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8. 연중20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지금 여기, 공평과 정의로 하느님 나라 평화를 일구어가시오.’입니다. 《이사야》와 《시편》은 하느님께서 ‘공평’과 ‘정의’를 기대하시는 세상의 ‘주재자’이시요, 참된 ‘재판관’이시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마음에 새기고 불공평과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키시어 하느님 나라와 영원히 ‘하나’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우리는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오직 주님만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다짐을 하는 우리를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어,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죄를 버리게 하시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끝까지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1-7
  • 시편 – 82
  • 2독서 – 히브 11:29-12:2
  • 복음서 – 루가 12:49-56

연중 2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지금 여기, 공평과 정의로 하느님 나라 평화를 일구어가시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저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부르다보면 행복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르십니까? 노래방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이들도 있다는데, 그런 분들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관계 지수’가 좀 낮다는 생각입니다. 천사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바흐(Bach)의 곡들’을 연주하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모차르트(Mozart)의 곡’들을 연주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존 레논(John Lennon) 이 부른 〈Imagine〉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상을 담아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입니다. 오늘날은 ‘반전(反戰)과 평화의 상징’처럼 불립니다. 그는 천국이나 지옥 같은 ‘내세’(來世)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 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노래합니다. 그는 국가(민족)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어야 할 이유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노래합니다. 더욱이 ‘종교’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노래합니다.

그의 눈에는 ‘종교’나 ‘국가’가 ‘오늘을 위한 삶’과 ‘인류의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였나 봅니다. 심지어 그는 ‘사유재산’을 소유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노래합니다. 욕심 낼 일도, 배고플 이유도 없는 세상, 모두가 한 형제처럼 함께 나누는 그런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 보자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을 호소하고, ‘무정부’, ‘무종교’, ‘무소유’를 살자고 노래한 그였지만 정작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유재산’을 내놓기는커녕 부요한 생활을 하다 자신의 팬이 쏜 총에 피살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과는 상관없이 〈Imagine〉은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은 광복 74주년이자 교회력으로는 ‘성모안식’을 기념하는 주요축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 4대 국경일의 하나인 ‘광복절’과 ‘그리스도교’(종교)가 기념하는 축일이 해마다 겹칩니다. 그날 주일 ‘말씀 나눔’을 준비하기 위해 <전례독서>를 묵상하는 제 마음에 노래 두 곡이 떠올랐습니다. 한 곡은 위에서 말씀드린 존 레논의 〈Imagine〉이었고, 다른 한 곡은 “We shall overcome”이었습니다. “We shall overcome”(우리 승리하리라)은 여러 ‘버전’(version)이 있지만 저는 “We shall live in peace. someday.”(그날 우리는 평화 속에서 살아가리라)라는 가사가 들어간 ‘존 바에즈’(Joan Baez)의 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두 곡 다 ‘광복절’과 ‘성모안식’에 어울립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불공평’과 ‘불의’가 없는 세상, ‘평화의 세상’을 갈망합니다. 오랜만에 기타를 조율해서 고요히 불러보았습니다. 한일갈등과 비핵화 논의가 교착 상태에 있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곡들입니다. 두 곡 다 ‘불공평’과 ‘불의’가 없는 ‘평화의 세상’을 꿈꾸는 노래이지만 그리스도인이자 사제인 제게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몸으로 ‘행동했던’ 존 바에즈(Joan Baez)의 “We shall overcome”이 아무래도 가슴에 더 와 닿았습니다. 사실 그 노래는 찬송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존 레논의 노래처럼 ‘국가’나 ‘종교’는 ‘평화’의 걸림돌일까요? 각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國家)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왔습니다. 누구나 ‘정의’와 ‘공평’이 강물처럼 흐르는 국가, 국민이 행복한 국가,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국가에 살고 싶어 합니다. 수세기 동안 그런 국가를 ‘철학자’(특히 플라톤의 《국가》에 따르면)나 ‘군주’(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따르면)나 ‘특정 이념을 가진 계층’(성리학자 정도전이 주도한 조선건국처럼)이 만들 수 있다고 가르쳐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특정 정당이나 훌륭한 정치인이 그런 국가를 결코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토마스 모어’가 상상의 섬나라 《유토피아》를 만들어내기까지 했겠습니까!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제 국민은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국가, 국민이 행복한 국가, 인류 평화에 이바지 하는 국가를 만드는 일은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의 몫’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시민,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는 시민들’이 바로 ‘국가’입니다.

