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 연중2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 방식으로 살아가시오’입니다. 성경은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며 그 계명을 좋아하는 삶이 ‘지혜’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추악하게 경쟁하기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고 주님은 초대합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주님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과 형제애를 나눈 이들을 마지막 날 ‘영생’으로 보상하십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 방식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오늘은 대한성공회 모든 교회가 ‘여성선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해 오신 수많은 여성들을 통하여 오늘의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앞으로도 하느님 나라 선교에 헌신하는 더 많은 여성 교우들과 지도자들이 육성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죄인까지도 사랑으로 부르시어 새 계약을 맺으시나이다. 비오니, 이 땅의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믿음의 한 가족이 되어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의 나라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로 여성들을 불러 주셨나이다. 비오니, 대한성공회의 여성들이 교회의 선교를 위해 힘쓰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집회 10:12-18
  • 시편 – 112
  • 2독서 – 히브 13:1-8,15-16
  • 복음서 – 루가 14:1,7-14

연중 2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 방식으로 살아가시오’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도리나 이치를 잘 분별하는 정신적인 능력을 ‘지혜’(智慧)라고 말합니다. 흔히 ‘무지’(無知, 어리석음)의 반대로 쓰입니다. 일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달인’(達人)처럼, 어떤 분야의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갖기까지는 사물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정신적인 노력과 그 원리를 몸에 습관으로 붙이기 위한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인’이란 그의 행동을 통해 몸에 담긴 정신적인 정보(지식)와 습관이 ‘지혜’로 흘러나오고 있는 셈입니다.

지혜는 달인으로 불리는 이에게서만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 속에서도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인생살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크게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만일 먼저 자신이 상대방의 ‘긍정적인 의도’(욕구)와 ‘마음’(감정)을 헤아리고 반응해 줄 수 있다면 ‘관계’는 개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이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른 바 ‘관계의 달인’입니다. 지혜가 그의 말솜씨와 눈빛과 표정과 몸짓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그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인간관계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정신적인 노력(황금률처럼, 아무래도 종교가 큰 도움이 되겠지요)과 그 깨달음에 어울리게 육체의 ‘이기심’을 조정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관계를 지혜롭게 가져가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는 중입니다. 우리도 몸에서 지혜가 흘러나오는 그런 인간관계의 ‘달인’으로 성숙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터득하고 몸에서 흘러나와야할 진정한 지혜가 있습니다. “삶의 질서와 삼라만상의 원칙을 전체적으로 터득하는 일”입니다(욥기 38:3~39:30). 다른 말로 하면 “우주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파악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언젠가 이것을 ‘믿음’과 관련지어서 말씀드린 바 있는 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이란, “자기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이다”라고 했던 정의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과 지혜’는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질서와 원칙을 터득하고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언젠가 찾아올 죽음과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을 터득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단편선 <세 가지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삶의 질서와 삼라만상의 원칙에 대한 깨달음을 모아 전한 책이 ‘욥기’, ‘시편’, ‘잠언’으로 대표되는 ‘성문서’(케투빔)입니다. 그들이 성문서 작업을 하면서 확인했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모든 지혜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모든 지혜의 근원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알고’, ‘경외’하는 삶이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원(근본, 시작)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이 지혜자의 삶이라 가르칩니다(욥기 28:28; 시편 111:10; 잠언 1:7; 9:10; 전도 12:13, 집회 1:14). 지혜로운 사람, 즉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출발점은 하느님을 아는 것, 즉 내적으로 하느님과 연결되는 삶입니다(시편 1; 잠언 2:5~8). 성경은 특히 ‘안다’는 말을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부부처럼,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교제 상태에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인격적 교제 속에 있어야 비로소 하느님을 아는 삶입니다.

더욱이 ‘경외’(敬畏)란 말은 어떻습니까? ‘경외’ 또는 ‘외경’(畏敬)이라는 말은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의 본질은 노예의 삶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입니다(1요한 4:16~19). 겸손과 신뢰로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르게 알고, 경외(사랑)하는 사람인지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말씀)을 지키는 데서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사랑의 삶이 ‘지혜로운 삶’이며, ‘지혜’를 선물 받은 삶입니다(잠언 2:4~6).

