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16. 성 삼위일체대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찬양받으실 하느님, 성부께서는 온 세상을 지으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성령으로 사랑과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 놀라우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고 영원히 하느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잠언 8:1-4,22-31
  • 시편 – 8
  • 2독서 – 로마 5:1-5
  • 복음서 – 요한 16:12-15

성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우리와 만물의 구원을 위하여 공동으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성공회는 ‘교회력’(전례력)을 지킵니다. 교회력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이 인간과 만물을 구원하시고 보존하시려는 ‘공동 역사’, 즉 구원사를 ‘해마다’ 전례를 통하여 경축하고 기억하도록 안내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와 죽음, 부활에 중심을 두고, 성서와 교회 역사 속 인물과 사건들을 기억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시를 ‘1년 단위’로 경축합니다.

그렇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임하소서. 임마누엘이여!”라고 주님의 ‘재림’과 ‘성육신’을 ‘준비’하며 교회력의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어느새 6개월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의 ‘성탄’을 경축했고, 하느님의 영광이신 아기 예수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으로 드러나신 ‘공현일’을 기뻐했습니다. ‘공현후절기’(연중시기) 동안 ‘세상의 빛’으로 비추이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우리 역시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 받았음을 기뻐했습니다. ‘부활’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기’를 지나 죄악권세,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주님의 부활을 50일 동안 경축했습니다. 더욱이 지난 2주간의 여정, 즉 그리스도가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완성된 ‘부활절기’는 지난 6개월 여정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배정된 ‘전례독서들’도 이 같은 교회력의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 역사’를 명백히 들려주었습니다. 사제는 말씀 나눔을 하면서 이것을 명확히 드러내고 싶었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자고 끊임없이 초대해 왔습니다. 그 초대가 여러분들 속에서 잘 응답되고 있는지요?

이제 지난 월요일부터 다시 ‘연중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전례공동체인 교회는 ‘연중시기’의 첫 주일을 ‘성삼위일체대축일’로 출발합니다. 이렇게 출발한 ‘연중시기’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날, 즉 ‘왕이신 그리스도주일’로 완성됩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다시 시작하는 ‘연중시기’ 첫 주일을 ‘성삼위일체대축일’로 출발하는 것입니까?

첫째, 우리와 만물의 ‘구원’(생명)이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의 ‘공동 역사’임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입니다. 그 구원을 위해 삼위일체 하느님이 가장 먼저 행하신 공동 역사는 ‘창조’입니다. 오늘 1독서 <잠언> <시편 8>에서 노래한 것처럼, 성부 하느님은 창조의 일을 단독으로 하시지 않고 ‘성자를 통하여’ 행하셨습니다. 분명 <창세기>와 <요한복음>과 <골로사이서>와 <히브리서>는 창조를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신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창세 1:1~2; 요한 1:1~4; 골로 1:15-17; 히브 1:1-2:8).

특히 <시편 8>은 이 창조세계가 하느님을 증언하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광대한 하늘과 달아놓으신 달과 별들을 마음으로 우러러보면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이 솟아납니다. 인간은 만물 중에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은 항상 인간을 생각해 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그 은총을 생각할 때 찬미가 절로 솟아납니다. 그 찬미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 존재하는 만물의 선하신 창조주, 통치자, 보존자이신 ‘성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만물 중에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은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창조세계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하도록 인간을 ‘청지기’(대리인)로 지명하심으로써 축복하셨습니다(히브 2:6-8,11). 물론 창조와 보존의 최고 책임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성령을 통하여 이 축복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영광스런 지위로부터 타락하여 성부 하느님과 원수가 되었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성자 하느님은 무지로 인해 어둠 속을 헤매는 그런 인류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 분을 우리는 ‘예수’라 부릅니다. 예수는 ‘고치고 살리는’ 성부 하느님의 일을 하셨으며,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바쳐서 인류가 성부 하느님과 ‘화해하고 친교 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의 통찰이 빛납니다. 아마도 다윗은 죄 지은 인간이 마땅히 받을 수밖에 없는 심판을 내리는 대신 한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성찰한 후에 <시편 8편>을 바쳐 올렸을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조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창조주의 빛을 그 피조물들 위에 비추기 위하여 여전히 인간을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지명하신 하느님을 그는 꿰뚫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역시 시편 기자와 더불어 삼위일체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주여! 주님의 이름은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 시편 8:1(성공회기도서 譯)

이제 성령을 통하여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이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그 ‘화해와 친교의 일’을 자신에게서 성취합니다. 창조세계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성취합니다. 성자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모든 축복은 성자 하느님께서 성부 하느님께 간구하여 보내주신 ‘협조자 성령을 통하여’ 우리(교회)에게서 성취됩니다. ‘양자(養子)의 영(靈)’이신 ‘성령’은 우리 삶에 역사하시어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상속자’까지 되게 하십니다(로마 8:15-17).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어받아 실천하신 ‘고치고 살리는 성부 하느님의 일’을 이 창조세계 속에서 꾸준히 실현해 가도록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이처럼 인간과 만물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지금도 공동으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오늘입니다.

