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30. 연중1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 영혼에 생기를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어 주님을 찾고 사랑하게 하시며, 완전한 자유를 주시는 주님을 더욱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열왕상 19:15-16,19-21
  • 시편 – 16
  • 2독서 – 갈라 5:1,13-25
  • 복음서 – 루가 9:51-62

연중 1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주님,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입니다.

성공회는 ‘공동체적인 신앙과 수행’을 중요시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새 계약에 참여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가르침에 근거합니다(1고린 12:27; 에페 1:15~23; 골로 1:18; 1베드 2:9~10). 성공회는 그 공동체성을 ‘감사성찬례’를 통해 함께 표현하고 확인합니다. 정말이지 성공회는 ‘감사성찬례’를 중심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전례(수행)공동체’입니다.

감사성찬례는 크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됩니다. ‘말씀과 성찬 전례’의 균형을 통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새 이스라엘)로 불러주신(교회) 그 크신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온 몸으로’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전례독서>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되새깁니다. 구원 받은 하느님의 백성은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 선교를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교훈 받습니다. 특히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 ‘지속적’으로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사랑의 성사’를 거행(擧行)하여 ‘생명의 원리’에 반하여 살아 온 ‘죄’에 대한 ‘용서’를 ‘지속적’으로 받습니다. ‘사랑의 성사’를 거행(擧行)하여 그리스도와 우리의 ‘일치’를 ‘지속적’으로 ‘체험’합니다. ‘사랑의 성사’를 거행(擧行)하여 서로 다르나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지체로 부름 받은 ‘하나 됨’을 ‘지속적’으로 ‘강화’합니다. ‘사랑의 성사’를 거행(擧行)하여 ‘영생’을 간직한 이들이 누리는 ‘하늘의 잔치’를 지금 여기서부터 미리 맛보도록 ‘지속적’으로 ‘인도’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거룩한 공동체’, 그 사랑과 구원(하느님 나라)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은 생명공동체’임을 명백히 드러내고, ‘지속적’으로 인도하는 감사성찬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려지는 감사성찬례는 성공회 신자들에게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는 감사성찬례를 참되게 봉헌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삶을 성찰하고 정성껏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감사성찬례의 ‘원형’(原形)인 ‘성체성사’는 애당초 삼위일체 하느님을 공경하여 바치는 ‘경신(敬神)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감사성찬례는 분명 예수 당시의 것이 아닙니다. 후대 교회 역사의 구원관과 문화적이고 전례적인 작업이 더해지고 조직화되어서 ‘경신(敬神)행위’로 승화된 전통의 산물입니다. 이 일에 대표적으로 기여한 것이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시 한 소위, ‘니케아신경’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하느님을 공경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바치는 경신(敬神)행위’로 세웠다기보다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향하여’, 남겨질 ‘제자들을 위하여’(그들의 전도를 통해 믿게 될 우리까지 포함하여) 세우신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을 한 마음, 한 몸으로 묶어주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제자들을 영원토록 자신과 하나로 결속시키려는 새 계약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가 떠나시더라도 지극히 사랑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상기’시키려고 일상의 흔한 사물들(빵과 포도주)을 통해 세우신 ‘최후의 한 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향해 드려지는 경신(敬神)행위’가 아니라 명백히 ‘인간들을 위한(향한) 사랑과 섬김의 행위’였습니다.

사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높이는 어떤 전례문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나를 예배하라”고 결코 요청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경배의 대상’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마르 10:18; 요한 4:21~24). 오히려 그런 요청은 ‘악마’가 했습니다(마태 4:9; 루가 4:7). 대신 오늘 복음이야기에서도 들었듯이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요청하셨습니다(마르 1:16~20; 마태 4:18~22; 9:9; 19:21; 루가 5:27~28; 요한 1:43; 12:26).

