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2. 승천대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어 영광을 받으셨나이다. 간절히 비오니,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는 우리가 비록 육신은 땅에 있으나 하늘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1:1-11
  • 시편 – 47
  • 2독서 – 에페 1:15-23
  • 복음서 – 루가 24:44-53

승천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주님’입니다.

‘성서’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경전이자 토대입니다. 그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권위를 갖습니다. 성서가 갖는 이 특별한 권위를 압축적으로 요약한 표현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성찬례에서 ‘성서’가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임을 드러내는 순서는 ‘전례독서 낭독’입니다.

1, 2독서 낭독 후에 독서자는 “주님(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느님의 현존을 선포합니다. 말하자면 그 순간 독서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도구’로 사용된 셈입니다. 회중은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느님의 현존에 응답합니다. 말 걸어오시는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잠시 머무르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이처럼 ‘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지금 여기 현존하시고, 듣는 사람 모두를 향해 말씀하고 계심을 독서자와 회중은 고백으로 함께 드러냅니다. 더욱이 성찬례 문구 뿐 아니라 『기도서』 전체가 ‘성서’를 토대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성공회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토대한 교회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좀 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 직접 전해주신 말씀’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특히 전례독서낭독 전통을 갖고 있는 성공회 신자들은 이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분명 독서낭독은 ‘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지금 여기 현존하시고, 듣는 사람 모두를 향해 말씀하시고 계심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독서자의 선포에 담긴 의미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입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는 선포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은유적’입니다.

‘은유적’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령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애인을 향해 ‘당신은 한 송이 장미’라고 쓴 편지를 우리가 읽는다면 ‘아, 이 사람 애인은 장미구나…’ 라고 ‘문자 그대’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장미’는 ‘애인에 관한 표현’입니다. ‘장미’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언어(말, 문자)를 통해 둘 사이에 오가는 ‘특별한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서’ 낭독 후에 ‘하느님의 말씀’이라 선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표현된 언어(말, 문자)를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해’ 말해주며,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신성한 도구’입니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갖는 은유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말’(말 그 자체의 언어적인 요소 뿐 아니라 시각, 청각적인 비언어적인 요소까지 포함하여)은 ‘의사소통의 도구’입니다. 말은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상대방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목적’과 ‘기능’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 칭하는 이유는 ‘성서’가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이며,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뜻에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거룩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이 손수 기록하시어 남겨주신 책이라서가 아니라 비록 성서가 수세기에 걸친 ‘인간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목적과 기능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하고 권위가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이라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 요한 1:14a

‘요한’은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말씀’이자, 인간의 생명을 입고 우리와 함께하신 ‘말씀’이라고 증언합니다. ‘음성’이나 기록된 ‘문자’ 뿐 아니라 ‘인간’도 ‘하느님의 말씀’일 수 있다는 놀라운 표현입니다. 구약성서, 즉 ‘문자로 기록된 책’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떠받들고 살던 시대의 사람들을 향해 <요한복음> 기자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드러내고, 하느님과 우리를 소통케 하며, 서로를 이어주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물론 이러한 ‘참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일차적으로 ‘문자’로 기록된 ‘말씀’인 ‘성서를 통해’ 알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표현대로 하자면 문자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는 하느님의 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구유”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할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표현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 직접 전해주신 말씀’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표현은 ‘하느님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말씀’이기에 성서가 기록된 ‘고대의 역사 · 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록된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는 은유적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을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성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직접 만드신 산물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산물’입니다. 더욱이 그들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인 이야기들’로 ‘구약성서’는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한 말씀’인 구약성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시각(세계관)과 그들을 둘러싼 역사 · 문화적 배경을 아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서는 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산물입니다. 1세기에 기록된 책이기에 그 시대의 역사, 문화, 세계관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특히 <복음서>가 ‘유대인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라는 배경을 아는 일은 중요합니다. 유대인이었던 <복음서> 기자들은(루가 역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입니다) ‘구약성서’ 특히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신학적 목적’에 맞게 정교하게 녹이고, ‘재해석’(의미주기)하여 ‘예수 사건’을 구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참 말씀이신 예수 안에서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희망’을 교회공동체에게 이야기하는 수단이 바로 <복음서>입니다(루가 1:1~4). 이런 이야기 방식을 ‘미드라쉬적 서술 방식’이라고 합니다.

