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14. 연중15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를 통하여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 가르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인도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30:9-14
  • 시편 – 25:1-10
  • 2독서 – 골로 1:1-14
  • 복음서 – 루가 10:25-37

연중 1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 고통당하는 이웃의 삶에 연민의 마음으로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초복이 엊그제였습니다. 무더위를 지나는 우리에게 영혼의 시원한 바람 같은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의 영성시(詩) 한 편을 선물합니다.

우리는 나뭇잎에게 물었다.
“당신은 혼자서 살 수 있나요?”
나뭇잎은 대답했다.
“아니오, 내 삶은 가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가지에게 물었고 가지는 대답했다.
“아니오, 내 삶은 뿌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뿌리에게 물었고 그것은 대답했다.
“아니오, 내 삶은 줄기와 가지와 잎들에 달려있습니다.
가지에서 잎들을 떼버리면 나는 죽을 것입니다.”
거대한 나무의 생명은 그렇다.
아무것도 완전하게 혼자서만 살 수 없다.

그의 ‘시’(詩)는 ‘나’를 중심에 두고 살아온 관계를 ‘우리’라는 관점으로 바꾸도록 촉구합니다. ‘나’인 것과 ‘나 아닌 것’으로 무수히 ‘선’(線)을 긋고, ‘경계’를 지으며 살아온 우리에게 고요히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말을 걸어옵니다. 오늘은 그의 시(詩)를 발판으로 삼아 ‘천하에 나(우리) 아닌 것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의 정수를 나누려고 합니다. ‘율법의 정수’를 아는 일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게 여기신 일이 ‘먼저 경계를 허물고 사랑으로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는 일임’을 안내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존재가 결국은 더불어 살아야할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눈 뜨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아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복된 관계들임을 찬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독서는 <신명기>입니다. 모세는 ‘법전’(율법책)에 쓰인 계명(명령)들과 규정들을 지키고 마음과 목숨(정성)을 다하여 주님께로 돌아오면 복음 받을 것이라 설교합니다(10절). 그 ‘법’(명령, 말씀)은 그들의 입과 마음에 있기에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14절). 이렇게 1독서는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27,28절)는 <복음서> 전반부의 배경이 되며, 그대로 실천할 것을 요청하는(37절) 후반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화의 배경이 됩니다.

시편 <25편>은 하느님의 명령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다윗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중간에 약간의 불규칙이 있지만, 각 절의 첫 머리는 9, 10, 25, 34, 37, 111, 112, 118, 145편처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작됩니다. 원수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다윗은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영혼을 우러릅니다(1-2절).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간청합니다(3-5절). 지금 너무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하느님께서 ‘길’을 가리켜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어서 하느님이 ‘기억’해주시기를, 그리고 ‘잊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6-7절). 무엇을 ‘기억’해 달라는 간청합니까? 영원 전부터 있었던 변함없는 그 ‘크신 자비’와 약속해 주신 ‘한결 같은 사랑’은 기억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그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시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금 베풀어달라는 간청입니다. 대단한 겸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공로’를 하느님이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기초해 자신이 ‘기억’(생각)되기를 간청했습니다(7절b).

또 무엇을 ‘잊어’주시라 간청합니까? 젊어서 저지른 ‘잘못’과 ‘죄’입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양심’에는 여전히 젊어서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회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한결 같은 사랑을 기억하는 순간,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 무엇도 심지어 우리의 ‘죄’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보다 크진 않습니다. 신실하신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자비와 사랑을 ‘기억’(생각)하시는 순간 우리의 죄는 용서됩니다.

끝으로 시인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올바르심’을 찬미합니다(8-10절). 하느님은 죄인들을 멸망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은 죄인들이 가던 길을 ‘돌이키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시기를 더 좋아하십니다(8절).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은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9절). 다윗은 이 같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1독서 <신명기>가 설교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당신과의 ‘계약’과 또 그 ‘계명’(명령,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사랑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10절). 주님과 맺은 세례의 계약을 기억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이는 삶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연중시기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모두 그런 축복의 주인공이기를 빕니다.

