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1. 연중19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믿음,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살게 하는 하느님의 보증’입니다. 한국교회는 해마다 광복절 직전 주일을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로 지킵니다. 광복 74주년을 앞둔 요즘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습니다. 교무원에서는 위중한 시기에 이 땅의 ‘평화통일’과 ‘한일관계의 복원’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견진성사가 베풀어지기에 ‘신앙고백’과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는 생략합니다. 교우들은 나누어 드린 ‘2019년 남북공동기도문’으로 각 가정에서 기도해 주시고,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복원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오늘 견진성사를 받는 교우들이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아 믿음 깊은 평화의 일꾼들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신실한 믿음을 주시어 주님의 충실한 청지기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5:1-7
  • 시편 – 33:12-22
  • 2독서 – 히브 11:1-3,8-16
  • 복음서 – 루가 12:32-40

연중 1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믿음,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살게 하는 하느님의 보증’입니다.

우리는 ‘과학시대’를 삽니다. 아시다시피 과학은 ‘현상계’(現象界)를 대상으로 합니다. 현상계에서 작용하는 자연법칙(무엇)의 ‘원인과 결과’(어떻게)를 ‘지성의 힘’(도구)을 사용해 ‘객관적으로 기술’(記述, description)하는 ‘지식체계’입니다.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는 것은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주관적 ‘신념’이나 ‘신앙’에 의해 좌우되지도 않고, 그런 것에 기반(基盤)을 두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과학은 그것들을 담아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수치화’, ‘계량화’와 같은 ‘실증성’(있는 그대로의 관측된 증거, 사실)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원인과 결과)할 수 있기에 과학은 ‘현상계’에 대해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인간이 갖는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이처럼 과학은 ‘현상계’에서 펼쳐지는 ‘무엇’(관측된 증거로서의 자연법칙)과 그 무엇이 ‘어떻게’(원인과 결과) 작용하는지를 기술하는 ‘논리체계’라는 강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관측된 증거’(객관성, 사실)에 기반을 두고, ‘관측의 울타리’에 들어온 것만을 ‘가치중립적으로 기술’하는 과학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는 ‘수치화’, ‘계량화’, ‘객관화’ 될 수 없는 ‘소중한 일들’(사랑, 감사, 우정, 헌신 등)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관측된 증거’로 제시되는 ‘무엇’에 대한 기술(記述)과 ‘원인과 결과’의 기술(記述)인 ‘어떻게’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적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과 ‘어떻게’로 덤덤히 기술(記述)되는 객관성(사실)만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왜’라는 ‘의미물음’을 추구하는 ‘실존적 존재’가 인간입니다.

특히 ‘생의 위기’ 속에 있는 인간이 그렇습니다. ‘고통’과 그 최종적 형태로서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생의 위기’에서 인간은 과학이 제시하는 ‘객관적 기술’(記述)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아니고 ‘어째서 자신이’ 그런 고통의 ‘당사자’여야 하는지 되묻습니다. 과학은 그가 던지는 ‘왜, 나여야 하는지….’라는 반복된 물음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심정이 그럴 것입니다. ‘어째서’ 구조하지 않았는지, 참사의 진실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기에 유가족들의 ‘한’(恨)은 풀릴 길이 없습니다. 더욱이 배의 침몰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아야 했던 국민들 역시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다 벚꽃이 아름다운 4월이 오면 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침몰 원인들도 ‘가설’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과학 기술’(技術)을 동원하여 ‘무엇’과 ‘어떻게’를 객관적으로 기술(記述)하더라도 ‘어째서 내 가족에게….’라고 묻는 유가족들 앞에서 과학이 제시하는 ‘객관적 사실’은 진정한 대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객관성(가치중립적 서술)에 기반을 둔 제 3자적 위치를 갖는 과학은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생의 위기’를 마주하는 1차적 위치의 주관적 참여자에게는 결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종교’는 ‘관측된 증거’보다는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말한 것처럼,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참고: 마르12:29),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에 기반을 둡니다. ‘궁극적 관심’이란 고통과 죽음으로 대변되는 ‘생의 위기’ 때마다 인간이 제기하는 질문(관심)들입니다. 종교는 과학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 관심’, 가령 ‘나 자신의 고통과 죽음의 근본원인’, ‘사후세계’, ‘영원한 생명’, ‘인간의 발생’, ‘우주의 시작’, ‘신의 존재’와 같은 ‘절대적 물음’(궁극적 관심)에 대한 최종적 대답의 시도들입니다. 어설픈 과학신봉자들에게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관측될 수 없는 ‘궁극적 설명’이 지극히 ‘주관적’(신앙적)이고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측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종교에서 가르치는 ‘궁극적 설명’(진리)을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른다’, ‘과학의 대상 밖에 있다’, ‘회의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과학자’에게는 정직합니다.

