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4.연중18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순간을 살면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들은 자기 업적과 출세와 성공을 ‘욕망’하며 서로 다툽니다. 전례독서는 그리스도 없이 이루고자 하는 인생들의 그와 같은 욕망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고, ‘물거품’과 같다고 교훈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새 인간’이 되었습니다. 새 인간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이 주신 삶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천상의 것’, 즉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런 삶으로 날마다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지혜를 주시어 우리가 받은 물질과 재능을 축복의 도구로 선용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전도 1:2,12-14, 2:18-23
  • 시편 – 49:1-12
  • 2독서 – 골로 3:1-11
  • 복음서 – 루가 12:13-21

연중 1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순간을 살면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같은 분위기입니다. 말씀 나눔을 준비하면서 이 모두를 꿰는 소설을 머릿속 이야기 창고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마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책 한권을 찾아들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단편집》에 실린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입니다.

이 작품은 1독서 《전도서》가 전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대한 톨스토이의 ‘설교’입니다.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다.”(14절) 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은 ‘바흠’(Pahom)입니다. 그는 더 많은 ‘땅’을 소유하려고 온종일 내달리다 결국은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의 탐욕이 초래한 죽음을 통해 톨스토이는 인생의 교사처럼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지금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가는지 ‘멈추어서 돌아보라’고 말입니다. 또 이 작품은 《시편》 49편이 찬미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대한 톨스토이의 ‘설교’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땅에다가 제 이름 매겼더라도(떨쳤더라도) 그들의 영원한 집, 언제나 머물 곳은 무덤뿐이다.”(11절) 톨스토이는 예술가답게 정확히 이 찬미를 꿰뚫어 ‘바흠’(Pahom)이 출발지로 돌아와 최종적으로 차지한 땅을 ‘마름질’하며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그는 이미 죽었기에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고작 2m미터 남짓한 땅에 묘비명 하나 세우는 인생인데 무얼 그리 업적과 출세와 성공을 욕망하며 다투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톨스토이는 ‘인생무상’을 직시(直視)하라고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통해 설교합니다. 같은 분위기의 《전례독서》인 《전도서》나 《시편》이 전하는 것처럼, 인생은 “제 아무리 영화를 누리더라도 결국은 잠깐 살다 죽고 마는 짐승과 같습니다.”(시편 49:12)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생무상’을 직시하게 하는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인간의 ‘자기완성’과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인생교사처럼, 예술가처럼 교훈합니다. 탐욕과 절제, 악마와 유혹, 삶과 죽음, 지금과 영원, 여기와 거기 모두를 이 작품 속에 잘 녹여냈습니다. 굳이 다른 작품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는 탁월한 ‘심리분석가’이자 ‘영성가’입니다. 줄거리는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도시 사는 언니가 시골 동생 집을 방문했습니다. 둘은 서로의 생활방식을 두고 옥신각신 합니다. 그 소리를 동생의 남편인 ‘바흠’(Pahom)이 들었습니다. 그는 두 자매의 대화에 끼어들며 원하는 만큼의 ‘자기 땅’만 있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만 그 이야기를 악마가 듣고 말았습니다. 약이 오른 악마는 땅을 갖고 싶어 하는 그의 욕심을 이용해 홀릴 참입니다.

어느 날 ‘바흠’(Pahom)은 ‘장사치’(악마가 유혹하는 분신입니다)로부터 ‘바시키르’(Bashkirs) 지역에 가면 싼 값에 원하는 대로 비옥하고 넓은 땅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일꾼 한 사람을 데리고 출발하여 7일 만에 ‘바시키르’(Bashkirs) 인들의 유목지에 도착합니다.

그곳 촌장에게서 하루치 땅값이 1,000루블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거리 제한은 없고 하루 동안 돌아보는 곳 전부가 자신의 땅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모두 표시를 한 후에는 해 지기 전까지 출발했던 장소로 꼭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만 날립니다.