오늘 <전례독서>는 이 ‘지혜’를 가르치며, 특히 ‘영원한 시간의 관점’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교훈합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는 ‘외경’ 《집회서》를 ‘차용’(借用)했습니다. 성공회에서 신앙의 걸음을 다시 떼는 분들은 ‘외경’(外經, Apocrypha)이란 말도, 《집회서》라는 책 제목도 생소합니다. 어쩌면 ‘정경’(canon)이란 말을 들어보신 분들은 ‘공동번역 성서에 포함된 외경은 이상한 책들 아닌가?’ 하고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회는 ‘외경’(천주교나 정교회에서는 이 책들이 ‘정경’의 권위를 갖습니다)을 ‘정경’만큼 교리를 정하는 권위로 삼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것이 성공회 전통입니다. 그래서 ‘준정경’(准正經)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간혹 성찬례에서 <전례독서>로 ‘차용’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초대교회는 성공회가 ‘외경’이라 부르는 책들을 포함한 ‘70인역 성서’(알렉산드리아 정경 전통)를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고향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어 ‘메시아 취임사’로(루가 4:18~19) 낭독하신 ‘이사야 예언서’(61:1~2)를 《루가복음》 기자는 ‘70인역 성서’ 전통에서 가져다 실었을 정도입니다. 이쯤 하고 ‘정경’ 전통의 또 다른 축인 ‘팔레스틴 정경’ 같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성서공부 시간에 나누겠습니다.

《집회서》는 “시라의 아들 예수”가(집회 51:30) 기원전 180년경 평생의 깨우침을 ‘히브리어’로 저술했습니다. 그 때는 ‘마카베오 혁명’(기원전 166~160)이 있기 전입니다. 이 책을 그의 손자가 132년경 ‘그리스어’로 번역했습니다. 책 제목에 붙은 ‘집회’라는 말은 사람들이 ‘특정 목적을 위해 모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집회서》는 ‘모임을 위한 책’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세례 할 예비 신자들을 ‘모아놓고’ 하느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육할 때 이 책을 사용했기에 이런 명칭이 생겨났습니다. 본래 ‘교회’(敎會)로 번역한 그리스어 ‘에클레시아’[ἐκκλεσία, ‘불러 모으다’란 뜻의 ‘ἐκκαλεώ’(에칼레오)에서 온 ‘여성형 명사’입니다. ek는 밖으로, caleo는 부르다]도 ‘회중들의 집합체로서의 모임’을 뜻하기에 《집회서》는 ‘교회(모임)의 책’(Ecclesiasticus)입니다.

《집회서》를 쓴 목적은 명백합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율법’(계명)대로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대한 ‘이방문화의 물결’ 속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를 가르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게 하려는 목적에서 기록했습니다. 먼저 ‘벤 시라’(히브리어로 ‘벤’은 ‘아들’을 뜻합니다. 시라의 아들)는 ‘지혜의 신비’를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인상 깊습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 집회 1:1
주님을 두려워함이 행복이요, 영예며, 쾌락이요, 환희의 극치이다. – 집회 1:11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요… 성숙이며…. 완성이다. – 집회 1:14a,16a,18a

그렇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 이것이 《집회서》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시대를 지배하던 ‘헬레니즘 문화’를 쫓아갈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 철학은 ‘지혜’를 강조하는 데,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참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의 ‘계명’(율법)을 좋아하여 충성하는 사람이, 비유하자면 《향연 Symposion》에 나오는 것처럼 애지(愛知)에 살고 있는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롭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교훈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좋아하여 충성하는 사람에게 ‘지혜’는 반드시 ‘보상’합니다.

