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8.연중17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7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성령기도하는 이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할 ‘더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들려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하나 되어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정하신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가득히 보내주시어 예수님 같은 삶의 목표와 지향 속에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 명령하시고 친히 기도를 가르쳐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용서와 사랑을 간구하며 이 땅에 오시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8:20-32
  • 시편 – 138
  • 2독서 – 골로 2:6-15(16-19)
  • 복음서 – 루가 11:1-13

연중 17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성령기도하는 이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하느님께 생명의 근거를 둔 ‘살아있는 생명체’(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nephesh chayah)라고 부릅니다(창세 2:7).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는 생명체’이지만 언젠가 정들었던 가족, 교우들, 세상과 ‘이별’할 날도 올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2고린 5:2)을 벗는 그 이별을 ‘죽음’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골로 3:3). 사도 바울로는 분명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고 새 생명을 얻었다”고 교훈했습니다(로마 6:3~14).

이 세상 나그네 집을 떠난 후에 우리는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하늘의 영원한 집’(낙원, 생명의 나라)으로 옮아 갈 것입니다(루가 23:43; 요한 14:1~3; 2고린 5:1,8~10; 필립 1:23; 1데살 4:14). 나그네 삶을 살면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일구어낸 ‘인격의 총체’, 즉 ‘생명의 고갱이’인 ‘영혼’은 인자하신 ‘주님의 품’에서 눈을 뜰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모든 성인들과 함께 ‘주님의 품’에서 ‘영원히 복된 안식’(평화)에 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평화)에 든 채 ‘불멸의 몸’으로 ‘부활’할 ‘완성의 때’를 성도들은 기다립니다(1고린 15:23,42,51~53; 골로 3:4; 1데살 4:15~16).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 마지막 날이 완성의 때입니다. 그 완성의 때 ‘불멸의 몸’으로 부활한 성도들은 주님이 가져오신 ‘새 하늘, 새 땅’(묵시 21:1~2), 즉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진정한 의미의 천국)에 들어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쉽게도 <성경>은 ‘부활이라는 그 완성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의 ‘안식 상태’, 즉 ‘낙원’에서 안식하며 기다리는 ‘교회’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별세’ 후 ‘부활 때’까지의 ‘중간기’에 대해 성공회가 지켜온 전승에 의지하는 것이 낫습니다. ‘성도의 상통’이라는 ‘믿음과 희망’ 말입니다.

<성공회기도서> 신앙의 개요 제 18장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치고 ‘낙원’에 있는 성도들의 ‘중간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가르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볼 때까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낙원’에서 ‘완성의 때’를 ‘기다리며 안식하는 성도들의 교회’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성을 향해 자라가고’ 있다는 것이 교회가 물려 준 희망입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교회’는 하느님 사랑 안에서 안식하며 ‘완성을 향해 자라가고 있는 성도들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치고 ‘안식에 든 그 성도들의 교회’ 역시 이 지상에서 세상과 육신과 악마와 싸우며 정말로 기도가 필요한 ‘우리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상통’입니다. 교회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포함하며,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상통’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간직할 일이지 ‘면벌부’(免罰符)를 팔던 ‘로만 가톨릭’의 ‘연옥 영혼’이나 기타 이단들의 ‘영혼수면설’, ‘무의식적 잠’과 같은 ‘중간기’에 대한 이상한 가르침에 빠질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잠깐 ‘면벌부’와 ‘연옥’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免罪符)는 잘못된 용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죄’를 면(免, 벗기다)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죄값)을 ‘면해준다’는 증서였습니다. 이를 돈을 주고 매매했습니다. 따라서 ‘면죄부’(免罪符)가 아니라 ‘면벌부’(免罰符) 또는 ‘사면부’(赦免符)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연옥’ 이야기는 바로 이 ‘죄의 형벌’(죄의 대가, 죄값)과 관련 있습니다.