말씀 나눔을 위해서 간단히 ‘미드라쉬’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미드라쉬는 ‘찾다’, ‘연구하다’는 동사인 ‘다라쉬’에 명사형 ‘미’를 붙인 말로 ‘설명’,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그래서 단 하나의 뜻만을 갖는 것으로 여김)의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에 관심하기 보다는 기록된 이야기의 보다 깊은 의미들(본래 의도)과 넓은 이해들을 변화된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추구하는 ‘성서 해석 방식’입니다. 대표적으로는 구약성서 ‘룻기’가 미드라쉬 역사서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문자 너머의 보다 깊은 의미들을 후대에 물려주는 일을 한 이들이 바빌론 포로기 후의 ‘랍비’(율법학자)들입니다. ‘에즈라’가 대표적인 ‘랍비’입니다. 한마디로 ‘미드라쉬’는 문자적,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보다 당시 청중들을 가르치고 격려하여 교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재미있게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딱딱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철학보다는 이야기 방식으로 진리를 담아 전달하면 훨씬 이해하기도 쉽고 오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이런 ‘유대적 관점’을 놓치거나 <복음서>를 읽을 때도 ‘미드라쉬적 서술 방식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음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서는 마치 ‘성서’가 유대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기록된 것처럼 오해합니다. 또 복음서 이야기를 기록된 ‘문자 그대로’ 일어난 사실 보도일 것이라고 문자에 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서>에 기록된 특정 이야기들이 상충된다는 점을 발견하는 순간 몹시 곤란해집니다. 가령 마태오와 루가의 예수 탄생보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문자 근본주의자들’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서>는 기자들이 유대인 선조들의 ‘신성한 유산’에 바탕을 두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해석’(미드라쉬적 서술 원리에 따라)해 놓은 일종의 ‘신학 책’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이들이 예수 안에서 발견한 하느님, 영원한 생명, 참 생명, 새로운 삶을 당시 교회공동체에게 전해준 책입니다. 그들이 참고한 신성한 유산 속에 담긴 핵심은 선조들의 ‘하느님 체험’에 있습니다. 그 선조들처럼 그들도 어느 순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 현존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나자 그 체험의 순간을 해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때 참고한 이야기가 ‘신성한 유산’인 ‘구약성서’입니다. 알고 있는 신성한 이야기들 중에서 자신의 체험과 비슷한 이야기를 찾아내어 그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자신들의 <복음서>에 ‘미드라쉬’적으로 풀어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서에 있는 그 많은 이야기들과 흡사한 이야기가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담긴 진리는 ‘유대인의 렌즈’를 통하여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목적은 명백했습니다. 구약성서의 그 어떤 영웅보다 예수님이 훨씬 ‘위대한 분’임을 증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성서의 예언을 성취’한 ‘그리스도’시라는 목적 말입니다(루가 24:25~27,44~48). 다시 말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요한 20:31; 마르 1:1; 16:16).

그러나 그 의도가 만들어낸 결과물, 즉 <복음서>는 자신들과 공동체에게 ‘위험천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1세기 당시 ‘평화’(팍스 로마나)와 ‘구원’을 가져다주었다고 칭송 된 이는 ‘신의 아들’이자 ‘주님’으로 불린 로마 황제(특히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 불린 ‘옥타비아누스’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대제국 로마 황제가 ‘복음’(기쁜 소식)이던 시절입니다. 그런 시절을 살면서도 <복음서> 기자들은(특히 루가) 온 세상에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진정한 주님’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마태 28:18; 루가 2:1, 요한 14:27; 16:33). 자신들의 <복음서>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체험하고 평화와 구원을 얻도록 초대했습니다.

