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8. 연중2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제자-생명을 선택하고 은총의 대가(代價)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1독서 <신명기>는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는 모세의 설교입니다. <성시 1편>은 생명의 길이 율법에 있다는 찬미시입니다. 2독서 <필레몬서>는 자신이 받은 은총답게 복음 전파를 위해 옳은 결단을 하도록 필레몬을 초대하는 바울로의 편지입니다. <복음서>는 제자가 되려는 이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代價)를 가르치시는 ‘제자도’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요청하시는 ‘제자도’를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총만이 우리를 제자로 만들어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어 이미 받은 십자가의 은총을 따라 생명을 선택한 충직한 제자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로 태풍으로 피해를 입고 몸과 마음이 힘겨운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본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어 이 세상의 파수꾼으로 삼으셨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지혜를 주시어 우리가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예언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여 주어진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30:15-208
  • 시편 – 1
  • 2독서 – 필레 1:1-21
  • 복음서 – 루가 14:25-33

연중 2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제자-생명을 선택하고, 은총의 대가(代價)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1독서 《신명기》는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는 모세의 설교에서 배정했습니다. 그 ‘생명의 길’이란 주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명령)에 순종하며, 주님께만 충성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순종하며, 충성해야 하는지는 ‘율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준수’가 ‘생명의 길’입니다. 이 ‘생명의 길’을 선택한 ‘보상’은 그들과 그들 후손이 ‘가나안’에 들어가 자리 잡고 오래 잘 사는 ‘복’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율법준수’라는 ‘생명의 길’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순종하며, 충성하는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불순종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는 가나안에서의 추방과 포로생활과 멸망입니다. 이렇게 1독서는 ‘예수님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제자도를 가르치는 <복음서>의 배경역할을 합니다.

《시편》은 1독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토라’(율법)를 찬미하는 <1편>에서 배정했습니다.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문에 해당하며, 주님의 말씀, 즉 ‘토라’(율법)를 사랑하라는 ‘찬미시’입니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말씀(율법)을 ‘최우선으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의인’은 복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비추는 ‘빛’으로 작용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들려지거나 읽혀지기 위해 있는 것 아닙니다. 마음에 적용되고 내적으로 그 의미가 깊이 음미되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으로 역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삶이 괴로움과 곤경, 박해와 시련 속에 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의 즐거움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아 밤낮 되새기는 사람이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배정했습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선택’과 그리스도의 종인 ‘제자’는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교훈하는 <복음서>와의 연결이 빛납니다.

‘골로사이’라는 도시에 ‘필레몬’(사랑의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했습니다. 그는 많은 ‘종’(노예)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 ‘오네시모’(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뜻)라 불리는 종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네시모는 돈을 훔쳐 필레몬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도망쳤습니다.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다 ‘에페소’(로마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까지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바울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바울로’는 자기 주인 ‘필레몬’이 존경하는 스승이었습니다. ‘에페소’는 바울로가 2년 반을 머물던 곳으로 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사도 19:1~20:1).

그는 바울로를 찾아가 자신의 가련한 인생사를 털어놓았습니다. 바울로는 그를 맞아들였고 새 삶을 원하는 그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의 아버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바울로와 함께 지내며 충직하게 섬겼습니다. 얼마 후 바울로는 그를 필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내는 ‘선택’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손에 편지를 주어 보냅니다. 그를 혼자 보내지 않고 ‘디키고’를 함께 가게 했습니다(골로 4:7~9).

