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2015, 187장에 대하여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아래의 글은 <성가 2015> 187장 2절 가사에 대해
동료 사제께서 제기(提起)한 재고(再考) 요청에 대한 저의 소견입니다.

저는 지난 2011년 전례위원회 산하
「성가개편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위원’으로
5년 여간 참여해서 <성가 2015> 발간을 도왔습니다.(관련 말씀 나눔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가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전체 가사 손질에 관여했기에
아무래도 제가 책임 있는 답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다만 어떤 정보는 관구 전체 성직자들이 공유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공개적으로 글을 올립니다.

사순절 기간에 다루었던 내용이라 철지난 느낌이 있지만
본디 해아래 새 것은 없기에 글을 올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여러분도 한번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 신부님께,

사순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일을 행하신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아시다시피 ‘성가’(聖歌)는 ‘성서’(聖書) 다음으로 가장 가까이서 신자들의 삶과 동행하는 보물입니다. 특히 ‘성가’(聖歌)는 우리 믿음의 고백이고, 신학의 표현이며, 공동체의 믿음을 만드는 소중한 기둥입니다.

성가를 개편하는 작업은 성서와 신학에 대한 기본적 이해, 음악과 문학에 관련된 전문적 능력과 실무적 치밀함이 요구됩니다. 저는 이 중에 하나의 자질(資質)을 주님께 은총으로 선물 받았고, 그 점은 ◯◯◯ 신부님도 마찬가지였지요. 다만 개인 사정으로 ◯◯◯ 신부님께서 「성가개편위원회」 활동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 생각입니다만,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하신 <성가 2015> 187장 2절(<성가 1990> 62장 2절), “주린 짐승 날뛰는 광야에서 사셨다.”는 신부님이 함께 활동하던 때에도 선곡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사’를 두고 논의가 한 차례 진행되었습니다(2012년 7월 23일~25일 강화교무구 ‘온수리교회’에서 있었던 「성가개편위원회」 웍샵 때였습니다). 그 때도 밴드에 올린 바와 같은 의견을 ‘강력히’ 제기하였고, 저 역시 수정의 필요성에 동의했지요. 회의 내용은 “원 시(詩) 수정 불가 의견과(작자의 권위와 문학적 요소) 신앙을 호도(糊塗)할 수 있는 구절은 수정해야 한다(신학적 요소).”로 꽤 장시간 논의가 있었습니다.

「성가개편위원회」의 선곡과 수정 결의는 성서, 신학, 전통(전례), 음악, 문학성을 총체적으로 살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가개편위원 위원 10명 중에서 참석 위원 3분의 2의 찬성이 있어야 선곡이 되고, 수정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현재 <성가 2015> 성가 일러두기 앞쪽에 실린 「성가개편위원회」 위원 전부가 의결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저를 포함하여 10명이 의결권을 가졌었습니다.

당시 이 가사 수정 건은 의견이 팽팽했고(이런 때는 부결입니다) 3분의 2 찬성을 얻기에는 ‘지혜’(라 쓰고 신학적 설득력의 부족이라 읽습니다)가 다소 부족했습니다. 보통 그럴 때는 ‘위원장’이신 이건용 선생님께 공이 넘어갔지요. 제 기억에는 장시간의 논의 끝에 위원장님께서 <성가 1990> 위원들이 62장 2절을 가지고 충분히 논의했을 터이니 <성가 2015>에서는 그대로 넘어 가자였습니다. 그리고 <성가 2015> 187장을 보시면 “[수] 성가개편위원회, 2013”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4절 가사 중 마지막 부분이 2013년에 단순 수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분인지는 아래에서 다룹니다.

이번에 이 건과 관련하여 ‘대한성공회 성가집’과 해외 성가 관련 사이트를 추적해 보았습니다. <성가 2015>에 실린 187장은 19세기에 가사가 붙여진 곡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영미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주 많이 불리는 유명한 곡입니다. 가사는 <마르코복음> 1장 12-13절을 배경으로 하는 데, <마르코복음>의 시험이야기는 <마태오>나 <루가>와는 ‘결’을 달리할 뿐 아니라 <마르코> 신학의 ‘독특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원래 ‘고어’(古語)가 등장하는 가사 전문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는 각 연의 줄 바꿈입니다.

