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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16. 연중15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5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어떤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 올곧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배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마음에서 돌을 걷어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여 우리 자신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풍성한 구원의 결실을 가져와야 함을 배웁니다. 그렇게 되기를 목적하고 기도하며 이 성찬례를 주님께 봉헌합시다.

아울러 한미 FTA 재협상 소문 속에 쌀 개방 문제로 고민하는 모든 농민들을 기억하며 성찬례를 주님께 봉헌합시다.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 마음에 은혜의 말씀을 심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열매를 우리 삶 속에 가득히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5:19-34
  • 시편 – 119:105-112
  • 독서 – 로마 8:1-11
  • 복음서 – 마태 13:1-9,18-23

우리는 그동안 1독서로 창세기 이야기를 묵상해 왔습니다. 특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가족사였습니다. 모든 인류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가정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던 사건 이후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사악은 서로 떨어져 살았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의 말년조차도 떨어져 살았습니다. 일종의 황혼이혼입니다. 도대체 믿음의 가정에 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의 가정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은 이사악이 60이 다 되도록 자식하나 점지해 주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그때까지도 아브라함은 살아있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잠시 후에 보겠지만 기도 끝에 이사악은 쌍둥이를 얻습니다. 자라면서 이사악은 에사오를,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야곱을 아브라함의 약속의 상속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이 가정의 불완전한 모습, 즉 편애를 정당화해 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부모의 이런 태도가 형제를 원수로 만들어 떨어져 살게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 계보를 있는 가정들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에게 참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가정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만의 실패와 투쟁의 몫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통해 그들은 하느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깨달아 갔습니다. 그 임재는 생의 어려운(혼돈, 혼란, 어둠) 결정의 순간들, 통과 의례, 고통스러운 전이의 시기에 가장 분명하게 알려졌습니다.

The Mess of Pottage, c. 1896-1902, by James Tissot

오늘 1독서 창세기 이야기는 형 에사오에 대한 야곱의 승리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 에사오는 허기진 배를 안고 사냥에서 돌아옵니다. 돌아와 보니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에사오는 자신의 감정을 과장합니다. “배고파 죽겠다.” 그의 이런 어리석음을 야곱은 포착해냅니다. 그는 형에게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합니다. 에사오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야곱에게 죽 한 그릇에 팔아먹습니다. 그는 야곱의 속임수와 조작에 넘어가 영원히 후회할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에사오는 상속권, 즉 신성한 약속을 경멸했고, 야곱은 그 신성한 약속을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웁니다. 하느님은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에 대해 성향 묘사가 재밌습니다. 에사오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만큼 외향적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천막에 머물러 살 정도로 성질이 차분합니다.

에사오는 장자이고 활달한 사람이기에 하느님이 그와 그의 후손을 더 선호하는 선택을 하실 것 같았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야곱과 그의 후손입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 상속권을 넘겨받아서, 그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유산을 상속 받는 자리에 자신을 세웠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약자인 형제, 즉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운명이 아닌, 위상이 낮은 이를 더 선호하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하느님”(루가 1:52)을 소개합니다. 하느님은 약한 이들을 옹호하시고, 그들을 상상 이상으로 행동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자비하신 분입니다.

Esau Sold Jacob his Birthright and the Mess of Pottage, by Matthias Stomer, 17th Century

우리는 이 창세기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야곱인지 아니면 에사오인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현재 야곱으로 삽니까? 아니면 에사오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과 교회가 하느님을 닮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같은 편이 되어 주어야 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오늘 시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작품으로 흔히 히브리어 알파벳 시편의 ‘백미’라 불립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순서를 따라 첫 문장을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8절을 1문단으로 묶어 총 22문단으로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ㄱ’(기역) 이렇게 운을 떼고 ‘ㄱ’으로 첫머리를 시작하는 문장이 8개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맨 마지막 문단은 ‘ㅎ’(히읗) 이렇게 운을 떼고 ‘ㅎ’으로 첫머리를 시작하는 문장이 8개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런 형식이다 보니 내용의 짜임새나 각 문단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도 약합니다. 하지만 시편 1편처럼(시편 1편의 확대판이라는 별칭도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율법)의 중요성을 높인다는 점, 즉 ‘토라’를 사랑하는 찬양시라는 점에서 통일성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삶이 괴로움과 곤경, 박해와 시련 속에 있을 때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율법)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들려지거나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적용되고 내적으로 그 의미가 깊이 음미되며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9절, 11-12절, 15-16절, 23-24절, 26-27절, 34절, 40절, 43절, 47-48절, 52절, 64절, 68절, 70절, 73절, 77-78절, 92-93절, 97절, 99절, 103-104절, 105절, 112절, 123절, 130절, 140-141절, 148절, 174절).