들뜬 마음에 밤을 지샌 ‘바흠’(Pahom)은 새벽녘 깜빡 잠이 듭니다. 불길한 꿈을 꿉니다. 웬 사내가 속옷 바람에 맨발인 채로 죽어 있습니다. 그 뒤에서 ‘악마’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습니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 사내는 바로 자신입니다. 깜짝 놀라 눈을 뜹니다.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그는 ‘바시키르’(Bashkirs) 인들과 함께 ‘시칸’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오릅니다. 촌장이 초원을 가리켜 보이며 마음대로 좋은 곳을 고르라 말하자 그의 눈은 활활 불타오릅니다.

촌장이 땅바닥에 내려놓은 ‘여우털 모자’가 출발지점입니다. ‘바흠’(Pahom)은 모자에 돈을 넣고 단단히 채비를 합니다. 이윽고 해가 떠오르자 그는 괭이를 둘러메고 초원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하루치 여정이 시작됩니다. 가다가 걸음을 멈추어 괭이로 구덩이를 파서 표시를 합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쉬지 않고 내달립니다. 피곤해도 좀 더 넓은 땅을 소유하려는 욕심 때문에 멈출 수가 없습니다. 땅은 너무나 기름져 보이기만 합니다.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갑니다. 자칫 돈만 날릴 수도 있습니다. 이제 ‘시칸’ 언덕을 향해 돌아가야 합니다. 이미 몸은 지칠 대로 지쳐서 금방 쓰러질 것 같지만 해가 벌써 지평선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탓하면서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립니다.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아도 넓은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꿈에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마침내 그는 ‘시칸’ 언덕 밑에 도착합니다. 해가 이미 진 줄 알고 포기하려다 언덕 위에는 아직 햇살이 남아있음을 알아차리고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갑니다. 처음 출발했던 ‘여우털 모자’가 놓여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모자 앞에는 촌장이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앉아 있습니다. ‘바흠’(Pahom)은 새벽녘 꾸었던 그 불길했던 꿈을 떠올리며 모자를 향해 손을 뻗은 채 쓰러지고 맙니다. 촌장이 그에게 소리칩니다. “참으로 훌륭하오! 당신은 정말 좋은 땅을 차지했소.” 쓰러진 그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옵니다. 《전도서》 말씀처럼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촌장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생명을 주셨다가 곧 거두어 가시지요.”

그와 함께 왔던 일꾼이 괭이를 들어 구덩이를 팝니다. 구덩이의 길이는 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키와 같았습니다.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3아르신’(약 2미터)에 불과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미 죽었기에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기 묻혔습니다. 《시편》의 찬미처럼 그곳이 그의 “영원한 집”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가 이 진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바람을 잡듯 헛된”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좁은 땅덩어리에 살다보니 오늘날도 수많은 ‘바흠’(Pahom)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땅’으로 상징되는 ‘자기 욕심’을 위해 멈추지 못하고 내달리는 ‘탐욕’(貪慾)에 빠진 사람들 말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탐욕’ 때문에 자기 ‘생명’(生命)을 파괴시켜 가는 어리석은 사람들 말입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걸음을 ‘멈추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 내달리고 있는지 ‘돌아본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자기 욕심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본다면 무엇이, 누가 보일까요? 아마 ‘멈추지 못해서’ 보지 못하고 잃어버렸던 ‘관계들’이 보일 것입니다. ‘땅’(돈, 권력, 명예, 성공, 소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삶의 진실들’이 보일 것입니다. 나중에, 다음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 관계와 삶의 진실에 투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칫 ‘자기 욕심’ 때문에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를 전하는 <루가복음>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바흠’(Pahom)이 ‘예화’ 속에 등장합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형제간 유산 다툼’입니다(13절). 당시 유대인들은 유산 다툼이 생기면 ‘랍비’를 찾곤 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 온 사람은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몫을 위해 형과 싸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선후관계는 생략한 채 예수님께 자기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율법에 따르면 ‘맏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의 ‘제일 좋은 몫’을 물려받을 뿐 아니라 다른 아들보다 ‘두 몫’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신명 21:15~17). 이 규정대로 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문제가 생긴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규정을 무시하고 형제들이 ‘자기 몫’보다 더 갖겠다고 ‘탐욕’을 부린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산을 분배하지 않고 형이 동생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경우입니다. 아마 동생은 형과 계속 살기보다 ‘자기 몫’을 분배받아 ‘독립’하기를 원했을지 모릅니다. 문제가 생긴 이유가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복음 이야기는 침묵합니다. 다만 이어지는 ‘예화’가 ‘탐욕’에 대한 것이니 둘 다 ‘탐욕’에 빠진 사람들로 보고 말씀 나눔을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유산 다툼 문제’에 끼어들기를 거부하십니다(14절). 오히려 이 일을 통해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과 ‘재산’(돈)을 어떻게 부려야 하는지 가르치시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정의’에 무관심한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깊이’ 보셨습니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문제는 보지 못하고 가짜 문제를 가지고 옥신각신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진짜 문제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루가 12:15a