분명 ‘삶의 의미’, ‘일상 안에 담긴 삶의 신비’, ‘생의 자각’처럼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삶의 본질적 물음’, ‘궁극적(窮極的) 질문’(관심)에 과학 그 자체는 결코 답해 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런 물음들에 대한 ‘의미추구’(해석)와 ‘통찰’이라는 ‘궁극적 설명’의 영역은 인문학, 특히 ‘종교의 몫’입니다. 과학은 형이상학이나 초현상계와 관련된 종교처럼, 인간의 주관적 신념이나 신앙에 결코 기반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어떨까요? ‘틸리히’는 그의 책 《신앙의 역동성, Dynamics of Faith》에서 “신앙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존재의 상태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란 그의 말처럼 ‘그리스도교’는 ‘관측된 증거’나 관측의 울타리에 포착된 것에 대한 ‘기술’(記述)보다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가 물려준 성서와 전통, 즉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에 기반을 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히브 11:1-3).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에서 선포하고 가르치는 ‘하느님’, ‘우주의 시작’, ‘영원한 생명’, ‘사후세계’와 같은 ‘궁극적 관심’은 ‘믿음’을 가진 이에게는 ‘관측의 울타리’(한계)마저 훌쩍 뛰어넘어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게 실재하는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의 영역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은 성교회가 물려 준 이 같은 ‘궁극적 설명’에 기반을 둔 ‘믿음의 위대함’이 빛나고 있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훗날 아브라함)에게 ‘상속자’와 ‘무수한 자손’을 ‘약속’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시편 말씀처럼(33:12),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선민의식’을 갖게 한 고전적인 뿌리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그가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그 ‘믿음’을 ‘갸륵하게 여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며, 매우 큰 상을 내리리라. – 창세 15:1

주석가들은 “두려워하지 말라”로 시작하는 이 약속을 앞 장(창세 14장)과 연결시켜 해석합니다.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창세 14:12).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사병들을 거느리고 가서 조카 롯을 포함한 모든 것을 되찾아냈습니다(창세 14:13-16). 소돔 왕은 이 승리의 보답으로 아브라함에게 ‘보상’하려 했지만 거절합니다(창세 14:21-24).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아브라함의 심리는 ‘불안’합니다. 자신이 쳐부순 왕들이 다시 연합해 보복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이런 그의 ‘불안’과 ‘걱정’을 깨뜨리시기 위해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식으로 주석가들은 해석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좁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오랜 만에 ‘환상’으로 현현(顯顯)하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그 자체에서 오는 ‘두려움’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약속은 ‘멜리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빌어 준 ‘복의 성취’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14:18-20).

이 약속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를 보십시오… – 창세 15:2-3a

하느님이 ‘방패’가 되어주시고, ‘큰 상’을 내리시겠다는 약속은 감사하지만, 자신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큰 상’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물려줄 ‘상속자’, 즉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그를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말씀하실 때 “큰 민족이 되게 하신다.”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창세 12:1-3). 그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창세 12:4). 또 조카 ‘롯’이 요르단 분지로 분가(分家)해 나간 다음에도 하느님은 그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창세 13:15-17).

