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25. 연중21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는 구세주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오늘눈물을 닦아주시고, ‘오늘마음을 만져주시며, ‘오늘 날을 열어주시는 으로 증언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생존권을 위협받고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불의’와 ‘고통’과 ‘무자비함’에 대해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오늘의 세상”을 만들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나라’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그런 세상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신장하는 일에 앞장서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심판의 하느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나이다. 비오니, 온 교회가 주님을 더욱 경외하며,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8:9하-14
  • 시편 – 103:1-8
  • 2독서 – 히브 12:18-29
  • 복음서 – 루가 13:10-17

연중 2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예수 그리스도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는 구세주입니다. 예수님이 오늘눈물을 닦아주시고, ‘오늘마음을 만져주시며, ‘오늘 날을 열어주시는 구세주시라는 증언들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1932년에 쓴 <내일은 없다>는 시(詩)가 있습니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내일은 없나니

‘시’(詩) 해석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 문학평론가들의 주장입니다. 오롯이 독자의 몫입니다. 제 감상(感想)으로는 윤동주는 ‘내일’이라는 개념이 정확히 잡힌 시인입니다. ‘내일’이 갖는 상징은 대체로 ‘희망’, ‘꿈’, ‘위안’입니다. 하지만 내일이라는 말에서 그런 것들이 연상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밋밋하게 ‘내일’ 그 자체여도 상관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희망 없던 식민시절’을 살던 소년 윤동주의 본래 마음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절망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 청년실업과 고용불안, 혼인율 저하와 인구절벽, 고령사회와 노인빈곤(노인혐오), 세대갈등과 지역갈등, 양극화와 갑질문화 등을 꼽습니다. 객관적인 데이터로 보아도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위입니다. 이 절망적인 사회를 살고 있는 ‘고단한 얼굴들’에게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요? 그들은 교회가 이 절망적인 세상에 꼭 ‘필요하다’고 느낄까요

교회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만큼 ‘희망’, ‘꿈’, ‘위안’을 많이 말하는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고통과 불안’에 공감하면서 자기존재의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회를 만들자고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사회이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어야 하는지 보다 명쾌하게 사회를 향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이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그 대답을 내놓아야 할 주체들입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그 대답을 내놓아야할 사회적 책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오늘’만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여기’(here & now) 밖에 없습니다. 매초마다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습니다. 오늘에,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이 지혜자라고 영성가들은 노래합니다. 우리는 항상 ‘오늘’을 살아갑니다. 어제는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고, 내일은 다시 왔으면 하고 ‘기대’할 뿐 정말 우리에게 허락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진실’이 사람들 귀에 잘 안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잘 알아들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을 사십시오.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할 사람이 있으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용서해야 합니다. 회개할 일이 있으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있으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감사해야 합니다. 정의를 실천하려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실천해야 합니다.

<전례독서들>도 ‘오늘’을 기쁜 날, 귀한 날, 감사의 날, 구원의 날, 해방의 날, 치유와 회복의 날로 우리에게 안겨주시는 ‘주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는 항상 ‘오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교는 항상 ‘오늘’을 위한 것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는 《이사야》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제 2이사야’(40장~55장), ‘제 3이사야’(56장~66장)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제 1이사야’는 예루살렘(유다백성)의 ‘죄’에 대한 ‘고발’과 ‘심판 선고’가 지배적입니다. 제 1이사야는 두 번에 걸쳐 예루살렘이 침공당하는 전란을 겪었고(기원전 735, 701년), 북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기원전 722년). 이 전란의 시기에 ‘제 1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과 징벌’(야훼의 날)을 면하고 ‘구원받는 길’은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데 있다고 초지일관 역설합니다.

