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1. 연중16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몫이신 입니다. 주님은 착한 주인이시고, 우리는 주님께 환대받는 손님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실입니다. 우리와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꼭 한 가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환대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늘 함께 하시나이다. 비오니, 일상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항상 만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8:1-10
  • 시편 – 15
  • 2독서 – 골로 1:15-28
  • 복음서 – 루가 10:38-42

연중 1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입니다.

가급적이면 꼭 보려고 하는 방송이 있습니다. 《세계 테마 기행》이라는 EBS 프로그램입니다. 매주 사진작가, 대학교수, 연예인 등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생생한 체험기를 들려줍니다.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인상’(印象)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 ‘이방인 여행자를 환대’하는 일을 ‘미덕’(美德)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낯선 ‘나그네’를 위해 스스럼없이 곁을 내주고 후한 ‘인심’(人心)을 보입니다. 그 훈훈한 모습들을 통해 영혼 안에 여전히 빛나고 있는 ‘별’을 보는 것 같아 마음까지 밝아집니다.

유대인들도 ‘나그네를 환대’하는 일을 ‘미덕’(美德)으로 가르쳤습니다. 천사를 맞이하는 일보다 나그네 환대를 큰 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이 나그네의 모습으로 갑자기 찾아오시어 자신들의 선행을 시험하신다는 전승까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최후심판’ 이야기(마태 25:31~46)에서 ‘나그네’(보잘 것 없는 이)를 맞아들이고, 잘 보살피는 일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의인의 삶이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지금도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를 방문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뿐 아니라 <히브리서>도 이렇게 교훈합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 히브 13:2

나그네(손님)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도 뒤지지 않겠지요? ‘이주노동자’를 홀대(忽待하거나 ‘난민’(難民)에게 적대적인 이들의 이야기가 가끔 보도되어서 부끄럽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도 ‘난민의 후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선조들은 난민으로 떠돌며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산업화 시절에는 이주노동자로 외화 벌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항상 ‘착한 이웃’, ‘착한 주인’으로 ‘나그네’(손님)를 ‘환대’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나그네로 오신 주님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들도 ‘나그네(손님) 환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1독서 <창세기>는 나그네 환대 전승과 가르침의 근거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은 ‘하느님 일행’을 극진히 ‘환대’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 일행을 집에 모셔서 ‘환대’하는 이야기입니다.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그만 ‘우는소리’를 터뜨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마르타를 ‘평화’로 이끄시며, 참된 ‘환대’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주님(상대방)의 말씀을 듣는 일’이라 교훈하십니다.

