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3. 주의 변모 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주의 변모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도수행을 통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우리’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날마다의 기도수행을 통해 그리스도처럼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비천한 몸이 순식간에 변화하여 불사의 옷을 입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존재의 변화’를 희망합니다. 이 희망을 간직한 우리를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이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4:29-35
  • 시편 – 99
  • 2독서 – 2고린 3:12-4:2
  • 복음서 – 루가 9:28-36

오늘은 ‘주의 변모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도수행을 통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공현대축일’로 시작한 ‘공현절기’를 마감하고,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몇 걸음 앞두고 있습니다. 물론 <성공회 기도서>에는 ‘공현절기’가 없고 ‘연중시기’라는 용어만 있습니다(기도서 25페이지). 따라서 정확히 말씀드리면, 오늘은 주님의 공현(1월 6일) 후 첫 주일인 ‘주의 세례 주일’ 이후 주간부터 시작한 ‘공현 후 연중시기’를 마감하고,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몇 걸음 앞둔 주일입니다.

교회력에서 ‘연중시기’는 ‘특별 절기’(節氣)가 아닌 ‘일반 시기’라는 다소 밋밋한 용어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러 모인 매주일 성찬례의 ‘기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용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현행대로 ‘공현 후 연중시기’라 부르기보다는 1965년 『공도문』처럼 ‘공현절기’라는 용어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공현 후 연중시기’에 배정된 ‘전례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공회도 세계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개정 공동전례독서’(RCL)를 주일 성찬례에서 사용합니다. ‘주의 세례 주일’부터 지난 주일까지 묵상해 온 ‘복음이야기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빛(신성)의 드러남’이라는 ‘공현대축일의 주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관련 글은 2019. 1.6. 공현대축일 설교문을 참고하세요). “예수님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성육신 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신성’을 증언하는 이야기들의 연속입니다.

오늘은 ‘주의 변모주일’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주의 변모축일’(The Feast of the Transfiguration)은 해마다 8월 6일로 고정입니다. 8월 6일이 주일과 겹칠 경우에는 다른 주일보다 우선하는 ‘주요축일’로 기념합니다. 전통적으로 성공회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직전 주일을 ‘공현 후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주의 변모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이렇게 ‘주의 변모’ 사건을 두 번 기념하는 데, 어느 시점에 기념하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는 셈입니다.

요즘은 일상에서 ‘변모’(變貌)보다 ‘변화’(變化)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굳이 교회가 ‘변모’라는 말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포함한다면, ‘변모’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외양’(겉모습)의 변화에 좀 더 치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變容, transformation)으로 바꿔 쓸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변모’라고 쓰는 이유를 알겠고, 또 두 번이나 기념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임은 알겠는데, 어째서 ‘공현 후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주일에, 또 ‘사순절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직전 주일에 기념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두 절기의 연결 고리로 ‘주의 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나눔 본론에서 다룰 내용이지만 우선 간단히 언급합니다.

첫째, ‘인상’(印象) 깊은 ‘마감’은 인상 깊은 ‘출발’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학교 졸업식이 그런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다시피 평범한 일상이라도 의미부여를 해서 ‘특별하게 끝내면’, 그 ‘인상’이 오래 남고, 다른 ‘시작’에도 영향을 주는 법입니다. 오늘이 ‘공현절기 마감 주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뭔가 ‘특별한’ 마감을 ‘복음서’에서 기대합니다. 실제로 복음이야기는 ‘공현대축일’로 시작한 ‘빛의 드러남’, 즉 ‘신성의 드러남’이라는 주제가 ‘최고조’에 달합니다. 더욱이 이번 주 수요일은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 축복식’이 있습니다. 교회력에서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 부릅니다. ‘주의 변모’라는 대단히 인상적인(종말론적인) ‘마감’은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큰 용기’를 줄 것입니다.

둘째, ‘주의 변모사건’이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정확히 절반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갈릴래아’에서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십자가, 부활로 전개됩니다(루가 9:51). 이처럼 ‘주의 변모사건’은 예수님 공생애 전반을 기념해 온 공현절기를 마감하고, 공생애 후반부를 기념하는 사순절기와 그 이후까지 바라보게 하는 일종의 ‘중첩점’(重疊點)에 위치합니다.

물론 사순절기 직전 주일이 아니라 ‘사순 2주일’을 ‘주의 변모주일’로 지키는 세계성공회도 있습니다(로마가톨릭도 이 전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새로 수정된 기도서의 ‘사순 2주일’ 전례독서도 ‘주의 변모사건’을 복음서로 읽도록 옵션으로 배정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교회력으로 ‘다해’이고, 다해 동안은 ‘루가복음’(간혹 요한복음이 배정되기도 합니다)이 복음서로 주로 낭독됩니다. 교회력에서 ‘주의 변모사건’이 갖는 위상에 대한 이런 배경이해를 가지고 이제 말씀 나눔을 진행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공관복음 모두에 전해집니다. 내용에서 차이점들이 발견되지만 예수님의 ‘첫 번 수난 예고’ 후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뿐 아니라 분명 ‘부활’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부활’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일로 ‘불신’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정확하겠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는데, 이제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니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들은 뒤숭숭한 마음을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수난 받는 ‘메시아 상(像)’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혼란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모든 일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셨습니다. 이야기 중에 점차 눈빛이 흐릿해 지는 그들을 보며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가끔 웃기는 소리를 했지만 내심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고백을 했던 베드로마저도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내신 길은 ‘기도’였다고 오늘 복음이야기는 전해줍니다.