2독서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부터 ‘연중 18주일’까지 우리는 이 서신을 ‘계속독서’로 낭독합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교회 – 고통당하는 이웃의 삶에 연민의 마음으로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모든 성도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이 성령을 통해서 ‘사랑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입니다. – 골로 1:4,8

서신은 바울로 일행의 인사와 감사로 시작합니다. 바울로는 그의 동료(제자) ‘에바프라’가 가르쳐 준 복음에 따라 ‘성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골로사이 인들을 칭찬합니다. 그들이 보여준 ‘성실함’의 주된 특징은 ‘사랑’입니다(4,8절). 바울로는 그들이 계속해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10절). 그들이 ‘흑암의 권세들’이 가하는 심각한 도전을 경계하고 더 강하여지기를 기도합니다(11절). ‘흑암의 권세들’이라는 이 구절은 골로사이 교회 안에 퍼져 있던 각종 이단사상(세속의 유치한 원리들, 골로 2:20)을 가리킵니다.

그 이단사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골로 2:9), 그리스 철학(인간의 지혜와 전통을 신뢰하게 하는)의 헛된 속임수(골로 2:4), 유대 율법주의와 금욕주의(골로 2:16,21,23), 천체와 천사숭배(골로 2:8,18) 등입니다(이것은 연중 17주일 서신 본문에 다루어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이러한 이단사상을 배격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생활’을 가르치기 위해 바울로는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다음주(연중 16주일)에 낭독할 서신 본문에(골로 1:15~28)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이 잘 나타나있으니 그때 가서 언급하겠습니다. 오늘 서신은 우리가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라고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복음서>루가가 전해주는 ‘사랑의 이중 계명’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引用)하여 ‘율법의 정수’(精髓, essence)를 요약한 가르침입니다. 613개나 되는 그 많은 율법조문들을 통합해 낸 일종의 ‘상위법’ 조문입니다.

3년 주기 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는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해마다 <복음서>로 낭독하도록 배정합니다. ‘가해 연중 30주일’은 마태오복음(22:34~40)에서, ‘나해 연중 31주일’은 마르코복음(12:28~34)에서 배정합니다. 둘 다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성전 뜰에 계실 때이고, 예수님이 직접 ‘사랑의 이중 계명’을 ‘율법의 정수’(精髓)로 말씀하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올해는 ‘다해’인데, 다른 해와 달리 상대적으로 아주 일찍 ‘사랑의 이중 계명’을 <복음서> 전례독서로 배정했습니다. 루가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배치합니다. ‘율법의 정수’(精髓)도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교사가 직접 대답한다는 점에서 마르코나 마태오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율법 해석 능력을 ‘시험’(속을 떠보려고)하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 루가 10:25

그가 얻기를 소망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 ‘생명’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조에’(zoe)는 그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을 갖기에 굳이 ‘영원한’(아이오니스)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데 루가 뿐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은 ‘강조’의 차원에서 이 단어를 꼭 덧붙입니다. ‘영원한’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이오니스’(aionis)는 ‘우주적인’, ‘신적인’, ‘종말적인’이라는 다차원적인 뜻까지 갖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텔로미어 이론, Telomere loss theory) 물려받는 끝이 있는 ‘자연적 생명’, 즉 ‘수명’에 해당하는 말은 ‘비오스’(bios)입니다.

따라서 그가 얻기를 소망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우주적 차원입니다. 질적으로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하느님의 차원이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적 ‘수명’(壽命)과는 완전히 다른 ‘거듭난 생명’(生命)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종말론적 삶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생명이 구현된 삶입니다. 물론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개념이 당시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죽은 다음’ 보다는 오늘 1독서에서 교훈하듯이(신명 30:1-20), 그리고 ‘샬롬’(שָׁלוֹם)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듯이(샬롬의 의미는 2019. 7. 7. 연중 14주일 설교를 참고하세요), 하느님과의 교제(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속에서 누리는 ‘지상에서의 복’에 더 주목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부활)의 소망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이사 26:19; 다니 12:2).

예수님은 조심스럽게 그의 옷차림새를 훑어보십니다. ‘율법교사’의 차림새입니다. 그가 율법교사임을 아신 순간 예수님은 새삼스레 그게 무슨 소리냐며 ‘전통’에 기대어 ‘반문’(反問)하십니다.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 루가 10:26

예수님이 이렇게 반문하신 이유는 ‘율법준수’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라는 생각이 당시 랍비들 뿐 아니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견해였기 때문입니다(마태 19:16~30; 마르 10:17~31; 루가 18:18~30; 요한 5:39). 그는 ‘쉐마 이스라엘’(너,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전통적인 신앙고백(신명 6:4~5)과 이웃 사랑(레위 19:18) 계명을 인용(引用)하여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 루가 10:27

이 두 계명이 그가 ‘율법서’ 중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정수’(精髓)로 오래도록 믿어 온 해답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어떤 식’으로 율법을 지켜야하는지 그가 찾아낸 길입니다. 그만큼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이해력)을 다하여’는 본래의 ‘쉐마’에는 없지만 <복음서>마다 약간씩 차이 나게 옮겼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생각’(이해력)의 힘을 다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율법교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가 본래의 ‘쉐마’는 아니었지만 여기에 결합시킵니다. 그만큼 이웃사랑, 그것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놀라운 ‘통찰’(洞察)입니다.