둘째, ‘교회’의 영적 여정이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고백하고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성령’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 역사’로 ‘탄생’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인격’(위격)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구별되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향한 친밀한 사랑의 교제와 연합(통일)’ 속에 존재하시면서 우리와 만물의 구원을 위해 ‘공동 역사’를 펼치시는 ‘공동체’(일체)입니다.

동방과 서방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 같은 ‘공동체적 친교와 연합’을 그리스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로 표현해 왔습니다. ‘페리코레시스’는 강강술래처럼 무대에서 동그랗게 둘러서서 추는 춤인 ‘원무’(圓舞), ‘윤무’(輪舞)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상호통재’(相互通在), ‘상호내주’(相互內住), ‘상호내재’(相互內在), ‘상호침투’(相互浸透), ‘상호순환’(相互循環) 등으로 번역됩니다. ‘서로’(相互)의 안(內)에 ‘꿰뚫어’(침투하시어, 通) ‘함께 존재’(共在, 內住)하시며 친밀한 사랑의 교제와 연합(통일)의 춤’을 통해 인류와 만물을 구원하시는 ‘공동체 하느님’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공동 역사 속에 탄생한 교회 역시 ‘서로를 향해 자신을 열어젖히고 연합하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되새기자는 의도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모이는 동아리도 아니고, 자신들의 이익이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시민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에페 1:13~14,18; 1베드 2:9~10). 교회는 은총을 내리시는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에페 1:23). 교회는 ‘생명과 일치’(코이노니아)를 이루시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1고린 6:19~20). ‘세 위격’(인격, 다양성)으로 ‘실제적’으로 ‘구별’되시지만 친밀한 ‘사랑의 교제와 연합’의 춤 속에서 온전히 ‘하나’(일체, 조화, 공동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처럼, 서로의 ‘다름’이 사랑 안에서 ‘조화’를 이룬 ‘하나(일체)의 공동체’야말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야말로 인류와 만물을 해방(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선교’(창조질서의 보존과 완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로마 8:18~27).

셋째,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느님과의 친밀한 친교와 일치 속에서 더욱 자라나 ‘하느님 나라 선교(창조질서의 보존과 완성)에 박차를 가하자’는 이유에서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된다는 것이 성령 안에서 탄생한 교회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로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로마 8:18~23)라고 통찰했습니다. 그러나 이 신음과 진통의 속박에서 해방(구원)되어 창조의 본래 목적인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오늘 2독서 <로마서>에서 교훈하는 것처럼, 성령 하느님은 교회가 이 희망 속에서 오늘을 견디며 그 날을 기다리도록 지금도 우리 속에서 활동하십니다(로마 5:5). 성자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통치 아래 머물며, 창조의 본래 목적인 ‘감사’와 ‘찬미’를 성부와 성자께 드리도록 성령께서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진실에 눈을 뜬 교회는 자신들이 모든 피조물을 해방(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선교’(창조질서의 보존과 완성)에 참여하고 있음을 ‘연중시기’에 더욱 숙고(熟考)해 갑니다. 성자께서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례’를 봉헌하도록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부활의 증인’이 되라 명령하셨음을 성령을 통하여 교회는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진행하신 ‘하느님 나라 일’(창조질서의 보존과 완성)을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교회는 수행해 나갑니다. 한마디로 ‘연중시기’는 성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계시를 믿는 교회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 속에서 더욱 성장하여 ‘하느님 나라 선교(창조질서의 보존과 완성)에 앞장서는 시기’입니다.

여기까지가 성공회가 ‘연중시기’ 첫 주일을 ‘성삼위일체대축일’로 출발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교의 ‘심장과 열쇠’인 ‘삼위일체’(Trinity) ‘교리’(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릴 차례입니다.

‘삼위일체’란 용어 자체는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시대’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해 ‘체계화’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유일하신 하느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거기에 ‘성령’의 관계까지 설명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와 관련하여 교회 안에 많은 이단사설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2~3세기까지의 대표적인 이단들은 ‘에비온주의’(Ebionism), 영지주의(Gnosticism),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몬타누스주의(Montanism)입니다. 이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특히 영지주의는 예수를 ‘영지’(靈知)를 전하러 온 ‘천상의 계시자’로 여겼습니다) 참 인간이심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주장했고, 극단적인 종말론과 예언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이러한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변증해 나갔습니다. 그 변증 과정의 핵심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질’(본성)의 하느님인가? 아니면 단지 인간으로 있다가 격상된 존재로 볼 것인가가 자리합니다. 나중에는 ‘성령’의 본질(본성)에 대한 논의까지 합세하면서 4세기까지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과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변증이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변증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신앙’을 희생시킴 없이 ‘삼위의 일체’이심을 보존하려는 시도들이었습니다.