성경은 ‘죄의 대가’(삯, 죄값)는 ‘죽음’이라고 가르칩니다(창세 2:17; 3:19; 로마 6:23; 히브 9:27), 즉 죄 지은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대가, 죄값)은 ‘사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 ‘죄’를 용서하신 사건이고, 죄 지은 이가 받아야 할 ‘사망’이라는 ‘형벌’을 면해 주신 사건입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하게 해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남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는 ‘살아생전’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다 면(免)해지는 것일까요? 중세 때 교회는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형벌)는 살아생전 ‘고행, 금식, 기도, 구제, 선행, 성지순례’ 등으로 치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한다는 ‘보속’(補贖)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죄의 값’(대가, 형벌)을 다 치루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영혼’이 가는 곳이 ‘연옥’입니다. 오염된 영혼이 남은 벌을 받으며 정화되는 곳이지요. 면벌부 이야기는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로만 가톨릭’은 ‘죄와 벌’의 관계가 분명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이런 관점에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는 정교회 신자였습니다. 물론 개신교 신학도 예수의 보혈로 ‘죄’를 씻김 받고(용서받고), ‘사망’이라는 ‘영원한 지옥 형벌’도 ‘면’(免)해졌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그러나 로만 가톨릭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아생전 지은 죄에 대한 ‘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가 모호합니다. 보혈로 죄가 씻김 받고 용서받음으로써 살아생전의 형벌도 함께 면제되는 것일까요? 신학적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너무 쉽게 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살아생전 치러야 할 ‘형벌’에 대한 이야기가 약해서이지는 않을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은 ‘바쎄바 사건’(사무하 11장) 이후 분명히 죄는 용서받았으나(사무하 12:13) 살아가는 동안 혹독한 ‘죄의 대가’(형벌)를 치러야 했습니다. 사무하 13~20장을 읽어보시면 압니다. 그것은 구약이고, 신약시대에는 다른 걸까요? 다만 우리가 희망을 거는 것은 ‘제 2이사야’(이사 52:13~53:12)에 기록된 ‘고난 받는 야훼 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말입니다.

아무튼 ‘성도의 상통’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자는 말씀을 드리려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개역개정과 새번역 성경에서 번역한 ‘잠잔다’는 표현은 ‘죽었다’는 말의 문학적 표현이지 ‘영혼수면설’이나 ‘무의식적 수면 상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의 생명이 끝났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아들으시면 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죽은 사람들’이라고 옮겼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침묵하는 그 ‘중간기’에 지나치게 관심하기보다 ‘지금 여기’를 ‘충실히’ 깨어서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성령을 따라’ 살면서 앞서간 성도들처럼 ‘사랑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 <성경>에도 맞고 성공회 정신에도 부합합니다. 다만 전통적으로 교회가 허용해 온 ‘낙원의 모습’에 대한 ‘희망사항’을 투사하는 것까지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님도 그 정도는 허용하실 것입니다. 가령 <나는 천국을 보았다>와 같은 책입니다. 이 책은 성공회 신자이자 신경외과 의사인 ‘이븐 알렉산더’가 ‘뇌사상태’에서 죽음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와 간증하는 실제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2고린 5:2)을 벗으면 옮아가 안식할(하느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기까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는) 하늘의 영원한 집, 즉 그 ‘낙원’(일반적으로 천국이라고 불렀습니다)에는 꽃과 나무들도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마 아름다운 꽃들과 온갖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없는 ‘낙원’(잠정적인 천국)을 상상할 순 없습니다. 동물들은 어떻습니까?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이고, 없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집에서 기르던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그 ‘낙원’(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작년에 ‘21년’이나 함께 생활해 온 ‘반려견’(伴侶犬)을 잃은 우리 교우 분이 계십니다. 인간의 나이로 말하면 그 반려견은 ‘천수’를 누린 셈입니다. 견종이 ‘포메라니안’으로 ‘다롱’이라고 불렸습니다. 많은 행복과 즐거움을 준 ‘다롱’이를 잃은 슬픔과 아쉬움은 함께 살아보지 않은 이들은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그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다롱이를 천국(낙원)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성경>을 좀 읽었다는 분들은 인간의 ‘특별함’과 ‘우월함’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인간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라고 대답합니다(창세 1:26). 인간만이 그 코에 ‘하느님의 숨’을 나누어 받은 ‘우월한’ 존재라고 대답합니다(창세 2:7; 전도 12:7).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코에 ‘입김’(숨)을 불어넣으셨다는 표현은 하느님을 인간 생명의 근원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사람의 숨’(영)은 위로 올라가고, (어떻게 해서 그들이 숨을 갖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기에 모르지만) ‘짐승의 숨’(영)은 땅 속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성경> 구절을 그들은 언급하기도 합니다(전도 3:21). 이렇게 <성경>을 좀 읽었다는 분들은 위의 질문에 동물도 인간처럼 ‘진흙’(히브리어 ‘아다마’)으로 만들어졌지만(창세 2:7,19), 인간과는 결코 ‘대등’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곤 합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동물은 단지 ‘생명의 숨’만을 가졌지만, 인간은 ‘영혼’, 즉 ‘영속하는 불멸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간의 우월함’을 대답해 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영혼’이라는 말을 쓸 때는 좀 조심해야 합니다. 저도 위에서 조심스럽게 나그네 삶을 살면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일구어낸 ‘인격의 총체’, 즉 ‘생명의 고갱이’이가 ‘영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합니다. ‘영혼’을 인간이 ‘죽은 후’에도 ‘육신에서 분리’되어 ‘의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환생하는 비물질적인 혼백’(정신)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심지어 ‘영혼의 무게’까지 주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성경>을 전승해 온 ‘히브리인들’의 것이라기보다 ‘신비주의자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인들의 사고’에 가깝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들은 당혹해 합니다. 분명 그리스철학을 ‘신학의 도구’로 사용한 그리스도교도 ‘영혼’이라는 말을 쓰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비주의자 플라톤’이나 또 그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靈知主義)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질과 육신’은 악하다는 철저한 ‘영육이원론’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육신 속에 ‘유배되어’ 있다가 ‘특별한 지식’인 영지(靈知, gnosis)를 터득해 다시 ‘하늘로’ 돌아가야만 하는 ‘환생하는 영혼’ 개념도 그리스도교는 배격합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위대함의 근거로 내세우는 <전도서> 해당구절에 대한 인용도 좀 엉터리입니다. 잘 읽어보시면 “사람의 숨(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영)은 땅 속으로 내려간다.”는 ‘확정판결문’이 아니라 “누가 아는가?”라는 ‘의문문’입니다. 더욱이 이 구절 바로 위에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 바 없어 사람도 짐승도 같은 숨을 쉬다가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이렇게 모든 것은 헛되기만 한데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을! – 전도 3:19