세월이 흘렀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자식’ 하나 없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근심과 고통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말은 “주님, 제 나이가 몇인지 아십니까? 저는 아무런 낙(樂)이 없습니다! 당신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다 필요 없고 저는 아들을 원합니다!”라는 호소입니다. 정말이지 한탄을 넘어 ‘약속의 말씀’을 믿고자 하는 정직하고 간절한 ‘기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10년이면 아브라함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릴만큼 오래 기다린 셈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불러서 약속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싶어 했고, 그의 ‘믿음을 확증’해 주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한탄에 다시 ‘약속’으로 ‘도전’하십니다. 이번에는 그 약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를 이를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 창세 15:4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젤’이 ‘대’(代)를 이을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대’(代)를 이을 ‘양자’(養子)를 입양하는 관습이 있었고, 노예가 가문을 잇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쩌면 ‘엘리에젤’을 양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일종의 ‘오해’인 셈입니다. 하느님은 그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살과 피를 지닌 친아들”이라고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십니다. 하느님은 분명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계시며, 그것을 이행할 것이라는 반복입니다. 물론 이 약속이 실현되려면 아직 15년도 더 남았지만 말입니다.

그런 다음 그를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 약속을 시각적으로 ‘확증’시켜 주십니다. 그의 불안과 걱정을 깨뜨리는 약속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 창세 15:5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한 순간을 꼽으라면 분명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장면입니다. 분명 그 자손들 중에는 다윗도 있고, 다윗의 뿌리에서 돋은 ‘빛나는 샛별’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있을 것입니다(묵시 22:16; 마태 1:1).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의 불안과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아니 이런 구태의연한 표현으로는 그의 적극적인 반응을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셨다. – 창세 15:6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도전’에 ‘적극적인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적극적’이라는 말은 없지만 횡간의 뜻을 살피면 분명 그렇습니다. 어쩌면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더덩실 춤을 췄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그런 적극적 믿음(인내)에 그만 감동하시고 맙니다. “갸륵하게 여기셨다”는 말씀은 “의로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히브 11:2).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보여준 그런 ‘믿음의 반응’이 ‘연중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적극적인 믿음’, 그런 ‘인내’를 간직하고 있습니까? 사실 이 장면은 구약성경에서 ‘믿음’(믿었다)과 ‘의’(의로 여기심)라는 단어가 사용된 ‘첫 구절’입니다(참고: 하바 2:4).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구원의 진리”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복음’인 셈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장면을 이른 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로마 4장; 갈라 2:16; 3:6; / 참고: 히브 11:1-4,6,8 / 참고: 야고 2:18-26). 더욱이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 아브라함이 보인 적극적 반응인 ‘믿음’조차도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입니다(로마 12:3). 정말이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총으로 주시는 ‘구원’ 뿐 아니라 ‘믿음’조차도 하느님이 나누어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임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에페 2:8~9).

비록 ‘믿음’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은 그 믿음을 사용한 아브라함의 적극적인 반응에 감동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주신 이전의 약속을 ‘회상’시켜주십니다(창세 12:1~3, 7; 13:15~17).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야훼다. – 창세 15:7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기계시’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시고, 아브라함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으며,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십니까? 아브라함이 불렀던 것처럼(창세 15:2)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실 것입니까? ‘가나안 땅’을 주시어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인도자이시고, 약속을 이행(履行)하시는 하느님의 ‘자기계시’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자기계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그 궁극적 의미에 도달한 것인지는 2독서 《히브리서》가 전해줍니다. 아래에서 다루겠습니다.

《시편》은 <33편>의 후반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 《창세기》에 대한 응답(적용)입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미로 시작합니다(12~19절). 마지막은 하느님을 향한 ‘경외’(敬畏)와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기 민족’에게 ‘복’(福)을 비는 찬미로 마무리됩니다(20~22절). 1독서에서 들었듯이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하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갸륵하게’ 여기시어, 그의 후손들의 하느님까지 되어주셨습니다. 시인은 그 약속의 성취를 노래합니다.

