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31. 사순4주일

본기도

자애로우신 하느님,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통회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주시나이다. 비오니, 주님께 돌아온 우리가 함께 성찬을 나눌 때에,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하시고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여호 5:9-12
  • 시편 – 32
  • 2독서 – 2고린 5:16-21
  • 복음서 – 루가 15:1-3,11하-32

사순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새로운 정체성과 관계로 들어가는 문지방에 선 우리’입니다.

1독서는 <여호수아>입니다. ‘새 시대’(사회)를 상징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출발하는 ‘신세대’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르단 강을 건넌 ‘신세대’는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 즉 ‘문지방’에 서 있는 셈입니다. 단지 ‘네 구절’만 배정했지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9절)는 하느님께서 ‘새 시대(사회)의 주역’이 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할례’의 결말입니다(여호 5:2-9). ‘할례’는 그들이 오직 하느님께 속한 ‘계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정체성의 표지’입니다(창세 17:10-14). 하느님은 그 표지를 받은 계약 백성들을 향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굴욕적인 ‘수모’(수치, 모욕)가 ‘벗겨지고’ 마침내 ‘새 시대’에 맞는 ‘자유인’이 되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그들의 ‘수모가 벗겨졌기’에 그 곳 이름을 ‘길갈’(원(圓), 굴러감의 뜻)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이곳은 ‘성소’가 됩니다.

 

후반부(10-12절)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리고 평야에서 ‘과월절’과 ‘무교절’을 지킨 이야기입니다. ‘과월절’(본래는 과월절에 먹는 ‘식사와 음식’을 뜻하는 말로 히브리어로는 ‘페사흐’, 아람어로는 ‘파스하’, 그리스어로는 ‘파스카’라고 합니다)은 어린양의 피와 고기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그들의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구원되고, 종살이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출애 12:3, 13-14, 27).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과 해방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기뻐하고 기념하며, 약속의 땅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구원과 자유를 고대하며 지키는 축제입니다.

이제 그들은 긴 광야생활 끝에 약속의 땅 ‘문지방’에 서 있습니다. ‘할례’로 ‘계약 백성’임을 되새긴 그들은 그 땅에서 난 소출로 당당히 ‘과월절(과월절은 하룻밤만 지키고 무교절은 과월절과 함께 칠일동안 지킵니다. 참고, 출애 12:15) 축제’를 지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과월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될 ‘새로운 파스카’의 ‘예표’(모형)라고 해석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어린양을 잡는 시간인 과월절 준비일(요한 19:14,31)에 ‘새로운 파스카’의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1고린 5:7)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또 공관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마태 27:45-50; 마르 15:33-37; 루가 23:44-46) ‘과월절 준비일’인 오후 3시경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성체성사’도 ‘새로운 파스카의 식사와 음식’입니다(1고린 11:24-25). 그렇지만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신 날(성목요일 전례)은 유대인들이 과월절 만찬을 행하기 이전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의 성찬례는 유대인들의 과월절 의식을 반복하거나 그 식사와 음식을 먹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성찬례는 ‘새로운 파스카’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대사제’이시자 흠 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구속’(해방과 새로운 시작)을 ‘감사’로 기념합니다. 감사로 기념할 뿐 아니라 그 구속을 경험하고 누리며,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완성하실 완전한 구원과 자유를 ‘고대’하도록 초대됩니다(1고린 11:26).

약속의 땅에의 문지방에서 과월절을 지킨 다음날(무교절 시작일),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맛보았고,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 ‘만나’가 멎었습니다. ‘만나’가 상징하는 ‘옛 시대’는 끝나고 그 땅의 ‘소출’을 먹는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자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간 ‘전환점’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얻기 위해 ‘날마다’ 하느님을 신뢰해야만 했습니다. 이제부터 하느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방식은 달라지더라도 하느님이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어 먹이신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그 땅의 소출을 얻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하느님을 신뢰해야만 했습니다.