‘종교’는 어떻습니까? 존 레논의 사상처럼 과연 ‘종교’는 집어 치워야 하는 방해물입니까? 그 이전에도 전통적 차원에서의 ‘신’(神)과 ‘종교’를 조롱하고, 신앙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포이에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는 ‘신’(神)을 “인간 욕구에서 비롯된 환상의 창조물”이라 비난했습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신’(神)을 “억압에 근거한 그릇된 환상이자 자아가 투사된 결과물”이라 비난했습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종교’를 “억압받는 자들의 탄식이자, 민중의 아편”이라 비난했습니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은 ‘신’(神)은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고, ‘종교’는 우연히 발생한 심리적 부산물이자 절대적 생존 능력을 지닌 종교적 ‘밈’(meme: 문화적 정보단위 및 진화의 단위)의 선택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 비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듣기에 거북스런 주장들이지만 결국 그들은 죽었고(도킨스도 언젠가는 인간이라면 가야할 길로 가겠지요), 종교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웃 종교의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는 “종교 간의 평화 없이 국가 간의 평화도 없다”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 종교가 전쟁과 분쟁의 온상(溫床)이었음을 시인하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제가 공부해 온 바에 따르면(저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종교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종교교사’ 교원자격증이 있습니다) ‘고등종교’에서 가르치는 핵심은 ‘오늘을 위한 삶’입니다. 고등종교는 ‘내세’(來世)를 위해 현재를 소홀히 해도 좋은 것처럼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등종교는 ‘공평’과 ‘정의’와 ‘평화’를 강조하고, ‘형제애’에 기반 한 ‘나눔 실천’을 언제나 강조합니다. 건강한 종교인은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확신’(신념)을 가지면서도 타인의 종교에 대해서는 ‘존중’을 보입니다. 종교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언제나 자기 종교의 정신에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발생합니다. 종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늘 <전례독서>에는 국가, 국민, 공평, 정의, 종교, 전쟁(분열), 평화, 이상향, 시대 분별 같은 핵심어들이 다루어집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두 명의 음악가가 등장하여 이 핵심어들을 노래합니다. 한 사람은(제 상상력이지만) ‘이사야’ 예언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제 상상력이 아닙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위대한 가수이자 음악가인 ‘아삽’입니다(역대상 15:17~19; 16:5~7; 25:1; 역대하 29:30). 사실 ‘예언자’(히브리어로 나비, Nabi)는 하느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 messenger)이자 ‘중보자’(intercessor)의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소음’(騷音)이 아니라 하느님이 전하라는 말씀, 즉 정확한 ‘음’(音)을 내야하기에 예언자는 ‘음악가’이고,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의 아름다운 ‘화음’(harmony)과 ‘조화’(harmony)를 추구하는 사람이니 예언자는 ‘음악가’가 맞습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는 《이사야》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사야 예언자가가 ‘버스커’(busker, 공연가)가 되어 ‘버스킹’(Busking, 거리공연) 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라고 자신이 부를 노래 제목과 장르까지 친절히 알려줍니다. ‘포도’는 그 탐스런 모습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징했습니다(아가 8:12). 또 ‘포도밭’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곤 했습니다(이사 27:2~5; 시편 80:8~13; 예레 12:10).