그런데도 우리가 자주 빠지는 함정은 ‘예배하기’(감사성찬례 참여하기)가 ‘예수 따라 살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이 그토록 환멸 했던 ‘싸구려 은혜’에 빠져 삽니다. ‘일상’에서 행동으로는 ‘예수 따라 살기’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예수 추종(追從)’인지에 대해 성당 안에 모여 토론만 장황하게 벌인다는 점입니다. 일상에서 ‘행동’으로는 ‘예수 따라 살기’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개혁하는 것이 전례를 아름답게 하는 일인지에 대해 그럴듯한 ‘전례상식’을 늘어놓는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를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종교심’에 빠져 있지, ‘예수’를 따라 올바른 삶을 살려는 진정한 ‘신앙수행’(信仰修行)은 약하다는 점입니다. 정말이지 믿음이란 자기 인생에서 발견한 소중한 것(예수 보화)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태도임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교단들로 분열되었습니다. 여전히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예배 방식과 교리를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서로를 정죄하기도 하고 이단으로 파문하기도 합니다. 말이 좋아 ‘다양성’이지 속내는 ‘음흉한 이권’에 따른 분열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처럼 교단 분열에 예수를 몸으로 따라 살기보다는 입술로 토론만 장황하게 벌여온 폐해들이 자리한다면 지나친 말씀일까요? 세상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것 역시 ‘예수 따라 살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믿기’에 열중해 있기 때문이라면 잘못된 진단일까요?

진정으로 우리가 “나를 따라오너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그리스도인을 부끄럽게 해 온 분열과 다툼은 그치고 ‘일치’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의 ‘제도적 교회’로 통합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 ‘하느님의 자녀이자 한 가족’임을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분명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지고 이어져온 성교회들이지만 그 어떤 제도적 교회도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는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성찬례는 중요합니다. 우리와 하느님을 ‘결합’시키기에 분명 중요합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예수 따라 살기’가 소홀히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정신’에 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 그리스도인인가는 ‘감사성찬례’를 드리는 모습이나 ‘신경고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행동’으로 ‘예수 따라 살기’를 통해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 예수의 정신에 부합합니다. 감사성찬례의 진정한 정신도 이것을 향하고 있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강복을 받아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파송됩니다.

더욱이 ‘예수 따라 살기’는 머리나 입술로 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따라 살기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고, ‘손과 발’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진정으로 향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장애물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예수님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면 세상은 벌써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예수 따라 살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공로’를 세우려는 신앙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도 아닙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예수의 뒤를 따라 산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한 배를 타고 계신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실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그대로 따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믿는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말’(전례문의 용어나 신경의 글귀)로써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이 ‘아픈 이들과 우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행동’이었다고 기억한다면, 그대로 따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믿는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말’(아름다운 성가)보다는 ‘현장에서의 실천’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이 ‘악과 불의, 거짓과 폭력, 차별과 인권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기억한다면, 그대로 따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믿는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말잔치’(미사여구美辭麗句로 가득 찬 기도서)가 아니라 ‘연대하는 행동’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우리에 앞서 이미 그런 곳으로 가셨고, 그런 삶을 사셨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길’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 따라 살기’의 올바른 방법에 대해 더 이상 토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따라 살기’에 있어서 좀 더 쉬운 길, 어떤 특별한 길을 찾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길이란 없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 앞서 가신 길과는 상관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길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따라오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미 교회(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되어 있고, 교회인 우리는 불러주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물론 예수를 따라가는 걸음은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나중에’, ‘다음에’라고 이러저런 ‘핑계’나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지금 당장 예수 따라 살기로 나아갈 것입니까? 어떤 마음으로, 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까? <전례독서>를 통해 안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독서 <열왕기상>은 하느님께서 예언자 엘리야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후에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5~16절)는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새로운 질서를 세우도록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경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는 ‘가르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싸워 위대한 승리를 경험했습니다(열왕상 18:20~40). 하지만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박해를 피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달아났습니다(열왕상 19:1~8). 호렙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시나이 산’입니다. 그는 거기 있는 동굴에서 밤을 지내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믿음을 잃고 신세한탄이나 하는 ‘엘리야’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엘리야는 하자엘을 기름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예후를 기름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며, ‘엘리사’(이름의 뜻: 하느님께서 구원하셨다)를 기름 부어 자신의 뒤를 잇는 예언자로 세워야 합니다. 이 명령은 후대에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 때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열왕하 8:11~15; 9:1~6; 2:15).