‘제 2이사야’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이사 41:1~4,25~29; 44:28; 45:1~4; 46:11)가 언급되는 것을 통해 ‘바빌론 제국 멸망 직전 시기’(기원전 539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심판’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말씀의 대상이 ‘바빌론에 체류’하고 있습니다(이사 48:20). 그들이 이방신들과 신상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이사 40:19~20; 41:7,29; 42:17; 44:9~17; 45:16; 46:1). 세상의 어떤 신, 어떤 우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느님’이라 역설합니다(이사 40:18; 43:10~11; 44:6,8; 45:5~6,18,21; 46:5,9). 하느님의 창조와 구속신앙이 강조됩니다(이사 40:12~31; 44:24~28; 48:12~22; 51:9~16). ‘창조’와 ‘구속의 하느님’께서는 포로로 살면서 낙심과 절망의 날을 보내는 그들을 ‘위로’하시며, ‘희망과 용기’, ‘새 힘’을 주십니다(이사 40:1,21~31; 41:10,13~14; 43:1; 44:2,8; 49:13; 51:3,12,19; 52:9; 54:4).

이처럼 예루살렘을 바빌론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이 제 2이사야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새 출애굽’과 ‘귀향’, 즉 바빌론 포로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기대와 흥분, 낙관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이사 43:18~21; 48:20~22; 51:9~11; 52:11~12). 더욱이 포로민들만 ‘예루살렘’(시온)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왕으로서 함께 예루살렘(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약속입니다(이사 52:7~10; 54:11~12). 특히 ‘제 2이사야’가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42:1~9;49:1~7; 50:4~9; 52:13~53:12)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고난, 죽음,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초대교회는 해석해 왔기 때문입니다(사도 8:26~36).

‘제 3이사야’는 ‘바빌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시대는 포로민 중 일부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입니다. 귀향한 그들은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과 성전에 실망합니다. 재건을 위해 필요한 재정도 부족했고, 성전권력을 장악한 제사장들과 사회지도층에게 ‘부’(富)가 편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사회지도층은 ‘탐욕’으로 부패했습니다(이사 56:9~12). 대부분의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반복되는 자연재해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습니다(참고. 하깨 1:5~11). 이런 이유로 ‘제 3이사야’는 윤리적 차원의 삶과 행동, 즉 ‘정의’를 행하라고 사회지도층에게 외쳤습니다(이사 56:1; 58:1~9).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권리를 그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까지 확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잘못된 ‘단식’(종교행위)을 꾸짖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단식을 외칩니다(이사 58:1~9).

더욱이 귀향민들은 신앙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의인’과 ‘악인’입니다(이사 65:8~16; 66:2~6). ‘의인’은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신앙의 정절’(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 즉 율법에 충실하게 살려는 사람)을 지켰던 소수의 ‘남은 자’입니다. ‘악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순종하지) 않고 하느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물질적 풍요를 갈구하며 종교적으로 극도로 부패한 생활에 빠졌던 다수의 ‘우상숭배자들’입니다(이사 57:1~13; 이사 65:1~12). 소수의 의인들(하느님의 말씀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들)은 패역한 다수의 우상숭배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했습니다(이사 66:5). 이처럼 의인과 악인으로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이 심하다는 점이 ‘제 2이사야’에 없는 신학적 특징입니다.

‘제 3이사야’는 ‘안식일 준수’(이사 56:2,4,6; 58:13; 66:23), ‘금식’(이사 58:1~9), ‘성전예배’(이사 56:7; 60:7)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계 만민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보편주의’(universalism)는 ‘제 1이사야’(이사 2:2~4; 11:6~9; 19:19~25)와 ‘제 3이사야’(이사 56:1~7; 66:18~21) 신학의 최고봉입니다. 다시 말해 온 인류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날이 온다는 예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3이사야’는 도래할 ‘예루살렘’(시온)의 ‘영광스러운 회복의 새 시대’를 예언합니다(이사 60~62장). 의로운 소수자들에게 하느님은 앞으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십니다(65:17~25; 66:22). 새 창조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시온)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로 배정된 본문은 ‘제 3이사야’에 해당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오늘’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키며 살아야 하는지 들려줍니다. 다시 말해 ‘오늘’ 하느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의 조건들을 들려줍니다. 이 조건들은 그들 사이에 만연한 ‘잘못된 생활태도’와 ‘피상적인 예배’를 폭로하는 역할도 합니다.

