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23. 연중1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지혜와 힘을 주시어 모든 분열의 상처를 씻고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5:1-9
  • 시편 – 22:19-28
  • 2독서 – 갈라 3:23-29
  • 복음서 – 루가 8:26-39

연중 1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일을 널리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연중 12주일이자 민족의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교회는 해마다 6.25 한국전쟁 직전 주일을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 기록된 ‘군대 마귀 들린 사람’처럼, 우리 민족은 서로의 생명을 몇 번이고 죽이고도 남을 무기로 이 땅을 채우며 오래도록 파멸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던 마귀 들린 사람처럼, 전쟁의 위협을 늘 곁에 두고 살아온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파멸과 죽음의 길을 끝내고 화해와 일치라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주님께서 남과 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일을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 그런 새 날이 속히 도래하도록 기도합시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성령 하느님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 합시다.

앞으로 교회가 걸어갈 여정(旅程)은 ‘왕이신 그리스도주일’까지 ‘연중시기(ordinary time)’입니다. <기도서>의 주일감사성찬례 전례독서 안내를 보면 구약과 시편이 각각 둘씩 안내되고 있습니다. 처음 <기도서>를 사용하는 신자들은 좀 헛갈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런 배정인지는 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독서 <이사야>는 <제 3이사야>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제 2이사야(40장-55장), 제 3이사야(56장-66장)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시간 관계상 신학적인 면 중의 하나만 간략히 살펴보면, <제 1이사야>는 예루살렘(유다백성)의 죄에 대한 고발과 심판 선고가 지배적입니다. <제 2이사야>는 심판이 이미 과거의 일이 되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으로 전환되며, 이것이 <제 2이사야>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와 흥분, 희망과 위로, 낙관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제 3이사야>는 실망과 좌절,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의 분위기가 강합니다.

본문은 <제 3이사야>에 해당합니다. 시대 배경은 바빌론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후입니다. 귀국했지만 폐허로 남은 ‘시온’(예루살렘)을 보고 그들은 실망과 좌절을 겪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의 분열과 갈등까지 겪습니다. 그들을 향해 <제 3이사야>는 미래에 도래할 시온(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회복의 새 시대’를 예언합니다(이사 60:1~22; 61:1~11; 62:1~12; 65:17~25). 하느님께서 시온을 모든 민족 위에 높여주시는 ‘아름다운 구원의 새 시대’를 노래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이 옵니다(이사 65:17). 그 회복과 구원의 새 시대는 하느님이 몸소 자기 백성에게 ‘오시는 날’ 성취될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들’도 함께 예배하게 될 날이 옵니다(이사 56:1-8).

이런 시대 배경과 메시지를 갖는 <제 3이사야> 본문이 <복음서>의 배경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입니다.

나에게 빌지도 않던 자의 청까지도 나는 들어주었고, 나를 찾지도 않던 자 또한 만나주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하고 말해 주었다. – 이사 65:1

바로 이 구절이 오늘 <복음서>를 위한 ‘배경’(보충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 ‘게르게사 지방’에 찾아가시어 빌지도 않던 자의 청을 들어주었고, 찾지도 않던 자를 만나주었으며,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 곁에 있어주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는 복음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

시편은 <22>에서 발췌된 배정입니다. 전례독서의 시편은 항상 1독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응답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 사건, 즉 그 말씀에 보인 ‘반응’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지혜’와 ‘율법’이 그들의 생활에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갔는지를 시편은 보여줍니다. 그 말씀이 개인과 공동체의 상황에 맞는 생생한 ‘기도’로 녹아들어가 있음을 시편은 들려줍니다. 특별히 전례독서로서의 시편은 오늘의 우리에게 모든 상황이 기도로 바뀔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시편의 기도가 우리의 지정의(知情意)에도 스며들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시편 22편>은 우리가 성주간 전례에서 교송(交誦)한 찬미입니다. 성목요일 성찬제정 예식 후반 ‘제대보를 걷는 순서’에서 그리했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의 수난이야기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 시편 탄원(歎願)의 첫 마디를 기도로 인용하십니다(마태 27:46; 마르 15:34). 다른 구절들도 복음서의 수난이야기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성시로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전반부(1-21절) 중에서 1-2절, 6-8절, 18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중에 외치신 말씀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취됩니다. 후반부(22-31절)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하는 찬미로 마감됩니다(24절, 29절, 31절). 특히 예수님은 이 시편 마무리에서 언급하는 ‘구원’(부활)도 성취하셨습니다(26절, 참고 히브 2:10-12; 5:7-8). 이처럼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예언한 시편 22편입니다.