이렇게 <전례독서>는 방문객(나그네, 손님)으로 가정심방(尋訪) 오신 주님을 ‘집주인인 아브라함과 마르타 가정’이 ‘환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처럼 ‘무’(無)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 마르타와 마리아 가정을, 특별히 우리 인생들을 ‘환대’하시는 ‘참 주인’이심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인생들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심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인생들에게 모든 것과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주실 수 있는 ‘진짜 주님’이신지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분이고,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주시려고’ 오신 분임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야훼이레’이신 주님이 나그네와 손님인 인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실상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주시는 ‘우주의 주인’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사람의 모습’으로 심방(尋訪)오신 ‘하느님 일행’을 ‘환대’하는 이야기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라의 ‘수태고지’(受胎告知)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그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를 들려줍니다. 이사악은 “사람들이 웃는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나무 있는 곳에 살던 시절입니다(창세 13:18; 14:13). ‘마므레’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중요한 곳입니다. 훗날 아브라함, 사라, 이사악, 리브가, 레아, 야곱이 안장된 ‘막벨라 동굴’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49:29~33). 요즘처럼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어귀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를 향해 서 있었다.’는 것은 ‘자신들을 존재를 드러내려는 일종의 신호’입니다. 아브라함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중요한 ‘방문객들’임을 알아차립니다. 신속히 뛰어나가 환영하고 쉬었다 가시도록 초대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르타’가 예수님 일행을 ‘환대’하는 <복음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은 이전에도 몇 차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땅과 자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12:1~2,7; 13:16~17; 15:18). 반복된 ‘현현’(顯現)과 ‘약속’에도 불구하고 ‘성취의 문’은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시련’(시험)을 통과하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그는 ‘약속’(희망)을 향해 ‘삶의 터전’을 떠났습니다. 그 ‘나이’와 ‘희망’(약속)은 서로 친구할 수 없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다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두려움’보다는 ‘희망’ 쪽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경험하는 ‘혼돈’의 세월도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가서 몸 붙여 살기도 했습니다. ‘자손의 약속’은 지연되고 ‘사라’는 세월이 갈수록 임신 능력이 없음이 확고해졌습니다(창세 10:30; 17:17). 그들 부부는 ‘하갈’을 통해 ‘약속된 상속자’를 얻는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하느님은 그 방법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어느덧 그의 나이 ‘99세’(사라는 89세)에 이르렀습니다(창세 17:17). ‘99세’(89세)라는 말은 인간적인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야말로 ‘끄트머리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는 ‘완전히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누가 보더라도 ‘약속(희망)의 등불’은 그만 끄는 것이 ‘합리적’(과학적)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추적하면서 ‘묵상’(默想)에 잠깁니다. 어떤 분은 한 때 특별한 ‘신적 체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인생 청사진’을 그리며 눈이 빛나던 시절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생’(生)이라는 글자는 소(牛)한 마리가 ‘외나무다리’(一)를 건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그냥 건너기도 힘든데 ‘외나무다리’가 흔들리는 일도 생기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짐’까지 실어서 건너야 합니다.

그렇게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건너다보니 어느 새 눈빛은 흐릿해 지고 ‘인생이라는 신발’이 다닳아갑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기쁜 날은 단 6일뿐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살아온 나머지 여정은 혼돈, 무질서, 어둠의 연속이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의 여생이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과연 ‘노인’과 ‘희망’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약속(희망)의 등불’이 다 꺼져가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오늘 ‘사람(나그네) 형상’으로 가정심방(尋訪)을 하십니다. ‘교부들’은 방문객이 ‘셋’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삼위일체’를 봤지만 성서학계에서는 그런 주장을 ‘지양’(止揚)합니다. 다만 ‘성육신’하신 예수님 이전에 ‘하느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찾아오신’ 또 다른 예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참고, 요한 8:56~59).

어떻게 아브라함이 하느님 일행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생의 경륜’(經綸)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 들수록 ‘육체의 눈’은 흐릿해져도 ‘영혼의 눈’은 더욱 밝아진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가짜뉴스’와 ‘유신시대’의 망령에 여전히 놀아나고 있는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기도가 필요한 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이 중요한 방문객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환대’를 제공합니다. 식사 중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용건’을 말씀하십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즉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재확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전에도 하신 적이 있기에 새로울 것도 없었습니다(창세 17:19,21).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 창세 18:10

오늘 1독서는 여기까지만 배정했지만 이야기는 좀 더 이어집니다(창세 18:11~15). 천막 문어귀에서 이 ‘신성한 대화를 엿듣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라’였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복음서>의 ‘마르다’처럼, 평소와 달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남편을 보고 좀 특별한 이들임을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급히 떡과 송아지 요리를 만들어 내보내면서 ‘도대체 누구라서 저렇게까지 하나…’ 궁금했습니다. 그 ‘신성한 대화를 엿듣다’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 18:12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불신앙’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참 속없는 양반들이네…’ 이러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남편처럼 아내도 웃었습니다(창세 17:17). 하지만 ‘속마음’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숨겨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다 아십니다(시편 139:2,4). 우리가 진정으로 이것을 인정하고 살아간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사라가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랴’고 하며 웃으니, 될 말이냐?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 창세 18:13~14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보여주는 ‘전능성’입니다. 하느님은 ‘사라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결코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심방이야기의 핵심은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이 ‘거룩한 증언’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어려운 일이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대화중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입니다. 하느님의 ‘전능성’과 ‘창조력’은 그 무엇으로도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거룩한 증언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인식’도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존재의 ‘시작’이 하느님의 ‘전능성’과 ‘창조력’에 전적으로 힘입고 있음을 이 심방이야기를 통해 후손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포함하는 빛나는 보석의 말씀입니다.