그 때 오네시모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주인인 필레몬에게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인지 말입니다. 그는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선택’을 합니다. 참 잘 된 일이었습니다. 바울로는 그 편지에 구구절절이 그에 대한 ‘신원보증’을 합니다. 과거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복음 전파를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마치 자기 ‘심장’과 같다면서 그를 사랑하는 교우, 즉 형제로 맞아주기를 필레몬에게 간청합니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할지는 필레몬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당시에 ‘노예’(종)는 인격이 아니라 재산과 상품으로 취급당했으며, 특히 도망친 노예가 잡히면 십자가형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필레몬이 ‘영혼의 스승’인 바울로의 간청에 따라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아들이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 편지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필레몬은 자기 스승 바울로의 간청을 귀담아 듣고 마치 ‘제자’처럼 ‘순종’하는 ‘선택’을 합니다. 오네시모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소유가 그리스도께 속하였으며, 자신마저 그리스도께 속한 ‘종’임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그 실천은 자신이 스승인 사도 바울로로부터 배운 대로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는 ‘사랑의 사람’임을 증명했고, ‘오네시모’도 자기 이름처럼 ‘쓸모 있는’ 복음의 일꾼으로 거듭났습니다. 두 사람은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습니다(골로 4:7~9). 그리스도께서 꿈꾸신 것처럼 노예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이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골로 3:5~14). 인간의 실수와 잘못까지도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선용’(善用)하시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책이 《필레몬서》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제자도’를 말씀하시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제자는 어떤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곰곰이 따져 본 후에 ‘제자도’를 살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결정)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제자도’를 성취할 수 없는 자신임을 겸손히 고백하게 됩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주님이 이미 이루신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한 우리들임을 발견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그런 내용을 다룰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루가 9:51)을 이어 가십니다. 앞서 가시던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 뒤에는 수많은 ‘군중’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죄인’(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곤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될 수 없다며 ‘정죄’ 당하곤 했습니다. 성전이나 회당에서도 추방당하고 보살핌을 거절당한 ‘변두리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당대의 부조리한 사회, 정치, 경제, 종교로부터 ‘인간다움을 박탈당하고 착취당한 이들’입니다. 다른 한편 그들은 “자신의 영적 갈망을 인도해 줄 ‘스승’을 찾아 헤매던 이들”을 상징합니다. ‘영적 갈망’은 있는데, 누구에게 지도받을 수 없는, 이끌어 줄 ‘영적 스승’을 만나지 못한 이들 말입니다.

어느 날 그들은 예수님을 ‘영혼의 목자’로, 그들 갈망을 지도해 줄 ‘스승’으로 만났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눈물’과 ‘아픔’과 ‘하소연’에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치유해 주시고, 자신들의 배고픔까지 해결해 주셨습니다. 자신들 편에 서 주시는 예수님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하느님 나라 가르침’까지 베푸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전혀 새로운 교훈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영적 갈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도 참 소중한데, 예수님이 그 갈망을 알아주시고 인도하시는 ‘목자’와 ‘스승’까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한 없이 기뻤고,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뒤따르는 군중들을 향해 예수님은 돌아서셨습니다. ‘돌아섰다’는 것은 뭔가 가르치실 특별한 말씀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도 ‘굳은 결기’가 느껴집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가 14:26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가 14:27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 루가 14:33

