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7. 연중1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언약의 하느님,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어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세상에 전파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6:10-14
  • 시편 – 66:1-9
  • 2독서 – 갈라 6:7-16
  • 복음서 – 루가 10:1-11,16-20

연중 1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살아내는 선교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일흔두 제자의 파송과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둘씩 짝지어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그들은 찾아 나선 ‘낯선 동네’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예수님의 ‘기쁜 메시지’를 받들고 수행합니다. 그들을 ‘환영’하는 동네에는 ‘평화’가, ‘배척’하는 동네에는 ‘심판’이 도래한 때입니다. ‘평화와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반응입니다. 구원받은 하느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멸망할 사탄의 자녀인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영접한 새 사람들, 즉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 영접함으로써 ‘없음’(無)에서 ‘있음’(存在)으로, ‘거짓’(僞)에서 ‘진리’(眞)로, ‘악’(惡)에서 ‘선’(善)으로, ‘추함’(醜)에서 ‘아름다움’으로(美), ‘어둠’(無明)에서 ‘빛’(光明)으로, ‘죽음’(死)에서 ‘생명’(永生)의 세계로 옮겨진 교회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고 성령을 통해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만 가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주변에 퍼뜨리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실로써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그 기쁜 소식을 세상에서 살아내는 ‘선교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퍼뜨리는 전달자로서의 삶,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하는 길이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 주제가 전례독서들에 어떻게 녹아있는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는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흔히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구원을 성취할 메시아의 도래, 고난, 영원한 통치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은 <제 3이사야>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는 1장부터 39장까지입니다. <제 2이사야>는 40장부터 55장까지입니다. <제 3이사야>는 56장부터 66장까지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시간 관계상 신학적인 면 중의 하나만 간략히 살펴봅니다.

<제 1이사야>는 예루살렘(유다백성)의 죄에 대한 고발과 심판 선고가 지배적입니다. <제 2이사야>는 심판이 이미 과거의 일이 되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으로 전환되며, 이것이 <제 2이사야>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와 흥분, 희망과 위로, 낙관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제 3이사야>는 실망과 좌절,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의 분위기가 강합니다.

특히 <제 3이사야>의 시대 배경은 바빌론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후입니다. 귀국했지만 폐허로 남은 ‘예루살렘’(시온)을 보고 그들은 실망과 좌절을 겪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의 분열과 갈등까지 겪습니다. 그들을 향해 <제 3이사야>는 장차 도래할 예루살렘의 ‘회복(기쁨, 평화)의 새 시대’를 예언합니다(이사 60:1~22; 61:1~11; 62:1~12; 65:17~25; 66:10~14).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 위에 높여주시는 ‘영광스러운 구원(평화, 기쁨)의 새 시대’를 노래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신천신지의 새 세상’이 옵니다(이사 65:17). 그 ‘회복과 구원, 번영의 새 시대’는 하느님이 몸소 예루살렘에 ‘메시아’로 ‘오시는 날’ 성취될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보편주의)이 함께 예배하게 될 그 평화의 날을 <제 3이사야>는 꿈꿉니다(이사 56:1~8; 66:18~21).

