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24. 사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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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제 헛된 갈망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5:1-9
  • 시편 – 63:1-8
  • 2독서 – 1고린  10:1-13
  • 복음서 – 루가 13:1-9

사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초대에 어서 속히 응답하고, 지금 회개하시오’입니다.

교회력으로 우리는 사순절 여정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할 예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기간에서 유래합니다. 또한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신자들이 하느님께 더 깊이 뿌리내리도록 안내하는 교육기간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간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착 과정에 비교됩니다. 한 옛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행하게 하시어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이 ‘과월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자유인’인의 여정에 들어섰고,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이 ‘오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 속에서 경험한 종살이와 출애굽, 홍해를 건넘과 광야 생활, 가나안 정착 등은 ‘오늘 서신’이 교훈하는 것처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본보기’입니다(1고린 10:6,11).

예비 신자들(물론 세례 받은 신자들까지 포함하여) 역시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은총의 사건들을 사순절에 배웁니다. 먼저 그들은 인류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악마가 유혹하는) 세상’에서 ‘노예’로 살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초대됩니다. 하느님은 죄와 죽음에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노예로 살던 인류가 ‘해방’되고 ‘자유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세례의 물’을 적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 ‘영원한 생명’(하느님의 나라)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의미들을 교육하고, 믿음의 삶으로 준비시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려는 목적이 ‘사순절’에 담겨있습니다.

‘다’해 사순절에 낭독하는 성찬례 전례독서들도 이러한 신앙교육을 목적으로 배정됩니다. ‘사순 1주일’, 1독서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을 듣습니다(신명 26:1-11).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어 자유인으로서 예배의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존재의 근원이시고, 그들 공동체의 중심임을 찬미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시편은 이러한 ‘신앙고백’(신뢰와 확신)을 바치는 이들이 받아 누리는 ‘구원의 복’을 노래합니다(시편 91:1-2,9-16). 2독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배웁니다(로마 10:8-13). 그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주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조차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제한’하시고 ‘순종’하심으로써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인류 구원의 길로 가셨다고 들려줍니다(루가 4:1-13).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풀려나 하느님의 자녀로 출발한 우리의 ‘신앙고백’과 ‘세례 언약’을 돌아보게 하는 전례독서가 배정됩니다.

 

‘사순 2주일’, 1독서는 하느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을 ‘계약’으로 확증하는 이야기입니다(창세 15:1-12,17-18). 하느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갸륵히 여기시고 자손과 땅을 ‘보상’으로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와 맺으실 ‘영원한 은총의 새 계약’을 가리킵니다. 2독서는 ‘십자가’를 믿는 이들이 ‘하늘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교훈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상급’을 주시러 능력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재림의 약속을 믿고 하늘의 시민답게 굳세게 살아야 합니다(필립 3:17-4:1). 시편도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하느님을 믿고 기다리는 이가 받는 ‘영원한 보상’을 노래합니다(시편 27편). 복음서는 ‘십자가 사명’을 완성하는 그 ‘새 계약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시는 예수님과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교훈합니다(루가 13:31-35). 이처럼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 영원한 은총의 새 계약인 십자가와 구원을 완성하러 재림하실 주님을 신앙하도록 가르치는 전례독서가 배정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다시 오십니다”가 믿을 진리로 선포됩니다.

오늘 ‘사순 3주일’ 전례독서는 어떨까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우리가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기억’하고 살아야할 일들을 교훈하는 전례독서가 배정됩니다.

1독서 <이사야>는 제 2이사야(40-55장)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제 2이사야 본문이기에 시대 배경은 바빌론 포로생활이 끝나갈 무렵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바벨론에서 포로로 두 세대 이상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에 지쳐 더 이상 구원도 하느님도 희망할 여력조차 없습니다. 총체적 절망입니다. 제 2이사야는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40장). 이제 그들은 모든 ‘죄과’(罪科)를 용서받았습니다. 심판과 분노, 저주와 절망의 관계는 청산되고, 자유와 회복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한마디로 ‘제 2출애굽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뭘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그들의 운명을 반전시킬 것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에게로 얼굴을 향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운명의 반전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와 언약의 신실성 덕택입니다. 따라서 ‘제 2이사야’는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여 죄의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 기간이면 충분히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고, 이제는 구원과 위로를 받을 때라고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이스라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제 2이사야는 가득합니다.

