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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7. 사순2주일

본기도

신실하신 하느님,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순종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5:1-12,17-18
  • 시편 – 27
  • 2독서 – 필립 3:17-4:1
  • 복음서 – 루가 13:31-35

사순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십자가 영원한 생명을 확증하는 하느님의 계약입니다.

1독서는 <창세기>입니다. 하느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람’(훗날 아브라함)과 ‘계약’을 확증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환상’으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며, 매우 큰 상을 내리리라.
창세 15:1

주석가들은 이 약속을 앞 장(창세 14장)과 연결시켜 해석합니다. ‘소돔’에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이 전쟁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창세 14:12). 아브람은 이 소식을 듣고 사병들을 거느리고 가서 조카 롯을 포함한 모든 것을 되찾아냈습니다(창세 14:13-16). 소돔 왕은 이 승리의 보답으로 아브람에게 ‘보상’하려 했지만 거절합니다(창세 14:21-24).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아브람의 심리는 ‘불안’합니다. 자신이 쳐부순 왕들이 다시 연합해 보복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이런 그의 불안과 걱정을 깨뜨리시기 위해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식으로 주석가들은 해석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좁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오랜 만에 ‘환상’으로 현현하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그 자체에서 오는 ‘두려움’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약속은 ‘멜리세덱’이 아브람에게 빌어 준 ‘복의 성취’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14:18-20).

 

아브람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를 보십시오…
창세 15:2-3a

하느님이 ‘방패’가 되어주시고, ‘큰 상’을 내리시겠다는 약속은 감사하지만, 자신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큰 상’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물려줄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그를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말씀하실 때 “큰 민족이 되게 하신다”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창세 12:1-3). 그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창세 12:4). 또 조카 ‘롯’이 요르단 분지로 분가해 나간 다음에도 하느님은 그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창세 13:15-17).

세월이 흘러 가나안에 정착한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자식’ 하나 없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근심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주님, 제 나이가 몇인지 아십니까? 저는 아무런 낙(樂)이 없습니다. 당신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다 필요 없고 저는 아들을 원합니다.”라는 호소입니다. 정말이지 한탄을 넘어 ‘약속의 말씀’을 믿고자 하는 정직하고 간절한 ‘기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10년이면 아브람은 약속의 성취를 오래 기다린 셈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을 불러서 약속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싶어 했고, 그의 ‘믿음을 확증’해 주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의 한탄에 다시 ‘약속’으로 ‘도전’하십니다. 이번에는 그 약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를 이를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창세 15:4

아브람의 종인 ‘엘리에젤’이 대를 이을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대를 이을 양자(養子)를 입양하는 관습이 있었고, 노예가 가문을 잇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어쩌면 ‘엘리에젤’을 양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일종의 ‘오해’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가 아니고 “아브람의 살과 피를 지닌 친아들”이라고 그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십니다. 하느님은 분명 약속을 기억하고 계시고 그것을 이행할 것이라는 반복입니다. 물론 이 약속이 실현되려면 아직 15년도 더 남았지만 말입니다.

 

그런 다음 그를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 약속을 시각적으로 ‘확증’시켜 주십니다. 그의 불안과 걱정을 깨뜨리는 약속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창세 15:5

분명 그 자손들 중에는 다윗도 있고, 다윗의 뿌리에서 돋은 ‘빛나는 샛별’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있을 것입니다(묵시 22:16; 마태 1:1).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한 순간을 꼽으라면 분명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의 불안과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아니 이런 구태의연한 표현으로는 그의 반응을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셨다.
창세 15:6

아브람은 ‘하느님의 도전’에 여전히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믿음(인내)에 그만 감동하시고 맙니다. “갸륵하게 여기셨다”는 말씀은 “의로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저는 아브람이 보여준 그런 믿음의 반응이 ‘사순 2주일’을 맞은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아브람처럼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믿음, 그런 인내를 간직하고 있습니까? 사실 이 장면은 구약성경에서 ‘믿음’(믿었다)과 ‘의’(의로 여기심)라는 단어가 사용된 첫 구절입니다(참고: 하바 2:4).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구원의 진리”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복음’인 셈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로는 이 장면을 이른 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로마 4장; 갈라 2:16; 3:6; / 참고: 히브 11:1-4,6,8 / 참고: 야고 2:18-26).