만일 사람들이 말하듯이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서 죽은 후에 낙원(천국)에 갈 수 없고, 그 교우의 영혼이 이 세상 나그네 집을 떠나 하늘의 영원한 거처(낙원)로 옮아갔을 때 ‘다롱’이가 없다면, 과연 그 낙원이 낙원일까요? 왜냐하면 ‘낙원은 완전한 행복의 나라’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 품에 안긴 교우의 행복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거기서 주님은 사랑했던 ‘다롱’이를 품에 안겨 주실 것이라 대답하면 지나칠까요?

물론 <성경>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면 집에서 기르던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결정적인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참고, 이사 65:25).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경>에 기록된 ‘낙원’, ‘새 하늘 새 땅’, ‘하느님 나라’(천국)의 묘사는 ‘스케치’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도 거기는 ‘지상’이 아니라 ‘낙원’(잠정적 천국)이고,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마태 19:26)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훈하셨으니 ‘기대’를 가져도 좋다고 저는 교우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살아있는 생명체인 인간(창조), 죽음(이별), 영혼(인격과 생명이 총체), 낙원(하늘의 영원한 집), 부활(완성의 때), 꽃들과 나무들, 동물들, 다롱이와의 재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들이 <전례독서>들에 공통 주제인 ‘기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사실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피조세계’(자연) 안에서의 인간, 식물, 동물의 관계로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리스도교는 피조세계 안에서 인간의 특별함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즉 ‘낙원’이든 ‘천국’이든 그것 역시 인간 차지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식물이나 동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존재라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가르침, 넓게 말하면 철학적 인식들이 도전받더니 이제는 인간이 특별하고 우월하다는 그런 가르침과 인식은 오히려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 비판은 정당할까요? 그런 도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그런 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성찰하고 어떤 행동을 돌이켜야 할까요? 물론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보다 정확히는 가진 자의 탐욕)가 만들어낸 폐해를 우리는 여실히 겪고 있습니다. 12시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데 ‘지구 환경시계’는 현재 9시 33분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다면 모든 일의 원인제공자인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인간은 동식물과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는 독특하며, 그 독특함 중에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진정한 요소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성찰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생물학적, 철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묵상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부디 말씀 나눔 끝에는 <시편 138편>이 우리의 찬미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물학자들은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을 약 1300만에서 1400만 ‘종’(種)으로 추정합니다. 이러한 생물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류체계가 있습니다. 계(界, Kingdom)-문(門, Phylum / Division)-강(綱, Class)-목(目, Order)-과(科, Family)-속(屬, Genus)-종(種, Species)입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가 제시했습니다. 그는 ‘현대 생물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이 분류체계에 따르면 우리 각자는 동물계(Animalia), 척삭동물문(Chordata), 포유강(Mammalia), 영장목(Primates), 사람과(Hominidae), 사람속(Homo), 사람(Homo sapiens)으로 분류됩니다. 이처럼 ‘린네’는 ‘최초’로 인간을 ‘동물의 일부’(원숭이와 같은 영장류)로 분류한 학자였습니다.

오늘날은 그의 분류체계가 자명(自明)하게 쓰이지만 처음에는 다른 생물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심각하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인 인간을 원숭이나 고릴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며 분노했습니다. 자연(피조세계)에서 인간의 우월함과 특별함을 지켜내려는 비판이었습니다. 사실 ‘린네’ 이전에는 생물 분류 체계에서 인간을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그의 책 <Dieta Naturalis>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Theology decree that man has a soul and that the animals are mere ‘aoutomata mechanica,’ but I believe they would be better advised that animals have a soul and that the difference is of nobility.
신학에서는 인간이 영혼을 가졌고 동물은 ‘자동적 기계’(특히 이것은 데카르트의 생각이었습니다)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신학자들에게 충고해 주고 싶다.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으며 그 차이는 고귀함의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종(種)의 불변성’이 사실로 여겨지던 시절, 그러니까 ‘종(種)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이전,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이냐를 두고 이미 ‘찰스 다윈’처럼 그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이냐는 철학이나 종교뿐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입니다. 한때 과학자들은 ‘생물학’ 측면에서 인간에게서만 나타나는 해부학적 특징이나 행동적 특성을 가지고 우월함과 특별함을 주장해 왔습니다.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두뇌나 직립보행, 도구나 언어사용,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의 능력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주장은 힘을 잃었습니다. 다른 영장류와 동물들도 그런 특질을 가진 것으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물학 차원에서 인간만의 고유한 해부학적 특징이나 행동적 특성을 찾기란 갈수록 쉽지 않습니다.