‘사라’는 비로소 그 일행이 누구인지 알아차렸습니다. 남편이 그토록 의지하던 ‘하느님’이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혼란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천막에서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웃었다’는 사실을 잡아떼려했지만 벌써 실패했습니다(18:15).

이런 ‘사라’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사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는 이러저런 ‘이유들’을 대며 자신의 ‘의심’을 정당화합니다. 어쩌면 ‘사라’보다도 더 의심합니다. 그 의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갖다 붙이기도 합니다.

신부님, 우리더러 성경말씀을 다 믿으라고요? 지금은 과학시대입니다…

우리시대 사람들은 ‘과학’을 모든 것의 ‘기준’처럼 사용합니다. 신자들 중에도 하느님이 과학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이라 ‘냉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대과학과 대치되는 성서 속 이야기들을 불편해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종교적 심성의 한 표현’으로 한계 지으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학은 해석학입니다. 성서를 읽는 그 누구라도 해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문자주의’로 대변되는 ‘근본주의 성서해석’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과학주의’에 물든 ‘이성’ 일변도의 성서해석도 경계해야 합니다. 문자주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우상화하고 시(詩)적 상상력을 신앙에서 차단하기 쉽습니다. ‘이성주의 성서해석’은 지나친 ‘엘리트주의’에 빠져 이성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감성, 정서, 체험, 느낌의 영역(영적인 차원이나 내면세계)을 신앙에서 제거해 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하느님과 ‘전인격적’으로 관계하며 인생길을 걸어간 이들의 ‘거룩한 증언’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은 이성 뿐 아니라 이성이라는 주체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감성, 정서, 체험, 느낌까지 포함하는 ‘의지적 존재’입니다. 특히 인간은 단지 이성적인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 하느님이라는 자신보다 더 큰 세계와 연결된 ‘영적 존재’입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살아가는 삶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라는 로마 카톨릭 사제가 있습니다. 프랑스어 이름에 들어가는 ‘드’(de)는 독일어 이름의 ‘폰’(von)이라는 말처럼 ‘귀족출신’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남긴 고귀한 통찰 중에 이런 글귀가 회자(膾炙)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경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경험을 하는 영적인 존재다.

그의 말 속에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깊은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영적인 차원이나 심오한 내면세계는 ‘이성’이 갖는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신비의 문’이 열립니다.

‘사라’와 달리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오늘 <복음서>의 ‘마리아’처럼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서 고요히 ‘경청’(敬聽)합니다. 즉 ‘침묵’(沈默)합니다. 그의 침묵은 우리에게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한 때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랐던 그 역시 ‘사라’처럼 생물학적 근거를 더 중시했던 ‘불신앙의 자리’에 있기도 했습니다.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 창세 17:17

그러나 ‘희망(약속)의 하느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자리’로 불러 세우기 위해 ‘오늘’ 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성실하심!’, 그 성품이 우리 구원의 진정한 근거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반복’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해서 듣는 일,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고 성장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로도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긴다고 교훈했습니다(로마 10:17).

<신약성서>에도 오늘 <창세기> 이야기를 해석해서 들려주는 책들이 있습니다. <로마서>와 <히브리서>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을 확고한 ‘믿음의 원형’이자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합니다(로마 4:13~25). 반면에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와 아브라함’ 둘 다를 ‘믿음의 사람’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히브 11:11). 분명 <히브리서> 기자는 ‘좌충우돌’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둘 다 생물학적인 제한, 즉 ‘과학’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개입해 오시는 하느님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으로 증언됩니다. 오늘 <시편 15편>과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연결 짓자면 ‘허물없는 사람’(시편 15:2), ‘흠 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골로 1:22)으로 증언됩니다.