아브람의 믿음에 감동하신 하느님은 이전의 약속을 ‘회상’시켜주십니다(창세 12:1-3, 7; 13:15-17).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야훼다.
창세 15:7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기계시’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시고, 아브람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으며, 아브람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십니까? 아브람이 불렀던 것처럼(창세 15:2)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하느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실 것입니까? 가나안 땅을 주어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도자이시고, 약속의 이행자이신 하느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이번에는 아브람이 하느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확증’(보증, 담보)을 요청합니다.

내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창세 15:8

놀랍습니다. 방금 전에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더니 이번에는 확실한 ‘보증’을 요청합니다. 일종의 ‘의구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아브람의 손에 그 땅의 소유자라는 ‘등기’를 쥐어주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징표’(徵標)를 내주신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줄곧 ‘말씀으로 하시는 약속’뿐이니 그런 ‘징표’(徵標)를 요구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 할만도 합니다. 참 대단한 아브람입니다.

하느님은 뜬금없이 “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하십니다.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한 마리씩 나에게 바쳐라.
창세 15:9

놀랍게도 아브람은 그 뜬금없는 요구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그것은 “계약을 맺자”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당시 관습대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준비를 합니다(창세 15:10). 고대 중동에서 계약을 맺을 때는 ‘희생물’을 반으로 쪼갠 뒤 땅 위에 놓습니다. 그런 다음 쌍방이 ‘계약의 조건들’(내용)을 말하면서 그 쪼개진 주검 사이를 함께 지나감으로써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계약의 조건을 깨뜨리면 그런 꼴을 당해도 좋다는 ‘맹세’(서명)입니다(예레 34:18-20). 이처럼 계약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심각한 행위이고, ‘피로 보증’ 되는 ‘맹세’(서약)였습니다. 그러므로 ‘확증’(징표)을 요청하는 아브람에게 하느님이 제물을 바치라고 하신 뜻은 명백합니다. “너랑 나랑 그 희생물들 사이를 함께 지나감으로써 서로의 생명을 걸어 맹세(서명)하고, 이 계약 조건들을 영원히 확증하자.”

 

아브람은 제물을 마련하여 계약 맺을 준비를 했지만 한 가지 확인해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분명 ‘둘을 위한 계약’입니다. 자신은 하느님이 제시하시는 ‘계약의 조건’(아들을 주리라, 땅을 주어 차지하게 하리라)이 좋아서 계약하는 것이 맞지만, 하느님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직 그 계약 조건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마음은 하느님이 무엇을 요청하시든 기꺼이 그렇게 할 작정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나타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체되자 솔개들이 그 잡아놓은 희생물들 위에 날아오곤 했습니다(창세 15:11). 아브람은 솔개들을 쫓으면서 하루해를 다 보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은 우리의 기도생활을 교훈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고대하지만 더딘 것 같은 그런 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해선 안 됩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해 질 무렵, 아브람이 ‘신비경’에 빠져 들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창세 15:12). 원문에는 “깊은 잠이 아브람을 덮쳤고 큰 어둠의 공포가 그를 덮쳤다”라고 합니다. 잠잘 시간이 아닌데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을 ‘깊은 잠’(신비경) 속으로 데려가십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이어지는 하느님의 ‘예언’(창세 15:13-16)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예언을 아브람이 ‘맨 정신’에 들었다면 아마도 그는 ‘아들’뿐 아니라 ‘땅’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똑똑히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네 자손은…  사 대만에야 돌아오게 될 것이다
창세 15:13-16

아브람의 손자인 야곱의 때에 벌어질 일이고, 모세 때에 일어날 출애굽의 예언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의 섭리(예언, 축복)는 좀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오늘 낭독한 1독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그 다음을 배정했습니다.