이제 종교를 갖지 않은 과학자들은 인간을 ‘생명 진화의 우연한 산물’로 정의하는 데 익숙합니다. 유인원이나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도 미미(微微)하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생물을 대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한쪽에서는 여전히 무엇이 인간을 특별하고 우월하게 만드는지를 두고 논의 중입니다. 최근에는 ‘뇌의 인지능력’이 주목을 받습니다. 그 인지능력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영역이 ‘시간’과 ‘종교’입니다. 사실 이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인지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시키는 결정적인 인지기능입니다. 과거나 지금 여기뿐 아니라 ‘다가올 시간’이 있음을 인간은 인지합니다. 그 ‘미래’를 위해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하며, 도구와 기술, 언어와 문화를 ‘전승’해 왔습니다. 일부 동물들에게서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이고, ‘즉흥적’이지 교육을 통해 ‘미래’로 전달되는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물론 인간에게서도 동물 같은 ‘본능적’이고, ‘이기적’이며, ‘즉흥적인’ 면이 관찰됩니다.

인간과 동물들에게서 관찰되는 이러한 ‘생물학적 유사성’을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둘 다 ‘같은 진흙’(아다마)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창세 2:19). ‘진흙’이라는 ‘같은 질료’(요소)로 창조되었기에 인간과 동물은 분명 ‘생물학적 유사성’을 갖습니다. 그런 유사성에 입각해 높은 지능을 가진 현생인류가 동물로부터 진화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간과했습니다. 인간은 ‘생물학 차원’에서의 동물 그 이상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이고, ‘이기적’이며, ‘즉흥적인’ 면을 훌쩍 뛰어넘기도 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리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힘센 폭군인 ‘시간을 인지’하는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가 없었던 ‘과거를 인지’합니다. 자기 존재가 있는 ‘현재를 인지’합니다. 특히 “자신도 죽는다.”는 ‘미래를 인지’하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으로 자신의 ‘허무’를 아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시간을 살다 그 시간이라는 폭군이 휘두르는 낫에 의해 맥없이 추수되고 마는 ‘존재론적 허무성’에 대한 인식입니다(전도 1:14). 이제 아래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이런 ‘철학적 성찰’은 인간을 동물 그 이상의 존재가 되게 하는 특별함의 계기입니다.

자기 존재의 허무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실존적 자각을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진흙’(아다마)이라는 질료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먼지’(티끌, 히브리어로는 ‘아파르’)라는 질료로부터도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창세 2:9; 3:19). ‘먼지’(아파르)는 인간사에서 무가치, 쓸모없음, 헛됨을 상징합니다. 시간을 사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실존을 이보다 더 뛰어나게 표현한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먼지’처럼 ‘무가치’하게 사라질 존재라는 ‘허무함’, 사랑하는 이의 기억에서조차 결국은 사라지고 말 존재가 자신이라는 ‘공허함’입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자기 존재의 무가치, 허무, 공허함의 자각은 ‘허무주의’나 ‘자살’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이런 ‘실존적 허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먼지’(아파르)가 아니라 오직 ‘진흙’(아다마)로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먼지’(아파르)로부터 만들어졌기에 실존적 허무와 혼란(혼돈의 어둠)의 고통을 느끼다 ‘먼지’로 돌아가야 하지만(창세 3:19; 시편 104:29) 동물들은 ‘진흙’(아다마)이니 실존적 허무와 혼란의 고통으로부터 예외입니다. 그들은 생물학적 본능대로 살다 ‘진흙’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과 동물은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유사하지만 실존적(철학적)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고 볼 수 없는 결정적인 능력이 ‘시간’에 대한 인지이며, ‘먼지’처럼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실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다가올 시간’ 중에서도 ‘자기 죽음의 필연성을 인지’하는 이러한 능력은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그 인지 능력은 ‘자기 죽음 너머의 시간’을 향한 ‘기대’와 ‘탐구’로 인간을 이끌었을 것으로 문화인류학자들은 추정합니다. 한마디로 ‘종교’입니다. 그 기대와 탐구 능력이 ‘종교’의 출현에 기여했다는 주장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의 이러한 추정을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죽음 너머의 시간을 기대하고 탐구할 수 있는 인지능력은 그가 ‘하느님의 숨’(히브리어로 ‘느사마’)으로 창조되었다는 요소로부터 유래(由來)하기 때문입니다(창세 2:7). <창세기>에 따르면 ‘진흙’, ‘먼지’로만 빚어진 인간은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숨’이 그 코에 불어넣어짐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생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완성한 결정적 요소는 진흙도 먼지도 아닌 ‘하느님의 숨’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속’했고, ‘하느님께 의지’해야 만이 필연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고백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숨’을 인지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진흙’과 ‘먼지’로부터 구원합니다. 다시 말해 ‘영(靈)이신 하느님의 숨’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라는 ‘앎’(인지)이 ‘생물학적으로 동물’에 불과한 ‘유물론적 존재’로 전락하지 않도록 인간을 지켜줍니다. 인간을 창조주 하느님과 상관없는 단지 ‘생명 진화의 산물’로 보려는 반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에서 우리를 지켜줍니다. ‘영(靈)이신 하느님의 숨’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라는 ‘앎’(인지)이 ‘실존의 허무’라는 고통에 빠지지 않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인간이 되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시편 8편>에서 찬미하듯이 ‘하느님을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진정 우월합니다. ‘하느님의 숨’을 통해 창조된 인간은 진정 특별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선포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훼손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자기 생명이 의존해 있는 ‘하느님의 숨’에 대한 ‘앎’(인지)이 인간을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이끕니다. ‘하느님의 숨’에 대한 자각이 ‘인간중심주의’의 병폐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을 구원합니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우주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지켜내는 ‘살아있는 인간’이게 합니다.