교우들과 대화하면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참 소홀히 한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다른 사람(친구, 동료와 같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에 기여하고픈 이들도 자신이 먼저 행복해지는 일이 소중하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613개나 되는 그 많은 율법규정 중에서도 ‘정수’(精髓)를 뽑아냈을 뿐 아니라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행해야 절대적 ‘명제’로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해 그가 찾았고, 믿어 온 일이 이 ‘사랑의 이중계명’이라 하더라도 그 계명들(율법규정) 어디에도 그것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약속’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분명 ‘첫째가는 계명’인 ‘쉐마’대로 사는 일은 주님께서 옳게 보시고 좋게 보시는 일입니다(신명 6:18). 인생이 잘 되는 길이자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길입니다(신명 6:18~19). 복되게 살기 위해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일입니다(신명 6:24~25). 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약속이 거기에 덧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분명 장려할 일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보장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그의 대답은 분명 모범적입니다. ‘율법의 본질’을 꿰뚫을 만큼 그는 훌륭합니다. ‘사랑의 이중계명’을 ‘율법의 정수(精髓)’로 요약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자신의 ‘이해력’(생각)이 남다르다는 점을 이미 증명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대답에 고무되셨습니다. 간단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 루가 10:28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 실천해라.”입니다. ‘율법의 정수(精髓)’까지 아는 이상, 그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실천하는 일 뿐입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 계명’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근본 원칙으로 제시됩니다(25,28절). 사실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실천하는 일은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숙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해를 줄 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종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고,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자기가 믿고 깨달은 진리를 ‘성령의 인도’ 속에서 수행하고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행합일’, ‘신행합일’이 신앙인의 마땅한 도리라 할지라도 ‘율법준수의 일’, 즉 ‘행동의 온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실 필요도 없었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속제물’로 봉헌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로의 ‘일갈’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준수의 행위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가 경계한 이단사상(유대 율법주의) 중 하나입니다.

‘율법준수의 일’, 즉 ‘행동의 온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이라면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하신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는 말씀의 진짜 뜻은 무엇일까요? 더욱이 자신이 아는 대로 실천하려고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기울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진실’입니다. ‘율법준수의 일’, 즉 ‘행동의 온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상속’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대로 수행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방향이 다릅니다. ‘수행과 실천’이라는 우리의 ‘행동’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 공로’의 보답이나 ‘자기 의’(義, 올바름)를 보상받는 결과물도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수행과 실천’이라는 우리의 행동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피조물인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치 자신을 돌보듯이 나눔의 손길을 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한 존재이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엇이 진실인지는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용기를 얻었던지 갑자기 그는 한 술 더 뜬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의 정수(精髓)’로 통찰한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지고 스스로를 측정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쉐마’로 시작하는 ‘첫째가는 계명’을 나름 충실히 지켜왔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둘째 계명’에도 충실했는가는 좀 자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어떻게 정의(定義)하느냐에 ‘둘째 계명’에 대한 충실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가 10:29

직업이 율법교사인 그는 법률가답게 먼저 ‘개념’ 정립을 원합니다. 글을 읽거나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가 쓰고 있는 용어나 개념부터 정확히 하자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시간 낭비도 줄이고, 서로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칫 그런 시도(설명)들이 자기 지식 자랑(자기 옳음)이나 상대방을 얕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교사가 그런 사람의 전형입니다.