야훼께서 당신 겨레로 뽑으시고, 몸소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신 민족은 복되다. – 시편 33:12

이처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시인은 상기시킵니다. 좁게 보면 ‘유대민족주의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좁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유대민족 뿐 아니라 모든 겨레, 즉 우리 ‘민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았듯이 어느 민족을 뽑으시고 몸소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시는 ‘절대적 주도권’은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겨레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겨레의 살길입니다.

금주간 우리 겨레는 광복 74주년을 맞이합니다. 해마다 한국교회는 광복절 직전 주일을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로 지킵니다. 최근 일본정부가 조장한 한일갈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남북이 한마음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엄중한 시기에 《시편 133편》을 묵상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축복이 우리 겨레의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민족들은 몰라줘도 우리 겨레가 일제로부터 당한 ‘고난’을 하느님만은 아십니다. 억울한 눈물들을 하느님만은 헤아려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들 같은 작은 눈이 아니라 우주를 담아내는 너무나 ‘큰 눈’을 가지신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이사 40:18~28).

《시편 33편》도 ‘야훼의 눈’을 찬미합니다. 하늘에서 모든 민족을 굽어보시는 하느님의 ‘큰 눈’을 처음부터 끝까지 언급합니다(13절). 우리 겨레가 “지상의 모든 사람을 낱낱이 살펴보시는 하느님, 사람들의 마음을 몸소 빚어주신 하느님, 사람이 하는 일을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느님”(14~15절)을 ‘경외’하는 자리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든든한 재물 창고와 군사력을(16~17절) 가진 미국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지’하는 겨레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겨레가 정치력과 외교력 신장(伸張)에만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경건한 믿음’이 세워진 겨레이기를 기도합니다(18절).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시고, 인간들의 역사에 분명히 개입하시는 하느님은 당신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민족의 하느님이 되어 주십니다(19~20절). 우리 겨레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는 그 ‘믿음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를 보시는 ‘하느님의 눈’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일 것이라고 믿습니다(21~22절). 사람들의 ‘마음’(생명)을 몸소 빚어 주신 분,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느님께 우리 겨레를 의탁하고, 한일관계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속히 복원되기를 기도합니다.

2독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흔히 ‘사랑장(章)’(1고린 13), ‘부활장(章)’(1고린 15)과 더불어 ‘믿음장(章)’이라고 불립니다. 또 《히브리서》 안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3요소인 ‘믿음’(11장), ‘소망’(12장), ‘사랑’(13장)이 언급되는 맨 앞자리에 위치합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연결이 느슨하지만 오늘은 예외로 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믿음의 산맥 속에서 봉우리처럼 우뚝 솟은 ‘위대한 영웅들’, 즉 ‘하느님께 인정받은 증인들’을 기념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뿐 아니라 ‘사라’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증언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본문은 하느님께 인정받은 ‘증인들’을 통해 《히브리서》의 기록 동기를 드러냅니다. 그 ‘위대한 영웅들’은 박해시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믿음의 본보기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흔들려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이들과 배교의 위협에 놓인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제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 히브 11:1