[1연] Forty days and forty nights / Thou wast fasting in the wild; / Forty days and forty nights / Tempted, and yet undefiled.
[2] Sunbeams scorching all the day; / Chilly dew-drops nightly shed; / Prowling beasts about thy way; / Stones thy pillow; earth thy bed.
[3연] Shall not we thy sorrow share / And from worldly joys abstain, / Fasting with unceasing prayer, / Strong with thee to suffer pain?
[4연] Then if Satan on us press, / Flesh or spirit to assail, / Victor in the wilderness, / Grant we may not faint nor fall!
[5연] So shall we have peace divine: / Holier gladness ours shall be; / Round us, too, shall angels shine, / Such as ministered to thee.
[6연] Keep, O keep us, Savior dear, / Ever constant by thy side; / That with thee we may appear / At the eternal Eastertide.

원 시(詩)를 ‘의역’해 보겠습니다.

[1연] 밤낮으로 사십일 / 주님은 광야에서 금식하셨도다. / 밤낮으로 사십일 / 주님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 전혀 유혹받지 않으셨도다.
[2] 낮에는 내리쬐는 뙤약볕, 밤에는 살을 에는 찬 이슬이 내리네. 굶주린 맹수들이 주님 길 앞을 어슬렁거리네. 돌을 베개 삼아, 땅을 잠자리 삼아 광야에서 사셨네.
[3연] 주님의 슬픔을 나누어야 하리. / 세상의 재미를 끊어야 하리. / 끊임없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 주님과 함께 고통을 겪도록 / 강해져야 하리라.
[4연] 사탄이 우리를 몰아세우고 / 몸과 마음을 괴롭히더라도, / 광야의 승리자이신 주님이여, / 우리가 쓰러지거나 / 실패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5연] 주님이 도와주시면 / 우리는 참 평안을 맛보리라. / 우리의 기쁨은 한이 없으리라. / 주님이 천사의 시중을 받으신 것처럼 / 우리 역시 천사들이 감싸주리라.
[6연] 사랑하는 구세주여, / 우리를 당신 곁에 / 항상 지켜 주소서. / 당신과 함께 / 우리가 영원한 부활을 맞이하게 하소서.

이제부터는 좀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성가 2015>는 기본적으로 ‘가사’와 ‘곡조’ 안내표기를 꼭 싣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87장의 곡 정보는 다음과 같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가사: Forty Days and Forty Nights      George Hunt Smittan, 1856      [수] 성가개편위원회, 2013
곡조: HEINLEIN     Nürnbergisches Gesangbuch, 1676     [유] Martin Herbst, 1676입니다.

이 표기된 정보를 읽는 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사’(歌詞)는 보통 ‘시의 첫 줄’을 가리키고, ‘곡조’(曲調)는 ‘멜로디’(주선율 主旋律) 또는 ‘튠’(tune)을 가리킵니다. 곡조는 <성가 2105> 195장 ‘인생아 기억하라 이한오 2013’처럼 새로 작곡한 것일 수도 있고, <성가 2105> 226장의 곡조 정보 ‘영국 민요 선율’(English Folk song)이나 251장 ‘스페인 노래, 17세기’처럼 예전부터 ‘전래된 선율’(旋律)일 수도 있습니다.

“곡조: HEINLEIN   Nürnbergisches Gesangbuch, 1676     [유] Martin Herbst, 1676”이라는 표기는 성가 187장이 ‘HEINLEIN’ 곡조인데, ‘원전의 유래’는 1676년 Martin Herbst라는 인물이 1676년에 출판된 <Nürnbergisches Gesangbuch> 노래책에 올렸다는 뜻입니다.

“가사: Forty Days and Forty Nights    George Hunt Smittan, 1856     [수] 성가개편위원회, 2013”이라는 표기는 성가 187장이 ‘Forty Days and Forty Nights’ 가사인데, 1856년 George Hunt Smittan이 <Nürnbergisches Gesangbuch> 노래책에 실린 HEINLEIN 곡조에 Forty Days and Forty Nights라고 붙였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수] 성가개편위원회 2013”이라는 표기는 <성가 1990>에 실렸던 가사 중 성가개편위원회가 <성가 2015>를 만들면서 2013년에 가사의 어색한 부분을 단순 수정했다는 뜻입니다. <성가 1990> 3절 처음의 ‘님’과 4절 마지막 줄의 “‘이를’ 물리치시네.”를 <성가 2015>에서는 각각 ‘주’와 “‘모두’ 물리치시네.”로 수정했다는 정보입니다.