사실 그는 이 질문을 함으로써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분명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하는 것인지 결코 예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첫째가는 계명’을 충실히 지켰다고 자부(自負)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준과 방식으로 이미 자기는 하느님을 만족시켰다고 자화자찬(自畵自讚)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교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인간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성찬례에 참석하고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주의’(注意)가 산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물며 일상생활에서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께 온전히 집중한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첫째가는 계명’에 충실한 사람으로 ‘자부’(自負)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다음 그의 실수는 ‘이웃’에 대해 물었다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언뜻 듣기에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그의 질문은 적절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제기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웃’이 누군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쳐온 ‘율법교사’였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은 ‘동족’(원문으로는 네 백성의 자손, 형제, 친척, 동포, 겨레) 뿐 아니라 ‘이웃’에 대해 정의합니다. ‘이웃’은 일차적으로 친구, 동료 같은 ‘가까운 사람’이지만 그 속에는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의미가 더 깊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은 가난한 사람, 장애인, 그 땅에 몸 붙여 사는 외국인(나그네)을 말합니다(레위 19:9~10,13~14,16). 이것은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레위기> 19장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하느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도였습니까?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29절). 루가는 콕 집어서 그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질문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쩌면 그는 전통적인 이웃의 ‘정의’(定義)를 두고 그 ‘경계’(범위)를 누구에게까지 두어야 하는지 다른 율법교사와 경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정규 랍비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대 사람들로부터 랍비로 추앙받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웃 해석이 옳다는 인정을 받고 자기 평판과 지위를 유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한편 그의 질문은 이웃을 좀 더 ‘좁게’ 정의(定義)하고픈 욕구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의 경계를 좁게 가져 갈수록 둘째 계명에 대한 자신의 충실도는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경계가 친구와 동료처럼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로만 ‘정의’될 수 있다면 ‘사랑의 이중계명’ 준수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매진해 온 자신에게는 금상첨화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와서 랍비들은 네 이웃은 사랑해야 하지만, 네 원수는 미워하는 것이 의무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이고, 미워해야 할 원수가 누구인가 하는 정의(定義)입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그의 질문은 ‘자기정당화’를 위한 길이었던 셈입니다.

여기까지가 ‘이웃’과 ‘이웃 사랑’의 모범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유명한 예화가 전해지게 된 배경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신 뒤에 예화를 하나 드십니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웃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 뿐 아니라 인간관계, 나아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바로 잡아주십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치십니다. 우리와 통하는 점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뿌리 깊은 ‘적대 관계’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훈하십니다. 사실 이 예화는 예수님의 ‘포용적인 태도’와 ‘인류애’라는 논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특히 예화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연민의 마음’은 감동스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르침을 위한 이야기이고 비현실적인(허구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왜 그런지는 예화 첫머리부터 등장합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아마도 유다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까지는 약 30km의 거리로 계속해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 사이에 황량한 사막이 있어서 ‘강도떼’의 출몰이 잦았습니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사이 길은 잠복해 있는 강도떼로 유명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다니지 않고 여럿이 무리를 이루어 그 길로 다녀야했습니다. 본문에는 혼자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무려 4명이나 등장하는 데 이런 점 때문에 허구이자, 비현실적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무모한 사람은 그 길로 가다가 강도떼를 만나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얻어맞아 거의 죽은 채로 남겨졌습니다.

이제 차례로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두 사람은 ‘사제’와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리고 출신의 ‘유다인’이었을 것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예리고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살던 곳입니다. 그들은 24개조로 나뉘어 한 주간씩 ‘성전 제사’를 도왔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예화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각각 성전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길의 가장 잦은 이용자들이었던 셈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들은 둘 다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들은 ‘종교인’입니다. 특히 그들은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별하던 일종의 심판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 성전에 기반을 둔 기득권들이자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식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성전 제사를 섬기던 그 거룩한 책무로 볼 때 가장 자비로운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즉각적으로 구조하고 도와야 했음에도 비인간적으로 굴었습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합당한 이유들을 떠올리며 피해서 지나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경건하다는 그들, 선민이라는 그들, 기득권이라는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셈입니다. 율법교사와 예수님을 둘러싸고서 그 대화를 듣던 청중들도 이야기 속 그들을 향해 ‘위선자들’이라고 욕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음에는 누가 그 길로 지나갈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마음이 있는 자신들 같은 평범한 유다인이 지나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같은 땅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처럼 ‘반목’하며 ‘원수’로 지내왔습니다. 한일관계, 북일관계, 남북관계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가졌던 이유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배경들이 깔려 있습니다.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의 사후, 통일왕정이던 이스라엘은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중심의 ‘남왕국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5세’는 서진(西進) 정책을 펼쳐서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열왕하 17:1~6), 그 땅에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열왕하 17:24~41).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의 시작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 남왕국 유다에 살던 백성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을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면서 ‘냉대’했습니다. 민족적으로 ‘혼혈’이라는 차별입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후에도 귀향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배척’했습니다(에즈 4:2~3). 어떤 유다인도 사마리아인과 결혼 할 수 없었습니다(에즈 9:1~10:17).