후반부(19~21절)는 엘리야가 ‘하느님의 명령대로’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장면’입니다. ‘엘리사’는 황소 열두 쌍에 겨리를 지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부자 집 출신임을 말해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쟁기’에 비해 ‘황소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입니다. 그 ‘열두 쌍’은 아마도 문자 그대로를 넘어서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후 그들은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유다와 시므온이라는 2개 지파 연합의 ‘남왕국 유다’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한 이유는 시므온 지파가 땅을 분배받을 때 유다 지파 지역 안에 있는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입니다(여호 19:1). 세월이 흘러 시므온 지파는 독자성을 잃고 유다 지파에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질서’를 상징하는 ‘엘리사’가 그 ‘열두 쌍’에 겨리를 지워 밭을 갈았다는 것은 ‘다윗의 후계자’ 밑에서 언젠가 이스라엘이 다시 한 번 통일될 것이라는 희망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 다윗의 후계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새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새 계약 백성인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엘리야는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다가가 자기 ‘겉옷’을 걸쳐줍니다. 이 행동은 아주 극적(劇的)입니다. ‘겉옷’은 ‘예언자 권위’의 상징입니다. 나중에 그 ‘겉옷’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명성을 잇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위대한 예언자’라는 ‘표시’가 됩니다(열왕하 2:8,13~15). 따라서 “겉옷을 그에게 걸쳐준 행동”은 “나 엘리야가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너를 하느님 일에 동참하도록 부른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역할’, 즉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기억해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은 엘리야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부르심을 ‘당장’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엘리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엘리사는 말 한마디 듣지 않았는데도 엘리야의 그 ‘극적인 행동’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단 한 가지’만 빼고 주저 없이 응답합니다. 그 한 가지는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부자 집에 살던 그가 ‘부르심에 응답’한 일은 ‘이득’에 밝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재산상의 큰 손실’을 뜻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엘리야는 그 요청을 허락합니다. 기억할 것은 그 ‘허락’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그것을 허락해도 좋다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황소’를 잡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쟁기’를 부수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신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청산했다’는 뜻입니다. ‘새롭고 숭고한 가치’에 충실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를 따라나섰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시간은 이미 많이 ‘지체’(遲滯)되었습니다.

시편은 <16>입니다. 유명한 <시편 23편>처럼,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마치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박해’를 피해 달아나던 ‘엘리야의 기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느님과의 교제가 주는 영적인 유익을 깊이 묵상한 후 ‘깊은 신뢰’ 속에서 하느님의 보호를 간청합니다(1절). 하느님만이 자신의 주님이시고 행복이라 선언합니다(2절). 그가 그렇게 간청하고 선언하는 이유가 이어집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이 세상은 ‘거짓 신들’(우상)과 그들을 섬기는 이들로 뒤섞여 있습니다(3절). 그러나 자신은 ‘엘리야처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4절) 오로지 하느님께만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5-7절). 하느님은 그렇게 충성하는 이들에게 ‘엘리야처럼’ 삶의 길을 몸소 가르쳐주시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십니다(8-11절).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는 각각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설교에 사용했습니다(사도 2:27; 13:35).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시인이 살아간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돈을, 권력을, 명예를 ‘신’(神)으로, ‘최고 가치’로 떠받들고 삽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입증하라는 요청을 오늘 시편을 통해 듣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또 무엇을 위해서 살 것입니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 ‘오늘’ 사랑과 평화를 일구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 ‘오늘’ 나눔을 실천하는 삶은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행복의 근원이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죽음’(종말)도 끝낼 수 없는 주님과의 영원한 사귐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이들임은 말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드러납니다.

2독서 <갈라디아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위한 교훈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사도 바울로는 명백히 가르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기초는 ‘성령’이라고 명백히 가르칩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하는가를 보면 우리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가 명백히 드러납니다.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면서도 현실에서 ‘육체의 욕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여전히 ‘육정의 노예’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성령의 사람은 관계에서 사랑을, 기쁨을, 평화를, 인내를, 친절을, 선행을, 진실을, 온유를, 절제를 선택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오시어 완성하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토록 복락을 누릴 이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멸망할 육체의 사람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거슬러 단지 자신의 육정을 만족시키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우리의 선택한 ‘가치의 반영’입니다.

<복음서>는 ‘비장미’(悲壯美)가 흐르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하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역사’(하느님 나라의 새 질서)를 성취하시기 위해 ‘굳은 결의’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旅程)을 시작하신 예수님과 ‘굳은 결의’로 그런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음으로, 또 무엇을 위해서 살았는지를 명백히 교훈합니다. 두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배경에 흐르는 ‘굳은 결의’가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전반부(51~55절)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선교 사역의 ‘전환’을 시작하신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들어가려 하실 때 발생한 사건입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어 모든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 선교활동을 하십니다(루가 4:14~15). 그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집중하시기로 ‘마음에 작정’하십니다.