이렇게 《집회서》는 오늘 우리가 찬미한 <시편 112편>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집회서》의 주제는 2독서 《히브리서》가 교훈하듯이 이 세상 풍조를 본받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참고, 로마 12:2).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병적인 자기중심성과 개인주의, 돈에 대한 탐욕과 숭배, 소유를 위한 끝없는 경쟁, 성공(효율)과 성과주의(실적주의) 강박, 거짓 사랑과 물질주의가 광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인정하기보다 인간 스스로가 주인이 되라고,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멋진 삶을 살 수 있다고 충동질하고 유혹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정신, 가치관, 세계관이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나라, 하늘의 시민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분명 세상 한 가운데를 살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따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삶을 ‘거룩한 삶’, 즉 봉헌된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은 ‘외딴 섬’처럼 홀로 살 때 생겨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즉 ‘교회’로부터 나옵니다. 물론 때로는 홀로 머무는 ‘고독’도 필요합니다. 그 고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에, 자기 생각에 속고 살아 온 나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의 관계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마저도 힘들게 해 온 그런 과거의 나, 자신이 알아 온 그때까지의 나와 단절하여 현재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몰입은 자신 안에 있는 자기발견의 ‘성소’(聖所)로 이끕니다. 그 성소에서 시간을 살다 꺼져갈 존재인 자신이 걸어야할 ‘자신만의 길’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자기 수용과 성숙과 변화로 연결되는 고독의 시간은 우리 각 자에게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오랜 고독’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투자하는 고독이라는 시간마저도 결국은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참된 고독은 우리 속에서 이타심과 연민과 공감과 연대를 불러올 뿐 아니라 우리를 관계의 장으로 이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관계 안에 있을 때 자신이 보다 큰 세계와 연결된 존재라는 진짜 힘을 얻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깊은 사람을 영성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집회서》라는 말에 담겨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모일 때, ‘혼자’가 아니고 서로에게 속하고 헌신하는 하느님 나라의 ‘동지들’임을 재발견합니다. 외딴 섬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대륙’이자 서로에게 힘을 주는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자매임을 재발견합니다. 세상 한 가운데를 사셨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따로 떼어 봉헌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재발견합니다.

그 발견, 그 깨달음은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위안’을 줍니다. 자신을 봉헌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시들었던 영혼은 ‘생기’(生氣)를 되찾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어느 새 하느님 나라의 숨결인 성령으로 가득 찹니다. 병적인 자기중심성과 개인주의의가 아니라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기쁨을 전하는 이로 파송됩니다.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나누는 삶’의 기쁨을 보여주러 파송됩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성공(효율)과 성과주의(실적주의)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함을 보여주러 파송됩니다. ‘참된 사랑’과 ‘영원한 세계’에 대한 추구가 아름다움을 보여주러 파송됩니다. 이런 삶은 하느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입니다. 이것이 제 2독서 《히브리서》 기자의 교훈이자 《집회서》가 헬레니즘 문화권에 살던 유대인들을 교훈하고자 했던 ‘지혜’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세상을 향해 열려진 지혜의 책이며, 우리가 《집회서》입니다.

오늘 낭독한 1독서 《집회서》 본문은 인간의 ‘오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주님께서 ‘자기만 아는 교만한 자’(군주, 자기중심적인 사람)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경고합니다. 마리아의 찬미인 <마니피캇 Magnificat>에 나오는 사회정의, 즉 ‘세상의 질서와 자리를 바꾸어 버리시는 분’에 대한 찬미가(루가 1:46~55) 벤 시라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14절). 한마디로 ‘오만’을 멀리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교훈합니다. 이렇게 해서 ‘겸손’과 ‘자리의 역전’,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자리’와 ‘보상’을 교훈하는 <복음서>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시편》은 <112편>입니다. 《집회서》의 가장 큰 주제인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누리는 ‘복’을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12편>은 <111편>과 여러 면에서 유사합니다. 둘 다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연속으로 사용하여 기록한 ‘알파벳 시’입니다. 길이도 같으며, 유사한 문구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학자들은 같은 사람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또 내용상으로도 《시편》을 여는 <1편>과 여러 면에서 유사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정당한 ‘보상’과 ‘사회 정의’라는 예언적 전통에 중점을 둔 ‘신명기 역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혜로운 삶과 정의(의로움)의 보상’이라는 주제가 되풀이되는 데 <복음서>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3절)는 복 있는 사람과 그의 집안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시인은 ‘벤 시라’처럼, 주님을 ‘경외하는’(사랑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찬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모든 ‘복’의 출발점입니다. <111편>에서 시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라 끝을 냈는데(10절), <112편>에서 시인은 “주님을 경외하는 이의 축복”을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말씀,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다시 말해 마지못해 행하는 ‘의무감’으로가 아니라 ‘기쁨’으로(내면으로부터) 주님의 계명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르치려는 바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라”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만들어내는 거짓 두려움에서 구출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만들어내는 거짓 두려움에 굴하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나 죄인들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계명)을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하기에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순종은 세상의 모든 과도한 욕망에서 그를 해방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믿음)하기에 그 마음이 든든하고 불행이 온다 해도 겁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두려움은 우리를 악의 길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막아주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를 기쁨으로 따르는 순종의 길로 인도합니다.