‘삼위일체’(Trinitas)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교부 ‘터툴리안’(Turtullian, 150∼220)입니다. 그는 다른 변증가들처럼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자신의 변증을 기술했습니다. 그는 ‘세 위격, 한 실체’(tres Personae, una Substantia)라고 설명하면서 하느님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로 명확히 ‘구별’했고 ‘통일성’을 주장 했습니다. 그가 쓴 ‘위격’(Persona), ‘실체’(Substantia)라는 말은 라틴어 일반적인 뜻보다는 ‘법률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사실 그는 법률가 출신입니다.

‘위격’으로 번역한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가면, 역할, 사람’이라는 뜻이 있지만, 법률용어로는 ‘법적인 권리를 가진 당사자’라는 뜻입니다. ‘실체’로 번역한 라틴어 ‘숩스탄시아’(Substantia)는 ‘물질, 재료, 재산’이라는 뜻이 있지만, 법률용어로는 ‘소유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 위격, 한 실체’(tres Personae, una Substantia)라는 그의 설명은 ‘세 당사자가 하나의 소유권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하느님이라는 한 주권을 공유한다는 설명입니다.

그가 ‘라틴어’로 쓴 ‘세 위격, 한 실체’(tres personae, una substantia)가 나중에 ‘그리스어로’는 ‘세 위격, 한 본질’(treis hypostases, mia ousia), ‘영어’로는 ‘세 인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ce/nature/being/substance), 우리말로는 ‘삼위일체’(三位一體)로 번역됩니다. 용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다룰 것입니다.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론’을 주장을 하게 된 계기는 ‘프락세아스’의 ‘단일신론’(單一神論)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단일신론’이라는 용어도 터툴리안이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단일신론’(單一神論)은 ‘삼신론’(三神論)을 배격하고 하느님의 ‘단일성’, 즉 유일신 신앙을 보존하려는 시도로 ‘종속론’(從屬論), 양태론(樣態論), 양자론(養子論)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 ‘단일신론’(單一神論)에 대해서도 아래에서 다룰 것입니다. 터툴리안은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란 논문에서 ‘삼위일체론’을 다음과 같이 옹호합니다.

삼위는 본질의 통일에 의하여 모두 일체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단일체’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순서로 된 ‘삼위일체’로 구분하는 신비는 그대로 보존된다. 그러나 삼위는… 그 본질이 셋이 아니라 양식이 셋이며, 그 능력이 셋이 아니라 표현이 셋이다. 왜냐하면 삼위는 모두 한 본질, 한 실재, 한 능력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차례와 양식과 모양은 모두 한 분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대한기독교서회출간, 『기독교 교리사 』, 177페이지에서 인용.

그는 이 ‘삼위일체’ 개념을 자연만물을 가지고 유비했습니다. 가령 성부, 성자, 성령을 뿌리, 줄기, 가지로 비유하거나, 수원(水源)과 하천(河川)과 ‘바다’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비록 그가 성부, 성자, 성령을 구분했으나 여전히 성자를 ‘제 2서열’의 하느님으로 보는 ‘종속론’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의미의 ‘일체’(一體, una substantia)는 아닌 셈입니다.

교부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도 ‘단일신론’(單一神論)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로고스가 태초로부터 한 인격(영원적 출생 개념)이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성자의 ‘신성’(神性)을 변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삼신론’(三神論)을 방지하려다 그 역시 ‘종속론’(從屬論)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삼신론’(三神論)은 성부, 성자, 성령을 별개의 ‘신’(神)으로 보는 이단입니다. 터툴리안과 오리게네스의 이 같은 ‘종속론’(從屬論的)은 나중에 ‘아리우스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이처럼 4세기까지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과 관계에 대한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절입니다.

흥미롭게도 ‘삼위일체’ 교리의 체계화는 당시 정치권력과 맞물려 시도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이용해 로마제국의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려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의지’(意志) 말입니다. 325년에 황제는 ‘니케아’로 주교들을 소집합니다. 이것이 교회사의 최초의 공의회입니다. 이 ‘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즉 성자의 본질에 대해 주교들은 ‘본질에서 같다’(同質, homoousia)를 채택하여 ‘삼위일체론’을 정립합니다. ‘니케아공의회’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가장 많이 회자되는 두 사람은 ‘아리우스’(Arius, 256~336)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 영어로는 아타나시오)입니다.