 

오늘 본문은 제 2이사야의 결론 부분입니다. 지금까지의 선포를 종합하면서 ‘자비하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 절망의 불신앙에서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시간적으로 ‘만나주실 때’가 되었으니 ‘찾으라’는 초대입니다(6절). 공간적으로 ‘옆에 와’ 계시니 ‘부르라’는 초대입니다(6절). ‘불의한 길’에서 ‘돌이키고’(7절), 허영에 들뜬 ‘생각’을 ‘고치라’는 초대입니다(7절).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자비롭게 ‘맞아’주시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는 초대입니다(7절). 한마디로 ‘속히 불신앙을 회개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와 화해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돌아오기만 하면 ‘새로운 출애굽’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6절). 지금은 하느님이 만나주실 때입니다(6절). 지금은 하느님을 불러야할 때입니다(6절). 지금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 때입니다(6절). 그러나 ‘지금’이라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제한적’입니다. 구원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구원의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처럼 은총을 베푸시는 때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닫힐 수도 있기 때문에 ‘속히’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진실입니다.

<시편 63편>은 1독서 하느님의 초대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시인은 하느님을 찾는 자신의 간절함을 처음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나의 하느님,
물기 없이 메마른 땅덩이처럼
내 마음 당신 찾아 목이 마르고
이 육신 당신 그려 지쳤사옵니다.
시편 63:1

그러나 그의 삶은 1독서처럼(이사 55:2d-3c) 이렇게 바뀝니다.

기름지고 맛있는 것 배불리 먹은 듯
내 입술 기쁘고 내 입이 흥겨워 당신을 찬양합니다.
시편 63:5

그러한 변화는 그가 어느 곳에 있을 때 일어났습니까?

당신을 그리면서 성소에 왔사오며…
시편 63:2a

그렇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 있을 때 자신의 ‘메마른 삶’이 변화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성전’을 찾아 나왔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의 깊이가 목숨보다 소중함을 ‘재발견’할 수 있었습니다(3절). 그 순간 입술에서는 찬양이 터져 나왔고, 두 팔을 치켜 올리고 찬양하게 되었습니다(3-4절). 성전을 떠나서도 하느님의 돌보심을 깊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6-8절). 우리의 성찬례에서도 하느님과의 이런 긴밀한 연합이 일어나고, 그 은총이 일상에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교회인 우리가 꼭 기억할 일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당부입니다(1절a).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과 광야 생활을 통해 교훈을 얻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1절b-2절).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구원’(구름의 인도와 홍해를 건넘)을 경험하였음에도 어느새 그 모든 것을 잊고 하느님을 배반했습니다(5절, 7절-10절).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를 마셨음에도(3절-4절)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보다 죄악을 더 기뻐하였습니다(7절-10절). 그 결과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멸망’하였습니다(5절, 8절-10절). 그들이 당한 일은 다른 민족들에게 경고가 되었으며, 기록으로 남겨진 이스라엘의 역사는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악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본보기이자 교훈입니다(6절, 11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표지로 ‘세례’를 받은 사실과 매주일 ‘영성체’를 한다는 사실이 구원의 절대적 보장일 순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의 행실을 살피고 조심하면서’(12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필립 2:12b). ‘신의’(신실하신)가 있으신 하느님은 힘에 겨운 시련을 우리(교회)가 겪게 하지 않으시며, 시련을 주시더라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13절). 교회인 우리로 하여금 자비하신 하느님, 신실하신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기억’하도록 안내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든 예기치 않게 끝날 수 있기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기회를 주실 때, ‘속히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교훈합니다. “금년 한 해 더” 새 삶의 기회를 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고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열매를 ‘꼭’ 맺어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저런 사건 사고 소식들을 듣습니다. 태풍이나 지진 같은 천연재해도 있고, ‘세월호 참사’ 같은 인간의 잘못으로 발생하는 불행한 재난들도 있습니다. 이런 재해와 재난이 두려운 이유는 많은 물질적 피해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겪는 이런 불행한 사건들을 두고 구경꾼처럼 나름의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 해석 중에 가장 큰 틀이 ‘인과론’(~때문에)과 ‘목적론’(~위하여)입니다. ‘인과론’은 ‘업보’나 ‘인과응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죄업’이라고 하는 과거의 ‘원인 때문에’ 재난(불행, 고통, 고통의 최종적 형태로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현재가 ‘결과’했다는 해석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이런 해석은 ‘결정론’입니다. 이런 결정론은 현재의 삶을 과거에 예속시켜 순응하게 만들며 현재의 불행한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의지마저 무력화시킵니다.