이런 말씀을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진짜 문제가 ‘탐욕’임을 보셨습니다. ‘탐욕’은 ‘자기 몫 이상으로 더 갖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욕심’(욕망)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바흠’(Pahom)의 경우처럼, ‘탐욕’이 자신에게 해로운 욕심인 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더욱이 ‘탐욕’은 마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아담과 하와가 표본이듯이 ‘불행한 행동’으로 연결됩니다(창세 3:6). 이처럼 ‘탐욕’은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 아니라 종국에는 하느님을 떠나게 합니다(로마 1:24~25; 야고 1:14~15). 우리는 누구나 ‘탐욕’에 빠져들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고, 또 ‘탐욕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늘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도 ‘탐욕’에 대해 경고할 뿐 아니라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는 결코 어울릴 수 없다고 명백히 가르칩니다(출애 20:17; 1고린 5:9~11; 6:9~10; 에페 4:19; 5:3; 골로 3:5).

문제는 인간을 망가뜨리는 ‘탐욕’이라는 ‘적’(敵)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탐욕’이 그들 유산 다툼의 진짜 원인이고, ‘자기 몫’을 갖지 못하는 것보다 탐욕이 ‘영혼’에 더 해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탐욕의 위험성을 깨치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콕 집어서 가르치십니다.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자기 몫’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몫 이상으로 더 갖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욕심’인 ‘탐욕’에 빠진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자기 몫’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탐욕’으로 몰아가는 세력이 존재합니다. 특히 ‘노동자’들을 향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는 ‘임금노동자’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분명 하느님께 기원하고, 하느님의 창조적인 활동에 잇닿아 있기에 ‘신성’합니다. 창조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노동’을 통하여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창조세계를 돌보는 ‘노동의 자리’로 인간을 이끄셨다고 보도합니다(창세 2:15). 공생애를 사시기 전 예수님의 직업은 ‘건축노동자’였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며 여전히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노동자’로 지칭하셨습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시는 ‘자기 노동의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다스리심 속에 자기 존재의 목적을 노동을 통해 구현하는 세상입니다. 인간 중심적으로 말하면 인간다운 삶을 일구어 가는 사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위해 ‘노동’하셨습니다.

hand of a farmer holding a young green plant with natural green background / Protect and love nature concept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시는 성령께서도 ‘생명’을 주는 영으로 지금도 ‘노동’하십니다. 교회를 낳으신 진정한 어머니이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노동’하도록 교회에 지속적으로 ‘능력’을 불어넣으십니다. 교회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현실화’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섬기도록’ 지금도 성령에 의해 파송됩니다. 참으로 성령은 하느님 나라의 ‘실행자’이시기에 교회는 하느님 나라에 반하는 ‘사회의 불의’에 결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은 피조세계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동’하시면서도 ‘정당한 대가’를 인간으로부터 결코 바라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삶을 살도록 ‘노동’으로 세상을 떠받치는 노동자는 ‘정당한 대가’, 즉 ‘임금’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의 고귀함 때문에라도 ‘노동’은 마땅한 대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실 지금처럼 임금노동자의 무려 3분의 1이 불안전한 고용, 즉 ‘비인간적인 비정규직’으로 고통 받는다는 사실은 ‘탐욕’에 빠진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비정규직 제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는 ‘제도개선’을 통해 보다 안전하고 인간적인 노동환경이 제공되도록 좀 더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일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느님 나라 정신과도 부합합니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과 노동자들도 한번쯤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일부 주요언론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세력을 대변하기 위해 사건의 본질을 ‘호도’(糊塗)하곤 합니다. 자신들을 대변할 ‘언로’(言路)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극단적 투쟁으로 존재감을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환경을 호소하며 “여기 기계가 아니라 따뜻한 품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알립니다. 대부분 그 호소는 사실에 가깝습니다. 그런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요구를 위해 나선 노동자들에게, 자기 행위를 성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폭력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그 호소 속에 스스로가 ‘간과’(看過)하고 있는 면은 없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 호소 속에 사실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냉정히 보자면 탐욕스럽다고 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그들처럼, 스스로도 자신의 ‘탐욕’을 감추고(혹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마음의 기만적인 본성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꼭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어째서 ‘탐욕’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재물, 소유)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 루가 12:15b