예언자가 길거리 공연을 하면서 ‘사랑 노래’를 부른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Imagine〉을 노래한 ‘존 레논’처럼 자신을 따라 ‘상상해보라’고 초대합니다. 처음에는 그의 ‘음색’을 따라 ‘상상’되는 서정적인 풍경이 듣기에 참 좋았습니다. 주인이 포도밭을 정성스레 일구는 모습과 좋은 포도를 거두려고 벌이는 온갖 역사가 선명하게 펼쳐집니다(1~2절a). 그러더니 가사와 함께 가수의 음색이 암울해집니다. 주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좋은 포도를 기대했건만 ‘들포도’였습니다(2절b). 주인의 실패가 묘사됩니다. 청중들도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기에 예언자의 노래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그 비극적인 심정에 깊이 공감합니다(3~4절). 다른 사람들이 풍성한 포도를 수확하는 그 때, 주인은 자신이 심은 좋은 포도나무에서 ‘들포도’만 열리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주인의 크게 실망하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갑자기 예언자의 목소리가 ‘고음’으로 치솟습니다. 주인의 실망이 분노로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주인은 자신에게 실망만 안겨 준 그 포도밭이 ‘짐승들’에게 망가져 황폐해지도록 내버려둘 것입니다(5~6절). 이 노래를 듣던 사람들도 주인의 그런 결정에 공감한다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혀를 찼습니다. 예언자는 노래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고음’으로 부른 탓에 예언자가 잠시 목청을 가다듬기 위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불러온 노래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괴로움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예언자는 그 자리에 있던 청중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더니 그들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불러온 노래의 진짜 의미를 이렇게 들려줍니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 이사 5:7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상상에서 깨어난 그들은 더 이상 예언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포도밭’은 ‘야훼의 계약 백성’인 자신들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버스킹 하던 예언자가 노래한 ‘사랑하는 임’은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 노래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배반’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심판의 선고’였습니다. 자신들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해 ‘짐승들’에게 파괴될 ‘포도밭’으로 노래하는 ‘서정시’였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한 둘 씩 자리를 떴습니다. 그렇다면 그 ‘짐승들’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고대근동에 속하는 이스라엘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위치합니다. 팔레스틴에 정착해 판관시대와 초기왕정 시기를 거친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시절 최절정기를 누립니다. 기원전 10세기 경 ‘솔로몬 왕’이 죽자 통일왕국은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중심의 ‘남왕국 유다’로 분열됩니다.

세월이 흘러 기원전 8세기 중후반,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고대근동을 통일한 최초의 제국으로 이집트와 쌍벽을 이루는 세력이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5세’는 ‘서진’(西進)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정책은 분열된 남북왕조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 시기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던 예언자가 제 1이사야(기원전 742-701/700, 1~39장)입니다. 제 1이사야는 ‘아시리아 제국’이 두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침공하는 ‘전란’을 겪었고(기원전 735, 70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는 것도 목격했습니다(기원전 722년).