오늘 노래한 단락(19~28절)은 시편 150편 전체에서 ‘탄원’에 이은 ‘감사시(感謝詩)’가 나오는 유일한 부분입니다. 시인은 구원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와 아울러 자신이 곤경에서 ‘서원’(誓願)한 것을 이행하는 ‘감사 제사’를 드립니다(25절).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의 위대한 행위와 그 이름을 겨레들 앞에서, 즉 예배에 모인 ‘큰 회중’ 앞에서 선포합니다. 이 단락이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1독서 <이사야>에 대한 응답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이야기와도 ‘상응’(相應)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악령’이라는 사나운 짐승(개, 사자, 들소)에게 무참히 공격당하여 인간의 품위마저 잃어버린 모습이 십자가에 달려 수난하시는 예수님을 먼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시편 22:19~21).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병과 고통과 죄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이사 53:1~10). 우리 대신 ‘파괴’(죽임) 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더욱이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죽음의 권세 잡은 이(사탄, 오늘 복음이야기에서는 ‘군대’라는 이름의 악령)를 영원히 무장 해제시키셨고(골로 2:15), 부활로써 생명의 불멸과 지옥의 힘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골로 2:15). 그리하여 시인의 노래처럼 “만방을 다스리시는 왕권”이 주님께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시편 22:28; 필립 2:9~11; 골로 2:15).

2독서는 <갈라디아서>입니다. 부활절기 후에 다시 시작되는 ‘연중시기’ 2독서로 배정되는 서신은 항상 ‘계속 독서’(Semicontinuous)이기에 복음서 주제와의 연결이 희박합니다. 따라서 무리하게 다른 전례독서들과 동일한 주제로 통일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했다고 선포합니다. 먼저 그는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기에 더 이상 후견인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마귀 들려 고통당하는 사람’을 치유하시는 <루가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권능’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구원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 모두에 전해지는데 다소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는 여러분이 평행본문(마르 5:1-20; 마태 8:28-34)을 펼치고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는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은 ‘마귀 들려 고통을 겪는 사람’에 대한 묘사입니다(26-29절). 둘째 단락은 악령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30-33절). 셋째 단락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치유된(구원받은) 것을 본 ‘다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34-37절). 넷째 단락은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의 반응’입니다(38-39절).

첫 단락부터(26-29절) 차례로 보겠습니다. ‘루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게르게사 지방’이라고 전합니다. 그곳은 갈릴래아 호수 남동쪽(데카폴리스)에 위치합니다(마르 5:20; 7:31). 당시에는 헤롯대왕의 아들이자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인 필립보가 다스리던 땅입니다. 돼지를 많이 놓아기르던 곳이었기에 ‘이방인의 땅’(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그 지방으로 배를 타고 건너 가셨을 때 그 ‘동네’(도시, 수도)에서 나온 한 남자를 만나십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영혼은 ‘악령’과 집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육체’라는 집말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내면’은 ‘더러운 영’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마귀 들려’(마귀가 소유한, 마귀가 지배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평화’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도 잃어버린 채 무덤 사이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의사인 루가는 그의 형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옷을 걸치지 않고 집 없이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악령에게 붙잡혀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인 채 감시를 받았으나 번번이 그것을 부수어 버리고 마귀에게 몰려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던 것이다. – 루가 8:27b…29b