 

시편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바로 그 힘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시인뿐만 아니라 읽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지침’이 되며 위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로를 가져다주기 위해 기도했던 이 시는 삶의 괴로움과 곤경, 억압과 시련을 겪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 있는 자신의 내면의 실상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119편을 다시 읽어보신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이 시인처럼, 하느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희망을 발견합니까? 삶이 곤고하거나 힘겨울 때 마음에서 암송되고, 적용되는 지침이 되는 ‘한 말씀’이 있습니까?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사도 바울로가 쓴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마르코복음서보다도 대략 10~20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서신에는 오늘 2독서 로마서에서도 들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사시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사시면).”과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계시면’(live, dwell, inhabit)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오이케오’(οἰκέω)는 ‘살다, 거처하다. 같이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표현을 별 감흥 없이 지나칩니다. 하지만 결코 당연하게 여길만한 표현들이 아닙니다.

오늘 서신(사도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계속해서 같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성령과 같이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점점 힘을 잃어갑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성찬례에 참여하거나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믿음 깊은 신자의 태도를 보이지만, 교회 문 밖만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를 돌변합니다. 이런 이중적 삶의 태도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사는 일을 방해하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로가 표현한 대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도록(사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오늘 복음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첫 비유입니다. 비유(比喩)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주된 교수법입니다. 어떤 것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비슷한 것을 빌려다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어로는 비유를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고 합니다.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명확히 하려고 “옆에 던져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일상의 친근한 것을 가지고 친근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비유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큰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하느님의 통치)입니다. 예수님은 이 주제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신적도 있지만 그 보다는 비유를 즐겨하셨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청중이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의 말로 초월적인 하느님을 설명하기가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사물과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서 고안된 평범한 언설(言說)로는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표현 불가능한 분을 표현하는 한계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비유를 유형별로 정리하면 대략 5가지 정도입니다. 일반비유, 특례비유, 은유, 예화, 우화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복음은 ‘일반비유’에 속합니다. 일반비유는 일상에서 흔히 있는 일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일상을 반영하는 이야기라서 청중은 금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반비유’ 중에는 오늘 우리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시와 지금의 생활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시에는 자연스러웠던 비유가 전승이나 편집 과정을 거치면서 변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는 신학 분야를 ‘역사비평학’이라고 합니다.

역사비평학 방법에 따르면 비유를 풀이할 때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최초의 자연스러운 형태나 예수님의 의도, 전승 과정에서의 추가, 복음서 기자의 추가나 해석입니다. 이런 충실한 연구 과정과 배경이해를 통해 비로소 우리 자신의 해석과 이해를 시도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 영적해석이나 비유풀이를 한다는 이들의 자랑은 지적 사유를 게을리 한 이들이 벌이는 농간(弄奸)입니다. 소위 비유풀이로 사람을 미혹한다는 신천지 이단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이런 간략한 비유 개념 이해와 더불어 오늘 복음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비유의 배경입니다. 우리나라 농사법에서 보자면 비유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참 한심한 농부입니다. 유실될 것을 알면서도 딱딱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가시 돋친 잡풀)에 씨를 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농사법을 이해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의 4~10월은 ‘건조기’(乾燥期)입니다. 무려 7개월이나 휴경지로 있던 밭에 잡풀(가시덤불)이 자라납니다. 사람들이 가로질러 다녀서 지름길이 나기도 하고 밭가에 길이 생깁니다. 11월부터 ‘우기’(雨期)가 시작됩니다. 이때 내리는 비가 ‘가을비’(이른비)고,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듭니다. 성경에서는 ‘가을비’를 축복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비를 언급할 때도 꼭 ‘가을비’(이른비)를 ‘봄비’(늦은비) 보다 먼저 언급합니다.