그 ‘신비경’ 속에서 아브람은 하느님이 계약을 ‘확증’(맹세, 서약, 보증)하시는 장면을 봅니다.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창세 15:17

 

구약성경에서 연기, 구름, 불은 ‘하느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출애 3:2-4; 13:21-22; 19:18; 열왕상 8:10-11; 열왕상 18:38; 1역대 21:26; 2역대 7:1). 하느님이 쪼개진 희생물 사이로 지나가시며 불태우십니다. 하지만 좀 이상합니다. 분명 ‘둘을 위한 계약 체결’이기에 아브람도 지나감으로써 ‘쌍방’이 목숨을 걸고 ‘맹세’(서명)해야 하는 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 야훼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
창세 15:18

그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분명 하느님이 계약을 ‘확증’(맹세, 서약)하시는 동안 아브람은 수동적으로 단지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람은 계약에 ‘맹세’(서명)하지 않은 ‘일방적인’ 계약 체결입니다. 그렇다면 그 계약은 무효일 텐데도 하느님은 약속 이행을 확증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신 이 ‘계약의 확실성’은 아브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누구이고, 또 계약 조건으로서 그가 할 일이 무엇인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누구이신가에 “약속 이행의 확실성이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대등한 두 당사자 사이의 ‘동등한 조건’에 따른 ‘상호 합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방적인 보장’, 그것이 ‘하느님의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결코 파기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고, 이행하실 수 없는 계약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맹세(서명)하지 않은 계약을 나중에 아브람(아브람의 자손)이 깨뜨린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단지 아브람(아브람의 자손)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세우신 그 계약이 성취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1독서가 복음서의 배경 독서로 배정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은총’으로 이루어진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영원한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 분명 아브람처럼 우리도 구원을 선물받기 위해 조건적으로 뭔가를 이행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우신 그 은총의 십자가 계약 속으로 ‘믿음’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우신 그 은총의 십자가 계약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감사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사순절은 이 은총의 십자가 계약으로 돌아오는 시기이고, 우리 믿음을 돌아보는 시기입니다.

끝으로 하느님이 말씀하신 “이집트 개울(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는 다윗과 솔로몬 왕(1역대 13:5; 열왕상 8:65) 시절에, 이집트 개울(강)은 여로보암 왕(열왕하 14:25) 시절에 한 때 차지한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음모론에 따르면 이스라엘 국기는 이것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다윗의 별을 사이에 두고 위와 아래에 있는 파란색 두 줄이 그 강들을 상징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1독서는 하느님이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며 꿋꿋이 ‘믿음의 길’을 걸어 온 아브라함과 일방적으로 계약을 확증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계약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새 계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됩니다.

<시편 27>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1독서에서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방패’가 되어 지켜주시고, 큰 상을 내리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시편 역시 전체적으로 인생길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인생이 받는 ‘보상’을 노래합니다.

먼저 전반부(1-6절)는 하느님을 향한 확신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도와주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피난처’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온 하느님을 향한 ‘확신’입니다(1-3절).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꿋꿋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확신’을 보는 듯합니다. 그 뿐 아니라 2독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처럼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시오”(필립 2:17a)라고 교훈하면서 복음전도자로 ‘희망의 길’을 앞서간 사도 바울로의 ‘확신’을 듣는 듯합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성전과 관련한 자신의 강한 열망을 표현합니다(4-6절). ‘하느님의 임재’(보호)를 경험하는 일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고백합니다.