오늘 낭독한 1독서는 <제 3이사야>에 해당하며 <이사야> 전체의 막을 내리는 결론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택하신 남은 자, 의인들)이 ‘예루살렘과 함께’ 기뻐하도록 불려 집니다. 하느님께서 절대권능으로 예루살렘에 베푸실 회복과 구원, 번영의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젖먹이’를 달래듯이 하느님이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실 때가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만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어색할지 모르나 분명 <이사야>예언자는 젖먹이를 간호하고 건강을 회복시키는 ‘어머니’처럼 하느님을 묘사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처럼 자식을 그렇게 잘 ‘위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어머니처럼 당신의 백성(택하신 남은 자, 의인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빨며 좋아하는 아기처럼, ‘위로’를 주는 ‘예루살렘의 품’에서 흡족하게 ‘젖’을 빨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 팔에 안겨(등에 업혀) 잠을 자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절대권능으로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회복’시켜주시는 날, 하느님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종’이나 ‘천덕꾸러기’가 아닙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고, 다른 나라들의 ‘부귀영화’가 개울처럼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하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상을 숭배하고 불의를 저질러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 쇠락했지만, 이제는 하느님께서 ‘거저주시는’ 회복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다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예루살렘에 ‘메시아’로 오시는 때가 당신 백성들(남은자, 의인들)에게는 ‘기쁨과 평화’이지만, ‘어떤 이들’(원수들, 우상숭배하던 이들)에게는 ‘심판’의 때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백성들, 다시 말해 ‘예루살렘 품’에서 사랑받는 그 ‘젖먹이’가 ‘교회의 영광’을 예시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통해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기뻐하게 될 ‘복락’(福樂)을 미리 보여준다고 믿습니다. <제 3이사야>는 그 ‘회복과 구원, 번영의 새 시대’는 하느님이 몸소 예루살렘에 ‘메시아’로 ‘오시는 날’ 성취될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예언이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그리스도교는 믿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역사’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젖먹이가 흡족하게 젖을 팔며 무럭무럭 자라듯이, 교회 역시 십자가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자라나고 세상으로 크게 퍼져나갈 것을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갈라 2:16; 히브 9:26~28; 10:10,12,14). 오직 한 번, 십자가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한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서로 원수로 갈라진 우리를 전혀 ‘새로운 피조물’, 즉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에페 2:11~22). 이것이 2독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포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갈라 6:14). 또한 예수님이 보내주신 ‘다른 협조자’, 즉 성령께서는 ‘교회’인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 부르는 ‘새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갈라 6:15). 따라서 사도 바울로는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는 이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이 법칙을 따르는 이들은 이미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고 강조했습니다(갈라 6:16).

그러면, 장차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 베푸실 회복과 구원, 번영의 시대를 예언하는 <제 3이사야> 본문이 <복음서>의 배경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입니다.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평화(부귀영화)를 개울처럼 쏟아져 들어오게 하리라. – 이사 66:12

이 구절이 오늘 <복음서>를 위한 ‘배경’(보충하는) 역할을 합니다. <루가복음>의 증언을 한마디로 줄이면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평화의 왕’이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오래도록 절망 속에 있던 인생들이 그들 가운데 찾아오신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돌봄 덕택에 ‘평화’(하느님 나라의 구원)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참 평화’가 그들 사이에 성취됩니다. 예수님이 파송하신 제자(사도)들을 통해 인생들이 그들 사이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을 맛봅니다. 예수께서 파송하신 일흔두 제자를 통해서 평화와 회복과 구원이 강물처럼, 시내처럼 사람들의 심령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제자들의 파송이 어떤 이들에게는 ‘평화의 기쁜 소식’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노여움이 폭발하는 심판 때의 ‘도래’(到來)이기도 합니다. 그 평화와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반응입니다. 구원받을 하느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멸망할 사탄의 자녀인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시편은 <66편>입니다. 시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자고 초대합니다(1~4절). 그런 다음 그들이 감사와 찬미를 바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5~7절).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의 일들, 즉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의 축복 때문입니다. 이 두 사건(특히 출애굽)은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 작용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현재가 하느님 덕택에 존재함을 ‘감사축제’로써 ‘기념’해야 할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받기 위해 돌아가야 할 ‘핵심 기억’이었습니다.

선조들은 모세의 지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는 ‘진퇴양난’에 처합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느님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바꾸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뒤쫓던 이집트 군대를 홍해가 삼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도우심 덕택’에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으로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광야생활의 ‘시련’을 통과하여(시편 66:10) 마침내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정착합니다. 이 일도 자신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 덕택’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 역사의 격변기 동안 자신들을 보살펴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느님을 회상하면서 감사와 찬미를 바치자고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끝이 납니다(8~9절). 22절까지 있지만 전례독서 시편은 9절까지만 배정했습니다.