오늘 ‘승천일’에 낭독한 <복음서>는 <루가복음>입니다. 우리는 ‘루가’가 ‘예수 사건’의 의미를 밝혀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구약의 이야기’(신성한 유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승천’입니다(열왕하 2:1-18). 이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시면 ‘엘리야의 승천’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뿐 아니라(루가 24:50-51; 사도 1:1-11) 루가가 자신의 <복음서> 후편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강림사건’(사도 2:1-4)에까지 정교하게 녹아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분이 본문을 대조하면서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예수님이 엘리야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서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셨음을 루가가 강조한다는 점은 기억하십시오. 엘리야는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들 없이도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이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저 대기권 밖으로 가셨다는 뜻입니까? 사실 마르코복음, 루가복음, 사도행전에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처럼 ‘문자 그대로’ 지금도 저 하늘 어딘가에 하느님의 옥좌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하는 데는 우리가 매주일 성찬례에서 바치는 니케아신경과 사도신경도 한 몫 합니다.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서는 고대인들에게 고대인들을 향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서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사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서에는 역사적 문화적 한계가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성서 속 고대인들은 이 세계가 ‘삼층 구조’로 되어있다고 믿었습니다. 맨 위에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이 있고, 중간에 인간이 사는 ‘땅’이 있으며, 땅 밑에는 ‘지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과학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좀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 신앙’이 없던 적은 없습니다. 우리말 하느님도 ‘하늘’과 ‘님’의 합성어이니, 우리 선조들 역시 하늘을 인격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때의 하늘은 ‘문자적’ 하늘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적’, ‘상징적’ 하늘입니다. 유한한 삶에 대한 ‘무한성의 상징’이고,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는 ‘생명의 상징’이자, 때로는 천둥과 벼락을 내리는 ‘심판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을 느꼈고, 불변하는 어떤 힘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옛 사람들은 ‘하늘’을 ‘계시와 권위의 원천’으로 상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대인들의 ‘삼층구조’나 ‘하늘의 이미지’는 과학적 발견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주는 무한하며, 인간 삶의 토대인 이 지구가 우주 공간 안에서는 정말 먼지 한 점 만도 못할 만큼 미미하다는 사실을 오늘의 우주과학이 밝혀냈습니다. 동시에 우주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 자체가 곧 하늘입니다. 땅 아래도 하늘이고, 땅 위도, 옆도 하늘입니다. 나 자신이 그대로 하늘의 한 복판에 있는 셈이고, 하늘 아닌 곳이 없는 셈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고대인들의 세계관과 사고에서 볼 때, 예수님이 승천했다고 전하는 성서의 하늘이란, 분명히 저 높은 공간 어딘가를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 땅마저 사실상 하늘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 오늘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다거나, 심지어 구름을 타고 다시 오리라는 이야기는 이제 당시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현으로서만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면, 고대인들의 그러한 세계관이 오류이니까 그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들은 못 믿을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근본주의자’에게는 오늘날의 과학적 사실과 대치되는 성서 속 이야기들이 난감한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된 ‘문자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것을 미드라쉬적 서술 방식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은유’와 ‘상징’의 창으로 성서를 더 넓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복음서> 저자들을 포함하여 문자사실주의라는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는 오늘의 우리) 전혀 난감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승천 이야기를 은유와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사실’ 이야기로 보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승천 이야기는 복음서 중에서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에만 직접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는 한 구절로 아주 짧게 처리되어 있고(마르 16:19), <루가복음>에는 두 절로 처리되어 있습니다(루가 24:50-51). 승천 장소도 <마르코복음>은 특정하지 않지만 <루가복음>은 예루살렘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베다니아’ 근처라고 기록했습니다(루가 24:50). 다만 승천의 앞 선 이야기로 보이는 <마태오복음>에는 따르면 예수님의 승천은 ‘갈릴래아에 있는 산’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마태 28:16).

더욱이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책인데도, 승천이 일어난 ‘시점’이 다릅니다. <루가복음>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도행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이 지나서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사람의 저자가 기록한 책인데도 ‘승천 시점’ 보도가 서로 ‘차이’가 납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둘 중 어느 하나가 ‘사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 합니다. 만일, 승천 이야기를 ‘근본주의자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사실’ 보도로 믿게 될 경우에는 대답할 수 없는 난감한 문제에 빠집니다. 그러나 ‘은유’와 ‘상징’의 창으로 더 넓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승천 이야기에 담긴 ‘문자 이상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승천 이야기의 문자적 사실 여부보다 그 배후에 있는 그들의 ‘체험’에 주목합니다. 다시 말해 승천 이야기를 기록한 ‘루가’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게 된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무엇을 전하고 싶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런 이미지를 루가가 선택했는지를 주목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승천 이야기에 담긴 ‘문자 이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승천 이야기를 통해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우리에게 쓴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첫째, ‘승천 이야기’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은 ‘절대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는 선포입니다. ‘절대 생명’이신 하느님이 모든 곳에 계시듯 ‘예수님도 모든 곳에 계시다’는 뜻입니다(사도 17:28). 이렇게 예수님이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 ‘승천’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모든 곳에 계시기에 믿음으로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이는 언제든 ‘절대 생명’이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승천 이야기에 담긴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둘째,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이 더 이상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참으로 ‘자유’하신 분이라는 선포입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살과 피’를 가진 역사적 실체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의 은유는 더 높은 시야, 더 넓은 시야, 가장 큰 시야, 종국에는 하느님과 같은 시야를 갖게 됨을 뜻합니다. 바닥에 있을 때 보다는 3층이, 3층 보다는 10층이 더 멀리, 더 넓게 보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승천이란 가장 큰 시각을 가졌다는 뜻으로 다른 말로 하면 ‘자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승천은 ‘자유’의 길을 보여줍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인생의 여러 벽들로부터의 자유, 한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땅에 붙어있는 낮은 시야로 ‘아옹다옹’ 다투며 살던 우리가 어느 날 예수 체험을 통해 더 높은 시야, 더 큰 시야를 갖고, 죽음을 상징하는 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이것 역시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승천’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셋째,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께 모든 ‘주권’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2독서 <에페소서>는 예수님이 ‘주권자’이심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신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또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 에페 1:20~21

