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9. 성령강림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연기와 불 가운데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고, 성령의 불 가운데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주셨나이다. 비오니, 제자들에게 내리셨던 성령의 불을 우리에게도 주시어 서로 사랑하라 명하신 주님의 계명을 기쁨으로 지키게 하소서.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1-21
  • 시편 – 104:24-34, 35하
  • 2독서 – 로마 8:14-17
  • 복음서 – 요한 14:8-17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성령 – 예수의 일을 지속해 나가도록 교회를 인도하시는 협조자’입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시간’(때)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k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크로노스’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선형적인 시간’(linear time)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따른 밤낮 하루와 계절의 변화처럼, 객관적이고, 정량적인(Quantitative, 양이나 수치화 하여 분석이 가능한) 시간입니다. 간단히 만물이 생성소멸 하는 ‘수평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카이로스’는 그 크로노스 위에 ‘수직적’으로 불현 듯 찾아든(혹은 크로노스를 깨고 개입한) ‘결정적인 순간’(Absolute moment)이나 ‘적절한 시점’(The right moment)입니다.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기회’(opportunity)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중요하게 요청되는 주관적이고, 정성적인(Qualitative, 양이나 수치화 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를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유한한’ 인생(시간)이 하느님, 즉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도 없이 ‘영원한 현재’이신 하느님과 만나(인생에게 드러나) ‘삶의 입체적 대전환’이 일어나는 ‘초월적이고 특별한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실행되고 성취되는 ‘궁극적 기회’의 펼쳐짐입니다. 다시 말해 ‘유한’이 ‘영원’을 품게 되는, 영원성이 지금 여기서 성취되는 ‘질적 도약’의 순간입니다(믿음이라는 말이 이 뜻이라고 2017년에 ‘인디아나 존스’ 영화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크로노스’가 죽어가는 ‘수명(壽命)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크로노스 속에서 구현되는 ‘생명(生命)의 시간’, ‘의미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수명’(壽命)의 시간인 ‘크로노스’를 ‘생명’(生命)의 시간인 ‘카이로스’로 만드는 ‘삶의 대전환’을 감행하도록 초대된 이들입니다. ‘크로노스’를 살다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의 ‘부활생명’, 즉 ‘영원한 현재’를 우리 자신을 위한 선물로 성취하라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의 결단’을 통해 주어진 기회에 ‘믿음’으로 담대히 ‘응답’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성찬례’는 이 ‘카이로스의 초대’(기회)를 자기 안에서 이루어가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향연’(饗宴)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한 우리는 완성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회’(시간, 행운)란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 ‘형상’(形狀)이 독특합니다. 앞머리는 길고 무성한데 뒤통수는 매끈한 대머리입니다. 옷을 벗고 다니는데 어깨에는 큰 날개가 있고 발뒤꿈치에도 작은 날개가 있습니다. ‘카이로스’를 이렇게 묘사한 이유가 뭘까요? 일단 옷을 벗었기에 사람들 눈에 잘 띕니다. 하지만 길고 무성한 앞머리가 얼굴을 가려서 그가 ‘기회’(카이로스)라는 것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만일 처음부터 알아봤다면 그를 쉽게 붙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지나친 다음에야 뒤늦게 그를 알아차리고 잡으려 하지만 붙잡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있어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기회’는 단박에 알아봐야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신화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크로노스’(수명)를 어찌할 순 없지만, 이 하루하루를 성령의 은총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회’(카이로스)로 만들어 갈 수는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수명’(壽命)의 시간인 ‘크로노스’의 지배를 받다 사라져갈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양자(養子)의 영’이십니다. 하느님이신 ‘성령’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가지고 우리가 노예처럼 살아가는 ‘수명의 시간’ 속으로 ‘결정적으로 개입’해 오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생명’(生命)과 ‘의미의 시간’인 ‘카이로스’로의 대전환을 우리 속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이 대전환의 새 시대를 열어주신 성령과 그로인해 탄생한 교회공동체를 기념하는 대축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일성찬례 전례독서들은 <복음서>의 배경(보충)역할을 위해 배정됩니다. 그만큼 <복음서>가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기에 오히려 성령 보내심을 약속하는 <복음서>가 1독서와 2독서의 배경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말씀 나눔도 <복음서>로부터 시작해서 1독서, 2독서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1독서 <사도행전>은 2017년과 2018년에 중점적으로 다룬 바 있음으로 별도로 다루지 않고 복음서 내에서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겠습니다.