반면에 ‘목적론’은 지금 살아있는 이들의 삶에 봉사하기 ‘위하여’ 재난이나 불행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현재가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몇 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어떤 대형교회 목사가 대한민국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경고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그들을 희생물로 사용하셨다는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해석이 ‘목적론적 해석’의 전형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다른 이들의 생명과 시간을 ‘수단화’하는 악마 같은 ‘하느님’을 만들 뿐입니다.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물론 오늘 2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이 우리를 더 성장시키기 ‘위하여’ 시련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더 성장시키려는 목적에서 주어진 시련이구나!” 하는 목적론적 해석은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할 일이지 남이 겪는 불행에 대해 구경꾼처럼 건넬 말은 아닙니다. 또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려 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재의 불행 속에서 눈물짓는 이들, 고통 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무튼 인간이 겪는 불행한 사건들에 대한 해석을 맹목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 판단해 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루가 13:1-5)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통해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게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든 예기치 않게 끝날 수 있기에 아직 기회 있을 때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교훈합니다. 후반부(루가 13:6-9)는 전반부의 가르침을 더욱 공고히 하는 비유입니다. ‘회개할 시간을 허락하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비유입니다. 두 단락으로 되어 있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다른 전례독서들처럼, ‘자비’(사랑, 신의)의 하느님을 믿고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속히 회개하라’는 초대입니다.

‘전반부’(루가 13:1-5)부터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입니다. 예루살렘을 다녀온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어난 ‘비극’을 알려드렸습니다. 성전 안뜰에서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빌라도’가 병사들을 보내어 학살한 사건입니다. 권력가의 악행으로 발생한 불행한 사건입니다. 다른 문헌에는 기록이 없고 오직 루가복음에만 전해지기에 언제 일어났는지는 특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유대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등장하고, 또 성전에서 희생물을 드릴 때 일어났다는 구절을 통해 이 시기가 과월절과 관련 있음을 추측할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부는 지중해 해변에 있는 ‘가이사리아’에 있었습니다. 총독은 평소에는 거기서 상주(常駐)하지만, 유다인의 최대명절인 과월절이 다가오면 소요(騷擾) 방지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주둔군을 강화했습니다. 그의 관저는 ‘예루살렘 성전’ 북동쪽 모퉁이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The Antonia Fortress)에 있었습니다. 그 요새는 헤로데 대왕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기념하여 세웠습니다. 성전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감시’하기 좋은 위치였습니다.