재미있는 어법입니다. 히브리 어법에서 두 번째 문장은 앞 문장의 반복이거나 강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바라는 것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이고, ‘보증’은 ‘확증’을 의미합니다. 우선 ‘믿음’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피스티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굳은 신뢰’, ‘충실’, ‘충성’, ‘확고한 신념’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어떤 주장(교리)이나 문구(신조)에 대한 ‘지적인 동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갓난아기와 어머니’라는 ‘생명의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갓난아기는 ‘온 몸’으로 젖을 빱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기에게 ‘헌신’합니다. 이처럼 온 몸으로 관계하는 두 존재의 모습을 담은 말이 ‘피스티스’입니다. 절대적인 신뢰, 절대적인 헌신, 절대적인 의탁(투신), 절대적인 충성, 즉 최고, 최선의 상태가 ‘피스티스’란 말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단지 ‘생각’(지적인 동의)에만 머무는 차원을 넘어 관계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절대적인 신뢰의 상태’입니다. ‘믿음’은 단지 ‘공허한 말’ 뿐인 ‘약속’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 약속을 ‘행동’으로 실현해 가는 ‘절대적인 헌신의 상태’입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 차원에 머물지 않고 관계 속에서 ‘행동’으로 표출되는 ‘전존재(전인격적)의 절대적인 투신’입니다. ‘믿음’은 ‘약속’(서약, 맹세)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이 한 그 약속에 기꺼이 자신을 묶는 ‘절대적인 충성’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믿음’으로 살겠다고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씀드리면, ‘믿음’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화’로 발견하고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께 갓난아기처럼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고 따르는 ‘최선의 상태’입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자신을 선택하고 불러주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온 몸으로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온 몸을 내어주시고 절대적인 충성으로 관계하시는 총체적인 모습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믿음’은 ‘사랑’이며, ‘믿는다’는 말의 참 뜻은 ‘사랑하다’입니다.