여기까지가 ‘자기 죽음 너머의 시간’을 향한 ‘기대’와 ‘탐구’가 ‘종교’를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의 추정에 대해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숨’ 덕택에 ‘종교’가 가능했다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의 설명입니다. 실제로 문화인류학자들은 ‘종교의 출현’은 원시 인류와 다른 현대 인류의 출현과 맥을 같이한다고 주장합니다. ‘종교’는 인류사에서 다른 무엇보다 집단의 생존, 결집, 번성에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시간’을 인지할 뿐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혹은 이미 현재에 침투해 있는) ‘자기 죽음의 필연성’을 인지합니다. 인간은 이 인지능력을 통해 자기 죽음 너머의 시간을 탐구(기대)해 왔고, 그 축적물이 ‘종교문화’로 형성되어왔다는 문화인류학자들의 주장은 개연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시간’을 살다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자기존재의 허무성’을 인지함에서 출발한 ‘종교’(종교문화)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특별한’(혹은 우월한) 문화현상 중 하나라는 데 있어서 이견을 다는 학자들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는 독특하며, 그 독특함 중에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진정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생물학적, 철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진흙’이 창조의 재료였다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먼지’가 창조의 재료였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이 느끼지 못하는 실존적 허무의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그러나 ‘진흙’과 ‘먼지’의 요소만으로는 완전한 사람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숨’이 진흙과 먼지로 창조된 사람에게 불어넣어지자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우월함과 특별함은 그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하느님의 숨’을 간직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숨’은 인간이 생물학적인 본능 차원과 실존적인 허무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타적인 삶’과 ‘영원에의 희구’를 향한 ‘종교문화’를 형성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신학적’으로 해명했습니다. 종교는 정말이지 생물학적 차원이나 철학적 차원에서는 해명할 수 없는 인간만의 독특한 문화입니다. 아직까진 동물이 종교행위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바로 그 ‘종교문화’ 중에서 가장 숭고한 행위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인도해 왔습니다. 모든 종교인은 ‘기도’를 합니다. 심지어 ‘기도’라면 질색하는 ‘무신론자’조차도 때로는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는 인류보편적인 행위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들, 가령 신이나 천사나 조상들의 힘을 빌리는 통로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자기 자신과의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대화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위대한 일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같이 ‘하느님의 숨’을 잃어버린 말들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우리의 기도와 다른 신을 섬기는 종교인들의 기도는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는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명상이나 묵상과 같은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도 그들의 명상이나 묵상과 같은 데 단지 마음에 하느님을 모신 것만 다를 뿐입니까?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고요히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의 택하신 ‘종’ 아브라함이 ‘끈질기게’(필사적으로) ‘중보기도’하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좋아 ‘중보기도’이지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뻔뻔한 협상’ 요구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들어주시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 끈질기고 뻔뻔한 협상은 소돔 땅에 사는 ‘의인 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죄악 때문에 장차 하시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비밀로 하실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신실함에 대한 보상으로 마음을 바꾸십니다.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계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멸망할 처지에 처한 도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어느덧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종이 아니라 ‘친구’처럼 대해 주십니다. 오십 명에서 열 사람까지 줄어드는데, 그 수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포함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도시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합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위한 아브라함의 끈질긴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다는 교훈입니다.