후반부(7-12절)는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나를 찾으라”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충실하신 하느님을 찾고, 필사적으로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이어집니다(7-10절). 그 동안 자신을 도와주시었으니 이제도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헤하려는 원수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11-12절). 한마디로 그는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간청하는 ‘믿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시(詩)는 다시 전반부처럼 도와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확신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납니다(13-14절). 살아생전 자신에게 베풀어질 변함없으신 하느님의 은덕을 높이고 확신합니다(13절). 그런 다음 다른 이들을 격려하는 말로 마무리합니다(14절). 시인이 격려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을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린 ‘아브라함’을 칭송하며, 그의 자손답게 믿음으로 살자고 교훈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시인처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시편 130:7) 우리도 믿음으로, 희망으로 하느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하느님의 약속 중 많은 일들이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시인의 확신처럼, 또 사도 바울로가 2독서 말미에 교훈하는 것처럼, 우리도 구원의 주님을 믿고 하늘의 시민답게 용기를 내어 굳세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인류에게 ‘희망의 복음’을 알리는 ‘전도의 길’을 간 사도 바울로가 옥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필립 1:7-8). 오늘 본문은 신앙여정의 좋은 ‘본보기’로 살아온 바울로 자신에 대한 소개로 시작합니다(17절a). 비록 그는 ‘옥중’에 있었지만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나를 보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면서 신앙생활 하라고 피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계속해서 그는 필립비 교우들에게도 새 신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라고 교훈합니다(17절b). 이 한 말씀으로 그는 우리가 새로 신앙을 시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좋은 안내자여야 함을 명백히 했습니다.

다음으로 신앙생활의 나쁜 예로 살고 있는 이들을 대조합니다(18-19절). 바울로는 자신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신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최후가 멸망뿐이기에 그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할례를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계약을 무효화하는 이들입니다(갈라 2:21; 5:11; 6:12; 1고린 1:23 참조). 그들은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들은 몸으로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로마 6장; 2고린 6:12-20). 이처럼 “자기네 뱃속(즐거움, 쾌락)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바울로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간주합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과 다시 오실 주님을 교훈합니다(20절). ‘필립비’는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시민’이라는 강한 자긍심을 갖고 살았고, 로마의 법과 관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참된 고향인 하늘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하더라도 ‘하늘의 시민’이라는 분명한 ‘자기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고향인 하늘의 법과 원칙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일종의 외계인입니다. 그러나 식민지에 살던 시민권자들이 자신들이 로마에 속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시민권자임을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외국인은 어느 나라에 가든지 내국인과 의무, 특권에서 차등이 있고 구별됩니다. 외국인은 자신이 체류하고 있는 나라에다 재산을 축적하지도 않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서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거나 동화될 것이 아니라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향을 생각하면서 하늘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로 출발한 영원한 세계로 향하는 이 ‘믿음의 길’을 아브라함처럼 잘 걸어가야 합니다. 더욱이 필립보에 살던 로마의 시민권자들이 ‘주님’과 ‘구세주’로 불리던 황제의 순방을 간절히 기다렸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우리의 참 주님이시오, 구세주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간절히 고대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분명 고대하시는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1절a). 그 날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21절b). 우리 비천한 몸을 변모시키는 그 일이 주님이 미래에 행하실 사역입니다. 새 몸을 입는 부활입니다. 그 날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하늘에 오를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고대합니다(고전15:49; 고후5:1). 지난 ‘주의 변모주일’에 들었던 복음서(루가 9:28-36)와 서신(2고린 3:18)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한 것처럼, 오늘날도 신자들 중에는 이 ‘하늘의 소리’에 마음을 쓰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일에만 마음을 씁니다. 좀 더 돈을 벌면, 큰 집을 사면, 생활이 안정되면, 그 때 가서 ‘하늘의 소리’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식으로 미루어둡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로 변질시켜가고, 십자가에서 은총으로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 계약을 배척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애도(哀悼)하신 것처럼, 스스로의 영적 상태를 결국은 멸망해 버리고 말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당부처럼, 하늘 시민답게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필립 4:1).

<복음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루가 9:44-45)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십니다(루가 9:51). 가시는 길에 여러 동네와 마을에 들러서 가르치십니다. 본문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 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아직 갈릴래아에 계십니다.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31-33절)는 헤로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 사명을 완수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후반부(34-35절)는 하느님의 새 계약, 즉 영원한 구원 계약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도(애도)와 재림 예고입니다.