1독서가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서와 서신의 배경독서이기에 그렇습니다. 길갈에서의 ‘할례’로 그들의 ‘수모’가 벗겨졌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과월절’(무교절) 축제를 지킵니다. 이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서 하고자 하시는 새로운 관계, 즉 ‘용서’와 ‘화해’와 ‘잔치’에 대한 ‘모형’(예표)입니다.

<복음서>가 들려주는 것처럼, 하느님께로 돌아와 새 출발의 문지방에 선 세리들과 죄인들의 기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파스카’의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할 ‘기쁨의 잔치’를 ‘과월절 축제’가 앞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2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이전의 우리의 ‘죄와 수치’를 없애셨습니다(2고린 5:18-19, 21).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새 사람)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2고린 5:17). 또한 ‘만나’로 대변되는 ‘구시대’가 끝나고 약속의 땅의 소출을 먹는 ‘새 시대’가 시작된 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참회시’로 알려진 <32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배경은 우리가 사순절 첫날(사순절의 문지방) ‘재의 예식 성찬례’에서 불렀던 시편 51편과 관련됩니다. 한 때 다윗은 ‘악인’처럼 살았고 그 죄의 결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사무하 11:1-12:18a; 시편 32:10a). ‘회개’를 통해 그의 ‘죄와 허물’은 ‘용서’받았고, 죄가 가져온 고통스런 ‘눈물’은 ‘위로’받았으며, 철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굴었던 그의 ‘무지’(無知)는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처절했던 체험이 32편에 녹아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베풀어진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용서’, ‘보호’, ‘인도하심’의 축복을 찬미합니다. 한마디로 ‘죄 고백’에 따른 ‘유익’입니다. 교회사에서는 ‘성 어거스틴’이 가장 좋아하는 시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크게 두 문단으로 나눕니다. 다윗뿐 아니라 아버지 집에 돌아 와 ‘새 삶을 출발’하는 복음서의 ‘작은 아들’의 노래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전반부(1-5절)는 ‘죄 용서의 축복’을 노래합니다. 1독서는 ‘길갈’에서 이스라엘 ‘신세대’가 ‘할례’를 받음으로 출애굽 세대의 ‘죄가 종결’되고(민수 14:22-23), 이집트에서의 ‘수모가 벗겨졌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윗도 죄를 용서받은 ‘기쁨’과 죄 허물(과실)이 벗겨진 자가 누리는 ‘행복’을 노래합니다(1-2절). 그는 고백하지 않은 죄로 인해 그가 겪어야했던 고통,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 아뢰옵지 않으렸더니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
시편 32:3-4

신음으로 뼈가 녹아내리고, 진액이 다 말라빠지는 고통입니다. 복음서의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그러져 ‘돼지나 치며’ 살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작은 아들처럼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토로하자 그는 용서받았습니다(5절). 다 죽어가던 몸과 마음이 생기를 회복하고 ‘기쁨’을 선물 받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참여한 성대한 잔치가 생각납니다. 죄 고백이 가져다 준 이러한 용서와 유익을 찬미하며 ‘어서 속히’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회개의 자리로 나오라 권면합니다.

 

후반부(6-11절)는 ‘용서받은 이가 누리는 축복’을 노래합니다. 그 축복이란 하느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입니다(6-7절).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이 가야할 ‘길’을 지시하시고 가르치시며 이끌어주십니다(8절).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워야 복종하는 말이나 노새처럼 고집부리지 말고, 선선히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권면합니다(9절). 매를 맞고 돌아서지 말고 그 전에 어서 속히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알거지’ 신세로 전락하기 전에 정신을 차리라는 뜻입니다.