먼저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조건들’이 제시됩니다(9~10절). 멍에(압제,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일)를 치우고, 폭력(삿대질)을 그만두며, 폭언(못된 말)을 거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삶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하느님께서 ‘해서는 안 된다’(멈추라)고 명령하시는 ‘오늘의 일들’입니다. 이어서 하느님은 그들이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할’(실천해야 할) 두 가지 일들을 명령하십니다. 굶주린 자와 ‘오늘’ 먹을 것을 나누고, 고통 받는(쪼들린, 가난한, 기가 죽은) 이의 소원(배)을 ‘오늘’ 충족시켜주는 일들입니다. 한 마디로 ‘사회적 약자(가난한 이들) 편’에 ‘오늘’ 서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사랑의 의무’는 ‘사회정의’를 부르짖던 예언자들의 결정적인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이와 빛이신 주님은 동행해 주십니다. 그런 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느님은 ‘오늘’ 받으시고 축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 멋대로, 자기 욕망만 충족시키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오늘의 일’을 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멈추고, ‘해야 할 일’을 ‘오늘 실천’하고 있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실천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면 그 역시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정의, 즉 약자들을 향한 ‘오늘의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일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들과 ‘동행’해 주십니다. 정말이지 하느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인생은 제 멋대로,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명령처럼, ‘약자들’을 향한 ‘오늘의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이들과 동행해 주십니다. 오늘 성찬례에 참여한 우리가 꼭 새기고, 날마다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두 가지 명령입니다.

더욱이 《시편》 23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그 조건들을 ‘오늘’ 충족시키는 이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배불리며 건강하게 지켜주십니다. 그러면 그는 물이 항상 흐르는 ‘동산’이요(예레 32:12),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됩니다(11절). 나아가 그는(그의 백성들, 아들들) 허물어진 옛 터전을 재건하고, 버려진 옛 터를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12절; 이사 61:4). 이렇게 오늘 이루어진 한 개인의 진정한 회복은 종국에는 ‘민족과 나라’의 재건과도 연결됩니다. 게다가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메시아께서 성취하실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도 ‘민족과 나라의 재건’이 너무나 필요한 시대에 삽니다. 광복 74주년이 지나도록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잔재들, 한국전쟁 69주년이 지나도록 반목 중인 민족 분단이 고통스럽습니다. 오래도록 진상을 호도해 왔으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언론사들’, 국정을 농단하고도 여전히 건재한 특권세력들, 썩은 내 진동하는 파렴치한 정치인들, 가짜 뉴스로 세상을 혼란케 하는 이들을 그냥 놔둔 채로 이 땅의 재건은 의미 없습니다. 제 3이사야처럼 우리도 ‘갈라지고 허물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을 배우는 신성한 곳들인 가정, 학교, 마을, 교회라는 공동체는 부모, 교사, 어른, 성직자의 잘못으로 허물어지고, 버려지며, 갈라지고, 황폐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도덕적 권리는 ‘돈’과 ‘소유’에 의해 유린(蹂躪)당하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병든 그림자들로 공동체는 급속히 ‘와해’(瓦解)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우리라도 하느님께서 ‘해서는 안 된다’(멈추라)고 명령하시는 일들, 즉 멍에(압제,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일)를 치우고, 폭력(삿대질)을 그만두며, 폭언(못된 말)을 없애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사회적 약자(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는 일을 ‘오늘’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허물어지고, 버려지며, 갈라지고, 황폐한 이 땅을 재건하는 일에 선한 도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십니다(13절). ‘제 3이사야’ 시대에 피상적으로 실천되던 ‘안식일 준수의 공허함’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 준수’를 소홀히 여겼다는 것은 하느님을 소홀히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그들이 공허한 피상적 종교의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킨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승리자가 되어 하느님께서 조상 야곱에게 주신 ‘유산’(땅의 소유)을 먹고 살게 될 것입니다(14절). 이렇게 ‘제 3이사야’는 ‘계약 전통’에 더 깊이 ‘충성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구절(14절)은 19세기 후반 유대인들 사이에 ‘시온주의’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영국 정부가 채택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하기로 한 외교문서)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1948년 이 선언에 기초해 유엔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재건하게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계속되는 분쟁은 ‘제 3이사야’가 선포한 조상 야곱에게 주신 ‘유산’(땅의 소유)을 먹고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그 정치적 영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시편》은 다윗이 지은 <103>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은덕’(사랑, 자비)을 기리면서 찬미하는 ‘감사 시’(詩)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을 불러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요구합니다(1절). 마치 그의 ‘영혼’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하느님을 충분히 찬미하지 않았던 것처럼 불러 세웁니다(2절). 그런 다음 삶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찬미합니다. 그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모든 ‘중병’에서도 고침 받았습니다(3절). ‘죽음의 세계’(스올, 구렁)에 도달한 것 같은 ‘삶의 위기’에서 구원받았고, 넘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4절). 정말이지 하느님은 그의 인생에 ‘복’을 가득 채워주시어 ‘독수리’ 같은 활력을 불어넣어 이끌어 주셨습니다(5절, 이사 40:31). 하늘을 나는 새들의 왕, ‘독수리’라는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가 체험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 대한 찬미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펴시고 ‘억눌린 자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이라 찬미합니다(6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이 사회와 약자들에게까지 골고루 베풀어진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보편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덕을 찬미하는 일에만 함몰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그 권리가 확대되는 그런 ‘오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시인은 예언자들이 선포한 ‘정의의 전통’과 함께 하느님께서 모세와 계약’을 맺어주신 일을 찬미합니다(7절). 말하자면 하느님의 자기계시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숨기시는 대신 계약(율법)을 통해 자신의 뜻을 밝혀주시고, 자신의 행사를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율법을 기억하면서 모세 이후 지금까지 그들 역사에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의 일들을 상기하자는 찬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영원성’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라 찬미합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자비와 은총의 신, 좀처럼 화를 내시지 않는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으로 계시하신 바 있습니다(출애 34:6). 정말이지 하느님의 이러한 자비와 은혜가 그들에게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벌써 끝장났을 것입니다. ‘오늘’ 자신과 민족 위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덕을 향한 ‘감사 시’(詩)입니다.