빌라도는 ‘갈릴래아’에서 올라온 일련의 사람들이 위험해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갈릴래아란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는 ‘로마’와 ‘기득권자’(대지주들)에게 ‘살림’이 거덜 난 이들이 찾아드는 땅이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가난한 사람들은 대지주들의 착취에 항거해 자주 ‘봉기’하곤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갈릴래아는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열혈당’(젤롯당)의 본거지가 있었습니다. 열혈당원들은 ‘암살자’로도 활약했는데, 예루살렘에 살던 대지주들, 즉 왕족이나 대사제들 같은 기득권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도 그들은 골칫거리였습니다.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빌라도는 분명 열혈당원들이 섞여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곧바로 군대를 출동시켜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본래 성전에는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었지만 중무장한 군대를 힘없는 순례자들이 막을 길은 없었습니다. 성전 안뜰은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학살을 목도한 사람들 중에 좀 더 늦게 성전에 올라간 갈릴래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고 예루살렘에서 목도한 일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들의 말은 그냥 그런 ‘비극’이 있었다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겪는 그런 불행한 죽음, 비극의 이유를 듣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당시 사람들은 인간이 겪는 ‘불행’과 ‘비극’을 ‘죄와 연결’시켜 생각하곤 했습니다(요한 9:1-3). 어떤 사람들이 불행을 겪는다면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행위, 즉 ‘죄 때문’에 하느님이 ‘진노’하시고 ‘보복’하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욥기 4:7; 8:20; 22:4-5). ‘인과응보’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통념에 따르면 학살당한 그 갈릴래아 사람들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큰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통념을 갖게 된 데는 ‘신명기 신학’의 영향도 컸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착한 이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느님의 명령에 불복하는 ‘악한 이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십니다(신명 28장). 우리 전통에도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들은 이런 통념에 근거해 예수님도 자신들과 견해를 같이 하는지 질문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루가 13:2

예수님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잘 ‘판단’해 보라”고 되물으십니다. ‘스스로 잘 판단해 보라’는 예수님의 이런 요청은 루가복음 12장 말미에 이미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위선자들’이라 나무라면서 ‘자연의 징조’는 알면서도 정작 ‘시대의 뜻은 알지 못하는’(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루가 12:54-56). 무엇이 옳은 일인지(늦기 전에 회개하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루가 12:57-59). 사실 이 책망은 바리사이파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군중을 그들로부터 떼어놓으시려는 예수님의 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이런 ‘판단력’을 요청하시는 가르침의 연속입니다.

이어서 자신이 제기하신 질문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면서 부정하십니다.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루가 13:3

학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이 ‘무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초점’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 불행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로 초점을 옮겨오십니다. 그 일들이 질문한 그들에게 ‘상관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불시에 맞이한 불행한 죽음을 통해 ‘보편적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내 말을 듣는 ‘너희도’ 죄인이고, 모든 죄에는 심판이 내려지기에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늦기 전에 지금의 ‘너’ 역시 ‘속히 회개하라’는 강조입니다.

“실로암 탑”,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30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강조하시는 ‘보편적 회개의 필요성’을 그들도 다 알고 있는 불행한 사건을 가지고 다루십니다. 인재(人災)로 인해 발생한 사건처럼 보이는 불행입니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루가 13:4

‘실로암’은 구약성경의 ‘히즈키야 왕’이 예루살렘이 포위될 경우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성(城) 밖에 있는 ‘기혼 샘’에서 물을 끌어올려 조성한 못입니다. 그 ‘실로암’ 근처에 있던 감시용 탑이 갑자기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마 그 비극을 접한 이들은 당시 통념을 따라 ‘인과응보’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루가 13:5

예수님은 ‘재난’으로 인한 불행한 죽음이 ‘죄’에 대한 ‘벌’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다시 부정하십니다. 지금 내 말을 듣는 ‘너희도’ 죄인이기에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호소”입니다. 늦기 전에 ‘너도’ 지금 ‘속히 회개하라’는 강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되물으시면서 ‘보편적 회개의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불행한 사건들과 재난들을 통해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분명 그 불행한 죽음을 당한 이들은 자신들이 그런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불행한 재난들은 하나같이 인간,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나 자신의 목숨’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지를 보여줍니다. 그 불행한 죽음들은 ‘나의 삶’이 예기치 않게 끝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 다른 이들에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가 묻기보다 오히려 이것이 ‘나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불행한 사건들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속히 올바른 길로 마음을 바꾸며’(루가 12:57), 자신의 ‘영원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사순절 성찬례 시작 때에 바치는 ‘대연도문’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벼락과 폭풍에서, 지진과 화재와 홍수에서, 전염병과 기근에서
모든 압박과 음모와 반란에서, 폭행과 전쟁과 살인에서,
준비하지 못한 불시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기도서 220쪽