오늘 《시편》 49편의 요약과도 같습니다(시편 49:8). 이 말씀은 ‘재산’(재물, 물질적 소유의 풍족함)에 대해 예수님이 견지(堅持)하신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정말이지 한 사람의 생명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풍부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만일 ‘재산’(소유의 풍부함)이 생명을 보장해 줄 것처럼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이미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탐욕’에 빠졌습니다(골로 3:5).

예수님은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말씀 후에 ‘예화’(비유)를 하나 드십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가르치신 후에 ‘재산’(돈)을 어떻게 부려야 하는지 가르치십니다. 본래 ‘예화’는 그 발설의 성격상 따로 뜻풀이가 필요치 않을 만큼 쉽습니다. 들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이 ‘예화’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기록되면서 ‘예화’가 말해지게 된 본래의 배경은 떨어져나가고 ‘예화’ 그 자체만 남겨진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전반을 참고해서 ‘예화’에 담긴 본래적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풍성한 결실을 맺는 ‘비옥한 넓은 밭’을 가졌습니다. ‘바흠’(Pahom)이 몹시 부러워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 해(年) 6월 밀농사는 풍작(豐作)이 들어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풍작(豐作)은 그의 능력이 특출 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 지역에 내리신 축복이었습니다. 큰 토지를 가졌던 부자는 많은 소출 때문에 곡식 쌓아둘 곳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궁리 끝에 이미 있던 ‘자기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어 거기에 ‘자기의 모든 곡식’과 ‘자기 재산’을 넣어둘 ‘계획’을 세웁니다. 아마도 그 지역 전체에 풍작(豐作)이 들었기에 지금 내다 팔면 가격이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창고에 쌓아두고 내년까지 기다리면 흉년이 들어서 시세가 오를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것이 있던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지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익에 빠를 뿐 아니라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자기 영혼’(목숨, 생명)과 대화를 합니다.

‘영혼(목숨, 생명)아, 많은 재산(좋은 것)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 루가 12:19