시인은 이처럼 그들 역사에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영원성’, 모든 억눌린 이들을 향한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보편성’을 찬미합니다. 이 영원성과 보편성은 인간의 무상함과 대조되어 후반부에서 노래되는데(14~17절), 오늘 시편은 그 부분을 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2독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노래하는 ‘12장’ 후반부에서 배정되었습니다. 물론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70인역 성경》에 접근하기가 쉬웠던 사람 같습니다. 본문에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의 분위기가 먼저 언급됩니다(18~12절, 참고. 출애 19:12~13; 신명 4:11; 5:23~27; 9:19). 이렇게 시작한 이유는 ‘시나이 산 계약과 시온산(골고타) 십자가 계약’,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나이 산’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시온 산’으로 옮겨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줍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과 하느님의 현존’을 위한 상징합니다.

먼저 ‘시나이 산’은 엄위하신 하느님과 대면하는 ‘두려움’, ‘공포’, ‘접촉불가성’, ‘죽음’을 상징하는 강조입니다(18~21절). 반면 ‘시온산’(골고타)는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기다리는 ‘영광’을 상징하는 강조입니다(21~24절).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으며,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순교한 성도들이 함께 있으며,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같은 대비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더 본질적인 곳으로 이끕니다(25~29절).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비입니다. 모세도 하느님의 메신저였고, 예수님도 하느님의 메신저였지만 둘은 전혀 다른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불완전한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완벽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땅이 뒤흔들렸다’는 《시편》의 기록들을(시편 68:8; 77:18; 114:7) 상기시킴으로써, 마땅한 경외심으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을 교훈합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차지한 사람답게 ‘감사’하며 살라고 교훈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의 우리는 하느님의 손에 붙잡힌 복된 인생이라는 교훈입니다.