세상에! 이것이 그 때의 예수께서 당신을 뒤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요구하신 ‘제자도의 조건들’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가족과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가진 것(재산)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하나 같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재산’을 버리는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족’을 미워하라니 너무하십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원문에 쓰인 그리스어는 영혼, 목숨, 생명을 뜻하는 ‘프시케’입니다)마저도 미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놀란 가슴을 가다듬고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요구하신 첫 번째 ‘제자도’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가 14:26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가족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라’ 가르치신 예수님인데 ‘미움’을 요구하시다니 너무나 의외입니다. 분명 ‘미움’은 ‘사랑의 반대’이고,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십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계명’을 어기라고 공공연히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형제와 누이들을 미워하셨습니까? 게다가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르치실 때는 언제고 여기서는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하십니다. 이런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가 근본주의자들처럼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진짜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움’이나 ‘분열’은 그리스도교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제자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성서주석가들은 여기서 번역의 어려움을 지적합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일상어는 ‘아람어’(고대 셈족의 언어)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모국어도 ‘아람어’이고, <복음서>에도 몇 단어와 문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바’, ‘라보니’, ‘게파’, ‘보아네르게스’, ‘다비타’, ‘탈리타 쿰’, ‘에파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등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아람어’로 가르치신 내용을 나중에 ‘그리스어’로 옮길 때 어떤 단어는 그 본래적 의미를 다 살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미워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미세오)를 본래의 ‘아람어’로 돌려서 용법을 밝혀내야 합니다. 아람어 연구자들은 ‘미워하다’란 말이 ‘덜(조금) 사랑하다’란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밝혀냈고,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라고 지침을 줍니다. 평행본문인 《마태오복음》에서도 이 구절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옮겼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마태 10:37). 《현대인의 성경》은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으로 옮겼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사랑해야 한다”로 옮겼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나보다 더 사랑하면”이라고 옮겼습니다. 이런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이 요청하시는 ‘제자도’는(이어질 나머지 두 가지까지 합쳐서) ‘제자’가 되기로 ‘선택’한 사람은 어떤 ‘각오’로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 ‘각오’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자신의 ‘선택’(결정)과 그에 따른 ‘대가 지불’(책임, pay the price)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선택’(결정)과 ‘책임’(대가 지불)의 연속’입니다. 한순간 한순간의 ‘선택’이 모여서 하루가 만들어지고 그 하루하루의 ‘선택’이 모여서 1달, 1년,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선택’은 ‘자유의지’라는 ‘대전제’에 근거합니다. ‘자유’(자유의지)가 없다면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흔히 “자유가 무서운 이유는 그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책임’(대가)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며칠 전 우여곡절 끝에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국교수의 ‘청문회’(聽聞會)가 있었습니다. 그가 법무부장관 후보가 되기로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수용)하던 순간, 이미 그는 자신(가족)이 앞으로 치러야할 ‘대가’(책임)마저 결심한 셈입니다. 그 ‘대가’(책임)가 자신과 가족을 공격하는 ‘거짓뉴스’와 ‘거짓선동’과 ‘거짓 환상쇼’와 ‘집단적 인격살인’이라는 ‘억울함’을 동반하더라도 말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뇌과학은 “자유의지는 환상”이라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기까지 합니다[《 Nature》 2008년 4월 뉴로사이언스 온라인 판: 당신이 알기 전에 뇌가 먼저 결정한다(Brain makes decisions before you even know it.)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존-딜런 헤인즈 연구팀의 보고서 참고]. 이런 연구결과들은 우리가 자유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선택’(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우리의 마음을 ‘몇 초 전’(단 몇 초에 불과하지만 그들 연구에 따르면 이 몇 초는 뇌의 기능에 있어서는 인생과도 같은 길이의 시간이라고 합니다)에 이미 ‘결정’한다는 보고들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선택(결정)은 ‘뇌 탓’입니다.

물론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존-딜런 헤인즈 연구팀의 보고서는 행동의 폭을 두 가지로 제한한 시도들이기에 뇌과학자들이 그 연구결과를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재미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욕망’(갈망)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선택’(결정)을 뇌과학은 주로 ‘뇌의 기능’(뇌의 신경적 연결)에서 찾고, 심리학(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서 찾으며, 역학(易學)은 ‘사주팔자’에서 찾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단지 ‘뇌’라고 하는 ‘물질덩어리’로만 정의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단지 ‘무의식’만으로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타고난 천운’에 맡기고 살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받는 자극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변화되고 만들어져갑니다. 이웃 종교인 불교식으로 말하면 ‘조건’과 ‘인연’에 따라 ‘업’(카르마)을 짓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 인간(인간관계), 자연(사회적 환경)과의 관계(교감) 속에서 인간은 만들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 ‘현존재’인 인간(자신을 포함하여)에 대해 우리는 ‘서로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에 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한 생명이 어려서부터 보다 나은 ‘선택’(결정)을 하며 자라갈 수 있는 ‘가정 환경’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정이 급속히 해체되어 가는 시대를 살면서 교회는 하느님이 불러주신 ‘생명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이 세상에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청소년들이 보다 크고 넓은 세계와의 연결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성장해 갈 수 있는 그런 ‘사회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와 개인주의, 돈에 대한 탐욕과 숭배, 소유를 위한 끝없는 경쟁, 성공(효율)과 성과주의(실적주의) 강박, 거짓 사랑과 물질주의에 빠진 이들이 삶의 방향을 돌이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연대해야 합니다. 특히 이 시대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회복하고 보다 숭고하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도록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연합’하며 살아가도록 교회는 ‘사랑의 그리스도’를 착한 행실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그런 선교를 하라고 ‘성공회’는 이 땅에 존재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당신을 따르기로 ‘선택’한 그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값)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 ‘선택’이 어떤 ‘값’을 요청하는지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그 ‘대가’는 일종의 ‘포기’입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다른 것들의 ‘포기’를 동반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선택’(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합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습니다. 제자란 그런 뜻입니다.