그러면 이 시편이 다른 전례독서들과 어떤 연관이 있기에 배정된 것일까요? 그것은 ‘출애굽’과 ‘약속의 땅’에 정착한 사건이 1독서 <제 3이사야>가 예언한 ‘영광스러운 새 시대의 본보기’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젖먹이에게 풍요한 젖을 물리듯,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시어 베풀어주셨던 회복과 구원이라는 평화의 시대를 시편이 먼저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하던 그들에게 ‘제2의 출애굽’을 허락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영광스러운 새 시대’를 열어주실 수 있는 분임을 그 두 사건이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서>와의 관계에서 이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성격이 ‘영적 출애굽’과 ‘영적 가나안 복지(福祉)’임을 드러내는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어(5절)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주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배경이기 때문입니다(9절). 물론 그 놀라운 일은 사도 바울로가 증언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은 두려우신 분, 하신 일 놀랍습니다. 당신의 힘, 그 하신 일을 보고 원수들이 무릎 꿇습니다.”(시편 66:3) 이 찬미처럼 파송되었다 귀환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루가 10:17) 예수님이 영원한 힘의 통치자,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7절).

2독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연중시기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교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살아내는 선교공동체’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갈라 6:14~15

오늘 배정된 2독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에 대한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해 1절부터 해설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서신을 마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 도덕적인 ‘과신’(過信)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갈라 6:1~5). 뭔가 공동체 안에 ‘평화’를 깨는 큰 문제가 발생했음을 암시해 주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무언인지는 이어지는 ‘마지막 권고와 인사’ 단락에서 밝혀집니다(11~16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어떤 행동이든지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갈라 6:1). 타인의 행동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스스로를 살피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합니다(갈라 6:1,3~5). 특히 “남의 짐을 져주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사랑의 사람’이라 교훈합니다(갈라 6:2). 사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서로의 종’이 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참 자유인’입니다(갈라 5:13).

오늘 낭독한 <2독서>는 여기에 이어집니다. 둘로 나뉩니다. 첫 단락(7~10절)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 자체로 스스로에게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고 교훈합니다(7절). ‘육체에 심는’ 사람, 즉 변화하는 ‘세속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8절). 반면에 ‘성령에 심는’ 사람, 즉 ‘사랑의 화신’(化身, incarnation)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8절).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그 행동으로써 이미 자신을 심판하고 증명하는 중입니다. 이 ‘사랑의 삶’은 세상이 ‘교회’에게 기대하는 삶의 모습이고, 특히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서 기대하는 삶의 태도입니다(9~10절). 교회는, 우리 각 사람은, 분명 이 땅을 살고 있지만 ‘성령에 심는’ 사랑의 삶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시민’임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단락(11~16절)은 사도 바울로의 마지막 권고와 인사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육체의 가시)을 앓고 있었습니다(2고린 12:7~8). 그의 ‘병’을 놓고 여러 해석이 있는데, ‘안질’(眼疾)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근거들도 전해집니다(사도 9:3, 8~9,18; 갈라 4:14~15).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로 시력이 약화되었기에 나중에는 자신이 불러주는 내용을 대신 기록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서신을 보내는 이가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친필 ‘서명’을 남기거나(골로 4:18), 아주 중요한 내용을 교훈해야 할 때는 펜을 건네받아 직접 써 내려갔습니다(11절).

그가 교훈하고 싶었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오늘 서신에서 전해집니다(12~13절). 사실 이것이 그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서신을 보낸 직접적인 동기였습니다. 두 번째 선교 여행을 출발한 바울로는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다니면서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가 그 지방을 떠난 뒤에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몹시 ‘화’가 났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교회들의 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갈라 1:6~10). 그들은 사도 바울로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키고,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그는 급히 서신을 보내야 했습니다. 서신 첫머리서부터 자신의 ‘사도성’을 항변(抗辯)합니다(갈라 1:1). 사도로서의 권위를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할 정도로 교우들의 마음이 흔들렸고 바울로의 마음도 절박했습니다(갈라 1:11~2:14).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율법준수’와 ‘할례’라는 ‘다른 복음’에 물든 교우들을 향해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임을 강한 어조로 질책합니다(갈라 2:15~4:31). 만일 ‘율법준수’와 ‘할례’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유’를 허사로 만드는 일이라고 질책합니다(갈라 5:1~15). 자신이 ‘할례’를 주장했다면 유다인들로부터 박해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 강하게 항변합니다(갈라 5:11; 6:12~13).