사실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사라와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믿음과 믿을 수 없는 근거들 사이에서 혼란스럽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제시하는 ‘객관적(과학적, 생물학인, 수치적, 수량적) 근거(자료)들’을 따를 것인지 그 사이에서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의심하게 하는 수많은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성서>는 그런 ‘수많은 데이터’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우리의 눈길을 기록된 ‘한 말씀’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사라’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성모 마리아’처럼 될 것인지 말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이유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우리 삶과 우주에 역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믿을 것인지 말입니다(창세 18:14; 루가 1:37,45).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찬례’는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을 일깨우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의 장’(場)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를 ‘제한’하려는 그럴 듯한 이유들의(과학) ‘공격’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느님보다는 생물학, 즉 과학을 더 신뢰하라는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서 ‘구석’으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의심과 믿음 사이를 ‘왕래’하다 그만 지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흔들리는 속마음을 숨기고 성찬례에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내치시지 않고 마음에 당신의 ‘한 말씀’을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의심’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신실하시며, 자비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고, 건네시는 ‘주님의 한 말씀’을 ‘경청’(敬聽)하며 다시 ‘믿음’으로 돌아섭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찾아오시어 말씀하시는 주님 덕분에 다시 ‘조율’(調律)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고 마심으로써 ‘영혼의 생기’(生氣)를 얻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순간 의심으로 어두워졌던 ‘영혼’에는 <성가 267장>에서 노래하듯이 다시 ‘등불’이 밝혀집니다. 성가를 찾아서 그 가사를 고요히 묵상하다 보면 영혼의 ‘고양’(高揚)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시련을 통과하여 희망을 낳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성찬례는 성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극진한 ‘서비스’(섬김)를 받고 있는 시간입니다. 언뜻 보기에 아브라함의 가정이 주인이 되어 나그네로 오신 하느님 일행을 극진히 ‘환대’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무’(無)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희망)을 ‘서비스’하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야훼이레’이신 주님이 나그네요, 손님인 인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실상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주시는 ‘우주의 주인’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깨우쳐야 할 진실입니다. 마르타의 집을 심방하신 ‘복음이야기’에서도 이 진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시편 <15>은 하느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와 예배자들이 ‘문답형식’으로 바치는 ‘제의용’ 찬미입니다. 축제기간을 맞아 성전으로 순례 온 이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먼저 ‘성전 문 앞에 선 예배자들’이 묻습니다(1절). 쉽게 말해 “어떤 사람의 예배를 하느님이 받으시는가?”입니다. 이 물음에 ‘성전 문 안에 있던 사제’가 대답합니다(2~5a절). 율법에서 가르치는 대로 ‘정의로운 사회관계’를 살아 온 사람입니다(이사 33:15~16; 예레 7:1~11; 에제 18:5~9; 야고 1:27).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 온 사람이 성전에서 살고, 그 거룩한 산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살아 온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하느님은 받으시고 그를 보호해 주십니다(5b절).

성찬례를 봉헌하러 온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의로운 사회관계’를 살아왔습니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왔습니까? 자신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는 허사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연약한 우리를 위해 ‘믿음과 희망의 새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히브 7:18~19). 무슨 말씀입니까?

지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그 ‘성전산’(시온산)은 1독서의 아브라함이 훗날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쳤던 ‘모리야산’이기도 합니다(창세 22:2). 그 ‘모리야산’에서 아브라함은 ‘야훼이레’를 경험합니다(창세 22:10~14). ‘야훼이레’는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누구를 그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는 뜻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제물’입니다.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타’가 그 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지킴으로는 도무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새 계약’인 예수를 주셨습니다(로마 3:20~26; 히브 8:7~13). 새 계약인 예수는 낡은 계약인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 즉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이들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습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늘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지상의 도시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모조품’이고(히브 8:5), 진짜는 ‘새 계약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하느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가르쳤습니다(히브 4:14~16; 7:24~8:1; 12:22~24).