자, 여기까지 <성가 2015>의 187장 곡 표기 정보를 설명했으니 이제 이 곡이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래 원 시(詩) “Forty Days and Forty Nights”는 ‘George Hunt Smittan’가 1856년 6연으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연’이 빠지고, 다섯 연으로 줄어든 현재의 가사 형태로 전 세계적으로 불린다는 점을 유수 ‘음악 검색 사이트’ 뿐 아니라 제가 가지고 있는 미국 성가집(1943년도 판)에서도 확인했습니다. ◯◯◯ 신부님께 우호적으로 해석하자면, 제기하신 신학상의 오류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합니다. 아래에 1943년 판 파일을 올리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대한성공회 성가집’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동안 “Forty Days and Forty Nights”을 성가에 채택해 온 역사를 살피다 다소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성가집 전부를 살필 수는 없었고 대표적으로 3판본 <성가 1965>, <성가 1990>, <성가 2015>을 참고했습니다. 아래에서 언급하는 <성가 1965>는 ‘대한성공회 성가’(편집, 발행 대한성공회 출판부) 1978년 발행본을, <성가 1990>은 1993년 발행본을, <성가 2015>는 2015년 발행본을 기준으로 합니다.

원 시(詩) [1연] “Forty days and forty nights / Thou wast fasting in the wild; / Forty days and forty nights / Tempted, and yet undefiled.”(밤낮으로 사십일 / 주님은 광야에서 금식하셨도다. / 밤낮으로 사십일 / 주님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 전혀 유혹받지 않으셨도다.)을 <성가 1965> 40장은 1절과 2절로 나누어 가사화했습니다.

1절: 구세주 사십일을 밤낮금식 하시고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받으셨도다.
2절: 마귀 힘을 다하여 주야로 유혹하나 예수께서 조금도 동요함이 없도다.

<성가 1990> 62장, <성가 2015> 187장은 다음과 같이 1절로 동일하게 가사화했습니다.

<성가 1990>   62장 1절: 밤낮으로 사십일 금식기도 하시고 악한 마귀 유혹을 주가 이겨내셨다.
<성가 2015> 187장 1절: 밤낮으로 사십일 금식기도 하시고 악한 마귀 유혹을 주가 이겨내셨다.

원 시(詩) [3연] “Shall not we thy sorrow share / And from worldly joys abstain, / Fasting with unceasing prayer, / Strong with thee to suffer pain?”(주님의 슬픔을 나누어야 하리. / 세상의 재미를 끊어야 하리. / 끊임없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 주님과 함께 고통을 겪도록 / 강해져야 하리라.)을 각각의 성가는 다음과 같이 가사화했습니다.

<성가 1965>   40장 3절: 우리 세상 있을 때 예수를 본받으며 헛된 낙을 버리고 사욕을 이길지라.
<성가 1990>   62장 3절: 님의 인내 본받아 세상 재미 버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그와 아픔 나누세.
<성가 2015> 187장 3절: 주의 인내 본받아 세상 재미 버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함께 아픔 나누세.

원 시(詩) [4연] “Then if Satan on us press, / Flesh or spirit to assail, / Victor in the wilderness, / Grant we may not faint nor fall!”(사탄이 우리를 몰아세우고 / 몸과 마음을 괴롭히더라도, / 광야의 승리자이신 주님이여, / 우리가 쓰러지거나 / 실패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을 각각의 성가는 다음과 같이 가사화했습니다.

<성가 1965> 4절: 마귀 모든 계교로 우리를 유인하면 구세주를 힘입어 굳게 대적 할진저.
<성가 1990> 4절: 나의 몸과 마음에 마귀 덤벼들어도 하느님의 큰 힘은 ‘이를’ 물리치시네.
<성가 2015> 4절: 나의 몸과 마음에 마귀 덤벼들어도 하느님의 큰 힘은 ‘모두’ 물리치시네.

※ 원 시의 뜻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제가 만들어 추천하는 가사는 이렇습니다.