그러면서 자신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집중하겠다고 재차 선언합니다(14절). 유다인들로부터 박해를 받더라도 ‘십자가’만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겠다는 선포입니다. 간단히 ‘그리스도께만 충성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율법준수’라는 ‘자기 공로’, ‘자기 의(義)’에 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인다는 것이 자신이 전한 복음의 본질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 셈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義),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입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갈라 5:25; 6:15). 그 일은 ‘율법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서 성취됩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는 이 ‘은총의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이 법칙을 따르는 이들은 이미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화와 자비를 기원하는 것으로 그의 ‘의분’(義憤)에 찬 서신을 마무리 합니다.

<복음서>는 ‘일흔두’ 제자의 파송과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루가복음>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 나라 백성의 추수’를 위해 나선 일종의 ‘현장수업 보고’입니다. ‘일흔둘’이라는 숫자는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하는 당시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예수께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도록 파송했다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고픈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명령하시는 ‘기쁜 메시지’를 수행하기 위해 둘씩 짝을 지어 길을 나선 ‘심부름꾼들’이었습니다. 둘씩 짝지으신 이유는 ‘서로 의지하고 도우라’는 뜻도 있고, 둘 이상의 사람이 증언해야 증거로써 신빙성을 갖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신명 19:15). 루가는 그들을 파송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말씀에 담았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 루가 10:2

예수님은 ‘수확’할 하느님 나라 백성이 너무나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탄식’하십니다. 당신 혼자 다 해낼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시면서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일꾼들을 더 보내주실 것을 기도하자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알리는 일은 특정 신자 그룹만이 아니라 더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연대를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더 많은 사람과 하느님 나라 전파를 위해 연대해야 합니다.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압박하시지도 않습니다. 그 일이 쉬울 것이라는 그 흔한 ‘위로’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파송이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염려’하십니다. ‘이리떼’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거짓과 폭력, 탐욕으로 가득 찬 무자비한 세상, 그러니까 초대교회가 처한 시대상황으로 유대교나 로마제국의 박해의 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잡아먹힐 확률 100%,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고, 그 사역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인정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명령에는 ‘끔찍한 금기(禁忌)’도 따릅니다. 그들은 ‘현장수업’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여분의 ‘소유’나 ‘수단’은 모두 잊어야 합니다.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닐 수 없습니다. 그런 소유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수단’을 상징하는 데, 제자들은 내일의 것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 시대의 가장 밑바닥 인생들 눈높이에 맞추어진 ‘금기’(禁忌)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 전파에 꼭 필요한 한 가지는 그런 외적인 소유나 수단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장황한 ‘인사치례’를 하느라 ‘가던 길’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필요한 말은 진심이 담긴 단지 한 마디입니다. 그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렇게 인사해야 합니다.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 루가 10:5