‘하늘에 오르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날렘프시스’는 ‘승천’, ‘들어 올림’을 뜻하고, ‘가까워지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심플레루’는 ‘완전히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또 ‘마음을 정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프로소폰(얼굴) 에스테리센(세우다, 굳세게 하다)’은 문자적으로는 ‘얼굴을 굳게 세우다’는 뜻으로 ‘어떤 결심으로 얼굴에 단호함이 나타난 표정’을 보여줍니다(이사 50:6~7). 결국 이 구절은 ‘하늘에 오르실 날이 완전히 다 채워져서 예루살렘에 집중하시기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신 예수님의 차돌 같은 얼굴’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이사 50:6~7).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해 성취하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사랑의 길, 새 역사의 길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굳은 결의’로 예루살렘으로의 본격적인 여정(旅程)을 시작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펼쳐 오신 ‘하느님 나라 행보’(行步)가 오늘 복음이야기서부터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셈입니다. 사실 <루가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 여정(旅程)을 제법 길게 배정했습니다(9:51~19:27). 루가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걸으신 길의 ‘도착점’이자 교회가 땅 끝까지 ‘예수의 길’(구원의 길)을 이어놓는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준비하도록 ‘심부름꾼들’을 당신의 굳센 얼굴에 앞서 보내십니다. ‘심부름꾼’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앙겔로스’는 ‘천사’, ‘사자’(使者, messenger)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앞서 보냄 받은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준비하러 갑니다(루가 7:27; 말라 3:1). 그들은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이 살던 한 마을’로 들어가 ‘메신저’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중인데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준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던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이는 일을 거절합니다.

사실 ‘심부름꾼들이 택한 행로’는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는 갈릴래아와 유다 사이에 위치하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려면 당연히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갈릴래아나 유다로 여행하는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땅’에 발을 들여 놓기보다는 ‘요르단 강 동쪽 베레아’를 통해 서로 왕래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처럼 ‘반목’하며 ‘원수’로 지내왔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가졌던 이유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배경들이 깔려 있습니다.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의 사후, 통일왕정이던 이스라엘은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중심의 ‘남왕국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5세’는 서진(西進) 정책을 펼쳐서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열왕하 17:1~6), 그 땅에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열왕하 17:24~41).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시작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 남왕국 유다에 살던 백성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을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면서 ‘냉대’했습니다. 민족적으로 ‘혼혈’이라는 차별입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후에도 귀향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배척’했습니다(에즈 4:2~3). 어떤 유다인도 사마리아인과 결혼 할 수 없었습니다(에즈 9:1~10:17).

종교적으로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 취급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경전을 가지고 있었고 야훼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이 아니라(신명 12:5) ‘그리짐 산’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배장소로 여겼습니다(요한 4:20). 유대교 신앙에 필수적인 ‘예루살렘’에 사마리아인들은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자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적대감은 예수님 당시까지 8세기 이상 이어져 왔습니다.

이런 적대 관계 때문에 ‘사마리아’에 있던 ‘그 마을 사람들’은 유다인인 예수님의 ‘심부름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익히 예수님의 ‘명성’(名聲)을 알고 있었지만(요한 4:39~4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나 그곳으로 순례하는 유다인들이라면 누구하고도 관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랜 ‘편견’과 ‘증오’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적개심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입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예수께서 가시는 그 길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길이자, 자신들이 사는 땅이 이제 곧 복음화의 첫 지역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사도 1:8).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신앙생활은 누군가(남편, 아내, 자녀, 부모, 교우, 친구, 이웃)를 미워하기보다 이해하려는 길입니다. 그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미움의 감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부름꾼들’이 돌아와 상황보고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성미 급한 두 제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들은 ‘천둥의 아들’(보아네르게스)이란 별명을 가진 야고보와 요한입니다(마르 3:17). 마을 사람들을 파괴하려는 듯 그들은 작정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 루가 9:54

그들이 내뱉은 말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하지야’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열왕하 1:1~16). 예언자 ‘엘리야’는 ‘아하지야’ 왕의 명령으로 자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불살라버립니다(열왕하 1:9~12). 그 ‘폭력적인 행동’은(비록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왕의 호위병들이라 할지라도) 분명 하느님이 허락하신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두려움’에 빠진 엘리야가 그런 폭력을 저지르지 않도록 좀 더 일찍 개입했어야 했습니다(열왕하 1:15).