종교적으로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 취급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경전을 가지고 있었고 야훼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이 아니라(신명 12:5) ‘그리짐 산’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배장소로 여겼습니다(요한 4:20). 유대교 신앙에 필수적인 ‘예루살렘’에 사마리아인들은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자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적대감은 예수님 당시까지 8세기 이상 이어져 왔습니다.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같은 하느님을 믿는 공통된 신앙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갈릴래아로 여행할 때도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돌아서 다녔습니다. 오래도록 상종하지 않은 채 ‘편견’과 ‘증오’의 감옥에 자신들을 가둬놓은 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다른 외국인들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욱 나쁘다고 멸시하곤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예수님도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당하셨습니다(루가 9:51~56).

이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는 긍정적인 예로 제시됩니다. 분명 오랜 전통에 따르면 그는 쓰러진 유다인 남자를 보고 피해서 지나갈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수’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예상을 여지없이 뒤집었습니다. 그는 요청받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 속히 다가 갔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측은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이를 보고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공감의 마음’입니다. 흔히 ‘애간장이 탄다’고 합니다. 아마 꼭 맞는 은유는 “어머니가 아픈 자식을 보고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를 자신처럼 여기는 ‘연민의 마음’(측은지심)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 속에 있는 이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구하고자 그의 삶에 뛰어 들어가는 ‘자비의 마음’, 즉각적인 ‘자기 투신’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 인생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연민의 마음’(측은지심)을 일깨우고 키워나가는 이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다 동원합니다. 원수의 몸을 만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런 경우는 유다인이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려는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 앞에서 그러한 율법규정은 무색해집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줍니다. 기름은 통증을 완화시키고,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며 포도주는 소독효과가 있습니다. 일종의 응급처치입니다.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간호합니다. 자신은 걸어갔다는 뜻입니다. 다음날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잘 돌보아 달라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부탁하며 떠납니다. 미래의 필요까지 재정적으로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자원을 다 동원해 희생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는 여행을 위한 돈을 다 써버렸으니 재정적으로 큰 위기에 처한 셈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본받아야 할 이웃 사랑의 모본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는 ‘연민의 마음’으로 원수(유다인)의 ‘이웃’으로 행동하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원수(유다인)까지도 돌봤습니다. 그들(유다인)이 ‘원수’라고, ‘상종 못할 것’이라고 멸시하던 그가 말입니다.

예화를 듣던 율법교사와 청중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율법교사는 엄청난 ‘모독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대화 첫머리에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첫 질문은 ‘행함’과 관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행함에 관심하는 그의 물음에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으로 답하신 셈입니다. 그런 다음 율법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 루가 10:36

분명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들을 만난 사람’(유대인)의 ‘이웃’이었지만 전혀 ‘이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그의 대답에 의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란 질문은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였는가?”란 질문만큼 중요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인생은 끝도 없는 ‘이론 놀음’으로 허비하기 보다는 고통당하는 이의 눈물에 손 내미는 ‘공감’, 즉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수련장(修練場)이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그만 넋이 나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힘없이 대답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분명 “그 유다인에게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에 ‘이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종교나 전통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에 기초해 행동했습니다. 율법교사는 더 이상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차렸습니다. 자기 속에는 ‘사마리아 사람’ 같은 ‘사랑’이 없음을 똑똑히 보아야 했습니다. ‘이웃’이라고 정의(定義)해 온 그 ‘경계’(境界)를 훌쩍 뛰어넘어서 갈만한 ‘사랑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음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만일 여기서 그가 자신의 그 같은 진실에 온전히 직면한다면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삶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치사하게 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말했어야 할 본래의 ‘진실’을 피해갔습니다. 본래 그가 말했어야할 진실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인데도 그는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자존심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사마리아 사람’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이론에 통달한 그가 이미 내세운 것처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 모본’으로 제시하면서 ‘한 말씀’ 주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 루가 10:37