유다인들에게는 흔한 인사말입니다. ‘루가’는 어떤 의미로 예수께서 여기서 ‘평화’라는 말을 썼는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평화’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입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 최고의 ‘인사’와 ‘기원’으로 ‘샬롬’을 말합니다. ‘평안’, ‘평화’라고 주로 번역하기에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개인이 순간순간 경험하는 ‘심리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문제가 없음’이나 ‘갈등이 없음’ 말입니다. 물론 그런 차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 질서 속에서 순간순간 다스려지기를 원합니다. 순간순간 제 멋대로 일어나는 생각에 시달리지 않고, 감정도 혼란스럽지 않은 그런 ‘조화’로운 상태(고요, 안식, 안정, 믿음직함, 걱정 없음)를 갈망합니다. 실제로 명상이나 마음수련을 통해 이런 차원을 경험할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샬롬’은 순간순간 경험하는 개인의 내면의 상태(평안, 고요, 안식) 그 이상입니다. 구약성경은 ‘샬롬’을 ‘온전함(부분이 아닌 전체성, 조화, 질서), 건강의 결핍이 없는 안녕과 치유, 번영(축복, 풍요, 부(富), 최대한의 복지, 형통, 성공), 전쟁(갈등, 폭력)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안전, 우호적인 관계, 우정, 언약, 화목, 화해, 화합, 공감), 기쁨(만족, 행복), 정의, 선(善), 사랑, 구원(해방, 구속), 새로운 창조 등등…’ 개인의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 ‘샬롬’을 사용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내적 고요의 상태를 진정한 의미의 ‘샬롬’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샬롬’은 불완전한 역사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던진 ‘삶의 의미 물음’에 대한 ‘공동체적인 대답’입니다. 그들이 희망하던 ‘하느님의 모든 구원의 총체적 상징’이 바로 ‘샬롬’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스라엘이 충실히 지킬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 즉 왕이신 메시아(그리스도)가 오시는 ‘종말’에 완전한 ‘샬롬’(평화)이 ‘실현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렇듯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으며, 종말론적인 희망을 담은 총체적인 축복이 ‘샬롬’입니다. 개인의 실존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구원의 상태입니다.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을 포괄하는 완벽히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창조의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모든 창조 세계를 포괄하는 하나인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바로 ‘샬롬’(평화)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갖는 ‘평화’, 즉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통치라는 ‘새 시대의 도래(到來)’를 방문한 집에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전령’이자 ‘평화의 일꾼’입니다. 그 평화를 갈망하며 살아온 집은 ‘평화의 전령’인 제자들을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평화는 전달되고 받을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그들은 ‘평화를 받아들이는 집주인’에게(그 집도 나중에는 평화의 전령이 될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머무를 곳’을 의지해야 합니다. 좀 더 나은 대접을 위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녀서도 안 됩니다. 그들의 생활은 자신들을 ‘평화의 전령’으로 환영해 준 집주인에게 가족처럼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결코 비굴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떠돌이 거지가 아니라 ‘추수’에 종사하는 주님의 ‘일꾼들’(심부름꾼들)이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이 베푸는 ‘식탁의 교제’를 기쁘게 누리고 ‘평화’, 즉 ‘하느님 나라라는 새 시대의 도래(到來)’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그들을 환영해서 주는 ‘음식’을 먹고, 마귀에 시달리는 ‘병자들’을 고쳐주면서(9,17절) ‘하느님 나라’(통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9,11절). ‘병자’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스쎄네스’는 ‘힘없는, 나약한, 소망 없는’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동네 병자들에게 행한 그들의 치유는 기존의 사회 질서 속에서 소망 없이 살던 ‘사회적 약자’들이 힘(소망)을 회복하도록 도왔다는 뜻도 있습니다. ‘사회적 치유’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뿌리 깊은 ‘사회적 어둠’과 ‘차별’이 걷어진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입니다. ‘집’과 ‘동네’ 둘 다에 ‘음식’을 먹는 ‘식탁의 교제’가 ‘평화’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 성찬례가 평화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준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건네는 평화, 즉 ‘새 시대의 도래(到來)’를 받으려 하지 않는 동네와 그들을 배척하는 동네들도 만날 것입니다(10~11절). 다시 말해 그들이 ‘평화의 전령’임을 무시하는 이들의 거절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그들을 거절하는 동네를 향해서는 ‘길거리에 나가서’ 다음과 같은 말로 공개적으로 질책해야 합니다.

당신네 동네에서 묻은 발의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놓고 갑니다. – 루가 10:11a

‘발은 묻은 먼지를 털어놓고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땅’으로 여겼습니다. 이방인 지역으로 여행 갔다가 이스라엘 경계로 들어오면, ‘부정한 것들’을 거룩한 땅에 묻혀 오지 않으려고 발에서 먼지를 터는 일종의 정화예식을 행했습니다. ‘먼지조차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방인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는다는 몸짓이었습니다. 결국 동네를 향해 이 질책의 행동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그 동네 사람들이 거부했음을 두 사람의 증인이 보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거절하는 이들은 발에 묻은 먼지 같은 처지로 전락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동네를 이제는 ‘하느님의 심판’에 맡긴다는 공개적인 단절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더러 똑같이 하라는 뜻으로 새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동네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이겠지요.