전반부부터 보겠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갈릴래아에 계실 때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중요한 정보를 하나 알려드립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루가 13:31

신약성경에는 ‘헤로데 왕’이 여럿 나옵니다. 본문에 기록된 헤로데는 ‘안티파스’(BC 20년 ~ AD 39년)입니다. 그는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 BC 73년경 ~ BC 4년)의 네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다섯 번째 아들입니다. 로마의 하수인이자 허수아비 ‘왕’으로(사실은 영주)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다스렸습니다. 황제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아 통치했기 때문에 ‘소요’로 로마제국이 개입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무척 애썼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제거한 것도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루가 9:7-9). 이제 그는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같은 위험인물로 눈 여겨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던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급히 찾았습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정보라 할지라도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염려했습니다. 루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좀 더 우호적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한 사건이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이 치유 사건 후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모의한 것으로 기록합니다(마르 3:6). 마태오복음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단독으로 예수님을 없애 버릴 모의를 했다고 기록합니다(마태 12:14). 반면에 루가복음서 기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한 것으로 다소 약하게 묘사합니다(루가 6:11).

또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루가 7:36; 11:37; 14:1). 루가의 이런 보도들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께 찾아온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꼼수를 쓰러 온 이들이 아니라 진심으로 염려해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바리사이파는 추구하는 바가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에 바리사이파와 쌍벽을 이루는 이들이 사두가이파이니 그들과 비교하면서 어떤 당파인지, 어떤 신념과 가치를 추구했는지 보겠습니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사두가이파의 반동으로 시작된 ‘바리사이파’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민(選民)답게 성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시작된 일종의 ‘개혁 당파’입니다. 사두가이파는 대부분 신분이 높은 제사장이나 경제력이 좋은 평민귀족 출신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주로 수공업에 종사하였기에 상류계급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문헌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출신도 바리사이파에 속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던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종교적인 면에서 사두가이파와 대립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기록된 율법’, 즉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기록된 율법 외에 ‘구전(口傳) 율법’도 중요시 여겼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천사나 영혼 불멸도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천사의 존재도 인정했고, 사후세계도 인정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레위기의 ‘정결 규정들’과 ‘음식 규정들’을 자신들 같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일상에서 철저히 지켜야할 규정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일상생활’에서 지켜야할 ‘삶의 기준’이라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개혁가’ 루터(종교개혁가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의 ‘만인사제설’에 비견할 만큼 ‘혁신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장소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았고, ‘제의’가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참여했지만, 대부분은 직업을 가지고 ‘회당’을 근거지로 활동했습니다. 계약관계는 ‘율법 준수’로 유지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율법학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부는 회당에서 율법 해석과 필사,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심지어 메시아 대망에서도 두 당파는 차이가 납니다. 사두가이파는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던 반면 바리사이파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사회정치적인 면에서도 사두가이파와 대립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의회격인 ‘산헤드린’을 장악한 권력집단이고, ‘사법권’(독자적 형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파의 법정에 섰을 때 받으셨던 재판이 바로 이 ‘형법’입니다. 그들은 성전 ‘제의’만 보장된다면, 어떤 정치체제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일종의 ‘실용주의’를 취했습니다. 로마는 유대 땅의 정치지배 구조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파는 헤로데와 로마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안정적인 성전 제의를 보장받았습니다. 이런 면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율법 규정에 따라서 ‘성전 제의’뿐 아니라 그레코, 로만이라는 이민족 문화의 침투 속에서 이스라엘 문화가 영향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인 셈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파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상류층에게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백성들로부터의 인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이처럼 바리사이파는 ‘율법준수’를 삶의 목적으로 삼을 만큼 충실한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파는 어떤 부분에서 추구하는 바가 겹칩니까? 예수님도 그들처럼 ‘개혁가’이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처럼 ‘율법에 충실’하셨습니다. 초창기에는 그들처럼 ‘회당’을 근거지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셨습니다. 반면에 명확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문자화된 율법과 자신들을 동일시한 데 반해 예수님은 문자로부터 좀 더 자유로우셨고, 자신을 ‘예언자 전통’과 동일시하셨습니다. 루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서부터 이 점을 명백히 했습니다(루가 4:16-30).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루가 13:33)는 오늘 말씀도 예수님이 ‘예언자 전통’과 자신을 동일시했음을 보여주는 연장선에 있습니다.