이 시간 우리의 ‘올바름’(義)이 아니라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의’(義)를 이루신 ‘새 계약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 자녀로 만들어 주신 그 은총의 능력을 ‘찬미’합니다.

이렇게 <시편 15편>은 표면적으로는 예배자의 자격을 교훈하는 것처럼 들지만 속뜻은 훨씬 깊습니다. 예배자들이 던진 질문의 궁극적 의미도 ‘누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입니다. 1독서와 연결하자면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극진한 환대’를 받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을 받습니까?”입니다. 이 질문의 해답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 위대한 약속의 성취이십니다. 우리는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정의로운 사회관계’를 실천하며 살 것을 다짐합니다. 성령께서 부디 우리의 결심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독서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연중시기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몫’이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시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서게 하여주셨습니다. – 골로 1:22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명백히 증언합니다. 본래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 교회 안에 퍼져 있던 각종 이단사상(세속의 유치한 원리들, 골로 2:20)을 배격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생활’을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해 써서 보내졌습니다. 오늘 서신에는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흔히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사도 바울로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쌍둥이 서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내용도 여러 면에서 비슷한 데, 교회와 그리스도의 올바른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차이점도 있습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교회론’이 좀 더 중심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을 몸의 지체에 비유하여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하나로 연합할 것을 강조합니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론’이 좀 더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드러내신 분이자, 교회의 머리이시며, 온 우주의 중심이심을 강조합니다. 특히 오늘 낭독한 서신 전반부(15~20절)가 사도 바울로가 제시한 ‘그리스도론’의 핵심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고(15,17절),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며(16,17절),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존속합니다(17절).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볼 수 있는 하느님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셨고(19절),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느님과 모든 만물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20절).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시어 우주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18절).

이제 성도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본질”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믿음 안’에서만 거룩하신 하느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22절). 성도들은 이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자신이 영접한 ‘복음의 희망’을 따라 신앙생활을 충실히 이어가야 합니다(23절). 특히 성도들은 사도 바울로처럼 ‘사랑과 섬김’(봉사)으로 심오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24~28절). 우리가 하느님께 사명을 받은 은총의 사람답게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 일행을 집에 모셔서 ‘환대’하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훌륭한 주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음식 장만과 시중드는 일에 여념이 없던 아브라함 편에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기도 전에 미리 다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 동분서주합니다.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그 시간’(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길의)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주목’했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발치’에 앉았습니다. 물론 둘 다 친절한 환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마르타’ 보다는 ‘마리아’처럼 해 주는 것이 ‘그 때 자신’에게는 보다 착한 주인의 환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 루가 10:42

<루가복음> 10장은 일흔두 제자를 파송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주님이 심부름꾼으로 파송한 제자들을 환대하는 이(마을)에게는 ‘평화’이지만, 배척하는 이(마을)에게는 ‘심판’입니다. 이 이야기는 ‘연중 14주일’에 다루었습니다. 지난 ‘연중 15주일’에 우리는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를 다루었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던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사랑을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로 응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여기에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면 ‘나그네 환대’(이웃사랑)라는 주제가 10장을 꿰뚫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환대’까지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습니다.

<복음이야기>는 ‘루가’에만 유일하게 전해집니다. 예수님 일행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 여정은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루가 9:51). 오늘 이야기는 그 여정에 속합니다. <요한복음>은 마르다, 마리아, 라자로가 ‘베타니아’에 살았고(요한 11:1; 12:1), 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그들이 하는 것으로 전하지만 <공관복음>에는 그런 정보가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사에서는 이 신비한 사람들, 특히 ‘마리아’를 두고는 많은 논란이 있었고 ‘향유를 부은 여인’(마태 26:6~13, 마르 14:3~9, 요한 12:1~8)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도 정리된 이야기가 없습니다. 다음에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가 그 ‘마리아’인지 여쭈어보시기 바랍니다(이것과 관련한 말씀 나눔은 2019. 4. 7. 사순 5주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녁 해질 무렵 예수님 일행은 ‘어떤 마을’에 들어가십니다. 그 일행이 ‘열두 제자’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흔두 제자’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치 않습니다. 그 마을에 ‘마르타’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난 여인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방문하시면 어느 집으로 가실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타의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일행이 마을에 들릴 때면 언제든 자기 집에 모셔서 따뜻이 ‘환대’하곤 했습니다. 말하자면 ‘섬김’으로 자신을 드리는 여인이어 왔습니다.