하지만 ‘기쁜 약속’도 있습니다. 제자들만 ‘평화’, 즉 ‘하느님 나라라는 새 시대의 도래(到來)’를 위해 파송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어 방문하시고(사제의 심방도 사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가십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현장에 참석하십니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대화 때마다 소리 없는 소리로 말씀하시며 듣는 분으로 함께 하십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거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실 것입니다(루가 2:34).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가신다는 약속이 없다고요? 다시 한 번 본문을 잘 읽어보십시오. 아래의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 루가 10:16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평화, 즉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참된 기쁨, 평화, 희망, 능력이라고 우리가 이웃에게 선포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우리의 이웃에게 주십니다. 만약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선포를 듣는다면 그들은 그 순간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이웃이 듣지 않고 배척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목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해야할 메시지를 갖고 파송된 심부름꾼들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두시오.”(9,11절) 그들이 주님께 받은 명령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증명하는 일 말고 그들이 해야 할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2독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도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일이 그가 전할 모든 것이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 갈라 6:14

물론 기쁨의 소식인 ‘평화’, 즉 ‘하느님 나라라는 새 시대의 도래(到來)’를 거절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나라, 통치)’이라는 ‘새 시대의 도래(到來)’를 기쁘게 선포하라는 ‘메시지’가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무시한다면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파송하신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목표는 성공만을 지향하는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파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모든 이들이 돌아서도록 만들고 싶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목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의 성공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해 가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전하고, 우리 삶에서 일구어가는 일,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일입니다.

일흔두 제자는 낯빛이 변해서 돌아왔습니다.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 루가 10:17

다른 보고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임무 수행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루가’는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기쁨에 넘쳐 돌아왔다고 묘사할 뿐입니다. 그들은 보고는 간결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어둠의 세력을 상징하는 ‘마귀들’까지 복종시켰다는 사실을 통해 과연 ‘주님의 이름’이 ‘복음의 능력’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이 찬미한 것처럼, 예수님이 영원한 힘의 통치자,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심이 드러났습니다. 처음 파송될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걸어가시어 방문하시고, 함께 현장에 참석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에게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고, 치유하면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점차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을 파송하시면서 그 이름의 능력과 권세까지 이미 주셨음에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 백성의 추수를 위해 나섰던 그들의 ‘현장수업’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현장수업’의 성과를 인정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루가 10:18

세상에! 예수님의 염려도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파송된 제자들은 잘 해냈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마귀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뿌리 깊은 사회적 차별이 걷어진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가 더 확장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방문하여 ‘식탁의 교제’를 펼치는 곳마다 나눔과 섬김의 하느님 나라가 더 확장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복음의 일꾼들을 통해 확장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원수인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 루가 10:19

‘뱀’, ‘전갈’, ‘원수’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알아듣고서 괜히 위험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단어는 ‘사탄의 명령을 따르는 세력들’을 나타냅니다(창세 3:1-15, 시편 91:13; 2고린 11:3; 묵시 9:3). 따라서 이 약속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害)하려는 ‘악한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주어졌다는 강조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까? 교회사는 무엇이 진실이라고 증언합니까? 정말 그 약속의 말씀대로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장 <사도행전>만 보아도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색해집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증언하다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사도 7:54~60). ‘베드로’와 ‘바울로’ 뿐 아니라 일흔두 제자는 ‘해’(害)를 받았고, 그들은 비참한 최후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로마 박해시절에 순교했다고 교회사는 전합니다. 악한 세력을 물리치거나 ‘원수의 힘’을 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에 지배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고 테러를 당하며 순교하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수께서 하신 능력과 권세의 약속은 너무나 공허하게 들립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약속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어째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 약속 하신 것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우리가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여기에는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한 ‘그 무언가’가 있는 셈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첫 번째 수난 예고’ 때 이미 당신을 따르는 일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 뿐 아니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루가 9:23~24). 또 <루가복음> 후반부에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박해와 투옥과 고문과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루가 21:12,16). 그런데 이 예언 후에도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가 21:18). 자기모순, 자가당착처럼 들리는 말씀들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습니까?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란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은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본질인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영원’을 차지할 ‘새 몸’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루가 10:20