오늘 전례독서 각각의 요지(要旨)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께서 성령을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2독서 <로마서>는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양자의 영’이시기에 그 인도를 따라 살라는 교훈입니다. 시편 <104편>은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기리는 찬미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입김’을 부어넣으시면 만물은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30절). 하느님의 ‘입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Ruach, 여성명사)는 ‘영, 바람, 숨, 마음’으로도 번역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죽어가는 모든 피조물을 다시 살게 해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오늘 전례독서 찬미로 선정되었습니다.

<복음서>부터 차례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십자가 수난 직전의 ‘고별설교’ 중에서 배정되었습니다. 지난 ‘부활 6주일’에 <복음서> 본문(요한 14:23~20)을 다루면서 전체적으로 한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다양한 주제가 이어지는 긴 본문의 도입부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듣던 제자들은 마음이 산란하여 좀체 그 말씀들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3년이라는 기나긴 ‘양적 시간’(크로노스)을 어찌하고 자신들을 남겨둔 채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인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더라도 다시 올 것이기에 걱정할 것 없다고 위로하시지만 그들 마음의 먹구름은 좀처럼 거둬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토마의 질문 후에 ‘필립보’가 간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 요한 14:8

‘바랄 것이 없다’는 말은 ‘충분하지 않다’, ‘만족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충분하다. 넉넉하다. 유익하다, 만족하다’입니다. 원문대로 옮기면 “우리가 충분하겠습니다.”입니다. 점잖게 번역했지만 간청의 ‘분위기’는 충분치 않다며 ‘경망스럽게 안달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말을 똑같은 단어를 써가며 이미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입니다(요한 6:1~15).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 – 요한 6:7

그가 “모자라겠습니다.”라고 한 말이 본문에 쓰인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로 번역한 단어와 같습니다. 그는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빵도 갖고 있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안달’하더니 이제는 예수님을 향해서도 “스승님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라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스승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직접 본다면’ 자기 삶이 완전히 바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번만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다면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질 텐테…’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요한 14:9

이 말씀의 분위기가 느껴집니까? ‘오랫동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랫동안’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설교 첫머리에 ‘크로노스’는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정말 ‘오랫동안 같이’ 있어 왔지만 그와의 관계에서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탄식에 비추어볼 때 ‘깨달음’이란 꼭 ‘양적인 시간’과 관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성당 계단을 오르내렸으면서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한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알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친밀한 교제가 필요하며,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둘 만의 내밀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상적인 ‘크로노스’의 시간만 가지고는, 친밀한 교제(관계맺기)를 회피하는 ‘익명의 신앙생활로’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둘만’의 보다 내밀한 ‘의미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예수에게 누구이고,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지 서로에게 의미부여하는 그런 ‘질적인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을 양적인 시간인 ‘크로노스’와 비교하여 ‘카이로스’(kairos)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의미의 시간, 질적인 시간’입니다. 간단히 ‘크로노스’가 ‘타자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나의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세속의 시간’(크로노스, chronos)을 ‘의미로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카이로스, kairos)으로 성화시키기 원합니다. ‘교회력’도 사실은 그런 산물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의 여정과 죽음, 부활과 승천,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강림 사건’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중요한 사건들을 ‘자연적인 시간’(chronos)을 나타내는 달력 위에 위치시킵니다. ‘자연적인 시간’을 살면서 생물학적으로 쇠퇴해가는 우리가 그 시간을 ‘의미로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가자는 의도입니다. 특히 그 중요한 사건들이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의 일부로 재현될 때 우리의 삶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사건이 2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 되는 축복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이 여러분에게 그런 ‘카이로스’이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좀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신이 누구인지 명백히 말씀해 주십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 요한 14:9

만일 그 자리에 제자들 말고 ‘당국자들’이 있었다면 큰일 날 말씀입니다. “내가 곧 하느님이다”라는 ‘신성모독’으로 들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필립보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고 명백히 이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자신을 아버지와 ‘동격’으로 놓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듣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나 봅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빛을 보고 한 말씀 더 하십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 요한 14:10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다르지만 ‘상호내주’, ‘상호공속’ 관계임을 명백히 하십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볼멘 간청이 교회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답변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 입으로부터 삼위일체의 맹아(萌芽)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낯빛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졌습니다. 그를 안타깝게 여기며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요한 14:11

예수님은 그의 간청에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가지고 최종 답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없다면, 그 ‘일들’에 ‘의지’해서라도 ‘믿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들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이미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 일들이란 무엇이었습니까?