끝으로 회개한 ‘의인’을 향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합니다(10절).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간 이의 노래입니다. 다윗 자신이 그런 축복을 받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용서 받은 의인들에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하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찬미를 마감합니다(11절).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죄 용서의 축복’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달리던 ‘죄책감’에서 풀어주시고 ‘새 출발의 은총’을 주신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한결 같은 사랑’으로 지금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기억한다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회개한 의인들이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우리가 낭독한 부분은 사도 바울로의 첫 번째 자기변호 편지(2고린 2:14-6:13, 7:2-4)에 속합니다. 그는 앞 문단에서(2고린 5:11-15)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사랑’(죽음과 부활, 2고린 5:14-15)이 어떻게 그의 ‘삶과 관점’을 바꾸었는지를 밝힙니다(2고린 5:16).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2고린 5:17-19a,21a),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권고합니다(2고린 5:19b-20,21b).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선물하신 우리의 ‘화목제물’이시고(흠 없는 어린양),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궁극적 지향점인 ‘화해’를 이루라고 세상에 파송된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실제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전까지(사도 9:1-8) ‘겉모습’(세속적인 표준)을 따라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2고린 5:12b; 16b). ‘영적인 관점’보다 단지 ‘육체적 관점’으로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단지 인간적 관점인 ‘유대민족 중심주의’, ‘육체적 기준’을 따라 사람들을 ‘이해’하고 엄격하게 ‘판단’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 ‘예수’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가 보잘 것 없는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고, 대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로부터 ‘거절’당했으며,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을 생각해 볼 때, 결코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없애려는 ‘박해자’의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 그는 사람들을 ‘피상적’(세속적인 표준, 겉모습, 민족적 관점, 육체적 관점, 인간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일을 중단했습니다(2고린 5:16). ‘세속적인 표준’(인간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하느님의 눈) ‘사람들’을 보는 눈을 떴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수를 ‘새로운 빛’(흠 없는 어린양)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진정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신 분인지를 정확히 알아보았습니다(2고린 5:17-19a,21a; 참고, 5:14-15).

이렇게 그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선물하시기 위해 오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깨달았습니다(2고린 5:21).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이 ‘화해의 이치’를 전하게 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2고린 5:18-19). 복음의 궁극적 지향점이 ‘화해’, 즉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2고린 5:19). 하느님과 세상의 화해, 그리스도인 공동체끼리의 화해, 그리스도인들과 세상과의 화해가 복음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로에게는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 아니면 이방인인가 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영접하지 않은 ‘비(非)그리스도인’인가가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2고린 5:17

그가 느끼는 ‘새 사람’의 기쁨, ‘중생’의 기쁨, ‘부활’의 기쁨을 이처럼 탁월하게 표현하는 구절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공동번역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이라고 의역했습니다)는 그가 좋아하고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삶을 말합니다. 은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구세주로 영접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은총으로 데려다 놓으시는 ‘무죄선언의 자리’입니다(2고린 5:21; 로마 5:16).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죽음에서 생명의 세계로, 추함에서 아름다움의 세계로 옮겨진 일종의 ‘재배치’입니다(요한 5:24).

 

더욱이 자리만 새로 배치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새 사람’(새로운 피조물, 새로 남, 중생)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인종도, 민족도, 성별도, 계층도, 학식의 높고 낮음도, 소유의 많고 적음도 ‘새 사람의 조건’일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은 ‘화목제물’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약속이자 선물입니다(요한 3:34). 다른 종교, 철학, 이념, 사상, 물질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오늘 복음서대로 하자면 ‘더부살이’하는 신세) 사람들을 위한 약속이 결코 아닙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의 조건과 운명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창세 1:27-28).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훼손했습니다. 죽음과 고통을 자신들뿐 아니라 온 인류의 운명에 가져왔습니다(창세 3:1-19; 로마 5:12-21). 이렇게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은 ‘하느님과 원수’가 되어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때가 되자 몸소 ‘화해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사랑으로 보내주신 일입니다(요한 3:16). 하느님은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기시고(2고린 5:21),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당신과 ‘화해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2고린 5:18; 로마 5:1,6-11). 이제 하느님께서 ‘화해의 길’로 마련하신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이들은 하느님과의 ‘원수 관계’를 청산합니다(2고린 5:19). 낡은 원수 관계가 청산되어(2고린 5:17b) ‘화해’가 일어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거저 얻어 ‘생명의 나라’에서 왕 노릇하게 됩니다(로마 5:17). 한 마디로 ‘회심’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받은 ‘새 사람’, ‘새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 바울로의 가르침입니다(2고린 5:17; 로마 5:1,6-11,12-21).