‘니케아공회의’에 참석한 사제 ‘아리우스’는(이미 그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단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자와 성부는 ‘동일 본질(동일 실체)이 아니라’ 주장했습니다. 성자는 완전한 하느님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한마디로 ‘삼위일체’가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그는 오직 ‘성부’만 ‘참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치다가 318년 이미 단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성부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먼저 성자를 ‘무’(無)로부터, 즉 시간과 공간이 있기 전,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성자는 ‘피조물’이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주장대로 하자면 성부는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던 셈입니다. 동시에 ‘성자’도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작이 있고,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비록 성자가 ‘창조’를 대행하기는 했지만 ‘무’(無)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열등한’ 존재로 성부께 ‘종속’됩니다. 물론 성자가 신성을 가진 ‘유사본질’로 하느님으로 불릴 수도 있고,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난 ‘중보자’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참 하느님’은 성부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성부의 ‘초월성’과 ‘단일성’에 대한 옹호입니다. 결국 그는 ‘니케아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파문되어 유배를 가야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니케아신경’(보다 정확히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 공의회에서 제 1차 니케아공의회에서 채택한 니케아신경을 보완하여 제정한 것)에서 성자에 관한 진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부제’였던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Alexander, 312-328)의 비서로서 ‘니케아공의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비록 공의회에서 발언권은 없었지만 ‘알렉산더’ 주교를 배후에서 보필하면서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는 데 논리적으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는 성자가 완전한 하느님이심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에 맞서 성자가 창조된 적이 없는 영원하신 ‘참 하느님’으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의 신앙고백을 논증했습니다. 이 ‘니케아공의회’에서 ‘동일본질’(homoousia)이 채택되어 신경으로 남았지만(성 아타나시오 신경은 여기를 참고하세요) 그의 생애는 평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아리우스파’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교구로부터 다섯 번이나 유배당할 정도였습니다. 그 시련의 기간을 포함하여 그의 일생은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very God of very God), “성부와 일체시며”(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라고 고백하는 ‘니케아신경’의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구절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종속론’을 주장했던 ‘아리우스파’에 맞선 그의 ‘투쟁’에 빚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구절들은 성찬례 밖에서는 우리 입술에서 쉽게 지워질 수 있지만, 성자께서 성부와 똑같이 완전한 참 하느님이심을 가르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이 담겨 있습니다.

만일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 아니고, 유사본질이며, 성부께 종속된다는 ‘아리우스파’의 가르침이 니케아공의회에서 정통으로 채택되었다면 전혀 다른 그리스도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아리우스파의 주장처럼,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 아니라면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일 수 없습니다. 만일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 아니라면,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삼위일체는 성부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인격적인 자녀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힌두교가 ‘신’(神)을 모든 것 뒤에 있는 분리된 우주적 힘으로 보고, 이슬람교가 ‘신’(神)을 성난 군주처럼 보는데 반해, 우리는 하느님을 인격적이고 자비하신 아버지로 믿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로 믿고 따릅니다. 성령은 우리를 보증하시고, 우리를 하느님의 소유로 인(印)치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면 4세기 경 ‘니케아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로 정립된 ‘삼위일체’(三位一體), 즉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이 ‘구별되는 세 위격(位格)과 한 본질(本質)’이심을 정립한 ‘신학용어’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인격)들의 상호관계와 존재방식을 밝힌 ‘신학용어’입니다. ‘세 위격’이 실제적으로 ‘서로 구별’이 되면서도 ‘한 하느님’을 이루는(일체) ‘동일본질’이라는 교리입니다. ‘복수성’과 ‘단일성’에 답변하고자 하는 교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느님이 ‘사회성’(공동체성)이 있음을 갈파한 용어가 ‘삼위일체’입니다.