그리하면 그가 너희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에 맞게 내려주시어, 밀과 술과 기름을 거두게 해주시고 – 신명 11:14

메마른 골짜기를 지나갈 적에 거기에서 샘이 터지고 ‘이른비’가 복을 내려주리라. – 시편 84:6

소나기, ‘가을비’, ‘봄비’를 철 따라 내리시고 추수 때를 어김없이 지켜주시는 우리 하느님 야훼를 공경하자고 하여야 할 터인데 그럴 생각조차 없구나. – 예레 5:24

너희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겨울비’도 내려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주시리니 – 요엘 2:23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 야고 5:7

휴경지에 가을비가 내리면 농부는 밭에 나가 밀이나 보리를 흩뿌립니다. 길바닥이나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먼저 밭을 갈고 이랑에 씨를 심는 우리나라의 농사법과는 정반대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의 형편도 이스라엘 지형을 이해하면 자연스럽습니다. 갈릴래아 평야를 뺀 나머지 대부분의 땅은 석회암 지대입니다. 흙인 줄 알고 뿌렸지만 나중에 밭을 갈 때 보면 온통 그 밑이 돌인 경우입니다. 이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비유가 이스라엘 상황에서는 모두 정상입니다. 더욱이 ‘좋은 땅’(沃土)에 떨어진 씨앗에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무슨 의도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등장하는 농부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비유 주제는 ‘하느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중에는 하느님의 나라 운동을 하시는 예수님의 ‘신상발언’, 즉 당신의 자세를 밝힌 것도 있습니다(마태 13:47-50, 루가 10:29-37). 오늘 복음이야기가 거기에 해당합니다. 씨 뿌리는 농부는 예수님이고, 당신이 하시고 있는 일을 농부의 희망에 비추어 발설하신 비유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런 신상발언을 하시게 된 것일까요?

Jesus Teaching by the Seashore, James Tissot

Jesus Teaching by the Seashore, by James Tissot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치고, 치유하고, 전도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 곁으로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며 인기가 치솟았습니다(마르 2:2). 예수님은 당신만의 율법해석을 거침없이 내어놓았습니다(마태 7:28-29). 심지어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마르 3:1-6). 이 일은 예루살렘 성전중심의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게 만드는 근거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모함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 뒤에는 본격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이탈자들이 생겨나며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 요한 6:66

이렇게 인기가 떨어지며 고립되기 시작한 예수님을 향해 반대자들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아마 하느님 나라 운동일랑 집어치우고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나 돌보라며 비아냥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처지에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희망 속에서 씨를 뿌리는 친근한 농부를 끌어다 당신의 ‘신상발언’을 하십니다.

저 농부를 보시오. 그가 씨를 뿌릴 때마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박토(薄土)에 떨어져 유실될 씨도 많겠지만, 마침내 ‘좋은 땅’(沃土)에 떨어져 풍성한 소출을 가져다 줄 씨도 많은 법입니다. 나 역시 지금 실패를 맛보고 있습니다만 결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온 천지에 하느님의 통치가 가득한 세상 말입니다. 나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엄청난 ‘희망’을 걸고 삽니다. 내 인생의 사전에 결코 절망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어떤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 운동에 절대적 희망을 두고 걸어가시는 예수님 자신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비유가 제시하려는 본래 의도입니다. 봄철의 수확을 희망하며 씨를 뿌리는 농부를 ‘옆에 두고’(παραβολη),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걸고 사시는 ‘자신의 자세’를 비유하신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뿌려지는 씨처럼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결국은 ‘좋은 땅’을 만나리라는 희망입니다.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죽어서 씨가 뿌리를 깊이 내리면 100배, 60배, 30배의 풍성한 결실을 가져옵니다. 이 희망이 예수님을 다시 일어서게 한다는 신상발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 속에 뿌려지는 씨앗처럼, 당신 자신이 친히 한 알의 밀알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에게 풍성한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여기까지가 복음 이야기의 전반부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의 후반부는 ‘비유 설명’입니다. 사실 비유는 원칙적으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비유가 말해지는 상황을 청중들이 다 알기에 쉽게 알아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비유 설명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복음서 학자들은 이 후반부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설명이라고 봅니다. 초대교회 전도자들도 열심히 ‘말씀’(ὁ λόγος, 이 단어는 ‘복음’이라는 말 대신 초대교회가 자주 쓰던 전문어입니다)을 전해 보지만 실패를 거듭합니다. 교회의 초창기이니만큼 여러 면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부실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한 초대교회의 충실한 ‘말씀 전도자들’을 격려하고, 부실한 신자들을 각성시키려는 목적으로 ‘전승자’(복음서 기자)가 비유 설명을 추가했다는 주장입니다.

잘 묵상해 보면, 비유의 초점도 옮겨갑니다. 전반부 비유의 핵심은 분명히 예수님의 자세를 언급한 신상발언입니다. 반면에 후반부 비유 설명은 ‘씨앗’과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으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전반부 비유의 핵심은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반면에 후반부 비유 설명은 등장하는 소재 하나하나를 초대교회의 전도체험 및 신앙생활과 연결시켜 여러 가지 뜻으로 늘어놓습니다. 이렇게 하는 비유 풀이를 ‘우의적’(寓意的, Allegory) 해설이라고 합니다. 비유 설명에 따르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부실한 부류가 셋이고, 성공하는 충실한 부류가 하나입니다.