이처럼 제 1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전란’을 겪던 ‘혼란시기’였습니다. 제 1이사야는 이 혼란시기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이 저지른 ‘불공평’과 ‘불의’, 하느님을 향한 ‘배신’과 ‘배교’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짐승들은 ‘아시리아 제국’인 셈입니다. 이 혼란시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구원 받는 길은 ‘불공평’과 ‘불의’를 ‘회개’하고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데 달려있다고 초지일관 역설한 예언자였습니다(이사 7:9; 37:35). 이렇게 해서 1독서 《이사야》는 ‘시대의 뜻을 살피라’는 <복음서>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82편》은 ‘아삽’의 노래입니다. 1독서 《이사야》 말씀처럼 ‘공평’과 ‘정의’를 기대하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아삽’은(1역대 25:1; 2역대 29:30) 세상의 ‘주재자’시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이 모든 나라를 소유하고 계시고, 세상의 참된 ‘심판관’이시라는 찬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민족적 긍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찬미가 무색하게도 ‘현실’은 그런 하느님을 만나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한 백성을 찾아보기도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불공평’과 ‘불의한 재판’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고도 악인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절대 다수인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은 ‘불의’에 시달립니다. ‘공평’과 ‘정의’는 사전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시인은 이 문제로 깊이 고민을 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주재자’시요, ‘공의로운’(사실 이 말은 필요 없습니다. 재판장은 당연히 공의로워야하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이신데, 어째서 현실에서는 ‘불공평’과 ‘불의’가 만연한 것인지 자기 나름의 대답을 이 찬미에 담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재판권’을 직접 행사하시지 않고 부리시는 ‘신들’(하늘 존재들, 또는 세상의 군주들과 권력가들)에게 ‘맡기신 탓’입니다. 일종의 ‘왕권신수설’(神授說)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세상과는 거리를 두고 저 높은 곳에 홀로 계시다는 신앙의 반영입니다. 몸소 인간사에 관여하는 수고를 하시기보다는 ‘신하들’을 시켜 세상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신앙의 반영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이 맡기신 그 재판권을 ‘하늘 존재들’(재판관들, 군주들과 권력가들)이 잘못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가 찾아낸 ‘실마리’였습니다.

이 ‘실마리’를 찾아낸 시인은 〈Imagine〉을 노래한 ‘존 레논’처럼 자신을 따라 ‘상상해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은 ‘불공평’과 ‘불의’를 가만 두고 보시지만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하소연’을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우리를 ‘하늘궁정’으로 데려 갑니다(욥기 1:6; 열왕상 22:19). 하느님은 ‘그곳에서’ 당신이 부리시는 재판관들을 ‘소환’하시어 재판하십니다(1절). 여러분도 한번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악인을 편들고, 백성들 사이에 ‘불공평’을 방조한 것에 하느님은 ‘분노’를 표출하십니다(2절). 그들은 분별력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3~5절). 하느님이 주신 권한을 잘못 행사하고 있기에 ‘배반감’에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땅은 그들 때문에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비록 그들이 ‘신들’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하더라도 보통 인간처럼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선고’가 내려집니다(6~7절).

끝으로 시인은 세상의 ‘주재자’시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느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시어’ 직접 이 세상을 ‘재판’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8절). 다시 말해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보라’는 초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꿈꾸길 바라는 그의 초대입니다.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는 배움의 기회가 적어서 자신이 받던 차별에 항거하지 못하던 이들도, 가진 소유가 적어서 멸시받고 불의에 내몰렸던 가난한 이들도 기(氣)를 펼 것입니다. 시인의 이 같은 요청은 ‘주의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다른 이들의 통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직접 통치가 도래하도록’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듣는 마음입니다(마태 6:10).

이 찬미를 부르는 우리도 이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나라가 어려운 진짜 이유는 ‘경제’나 ‘아베’나 ‘김정은’이나 ‘트럼프’ 때문이 아닙니다. 이 땅에 만연한 ‘불공평’과 ‘불의’ 때문입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잔재(殘滓)들, 여전히 거짓뉴스를 양산하고 있는 국정농단의 주역들, 사법농단 판사들, 자리를 내려놓을 줄 모르는 파렴치한 정치인들, 정권만 바뀌길 바라는 복지부동 공무원들, 이득에만 눈이 먼 기업가들, 어쩌면 우리 자신의 썩은 내 나는 모습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과 자기 자신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어느 시대나 하느님은 ‘불공평’과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잠깐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거대한 폭풍’으로 뒤집어 버리십니다. 우리는 그 ‘위대한 역사’를 ‘4.19 혁명’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6.10 민주항쟁’으로, ‘2016 촛불혁명’으로 경험해 온 ‘위대한 시민’입니다. 다만 ‘지속성’이 문제입니다.

Joan Baez performing at the the Civil Rights March on Washington in 1963. She sang “We Shall Overcome” and “Oh Freedom.