우습습니다. 보통은 그냥 혼잣말을 하면 되는 데 그는 자신과 대화하면서도 그 대화 상대가 마치 자기 몸 밖에 있기라도 하는 냥 말합니다. 상담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신과의 관계가 편안치는 않다는 뜻입니다. 그의 계획과 준비에 따르면 자신의 인생은 놀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전부가 될 것입니다. 《전도서》에도 이런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므로 즐겁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늘 아래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밖에 사람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것이 없다면 하늘 아래서 하느님께 허락받은 짧은 인생을 무슨 맛으로 수고하며 살 것인가?” – 전도 8:15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계획처럼 들리지만 가난에 시달리던 대다수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공감 받기 어려운 결정입니다. 이 같은 혼잣말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이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많은 ‘재산’(재물)은 그의 자부심의 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못 보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느님은 장밋빛 인생을 꿈꾸던 부자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놀랍습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가리켜 ‘성공한 사람’이라 부르기를 좋아합니다(간혹 부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는데 잘못된 말입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것이지 잘 사는 사람과 ‘등가’(等價)개념일 순 없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창고를 더 크게 지어서 곡식을 쌓아놓았다가 시세가 오를 때 내다 팔 생각을 할 정도로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어리석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물론 그가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어리석은 자’로 불린 첫 번째 이유는 ‘우상숭배자’였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가 다른 ‘신’(神)을 섬겼다는 말은 없습니다. 게다가 남의 것을 착취했다거나 도둑질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둑질보다 더 위험한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는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 뿐 아니라 새 창고에 많이 쌓여 질 ‘재산’(재물)에 의지했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생명과 미래를 보장하는 것처럼 믿었습니다. 이렇게 쌓아 둔 재산(재물)에 의지하며, 자기를 지켜줄 하느님으로 삼았으니 그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가 ‘어리석은 자’로 불린 두 번째 이유는 ‘자기 것’(소유)이 아닌 것을 ‘자기 것’(소유)이라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 뿐 아니라 우리도 ‘영혼’(목숨,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본문에 ‘영혼’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프쉬케’는 ‘목숨’, ‘생명’(生命), ‘마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생명’(生命)은 ‘살(生)라는 명령(命)’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살라는 명령’을 받고 ‘부모’라는 길을 통해 세상에 왔습니다. 지극히 높은 차원과 연결된 우리의 ‘생명’(生命, 목숨, 영혼)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되는 인생이 아니라 ‘잘 살고 오라’는 숭고한 명령을 주신 분, 즉 ‘생명’(生命)을 허락하신 분의 뜻을 성취하는 데 인생의 참 의미가 있습니다. 참으로 모든 ‘생명’(生命, 목숨, 영혼)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하느님은 인생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풍요로운 ‘창조주’이십니다(사도 17:25).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사도 17:28).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이자, 소중한 일부라고 명백히 가르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인간이 자신의 ‘소유’, 즉 ‘내 것’이라 주장할만한 것은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생명’(목숨, 영혼)도 ‘잘 살고 오라’고 하느님이 잠시 빌려 주신 ‘빚’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생명 원리’대로 잘 살겠다고 잠시 빌려다 쓰고 있는 ‘빚’입니다. 지금 누리는 우리의 ‘생명’(목숨, 영혼)이 분명 창조주께 진 ‘빚’이기에 거기에서 움터 자라난 모든 활동들, 즉 재능과 업적과 성취와 재산도 근원적으로는 하느님께 지고 있는 ‘빚’입니다.

‘빚’진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빌려 준 이에게 ‘이자’를 내다 약속 기한에 ‘원금’을 갚는 일입니다. 하느님도 우리로부터 ‘생명의 이자’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빌려간 그 ‘생명의 원금’도 언젠가 완전히 청산하도록 요구하실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느님께서 언제 그 빚을 청산하도록 요구하실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대비는 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받기 원하시는 ‘생명의 이자’는 ‘착한 일’, ‘선행’, ‘나눔’입니다(1디모 6:18~19). 물론 하느님은 그 ‘이자’를 당신에게가 아니라 ‘이웃’에게 되돌리도록 처음부터 의도하셨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생명을 잠시 빌려주신 창조주 하느님의 ‘목적에 맞게’ 잘 살아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 부자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기에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가 ‘어리석은 자’로 불린 세 번째 이유는 ‘생명의 선순환 원리’(이치)를 거스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생명’ 그 자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 생명을 빌려주신 분의 목적에 맞게 잘 사는 ‘생명 원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계’입니다. 무릇 하느님께 생명을 나누어 받은 피조물 중에 ‘관계’를 떠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은 오로지 ‘관계’ 속에서만 풍요로워집니다. 특히 모든 생명은 무엇인가(누군가)의 끊임없는 ‘희생과 죽음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특징이자, 원리이며, 이치입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먹는 ‘밥’(음식)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밥이 된 그 쌀(모든 먹거리) 속에는 땅과 하늘, 햇빛과 구름, 바람과 비, 농부의 수고와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쌀은 또 자신을 희생하여(자기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밥이 됩니다. 우리는 그 밥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의 산물인지를 감사하고, 한 그릇의 밥이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수고한 모든 이들을 축복하며 먹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살리는 밥(희생물)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먹습니다.