<복음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하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와 유다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며,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고 보도합니다(마르 1:38~39; 루가 4:14~16, 31~37, 43~44). 특히 ‘가르치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이 ‘랍비’로 인정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직접 여러 ‘회당’을 찾아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에 사람들은 감동했습니다(루가 4:15,22,32,36).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감동한 사람들 덕택에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루가 4:14,37). 공생애 초창기만 하더라도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여행을 하시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오후가 되면, 방문한 마을에 그대로 머무르셨습니다. 안식일은 매주 일곱째 날이지만, 오늘날의 요일 개념으로 금요일 해가 진 뒤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이런 시간 개념은 창세기에 기록된 ‘밤, 낮 하루가 지났다’에서 유래했습니다(창세 1:5). 동이 터올 때를 하루의 시작으로 삼는 우리 문화와 비교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과 마을의 회당 봉사자가 세 번에 걸쳐 나팔을 붊으로써 거룩한 날의 시작과 끝을 알렸습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안식일’(히브리어로 Shabbat,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중지하다. 멈추다”에서 유래, “쉬는 날”이라는 뜻)을 제정하신 분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하셨습니다(출애 20:8~11; 31:13~17; 신명 5:12~15).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들이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출애 20:11). 그들의 ‘기원’이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

또 ‘안식일 준수’를 통해 하느님은 그들이 누리는 ‘쉼’이 하느님 덕택임을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신명 5:15).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약자)하던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그 같은 ‘쉼’을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 안식일은 그들이 ‘종살이’로부터 얻게 된 ‘자유’를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하느님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이의 영원한 ‘계약의 표’가 되는 날입니다(출애 31:13~17). 특히 ‘약자 보호’의 정신이 안식일에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평등한 사회관계의 구현이 ‘안식일 준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왕이든 노예든 반드시 ‘쉼’이 필요한 존재임을 하느님께서 친히 안식하심으로써 모범이 되어 주셨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안식일’을 주신 목적대로 인생들이 이 날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다른 날들은 자기를 위해 살더라도 이 날 만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을 예배하며, 하느님을 기리며, 하느님을 위하여 살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문화적 ‘시온주의’ 제창자였던 ‘아하드 하암’(Ahad Ha-am 1856-1927)은 ‘안식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둥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의 문제 말입니다. 따라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래로 예수님 당시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하는가?’를 두고 많은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이른 바 ‘안식일 법 논쟁’입니다(대표적으로는 39가지 금지조항).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며(출애 16:29), 마을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많은 ‘안식일 법’(규정)을 다 살필 수는 없고, ‘질병 치료’와 관련한 부분만 아래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회당’(그리스어로 Synagog, ‘모임’이라는 뜻)은 유대공동체의 종교와 사회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그 보다 더 중요한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우선 천문학적으로 유대인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배꼽)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천동설’이라 합니다. 이 천동설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세 때까지의 ‘보편적인 세계관’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배꼽)에 위치한다고 믿었습니다. 지구의 중심인 예루살렘에는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자리합니다. 이 성전은 하느님이 그들 공동체 한 가운데 머물러 계신다는 물리적 상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가장 성스러운(거룩한) 곳’이라는 ‘중심 위치’를 차지하며,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속’(俗)된 곳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회당입니다. ‘회당’은 거룩한 ‘토라’(모세오경)를 필사하여 보관한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을 종교학에서는 ‘중심의 확장’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회당’에 모여 기도와 찬양, 성경 낭독과 설교로 이루어진 ‘예배’를 드렸습니다. 평일에는 ‘회당’이 ‘토라’(모세오경)를 가르치는 ‘학교’로, ‘집회장’으로, ‘재판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마르 13:9; 사도 22:19; 2고린 11:24). 심지어 나그네를 환대하는 ‘여관’ 기능까지 ‘회당’은 갖추고 있었습니다.

‘회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 성전이 있던 기원전 8, 7세기경으로 추정하는가 하면, 어떤 학자들은 기원전 6세기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라고 주장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웠다는 주장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포로기 이후인 기원전 4세기경에 ‘회당’ 제도가 완성되었다 주장합니다. 이처럼 여러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기원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늘 복음이야기 첫머리에서도 밝히듯이 ‘안식일’이면 ‘회당’ 예배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루가 4:16~21)이 예수님 시대에 이미 확고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회당’에는 예배(재판,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의 책임을 맡은 ‘회당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교사’(율법학자, 랍비)였습니다. 또 ‘회당’에는 회당장을 돕는 ‘시중꾼’이 있었습니다(루가 4:20). 예배의 중심은 해당 날짜와 절기에 맞춰 ‘토라’(모세오경)를 낭독하는 일입니다. 다음에는 ‘예언서’(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분류하는 구약성경의 역사서도 예언서에 속합니다)에서 한 단락씩 선택하여 낭독합니다. 우리 성찬례 <전례독서>의 원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때 글을 아는 유대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루가 4:16-21; 사도 13:15).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는 장면이 특이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침묵합니다. 아마 ‘예언의 성취’(루가 4:16~21)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루가 4:43-44).