《시편 82편》을 부르는 우리는 존 바에즈(Joan Baez)의 “We shall overcome”처럼, 이 땅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그 승리의 날이 속히 오도록 더욱 깨어있는 시민의식으로 살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더욱이 ‘평화’에 이르는 진정한 길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의 실천에 있습니다. “평화가 경제다”라는 여당의 표어를 풍자해 “경제가 평화다”라고 주장한 야당 수준으로는 이 땅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경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환상에 빠져 ‘불공평’과 ‘불의’를 눈감아준 세월은 지난날로 족합니다. ‘불공평’과 ‘불의’가 만연한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의로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된다면 다른 누가 흔들 수도 없고, 흔들리지도 않는 ‘평화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선후가 뒤바꾸어서는 곤란합니다. 정말입니다.

2독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믿음장(章)’이라고 불리는 ‘11장’과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노래하는 ‘12장’ 첫머리가 배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교훈하는 ‘12장’은 오늘과 다음주일까지 2독서로 배정됩니다. 물론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피스티스’가 ‘굳은 신뢰’, ‘충실’, ‘충성’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기에 ‘하느님의 계약 백성’이 ‘충실하게 지켜야할 공평과 정의의 삶’을 교훈하는 1독서 《이사야》나 《시편》과도 연결됩니다. 또한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세례한 우리가 ‘공의로운 하느님의 자녀’로써 ‘충성스럽게 지켜야할 믿음의 삶’을 교훈한다는 점에서 <전례독서>와의 일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증인들’은 오늘 복음이야기가 전하듯이 ‘추방’과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좋은 본보기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넜던 ‘승리의 사건’에서부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그들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믿음의 사건들’을 총망라합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수세기 동안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즉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라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39절). 그 ‘약속된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해 주신 영원한 유산”입니다(히브 9:15).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될 구원, 즉 ‘영원한 하늘나라가 구현’되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대로 ‘역사의 절정’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구현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와 그 죄로 인한 ‘궁극적 죽음’을 없애 주셨습니다(히브 9:26~28a). 십자가에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화해와 평화,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구약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과 신약의 성도들은 다함께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하늘 도성의 시민’이 되었습니다(히브 12:22~29).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이미 구현하신 구원(영원한 하늘나라)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즉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히브 9:28b).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하는 많은 ‘믿음의 증인들’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달려야 할 ‘믿음의 길’을 꾸준히 달려가야 합니다. 신앙은 ‘100미터 달리기 경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라톤’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히브 12:2a) 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 옥좌 오른편에 앉아계십니다.”(히브 12:2b). 또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약속된 것’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았던 증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디 ‘믿음의 경주’라는 이 마라톤에서 “하느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이 모두에게 ‘종말의 심판’이 된다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전반부(49~53절)는 예수님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와 따르지 않는 이 사이에 ‘분리’(분열)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서도 철저한 분리(불의 심판)가 일어납니다. 루가는 ‘평화’를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이라고 성탄이야기를 시작했는데(루가 2:14), 여기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합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후반부(54~56절)는 1독서 《이사야》가 노래한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는 말씀처럼, 철저한 ‘불의 심판’이 일어날 것이에 속히 ‘시대의 뜻을 살피라’는 교훈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 루가 12:49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은 문자적이지 않습니다. 그 ‘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두고 몇 가지 해석이 있어왔습니다. 열거하면 ‘심판’, ‘하느님 나라의 확산’, ‘복음 전파’, ‘성령의 강림’, ‘하느님의 사랑’ 등입니다. 다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유대인들도 대부분 ‘불’을 ‘심판’의 상징으로 생각했으며,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심판의 시간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 ‘복음전파’, ‘하느님 나라의 확산’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 루가 12:50