 

‘새 사람’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하는 길로 영접하는 이가 받는 ‘축복’입니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사람’의 약속(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더 이상 해야 할 것이 없는 ‘완성을 이룬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였기에 ‘새 사람’이 되는 약속(선물)은 이미 우리의 ‘현재’가 되었습니다. 기억할 것은 아직 ‘완결’이나 ‘완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를 ‘새 창조와 빚음’으로 초대하신 하느님의 역사에 ‘순종’하여 날마다 ‘능동적’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여정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로마 13:14; 에페 4:22-24; 골로 3:9-10).

사실 이 여정에는 많은 ‘역동’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 아직 사라지지(변화되지) 않은 ‘옛것’(낡은 것)과 하느님이 은총의 선물로 추가해 주신 ‘새것’ 사이의 역동성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가령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특징, 체질, 성격이라는 ‘옛것’은 우리에게서 그대로입니다. 또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반대하는 ‘옛것들’(복음서에 등장하는 돌아오기 전의 작은아들), 즉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탐욕, 거짓, 고집스러움, 뿌리 깊은 편견, 자기애(자기자랑), 거만함, 무자비함도 그대로 있습니다(로마 1:18-32). 우리 몸 바깥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죄가 지배하는 악한 세상도 그대로입니다(1고린 10:14; 갈라 1:4).

이처럼 우리 자신의 육신적 조건과 악한 본성과 환경적 제약이라는 ‘옛것들’은 사라지지(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옛것’들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별로 강하게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감정과 느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대상인 분’, 즉 ‘신실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상담해도 초조한 눈빛이 숨겨지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도 바울로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이라고 명백히 선포하게 하셨습니다(2고린 5:17; 로마 6:1-23).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안에 은총의 선물로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갈라 2:20). 이 때 우리 안에 새롭게 추가된 것은 단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세계관)만이 아니라(2고린 5:16) 다른 많은 것들도 포함합니다. 하느님은 ‘협조자 성령’, ‘그리스도의 의’(정의), ‘용서’, ‘영원한 생명’(생명의 나라)을 포함하여 많은 ‘새것들’을 우리에게 은총으로 선물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새것들’은 우리 믿음의 대상인 분’, 즉 ‘신실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선물들이기에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회심하기 전’에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로마 8:9). 하지만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선물하러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우리 안에는 죄에 물든 인간 본성이라는 ‘옛것’과 내주하시는 성령이라는 ‘새것’ 둘 다가 현존합니다. 희망이 있는 이유는 이 새로운 선물인 ‘성령의 영향력’은 너무나 지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본질적으로 ‘새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새것들을 선물’하시어 당신의 창조 목적에 따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옛것인 자기중심적 삶에서 풀려나 ‘새것’인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해 주십니다. 더욱이 새것인 성령께서는 풍성한 은사를 우리에게 선물로 추가해 주시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게 하시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게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새 사람’(피조물)처럼 살지 않는다고 불평할 일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기대는 부당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새 사람들에게서 ‘변화된 삶’을 기대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새 창조’에 동참했습니다. 따라서 날마다의 삶에서 ‘새 사람, 새 피조물, 새 창조’가 우리의 현실이 되도록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반대하는 ‘옛것들’, 즉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탐욕, 거짓, 고집스러움, 뿌리 깊은 편견, 자기애(자기자랑), 거만함, 무자비함에서 돌아서야 합니다(로마 1:18-32).