“거기에 18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원문의 뜻대로 번역하자면 그녀는 스스로는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는 그런 최악의 처지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신체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영성적으로든)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병이나 장애를 갖게 되면 ‘죄’에 대한 ‘벌’을 하느님께 받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요한 9:2). 만일, ‘중병’이라면 하느님께 ‘천벌’을 받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병든 것도 서러운데 ‘죄인’ 취급까지 받았으니 ‘병자’(장애인)들의 처지가 얼마나 딱했겠습니까? 아마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해대며 그 여인을 벌레 보듯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명인간 취급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 여인을 ‘주목’하시고 가까이 부르십니다. ‘병마’ 때문에 ‘주변부’로 내몰렸던 여인을 예수님은 ‘중심’에 세웁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아브라함의 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 – 루가 13:12

“떨어졌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폴리오’는 ‘풀려났다’, ‘해방되었다’, ‘석방되었다’,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재미있습니다. 루가는 ‘치유되었다’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병마’가 그녀를 ‘사로잡았기’(속박했기)에 발생한 문제였으니 ‘병마로부터 풀려났다, 해방되었다, 석방되었다’가 맞습니다. 그런 다음 ‘손’을 얹어주시자 즉시 허리를 꼿꼿이 폅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몸을 펼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개입하심으로 ‘속박’에서 풀려났기에 몸을 펼 수 있습니다. 몸을 편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그녀는 분명히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이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는 ‘회당’에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병마’는 내쫓기고, ‘공간’은 ‘정화’되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에 맞게 그녀는 ‘병마에서 풀려나 안식’(쉼)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말씀)과 치유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둘은 한 데 어울려 다닙니다. 마치 ‘천지창조’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일이 성취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병든 이에게 말씀하시고, 치유는 예수님께 ‘권위’가 있음을 증거 하는 ‘표’가 됩니다. 나자렛 출신의 ‘예언자’이요, ‘랍비’이신 예수는 당대 그들이 알던 여느 ‘율법교사’(랍비)와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광경에 심사가 뒤틀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 모임의 총책임자인 ‘회당장’입니다. 그는 오히려 군중들을 향해 ‘분개’하였습니다. 화를 냈다니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누가 보아도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치유가 모두에게 항상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어째서 분개했을까요? 혹시 ‘회당장’으로 살아온 자신의 ‘권위’가 다른 마을에서 온 예수라는 ‘랍비’ 때문에 위협 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요? 그는 신비한 기운에 눌려서인지 예수님께 직접 대놓고 화내지는 못하고 군중들에게 화를 터트리며 단호하게 말합니다.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 달라 하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 루가 13:14b

그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합니다(신명 5:13). 그의 심사가 뒤틀린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안식일 법’에 대한 언급입니다. 안식일인 ‘오늘’ 말고도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그 때 와서 치료 받으라는 ‘나무람’입니다. 그만큼 치료를 받으러 몰려 온 군중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회당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고 찬성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17절의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이 그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급성질병’으로 사람의 생명이 촌각을 다투게 되면 빨리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당시에도 ‘급성질병’이나 큰 사고로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의사를 불러 치료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성질병’의 경우 ‘안식일’에는 치료 행위를 할 수 없도록 ‘금지’했습니다. 그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18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인 여인은 어느 경우에 해당합니까? ‘만성질병’에 해당합니다. ‘오늘’ 당장 생명이 위독한 경우는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의 치유는 ‘일부러’ ‘안식일 법’을 어긴 고발대상이 됩니다.