‘부활 5주일’ 1독서 <사도행전>에서 들은 것처럼, 베드로는 ‘고르넬리오 집 사람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설교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 사도 10:38

베드로가 설교한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루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은 보게 함을,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시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은총의 해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루가 4:18-21).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 일들’을 하셨습니다. 질병과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은 고쳐주시고, 율법의 짐에 허덕이며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르침으로 쉼을 주셨으며, 세리와 죄인들, 장애인들로 대변되는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 주셨습니다. 이런 치유와 해방과 연대의 일들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일만 마디 말보다 때로는 ‘행동’ 하나면 아버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사실 ‘이론’으로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일들’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증명한다고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일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증명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받은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고 행하는 일들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일들입니까?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보여주고 있는 일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외에 우리에게 하느님 체험을 가장 완전하게 시켜 줄 그 밖의 존재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상호내주’, ‘상호공속’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 ‘진실’을 아무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협조자 성령’이 그 속에 임하여 계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 ‘진실’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협조자 성령’이 도와주셔야 비로소 예수님의 모든 것이 아버지를 향해 있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협조자 성령’이 마음을 열어주셔야 그 순간 예수님이 아버지께 의지하며 사셨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마음대로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요한 5:19). 아무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씀하셨음을 깨우치게 됩니다(요한 8:28).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고, 도와주셔야’ 우리는 ‘일순간’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관통’합니다. ‘양적인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아버지와의 ‘상호내주’, ‘상호공속’ 관계의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걱정과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세 가지를 ‘보장’하십니다. 오늘 배정된 <복음서> 본문은(8~17절) 그 중 두 가지를 다룹니다. 나머지 하나에 해당하는 ‘평화’는 ‘다해 부활 6주일’ 말씀 나눔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보장’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우리) 역시 ‘아버지의 일들’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고 ‘보장’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일’에서 ‘예수님의 일’로, ‘예수님의 일’에서 ‘제자들의 일’로 점점 확산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도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시작하신 ‘예수 운동’(하느님 나라 운동)이 ‘계속’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요한 14:12~14).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그것으로 ‘예수 운동’은 끝이고, 자신들도 흩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시작하고 진행하신 ‘예수 운동’을 제자들이 계속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큰 일을 하도록 장려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기 때문이다. – 요한 14:12~13a

‘예수 운동’은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다고 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느님으로 아들로 믿고’(요한 20:31),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들을 통해 더 위대하게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운동’이 더 위대하게 지속되기 위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아직 ‘한 가지’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독서 <사도행전>을 통해 밝혀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한 몸, 즉 ‘교회’로 세워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일들(아버지의 일들)은 결코 홀로 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들을 하려면 ‘하늘 생명 공동체’, 즉 ‘교회’가 먼저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일들을 하게 됩니다. 결국 ‘카이로스’의 시간인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예수님의 일들을 행하는 교회를 탄생시킨 어머니입니다.