이 책임과 순종이 잘 수행되고 있는 사람의 주요 특징은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생명,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교우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로는 복음의 궁극적 지향점이 ‘화해’임을 강조하면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우리의 사명을 상기시킵니다(2고린 5:20-21). 하느님과 세상의 화해, 그리스도인 공동체끼리의 화해, 그리스도인들과 세상과의 화해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로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17절), ‘화해자’(18절), ‘그리스도의 대사’(20절)입니다. 비록 자신의 내면 변화가 너무나 더딘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용기를 내십시오. 아무리 더딘 변화라 하더라도 그런 차이는 마침내 고치에서 ‘나비’가 되는 ‘영원한 변모’를 만들어 냅니다. 선(善)을 지향하는 우리 내면의 작은 변화와 주님을 닮아가는 날마다의 작은 성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옛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간 ‘새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화해자’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고 있습니까? 이제 서신의 이 같은 ‘새 사람’, ‘새 피조물’의 교훈이 복음서에는 어떻게 녹아져 있는지 볼 차례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루가복음》이 전하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전해집니다.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입니다. 양과 목자(주인), 드라크마(은전, 노동자 하루품삯에 해당)와 여인, 아들과 아버지입니다. 특히 오늘 복음서로 배정된 ‘두 아들을 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는 오랜 시간을 두고 문학가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이야기입니다. 읽는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겨 대화에 참여시키고 성찰하게 하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이른 바 ‘고전’(古典)들이 갖는 역사성과 현재성, 특수성과 보편성을 갖춘 그자체로 탁월한 이야기입니다.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영하고 어울리며 음식까지 나누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을 구별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세리들과 죄인들’과는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에 빌붙어 먹고 사는 창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라고도 불렸으며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또 ‘병을 앓거나 장애를 갖게 되면’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 여겼기에 장애인과 병자들도 함께 할 수 없는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같은 율법규정을 위반한 예수님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면 그들이 오는 것을 거부할 것이고,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려주실 참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하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에 대해 잘 안다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십니다. 동시에 가르침을 들으려고 모여든 ‘세리들과 죄인들’을 격려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환영하고 어울리며 음식까지 나누는 이유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기쁨을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비유에는 후대의 상황도 담겨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비유 속에 초대교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갈등입니다. 유대교의 대명사인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이들로부터 멸시당한 이방인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루가는 이방인이 주축인 자신들의 공동체를 향해 예수님의 비유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해 ‘심금’(心琴)을 울립니다. 그리스도교가 돌아온 ‘작은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파스카’의 잔치, 즉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현재화’를 보여줍니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 즉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사치스러울 정도로 ‘용서’하며, ‘넘쳐흐를’ 정도로 풍부한 ‘사랑’을 가졌습니다. 만일 이 비유를 흔히 말하듯이 ‘탕자의 비유’라 부른다면, 이 아버지야말로 두 아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사랑과 관대함을 마구뿌리는 ‘방탕한’ 아버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어떤 ‘기준’이나 ‘한계’마저도 넘어서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문학적으로 설정된 인물입니다. 사실 이 비유의 주인공도 두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기에 ‘탕자의 비유’라든지 ‘잃었던 아들’이라든지 하는 제목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방탕한’ 아버지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면, ‘무한히 자비로운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더욱이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세리들과 죄인들’ 뿐 아니라 우리 같은 죄인도 품으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두 아들은 어떻습니까? 세리들과 죄인들을 상징하는 ‘작은 아들’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죄인의 회개’임을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큰 아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뜻(율법)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물론, 두 아들은 우리 인생들의 모습을 반영하며, 우리 마음에도 두 아들과 같은 ‘성향’이 공존합니다. 어떤 모습과 성향인지 차례로 보겠습니다.