도대체 어떤 ‘가슴 아픈 사연(事緣)’이 있었기에 그리 된 것일까요? 복음서가 침묵하기에 알 수 없지만 ‘상상력’마저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때는 그도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가족들과 오손도손 살았습니다. 한때는 그도 사랑을, 연민을, 희망을, 우정을, 살가운 관계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생의 어느 한 시점, 하늘이 무너지는 큰 고통을 겪으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렸습니다. 전염병이든, 기근이든, 사고든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군대’라는 그의 이름처럼 전쟁으로 아내(딸)를 잃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일을 겪고서 어찌 사람이 맨 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간이 약이 되기는커녕 더 병들게 하는 아픔도 있는 법입니다.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감’(共感) 받지 못한 ‘정서’(情緖)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끝 모를 깊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언제부턴가 그에게서는 ‘이상행동’(트라우마)이 나타났습니다. 이전과 달리 난폭해졌으며, 집에 있을 때는 ‘자책’(自責)하며 몸에 상처를 내기도 했습니다.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큰일입니다.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동원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는 일이었습니다. 몸의 ‘구속’(拘束)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로부터 ‘격리’(단절)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구속’(拘束)으로 인해 그는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었으며, ‘소외’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유의 ‘구속’입니다. 이것은 ‘불행을 겪는 이들’을 대하는 세상의 대표적인 처리방식입니다. 세상은 불행한 이들의 자리를 정하고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차단시킵니다.

그런 손쉬운 해결책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으로 그는 번번이 ‘속박’(束縛)을 부수었습니다. 자신을 격리 수용시키지 말고 ‘공감’해 달라는 온 몸의 ‘저항’이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자유케 한 초자연적인 ‘힘’은 마귀가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짓 자유’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힘을 준 ‘마귀에게 몰려’(강제로 끌려) ‘광야’로 뛰쳐나갔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성령의 역사’를 이런 ‘악령의 역사’처럼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강제로 끌고 다니는’ ‘공포의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당신의 이끄심에 순종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악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마귀에게 몰려’(강제로 끌려) ‘광야’로 뛰쳐나갔다가 야생동물처럼 며칠을 지냅니다. 그런 후 ‘회귀본능’처럼 다시 동네 근처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를 잡아다 격리 수용시켰습니다. 이 일들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그의 육체와 정신은 통제 불능이 되었습니다. 그는 악령의 소유로 보일 정도로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몸을 운전하는 이는 누가 보아도 ‘악령’으로 보였습니다. 사실 악령은 인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우리 몸을 차지하기 위해 ‘성령’과 다툽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을 시기하기 때문에 공격하여 파괴시키길 원합니다.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잔악한 괴수처럼 만듦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손상’시키려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탄과 그 졸개들은 무장해제 되었지만(골로 2:15) ‘속임수’로써 인간들을 위협하고 두려움과 불신앙에 묶어둘 수는 있습니다.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그를 포기하고 내쫓았습니다. 내쫓긴 그의 최종 거주지는 ‘무덤들’ 사이였습니다. 다시 말해 마귀가 선물한 ‘거짓 자유’의 최종 형태는 살아있는 사람들로부터의 영원한 소외인 ‘무덤들’ 사이, 즉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마땅한 자리를 찾았다고, 동네에 평화가 찾아들었다고, 그를 수용하기에는 ‘공동묘지’야말로 제격이라고 좋아했습니다. 그 사람만이 아니라 온 도시가 총체적으로 미쳤습니다. 사실 가련한 이들과 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회 건강 수준의 척도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산비탈이나 바위벽을 뚫어서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유다인들 입장에서 무덤은 ‘더러운 영의 거주지’를 상징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린 채, 짐승처럼 ‘죽은 이들’ 사이에 거주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 근방에는 유다인들이 혐오하던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야기는 그의 형편이 얼마나 불행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그를 ‘마귀 들린 사람’, ‘미친 사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그를 마주하고 섰기 때문에 모든 것은 바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더러운 악령에 들렸든지 간에 예수께는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자석처럼 끌려나와 엎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자신을 예수께로 데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배할 힘이 없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더러운 악령은 그를 예수께로 데려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러운 악령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께는 그가 ‘구원받아야 할 사람’, ‘치유되어야 할 사람’, ‘존재해야 할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육체와 정신이 통제 불능이고, 무덤 사이에 거하며,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처지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는 ‘살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미 그 더러운 악령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시며 지배권을 행사하셨습니다. 그는 엎드려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악령의 반응입니다. 그의 머릿속에 무수한 목소리들과 이름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목소리와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탁월한 선택처럼 들리지만 예수님의 사역에 ‘저항’하려는 악령의 속임 수법입니다. 그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분의 정확한 ‘이름’(정체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올바른 지식’입니다. 고대 근동의 민간신앙(일종의 미신)에 따르면 상대방의 ‘정확한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다면’ 자신이 상대방을 ‘지배’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더러운 악령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이름을 ‘정확히’ 부른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악령은 ‘회심(會心)의 필살기’를 날린 셈입니다. 고대 근동의 민간신앙이 진실이라면 여기서 예수님은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 앉아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며 빙긋이 웃으십니다.