시편은 <138>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다윗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원수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바치는 찬미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향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시며 그 계획과 목적에 맞게 그의 삶을 빚어 가신다는 깊은 신뢰가 드러난 찬미입니다.

우선 그는 ‘온 마음으로’ 천상의 왕이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바치겠다고 선언합니다(1절a). 시인은 천사들 앞에서도 하느님을 담대히 찬양합니다(1절b). 시인의 찬미는 공허한 경배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자신을 인자(인애)함과 성실(진실, 진리)함으로 후대하시는 존귀하신 하느님의 ‘성품’(신성)이 그 근거입니다(2절). 이처럼 시인은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찬미합니다. 하느님은 ‘인자’(인애)하시고 ‘진실’(진리, 신실, 성실)하신 분입니다.

시인은 무엇을 통해 하느님이 그런 분임을 알았을까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그에게 전달되는 주요한 수단은 ‘말씀’입니다(2절). 말씀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빈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 말씀’을 존중하시고 온갖 것들, 심지어 자신의 ‘명성’(이름)보다 그 언약 말씀을 더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그 만큼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이 약속하시는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찬미입니다. 더욱이 그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독서의 ‘아브라함’처럼 그가 부르짖을 때 들어주시고, 그가 약해졌을 때 영혼에 힘을 불어 넣어 그를 담대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3절). 이렇게 시인은 하느님이 그에게 ‘행하신 일’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은 위기의 순간에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왕’들이 하느님께 감사 노래 부를 날이 올 것이라 내다봅니다(4-5절). 왜냐하면 그들은 선포하는 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언약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인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어야 한다고 노래하는 중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누구나 자기 ‘마음의 왕국’에서는 ‘왕’입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신 그 언약 말씀을 들으면 시인처럼 세상의 모든 왕들도 하느님이 ‘인자’(인애)하시고 ‘진실’(진리, 신실, 성실)하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알게 되면 그들은 “야훼 그 영광 크시다”라고 찬미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높이 계시지만 ‘비천한 자’(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를 굽어보시고 멀리 계셔도 ‘거만한 자’(부유하고 유력한 자)를 아십니다(6절). 다시 말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천상의 왕’이신 하느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는 미워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이 대우를 받지만 하느님은 다르게 대하십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자를 대우하신다고 가르치십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소망으로 찬미를 마감합니다(7-8절). 그 신뢰와 소망은 그가 지금까지 감사와 찬미를 바칠 수 있었던 근거인 ‘하느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자(인애)하시고 성실(진실)하십니다(2절). 하느님은 ‘자기 이름의 명예’ 때문에 스스로 하신 그 언약의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천상의 왕이십니다. 그렇기에 그가 고생길을 걸을 때 분명 살려주시고, 살기 띤 원수들을 흩으시며, 오른손으로 붙들어 그를 구원해 주십니다(7절).

더욱이 시인은 더 깊은 ‘신비’를 꿰뚫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목적과 계획’입니다. 하느님은 거기에 맞추어 지금도 그를 빚어 가시는 중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자기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목적과 계획을 신뢰했습니다. 인자(인애)하시고 성실(진실, 진리)하신 하느님께서 그 목적과 계획을 완전하게 성취하시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의 감사기도와 찬미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8절) 우리 역시 <시편 138편>을 배정한 전례독서의 의도에 따라 하느님의 완전한 목적과 계획으로 초대된 자녀임을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연중시기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성령 – 기도하는 이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은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살아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 골로 2:13b

본래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 교회 안에 퍼져 있던 이단사상들을 배격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생활’을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해 써서 보내졌습니다. 오늘 본문(6-15절까지이나 19절까지 확장해서 살핍니다)에는 골로사이 교회 안에 퍼져 있던 각종 이단사상들이 망라됩니다.