주님을 향한 의인의 경외(사랑과 믿음)는 집안이 하느님이 주시는 ‘복과 번영’을 누리도록 영향을 끼칩니다. 본문에 기록된 ‘복과 번영’은 물질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은 그들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 즉 ‘의로운 행실’의 도구들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물질적 부자가 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富)를 어떻게 ‘선용’(善用)하여 ‘의롭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신앙의 모범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고,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루가 6:20).

후반부(4~10절)는 주님을 경외하는 의인과 주님은 안중에도 없는 악인의 대조입니다. 의인은 어둠 속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이 태양이라면 그는 달입니다. 태양은 그 자체의 찬란한 빛으로 빛나지만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납니다. 하느님과 의인의 관계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의인은 세상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도 빛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 어둠이란 인간들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나쁜 소식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어둠에 둘러싸일 때 두려워하고 절망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의인은 그 어둠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납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소식이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며, 종국에는 ‘선’(善)으로 바뀝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온갖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줍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의인의 ‘관대함’(5, 9절)은 영원히 기억되고, 사람들이 그 영광스런 모습을 우러릅니다. 여기서 오늘 복음이야기와의 직접적인 연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이 읊어대는 의인의 ‘인물평’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주님을 경외합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그는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질고, 자비로우며, 인정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꾸어주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께 삶의 뿌리를 내렸기에 결코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한 악인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그는 의인을 보고 속이 뒤틀려 이를 갈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갈 것입니다(10절).

2독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3덕을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2독서로 낭독해 온 《히브리서》를 통해 믿음(11장), 소망(12장)에 대해 들었고, 오늘은 ‘사랑’(13장)의 교훈을 듣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경계 짓지 않는 ‘형제애’, 즉 연대의 실천입니다. 이어지는 생활의 교훈은 1독서 《집회서》를 설명할 때 이미 다루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복음서>는 잔치와 초대이야기인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식사’를 하시러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 가 음식을 잡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루가는 예수님이 ‘주빈’(主賓)이셨는지 밝히진 않지만 그렇게 상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전반부(1절, 7~11절)는 잔치(식사) 자리에 초대된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비유입니다. 교만을 경계하시고 겸손을 가르치시는 비유입니다. 후반부(12~14절)는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되갚을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초대하면 부활의 날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 ‘따끔하게’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두 이야기는 대상이 다릅니다. 물론 이 가르침들은 우리시대의 풍조와는 많이 다르기에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전반부(1절, 7~11절)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셨다고 시작합니다. 《루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좀 더 우호적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이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이 치유 사건 후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모의한 것으로 기록합니다(마르 3:6). 《마태오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단독으로 예수님을 없애 버릴 모의를 했다고 기록합니다(마태 12:14). 반면에 《루가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한 것으로 다소 약하게 묘사합니다(루가 6:11).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시거나 논쟁하기도 하셨지만(루가 12:1), 오늘처럼 그들의 식사초대에 응하기도 하셨습니다(루가 7:36; 11:37). 우리도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동화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건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는 데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지켜보고 있었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파라테레오’는 ‘주의 깊게 관찰하다’, ‘자세히 지켜보다’, ‘노려보다’는 뜻입니다. 어디 예수님만 그랬겠습니까? 오늘날도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주의 깊게 관찰’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공회 송파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파송하신 ‘소개장’(추천장, 편지)입니다(2고린 3:2~3).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성공회를, 송파교회를 알게 되며, 특히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읽을 수 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종의 ‘성경’인 셈입니다.