예수님이 당신이 겪으실 ‘고난’(십자가)을 ‘세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성공회 전통은 ‘침례’가 아니기에(외국의 경우는 침례할 수 있도록 큰 시설을 갖춘 곳도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고통)은 머리에 물을 세 번 붓는 것처럼 금방 지나가는 일이 아닙니다. 물에 온몸이 잠기는 ‘침례’처럼 예수님이 고통 속에 완전히 잠기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난이 예수님을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고난에 빠져계신 상태입니다. 그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2독서 《히브리서》의 말씀처럼(히브 12:2) 십자가에서 성취될 당신의 사명, 즉 ‘인류의 구원’을 아셨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1고린 1:18,23), 그 고난(고통)을 견디어내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가 12:51

‘평화’가 아니라 ‘분열’이라니 너무 충격적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지는 ‘평화’가 아닙니까? 세계가 평화롭지 못한 것은 ‘미국’과 ‘기독교’ 때문이라고 공격하는 이들 말고 누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는 분명 ‘평화의 주님’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루가복음》이 전하는 우리 구세주의 탄생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계신 그 이야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한 옛날 주님의 천사가 들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알립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 루가 2:10~12

그 소식 후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와 천사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 루가 2:14

분명 ‘루가’는 구세주의 탄생이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큰 기쁨의 소식’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평화’ 아닙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분단 74주년, 한국전쟁 69년’을 지낸 이 땅에 사는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도 ‘평화’입니다.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행진했던 ‘존 바에즈’도 ‘평화’를 노래했고, 존 레논도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달라이라마나 틱낫한도 ‘평화’를 전합니다. 모든 종교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같이 ‘평화’를 염원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이 모든 인류가 간절히 염원하는 ‘그 평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라는 ‘루가의 통찰력’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같은 ‘진실’ 때문에 방금 우리가 들은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복음이야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1세기말 《루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 공동체에 일어났던 상황을 반영합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승천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큰 충돌 없이 지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각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 모여서 예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이미 오신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의 차이점이 점차 명백히 드러나면서 긴장과 갈등이 형성됐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분리 된 계기는 서기 66~73년 있었던 ‘1차 유대 독립전쟁’입니다.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기 시작할 때, 유대인들은 항쟁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하였습니다(마태 24:15~16). 결국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서기 70년),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겁하게 도망쳤다며 비난하고 증오했습니다. 회당에서도 추방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울타리를 확실히 벗어나 독자적 종단으로 분리 독립해 갔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의 차별뿐 아니라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대화재’(서기 64년) 이래로 계속된 ‘박해’까지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따라서 ‘루가공동체’는 자신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추방’과 ‘박해’, 가정들 간의 ‘분열’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예수님도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에게서조차도 ‘미쳤다’는 오해를 받으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 기득권자들인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거부당했고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종국에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신성모독’과 ‘자신을 왕’이라고 했다는 ‘국사범’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로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일치’를 가져오셨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분리’(분열)을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은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는 ‘무엇’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그것’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과 조금의 분리도 없이 완전한 평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죽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인간에게 하는 일은 오로지 ‘죽음’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죽음’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력한 ‘왕’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죽음과 ‘화해’하거나 ‘평화’를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결코 ‘하나’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더욱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분리’시켰듯이 죽음과 하나였던 우리를 ‘영원히 분리’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켰습니다. 하느님께 반역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 완전한 성취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철저히 갈라져야 합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신앙과 행동은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갈등’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 갈등과 분열은 결과적으로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 이 세상의 권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딘가 맞지 않습니다. ‘평화의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불공평’과 ‘불의’에 ‘침묵’하는 일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일로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으며, 주님을 위해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재림은 필연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영원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후반부(54~56절)는 1독서 《이사야》가 노래한 것처럼 ‘불의 심판’이 일어나기 전에 속히 ‘시대의 뜻을 살피라’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좀체 ‘시대의 뜻’을 살피지 않는 당시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징조를 통해 날씨 변화는 예측하면서도 정말 알아차려야할 ‘시대의 표징’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예언 말씀을 더 많이 이해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 일들을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임이심을 알아보는 ‘표징’으로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시대의 뜻을 살피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으로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삶은 무엇입니까? ‘공평’과 ‘정의’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일구는 실천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도 ‘존 레논’처럼, ‘존 바에즈’처럼 불러야 할 ‘노래’가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이라는 ‘평화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야말로 참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성인들의 증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에 불타올라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불’을 이 세상에 질러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복음의 불’을 위한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어느 자리에 있든지 《히브리서》 기자가 교훈하듯이 ‘믿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사야》와 《시편》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의 ‘주재자’시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느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우리 삶의 현장에 임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자기 배만 불리는 이들이 말하는 ‘거짓 평화’에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됩니다. ‘평화’는 더 많이 갖고 움켜쥐는 이기심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 많아질 때 평화는 그 만큼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사람대접 받는 삶을 살도록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평화의 종소리는 그만큼 가까이 들립니다. 인간의 존엄함을 억압하는 모든 ‘불공평’과 ‘불의한 세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많아질 때 평화의 비둘기는 날아듭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런 ‘자기비움’과 ‘자기헌신’이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을 구원하는 자유와 평화에 도달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본입니다. 정말이지 평화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나서는 이들이 많아질 때 선물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공평’과 ‘정의’에 기반 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일구는 일의 맨 앞자리에 항상 서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일구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을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는 힘은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볼 때 솟아납니다. 예수님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2:2)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에도 적대자들의 조롱을 십자가에서 끝까지 견디어내신 예수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지치지 않고 평화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음, 결코 하느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의 가치 때문에, 복음 전파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 간에 ‘분열’이 일어나는 일은 가슴 아픕니다. 세대들 간의 ‘분열’도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신앙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지만 그 은총이 자신에게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양손에 떡을 쥐고 있기에 누가 또 하나의 떡을 주면 입으로 덥석 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 양손에 쥐고 있는 다른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더욱이 분열과 대립은 가족들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해서는 안 되지만 하고 싶어 하는 일”과 “해야 되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 사이에서 마음이 길을 잃습니다. 자아가 여러 갈래로 분열하고 서로 대립합니다. 사도 바울로도 자신의 그런 내적 분열과 대립을 고백합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 로마 7:21~25