차례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당연히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길바닥’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굶주린 새들처럼 덤비는 사탄에게 말씀의 씨앗을 빼앗깁니다. ‘돌밭’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지만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신앙을 내버립니다. ‘가시덤불’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욕심)에 휩쓸립니다.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풍성한 구원의 결실을 맺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습니다. 몸부림치며 애써보지만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양극화와 가난의 대물림, 세대, 사회 간 갈등과 여러 구조적인 문제가 맞물려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기득권층은 너무도 쉽게 이런 상황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구조적인 문제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선택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실패와 고립을 기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삶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기억하십시오. 태도는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속마음입니다. 한마디로 그가 어떤 ‘믿음’과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순절기 때 말씀드린 ‘믿음의 정의’(定義)를 기억하십니까? 그 때 저는 믿음이란 자기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찾아낸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에서 찾아내신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모든 것을 거신 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으로 일어서신 예수님의 불굴의 ‘믿음’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우리시대 사람들이 힘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 세대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면서 열심히 나라 경제를 일구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젊은 세대들로부터 ‘태극기’라고 조롱당합니다. 청년 세대들은 놀지도 않은 채 하루 20시간 가까이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했지만 정작 취업할 곳이 없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서로가 열심히 고생하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람도 없이 세대 간 갈등과 불신의 벽만 높아갑니다. 열심히 살았고, 또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에게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제의 눈으로 진단하자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은 채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적 없이, 방향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사회가 그렇게 하니까 덩달아 따라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세대들도, 청년 세대들도 예외 없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학교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나 교사는 자녀들에게 열심히 하라고만 했지 무엇을,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종교교사 양성과정에 다니던 교직실무 시간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강사로 초빙된 적이 있습니다. 질문 시간에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의외의 대답이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다고 했습니다. 그 점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는 원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방법이 별로 많지 않았고 안내해 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원하는 것을 성취할 방법이 넘쳐나는 데 정작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개인이나 가정만의 책임이고 사회와 정부는 책임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사회와 정부의 책임이 더 큽니다. 사회와 정부는 국민들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존경받는 삶인지, 어디가 옳은 방향인지 참된 정보를 주면서 바른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정부는 그런 역할을 소홀히 해 왔습니다. 권력을 잡으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국민들을 호도(糊塗)하고 불의와 부정부패를 일삼아 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습니까!

교회는 우리시대를 향해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지금이라도 삶의 소중한 것을 먼저 찾는 ‘묵상, 침묵, 고민’부터 하라고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찾아낸 이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일어서 걸어갑니다. 자신이 찾아낸 그 목적, 그 방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가게 됩니다. 그런 이들은 분명코 희망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 다음 비유 설명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말씀 전도자들처럼 우리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됩니다. 선교에서 별 수확을 못 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낙담 말고 그 귀하고 소중한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땅에 뿌렸습니다. 비록 우리가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을 만나 실패도 할 것이지만 말씀을 듣고 깨달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좋은 땅도 만나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자신이 그 ‘좋은 땅’이 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공짜로 심어주신 구원의 말씀이 풍성히 결실되도록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지켜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1독서 창세기의 ‘에사오’처럼 공짜로 얻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흔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참회하고 하느님께 교회를 의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다 보면 ‘충실한’ 신자도 있고 ‘부실한’ 신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일은 부실한 신자를 탓할 것이 아니라 함께 ‘좋은 땅’이 되도록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모든 지체가 더욱 공고히 한 몸을 이루어 환난이나 박해를 이기도록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 ‘걱정’에 억눌려 살지 않도록 주님의 평화를 빌어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참된 ‘부요함’을 사모하도록 권면함으로써 세상 ‘재물’의 유혹(욕심)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온유와 친절의 끈으로 서로를 묶고, 사랑과 감사를 포함한 여러 덕행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찬례에서 들은 주님의 말씀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머무는 ‘인내’를 배워가야 합니다. 마음에서 돌을 걷어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려면 인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인내가 우리 자신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풍성한 구원의 결실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후반부 비유 설명에서 우리가 찾아내야할 깨달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과 스텔라 데이지호 수색 재개를 위해 기도합시다.
  2. 남북의 새로운 협력관계 형성과 평화정착을 위해 기도합시다.
  3. 모든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실직자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5. 성공회 교회들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합시다.
  6. 교우 가정과 자녀 양육을 위해 기도합시다.
  7. 오종민(어거스틴) 교우와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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