비슷한 경우가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베짜타’ 못 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 이야기 말입니다(요한 5:1~13). 그 역시 오늘 복음이야기에 나오는 여인처럼, ‘만성질병’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고, 그는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은 ‘무화과열매’보다 무거운 ‘짐은 나르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그가 걷어들고 걸어가는 ‘요’는 무화과열매보다 몇 십 배 더 무거운 짐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 사람은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입니다. 그는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라”고 했기에 그렇게 한다고 대꾸합니다. 누가 자신을 고쳐주었고, 그런 말을 했느냐고 유다인들이 묻자 나중에 그는 ‘예수’라고 고자질합니다. 그 때부터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안식일 법’에는 생명이 위독한 경우가 아닌 ‘만성질병’의 경우에는 치유행위를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공공연히 치유행위를 하던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에 해당합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처럼 ‘미움’과 ‘박해’를 자초하는 일을 하신 것일까요? 하루쯤 늦추어서 ‘안식일이 지난 후’인 ‘내일’ 치료 해 준대도 고마운 일입니다. 내일 치료해준다 해도 그 여인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내일’이 아니라 굳이 ‘안식일’, 즉 ‘오늘’ 치료하심으로써 논란의 대상이 되십니다. 이 무슨 마음입니까?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초창기에 이미 ‘안식일’에 ‘만성질병’을 앓던 사람을 치료하신 일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미움’을 자초하신 일이 있습니다(루가 6:6~11). 심지어 평행본문인 《마르코복음》은 이 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가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고까지 보도합니다(마르 3:6).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자신을 고발하려는 이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오른손 오그라든 사람’, 즉 ‘만성질병’을 갖고 있던 그 사람을 치료하십니다.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하느님의 집’인 ‘회당’에서 당신이 그 같이 행동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루가 6:9).

이렇게 1독서 《이사야》에서 명령하는 ‘안식일’의 진정한 ‘정신’을 행동으로 성취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안식일 법’(안식일 규정)도 인간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데 기여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오늘 자유롭게 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회당’은 곤경 속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오늘 살림을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권’이 회복되고 ‘살림’을 받는 ‘오늘’이고, ‘공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내일이면 늦는다.”였습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오늘’ 차별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 앞에서 한가하게 ‘안식일 규정’이나 따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행동은 ‘오늘’ 사람을 살리고, ‘오늘’ 자유롭게 하는 ‘기준’에 따라 행해져야 함을 복음이야기는 들려줍니다. 오늘 응답되어야 할 ‘연민’과 ‘동정’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모든 행동의 가장 좋은 기준입니다.

정말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고통 하는 이웃이 회당장 ‘자신의 가족’이라면 어땠을까요? 그 고통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어땠을까요? 만일 ‘우리 가족이나 자신’이 고통 속에 있다면, 그 누구도 “하루쯤 늦춰도 된다”고, “내일이어도 된다”고, “기다려도 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이 마주하는 신음하는 인생을 결코 남처럼 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 ‘내일’이면 구원이 정말 늦을 수도 있습니다.

회당장의 말에 예수님도 그가 인용한 《신명기》 그 다음 말씀(신명 5:14)을 인용하여 책망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주지 말아야 한다 말이냐? – 루가 13:15~16