여기까지는 잔치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의 깊게 관찰한 장면입니다(1절). 이제 예수님이 그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십니다(7절). 보통 잔치를 베풀면 주인이 자리를 정해주기 마련인데 그 바리사이파 지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뒤로 물러서서 손님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뒀습니다. 손님들은 대부분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윗자리’란, 초대한 ‘주인’이나 ‘주빈’이 앉는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가까운 자리’입니다. ‘주인’이나 ‘주빈’ 옆에 자리한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이 다른 사람들 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였습니다. 한마디로 자리는 ‘사회적 지위’, 즉 ‘명예’의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은 ‘돈’이 절대적인 가치 기준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돈보다도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명예’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주인의 초대에 응했고, 자리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초대받은 사람의 명예가 월등히 높을 때는 ‘윗자리’를 내드려도 되니까 자리 배치가 수월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초대된 경우는 누가 윗자리를 차지해야 하는가를 두고 다투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성경에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안나’라는 여인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자신의 ‘자리’를 늘 지켰기에 구세주를 알아보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제베대오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위해 ‘한 자리’를 청탁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도 높은 자리다툼을 벌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 뿐 아니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더 높고, 좋아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합니다. 옛날과 다른 점은 그 ‘자리’라는 것이 명예보다는 ‘돈’이나 ‘권력’과 관련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말이 좋아 경쟁이지, 돈이나 권력을 더 갖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해도 별반 틀리지 않습니다. 취미활동으로 시작한 동아리에서든, 이익집단인 회사에서든, 심지어 영적공동체라고 하는 교회에서 마저도,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고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핵심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입니다. ‘오만’하게 스스로 ‘명예’를 차지하려다가는 주인으로부터 ‘불명예스런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이는 주인으로부터 ‘명예로운 자리’로 초대될 것입니다. 비유의 결어는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 루가 14:11

예수님은 그들에게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경쟁보다 더 급진적인 일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시대의 가치와 동떨어진 말씀처럼 들리기에 묵상하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대인관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겸손의 ‘처세술’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얄팍한 성공을 위한 처세술로 사용하라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반부 비유의 핵심은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잘 새겨 보십시오. 비유에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과 그 잔치의 ‘주인’이 등장합니다. ‘혼인 잔치’는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적 행사’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앉느냐는 지역 사회에서의 자신의 명예를 드러냅니다. 상황이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초대받은 사람이 ‘윗자리’에 앉았다가 ‘맨 끝자리’로 밀려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맨 끝자리’에 앉았다가 ‘윗자리’로 올라가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누가 밀려났고, 누가 올라갔느냐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잔치에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했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그들을 ‘주목’했다면, 이제 우리가 누구의 행동에 ‘주목’해야 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할 사람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이고, 그가 한 행동입니다. 주인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맨 끝자리’로 내려가게 하고, ‘맨 끝자리’에 있는 사람을 ‘윗자리’로 올려 보냅니다. 한 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참석자들의 자리를 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사람들의 자리를 정할 수 있는 주인’이란 과연 누구입니까? 전체 맥락에서 살펴보면 그 주인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그 혼인 잔치 주인의 행동은 ‘하느님의 행동’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믿음은, ‘나’ 라고 하는 유한자가 우주의 시공간에서 살아갈 ‘삶의 자리를 정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우리 삶의 자리를 정하시기만 할 뿐 아니라 ‘마음대로’ 바꾸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시공간에서 어떤 한 점을 찰나처럼 허락 받아 오늘을 살고 있다면, 자신이 뭐라도 되는 냥, 까불거나 ‘교만’을 떨지 말고, 언제나 ‘주님을 경외’하면서 ‘겸손히’ 그 앞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집회서》가 교훈한 ‘지혜의 삶’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나 사주팔자나 윤회나 환생, 운명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느님께 달렸습니다. 《집회서》가 교훈하듯이(15~17절) 민족을 낮추고 높일 뿐 아니라 인생들의 ‘윗자리’와 ‘낮은 자리’를 마음대로 판단하시는 창조주 하느님 손에 우리 인생이 달렸습니다. 우주의 시공간에서 선물 받은 자신의 한 ‘찰라’(지금 여기)를 만유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겸손히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것처럼, 하느님은 해와 달과 별의 ‘자리’를 정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시편 148:3~6). 바다와 땅과, 꽃과 나무의 ‘자리’를 정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시편 104:1~31).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정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처럼 까불고, 교만을 떨며, 위세를 떨쳐보아도, 언젠가 한낱 ‘티끌’로 돌아가야 할 가련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 ‘영화’라는 것이 들의 풀과 같고, 곧 시들어갈 꽃과 같을 뿐입니다(이사 40:6~8).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들이마신 그 첫 숨이 코끝을 통해 다시 나가면, 그것으로 끝인 ‘먼지’ 같은 허무한 존재일 뿐입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개입하셔서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 “야, 이제 됐어! 너는 저 끝으로 가!” 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지금 저 끝에 있는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을 향해서는 “얘야, 너는 이제, 저 위로 올라가라”고 하실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촛대’가 서야할 ‘자리’를 정하시고, 마음대로 그 촛대를 ‘판단’하시며, 그 ‘자리’마저도 옮겨버리실 수 있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주님께 오늘의 자비를 구하고, 겸손하게 그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을 신뢰하셨고, 비유 마지막에 하신 그 말씀을 완벽히 성취하신 분입니다.