그 이단사상은 그리스 철학(인간의 지혜와 전통을 신뢰하게 하는)의 헛된 속임수(골로 2:8),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골로 2:9), 천체와 천사숭배(골로 2:8,18), 유대 율법주의와 금욕주의(골로 2:16,21,23)입니다. 많은 은유와 이미지가 서로 겹쳐져 있습니다. 핵심 구절을 뽑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으로 결코 이단사상들이나 그리스도가 아닌 그 무엇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는 ‘기도’(祈禱)를 주제로 한 <루가복음>입니다. 루가가 전하는 ‘주의기도’, ‘아브라함처럼 끈질기게 기도하는 일의 중요성을 교훈하는 손님대접 비유’, 진정으로 구할 것은 성령임을 교훈하는 권고로 마무리됩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기도해 왔지만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를 잘 보았습니다. 사실 <루가복음>만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복음서는 없습니다(루가 3:21~22, 5:16; 6:12, 9:18, 9:29, 11:1; 22:32,41~44).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루가 23:34,46). 게다가 다른 랍비들과 달리 예수님은 너무나 수월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제자들에게는 부럽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기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한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 간청 덕택에 우리가 갖게 된 기도가 ‘주의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 가르침은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사실 교파를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교에서 ‘주의기도’는 가장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기도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기에 모든 그리스도교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먼저 예수님은 기도할 때 미사여구가 아니라 간단히 “아버지”라 부름으로 시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저는 무엇을 의도해서 <루가복음> 기자가 ‘우리’라는 말을 생략했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1독서의 아브라함처럼 한 가문의 기원, 또는 가정을 보호하고 돌보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아버지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학대하고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아버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부정적인 아버지 이미지 때문에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다 문득, ‘우리’라는 말을 넣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분명 ‘우리 인간들’ 사이의 아버지와는 다르며, 더욱이 ‘우리만 독점할 수 있는’ 그런 아버지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물론 당시 유다인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요한 1:12; 히브 2:10~15). 분명 ‘아버지’는 ‘관계의 칭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기도’는 ‘아버지’로 확인된 분에게 ‘자녀’가 ‘청(請)하는 ‘친밀한 대화’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자녀임을 자각한 이들은 무엇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간청’(懇請)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가장 먼저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까? 다시 말해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은 무엇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마음에 품고 행동하셨습니까?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공동번역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시며 당신의 왕국이 임하십시오. – 원문직역

한마디로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며 한 형제자매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성육신 하셨고, 세례를 받으셨으며, 제자들을 불러 모아 활동하셨고, 종국에는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기도’는 예수님이 ‘마음’에 품고 사셨던 ‘삶의 목표’, ‘지향’(志向)을 잘 보여줍니다. 모든 그리스도 교파가 ‘주의기도’를 가장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기도로 가르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향’(志向)하신 ‘기도의 정신’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서도 선생님의 ‘삶의 목표’와 ‘지향(志向)’을 품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제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삶의 목표’와 ‘지향’(志向)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나라’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봉헌하는 성찬례는 바로 이 ‘목표’와 ‘지향’(志向)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영성체에 앞서 ‘주의기도’를 바칠 때, 그 ‘목표’와 ‘지향(志向)’이 더 선명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아버지를 향한 신뢰 속에서 사랑받는 자녀가 아버지에게 하듯이 우리의 필요를 위해 아버지께 ‘간청’(懇請)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필요를 간청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라고 거룩하신 아버지께 간청하라 가르치십니다. 물론, 자비하신 아버지는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길이고,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신뢰를 표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연약함에 대한 인정과 신뢰의 고백 속에서 아버지께로 나아오는 우리의 필요를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주님이 ‘청’(請)하도록 가르치시는 날마다의 ‘필요한 양식’은 단지 ‘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직업, 건강, 좋은 관계, 평화처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거룩하신 아버지께 ‘간청’(懇請)하라 가르칩니다. <루가복음>에서 ‘죄의 용서’는 중요한 주제입니다(루가 1:77; 3:3; 5:20~21; 23:34). 우리는 날마다의 필요한 양식을 청하듯이 ‘죄의 용서’를 청(請)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청하러 아버지께 나아갈 때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잘못한(빚을 진) 이를 용서합니다.”라는 다짐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빚을 탕감해야) 만이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조건부로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진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빚을 진)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거룩하신 아버지는 죄인인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이 진실을 깊이 깨달으면 우리는 결국 우리에게 ‘잘못한’(빚을 진) 이를 조건 없이 용서하는(탕감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이들이 서로를 ‘빚’으로부터 풀어주는 세상이 될 때 그런 세상은 아버지의 나라가 다가온 징표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간청’(懇請)을 바치며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관대함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거룩하신 아버지께 ‘간청’(懇請)하라 가르치십니다. ‘유혹’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는 ‘시험’이나 ‘시련’의 뜻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욥처럼 인생들을 ‘시험’하신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다시피 인생은 그 자체로도 힘든데 하느님이 시험까지 하신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따라서 이 ‘간청’(懇請)은 우리 ‘약함’에 대한 고백일 뿐 아니라 유혹을 이길 ‘힘’을 주시라는 ‘간청’(懇請)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직접 보호하시고 구원의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고백하는 ‘간청’(懇請)입니다.