악령이 무서워 떨고 있다는 것이 눈길을 피하는 그를 통해 드러납니다(참고, 야고 2:19). 고대 민간신앙이 틀린 셈입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부르는 것이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분명 악령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나 당대 종교지도자들도 아직 갖지 못한 지식이었습니다(참고, 루가 9:20). 하지만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동반된 지식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할 신학지식이나 성경지식들을 자랑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이렇게 통사정(通事情)을 합니다.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악령의 말인지 그 남자의 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둘 다의 말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악령의 말이라면 자신이 머물던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남자의 말이라면 정말 ‘아니러니’(irony)한 항변입니다. 그는 악령에게 오랫동안 시달려 왔습니다. 앞에 계신 예수님은 그에게 참 자유를 주실 분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악령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도 자신을 괴롭힐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둘째 단락의 시작입니다(30-33절). 악령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30-33절). 먼저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물어 보십니다. 이것도 일종의 ‘아이러니’(irony)입니다. 악령은 예수님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보고 불렀는데, 예수님은 그의 정확한 정체를 몰라서 물어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의 이름을 물으신 것일까요? 악령일까요? 아니면 그 남자의 이름일까요? 오랫동안 악령에 지배당했으니 그 남자의 정체성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것이 악령이 먼저 대답하는 이유입니다.

악령은 그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고대 근동의 민간신앙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를 ‘지배할 권위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에덴에 살던 아담이 다른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표현이 바로 그 뜻입니다(창세 2:19). 그러니까 악령은 자신에게 그 남자에 대한 지배권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상대방의 정확한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다면 그를 ‘지배’할 힘의 우위를 갖는다는 민간신앙(일종의 미신)도 있었습니다. 그 신앙대로 하자면 악령은 자신의 이름을 밝혀서는 안 됩니다. 노출했다가는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선히 자신들의 이름을 노출합니다.

그는 자신을 ‘군대’라고 이름 짓습니다. 군대라는 말은 그리스어 ‘레기온’(Legion)을 번역했습니다. 그 단어는 300~700명의 ‘기병’을 포함하여 3,000~6,000명 정도의 ‘보병’으로 구성된 ‘로마 1개 군단’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만큼 많은 마귀들의 힘이 그 남자를 사로잡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군대’도 그의 이름이 아닌 셈입니다. 마귀는 자기를 크게 보이려고 또 속임수를 쓰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얼버무리고 예수님께 겁을 주고 위협하려는 속임수였습니다. 군단처럼 자신들이 조직적이고, 통일되어 있으며,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시도는 안 통합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의 정확한 이름까지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이름도 끝까지 노출시키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크게 보이게 하는 숫자놀음까지 벌였지만 다 허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시편에서 노래하듯이, 예수께 만방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권이 있기 때문입니다(시편 22:28).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이름을 지어 주시는 ‘진정한 왕’은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이사 40:25~26).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악령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권세를 갖고 계심을 ‘처음부터’ 증명하셨습니다. 악령과의 대화에서 얻게 된 이름과 상관없이 이미 그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창조주께서 하시는 명령에 감히 피조물 따위가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고대근동의 그런 민간신앙, 즉 ‘미신’을 훨씬 능가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처넣지 말아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그 기세등등함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옥’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아비소스’(ἄβυσσος, 영어로는 Abyss)입니다. 이 말은 부정접두사 아(ἄ)와 ‘바닥’(bottom)을 뜻하는 ‘뷔소스’(βυσσος)의 합성어입니다. ‘밑바닥이 없다’는 뜻으로 ‘끝없이 깊은 지옥 구덩이(무저갱), 심연(深淵, 깊은 바다), 지하세계’로도 번역됩니다. <요한묵시록>은 ‘끝없이 깊은 구렁’인 ‘지옥’을 사탄과 그 졸개들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가두어두는 장소로 묘사합니다(묵시 9:1; 20:1~3).