우선, 각각의 용어 정리부터 합니다. 라틴어의 의미는 위에서 다루었으니 그리스어로 설명하겠습니다. 사실 라틴어가 공식 신학용어가 되기 전, 4세기까지는 대부분의 교부들은 그리스어에 의지해 교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는 문자적으로는 “아래에 위치한 것”이라는 뜻이지만 철학사와 교회사에서 워낙 번역이 복잡한 단어이기에 꼭 필요한 부분만 설명합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 가면, 역할, 사람), 영어로 person(인격, 개인)으로 번역됩니다. 사실 ‘휘포스타시스’를 번역한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와 영어 ‘퍼슨(person)은 엄밀한 의미에서 같지 않습니다. 본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영어 ‘퍼슨(person)의 ‘대체 불가능한 개체성을 지닌 한 인격’이라기보다는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다양한 ‘역할’(기능, 활동, 표현, 양태)을 하는 ‘배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들(표현, expressions)을 이해하는 데는 좋지만 동시에 이단으로 정죄된 ‘단일신론’(單一神論)에 속하는 ‘양태론’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사에서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를 ‘구체적으로 구별되는 사물의 개별 특성’이란 뜻의 각각의 ‘본체’, ‘위격’(位格), ‘인격’(person)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본질’(本質, essence/nature) 또는 ‘실체’(實體, substance)로 번역하는 ‘우시아’(ousia)는 상대적으로 좀 더 어려운 말입니다. ‘본질’(本質)이란 어떤 존재를 처음부터 바로 그 존재이게 하는 ‘고유하고, 불변하는 자연적인(nature) 요소’, ‘본성적인 근본 요소’를 말합니다. ‘실체’(實體)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스스로 있는 독립적인 존재, 즉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내적관계’ 및 ‘존재양상’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서로 다른 ‘특성’(인격, 위격)들로 실제적으로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존자’인 ‘한 본질(실체)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세 위격’이 실제적으로 ‘서로 구별’이 되면서도 ‘한 하느님’을 이루는(일체,통일) ‘동일본질’(homoousia)이십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영’, ‘혼’, ‘육’을 가진 인간에게서 이 셋이 분리되면 죽음이고,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유지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성부, 성자, 성령이 ‘영’, ‘혼’, ‘육’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서 핵심은 ‘일체’(一體)에 있습니다. 이 ‘일체’(一體)를 잘못 이해하여 많은 ‘이단’(異端)들이 생겨났습니다. ‘양태론’(樣態論), ‘종속론’(從屬論)이 그것입니다. 이런 이단 사설(邪說)들은 아래에서 언급할 것입니다. ‘삼위’(三位), 즉 ‘세 인격’은 ‘삼’(三)이라는 숫자처럼 ‘한 위’씩 실제로 ‘구별’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성령)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성부)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성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체’(一體)에서 ‘일’(하나)은 그 ‘구별되는 삼위’가 ‘함께 연합’(통일, unity)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가리킵니다. 분명 ‘세 인격’이 실제적으로 구별되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활동하시지 않고 ‘서로’(相互)의 안에 ‘꿰뚫어’(침투하시어, 通) ‘함께 존재’(共在)하고 활동하는 ‘상호통재’(相互通在), ‘상호내주’(相互內住), ‘상호내재’(相互內在), ‘상호침투’(相互浸透), ‘상호순환’(相互循環)의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이 공동체성을 신학에서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로 표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三位)의 상호침투의 ‘공동체’(일체)로 믿는 신앙이 ‘삼위일체’입니다. 인류와 만물의 구원을 위해 ‘삼위’(三位)가 충돌하지 않고 마치 춤을 추듯 ‘통일’(연합, 일체)을 이루어 역사하는 ‘공동체적인 하느님’을 나타내려는 용어입니다. 서로에게 침투하시어 친밀한 사랑의 교제와 연합의 춤을 추시며 전체 하느님으로 역사해 오셨고, 창조세계로부터 “동일한 영광과 동일한 경배와 동일한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저마다 ‘완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삼위’(三位)는 신성을 3분의 1씩 골고루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십니다.

주의할 점은 ‘삼위’(三位)가 갖는 이러한 ‘개별 특성’을 ‘관계’를 제외하고 그 자체로 ‘본질’(신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위격’(인격)의 개별 특성은 ‘삼위’(三位)의 ‘상호관계성’이 그 원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사에 비추어 볼 때 ‘존재론적’으로는 당연히 아버지가 자녀들보다 앞섭니다. 하지만 ‘관계 차원’에서 볼 때 자녀를 낳지 않고서는 누구도 ‘아버지’일 수 없습니다. 이런 ‘상호관계성’이 원인인 ‘삼위’(三位)의 개별 특성을 무시하고 그 자체로 ‘본질’(신성, 하느님)과 동일시해 버리면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들’처럼 ‘세 하느님들’을 주장하는 ‘삼신론’(三神論, tritheism) 교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중에서 ‘삼위’(三位)의 개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하느님은 세 하느님들이다”라고 주장하면 ‘삼신론’ 이단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세 하느님들’(三神)이나 ‘다신론’(多神論)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 믿는 ‘단일신론’(單一神論), 또는 ‘유일신론’(唯一神論)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일신론은 삼위일체 중에서 ‘삼위’(三位)를 부정하고 ‘아리우스’처럼 성부의 초월성과 단일성(유일성)만을 믿는 신앙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교처럼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다”라고 주장하는 신앙입니다. 물론 우리도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삼위일체론에 입각해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내적 관계는 ‘세 인격’이시며 존재방식은 ‘일체’이십니다. 실제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단지 ‘인간’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따라서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리스도교는 ‘유일신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믿는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신들’(三神)이 아니라 내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삼위’(세 인격)로 존재하는 ‘한 하느님’을 믿는 ‘삼위일체론’ 신앙입니다.

게다가 ‘한 위’(인격)가 다른 ‘위격’보다 ‘열등하다’는 ‘종속론’(從屬論)도 아닙니다. ‘삼위’(三位)에서 ‘개별 위격’(位格)의 특성은 내적인 ‘상호관계성’(인류와 만물을 향한 구원의 역사 방식인 경륜적 행위까지 포함하여)이 원인이며, ‘한 본성(신성, 하느님) 안의 삼위(三位)’이십니다. ‘개별 위격’(位格)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활동하는(이러면 ‘세 신들’(三神)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 하느님들’이 결코 아닙니다. 서로를 꿰뚫어 함께 존재하는 사랑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 속에서 인류와 만물의 구원을 위해 온전히 일체(하나, 일치, 조화)로 역사하시는 ‘삼위(三位)이시고, 일체(一體)이신 하느님’입니다.