《루가복음》 1장에는 마리아의 찬미인 <마니피캇 Magnificat>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루가 1:46~55). 마리아는 그 찬미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에게 갖는 의미를 밝혀줍니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다”고 노래합니다(루가 1:52). 예수님은 ‘자리’(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일을 하러 오신 ‘구세주’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성육신’과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성육신은 가장 낮은 곳이 가장 높은 곳이 되는 신비를 보여준 첫 단계입니다.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려 하실 때 로마 황제의 공주라는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갈릴래아 촌동네 나자렛에 살던 ‘동정녀 마리아’라는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셨습니다. ‘성탄’ 하셨을 때는 가장 명예롭지 못한 자리, 즉 ‘마소의 밥통’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렇게 종의 ‘신분’(자리)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7).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는 머리 둘 자리조차 없으셨습니다. 음식을 드실 때는 세리와 창녀, 즉 ‘죄인’과 ‘매국노’라 불리던 이들과 함께 ‘식탁’을 같이 하셨습니다. 특히 돌아가실 때는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죽으셨을 때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말하는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 무덤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라는 말처럼, 인류 구원을 위한 자신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죽음 속에서 ‘안식’하셨습니다. 다른 날이 아니라 안식일, 즉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 가시자마자 ‘안식일’이 시작됐다는 복음서의 증언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식 후 다음날, 하느님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인 무덤을 차지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가장 명예롭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그리스도 찬가’를 기록했습니다.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 필립 2:10~11

이 모든 일은 예수께서 종의 신분(자리), 즉 가장 낮은 자가 되시어 우리의 비참함에 동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가장 낮은 곳인 ‘무덤’으로 가시어 친히 ‘안식일’에 쉬시며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에 머무신 예수님은 안식일이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를 친히 보여주셨고, 그 ‘무덤’은 인류를 위한 ‘안식’을 성취한 곳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성사로 세우신 성 목요일로 시작하여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성금요일, 무덤 속에서 보내신 안식일인 성토요일, 참 승리의 날인 부활절에 모든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이 걸쳐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과 사역과 시간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 즉 안식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이 하나로 함께 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마음으로부터 부르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마태 11:28).