그 ‘환대’가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구설’(口舌)에 오를 수도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냉대했던 다른 지방 사람들과도 여러 면에서 대조됩니다(루가 8:37; 9:53). 우리에게도 ‘마르타’처럼 나그네를 대접하는 그런 훈훈한 마음이 있는지 돌이켜봅니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쁘기로 소문난 ‘마리아’였습니다. ‘마르타’는 옆집 사람들을 불러다 음식 장만을 서둘렀습니다. 마리아도 언니를 도와 음식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아무리 손이 빠른 그녀라 하더라도 그 많은 일행을 대접할 음식을 차려낸다는 것은 여간 분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처럼 집안이 활기에 찼고 특히 ‘마르타’는 대접하는 일이 기뻤습니다.

예수님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예수님이 쉬시게 그만 좀 찾아왔으면 좋으련만 계속해서 찾아 들었습니다. 도대체 음식을 몇 인 분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같이 음식 장만을 하던 ‘마리아’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루가는 그녀가 어디에 가 있었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 루가 10:39

루가는 예수님의 ‘발치’라고 하지 않고 ‘주님의 발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짧은 단락 안에 ‘주님’이라는 단어가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어떤 의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루가는 아브라함을 심방하신 하느님의 경우처럼, 예수님이 ‘손님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르타의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이야 별일 아닐 수 있지만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자세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破格)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공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유다인입니다. 나기는 길리기아의 다르소에서 났지만 바로 이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믈리엘 선생 아래에서 우리의 조상이 전해 준 율법에 대해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 사도 22:3a

우리말에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인 “저는 신영복 선생님 밑에서 배웠습니다.”와 비슷합니다. ‘발치’에 앉아서도 바로 이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줍니다. 그 일이 ‘파격’(破格)인 이유는 당시 랍비들은 여성을 제자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마르타도, 마리아도, 예수님도 파격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마르타’는 ‘시중’(심부름, 섬김, 봉사)드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었습니다. ‘경황이 없었다.’는 말은 지나치게 일이 많고, 바빴다는 뜻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여기저기서 그녀를 ‘끌어’당겼습니다. 손놀림을 아무리 빠르게 해도 그 많은 일행에게는 턱도 없었습니다. 잘 대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런 마음’이 밀려들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원숭이마냥 한번 시작된 ‘걱정’은 그녀의 마음을 ‘산만’(散漫)하게 만들었습니다. 급기야 걱정하는 마음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마르타의 눈에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가 보입니다.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처음이신 분)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 손이 아쉬운 판에 그러고 있는 모습이 철없어 보입니다. 자신은 이토록 ‘경황’이 없는데 마리아는 ‘제자’ 흉내를 내면서 너무나 편해 보입니다.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동생에게 섭섭함이 밀려듭니다. 마음의 ‘평정’(平靜)을 잃어버렸습니다. ‘걱정’은 항상 우리를 그 순간(처음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지금 여기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마르타는 음식상을 들고 방에 가서 ‘우는소리’를 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 루가 10:40

분명 그 친절한 ‘마르타’가 예수님 일행을 ‘초대’하고 ‘환대’하기로 한 일은 칭찬할 만합니다. 하지만 ‘걱정’하면서부터, 마리아와 자신을 ‘비교’하면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도움을 받고 싶다며 ‘비난’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당사자인 마리아에게 직접 말하면 되는데 예수님께 ‘명령조’로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 루가 10:41~42