이렇듯 자칫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며, 관념적인 것으로 들리는 용어이고, 또 4세기에 정립된 교리이기에 어떤 분들은 ‘초대교회’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부들과 공의회가 그리스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응용해 ‘삼위일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후부터 교회가 비로소 믿기 시작했다는 식입니다. 한마디로 고대 교부들이 ‘사변’(思辨, 순수한 사유)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낸 교리가 ‘삼위일체’라는 생각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비록 ‘삼위일체’라는 용어 그 자체는 훗날에 등장했지만, 초대교회는 ‘이미’ 성찬례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진리의 성령을 향한 경배와 찬미를 바치고 있었음을 ‘성서가 증언’합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부 하느님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구원 역사를 펼쳐 가심을 체험했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매주일 아침,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례로 모일 때마다 신자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주신 성부 하느님께 감사를 바치고 있었습니다(요한 3:16). 성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워 사람으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를 바치고 있었습니다(필립 2:5~11).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성부 하느님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느님 안에 계셨음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요한 14:10; 17:21).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성부 하느님의 일이었음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요한 14:11). 이렇게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부와 성자가 ‘일체’라고 찬미와 경배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워(원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음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2고린 5:19).

또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상속자로 만들어 주시는 성령께 찬미와 경배를 바치고 있었습니다(로마 8:14~17).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계시며, 성령의 활동 속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계심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요한 16:13~15). 아버지, 아들, 성령을 동일한 감사와 찬미와 기도의 대상으로 예배하였습니다(2고린 13:13). 한마디로 “한 하느님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앙의 맹아(萌芽)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성서는 증언합니다(참고, 마태 11:27; 28:19~20; 루가 10:22; 요한 1:1~14,18; 14:9~14,23,26; 1고린 8:6; 2고린 13:13; 에페 1:3~14).

그렇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대로 초대교회가 성부, 성자, 성령께 바치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후대에 주교들과 ‘공의회’가 한 데 모으고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후대의 주교들과 공의회가 했던 것만큼 ‘삼위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기록해 놓진 않았지만 그 체험과 근거는 분명 ‘성서’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공의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定立)하게 되었는지도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교회 안에 발생한 교리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단, 異端)를 가진 이들이 교회 안에 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견해란 크게 ‘다신론’(多神論)과 ‘단일신론’(單一神論)이었습니다. ‘다신론’은 위에서 ‘삼신론’을 언급할 때 다루었습니다. ‘단일신론’(유일신론)에 속하는 이단 사설도 ‘아리우스’를 언급할 때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좀 더 세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처럼 ‘단일신론’(單一神論), 또는 ‘유일신론’(唯一神論)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믿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일신론’에는 대표적으로 ‘양태론’(樣態論), ‘종속론’(從屬論), ‘양자론’(養子論)이 있습니다. 우선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은 일종의 ‘엄격한’ 단일신론’(單一神論)입니다. 3세기에 살았던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으로 대표됩니다. ‘단일’(單一), 즉 ‘한 분’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역할(기능, 양상)을 각각 달리하여 나타났다는 ‘이단’(異端)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역사적 순서’에 따라 다른 ‘세 양태’(樣態)로 ‘계승’(繼承)되어 활동했다는 주장입니다. 한 사람의 모델이 ‘시간차’를 두고 새 옷과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오는 것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한 처음’ 창조와 율법 수여에서는 성부의 ‘모습’(양태, 양상)으로, ‘성육신’과 ‘수난’의 역사에서는 성자의 모습으로 ‘계승’되었고, ‘거듭남’과 ‘성화’(聖化)의 역사에서는 성령의 양상으로 ‘계승’되어 각각 다르게 활동했다는 식입니다. 아마도 가장 많이 들어보신 표현이 ‘구약’은 성부의 시대이고,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부터 승천까지는 성자의 시대이며, 오순절 성령강림부터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겠으나 ‘양태론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가 ‘니케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이미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공회’도 아니면서 영국여왕으로부터 ‘봉사상’을 받았다고 들먹이며 선전해 대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알려진 ‘안상홍 증인회’가 양태론에 속하는 이단입니다.