사도 바울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자기욕망에 사로잡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삶은 노예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노예’는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삶은 욕망의 노예입니다. 그런 노예의 삶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그 삶이 편하게 느껴지더라도 자유가 없는 편안함은 결코 평화가 아닙니다. 사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오히려 자유란 자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때라도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실천입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혹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과 사탄의 노예로 살던 우리가 당신처럼 ‘나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그 자유인의 삶을 우리가 누리며 살도록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도록 날마다 이끌어주시는 ‘협조자’이십니다. 언제인지는 우리가 정확히 특정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해 주신 그날,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성령은 그런 고백을 하는 우리를 ‘세례성사’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영원토록 ‘하나’로 만들어주었습니다(로마 6:3). ‘세례성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이 되었습니다(갈라 2:19; 5:24). 그렇게 ‘세례성사’는 우리가 죽은 사건이었고, 주님과 함께 묻힌 사건이 되었습니다(로마 6:4). 더욱이 ‘세례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로마 6:5~8). 이렇게 성령의 이끄심 속에 베풀어진 우리의 ‘세례성사’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분리’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분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자리에 옮겨주신 사건임을 성령을 통해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성찬례에서 주님이 주시는 한 말씀을 통해 ‘영혼의 새 힘’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명확히 깨닫고 감사와 찬미를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영원한 분리’와 ‘영원한 하나 됨의 축복’을 전하러 세상에 파송됩니다. ‘공평’과 ‘정의’에 기반 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일구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뜻’임을 외치러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우리는 그 일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친히 일어나시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이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가 삶의 현장마다에서 부르는 ‘십자가 복음’의 노래를 듣고,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서는 믿음의 증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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