아이가 자라나는 일도 그렇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과 죽음으로 내어주는 엄마 덕택에 아이는 생명을 영위(營爲)해 갑니다. 엄마의 생명력은 날마다 새어나가지만 아이의 생명력은 날마다 커갑니다. 그렇게 엄마는 할머니가 되고 아이도 엄마가 됩니다. 물론 엄마는 자신의 희생과 죽음을 기뻐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났고, 언제가 자녀도 자신의 아이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의 우리가 이어가는 생명의 특징, 원리, 이치는 무엇인가가(누군가가) 내게 바치는 희생과 죽음, 내가 누군가에게 바치는 희생과 죽음의 ‘선순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체 상호간의 돌봄과 제공의 ‘사슬관계’입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희생과 죽음은 손실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생명이고, 또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한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게도 부자는 이 같은 ‘생명의 특징, 원리, 이치’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참된 지식’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행복만을 위해’ 그 모든 ‘좋은 것’(재산)을 이기적으로 만끽할 탐욕스런 생각뿐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자기행복이지 그것은 ‘탐욕’이었습니다. ‘창고’와 ‘더 큰 창고’가 그의 탐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하느님이나 가난한 사람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전혀 기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그는 그 많은 ‘좋은 것’(재산)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의 이자들’(착한 일, 선행, 나눔)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내 창고, 내 곡식, 내 재산, 내 영혼”에만 골몰했습니다(18~19절). 그리하여 그 많은 ‘좋은 것’(재산)이 ‘생명 원리’에 맞게 자신과 다른 생명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걸림돌과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자부심이었던 재산이 ‘구원’과 ‘영원’에 있어서는 가장 큰 적(敵)이었습니다. 그의 ‘영혼’(목숨, 생명)은 하느님이 받으실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재산’에 대한 ‘탐욕’이 그로 하여금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처럼 ‘천상의 것’(위에 있는 것, 영원한 생명)을 추구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가 ‘어리석은 자’로 불린 네 번째 이유는 ‘영원’에 대한 ‘알아차림’과 ‘준비’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원’이 없다면 그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영원’이 있기에 그 세계를 위해 준비하지 못한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영혼’(목숨,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계시기에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처럼 그가 하느님께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 이유를 종합하면 그는 하느님께 진 ‘생명의 채무’를 망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선고하십니다.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 루가 12:20

장밋빛 인생을 그리던 ‘어리석은 부자’는 그날 밤 생명을 빌려주신 하느님으로부터 빚을 완전히 청산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좋은 것’을 준비하고 즐길 인생계획은 세웠으나 자신이 죽는 날은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시편》 말씀처럼 “돈 많음을 자랑하며 재물을 믿은” 그였지만(시편 49:6) 단 하룻밤 사이에 그의 모든 업적과 계획이 죽음 앞에서는 ‘물거품’이었습니다. 그의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그 많은 ‘재산’(좋은 것)은 그의 ‘영혼’(목숨, 생명)을 결코 살려낼 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이상합니다. 분명 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 루가 12:18~19a

‘내 창고’, ‘내 모든 곡식’, ‘내 재산’, ‘내 영혼…’ 그는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 분명히 ‘자기’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세계에 내려 갈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편》에서 노래했듯이, 그리고 《탈무드》에 나오는 <세 친구의 이야기>처럼,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친구’로 데려 갈 수 없었습니다. 그 무엇도 어리석은 부자의 소유인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 ‘영혼’(목숨, 생명)의 진짜 주인이 하느님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목숨, 생명)을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요? 그에게 잠시 빌려주셨던 ‘생명의 원금’을 기쁘게 되돌려 받으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생명의 원리(이치)에 따라 살지 않고 역행해 살았습니다. 하느님이 되돌려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실 정도로 그의 ‘생명’은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그의 소유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되돌려 받고 싶지 않으실 정도로 변질된 그의 ‘영혼’(목숨, 생명)은 누구의 소유란 말입니까? 악마의 소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와 그 졸개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탐욕’에 빠져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 온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것들은 하느님의 소유였습니까?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라는 이 진실을 깨우치지 못했기에 ‘어리석은 자’라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살아생전 그가 이룩한 것들에 대한 권리를 하느님께 양도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그가 언급한 것들 중에 하느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제 지상에 남겨진 그의 모든 곡식과 재산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습니다(전도 2:21; 시편 49:10). ‘탐욕’에 빠져 ‘자신만을 위해 재산을 모은 사람’의 끝은 그야말로 ‘허무’였습니다.