‘주의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기도에 임해야 할 지 ‘손님대접’ 비유로 가르쳐주십니다. 어느 공동체나 ‘나그네 대접’은 ‘미덕’(美德)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나그네를 대접하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과 ‘마을공동체’에게 부끄럽고, ‘불명예’입니다. 잠자리에 들었던 친구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귀찮게 졸라대는 친구의 끈기’ 때문에 결국 ‘청’(請)을 들어주고 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빵을 주고 맙니다. 나그네를 위해 빵 한 개도 내주지 않은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평판’(評判)이 도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비유가 강조하는 점은 ‘인내를 가지고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진정한 핵심은 들어줄 때까지 귀찮게 졸라대면 하느님의 마음마저도 바꿀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이 ‘거룩하신 아버지라는 자신의 이름’ 때문에 자녀인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우리의 ‘친구’에 비유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은 자녀인 우리가 가까이 가기 두려워해야 할 분이 아니라 언제든 찾아가 성가시게 ‘간청’(懇請)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창피를 모르는 뻔뻔함’으로, ‘끈덕지게 졸라대는 끈기’로, 봉투에 딱 붙은 ‘우표’처럼, 딱 달라붙어 마주해도 좋은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느님은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뻔뻔하게’ 대해도 좋다고 가르치십니다. 정말이지 좋은 부모는 철부지의 뻔뻔함을 결코 탓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의 친밀, 하느님과의 사귐이 빛나는 비유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입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명예’를 걸고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대해 주셨습니다(창세 18:17). 예수님은 손님대접 하는 친구의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이점을 다시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주의기도’에서 이미 예수님은 하느님을 우리의 ‘부모’(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자녀들이 두려워해야할 학대하는 부모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낮이든 밤이든 심지어 ‘한밤중’이라도 친구 같은 하느님께 찾아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항상 거기 그렇게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간청’(懇請)을 결코 ‘폐’(弊)라고 여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라면 ‘성가시게 여길’ 것이 틀림없는 ‘시간’이어도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성가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정말이지 어느 때든 우리와 ‘대화’하기를 좋아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가 요청하는 것을 마지못해 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거기 그렇게 기다리고 계신 ‘명예로운 아버지’이십니다. 바로 이 약속이 마지막에 이어집니다.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 루가 11:9~12

“구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이 세 마디는 사실상 같은 뜻입니다.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기도하면 결국 아버지께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오늘의 우리들처럼, 인내심도, 간절함도 부족했고,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지 삶의 ‘목표’나 ‘지향’(志向)도 분명치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면서 이렇게 설득하십니다.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루가 11;13

세상에나! 예수님은 우리 인간 사회의 ‘악한 아버지’와 ‘하느님’을 비교하십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선하신 아버지’는 어떨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자녀라는 확신’으로 마치 ‘철부지가 엄마’(이런 경우 우리교회에서는 베네딕트와 엘리사벳을 떠올리시면 됩니다)에게 하듯이, 우리가 친한 친구에게 하듯이, 어려워말고 아버지께 ‘간청’(懇請)하십시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더 좋은 것’이란 자녀가 아니라 ‘아버지의 관점’에서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이 점을 착각하곤 합니다.

가령, 스마트폰은 아이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나쁜 것입니다. 반면에 쓰디 쓴 약이나 예방 주사는 아이 입장에서는 나쁜 것이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시련이나 고난에도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분명히 신뢰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십자가’마저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예수님의 순종 덕택에 우리는 지금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녀에게 주고자 하시는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더 좋은 것’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올바른 삶의 목표와 지향(志向)’을 갖고 살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품고 살아야 할 ‘올바른 삶의 목표와 지향(志向)’이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할 바로 그 일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실 때 우리는 사탄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고, 썩어 없어질 것에 몰두하던 삶에서 ‘영원한 것’에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성령이야말로 우리를 다른 생물과 구별하여 ‘하늘 생명체’로 살게 하는 ‘참된 기도의 영’이자 ‘하느님의 숨’입니다(요한 20:22~23).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기도’(祈禱)할 수 있습니다. ‘기도’(祈禱)야말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물 중에서 우리의 ‘특별함’과 ‘우월함’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도록 유혹하는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것들 앞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그것들의 노예로 전락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祈禱)는 바로 이런 유혹들 앞에서 ‘예수님이 간직하신 삶의 목표와 지향(志向)’으로 돌아서게 하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야말로 자녀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이 진실을 신뢰하고, 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이 우리의 목표와 지향(志向)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시간표’대로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기도(祈禱)의 보화인 시편도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탄원의 연속입니다. 실제로 그들 기도(祈禱)의 진정한 응답(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중요한 점은 ‘기도’(祈禱)로 ‘하느님과의 친밀’ 속에 살았던 이들은 결코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시편 <138편>말씀처럼 자기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목적’과 ‘계획’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기도’(祈禱)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는 ‘수행’(修行)입니다. ‘기도’(祈禱)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당신의 뜻을 바꾸시도록 ‘떼를 쓰는 시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변화’되고 ‘재창조’되는 시간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께서 들어와’ 현존(現存)하고 계십니다. 고요히 귀 기울여 들으면 ‘침묵의 소리’로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 친히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본분’을 재발견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게 하시기 위해 우리 속에서 ‘기도’(祈禱)하고 계십니다. 이번 주간도 ‘주의기도’처럼, 성령을 따라 바치는 기도(祈禱)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통해 더 밝고 맑아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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