마귀들은 그 ‘지옥’에 가기 싫다고 ‘애원’합니다. 그러니까 마귀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상태를 가장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마귀들이 최종적으로 ‘지옥’에 붙잡혀 들어가기 전까지 자신들의 거처를 찾아 땅 여기저기를 배회한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마귀들이 선호하는 거처는 ‘무덤’, ‘쓰레기가 있는 곳’이고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거처라고 믿었습니다. 마귀들의 이 같은 애원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악령의 세력을 능가하시는 힘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그들을 ‘지옥’에 가둘 권세를 갖고 계심을 명백히 알게 됩니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우글거리고 있었다는 말은 악령이 둘러댄 ‘군대’(레기온)라는 이름처럼 ‘엄청나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돼지는 ‘더러움과 혐오’의 상징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악령이 동물들 속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사탄은 뱀의 몸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창세 3:1~15).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마태 10:29), 하느님의 허락 없이 악령은 돼지 한 마리조차 괴롭힐 수 없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2독서 <갈라디아서>에서 교훈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세례’로 하느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자신의 ‘기업’으로 삼은 하느님의 자녀를 악마는 결코 건드릴 수 없습니다(1요한 5:18; 로마 8:31~39; 시편 118:6).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하느님은 가련한 우리의 참된 보호자이시고 우리의 영원하신 ‘기업’입니다(시편 22:21,26).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잊고(골로 2:15), 사탄이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그 거짓말과 속임수에 미혹당할 때 우리는 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면 우리의 지위는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겪어온 그 남자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 순간 돼지들이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몰살당합니다. 악령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는 자라는 특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요한 10:10). 이전에 마귀들은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리며 그 사람을 ‘광야’로, ‘무덤들’ 사이로 몰고 다녔습니다. ‘돼지’를 몰살시켰던 것처럼, 본래 악령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 남자를 ‘파괴’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와 마주서자 오히려 마귀들이 죽었고, 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 ‘멀쩡한 정신의 사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 고향을 방문하시어 행하신 ‘메시아 취임사’가 성취되었습니다(루가 4:17~19).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시는 메시아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오늘 1독서 <이사야>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나에게 빌지도 않던 자의 청까지도 나는 들어주었고, 나를 찾지도 않던 자 또한 만나주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하고 말해 주었다. – 이사 65:1

예수님이 그를 치유하시는 과정에 생겨난 일은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분명 제 정신이 돌아온 그 사람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반면에 돼지 치던 사람들은 갑자기 직업을 잃었습니다. 돼지 주인들은 큰 손실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치유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른 논의는 미루어두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진리’입니다(마태 16:26). 이것이 가치에 있어서 주님의 우선순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바뀔까요?