후반부(12~14절)는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잔치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 사는 이웃사람을 초대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초대된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명예)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초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같은 사회 계층끼리만 어울리는 삶은 ‘잘못’입니다. 그런 초대는 예수께서 혐오하신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자기와 다른 ‘지위’(학연, 지연, 혈연)의 사람들은 ‘울타리 밖’으로 배척하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주고받는 ‘금수저’ 삶은 이제 그만 두라는 ‘경고’입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으로 쌓아올린 ‘장벽’을 허무는 일입니다. 그 ‘장벽’을 허물고 ‘되갚을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들’을 ‘안으로 초대’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들’이 대접받는 사회, 그런 하느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러 저런 이유와 기준으로 서로를 경계 짓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형제자매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예수님은 꿈꾸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는 때 서로를 갈라놓았던 세상의 기준들은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로 경계를 짓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고받는 것에 익숙한 현실 세상과는 맞지 않고 너무나 혁명적으로 보입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금 타령’을 해가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회를 만드는 일에 반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필요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세금 많이 든다며 반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사회는 과연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사회입니까? 우리 사회는 과연 사회적 약자들에게 공정한 사회입니까? 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사회는 아닙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끼리만 교류하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장벽’을 높이 쌓고 있는지 모릅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임대아파트 단지 아이들과 같은 초등학교에 배정받지 않게 해달라고 교육청에 압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과연 없겠습니까? 그동안 교회를 잘못 다닌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살아가는 이들은 ‘부활의 날’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다시 말해 의인들이 부활하는 때인 ‘영원한 시간’의 관점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가 ‘지혜롭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이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어떤 이들’의 착한 이웃, 친구, 스승, 목자, 구세주, 주님이셨는지 명백히 가르쳐줍니다. 그들은 잔치를 베풀 때 초대해야 할 목록에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그들은 어울릴 수 없는 죄인 취급을 받았고, 자신이 받은 것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사회적 약자들’은 우리의 개인적 삶 뿐 아니라 교회로서의 삶에도 함께 초대되어야할 하느님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자선이나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인 형제자매이며, 아마도 하느님의 영원한 잔치에서 우리 옆에 앉아있을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을 초대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저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목록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지부터 먼저 묻고 싶습니다. 사실 잔치를 베풀 때에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초대하라’는 말씀은 그 일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당신이 주최하시는 ‘구원의 잔치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초대는 우리의 ‘수고’나 ‘노력’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부’(富)나 사회적 ‘지위’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적 ‘자질’이나 ‘자격’이 있어서 초대된 것이 아닙니다. 잔치 초대는 오직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은총으로 되갚을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속죄’되었고, 영원한 지옥 형벌은 ‘면’(免)하여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사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과 은총’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말고 우리가 세워야할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명예’와 ‘영광’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받은 이러한 ‘사랑과 은총’을 되갚을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구원의 식탁’에 우리를 불러모아주셨습니다. 우리는 담장 바깥에서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족으로서, 그 일원으로서 지금 주님의 잔치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선택되었고 사랑받고 있습니다. 종이나 노예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끄시며 “얘야, 저 윗자리로 가자”라고 말씀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리 가까이 앉혀주십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렇게 구원으로 초대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 ‘받은 사랑과 은총’처럼 우리 역시 되갚을 수 없는 처지의 ‘사회적 약자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그런 이들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 자녀의 합당한 삶입니다. 그들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기 위해 함께 앉으며, 그들의 처지와 형편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랑의 삶’이 예수님 정신에 맞는 삶입니다. 그런 삶의 자리야말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보좌’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보좌가 저 멀리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살아 간 이는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의 ‘보상’(報償)을 받아 ‘어린양의 영원한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교회와 특히 성직자들이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권력자와 부자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하려다가 ‘영혼의 힘’을 잃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이들의 눈에는 그런 교회와 성직자들이 부러워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이 오실 때에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만’을 멀리하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추악하게 경쟁하기보다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자리를 정’하시기만 할 뿐 아니라 ‘마음대로’ 바꾸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시공간에서 어떤 한 점을 찰나처럼 허락 받아 오늘을 살고 있다면, 자신이 뭐라도 되는 냥, 까불거나 교만을 떨지 말고, 언제나 주님을 경외하면서 겸손히 그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생은 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나 사주팔자나 윤회나 환생, 운명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느님께 달렸습니다. 민족을 낮추고 높일 뿐 아니라 인생들의 ‘윗자리’와 ‘낮은 자리’를 마음대로 판단하시는 창조주 하느님 손에 달렸습니다. 우주의 시공간에서 선물 받은 자신의 한 ‘찰라’(지금 여기)를 만유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형제애’로서의 ‘선한 의무’를 다하며 겸손히 살아갑시다. 우리가 자신과 ‘배경’이 다르다고 사랑의 초대에서 제외해도 좋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차별 없이 모두를 하느님 나라 자녀로 초대하며 살아간 ‘사랑의 삶’을 하느님은 반드시 ‘영원한 생명’으로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방식을 살아내야 합니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서 우리 모두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저희가 어찌 보상을 바라겠습니까!
다만 당신께 배운 대로 사랑의 사람으로 사는 일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