었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이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바 되었을 때 하느님은 ‘애간장’이 탔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우리 중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하느님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잃어버리셨을 때, 하느님께는 우리를 찾는 것 외에 달리 소중한 것이 없으실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한 때는 자신이 길을 잃어버린 양이었다고 오늘 2독서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 1디모 1:13, 15b

이어서 예수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를 명백히 교훈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15절a).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16절b). 이것이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공생애’를 사신 이유입니다.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이유입니다. 길 잃어버린 우리에게 ‘믿음’을 풍성히 주시기 위해서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14절b). 길 잃어버린 우리에게 ‘사랑’을 풍성히 주시기 위해서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14절b).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조차도 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느님과 ‘원수’였을 때조차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찾기 위하여 ‘먼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6절).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계속해서’ 우리를 찾고 찾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육신으로 시작된 이 모든 은총의 사건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니다(15절a).

이제 우리는 《루가복음》 기자가 덧붙인 이러한 적용문이 아니라 본래의 비유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유들이 발설된 상황을 전하는 첫머리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 루가 15:1~2

<복음서>를 꼼꼼히 살핀다면 예수께서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 교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식사’하셨습니다. 기득권자들, 즉 종교지도자들과도 ‘식사’하셨고, 심지어 기득권자들이 혐오하고 조롱하던 사람들과도 ‘식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먼저’ 베풀어진 뭔가가 있다는 진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뭔가가 먼저 있었다.’는 진실을 아시기에 이 시간 우리를 이 ‘거룩한 식탁’으로 성령을 통해 데려오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흔히 ‘식사 자리를 같이 한다’, ‘식탁에 앉힌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수용’, ‘인정’, ‘존중’을 나타냅니다. 쉽게 말해 한 가족이라는 뜻합니다. 분명 ‘루가’가 덧붙인 적용문처럼(7,10절),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천사들은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할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회개가 일어나기 전 항상 ‘먼저 베풀어진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용납’(수용)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회개한 후에 비로소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항상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수용)하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항상’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베풀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진실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겨워하는 우리들 편이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포기하시는 일 없이 항상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무한한 사랑’, ‘수용’, ‘용서’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호흡과 호흡사이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우리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자신이, 엄마의 손을 뿌리치는 6살 아이처럼,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때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이 비유들을 참 좋아합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를 찾으러 오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셨다고 사도들은 증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특별한 존재’라 ‘자부’(自負)합니다. ‘중요한 존재’라 ‘자평’(自評)합니다. 하느님이 독생자를 보내시어 사랑하실 정도로 우리 안에 어떤 ‘선함’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합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수난하셔야 할 만큼 자신에게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길 잃어버린 우리, 죄인인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의 성실하심’, ‘하느님의 선하심’보다 스스로에게 어떤 ‘공로’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평가’하곤 합니다. 우리 뿐 아니라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순전히 ‘하느님의 사랑’ 덕택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덕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덕택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느님께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주장하는 자격이나 가치나 공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 ‘하느님의 선하심’ 덕택입니다.

분명 예수께서는 당신(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이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 희생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조차 말입니다. 분명 그들에게도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자비를, 은총을 베푸셨고, 그들이 자신들 앞에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통해 돌아서서 ‘주님’(혹은 사랑 받고 있는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할 때 하늘에서는(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당신의 독생자를 ‘먼저’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죄악에서, 걱정에서, 불안에서, 두려움에서, 미움에서, 교만에서, 증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먼저’ 보내주셨습니다. 죄악에서, 걱정에서, 불안에서, 두려움에서, 미움에서, 교만에서, 증오에서 돌아서십시오.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향하십시오. 거기 우리를 위한 사랑과 자비와 은총이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전혀 새롭게 볼 수 있는 십자가 사랑과 자비와 은총이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먼저 베풀어진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을 의지하십시오.