다음으로 ‘보증’(assurance)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hypostases)는 ‘지지’(support, 후원, 유지, 양육), ‘실체’(substance, 본체, 물질), ‘안정’(steadiness), ‘확신’(guarantee, 보험)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아래에’(휘포)와 ‘서다’(히스테미)의 합성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어떤 것의 아래에 위치한 것’으로 밑에서 지지(支持)하고 지원(후원)하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철학사와 교회사에서 워낙 번역이 복잡한 단어라고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세 위격, 한 본질’(treis hypostases, mia ousia) 말입니다(관련 설교는 2019. 6.16. 성삼위일체주일을 참고하세요). 아무튼 ‘휘포스타시스’는 어떤 것의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실체’(물질), ‘실상’(본바탕), ‘현실’이라는 뜻으로 건물이라면 ‘기초’에 해당합니다. ‘약속’에 쓰일 때는 두 당사자의 아래에 흐르고 있는 것, 즉 ‘신뢰’와 ‘확신’입니다. 여기서 ‘보증’(보험), ‘확신’(확증)이라는 뜻도 나왔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소망하는) 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보증, 확신, 실재)이자 볼 수 없는 것들이 참으로 존재함을 ‘확신’(확증)시키는 일종의 또 다른 눈”이라고 정의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소망하는) 것들’이 주관적인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임을 보증해 주고, 확신시킵니다. 과학은 ‘눈’에 보이고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현상계만을 다루지만 믿음은 현상계를 초월하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하고, ‘이성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명확히 깨닫게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이미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성(머리)으로는 믿어지지 않지만 ‘가슴’으로는 믿어지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실력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이성의 힘 이상입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개인적인 확신 이상의 것입니다. ‘믿음’은 아직 갖지 못한 미래의 것조차도 ‘지금 가진 것처럼 확신’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소망하는) 미래의 것들이 ‘현실’이 되게 하고 ‘실체’가 되게 하는 힘입니다. 육체의 시력이 물질세계의 증거를 주는 감각인 것처럼, 믿음도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확증을 주는 일종의 ‘초월감각’입니다. 사실 ‘죄의 용서’, ‘몸의 부활’,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는 우리가 ‘바라는(소망) 것들’이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그 세계가 ‘확실히 존재’하고 ‘참되다’는 것을 ‘확증’(보장)해 줍니다. 이런 것들 앞에서 육체의 감각과 이성은 캄캄한 어둠에 처하지만,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선물’하신 제 3의 눈인 ‘믿음’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또렷한 참된 실체들입니다. 옛 사람들도 이러한 믿음을 사용해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고, 우리가 바라는 그 세계가 존재함을 실제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누구도 하느님의 창조를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보이는 모든 것이 나왔다’는 것을 믿음 때문에 ‘확신’합니다. 과학이 더 이상 밝힐 수 없는 생명체의 신비, 물질세계의 궁극적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인 ‘믿음’을 통해 깨닫습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차례로 위대한 영웅들의 믿음을 예로 든 후에 아브라함에 이릅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을 확고한 ‘믿음의 원형’이자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합니다(로마 4:13~25). 대조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와 아브라함’ 둘 다를 ‘믿음의 사람’으로 칭송합니다. 분명 사도 바울로와 <히브리서> 기자는 ‘좌충우돌’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알고 있었음에도 둘 다 생물학적인 제한, 즉 ‘과학’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개입해 오시는 하느님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사실 《성경》은 ‘사람들의 믿음’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하느님이 믿는 사람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시고, ‘하느님 나라’(하늘 예루살렘, 하느님의 도성, 영원한 처소, 히브 12:22,28; 13:14; 묵시 21:2~4)를 보장하심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절대적인 헌신, 절대적인 의탁(투신), 절대적인 충성, 최고, 최선의 상태에 있는 이들이 갖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들려주는 책입니다(요한 20:31).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시라면,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인간이 어둠 속을 살아가는 ‘사탄의 아들’이라면 예수는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자신에게 선물된 초자연적인 믿음을 통해 예수와 이 영원한 생명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 이들 앞에는 ‘영원한 도시’가 기다립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생명력을 잃고 살아가던 인생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영접함으로써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생명의 근원’에 연결됩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는 시점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늘의 별들처럼’ 많은 자손과 땅을 차지하는 약속입니다. 다만 멀리서 그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분명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실상’은 육적인 이스라엘 자손과 가나안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그림자’, ‘모조품’일 뿐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은 ‘메시아’와 영적인 이스라엘,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분명 아브라함도, 사라도, 이사악도, 야곱도 ‘하늘의 별들처럼’ 많은 자손으로 늘어나는 약속의 성취를 현실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처럼 ‘메시아’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은 자손으로 늘어나는 약속의 성취를 현실에서 얻지는 못했으나 세대를 이어가며 자손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먼 미래에 받을 하느님의 약속을 확신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지라는 하느님의 약속 뿐 아니라 그 ‘땅’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땅의 실재는 이 ‘지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실재는 ‘하늘’에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설계자와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 ‘한 도시’입니다. 기초도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임시 거처 ‘천막’이 아니라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영원한 집으로, 그 집은 하느님이 설계자와 건축가가 되셔서 세워주실 영원한 ‘하늘 도성’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 약속이 현실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약속의 실재인 하늘에 있는 ‘한 도시’를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들을 이 땅에서는 타향 사람, 나그네로 여기면서 그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에 있는 고향’, 즉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이 믿음으로 살아간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많은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이리저리 나그네처럼 더 이상 옮겨 다니며 ‘천막’을 치고 살지 않아도 되도록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도시’, 즉 ‘영원한 처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서 설계자와 건축가가 되셔서 세워주실 그 영원한 하늘 도성의 ‘기초’임을 믿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영접한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 하늘 도성에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가 물려준 신앙입니다. 우리의 성찬례는 바로 이 신앙의 살아있는 표현입니다.

복음이야기는 ‘하느님의 약속’과 ‘제자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교훈을 주시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전반부(32~34절)는 예수님께서 ‘어린(적은) 양떼들’에게 전해주시는 ‘하느님의 약속’과 탐욕을 버리고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제자도’의 명령입니다. 후반부(35~40절)는 ‘주님의 재림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전반부(32~34절)는 1독서 《창세기》와 2독서 《히브리서》가 <복음서>의 배경 독서로 배정된 이유를 알게 합니다. 하느님은 ‘보잘 것 없던’ 떠돌이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믿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하느님은 ‘갸륵하게 여기셨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 뿐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은 하느님이 주신 그 ‘약속의 실상’이 지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그들의 후손 가운데 보내주실 것임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느님이 친히 ‘설계자’와 ‘건축가’가 되셔서 세워주실 영원한 ‘하늘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자신들을 ‘타향 사람’, ‘나그네’로 여기면서 그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에 있는 고향’, 즉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셨고, 더 이상 그들이 옮겨 다니며 살지 않도록 고정된 ‘영구한 도시’, 즉 ‘영원한 처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선조들이 꿈꾸던 그 ‘하늘나라’(하느님의 왕국)를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는지 먼저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신 것처럼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대조하면 이렇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 창세 15:1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 루가 12:32