4절: “우리 몸과 마음에 마귀 덤벼들어도 시험이긴 예수여 우리 도와주소서.”

원 시(詩) [5연] “So shall we have peace divine: / Holier gladness ours shall be; / Round us, too, shall angels shine, / Such as ministered to thee.”(주님이 도와주시면 / 우리는 참 평안을 맛보리라. / 우리의 기쁨은 한이 없으리라. / 주님이 천사의 시중을 받으신 것처럼 / 우리 역시 천사들이 감싸주리라.)을 <성가 1965>, <성가 1990>, <성가 2015> 중 어느 성가집도 가사화하지 않았습니다. 참 희한한 노릇입니다. 제 생각에 <성가 2015>는 <성가 1990>에 해당 가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고, <성가 1990>도 <성가 1965>에 해당 가사가 없어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이제 와 드는 생각은 성가개편위원회 위원이자 최종 단계에서는 ‘가사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전체 가사 손질에 관여했던 제가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꼼꼼히 챙기지 못한 불찰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수정 가사를 전례위원회에 제안할 생각입니다.

※제가 만들어 추천하는 가사는 이렇습니다.

5절: “주님 도와주시면 참 평안을 누리리 주 섬기던 천사들 우리 감싸주리라.”

원 시(詩) [6연] “Keep, O keep us, Savior dear, / Ever constant by thy side; / That with thee we may appear / At the eternal Eastertide.”(사랑하는 구세주여, / 우리를 당신 곁에 / 항상 지켜 주소서. / 당신과 함께 / 우리가 영원한 부활을 맞이하게 하소서.)을 <성가 1965> 40장만 다음과 같이 가사화했습니다.

<성가 1965> 40장 5절: 이제 주께 비나니 우리를 보호하사 마침내 부활하여 영복 얻게 하소서.
<성가 1990>   62장 없음
<성가 2015> 187장 없음

※제가 추천하기로는 <성가 1965> 40장에 실린 5절 가사를 그대로 살렸으면 합니다.

5절: “이제 주께 비나니 우리를 보호하사 마침내 부활하여 영복 얻게 하소서.”

그러면 ◯◯◯ 신부님이 제기 하신 <성가 1990> 62장 2절과 <성가 2015> 187장의 2절 가사로 쓰인 ‘George Hunt Smittan’의 [2연] “Sunbeams scorching all the day; / Chilly dew-drops nightly shed; / Prowling beasts about thy way; / Stones thy pillow; earth thy bed.”을 다룰 차례입니다.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낮에는 타는 듯한 뙤약볕이 내리쬐고, 밤에는 살을 에는 찬 이슬이 내리네. 굶주린 맹수들이 주님 길 앞을 어슬렁거리고, 주님께서는 돌을 베개 삼아, 땅을 잠자리 삼아 광야에서 사셨네.

현재의 <성가 2015> 187장 2절 가사를 이렇게 실었습니다.

내리쬐는 뙤약볕 살을 에는 밤이슬 주린 짐승 날뛰는 광야에서 사셨다.

이 [2연]을 <성가 1965> 62장은 가사화하지 않았습니다.

<성가 1990> 「성공회음악연구위원회」는 <성가 1965> 62장에 없던 가사를 원 시(詩)에서 찾아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사를 보면, “내리쬐는 뙤약볕, 살을 에는 밤이슬.” 여기까지는 문학적으로 참 멋진 가사입니다. 그 다음 “Prowling beasts about thy way”을 직역하면, “굶주린 맹수들이 주님 길 앞을 어슬렁거리네.”입니다. 이 구절을 <성가 1990> 62장과 <성가 2015> 187장은 “주린 짐승 날뛰는 광야에서 사셨네.”로 옮겼습니다. ◯◯◯ 신부님은 ‘주린 짐승 날뛴다.’는 구절에 문제 제기를 했지만 그 자체로는 비교적 원 시(詩)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성가 1990> 당시 위원들의 가사화 실력은 정말 뛰어납니다! 원래 ‘Prowling’은 작은 짐승들이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의 행동을 표현하는 말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 신부님의 주장대로 신학적인 견지에서 2절 가사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가 1990> 「성공회음악연구위원회」가사화 작업에 참여했던 분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187장은 분명 <마르코복음> 1장 12-13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만일 2절 가사가 없었다면 어느 <복음서>를 기준으로 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가 1990> 가사위원들 덕택에 이 곡의 배경을 ‘명백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놀랍기만 합니다. 지적하신대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1장 12-13절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을 알리려는 서문의 확장부에 위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야 합니다.