“준비하지 못한 불시의 죽음”, 사실 ‘우리’는 아무도 ‘나 자신’의 생명이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최우선 과제는 ‘회개’입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서는 가르치기 때문입니다(히브 9:27). 나의 죄에도 불구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 덕택에 오늘도 생명의 시간을 선물 받아 나는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오늘 1독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내가 당신의 초대에 반응하고, 당신께 나아오며, 회개할 시간을 오늘도 허락하십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더구나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입니까?
로마 2:4

오늘 예수님은 그 불행한 사건들을 통해 ‘지금이 회개의 때’임을 가르치십니다. 아직 살아있을 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오직 하느님만 주실 수 용서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 ‘비극들’을 통해 호소하십니다. ‘회개’는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처럼, 있어야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던 내가 있어야할 길 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가야할 ‘목적지’ 위에 있지 않던 내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 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나 자신의 회개의 필요성’을 호소하십니다. 그런 다음 ‘회개할 시간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르치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복음서 후반부’(루가 13:6-9)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를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번제물을 태울 때도 이 두 나무만은 화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보호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어땠을까요? 무화과나무는 ‘에덴동산’에도 있었고 아담과 하와의 잘못을 지켜본 나무입니다(창세 3:7). 보통 4~6 미터 높이로 자라고 많게는 1년에 5차례 정도 열매가 열리는 나무였기에 이스라엘에서는 하찮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만일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땅을 낭비하는 셈이었기에 즉시 잘라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열왕상 5:5; 미가 4:3-4; 즈가 3:10). 또 포도나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이사 5:1-7; 예레 8:13; 24:1-8; 호세 9:10; 요엘 1:6-7; 미가 7:1). 하지만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처럼 귀하게 여기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농사풍습을 잘 알고 있던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루가 13:6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셨을 때,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화과나무’보다 ‘포도나무’를 더 소중히 여기던 문화였기에 아마도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저런,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루가 13:6c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은 ‘율법’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종교이자, 정치요, 사회규범이자 문화였습니다. 농사 관련 율법 규정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일 나무를 심을 경우에 그 열매를 사람으로 치면 갓난아기의 포경처럼 여겨야 한다. 삼 년 동안을 할례 받지 아니한 갓난아기의 포경처럼 여겨 따먹지 마라. 넷째 해에 열린 과일은 모두 거룩한 것이므로 야훼에게 축제물로 바쳐야 하며 다섯째 해부터 열리는 과일은 따먹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너희가 과일을 더 많이 거두게 되리라.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레위 19:23-25

따라서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다”고 했을 때,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 주인이 ‘5년만’에 처음 찾아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 나무에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주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을 듣던 사람들은 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힐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루가 13:7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 열매를 얻으려고 “‘3년째’나 여기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할 단어가 ‘3년째’라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요?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포도원주인’이 열매를 따가려고 처음 찾아간 것은 ‘5년 만’이라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주인이 “‘3년째’나 여기 왔다”고 했으니 그 무화과나무를 심은 지 적어도 ‘7년’은 족히 지난 셈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무화과나무를 그냥 내버려둔 주인에 대해 ‘어리석다’고 수군 거렸습니다.

정말이지 포도원주인은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린 셈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땅만 낭비하는 셈이기에 즉시 잘라버린다 했습니다. 주인은 무려 ‘7년’이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사실은 ‘7년’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에 따르면, ‘7년째’는 어떤 해입니까?