‘어린 양떼들’은 ‘적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좁게는 ‘제자들’을 말하며, 넓게는 그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1세기 ‘그리스도인들’과 오늘의 ‘우리’를 뜻합니다. 제자들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의 ‘목자’(아브람에게는 방패)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문에는 ‘나의’라는 말은 없지만 《공동번역 성서》는 문맥상 그렇게 의역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라 독점하시지 않고 ‘너희(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던 ‘제자들’이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더욱이 ‘너희’(우리)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상을 주신 것처럼, 어린(작은) 양떼들에게 ‘하늘나라’(하느님의 왕국)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비록 제자들이 ‘어린(작은) 양떼들’이더라도 그들의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0:11). 정말이지 ‘삯꾼’ 밑에 있는 ‘많은 양떼들’보다 ‘착한 목자’ 아래서 보호와 공급을 받는 ‘어린(적은) 양떼들’이 훨씬 ‘복’(福)이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주인’이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상속할 ‘제자도’를 명령하십니다. 그 ‘제자도’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자선’입니다(33절). 이 제자도가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드는 길이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는 길이라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저축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는 하늘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난주에 들은 말씀처럼, ‘인색하지 않고 하느님께 부자’가 되는 길입니다(루가 12:21). ‘생명의 이자’는 하느님께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돌려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 자선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저축’입니다.