더욱이 교회는 그들 ‘개인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일들을 행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의 정신’을 ‘자신의 정신’으로, ‘예수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예수의 동기’를 ‘자신의 동기’로, ‘예수의 실천’을 ‘자신의 실천’으로, ‘예수의 사랑’을 ‘자신의 사랑’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지도 않으며, 예수의 이름을 ‘주문’(呪文)처럼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주님과의 연합, 일치, 사랑’입니다. 오늘 2독서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이들의 기도는 응답되며 그 때에 아버지께서는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새로 탄생한 공동체인 제자들이 행하는 일들은 이 땅에서 예수를 보여주는 일들이고, 그들이 예수를 보여준 일들은 종국에는 아버지를 보여주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탄생한 교회인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 것인가? 예수님은 교회인 우리가 무엇을 구하기를 바라실까?” 라고 성찰해 보는 일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첫 번째 보장’은 오늘 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았듯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따르는 ‘수행 공동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 즉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탄생한 교회의 ‘종’인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삼천 명’이나 신도가 될 정도였습니다(사도 2:41).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이 ‘첫 번째 보장’은 송파 지역의 교회로 탄생한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사랑과 계명의 순종’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과의 연합, 일치, 즉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이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요한 13:34). 이 계명은 모세가 전해 준 그 어떤 율법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은 항상 ‘새 계명’을 지키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새 계명’에 대한 ‘순종’이며, 그렇지 않다면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불순종’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체’ 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지 않지만 ‘사랑하는 이’는 진정으로 ‘새 계명’에 순종합니다. 그 순종은 두려움 때문도 아니고 축복을 받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순종의 원천과 본질도 항상 ‘사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는 단식이나 고행, 독특한 옷차림이나 어떤 표식을 가지라고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켜라.” 오직 이것만을 명령하셨습니다.

사랑과 계명의 순종을 언급하신 후에 예수님은 ‘두 번째 보장’을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 요한 14:16

‘협조자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주신다는 ‘보장’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떠나가시면 그것으로 ‘예수 운동’은 끝이고, 자신들도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기에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버려진다’는 걱정과 두려움 속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들은 더 ‘큰 도움’(힘)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협조자’(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즉 ‘성령’을 보내주시어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이 ‘보장’의 성취과정을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한 이미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 담긴 의미는 2017년과 2018년, 성령강림대축일 말씀 해설로 올린 바 있음으로 오늘은 별도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Pentecost – Acts 2:1-4

예수께서는 제자들(우리들)이 ‘아버지의 일들’인 ‘예수 운동’을 하려면,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면’, 하느님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약속하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성부께 간청할 것이고, 성부께서는 “예수의 일들을 계속하도록”(사실은 당신의 일들을 계속 하도록), 그리고 “내 계명을 지키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신 이 말씀은 초대교회사에서 삼위일체의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본문에 ‘협조자’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가 명사화된 단어입니다.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는 ‘옆에, 곁에’를 의미하는 ‘파라’(παρά)와 ‘부르다’를 의미하는 ‘칼레오’(καλέω)의 합성어입니다. ‘자기 곁으로 부르다’, ‘초청하다’, ‘격려하다’, ‘간청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나란히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 법정’입니다. 법정에 선 어떤 사람 ‘옆에서’ 그의 주장을 대신 호소하거나 도와주는 ‘법적 방어자’(조언자, 옹호자, 대언자, 중재자), 오늘날로 말하면 ‘변호사’를 말합니다. ‘옆’에서 도움을 주기에 ‘협조자’이고, 또한 ‘옆’에서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기에 ‘위로자’(상담자)입니다. 따라서 ‘협조자’(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은 우리 편에 서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 ‘간청’하시는 ‘변호사’(옹호자)이시며(이에 비해 사탄은 ‘고발자’, ‘비난자’, ‘반대자’), 어려울 때 ‘힘’이 나도록 ‘위로’하시는 ‘위로자’(조언자, 상담자)가 되십니다(요한 14:16, 26; 15:26; 16:7).

더욱이 ‘다른 협조자’란 말씀은 예수님 역시 ‘협조자’이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첫 번째 ‘협조자’이셨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밝혀줍니다(요한 1:14).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협조자”이셨습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의 ‘협조자’이셨고, 성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게 해주신 ‘협조자’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위격은 성자와 구별되지만 예수님의 본질을 그들에게 알려주실(요한 14:26; 15:26) 똑같은 ‘협조자’이십니다.

이처럼 성부께서 성자의 이름으로 보내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상생애 동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되새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27). 성령은 예수께서 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을 대행케 하십니다(요한 14:12).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첫 번째 ‘협조자’ 예수님처럼,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아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한 14:17; 16:7~11). 믿는 이들을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시고,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시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입니다(요한 16:13~15).