이제 셋째 단락이 이어집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치유된(구원받은) 것을 본 ‘다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34-37절).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일어난 일을 알려주러 읍내와 촌락으로 들어갑니다. 그 근방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러 옵니다. 그들은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어떤 분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발 앞에 앉는 것’은 존경과 환대의 자세입니다(루가 10:39). 그에게서 악령만 추방된 것이 아니라 상담을 통해 마음을 힘겹게 해 왔던 아픈 상처도 치유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처음에 그 사람은 옷을 걸치지 않고, 집 없이 무덤들 사이에서 소외된 채로 살았으며,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이 바뀌었습니다. 옷을 입고 제정신을 차렸으며, 더 이상 ‘통제 불능’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곧 그는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사람이 처해 있던 관계 단절, 즉 사회적 고립과 소외, 특히 영적인 소외는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구원’ 받았습니다.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사람이 구원받게 된 경위를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악령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전해 듣자 그들은 ‘겁’(두려움)을 집어 먹습니다. ‘멀쩡한 정신’이 돌아 온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이 자기들 땅에 머무는 것은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네 땅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간청했다’는 말은 ‘간절히 빌었다’는 뜻으로 일종의 ‘기도’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참으로 ‘악’합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의 치유는 분명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선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자신들이 겨우 맞이한 평화를 위험스럽게 만드는 분으로 보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자리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떠나가십니다. 그들의 ‘악한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지방에서의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거기에는 참 평화를 간직한 행복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치유된 사람입니다. 드디어 마지막 단락입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의 반응’입니다(38-39절). 고침 받은 그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있기를 ‘애원’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애원했다’는 달리 말하면 ‘간절히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기도는 ‘게르게사’ 근방에서 나온 사람들의 ‘기도’(간청)에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간절한 ‘기도’(애원)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러셨을까요?

우선 그에게는 그의 가족과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어야 할 더 중요한 ‘사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보다 그가 그 일에 더 ‘적임자’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그의 불안한 마음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전에 불행에 시달리다가 겨우 예수님을 만나 평화와 행복을 찾았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 곁에 있어야 안전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조마조마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에게도 그런 ‘미신 같은 신앙’이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미신 같은 심리 때문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악령이 다시는 그를 붙잡지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령은 ‘호수’(바다)에 몰살된 돼지와 함께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심연’(深淵, 깊은 바다, 깊은 구렁)에 가두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육체적 현존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그에게 ‘사명’(使命)을 주시어 집으로 돌려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베풀어주신(행하신) 모든 일을 이야기 하여라. – 루가 8:39

분명 치유는 예수님이 행하셨는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행동’이 ‘하느님을 보여주는 계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물러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주신 일을 ‘온 동네’에 널리 알리는 ‘전도자’가 됩니다. 비록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와 회복의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이것이 치유이야기가 말씀하려는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마귀 들려 인간의 품위를 잃고, 무덤들 사이에 거하며, 고통당하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그 땅에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찾지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 속했지만, 주님은 나 여기 있다며 만나주셨습니다(이사 65:1). 무너진 마음들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기 위해 두 팔 벌려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담긴 최고 가치였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무덤들’ 사이에 있던 우리를 찾아오셨고 만나주셨습니다. 외로움과 슬픔, 상실과 절망의 무덤들 사이에 있던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죽은 것처럼 고통 속에 신음하던 우리 삶의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악마에게 묶이고, 그 지배에 억눌려 고통당하던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위엄마저 잃어버리고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가 어둠 속에 있던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죽은 것 같은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새로운 해방을,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변화를, 새로운 빛을, 새로운 희망을, 새로운 길을, 새로운 창조를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과거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움과 슬픔, 상실과 절망의 무덤들 사이에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해방을,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변화를, 새로운 빛을, 새로운 희망을, 새로운 길을, 새로운 창조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하고 걸으며 삶을 갱신하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회로부터, 관계로부터 소외되어 죽은 것처럼 무덤들 사이에 거주하던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 ‘희망’의 등불로 변화되었습니다. 가장 처참한 지경에 내몰리고, 방치된 사람조차도 희망의 표지로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그는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주신 일을 ‘온 동네’에 널리 알리는 ‘전도자’가 됩니다. 이렇게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누구나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떤 처지의 사람도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외로움과 슬픔, 상실과 절망의 ‘무덤들’ 사이에 살도록 의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악마 같은 ‘이념들’과 인간의 존엄을 떨어뜨리는 ‘차별’들에 묶여 살도록 의도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품위와 위엄을 간직하고 보다 ‘가치 있는 삶’에 투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예수와 함께 하는 그런 ‘자유와 해방과 변화의 새 삶’으로 초대하라고 우리를 파송하십니다.

부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일을 널리 알리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외로움과 슬픔, 상실과 절망, 왜곡된 이념과 차별의 ‘무덤들’ 사이에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해방을,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변화를, 새로운 빛을, 새로운 희망을, 새로운 길을, 새로운 창조를 더욱 널리 알리는 연중시기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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