<복음서> 연구가들은 여기까지가 본래의 ‘예화’였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나머지 한 절은 예수님의 예화에 루가가 적절하게 덧붙인 그만의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루가는 예화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 루가 12:21

이것이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를 이해한 루가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탐욕’에 빠지지 않고 ‘영원을 준비’하는 길이 제시됩니다. 우리가 재산을 어떻게 부려야하는지 그 길이 제시됩니다. 루가가 생각하기에 부자의 진짜 문제는 자기를 위해서 재산을 모았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짜 문제는 “하느님께 인색”했고, ‘하느님을 향한 부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예화’를 들려주신 계기가 된 탐욕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 부유하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향한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루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정신에 따르면 가난한 이웃을 향한 연민과 나눔, 즉 ‘사랑의 실천’입니다(루가 10:30~37; 12:33; 18:22).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자면 ‘생명의 이자’, 즉 ‘착한 일’, ‘선행’, ‘나눔’입니다(1디모 6:18~19). 이렇게 실천하는 삶이 ‘생명의 이자’를 잘 내는 삶이고, 하느님을 향한 부자가 되는 삶입니다. 어쩌면 그런 ‘사랑의 성적표’만 들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창고를 채우고 있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생명’의 보장을 위해 창고에 쌓아놓길 좋아하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황금만능’이란 말처럼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이들도 보입니다. 정말이지 ‘돈’은 ‘탐욕’에 빠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릴 만큼 ‘군림’(君臨)합니다. 심지어 돈은 ‘양심’마저 마비시킬 정도로 ‘위력’(威力)이 대단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고위공직자의 비리나 대부분의 사건사고는 ‘돈의 탐욕’에 눈먼 사람들이 저지르는 일들입니다. 더욱이 삼성가나 롯데가의 예에서 보듯이 가족관계마저도 무너뜨리는 것이 돈이 가진 ‘위세’(威勢)입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물거품’처럼 허무한 게 ‘돈’입니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결국 한 평 남짓한 땅에 몸을 누이고 마는 ‘바흠’(Pahom) 같은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돈을 자기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죄일 뿐 아니라 어리석습니다.

예수님의 ‘예화’에 따르면, 더 나은 겨울을 위해 최대한 많은 도토리를 저장하는 것이 인생은 아닙니다. 그런 삶은 다람쥐에게나 해당하지 인간에게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재산을 모아서는 안 된다거나, 노후대비를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인생을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단지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자기 몫 이상’으로 더 가지려는 이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웃들은 심각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데도 자신과 자기 가족만은 풍요를 누리려는 이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 ‘지상의 것’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자기만족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르치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새 인간’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우리의 ‘영혼’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세례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어 ‘천상의 것’(위에 있는 것,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며 살도록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 속에서 예수의 정신을 더욱 깊이 알아갑니다. ‘지상의 것’에 행복을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 이제는 분명히 보입니다. ‘생명의 이자’를 이웃에게 잘 되돌리는 삶이야말로 생명을 주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임도 명백히 보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것’, 즉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이 진정 ‘복’임을 성령 안에서 날마다 깨달아 갑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에 추구하는 것을 닮는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뿌린 생각을 거둔다.” 또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자연법칙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성 생활에도 이 원리는 해당합니다. 헛된 것을 마음에 품고 쫓으며 사는 사람은 결국 헛된 것을 닮고, 헛된 것을 거둘 것입니다. 반면에 ‘영원한 것’을 마음에 품고 추구하며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결국, 그 영원한 것을 닮을 것이고, 영원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참된 지식’입니다(골로 3:10).

나는 요즘 무엇을 위해 그렇게 내달리고 있는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잠시 ‘멈추어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업적과 출세와 성공을 욕망하며 서로 다투지만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생살이는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2m미터 남짓한 땅에 묘비명 하나 세우는 ‘물거품’입니다.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잠시 ‘멈추어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올바르게 여기는 일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르심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부디 물거품처럼 사라져갈 ‘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향한 추구로 우리의 생활이 채워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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