이렇게 ‘양태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어 ‘계승’해 나가기에 ‘삼위일체론’을 부정합니다. 삼위일체론에서 강조하는 ‘동시에 존재’하시고, ‘상호내주’ 하시는 ‘삼위’(三位)의 개체성과 독립성과 관계성을 부정하고, 굳이 말하자면 ‘단일위격’(單一位格)만 존재한다고 보는 이단 사설(邪說)입니다. 더욱이 ‘양태론’(樣態論)에 따르면 성자는 성부의 ‘계승’이기에 성자의 탄생은 성부의 성육신이 되어버리며, 성자의 수난과 죽음 역시 성부의 수난과 죽음이 되어 버립니다. 성부와 성자의 구별이 없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성서’와 교부들은 결코 그렇게 증언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삼위’(三位)는 영원 전부터 ‘공존’(共存)하실 뿐 아니라 서로 명백히 구별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묘사한 <공관복음서>를 떠올려보십시오. 성자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십니다. 그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며, 성부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마르 1:9-11; 마태 3:13-17; 루가 3:21-22). ‘삼위’(三位)는 같은 공간과 시간에 명백히 ‘공존’하십니다. 또 성자가 성부께 기도 드렸을 때처럼 ‘삼위’(三位)는 서로 구별되는 ‘위격’(位格)으로서 대화하실 수 있으십니다(마르 6:41; 14:36; 마태 14:19; 26:39; 루가 9:16; 22:42; 요한 6:11; 11:41-42; 12:18-30; 17:1-26; 요한 14:10). 예수님은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필립보’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한 14:10~11)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유다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란 말씀은 성부가 곧 성자고, 성자가 곧 성부란 뜻이 아닙니다. 성부가 성자 안에 사랑의 친교로 계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사랑의 친교로 계시며, 성령의 활동 속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나’(연합)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들어보셨을 ‘양태론’의 예는 이런 것들입니다. 비록 그 의도가 순수했을 지라도 신학적 사유가 부족한 유감스러운 설명들입니다.

먼저 삼위일체를 ‘1인 3역의 사람’으로 비유하는 경우입니다. 사제인 제가 어머니에게는 ‘아들’이요, 아내에게는 ‘남편’이며,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인 것처럼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엉터리’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처음부터 아들, 남편, 아버지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는 아들이었고, 시간이 지나 혼인하여 남편이 되었으며, 자녀들이 태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느님은 영원 전부터(‘처음’ 이전부터) ‘삼위’(三位)로 존재하시고, 창조이후에도 인류와 만물의 구원을 위해 ‘함께 연합’(하나)으로 활동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물’이 ‘얼음’과 ‘액체’와 ‘증기’로 변하는 것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엉터리’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명백히 구별되는 ‘삼위’(三位)로 인류와 만물의 구원을 위해 동시에 존재하시며 ‘함께 연합’(하나)으로 활동하시지만 ‘물’은 동시에 얼음, 액체, 증기로 한 자리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고온의 가스덩어리와 빛과 열로 이루어진 ‘태양’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엉터리’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고온의 가스덩어리, 빛, 열 각각은 그 자체로 ‘태양’이라 할 수 없지만 성부, 성자, 성령은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인격이 없는 물체가 아닙니다. 그 밖에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사용되는 ‘양태론’의 폐해가 많지만 여기서 줄입니다.

‘단일신론’에는 속하는 ‘종속론’(從屬論)도 이단입니다. ‘종속론’(從屬論, subordinationism)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는 ‘서열’(序列)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성부가 가장 높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께 ‘종속’되는 ‘열등한’ 하느님이라는 이론 사설(邪說)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위에서 보았던 ‘아리우스’입니다. ‘종속론자들’은 오직 성부께만 ‘영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고, 경배와 찬양과 기도를 바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종속론에 속하는 대표적인 이단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양자론’(養子論, adoptionism)은 ‘성부’만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양자론’도 일종의 ‘종속론’에 속하는 셈입니다.