이 ‘한 말씀’이 그의 영혼이 진정으로 들어야 할 ‘하느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인에게 사랑을 베푼 것처럼, 율법교사 역시 ‘가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 ‘율법의 정수’(精髓)를 통달했다고 떠드는 일보다 중요합니다. ‘가서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다면’ 그는 오랜 증오의 감옥에 갇혀 있던 자신을 해방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흑암의 권세에 빠져있던 마음도, 목숨도, 힘도, 생각도 살려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답하고, 이웃사랑에 적용하도록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웃’이라는 개념을 유다인들끼리만 제한적으로 정의하려는 그들의 생각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선’(線)을 긋고 경계(境界)를 짓는 일을 더 이상 인간들이 할 수 없도록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처럼 마귀에 짓눌려 죄와 영원한 죽음으로 고통 받는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연민의 마음’으로 찾아 오셨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며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이론이나 생각이 아니라 실천적 사랑으로 우리의 ‘착한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율법교사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이론적으로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가까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편 가르기 하는 ‘차별’을 가정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이론적으로 내 이웃이 누군지, 내 편이 누군지를 살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 사랑을 실제적으로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생각’(이론)으로만 “누가 나의 이웃인지” 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관계에서 우리는 ‘이기심’에 따라 누군가를 가까운 이웃으로 삼았다가도 어느 순간 ‘외부자’ 취급을 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실천’ 없는 질문들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원수’ 이야기를 하십니다. ‘연민의 마음’에 기반 한 ‘행동’을 통해 ‘이웃이 되어주는 원수’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그 때의 이웃은 다른 사람들이 나의 ‘원수’라고 생각할만한 사람까지도 포함해야 합니다. 언제나 ‘나의 이웃’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입니다.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입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희망을 잃은 이들, 사회적 차별로 신음하는 이들, 임금과 노동조건으로 차별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정폭력으로 시달리는 여성들과 학대받는 어린이들, 사고 원인조차 알 수 없어 정부를 상대로 호소하는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 자국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이주하는 난민들도 ‘우리가 착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이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그들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구에 사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다 채워줄 순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에 ‘연민의 마음’으로 동참한다면 분명 세상은 ‘하느님 나라’로 바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 내 동족… 이런 식으로 ‘나 자신과 나 아닌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중심적 대립관계의 틀’을 넘어섭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한 이들은 그와 내가 ‘자타불이’(自他不二) 즉, 둘이 아닌 하나,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된 한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섬’(島)들은 드러난 모습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해(深海)에서는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 손바닥에서 갈라진 손가락처럼 말입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과 마음도 ‘섬’(島)처럼 각각이지만 ‘근원의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요한 15:5~7)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 하나로 연결된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말씀 나눔 첫머리에 실은 ‘해리 에머슨 포스딕’이 쓴 ‘시’(詩)처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를 중심에 두고 살아온 관계를 ‘우리’라는 관점으로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로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그 ‘우리’라는 관점도, 단지 ‘혈연에 근거한 가족 차원의 우리’, ‘민족 차원의 우리’로 제한하며 경계 짓던 삶에서 ‘세계적 우리’, ‘지구적 우리’로 완전히 인간을 바라보는 틀을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본받아 ‘우주적 가족애’로 서로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이야말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신 ‘십자가’의 정신이라는 가르침이 이 예화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하느님과 올바로 관계하는 삶임을 가르쳐주신 예화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알량한 율법 지식’은 다 헛수고이니 빨리 돌이키라는 ‘회심’(悔心)의 선포입니다.

오늘 <루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이들, 즉 ‘영원한 생명’을 이미 얻은 이들은 자기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 ‘착한 이웃이 되어준다’고 담아냈습니다. 성육신 하신 주님처럼, 은유적으로 말하면, 그 순간 그들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화신(化身)입니다. 그리고 그 ‘착한 이웃’,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우리여야 한다고 오늘도 가르칩니다. 물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복잡하기에 모든 일이 우리의 결심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여러 면에서 나와 다른 이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 손 내밀어 착한 이웃이 되어주라는 예수님의 ‘자타불이’(自他不二) 가르침에는 동의하지만 정작 실천에서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물러나 있을 일만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가서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은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착한 이웃이 되어 줄 때 우리는 이미 주님을 도와드린 셈입니다. 차별과 소외로 신음하는 이들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착한 이웃이 되어주는 이들은 자신이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이들임을 증명합니다.

부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처럼, 지구적인 우리, 지구적인 사랑의 관계로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데까지 마음과 영적인 눈이 떠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론을 따져가며 나의 옳음이나 드러내려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속에서 소외되고,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다가가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품으셨던 ‘연민의 마음’이 교회인 우리의 손과 발과 입술을 통해 실천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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