칠 년째 되는 해는 야훼의 안식년이므로 그 땅을 아주 묵혀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 순을 치지도 마라. 너희가 거둘 때 떨어진 데서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 말고,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둔 덩굴에 절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 말며 땅을 완전히 묵혀야 한다.
레위 25:4-5

이 농사 관련 율법에 따라 ‘7년째’인 안식년에는 주인이 ‘포도원’에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3년째’는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은 지 ‘8년째’ 되는 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3년째’나 여기 왔으나”라는 말은 주인 입장에서 기다릴 만큼 ‘충분히 기다린 시간’입니다. 포도원주인은 참을성 있게 상당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허사였습니다. 주인은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심판)을 내렸습니다.

“포도원지기와 무화과나무”,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03

그런데, 뜻하지 않는 ‘강적’이 나타났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포도원지기’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십시오.
루가 13:8-9

‘포도원지기’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포도원주인’보다 더 어리석은 ‘강적’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주인보다 더 이상한 행동을 하겠다고 지금 ‘간청’하고 있습니다. “금년 한 해만 더 기회를 주시면 자신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요청합니다.

‘심판’과 ‘자비’의 긴장감이 팽팽히 흐르면서 비유는 끝이 납니다. “잘라버려라”는 ‘심판’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시라”는 ‘자비’(용서)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어떤 비유들처럼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 열린 결론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인이 금년 한 해 더 기회를 주었을까요? 그 무화과나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한 해가 더 주어졌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회개할 시간을 허락하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가르치신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하느님 나라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의 유업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보다 정확히는 수년간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만 열매 맺지 않는 오늘의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보내신 ‘심부름꾼들’입니다.

이처럼 비유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자비하신 분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대신 우리를 택하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사람들로 포도원에 심으셨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오래 참는 분입니다. 기대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한 없이 기대하시면서, 즉 회개할 시간을 허락하시면서 ‘기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훨씬 소중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해서 기다리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는데도 기다린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하느님의 이런 ‘자비와 기다림’이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없는 ‘은혜’입니다. 또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도 하느님의 진노를 막아 준 ‘포도원지기’는 더 없이 은혜롭고 감사한 존재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사순절 주일 성찬례에서 낭독하는 전례독서들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꼭 ‘기억’하고, ‘성찰’할 일들로 초대합니다. ‘사순 1주일’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 ‘신앙고백’과 ‘세례 언약’을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사순 2주일’에 우리는 영원한 은총의 ‘새 계약인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러 ‘재림하실 능력의 주님’을 기억하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들’을 성찰하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 생명의 촛불이 언제 꺼질지 알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기억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남이 당한 불행에 대해 ‘구경꾼’처럼 현학적으로 대답할 만큼 결코 여유롭지 않은 인생임을 경고하십니다. 어디서 불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인생에게 최우선 과제는 ‘회개’라고 교훈하십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서는 가르치기 때문입니다(히브 9:27). 늦기 전에 ‘속히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실 하루하루는 죄 많은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그 ‘은총의 해’는 영원토록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하느님은 “잘라버려라”고 심판을 명령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의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잘라버려라”고 진노하며 명령하는 주인 앞을 막아선 포도원지기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덕택’에 우리는 하느님의 진노를 면하고(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오늘도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얻어 살아갑니다. 또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포도원지기’ 같은 ‘교우들의 사랑과 돌봄 덕택’에 오늘도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얻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를 완성하셨고, 또 교우들의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다 하더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표지로 ‘세례’를 받았고, 또 매주일 ‘영성체’를 한다는 사실이 구원의 절대적 보장일 순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의 행실을 살피고 조심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예 기간, 즉 최종적으로 우리 인생의 자리를 결정할 ‘심판의 주권’은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구원의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자비롭게 맞아주실 것이니 ‘지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할 일을 회개하고(마르 11:25; 루가 11:4), 은밀히 자선을 베풀고(마태 6:3-4), 사랑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선물 받은 하루하루는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부디 우리가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성령의 열매’(갈라 5:22-23), ‘빛의 열매’(에페 5:8-9)를 주렁주렁 맺는 ‘성령의 나무, 빛의 나무’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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