우선, 작은 아들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왕국을 원하고 꿈꾸는 우리 내면의 욕구를 봅니다. 그 세계(왕국)는 당연히 자신이 왕입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작은 아들은(당시로는 17-18세쯤) 아버지의 그늘에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집에 들른 상인들로부터 들은 ‘먼 고장’ 이야기는 그야말로 ‘별천지’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그곳에서 살아간다면 자기 삶이 훨씬 빛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꾹 눌렀지만, 그럴수록 ‘별천지’는 솟아올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없는 ‘날개 접힌 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아버지 뜻’을 우선해야 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만’ 해야 하기에 자신은 독립할 수 없는 ‘아이’일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이 생각에 붙잡히자 ‘아버지’는 자신을 제약하는 존재, 자기 꿈의 실현에 장애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자아실현의 방해꾼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집이 ‘지옥’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지옥 같은 아버지 집을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인생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자기만의 왕국을 찾아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돈’이 필요했는데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한참을 궁리 끝에 그가 찾아낸 방법은 ‘유산’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자신에게 돌아올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청할 참이었습니다. 이 요청은 자신을 사랑해 온 아버지를 향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속마음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무서웠지만, 물러설 순 없었습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집요하게 아버지를 조릅니다.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아야 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버지는 결국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당시 풍습대로 하자면 작은 아들은 3분의 1, 큰 아들은 3분의 2를 유산으로 차지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받을 경우는 몫이 훨씬 적었습니다. “며칠 뒤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자기만의 천국)”으로 ‘스스로’ 떠나갔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러면서 제 발로 ‘아버지’를 떠나갔습니다. 대단한 모험의 시작입니다.

우리 내면에도 이런 욕구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가족이나 공동체, 윤리나 사회규범 같은 것들을 ‘장애물’처럼 여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마저도 귀찮은 ‘충고자’로 여길 때도 있고, ‘십계명’이나 ‘주의기도’를 자신의 욕구를 막아서는 ‘장애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이런 우리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그렇게 ‘자기 욕망대로’ 실행한 작은 아들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꿈의 실현이 아니라 ‘인생 낭비’였고, ‘자기 파멸’이었습니다. 대우받던 아들에서 ‘알거지’로, 자유인에서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더부살이’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남이 좋다고 만들어 놓은 것에 지배받는 삶입니다. 자기 인생을 남에게 내맡겨버린 삶입니다. 사제들에게는 누군가의 ‘신학’(주석)일 터이고, 인문학도들에게는 누군가의 사상(이념)일 것이며, 일반인들에게는 세상 풍조일 수도 있습니다.

 

그 ‘더부살이’의 종국은 무엇이었습니까?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물입니다. 그런 그가 ‘돼지우리’에 살게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품위’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그가 ‘돼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추론할 수 있습니까? 돼지의 양식인 ‘쥐엄나무’ 열매를 그가 먹으려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남이 좋다고 만들어놓은 것 아래 가보았더니 소문과 달리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깨달음이 아니라 남의 가르침이나 사상에 기웃거리는 인생들이 성찰해야할 진실입니다. 작은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죽은 인생’, ‘자기를 잃어버린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실패한 인생, 빈털터리 인생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를 떠나 자기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는 ‘자기 파멸’, ‘자기 소외’로 끝났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자기실현의 모든 시도들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삶에는 이런 은총도 있는 법입니다. 어느 날, 돼지우리 안에서 그는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바닥을 쳤기 때문에 비로소 길을 찾았습니다. 죄의 신비입니다. 그가 겪은 삶의 고난들, 아픔, 슬픔, 고통, 죄, 어둠이 오히려, 아니 드디어 그에게 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신을 제대로 보고 만납니다. 이런 자기 대화, 즉 ‘내적 독백’을 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루가 15:17-19

놀랍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기 파멸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는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거룩한 목소리’, ‘거룩한 한 말씀’, ‘거룩한 기억’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의 ‘내적 독백’을 듣는 우리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을 향한 초대로 들립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지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솜씨는 정말 탁월합니다.