주교들과 교부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이런 ‘잘못된 견해들’을 경계하고 ‘바른 신앙’을 정립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삼위’(三位) 하느님을 동등한 경배와 찬양과 기도의 대상으로 섬겨온 교회를 지키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정립의 과정에서 있었던 몇 차례의 ‘공의회’와 ‘인물들’을 여러분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의 신적 본질과 성부와의 관계에 대한 ‘니케아공의회’(325년)는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외에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 ‘에페소공의회’(431년), ‘칼케돈공의회’(451년)가 대표적입니다. ‘성공회’는 5세기 이전의 이들 4개의 공의회가 결의한 내용을 5대 권위들 중 하나로 삼습니다. 성공회 5대 권위란, “하나의 성서, 두 개의 성사(세례와 성체성사), 세 개의 신조(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네 개의 공의회, 5세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입니다. 또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말고도, 나지안조의 그레고리, 키릴과 네스토리우스라는 인물들도 삼위일체와 성자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론 및 그 부속 논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사실 교회사의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성삼위일체’ 하느님을 설명하기에는 인간의 말은 이미 한계적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신비’를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 어떤 그림이나 은유나 유추도 이미 실패한 설명들입니다. 심지어 <요한복음>을 읽어보아도 어리석은 저에게는 아직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속 시원히 꿰뚫리지 않습니다. 우리 짧은 머리로 다 헤아리기 어려워서 ‘부정의 신학’을 동원해서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며, ‘신앙의 신비’라고도 불립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증언해 주는 만큼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교부 ‘성(聖) 어거스틴’(Saint Augustine of Hippo, 354~430)처럼, 물 컵으로 바닷물을 재려한다는 심정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형상인 인간의 영혼의 생명력을 성찰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영혼은 기억합니다. 영혼은 압니다. 영혼은 사랑합니다. 분명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는 일은 세 가지 활동들이지만 한 영혼의 활동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격적인(개인적인) 활동들은 불완전한 연합(일치)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사랑과 의지는 일치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격적인(위격적인) 활동의 ‘완벽한 연합’입니다. 존재하시고, 아시며, 사랑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다른 개별 특성을 갖기에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삼신’(三神)은 아닙니다. 각각 동등한 하느님이시나 ‘일체’로 역사하십니다. 이처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말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력(智力)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어려움 때문에 삼위일체는 논리적 설명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영역이라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이처럼 성삼위일체대축일은 교회력의 다른 대축일(성탄일, 공현일, 부활일, 승천일, 성령강림일, 모든 성인의 날)이 구원사 가운데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념인 반면 ‘신학사상’(교리)에 관련합니다. 흔히 ‘신경’으로 대변되는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위에서 살핀 것처럼, 아브라함을 신앙의 선조로 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로부터 그리스도교를 구별하는 가장 독특한 차이점입니다. 또한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와 이단들을 식별하는 기준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인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가 인류와 만물의 구원을 위해 선포하는 모든 중요 ‘교리들’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입니다. 그 교리들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과 각 방들로 연결된 통로들을 열어주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이제 오늘 전례독서를 전체적으로 언급하며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부활 5주일’ 이후 우리가 읽어 온 <복음서>는 ‘연합’(하나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은 ‘대사제의 기도’(요한 17:1-26, 부활 7주일 복음서 본문이지만 올해는 ‘승천대축일’로 지켰기에 이 본문으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의 ‘연합’(하나됨, 일체)을 들려주시면서 우리의 ‘하나’됨(연합, 일체)을 간구하셨습니다(요한 17:11,21-26). 그 기도처럼 ‘성령강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한 몸)가 되는 교회가 탄생했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의 지체로 태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대사제의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지상의 교회가 보여주는 ‘연합’(하나됨)은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욕심과 미움, 많은 인간적 결함 때문에 그 ‘연합’과 ‘결속’이 쉽게 깨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에 비해 삼위일체는 우리 인간들처럼 ‘불완전한 결속’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실제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삼위’(三位)께서 어떻게 하나로 함께 존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완벽한’, ‘신성한’ 연합(하나됨)입니다.

오늘 2독서 <로마서>는 어떻게 ‘삼위’(三位)가 ‘일체’(一體)이신 하느님으로서 공동으로 협력하여 역사하시는지 그 하나의 예를 들려줍니다. 어떻게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지 사도 바울로는 교훈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의롭다함을 얻음)를 가지게 되었다고 교훈합니다. 올바르다(의롭다함을 얻다)는 것은 똑바로 정돈되고, 정렬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똑바로 정돈되고, 하느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성자 하느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께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성자 하느님은 성부 하느님께 대하여 우리를 위한 ‘중보자’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어 성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삶에 적용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그렇지만 삼위(三位),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일체’(연합, 하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찬례를 시작하고, 진행하며, 이 신앙을 신조로 고백하고, 강복을 통해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매주일 고백되는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경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우리 <기도서> ‘신앙의 개요’ 중 성부, 성자, 성령 항목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립니다. 우리는 ‘성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부는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하늘과 땅의 만물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 외에 ‘신’(神)이라 불리는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우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부는 참되시고, 거룩하시고 살아계십니다. 성부는 선하신 왕이시고, 착한 목자이시며, 만물의 보호자이십니다. 오늘 시편 찬양처럼 우리는 성부의 사랑, 힘, 지혜, 정의가 그 분의 창조세계 전체에 나타난 것을 찬양합니다. 온 우주는 성자와 성령을 통한 성부의 작품입니다. 손수 만드신 모든 창조의 솜씨는 찬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자는 오직 한 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는 성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세계에 앞서 성부께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성자는 성부 하느님의 유일하고 완전한 형상을 지니셨으며, 하느님의 본성, 즉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자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과 죽임을 당하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릴 수 없는 온전한 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성부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무덤을 정복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셔서 죽은 자들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하늘에 오르시어 우리를 위해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해 주시는 성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성령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령은 주님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협조자이십니다. 우리는 성령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령은 성자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시어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온전한 진리로 이끌어 주시고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성령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시며 더욱 성장하여 ‘복음’의 충실한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찬양합니다. 성령은 우리와 하느님의 모든 백성을 성화시키십니다.

부디 ‘성서’가 가르치는 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겸손히 받아들입시다. 성찬례에 참여한 형제자매들의 손을 잡고 우리 하느님, ‘거룩하신 삼위일체’께 찬미를 바칩시다. 성 아나타시오 신경처럼, “거룩하신 ‘삼위’(三位)에 ‘한 하느님’이시오, 한 하느님에 거룩하신 ‘삼위’(三位)이심을 흠숭(欽崇)합시다.” ‘서로’(相互)의 안에 ‘꿰뚫어’(침투하시어, 通) ‘함께 존재’(共在)하시며 친밀한 사랑의 교제와 연합(통일)의 춤’을 통해 우리와 만물을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경배를 바칩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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