오늘도 주님은 ‘모든 사람’을 ‘거룩한 식탁’으로 초대하시고, ‘성령’을 통해 ‘거룩한 식탁’으로 데려오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단 한 부류’뿐인 인류입니다. ‘죄인’ 말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식탁’에 나아오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십니다. 간혹 성공회 신자나 다른 형제교회 신자들이 ‘천주교 미사’에 참여했다가 함께 ‘성체 나누길 거부’당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성찬례’[(성聖)변화]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그렇게 한다는데, 정말 한심하고 웃기는 짓거리입니다(더 심한 욕을 하고 싶지만 참습니다). 예수의 정신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짓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못된 ‘차별’입니다. 하기야 제가 교제하는 천주교 사제들 중에는 그렇게 식탁을 차별하는 자신들의 ‘성찬례’를 부끄러워하는 건강한 사제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정죄’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성공회에서 이러저런 이유로 ‘성찬 나눔’을 거부당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요? ‘은총’은 사제가 주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권한’이며,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에 믿는 마음으로 성체와 보혈을 받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베풀어져야 합니다. 사제가 임의로 ‘평가’(판단)하고 ‘정죄’하며 은총을 막아 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거룩한 신비’인 ‘성찬’은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며,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를 ‘영적’이고 ‘신성한’ 사람들, 즉 ‘의인’이라 ‘자부’하고 ‘자만’했습니다. 자신들이 너무나 ‘거룩’했기에 그들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은 ‘죄인’이라 ‘정죄’했으며 그들과 어울린 ‘예수님마저도 죄인’으로 내몰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 예수님이 옳았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변호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 변방으로 내몰린 이들을 당신의 ‘환대의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냉혹한 율법 적용’과 ‘자기중심적 기준’을 흔연히 ‘넘어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 즉 단 한 부류의 사람으로서 ‘함께 거룩한 식탁’에 부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잃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되찾으시고 ‘한 가족’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에페 2:15,19). 그것이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예수를 통해 찾아낸 우리를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히시고 더불어 먹고 마시게 하십니다(묵시 3:20).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기뻐할 ‘새 가족’(하느님 나라 새 민족)을 성령을 통해 지금도 만들어 가시는 중입니다(에페 2:15,19).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새 가족’으로써 ‘환대의 자리’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침 받습니다. ‘성찬례’는 우리교회의 ‘중심’이고, ‘제대’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 베풀어지는 ‘거룩한 식탁’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이 ‘거룩한 식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의 양식’이 제공됩니다. 공감하고 존중하며 수용하기보다 판단과 평가와 충고하기에 바쁜 우리의 ‘병든 영혼’을 고치고 살리시는 ‘영혼의 영약’(靈藥)이 제공됩니다. 우리는 이 ‘성찬례’, ‘거룩한 식탁’에 함께 모여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기쁨’에 참여합니다. 함께 주님을 경배하며, 함께 먹고 마십니다. 이 ‘거룩한 식탁’을 아직 맛보지 못한 이들을 초대하러 ‘파송’됩니다. 특권과 반칙이 난무하는 이 세상 속에서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예수,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기 위해 파송됩니다. 스스로를 변호조차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있어주기 위해’ 이 세상에 파송됩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고 파송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 자부하며 편을 짜고, 그들만 소통하고 특권을 누리는 그런 세상을 가만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차별의 장벽을 허무시고, 마침내 너와 내가 서로의 기준을 내려놓고, 한 자리에 어울려 먹고 마시는 ‘화해와 일치의 식탁’을 마련해 주시는 ‘주인’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비인간화로 잃어버린바 되지 않고, 인간으로 대우 받는 그런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지금도 ‘당신과 함께 일할 자녀들’을 찾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판단, 정죄) 때문에, 혹은 용기를 잃고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니라 여기던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회복하도록 ‘당신 자녀들을 통해’ 찾아가 주십니다. 그리하여 새 희망을 꿈꾸는 일이 그들 안에서 일어날 때 누구보다 기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람들 안에서 잊힌 ‘희망’이라는 단어가 다시 되살려지는 순간, 하늘에서도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교는 자기중심적인 기준으로 이웃을 ‘평가’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판단’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정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차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두려움’을 조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며, 하느님께는 소중하다는 진실을 일깨우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공로나 선함 이전에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수용’,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 베풀어졌음을 ‘기쁘게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말고 모든 사람을 위한 ‘큰 기쁨’이 되는 소식이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루가 2:10)

자, ‘하느님의 새 가족’인 우리는 함께 ‘거룩한 식탁’에 나아갑시다.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생명의 양식’입니다. 오늘과 다가올 영적 전투를 위해 이 양식을 먹고 새 힘을 얻으십시오. 오늘 사도 바울로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거룩한 직분을 맡겨주신 하느님을 날마다 기쁘시게 합시다. 마침내 그런 이들은 불멸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의 식탁’에 다시 모여 영원토록 기뻐할 것입니다.

함께 밥을 나눕시다. 함께 사랑을 나눕시다. 함께 생명을 나눕시다. 사랑이신 주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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