또 그 선택에 대해 치러야할 ‘대가’를 적극적으로 말하면 오롯한 ‘충성’입니다. 누군가와 결혼하기로 ‘선택’(결정)하는 일은 오직 그 사람에게만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일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 것을 ‘선택’(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께만 ‘최우선의 충성’을, ‘최우선의 사랑’을 바치기로 서약한 셈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요청하시는 ‘값’(대가)이었습니다. 이렇게 ‘선택’과 ‘대가 지불’은 항상 같이 갑니다. 그 선택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경우처럼, 가족들과의 ‘긴장’과 ‘갈등’, ‘박해’와 ‘핍박’이라는 또 다른 ‘값’(대가)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제자도’가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예수님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나 ‘형제’나 ‘누이’를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계속해서 ‘목수’(건축노동자)로 살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심은 가족이었고, 가족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구성원들에게 매우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일만 하도록, 그 가족에게만 소속되도록 세상에 파송된 것이 아닙니다. ‘목수’ 일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사를 이롭게 하는 모든 직업은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일터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제대’란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놀라운 ‘성령체험’이 일어납니다(루가 3:21~22). 그 성령체험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정체성’으로 우뚝 서십니다. 그때 이후로 예수님의 삶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인도 속에서 광야의 유혹을 이기신 후(루가 4:1~13),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헌신을 ‘선택’하십니다. 자신과 그 가족에게만 소속된 삶이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고, ‘하느님 나라 건축자’로 살아가는 ‘선택’을 하십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규정’해 온 ‘과거’와 담대히 ‘단절’하십니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출가’를 감행해야 하는 그 ‘선택’은 당시의 가족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불명예’를 안기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출가는 ‘시므온의 예언’처럼,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과 가슴 아픈 일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루가 2:35).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 ‘하느님 나라’, ‘자신의 사명’에 ‘충성’이라는 ‘값’(대가)을 치르기 위해,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과거’로부터 떠나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뿐 아니라 형제와 누이, 일가친척을 떠나셨습니다. 나중에는 가족과 친척과 고향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받는 ‘대가’마저도 ‘지불’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하나 뿐인 ‘목숨’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완전히 증명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인정하다시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목숨’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절대적 목숨’마저도 ‘덜 사랑하라’고 제자가 되려는 그들에게(우리에게) 오늘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절대적 목숨’마저도 결국은 가족이라는 ‘과거’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존재의 기반인 그런 ‘과거의 친밀한 가족관계’ 보다도, 그 과거에 기반을 둔 ‘절대적 목숨’보다도 ‘현재’의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요청하십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규정’해 온 생물학적인 ‘과거로부터’ 담대히 ‘단절’하라고 요청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필요한 일꾼은 그런 ‘과거’에 예속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과거’는 ‘하느님 나라’라는 ‘새 시대’의 도래에 마땅히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일꾼은 자신의 기반인 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예수와 함께 참여하고 있는 ‘생명의 일’을 통해 정의(定義)됩니다. 하느님 나라 일꾼은 ‘미래’에 성취될 ‘희망’, 즉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 되는 하느님 나라에 의해서만 정의됩니다. 그런 미래를 위해 ‘과거’(친밀한 가족관계와 자기 목숨)와 단절할 수 없다면, 그런 ‘희망의 선택’을 할 수 없다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자기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 되자는 이 첫 번째 ‘제자도’는 이어지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두 번째 ‘제자도’에서 더 직접적으로 요구됩니다.