이 구약의 사건을 기억해 낸 두 제자는 지금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탁월한 스승’을 배척한(홀대한) 것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을 배척한 것’에 불같이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자신들이 마치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할 수 있는 예언자 엘리야라도 되는 냥(참고, 열왕상 18:20~40), 자신들이 그 마을 사람들을 ‘다스릴 특권’이라도 있는 냥 주제넘게 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님은 ‘원수 맺는 것’에서 출발한 그들의 그런 폭력적인 성급함을 꾸짖으십니다.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원문대로 하자면 ‘돌아서서 정색(正色)하고 그들을 향해 호되게 책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심각하게 반응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로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항상 빛납니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 갈라 5:22

이처럼 두 제자는 예수님과 자신들을 오해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자’는 야훼 신앙에서 벗어난 이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하느님과 다시 연결시키는) 선포하는 ‘보냄 받은 자’(메신저), ‘안내자’의 상징입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가르멜 산’에서 이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공관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라고 선포한 이유도(마태 11:14; 마르 9:11-13; 루가 7:27) 그가 ‘보냄 받은 자’, ‘안내자’, ‘심부름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이신 아버지를 보여주도록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으신 분’이십니다(요한 5:23~24,30,37;6:38;7:29). 그렇다면 제자로서 부름 받은 그들의 사명 역시 정죄나 저주나 폭력이나 파괴가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아이러니’(irony)한 사람 엘리야처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 폭력’을 행사한 그런 식의 예언자가 결코 아닙니다. 엘리야가 비교될 수 없는 ‘새롭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존경심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 ‘신적인 능력’을 동원하시는 그런 파괴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정죄나 심판이나 자기자랑이 아니라 ‘사랑’과 ‘연민’과 ‘자기희생’을 통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어떤 경우든 ‘폭력’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라 ‘악마의 수단’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폭력을 행사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폭력을 당하신 분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불사르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성령의 불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불사르신 그 일은 누구도 하지 못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유다인과 외국인 사이에, 인간과 만물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신 길이었습니다(에페 2:11~22). 생명 파괴에 맞서 생명을 살리는 일, 예수 따라 살기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명백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어쩌면 본래대로 ‘요르단 강 동쪽 베레아’를 통해 올라가시는 길을 택하셨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후반부(57~62절)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말씀하시는 단락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역사’(하느님 나라의 새 질서)를 성취하시기 위해 ‘굳은 결의’로 나서신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도 ‘굳은 결심’으로 ‘충성하라’는 요청입니다. 한마디로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부른 1독서가 이 후반부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계속해서 길을 가십니다.’ 그 때 몇 사람과 마주칩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충동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 루가 9:57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 루가 9:58

그의 충동적인 결단에 예수님은 ‘노숙자 생활’을 각오하라고 받아 치십니다. 이것도 일종의 ‘꾸지람’입니다. 아마 그가 보기에 예수와 동행하는 제자들의 삶이 괜찮아 보였나 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현실을 보장’해 줄 것 같은 메시아로 보였나 봅니다. 그는 잘못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찾고 있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의 초대는 결코 ‘현재의 물질적(경제적) 안락’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 루가 9:59

그러자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부모(어른) 공경’은 자식(젊은 이)의 도리입니다(출애 20:12). 당시 전통으로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장례를 잘 치러드리는 일은 합당한 일입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과거부터 내려온 전통’을 상징합니다. 그의 요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 루가 9:60

세상에!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문자 그대로 들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이 우리 삶에서 그만큼 ‘최우선의 가치’를 가진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 – 루가 9:61

식구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과거의 현대적 산물’입니다. 다시 말해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금은 선조들이 된 ‘오랜 과거와 연결된 고리의 일부’이자 다가올 세대에게 ‘과거로 존재할 고리의 일부’입니다. 또한 식구들은 ‘오래된 과거를 자신과 공유하는 또 다른 나들’입니다. 1독서에서 본 것처럼, 그런 의미를 갖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려는 요청은 분명 타당하고 중요하게 들립니다. 엘리야도 엘리사의 그 같은 요청을 허락했습니다. 엘리사는 분명 뒤돌아보았고, 엘리야 역시 그가 뒤돌아보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를 돌아보며 지체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 루가 9:62