‘마침내’ 그는 일어섰습니다. 그의 ‘회심’이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거기를 떠나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가 15:20

 

작은 아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몰골’은 형편없었지만 아들로서 환영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저 멀리서부터 보고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옵니다.” 아버지라는, 어른이라는 체면 따위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였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아들이 미처 참회의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가로막습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품에 돌아온 것이 그 모든 참회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알거지’ 행색으로 왔는데 ‘제일 좋은 옷’(길게 끌리는 옷이라는 뜻으로 주인만이 입을 수 있는 일종의 ‘예복’입니다)을 꺼내다 입히게 합니다. 품꾼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로서 ‘권위’를 갖고 있음을 상징하는 ‘가락지’를 끼워주게 합니다.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임을 상징하는 ‘신’을 신겨주게 합니다. 물론 목욕은 했겠지요.

이렇게 작은 아들에게 제공된 세 가지는 ‘회심’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온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상징합니다.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우리의 새로운 시작,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 됨을 가리킵니다. ‘가락지’는 성령을 상징하며, 하느님의 자녀라 인(印)치심을 받은 우리 신분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신발’은 자유인을 상징하며, 화해를 이루도록 파송되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의 우리 사명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아버지는 성대한 잔치를 벌이도록 하인들에게 이렇게 명령하며 기쁨을 표현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루가 15:23-24

우리의 ‘성찬례’를 잘 드러내주는 구절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어! 내 인생은 내거야!”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해 보겠다며 아버지 곁을 떠난 그의 결말은 ‘자기 상실’이었습니다. 인생의 바닥을 치고, 어둠의 한 가운데를 걷다가 이제 집에 돌아온 작은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속했음’을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베푸는 성대한 잔치 속에서 그가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리가 아버지 집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베풀어주시는 그 어느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이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무상으로’ 관대하게 베풀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것이라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진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은총임을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서 출발합니다. 성찬례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떠나 죽었던 우리, 잃었던 우리였지만 그리스도 덕택에 다시 살아나고, 다시 찾아진 우리 자신임을 발견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내 삶이 은총임을 발견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느님 집에 다시 돌아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성대한 잔치’를 즐기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는 동생이 돌아온 것이 기쁨의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큰 아들입니다.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특히 자기보다 ‘큰 권위자’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싶어 하는 우리 내면의 욕구를 보게 됩니다. 청년기 문지방을 넘어서자 큰 아들은 자신의 충성과 성실을 인정해 주는 아버지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충성과 성실에 따른 보상으로 집에서 자신의 지위를 자리매김해 주는 그런 아버지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권위를 등에 업고 집과 마을에서 아버지 다음 가는 지위를 얻는 것, 그것이 큰 아들이 갖고 있던 목표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아버지가 인정할 만큼 ‘모범생’처럼 살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인정 욕구와 또 그렇게 살아 온 큰 아들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란 존재는 자신의 충성과 성실을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고 도구입니다. 아버지를 그런 수단으로 여길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아들에게 있어서 주변의 인물은 자신의 충성과 성실을 인정해 줄 때만 존재의미를 가질 뿐, ‘동생’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속마음이나 집 사람들의 속사정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모범생, 절제된 삶, 자기 옳음, 인정받음에만 몰두해 있던 큰 아들이었기에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돌아온 동생은 ‘측은히’ 여길 대상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큰 아들에게 있어서 돌아온 ‘동생’은 서로 나눠가질 수 없는 ‘아버지의 권위와 인정’, 그리고 ‘집과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두고 또 다시 ‘경쟁’해야 할 ‘형제라는 이름의 적’일 뿐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잔뜩 화가 나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인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립니다. 아버지는 몸소 집 밖으로 나와서 큰 아들을 달랩니다. 그 순간 큰 아들은 오랫동안 감춰둔 자신의 본심을 들키고 맙니다. 인정 욕구에 목말라 ‘종’처럼 살아왔다고 말입니다(29절). 그것이 그가 충성과 성실을 보인 이유였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인생이었습니다. 게다가 완벽주의 모범생들 안에 들끓고 있는 무의식적 욕구를 동생에게 투사하고 맙니다.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루가 15:30