우리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참된 선택’과 ‘충성’이라는 ‘대가 지불’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배우는 사람’을 ‘학생’이라고도 하고 ‘제자’라고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학생’이 되려는 이들이 아니라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학생이 아니라 제자가 되려고 ‘신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배움을 통해 도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결국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자기 정체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이웃,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 ‘자기 정체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더욱이 영성적 차원에서 볼 때 ‘학생’과 ‘제자’는 분명 다릅니다. ‘학생’은 단지 ‘머리’로 ‘지식’을 배우는 사람이고, 제자는 ‘가슴’(마음)으로 스승께 ‘묻고 들으며’(기다리며) ‘진리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머리’로 ‘지식’을 배운 ‘학생’은 언젠가 떠나지만(십자가 수난이 있기 전날 밤 제자들이 그랬지요) ‘가슴’으로 ‘묻고 듣는’ 제자는(성령 체험 후의 사도들입니다)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학생’은 머리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제자’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제자가 됐다는 것은 비로소 우리가 ‘마음’(가슴)으로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온전한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전에는 학생처럼 ‘머리’로 인식했습니다. ‘아, 이제 알겠어! 그렇게 하면 되는구나. 나 그거 믿어.’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 인식한 것으로는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머리로 인식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여러분은 학생입니까? 제자입니까? 제자라면 누구의 제자입니까?

예수의 ‘제자’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오직 예수께’ 배우려는(묻고 듣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예수께 배우려는 사람은 ‘최우선 자리’에 ‘예수’를 둡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여정’에 있어서 예수 외에 그 무엇도, 어떤 관계도, 그 누구도 ‘앞자리’를 차지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부귀영화도 예수님보다 소중할 수 없습니다. ‘가족’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영혼, 목숨, 생명)마저도 ‘최우선’ 할 수 없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어떤 관계도 스승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과 ‘순종’과 ‘사랑’보다 ‘우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요구’는 대담하십니다. 모세로 대변되는 예언자나 바울로로 대변되는 사도들도 예수님처럼 그런 인격적인 ‘최우선의 헌신’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이러한 요구는 분명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특별한 스승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최우선 자리’에 모시고 따르고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을 ‘최우선 자리’에 모시면 우리 ‘서로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예수님은 분명 과거의 낡은 ‘자연적 가족관계’를 뛰어넘어 당신을 ‘가장 중심’, ‘최우선 자리’에 두고 살아가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지향하신 분입니다. 그 새로운 가족관계를 ‘하느님 나라’라고 합니다.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기로 ‘선택’한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그 ‘신성한 가족’에 희망을 겁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은 아닌 ‘하느님의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과거’로 규정되는 ‘자연적 가족관계’와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포기하라, 내려놓으라)는 요구를 실행합니다.

우리는 지금 ‘최우선 자리’에 누구를(무엇을) 두고 살고 있습니까? 당장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제자답게 스승이신 주님께 ‘기도’(祈禱) 속에서 고요히 여쭈어보십시오.

주님, 지금 나는 무엇으로 ‘부모’(처자, 형제자매, 나)를 삼고 있습니까?