예수님은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할 일이 무엇인지를 교정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마귀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복종시켰다고 해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올바름’(義)을 획득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마태 7:22~23).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자신의 ‘공로’나 ‘자기 의’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들의 ‘의’(義)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1독서 <이사야>에서 들었듯이 예루살렘의 회복과 구원 번영, 그리고 하느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축복과 영광은 그들의 행위나 공로에 기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느님이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총에 기반 할 것입니다. 제자들도 은총의 주님 덕택에 자신들의 구원이 하늘에 보장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와 ‘구원’도 전적으로 ‘은총의 주님’께 달려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 기록하신 그 은총에 감사하여 주님께서 완성해 가시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이루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도록 우리를 세례를 통해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기시어 하느님 나라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매주일 ‘한 말씀’의 은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우시고,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영혼을 살찌우십니다. 거짓과 폭력, 탐욕으로 가득 찬 무자비한 세상, 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불안한 인생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도록 ‘강복(降福)’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나누어주십니다. 서로의 손을 붙잡게 하시어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생일대의 ‘사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 즉 최고의 ‘선’(善) 행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십자가 복음은 구원을 얻는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전도’나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신부님, 전도(선교)하란 말씀 좀 그만하세요. 부담스럽게 자꾸 그런 말씀으로 압박하지 마세요! 우리 감사성찬례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라고 항변합니다. 또 성공회로 전입하신 분들 중에도 “신부님, 성공회 교회에 나오면 그런 말씀을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전례가 좋아서 왔더니만….”라고 항변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유감스럽게도 제가 만들어낸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왔습니다. 전례가 아름다워서 간혹 성공회는 ‘전례공동체’라는 말에 잠깐 정신이 팔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공회는 전례공동체에 방점이 찍히기보다는 ‘선교공동체’입니다. 성당은 아름다운 전례에 사람들을 붙잡아 두려는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희미해지면 결국 성당은 보기에 아름다운 전례가 가미된 자신들만의 ‘사교장’으로 변질됩니다.

또 청년 중에는 이렇게 말씀하는 이도 있습니다. “신부님,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손에 들고 있는 게 뭐냐고? 제 생각으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서로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사용하는 시대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진정한 관계’에 늘 목말라합니다. 물론 SNS를 통한 복음전파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린 양’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떼’처럼 행동하는 신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비난의 대상이 되다 보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무관심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더욱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한 번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 이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란 말씀의 성취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재밌는 볼거리들’은 하느님(다른 사람들)과의 진정한 관계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가기도 합니다. 교회는 지금 그런 과학기술의 진보가 만들어낸 ‘가짜 복음’에 맞서 십자가가 만들어낸 ‘참된 복음’을 가지고 경쟁하는 중입니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약속하는 ‘가짜 평화’, 즉 ‘가상 시대의 도래(到來)’에 맞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참된 평화’, 즉 ‘서로가 마음으로 이어지는 진짜 세상의 도래(到來)’를 가지고 경쟁하는 중입니다.

사실 교회는 그 경쟁들에서 늘 이기고 싶고, 또 우리는 전도에 늘 성공해야 한다는 괜한 압박감을 갖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행해야 할 ‘메시지’를 주시면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압박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우리를 파송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복음의 메시지’에 담긴 ‘평화’의 부르심에 응답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화’의 부르심에 마음을 열고 우리를 받아들일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낼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어제까지는 아니었어도 오늘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십자가 복음’에 반응할지, ‘새 시대의 도래(到來)’에 반응할 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려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을 현혹하는 ‘가짜 복음’이나, ‘가짜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 ‘참된 평화’를 전하도록 파송됩니다. 사람을 점점 고립시키고 소외시키는 ‘가상 시대’가 아니라 사람들과 하느님을 서로 이어주는 ‘진정한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도록 파송됩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하는 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사랑, 기쁨, 평화의 씨앗들은(갈라 5:22~23) 저절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우리의 믿음을 나누는 만큼 우리 안에서 커져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함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어머니가 젖먹이를 돌보시듯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일하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기 의(義)’를 세우려는 율법준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자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그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그 무엇도 우리의 ‘참 생명’을 ‘해’(害)할 수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을 향하여 살아갑시다. 오늘도 ‘주님의 이름’과 함께 평화가 필요한 자리에 우뚝 섭시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일에 헌신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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