예수님은 오늘의 우리가 듣기에도 귀에 거슬리는 응답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엘리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엘리야와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던 새로움을, 궁극적인 추종을 요청하실 수 있으십니다. 더욱이 예수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종말론적입니다. 일단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우리 자신을 헌신했다면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며 거기에 붙잡혀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내일’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하느님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따라 나섰습니다. 세상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과거에 붙잡아 두고 정체성을 정의하려고 합니다.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전통적인 ‘관습’에 순종하게 하면서 ‘현재에 안주’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의해서 정의됩니다.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미래를 향하여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나섭니다. 한 발 한 발, 또 한 발 그렇게 우리 손을 잡아 이끄시는 예수와 함께 미래를 향해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갑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예수님과 엘리야를 대비시킵니다. 엘리야는 자기 마음대로 ‘불’을 내리는 ‘폭력’을 통해 자신을 잡으러 온 이들을 불살랐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허락하시거나 좋아하시는 일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청했으나 예수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엘리사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로 부름 받은 이가 ‘되돌아보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엘리야는 되고 야고보와 요한은 안 되며, 어째서 엘리사에게는 허락되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은 ‘엄격한’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제자가 아니라 자신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명확히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절대적 부르심 앞에서 “아버지의 장례부터 치르겠다.”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 소식을 전하는 것이 먼저야!”라며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따르겠다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며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과거’로 정의되는 그 어떤 일도 우리 삶의 앞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안락함도, ‘과거’로부터 이어오는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도, 심지어 ‘과거’로 상징되는 부모의 얼굴을 담고 ‘지금 여기’ 실존하는 나 자신의 행복도, ‘오랜 과거를 자신과 공유하는 또 다른 나들’인 가족들조차도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하느님 나라 앞에서는 ‘최우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자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미래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응답’이 최우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최우선으로 응답하고 나서는 ‘굳은 결의’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더욱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사마리아 사람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도,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러니’(irony)하게 들리지만 그 위대해 보이는 ‘엘리야’는 예수님이 꾸짖으신 ‘폭력’을 행한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사’ 역시 부모와 작별인사를 하러 지체(遲滯)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임을 스스로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황소 두 마리를 잡고 쟁기를 부수는 일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한 것처럼 보였어도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편견과 증오’를 가지고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편견과 증오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현실의 행복’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전통적인 과거의 가치’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도,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인 ‘가족’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리면서 자꾸 과거를 되돌아보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속에 여러분과 저의 얼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합니까?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나라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인생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실제로 바치시기 위해 차돌처럼 ‘얼굴빛을 굳게 세우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하느님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해 ‘마음을 정하시고’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구원의 역사’(하느님 나라)를 성취하러 ‘굳은 결의’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旅程)을 시작하십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 여정이 이룩해 낸 결과를 오늘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 갈라 5:1

우리의 ‘해방’과 ‘자유’는 저절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은총으로 선물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진노의 불’은 십자가에 퍼부어졌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원했던 그 ‘불’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내려졌습니다. 엘리야가 퍼부은 ‘저주와 심판의 불’은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내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에 허덕이는 우리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대신 파괴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녀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불사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셨습니다(요한 1:14). 머리 둘 곳조차 없었으면서도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셨습니다(루가 9:58). 만왕의 왕이신 분이 ‘여우’나 ‘새’ 보다도 자신을 더 낮추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가르치신 것처럼, 예수께서는 그 참혹한 십자가 고통을 앞두고서도 결코 되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반역한 저와 여러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생각’으로가 아니라,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십자가에서 ‘실제로’ 다 쏟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 모셨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부활’로써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유일한 분’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노숙자’에게는 영원한 ‘천국의 집’을, ‘고아들’에게는 신성한 가족인 ‘교회’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거룩한 식탁’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정죄나 저주나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기쁨’을, ‘평화’를, ‘해방’을, ‘자유’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거룩한 식탁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일주일을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여정’(旅程)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시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초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과 ‘육정이 빚어내는 일’ 속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초대해 주셨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랑의 왕 예수께서는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셨고, 해방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생명의 성령을 통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를 누리는 길로 지금도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분명 우리 혼자서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이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이 진실을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부디 이 진실을 깊이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온 몸으로 예수 따라 살기’를 실천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는 데 거룩한 도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일어서십시오. ‘해방’과 ‘자유’를 주신 주님이 앞서 가시니 다함께 따라 갑시다.

나를 따라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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