예수님이 자신에게 ‘동의’하실 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마르타가 완전히 틀렸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도 곤란합니다. 섬기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마르타의 말은 분명 옳습니다. 더욱이 그녀가 보인 ‘섬김’(봉사)은 훌륭한 가치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셨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섬기는 삶’을 교훈하셨습니다(루가 22:24~27). 사실 예수께서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은 한마디로 ‘사랑의 섬김’입니다. 종교와 이념과 국경을 넘어 ‘사랑의 섬김’을 살아가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 온 이들입니다. 이 ‘섬김’의 교훈에 비추어볼 때 ‘마르타’ 역시 이미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마리아’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신이 선택한 몫의 가치를 잠시 잊고 있었을 뿐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마르타를 ‘평화’로 이끄시기 위해 ‘고요히’, 그리고 ‘다정하게’ 두 번씩이나 부르십니다. 그녀의 ‘걱정’하는 마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 일행을 환대하기로 선택한 ‘열망’은 정말 갸륵합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일행들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그녀의 말도 옳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그렇게까지 ‘많은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물어보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길에) 그 집을 방문한 주님께 필요한 일은 ‘한 가지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일’과 ‘한 가지 일’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그 ‘한 가지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주목했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 당시 주님이 필요로 했던 그 ‘한 가지 좋은 일’을 자기 ‘몫’으로 ‘선택’했습니다. ‘마르타’는 잠시 이 점을 놓쳤습니다.

사실 ‘섬김’(봉사)은 ‘격려’되어야 할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섬김’(봉사)이 힘겨운 ‘과로’가 되거나 ‘걱정’과 ‘괴로움’을 동반하거나 남과 ‘비교’하면서 마음을 ‘산만’하게 하는 일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더욱이 마르타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마리아에게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되는 일은 남성의 몫이고, 부엌이나 시중드는 일은 여성의 몫이라는 투로 말입니다. 이러한 주장과 가치관을 관철(貫徹)시키는 데 있어서 예수님을 끌어들이려 한 점은 분명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끌어들이려 합니다. 자기 옳음을 내세우기 위해서 편의대로 성서를 끌어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은 마르타의 그런 주장, 가치관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도 언니의 ‘가치관’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부엌이나 시중드는 일로 여성을 제한하려는 전통적인 ‘성역할에 항거’했습니다. 대신 당당히 배우는 권리, 즉 ‘주님의 발치’를 지키는 ‘순명’(順命)을 통해 자신의 ‘제자됨의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순간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그런 용기를 예수님은 지켜주셨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사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종종 대조되어 왔습니다. 외향 대 내향, 행동 대 사색, 섬김 대 기도, 봉사 대 경청, 활동 대 묵상(관상)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마르타와 친합니까? 아니면 마리아와 친합니까? 행동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색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주님과 둘이서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까? 사실 이런 이분법적 질문은 잘못되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매’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두 가지 얼굴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묵상, 사색)에 기초해 행동(섬김, 봉사)하고, 행동(섬김, 봉사)을 통해 위선으로 흐르지 않는 기도(묵상, 사색)의 진정성을 성찰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이야기는 외향과 내향, 행동과 사색, 섬김과 기도, 봉사와 경청, 활동과 묵상(관상), 모두를 존중하시는 말씀입니다. 진실의 두 차원입니다. 경청으로 자신을 드린 마리아의 선택 뿐 아니라 섬김으로 자신을 드린 마르타의 선택도 존중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일입니다. 행동(섬김)은 그 자체로 기도가 될 수 있고, 기도 역시 행동(섬김)에 담겨 질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섬김’에서 ‘걱정’과 ‘평화’는 ‘식별’하기를 원하십니다. 맹목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고요’ 속에서 행동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주인’이 되고 싶어 경황없이 뛰어다녔습니다. 떡과 요리한 고기와 치즈(엉긴 젖)와 우유를 하느님께 차려내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마므레 상수리나무 밑에는 ‘무’(無)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우주의 주인’이신 앉아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들 부부에게 꼭 필요했던 ‘단 하나’를 줄 수 있는 ‘진정한 주인’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부부에게 ‘약속된 아들’을 은총으로 주실 수 있는 ‘참된 주인’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주실 아들’은(그들이 ‘생물학적 능력’으로 ‘임신하고 낳는다.’는 말이 아니라 ‘임신되고 낳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입니다.) 단지 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아들을 통해 그들과 우리의 ‘구세주’께서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마르타도 예수님을 손님으로 환대하는 ‘주인’이 되고 싶어 아브라함 못지않게 경황이 없었습니다. 무슨 음식을 차려내느라 그렇게까지 경황이 없었는지 본문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많이’ 차려내려고 수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집에 ‘진짜 주인’이 앉아계셨기 때문입니다. 두 자매와 거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단 하나’를 주실 수 있는 ‘진정한 주인’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들에게 꼭 필요했던 ‘절대적 하나’를 줄 수 있는 ‘진정한 주인’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실 수 있는 ‘참된 주인’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 구세주’께서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그들로부터 이 주님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많은 음식들은 거의 필요가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상차림과 시중들기였고, 그들 앞에 계신 분은 실제로는 그런 것들이 거의 필요치 않았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현존을 드립니다. 다른 음식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립니다. 그것이 정말 감동적이고 멋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곳에 계시든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복음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최상의 포도주를 풍부히 제공해 주시는 주인이셨습니다(요한 2:1~11). 오병이어로 오천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을 풍성히 먹이시는 주인이셨습니다(요한 6:1~13).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이 베푼 잔치자리에서도(루가 7:36~50), 세관장 자캐오가 주님을 영접하고 마련한 만찬 자리에서도(루가 19:1~10),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다니는 ‘먹보’와 ‘술꾼’이라는 비난을 들으셨을 때조차도(마태 11:19; 루가 7:34)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주인이셨습니다.