그렇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 안에 영원히 함께 계시는 ‘성령’은 ‘하느님’이십니다(요한 14:16~17). 감사하게도 우리 안에 한번 선물된 성령은 결코 철회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으로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거짓의 세상’은 결코 ‘진리의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첫 번째 협조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맞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1:10~11). 반면에 하느님이 택하신 자녀들은 알아보고 영접합니다(요한 1:12). 그들 안에는 진리의 영이 계시며, 진리의 영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자녀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2독서 <로마서>도 성령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이 신비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과 전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갑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양자(養子)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새길 수 있습니까? <로마서> 말씀을 다시 잘 새겨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로마 8:14

바울로는 “성당에 자주 오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찬례에 자주 참석하여 성체를 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유일한 기준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은 일상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문제는 ‘성령의 인도’를 ‘식별’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일 중에 하나가 ‘인도’(이끄심)입니다. ‘인도’라는 말은 강제로 ‘끌고 간다’거나 ‘몰고 간다’란 말이 아닙니다. 일종의 ‘협력’입니다. 한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문에 쓰인 ‘인도’라는 단어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선도자’(先導者)에게 의지적으로 협력할 때 그는 우리를 잘 이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티거나 반항하면 선도자는 이끌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강제로 끌고 가는 공포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당신의 이끄심에 순종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반면에 ‘악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악령이 사람 속에 들어있을 때는 그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짐승에게 들어갔을 때는 ‘죽음’으로 격렬하게 몰아댑니다(마르 5:1~13). 사실 ‘광신’과 성령 안에서의 ‘열정’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든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교회 공동체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게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품위’를 떨어드리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 자녀다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느님 자녀다운 삶에 맞지 않을 때 성령은 우리가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진리’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사랑’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거룩한 생활’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가치 있는 삶’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은 하느님과 더욱 친밀하고 즐거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율법의 속박이나 숨 막히는 공포와 달리 자유를 줍니다. 성령을 힘입어 하느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기에 마치 아이처럼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사도 바울로의 이 같은 교훈이 낯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하느님과 그런 관계를 맺기에 부적격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입니다(2고린 5:17). 더욱이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증언하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증언하시기에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압니다. 율법에는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그 증언이 성립이 됩니다(신명 17:6).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증인은 둘입니다. 우리 자신과 성령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어떤 특권과 책임이 따릅니까? 소설 『벤허』에 보면 ‘유다’는 로마 함선의 사령관 ‘퀸투스 아리우스’를 익사 직전 구해 줍니다. 그 일로 유다는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그의 양자로 입양되어 모든 재산을 물려받습니다. 이처럼 1세기 로마가 지배하던 시절 어느 가문에 입양되면 그의 삶과 지위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입양되기 전 옛 가문에서의 빚이나 신분은 사라지고, 새 가문에서 전혀 새로운 권리를 얻습니다. 입양된 양자에게 그 어떤 과거도 영향을 끼칠 수 없었습니다. 보통 양자는 양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영구화하고 재산을 상속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한 ‘후계자’였습니다. 비록 입양된 ‘양자’이지만 그 신분은 친부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동등이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양자(養子)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듯이 우리도 아버지와 관련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권이란 무엇입니까?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공동 상속인입니다. 알렐루야!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상속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나누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영광도 함께 받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현재의 고난이 미래의 영광을 위한 조건임을 눈 뜬 이가 복됩니다. 인간인지라 고난 없는 상속과 영광을 받기를 바라지만 정확히 말하면 고난과 영광, 고난과 상속은 한 묶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수명’의 시간인 ‘크로노스’의 지배를 받다 사라져갈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 인생들에게 하늘로 오르신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양자(養子)의 영’이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가지고 우리 ‘수명의 시간’ 속으로 ‘결정적으로 개입’해 오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생명’(生命)과 ‘의미의 시간’인 ‘카이로스’로의 대전환을 우리 속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이 대전환으로 탄생한 교회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더욱이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고치고, 살리는’ 아버지의 일, 예수의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생명 공동체’인 교회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치고 살리는’ 아버지의 일, 예수의 일을 통해 우리는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물론 치유와 행방과 연대라는 ‘고치고 살리는’ 그 일들을 해나가는 과정에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고난 앞에서 멈추거나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영광, 고난과 상속은 한 묶음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진리의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교회가 예수님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아버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도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 우리교회가 ‘고치고 살리는’ 아버지의 일, 예수의 일을 더욱 많이 실행하는 ‘생명 공동체’로 존재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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