분명 복음서 모두에서 바리사이파는 예수님께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난 이야기에서 바리사이파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파는 중앙인 예루살렘보다 지방에 있던 ‘회당’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들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간 세력이 그들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간 이들은 중앙 종교권력, 즉 ‘산헤드린’(의회 권력)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사두가이파와 대사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헤로데를 이렇게 부릅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루가 13:32a

사람을 동물에 빗대었으니 좋은 뜻은 아닙니다. 여우는 잡식성인데 먹잇감이 사정권에 도달할 때까지 죽은 척 연기하다가 잽싸게 잡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습성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우는 꾀 많고, 속임수에 능하며, 교활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유대 문화는 여기에 ‘파괴자’와 ‘거짓 예언자’란 상징도 덧붙였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포도 꽃이 한창인 3-4월 이스라엘에서는 들쥐와 같은 설치류(齧齒類)들도 왕성한 활동력을 보입니다. 그것들을 먹잇감으로 삼는 여우가 ‘포도밭 돌담’ 밑을 파헤치는 바람에 담이 허물어집니다. ‘포도밭’에 들어가 들쥐를 잡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람에 꽃이 한창인 포도밭이 엉망이 됩니다(아가 2:15). 게다가 여우가 무너뜨린 돌담 사이로 다른 들짐승들이 들어와 ‘포도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습니다. 농부들 입장에서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이사 5:1-7).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아서 하느님의 포도밭인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거짓 예언자들을 ‘여우’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에제 13:4). 이처럼 여우는 ‘포도밭’을 망치는 ‘파괴자’, ‘황폐자’, ‘거짓 예언자’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헤로데를 ‘여우’라 부르신 것은 우리 식으로 하면, 그 ‘천벌 받을 놈’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교활한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헤로데는 정치적 목적으로 자기 아버지처럼 도시들을 건축했고,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로마 황제를 기념하는 도시 ‘티베리아’를 세워 갈릴래아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또 자기 권력의 안정을 위해 유다 백성이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는 못된 짓까지 저질렀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잡으러들었습니다(루가 9:7-9). 나중에 예수님은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머물던 헤로데로부터 ‘재판’을 받았습니다(루가 22:6-12). 헤로데는 언뜻 보기에 힘 있는 권력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영리하고 민첩하게 포도밭을 휘젓고 다니는 여우라 하더라도 몽둥이로 잡을 수 있는 ‘약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를 ‘힘 있는 통치자’로 여겨 두려워했다면, 여우가 아니라 ‘사자’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권력을 위해 교활하게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있지만 실상은 약한 통치자, 그가 바로 ‘헤로데’였습니다. 실제로 헤로데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서기 39년 경 로마황제 칼리굴라에게 영지를 몰수당하고 오늘날의 프랑스로 추방당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세우러 오신 분’이고, 복음서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보호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루가 13:33

일제치하의 그 엄혹한 시절에도 하늘에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걸어간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가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헤로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십니다. 지금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있지만(루가 9:51), 헤로데 때문에 그 길(사명)과 일정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음을 천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심지어 일의 종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조차 헤로데가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길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을 명백히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는 ‘예루살렘’에서 ‘완성’해야(마쳐야) 할 ‘거룩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는 성자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느님이 주신 ‘신성한 명령’(거룩한 구원 계약)입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결코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사명의 마지막 하나까지 다 이루실 참입니다. 십자가와 삼일 후의 부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시던 예수님의 얼굴 표정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유다인들이 세상의 중심이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게 여기던 곳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구원 계약으로 오신 예수님, 메시아로 오신 분이 다른 곳도 아니고 그 ‘예루살렘’에서 다른 예언자들처럼 배척당하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것도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하던 대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말입니다.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복음서 후반부(34-35절)는 예수님을 배척할 예루살렘을 향한 피 끓는 ‘애도’(哀悼)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실 만큼 애절한 감정을 표출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루가 13:34a