‘시인’(George Hunt Smittan)이 오해한 것처럼(시인이 전문신학자는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이 구절은 배고픈 들짐승이 예수님을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즉 들짐승들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하고 삭막한 ‘광야’(이것은 우리가 흔히 ‘광야’라는 말에 매여서 빠질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지요)가 아닙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단식’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를 “하느님의 구원이 일어날만한 행복하고 영적으로 이상적인 상황으로 묘사하는 데, 이 점은 ◯◯◯ 신부님도 유대인에게 있어서 ‘광야’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언급했습니다. 즉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이(창세 2:19-20) 평화의 왕(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이사 11:6-7).

다음과 같은 <이사야> 예언서 말씀이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 이사 11:6-9

이처럼 <마르코복음> 1장 12-13절은 예수님을 <이사야> 예언서의 종말적인 지복의 상태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나해 사순 1주일’ 1독서 <창세기> 9장 8-17절에 기록된 영원한 계약의 평화로운 성취자로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지요. 즉 사람들이 대망하던 이상적인 상황, 구원의 상태, 지복의 때가 예수님과 함께 여기 ‘광야에 출현’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르코복음>의 시험이야기는 “예수님을 통해 그 때가 도래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시다”라는 ‘복음’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뻐할 만한 ‘복음’의 깊이를 다 파악하지 못한 ‘시인’이 <마태오>와 <루가>에 등장하는 ‘광야’와 ‘단식’이라는 말에 함몰되어 “Prowling beasts about thy way”라고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 그 곡해된 시적 감성을 <성가 199> 가사위원들 역시 “내리쬐는 뙤약볕 살을 에는 밤이슬 주린 짐승 날뛰는 광야에서 사셨다”라고 그대로 따랐던 것이지요. 차라리 [2연]을 가사화하지 않은 <성가 1965> 발행본이 더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더욱이 <성가 2015> 가사위원장이었던 제가 좀 더 꼼꼼히 원 시(詩)를 체크하고, <마르코복음>의 신학적 식견을 강력히 주장하지 못한 아쉬움이 느껴집니다(그 때는 그런 것까지 살필만한 여유가 없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예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187장이 분명히 <마르코복음> 1장 12-13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으니, 가사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고(마태오와 루가가 보도하는 의미의 광야나 단식이 아니었다는 점), 신자들의 신앙을 호도하지 않도록 바로 잡자고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에 ◯◯◯ 신부님이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고민하고 추천하는 ‘개사’(改詞)’는 이렇습니다.

※ 2절:

①예언말씀 그대로 평화로운 그 광경 들짐승과 천사들 주님 곁을 지켰네.
②예언말씀 그대로 평화로운 그 광경 주님나라 이뤄져 천사들도 찬미해.
③들짐승과 한 자리 평화로운 그 광경 예언말씀 그대로 주님나라 임했네.

저는 이중에서 ①을 추천하는 데, 가사를 한번 검토해 주시고, 더 좋은 의견이 있으면 밴드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신부님, 답변이 다소 길었습니다. ‘성가’는 ‘성서’ 다음으로 가장 가까이서 신자들의 삶과 동행하는 보물입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이고, 신학의 표현이며, 공동체의 믿음을 만드는 소중한 기둥입니다. 따라서 ‘성가’의 이런 위치 때문에라도 좀 더 세심했으면 좋았겠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들이 많습니다. 좀 더 온전한 ‘성가’는 후세대들이 해내야할 일이지만, 아쉽고 보완해야할 점들을 차근차근 축적하고 신학적 식견까지 첨가하여 남겨주는 일도 선배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명백한 오류라 하더라도 참 좋은 ‘성가’를 그 한 절 때문에 부르지 않는다는 점은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절을 빼고 불러야할 이유를 미리 친절히 안내하거나 ◯◯◯ 신부님이 개사한 가사를 넣어서 부르자고 할 수도 있겠지요.

◯◯◯ 신부님,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여성신학 강좌에 초대해 주신 일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안에서 오정열(애단) 사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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