분명 주님을 ‘최우선 자리’에 모시고 살아왔노라고 자부하실지 모르지만 주님의 대답은 다를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이 ‘미워하라’고 말씀하신 ‘부모’, ‘처자’, ‘형제자매’, ‘나’(영혼, 목숨, 생명)를 묻고 듣는 ‘기도’(祈禱)로 가져가면,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의지하고, 하나가 되어,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들의 ‘상징’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하느님 나라’, 즉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 되는 그 ‘희망의 미래’를 위해서 기꺼이 ‘잃을’ 각오를 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로 따르는 이에게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이 고백은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가 14:27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정말 강력하지만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다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답니다. 세상에!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당대에 ‘십자가’는 강도, 살인자, 반란군을 처형하는 로마제국의 대표적 ‘사형도구’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죽어야 할 악행을 저지른 죄인’임을 알리는 ‘공공연한 표시’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한 몫’ 누릴 줄 알았는데 정반대입니다. ‘영광’보다는 ‘고난’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멸시’, ‘조롱’, 그리고 그 길 끝에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그 ‘절대적 목숨’마저 가장 고통스럽게 잃을 각오를 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는 스승과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희생(고난)’과 ‘자기죽음’을 각오하라는 ‘직접적인’ 요청입니다. 이미 결말을 아는 우리는 ‘죽음’ 뒤에 ‘부활’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 때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도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제자도’는 지금이라도 잘 생각해 보고 계속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이지 ‘양자택일’하라는 선언입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그들에 앞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한 가족’이 되는(골로 3:11) ‘하느님 나라’, ‘새 시대’의 성취를 가져올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양자택일’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이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망대 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싸움) 수행을 위해 나서는 임금입니다. 둘 다 ‘일을 착수하기 전 합리적으로 철저히 계산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비용’과 ‘자원’을 훨씬 더 많이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용’과 ‘자원’이 충분치 않다면 자기 ‘명예’를 위해서라도 착수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그런 선택과 결심 전에 자신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강조하십니다. 앞으로 있을 일이 ‘영광’이 아니라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고난의 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일을 ‘망대 건축’과 ‘전쟁 수행’(싸움)에 비유하셨습니다. 자신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 ‘건축’이나 ‘전쟁’(싸움)과 같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제자도’는 무엇입니까?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 루가 14:33

이것이 ‘제자도’의 결론입니다. 정말 어렵고 너무나 철저한 요구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자동차나 집 같은 ‘사유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 재산으로 사회적 지위와 존경과 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정서적 재산으로 자존심이나 자부심이나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이런 것들을 모두 ‘버리라’고 요청하십니다.

도대체 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릴 수 있단 말씀입니까? 이것을 해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씀입니까? 하기야 ‘교회사’에서는 그렇게 살아간 ‘성인’(聖人)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생전 존경과 명예를 보상으로 받기도 했으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 할 수 없습니다. 분명 버린 것 같지만 다른 것으로 되돌려 받아 갖고 있던 셈입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그렇게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마르 10:28) 자부한 베드로마저도 다시 자기 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요한 21:3). 놀랍게도 그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였습니다. 이렇듯 세 번째 ‘제자도’는 모두에게서 실패되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도’마저도 모두에게서 실패했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그들이(우리가) 지킬 수도 없는 ‘제자도’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도’ 앞에서 낙담합니다. 그렇게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가족을 미워하기는커녕 가족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기보다 보존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피해서 달아납니다. 따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릴 수 없는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갖기 위해 애쓰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 자신에게서 발견된 진실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가 ‘제자도’를 실행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비용’과 ‘자원’을 합리적으로 따져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런 ‘비용’과 ‘자원’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에게는 그런 ‘비용’과 ‘자원’이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역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야 만이 ‘제자도’에 담긴 ‘참 의미’가 우리에게서 되살아납니다. 그 ‘참 의미’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제자도를 실천할 수 없다’는 진실입니다. 실천할 수 없기에 우리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과 실패를 ‘인정’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는 율법의 기능(機能, 목적)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기능(機能, 목적)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로마 3:20; 갈라 3:19,22a).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지식을 더 많게 할 뿐 아니라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게 합니다(로마 5:20; 7:5). 한마디로 율법은 ‘정죄’(定罪)하고, 우리 속에서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게 합니다. 또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임을 드러냅니다(로마 3:23).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절대로 지킬 수 없는 ‘약한 본성’의 소유자임을 드러냅니다(로마 8:3). 다시 말해 우리가 ‘무능력한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없기에 ‘저주의 위협’ 아래 놓여있음을 드러냅니다(갈라 3:10).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임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후견인’ 기능(機能)을 한다는 점입니다(갈라 3:24~25).