사실 이 명령은 어느 시대나 제자도의 시험이며, 우리를 제자로 훈련시키는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이 ‘탐욕’에 물들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미리 제공하시는 일종의 ‘해독제’인 셈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생을 단순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이 재물의 무게로 주저앉지 않도록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실제로 ‘자캐오’의 경우에서 보듯이(루가 19:1~10) 이 제자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진정한 ‘회심의 표시’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는 완전한 ‘충성의 표시’이자, 예수님께만 사랑을 바치는 변함없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분명 지혜의 역설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눌수록 오히려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을 더 많이 갖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어째서 우리가 그런 제자도를 실행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재물(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 루가 12:3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말씀처럼 단순한 진실이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땅의 창고에 저장하는 ‘재물’을 우리 삶의 진정한 보물(보화)로 여긴다면, 우리 ‘마음’(그리스어로 카르디아, 내면의 자아, 우리 존재의 정서와 의지의 중심)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그 재물과 함께 이 지상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자선’은 곧바로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진정한 재물 창고가 ‘하늘’에 있고, 우리의 ‘마음’을 거기 하늘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후반부(35~40절)는 ‘주님의 재림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하늘나라를 상속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탐욕’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과 염려에 빠지지 않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 길은 딱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는 생활입니다. 스승께서 간직하셨던 그 최고의 가치, 즉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며, 스승의 귀환을 준비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스승의 귀환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35절) ‘띠를 띠었다’는 말은 ‘일을 할 준비, 혹은 섬기는 행동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등불’은 하느님의 말씀(시편 119:105)을 상징하기에 하느님의 말씀의 빛이 그의 삶에서 타오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승의 귀환을 준비하는 이들은 어떤 복을 받습니까?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맞이하는 종들, 즉 준비된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섬김’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은 흥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발걸음은 여유롭고 마음에는 노래가 흐릅니다. 그 흥겨운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처음에는 시중을 드는 주인의 행동에 놀라겠지만 이내 행복해 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반전, 그것이 세상과 다른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스승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준비된 삶을 산 제자들에게는 많은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긴장’(緊張)이 있습니다.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는데 일을 해야 할 때의 당혹감을 한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당신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 그것이 누구나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루가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미지를 ‘도둑’에 적용할 정도로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도둑은 절대로 자신이 언제 침입할지 집주인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도둑을 막는 일은 항상 경계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는 길 역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시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이니 항상 준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은 ‘믿음’의 위대함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하늘나라’를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믿음과 믿을 수 없는 근거들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제시하는 ‘객관적(과학적, 생물학인, 수치적, 수량적) 근거(자료)들’을 따를 것인지 그 사이에서 주저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의심하게 하는 수많은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심지어 하느님보다는 과학을 더 신뢰하라는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서 ‘구석’으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반면에 《성경》은 그런 ‘수많은 데이터’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우리의 눈길을 기록된 ‘말씀들’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역사와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인지, 과학을 하느님처럼 믿는 ‘데이터’의 사람이 될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의심과 믿음 사이를 ‘왕래’하다 그만 지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흔들리는 속마음을 숨기고 성찬례에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오늘도 성찬례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흔들리는 우리를 내치시지 않고 당신의 ‘한 말씀’을 우리 마음에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의심’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신실하시며, 자비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처럼 변덕스럽지도 않고 결코 흔들리시지도 않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찬례 속에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요히 타오르고 있는 ‘제대초’를 바라볼 때 어느 새 주님은 우리 어두운 마음에 한 줄기 ‘믿음의 빛’을 당기어주십니다.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성가의 선율을 타고 어느 새 우리 마음 한 가운데 들어와 노래하고 계십니다. 피어오르는 향로의 연기와 그 향을 통해 어느 새 우리 마음 한 가운데 들어와 기도를 들으십니다. 낙망한 제자들에게 부활의 모습으로 찾아가시어 다정스레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듯이 오늘도 선포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한 아름 ‘평화’를 안겨주시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참된 고향은 하느님이 설계자와 건축가가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하신 영원한 ‘하늘 도성’임을 다시 일깨움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고,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다시 ‘믿음’으로 돌아섭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찾아오시어 말씀하시는 주님 덕분에 다시 ‘조율’(調律)됩니다. 의심과 불신앙은 멀리 달아나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더욱이 축성된 성체를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와 눈을 마주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도록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고 마심으로써 ‘영혼의 생기’(生氣)를 얻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순간 의심으로 어두워졌던 ‘영혼’에는 다시 ‘믿음의 등불’이 밝혀집니다. 의심과 불확실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않을지라도 성체를 영한 우리가 두려움의 문들을 열고 주님과 함께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일할 풍성한 은사까지 주셔서 파송하십니다. 화해와 평화의 소식인 예수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믿어 영원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도록 하는 그 거룩한 사명으로 우리를 파송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처럼, 시련을 통과하여 희망을 낳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믿음 덕택에 우리가 죄의 묶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왕국이 되었으며, 거룩한 사제가 되었음을 일깨웁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인 믿음을 통해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었음 일깨웁니다. 이 진리가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가 우리에게 물려준 신앙입니다.

부디 우리가 하느님이 선물하신 이 믿음을 잘 개발하고 사용하는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재물의 탐욕에 빠지지 않고, 자선을 통해 하늘 창고에 재물을 쌓는 ‘믿음의 사람들’로 우뚝 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의 등불을 높이 치켜들고 다시 오실 주님을 잘 준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축복합니다. 분명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지상의 민족주의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눈’을 뜬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모든 민족을 하나의 새 민족, 한 시민, 한 가족으로 이미 만들어 주셨음이 보입니다(에페 2:14~19). ‘하늘나라’를 아버지께서 예수를 통해 이미 믿는 이들에게 주셨음이 믿어집니다. 지금은 서로 다투지만 그 날에는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대한민국도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새 민족’만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친히 설계자와 건축가가 되셔서 세워주신 그 ‘하늘 도성’에서 함께 만나 복락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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