오늘 노래한 시편 47편도 주권자로 왕위에 오르시는 주님께 손뼉을 치고, 기쁜 소리 드높여 환호하라고 초대합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도 주님의 왕 되심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 마태 28:18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파노’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 사도 7:56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 찬가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 필립 2:9~11

이처럼 ‘신약성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다고 선포합니다. 그 승천은 예수님이 ‘승리자’이심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이 선포에 기초해 만들어진 고백이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에 나오는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라는 신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위의 성서말씀들을 읽거나 신경들을 고백할 때, 거기 씌어 있는 ‘문자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느님에게는 ‘오른편’이나 ‘왼편’이 따로 있고, 예수님도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앉아 계신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른편’이나 ‘앉아 있다’는 표현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유적인 말’이었습니다.

고대 군주제 하에서 왕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자는 가장 명예로운 자, 가장 총애를 받는 자, 왕과 같은 권한을 가진 자를 뜻했습니다. 따라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은유적인 말을 들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주권을 가지신 승리자’이시고,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고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승천 이야기에 담긴 이런 의미를 박해시절을 살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른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설교 첫 머리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이 세상에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참된 주인인가? 누가 진정한 주권을 가졌는가? 대제국 로마의 황제인가? 아니면, 저 보잘 것 없는 식민지 유대 출신의 예수인가?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승천을 믿는다는 것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 우주의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심장’을 걸고 믿고 따른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심장을 걸고서 믿고 따른다는 뜻이 신경(Credo)이라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승천’은 은유적으로 온전히 ‘비움’을 뜻합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자유’하고도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갈망이든 욕망이든 욕심이든 ‘온전히 비운 이’만이 가장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비운 이가 도달하는 곳이 은유적으로 하느님 가장 가까이를 뜻하는 ‘오른편’입니다. 이렇게 ‘승천이 온전히 비움’을 가리키는 은유라면, 1독서 <사도행전>의 ‘성령의 약속’은 하느님이 뭔가를 채워주심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오순절 사도들의 성령 체험은 하느님의 채워주심, 즉 충만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비움이 승천이라면, 채움은 성령 강림인 셈입니다.

끝으로 ‘승천 이야기’에 담긴 ‘문자 이상의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선포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도 예수님이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 지금 여기의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심을 승천 이야기로 담아냈습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는 처음과 끝을 이 ‘주제’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여 끝내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기자 역시 오순절 약속하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믿는 이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예수님의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사도행전> 2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에 담긴 문자 이상의 의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승천 이야기’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은 ‘절대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는 선포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절대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계시듯, 우리 역시 죄의 종살이하던 죽음의 자리로부터 들리어져 ‘절대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이 더 이상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참으로 ‘자유’하신 분이라는 선포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더 높은 시야, 더 넓은 시야, 가장 큰 시야, 종국에는 하느님과 같은 시야를 갖게 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 체험을 통해 더 높은 시야, 더 큰 시야를 갖고, 죽음을 상징하는 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께 모든 ‘주권’이 있음을 선포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하늘로 들어 올리시어 모든 권세를 주셨듯이, 우리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새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로 들리어져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5).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선포입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도 예수님이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 지금 여기의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이 은총과 축복은 오로지 예수님을 온 우주의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받게 될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 명예나 권력, 철학이나 과학기술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온 우주의 참된 왕이심을 용기 있게 살아낸 이들이 받게 될 축복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무르익게 한 이들이 차지하게 될 축복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예수님을 신실히 닮아간 이들이 차지하게 될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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