예수님의 ‘제자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대가지불로 요청하시는 ‘제자도’는 우리가 그렇게 실천할 수 없는 ‘약한 본성’의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를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과 실패를 인정하면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비유로 말하면 ‘제자도’ 역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종의 ‘후견 기능’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제자도’를 말씀하신 ‘참 의미’를 깨닫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 했던 ‘제자도’를, 우리에게는 불가능했던 ‘율법의 요구’를 몸소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로마 8:1~4).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갈라 3:13).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본래 그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 대신 ‘죄인’이라는 ‘누명’을 쓰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반역죄’와 ‘악행’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버림받아 ‘천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누명’을 쓰시고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이사 52:13~53:12).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죽기까지 온갖 ‘수치’를 참아내셨습니다(이사 53:7).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내셨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 일을 착수하시기 전, 당신이 ‘망대 건축’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비용’과 ‘자원’을 곰곰이 따지셨습니다. 그 일을 ‘착수’하시기로 선택(결정)하시면 어떤 ‘대가’(비용)를 치러야 할지를 먼저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명예’도, ‘능력’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충분히 아셨습니다. 더군다나 ‘멸시’와 ‘비웃음’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잘 아셨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또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아라…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느냐?”(마태 27:40b; 마르 15:32)라고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착수하신 하느님 나라 일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또 예수께서는 ‘전쟁’을 앞둔 임금처럼 심사숙고 하셨습니다. 1만의 군사로 2만의 적을 상대할 수 없던 임금은 서둘러 ‘사신’(使臣)을 보내 ‘화평’(和平)을 청합니다. 예수님도 하느님께 반역만 하는 이 세상이 하느님을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에 자신이 친히 ‘평화의 사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루가 2:14). 예수님이 이루신 그 ‘평화’는 ‘팍스 로마나’로 대변되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폭력과 억압에 의한 ‘거짓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가깝게 하시는 평화”입니다(에페 2:13).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는 평화”입니다(에페 2:15).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갈라놓는 평화’입니다(로마 8:38~39).

이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대신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제자도’의 가르침을 잘 준수해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때 요청하신 ‘제자도’ 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약속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1독서 《신명기》와 《시편》의 서문인 <1편>에서 찬미하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성취’하셨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그 ‘의’를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에게 ‘은총’으로 넘겨주셨습니다(로마 3:21~31). 그리하여 우리는 ‘율법’에 약속된 ‘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핵심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기대와 달리 ‘율법준수’에 실패했습니다.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대신 그들은 ‘죽음의 길’을 선택했고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율법준수를 통해 하느님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로마 3:20,23).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사람이 이룰 수 없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 즉 예수님을 최우선으로 선택한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은총으로 넘겨주셨습니다(로마 3:21~31). 이제 우리는 예수님 덕택에 ‘가나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선택하고, 불행을 선택하는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마음이 변하여 불순종하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신’(神, 우상)들을 따르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십자가에서 성취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 예수님을 죽음에서 높이 들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우주의 주님’으로 등극하게 하셨습니다(필립 2:9~11).

이제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기준은 ‘율법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누립니다. 우리가 가진 소유는 ‘일시적’이지만 십자가의 은총만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가진 소유는 죽으면 단 하나도 가져 갈 수 없으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총만은 ‘궁극적’입니다. 이렇게 크신 은총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 받은 삶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때로는 이러한 선택에서 빗나갈 때도 있지만 우리는 은총 받은 제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은총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모든 순간 은총의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보고, 십자가를 통해 이웃을 보며,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선택’을 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제자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제자’로 다시금 올곧게 세워 주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여 주시어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전하라고 ‘제자’로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길을 ‘선택’하는 일을 도와주라고 ‘제자’로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요, 한 가족임을 전하라고 ‘제자’로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은총으로 치러진 ‘대가’에 감사합니다. 머무는 자리마다에서 제자로 부름 받은 이 거룩한 책무를 착한 행실로 수행해 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대를 온 몸에 받고 파송되는 ‘복된 제자’입니다. 주님, 제가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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