그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James Tissot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58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이 깊은 애도는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로 치는 처형은 영매나 점쟁이(레위 20:27), 우상숭배(신명 17:3,5) 같은 하느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해당했습니다. 그 일을 예루살렘은 예언자들과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에게 저질렀습니다. 예루살렘은 ‘살인자’라는 정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참담한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몰아닥칠 파멸로부터 돌아서라고 간청합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루가 13:34c

 

암탉은 위험을 인지하면 병아리들을 모으기 위해서 소리를 내고, 재빨리 날개를 펼쳐 병아리를 덮습니다. 여기서 암탉은 누구일까요? 구약성경에서 ‘암탉’(그리스어로는 단순히 ‘새’)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성적’ 이미지입니다(시편 17:8; 91:4; 125:2; 이사 31:5). 암탉의 날개 외에도 오늘 시편의 ‘피난처’, ‘장막’(초막), ‘그늘’, 1독서의 ‘방패’도 보호하시는 하느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암탉에 비유하신 이 말씀은 자칫 ‘신성모독’처럼 들릴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암탉’(날개)은 하느님께만 사용하는 이미지인데,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려고 오신 분’이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싶으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은총의 ‘새 계약’으로 부르러 오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오는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보호요, 양육의 축복입니다(마태 11:28). 사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머잖아 ‘로마’라는 ‘독수리’가 유다 땅에 덮칠 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마르 1:14-15). 이 복음 선포를 귀담아듣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 외에는 그 불행을 막을 수 없다고 초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예수님의 부르심(복음)에 끝내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대적하고, 종국에는 십자가로 내몰아 죽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예언자’이시고, 예루살렘은 ‘살인자’임이 다시 입증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새 계약 초대)에 응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너희 성전(원문에는 ‘집’입니다)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루가 13:35

본문에 ‘성전’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는 ‘집, 가족’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이스라엘) 집 전체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복음에 응답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은 서기 70년 로마 독수리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재림’을 약속하십니다. 그 재림의 날이 올 때까지 유대인들은 결코 ‘메시아’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로마 11:25-26a) 찬 다음에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의 문이 열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방인과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모든 교회 성도) 모두는 재림의 때 ‘새 계약’이신(로마 11:26-27) 예수님을 메시아로 반기며, 우리가 고난주일 성지축복에서 하는 것처럼,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시편 118:26; 마르 11:10; 마태 21:9; 루가 19:38; 요한 12:13).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2019년 사순절이 벌써 10일이 지났습니다. 사순절은 내가 지금 걷는 인생길, 내게 주신 사명을 성찰하는 시기입니다. 만일, 나의 인생길이 하느님의 뜻과 연결된 생명의 길이 아니라면 얼른 돌아서서 생명의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전례독서는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세 분이 등장했습니다. 한 분은 ‘부르심’ 받은 대로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꿋꿋이 ‘믿음의 길’을 걸어 간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믿음에 감동하신 하느님은 그를 ‘갸륵하게’ 여기셨을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은총으로, 무조건적으로) 자손과 약속의 땅에 대한 계약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다른 한 분은 ‘십자가’ 복음의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아 꿋꿋이 ‘희망의 길’을 앞서 간 ‘바울로’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 우리 비천한 몸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희망을 그는 온 인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마지막 한 분은 ‘십자가-사랑의 길’을 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새 계약을 확증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분들이 각자의 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을 불러 ‘사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각자가 걷는 그 길을 통해 삶의 목적과 방향을 보여주셨으며,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 하늘에(영생에, 부활에), 하느님께 속한 분들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감동시킨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처럼, 하늘 시민임을 일깨워주신 희망의 사람 바울로처럼,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새 계약을 사랑으로 완성하신 그리스도 예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꿋꿋이 잘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모두 함께 새 몸을 입고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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