심지어 배신당하여 잡혀가시던 날 밤에 있었던 ‘최후만찬’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먹이시는 주인이셨습니다(마르 14:10~26). 사실 복음이야기 전체에서 주님은 결코 ‘손님’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착한 주인’이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표현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주인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성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환대받는 손님’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그 한 가지를 주시는 주인’이십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인’이십니다.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의 주인이시기에 <말씀의 전례> 안에서 낭독되는 말씀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고 그것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었음을 믿을 수 있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예수님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로 결코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정말이지 ‘성찬례’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정심기도’에서 ‘강복’에 이르기까지 전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입당성가’부터 ‘파송성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찬미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용서, 생명, 구원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주고받는 ‘계응’(啓應)들조차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물들을 다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 성찬례에서 우리를 통해 행해진 모든 일은 하느님 자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도 ‘착한 주인’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거룩한 식탁’을 마련하십니다. 우리의 ‘생기’(生氣)를 북돋기 위하여 ‘기쁨의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육신’하신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요한 1:14). 우리가 받아야할 ‘고통’(질병)을 대신 받으신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겪어야할 ‘슬픔’을 대신 겪으신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이사 53:4). 우리를 ‘질고’(疾苦)로부터 낫게 해 주시기 위해 ‘상처’를 받으신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흘리셨던 그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죄악’(허물) 때문에 ‘대신 찔리고 짓밟히신’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이사 53:5).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씻고 ‘화해’를 가져오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죽으셨던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묻히셨던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던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허락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셨던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손바닥 위에, 우리의 혀 위에 그 고귀하신 살과 피를 주십니다. 그 ‘살’을 ‘굶주린 영혼’을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그 ‘보혈’을 ‘갈급한 영혼’을 위한 ‘참된 음료’로 제공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바로 그 한 가지’를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성찬례에서 행한 모든 일은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크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우주의 중심(주인)이신 그리스도, 우리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께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생명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꼭 필요한 그 한 가지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성사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선물됩니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 좋은 몫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선포해야할 구세주이십니다. 그리스도야말로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참 좋은 몫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중요한 그 무엇은 결코 없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시지만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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