예수님의 노기 띤 얼굴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소나 나귀에게 사람들이 보여주는 ‘보살핌’과 자신이 방금 그 여인에게 보여준 ‘연민’ 사이의 유사점을 예수님은 도출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담장 안쪽에 물동이가 있고, ‘한 손’으로 고삐를 풀어서 소나 나귀가 물동이를 찾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노동으로 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관행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의 행위가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당신이 그 여인에게 보여준 ‘연민’도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밝히십니다. 더욱이 그 여인도 ‘아브라함의 딸’(공동번역에 ‘자손’으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딸, 여자후손입니다)이라고 예수님은 대우하십니다.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안식일보다 아브라함의 딸이 사탄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본래 ‘안식일’이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얻게 된 ‘자유를 기념’하는 날이듯이, 여인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어’ 자유를 얻게 하는 일은 안식일 정신에 비추어 보아도 너무나 적절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회당장’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치유를 목격한 회당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병마에 시달려온 한 인생과 그 가족은 기뻐하며 ‘회당’을 떠나갔습니다. 갈수 갈채를 받으며 ‘회당’ 밖으로 나가는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 갔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은 여러 훌륭한 일을 ‘회당’에서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훌륭한 일을 보고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안식일이 그들 사이에서 기쁜 날, 귀한 날, 감사의 날, 구원의 날, 해방의 날, 치유와 회복의 날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자유’를 위한 사람들의 필요에 ‘오늘’ 응답하는 것을 그 어떤 법 규정보다 우선하셨습니다.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오늘 우리의 사랑’은 곧바로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는 ‘오늘’ 실천하는 ‘인간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1요한 4:20).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은 ‘오늘 인권이 회복’되고, ‘쉼을 얻는 날’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회당은 ‘오늘 살림을 받는 곳’, ‘오늘 기쁨이 회복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그리스도교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경축하는 ‘주일’(主日)이 안식일을, 우리가 모이는 ‘성당’이 ‘회당’을 대체했다고 이해합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모이는 장소인 성당과 주일마다 봉헌되는 감사성찬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일 감사성찬례는 ‘쉼’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주일 감사성찬례는 ‘회복’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베푸시는 쉼을 얻고,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쉼과 회복을 얻은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쉼과 회복의 자리로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회당장처럼 ‘해방의 기쁨’, ‘회복의 기쁨’, ‘용서의 기쁨’, ‘치유의 기쁨’, ‘부활의 기쁨’을 맛보는 일을 결코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오늘’ 생명을 살리는 부활의 기쁨과 자유를 일상의 모든 면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거룩한 책무’로 부름 받고 있음을 기억하는 시간이 ‘감사성찬례’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모이고, 감사성찬례를 봉헌할 때마다 예수님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다 명확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 무거운 짐과 곤경, 불행과 억울함 속에 있는 이들이 호소하는 ‘오늘의 필요’를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야만 합니다. ‘회당장’처럼 법을 해석하는 위치에 있다는 이 시대의 특권층은 외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이런 ‘불의’와 ‘고통’과 ‘무자비함’ 앞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어찌 이런 이들이 없겠습니까? 강남역 사거리 CCTV철탑에 올라 두 달 넘게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60)씨,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서울요금소 캐노피 위에서 두 달 가까이 고공농성 중인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 등등…

우리 시대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기보다 정권과 대기업과 결탁하여 편향된 눈으로 바라보게 한 다수 언론의 ‘흑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을 빈번히 사회 혼란 세력으로 묶었습니다. ‘불법’이라는 구실로, 때로는 그렇게 유도하면서 ‘범죄자’를 양산하기도 했습니다. ‘불법’이라고 규정하기 이전에, 왜 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공직자의 첫 번 의무가 무엇이고, 참된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부터 재고했어야 합니다.

흔히 “법 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법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뜻이겠지요. 이것이 어찌 권력가들에게만 해당 되겠습니까? 게다가 어떤 경우든 사람 자체가 ‘불법’인 경우는 없습니다. ‘오늘’ 고통 하는 이에게 ‘내일’이면 늦습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오늘’ 해야 합니다. 그러라고 ‘영원한 현재’이신 하느님은 진리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질그릇 속에 예수 생명의 ‘보화’를 간직하신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오늘의 세상”을 만들러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나라’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그런 세상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이 언젠가 변화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오늘’ 우리가 그런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내일의 기적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 우리가 그런 기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누구나 한 주의 첫날을 ‘주님의 날’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주의 첫날을 진정으로 주님의 날로 만드는 일은 남은 6일을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 생명’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오늘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예수님을 따라 다함께 손을 잡읍시다.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최후심판 때 사람을 살리고 자유를 가져다 준 오늘 우리의 착한 행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빙그레 웃으시며 우리를 ‘안다’고 말씀하시고, 당신의 오른편에 서 있게 하실 것입니다. 진정 그리하실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생명과 자유를 주시는 주님의 거룩한 도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은오늘눈물을 닦아주시고,
오늘마음을 만져주시며,
오늘 날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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