이야기에는 있지도 않는 내용입니다. 동생이 “먼 고장에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만 되어 있지 ‘창녀들한테 빠졌단’ 말은 없습니다. 만일 정말로 동생이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알았다면 ‘큰 형답게’ 찾아가서 데려왔어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동생이 아니라 ‘그 아이’라고 얕잡아 말합니다. 동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불평을 듣던 아버지는 큰 아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지 안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면서 함께 들어가자고 애정을 가지고 다시 권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부드럽게 말해 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루가 15:31-32

아버지는 굳어진 큰 아들의 마음을 향해 ‘그 아이’가 아니라 ‘네 동생’(원문에는 ‘형제’)이라고 바로 잡아줍니다. “네가 말한 그 형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며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충고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더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옛날 동생과 지금의 동생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옛날 동생과 지금의 동생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집에 돌아온 동생은 인생의 바닥을 치고, 어둠 속에서 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큰 아들은 아직도 인생의 길을 발견하지 못한 셈입니다.

비유는 어떻게 끝납니까? 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잔치에 참여했을까요? 가족의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졌을까요? 비유는 지난주에 우리가 낭독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처럼 ‘열린 결론’입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 했을지 각자 생각해 보라고 열려 있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은 사순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는 ‘새 사람의 정체성’을 갖고 ‘새로운 관계’의 ‘문지방’에 서게 된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이들을 위한 집중 신앙교육 기간에서 유래한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새 사람의 정체성을 갖고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문지방이고, 우리는 이미 그 문지방을 넘어서 있습니다. 새 사람의 정체성과 새로운 관계는 전례독서에 어떻게 녹아 있었습니까?

1독서 <여호수아>는 ‘할례’를 통해 이집트 종살이 ‘수모(수치, 모욕)를 벗은’ 신세대 이야기입니다. ‘새 사람의 정체성’을 갖게 된 그들은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에 서서 ‘자유인’으로서 ‘과월절’을 지킵니다. 그 땅 소출을 먹은 다음날 ‘만나’로 대변되는 ‘구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해서 거기서 나는 것을 먹게 되는 새 시대, 새로운 관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의 문지방’을 넘어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 역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으며,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식탁에 앉게 될 것입니다.

<시편>은 옛것인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보호’와 ‘인도하심’의 축복을 받은 시인의 노래입니다. 그에게는 회개한 ‘의인’이라는 ‘새 사람의 정체성’이 주어졌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누리며 다른 이들을 그 관계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합니다.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화해의 사명’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관계와 새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교훈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인류가 화해라는 새로운 관계와 새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선물 받을 수 있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입니다.

<복음서>는 죽었던 아들,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새 출발’의 성대한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성대한 잔치’에서 ‘새 사람의 정체성’을 갖고 ‘새로운 관계’로 출발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작은 아들을 통해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는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 행동은 무한히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새 사람의 정체성’을 갖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 삶을 향해 출발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기쁨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그 자리에서 느껴집니다. 하지만 ‘구원의 문지방’ 밖에서 화를 내며 서성이던 큰 아들 같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있었음을 들려주십니다. 그들은 자기 옳음을 내세우며 아버지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리며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의 성찬례는 어떻습니까?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성찬례’는 하느님을 떠나 죽었던 우리, 잃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덕택’에 다시 살아나고, 다시 찾아진 자신임을 발견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총’임을 발견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작은 아들이든, 큰 아들이든 깨달아야 할 점이 이것입니다. 참으로 성찬례는 하느님의 집에 다시 돌아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성대한 잔치’를 ‘함께’ 즐기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와 부활 덕택에 새로운 정체성을 선물 받고, 새로운 관계로 출발한 ‘우리’임을 되새기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심으로 영혼의 새 힘을 얻습니다. 그 힘으로 ‘화해의 이치’를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대사’로 세상에 파송됩니다. 그 거룩한 화해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새로운 파스카 부활절을 기쁘게 맞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019. 3.31. 사순4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19.9.15. 연중24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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