그렇게 혼란과 불안감 속에서 지낸지 ‘여드레쯤’이 지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드레쯤’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새로운 창조의 날인 부활’을 루가가 미리 언급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가령 노아의 홍수 때 살아남은 사람은 ‘8식구’이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인류가 퍼져나갑니다(창세 6:13-10:32; 1베드 3:20). 아브라함의 후손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창세 17:10-14; 21:4; 23-27; 레위 12:3; 루가 2:21).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도 ‘주간 7일째인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인 주간 첫날’(일요일 이른 아침)입니다(마태 28:1; 마르 16:1; 루가 24:1; 요한 20:1). 이들 사건에 숫자 ‘8’이 공통적으로 관련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루가가 언급한 ‘여드레쯤’이 ‘구원’, ‘새로운 시작과 출발’, ‘새로운 창조’, ‘부활’을 상징한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일리 있어 보이지만, 상상력이 좀 지나쳤습니다. 루가는 본문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여드레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루가복음서 자체가 아니라 ‘전례’ 속에서 ‘숫자 8’의 상징이 상기될 때는 ‘구원’, ‘새로운 시작과 출발’, ‘새로운 창조’, ‘부활’과 관련 있다는 점은 기억해 두십시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은 ‘안식일 다음날’에 해당하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날’은 창세기의 ‘주간 주기 7일’(학자들은 창세기의 7일이 고대 바빌론의 점성술(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창조설화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속에서는 ‘창조의 첫 날’, 즉 빛을 창조하신 날에 해당하고, 하느님이 안식 하신 후에 세상에 도래한 ‘여덟 번째 날’에 해당합니다(창세 1:1-2:4a).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느님 자녀들의 영원한 구원을 완성하신 이 ‘부활의 날’을 ‘그 창조의 첫 날’과 구분하여 ‘새로운 창조의 날’이라는 의미에서 ‘제 팔일’이라 불렀습니다. 인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던 창조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 창조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2고린 5:17, 갈라 6:15). 이처럼 숫자 8이 전례 속에서 상기되는 ‘새로운 창조’라는 상징은 성당 입구에 배치된 ‘팔각형 세례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례대에서 영세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부활절기에 사용하는 부활 촛대도 ‘팔각형’입니다.

예수께서는 최측근인 제자 3명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십니다. 루가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세 제자의 이름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로 기록합니다. 루가공동체가 알고 있는 제자들 사이의 ‘서열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이 데려가신 이들 세 제자를 ‘기도’라는 ‘수행의 언어’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가난’, ‘정결’, ‘순명’을 뜻합니다. 사실 모든 기도 수행은 ‘가난’, ‘정결’, ‘순명’이 함께 해야 합니다. ‘가난’으로 출발하고, ‘정결’로 진행하며, ‘순명’으로 끝맺습니다. 다른 말로 ‘가난, 정결, 순명’은 ‘죽는 일’입니다. 자기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죽고, 하느님으로 사는 일이 ‘기도 수행’입니다. 이 기도 수행은 오늘 말씀 나눔 마지막에 다시 강조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의 ‘위엄’과 ‘통치’의 동의어입니다.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계시의 장소’입니다. 한마디로 ‘산’은 지상에서 ‘하늘’로 가는 일종의 ‘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산’으로 가서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2장).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출애 19-20장). 예언자 엘리야는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누가 참 하느님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1열왕 18:20-40). 예루살렘 성전은 ‘시온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시편 50:2). 예수님은 ‘해골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마르 15:22),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루가 24:50-51; 사도 1:12). 오늘날도 하느님과 가까이 접촉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산’(물론 우리 내면에도 ‘에베레스트’ 보다 더 높은 산이 있습니다)에 올라가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 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이 산에 올라간 목적입니다. 수난 예고로 인해 ‘혼란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따라나선 이 위태로운 제자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실 참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이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고 끝까지 함께 할 용기를 기도하실 참입니다. 특히 언제, 어디서 그 수난을 감행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루가 9:5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기도제목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밤’이었고, 예수님만 기도 속에 남겨놓고 그들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주님을 남겨두고 잠들어 버린 ‘올리브산’(게쎄마니)을 떠오르게 합니다(루가 22:39-46; 마르 14:32-42). 그들이 잠든 사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루가 9:29

공관복음서 중에서 루가복음서만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런 ‘변모’가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기도 수행’을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증언입니다(루가 3:21; 5:16; 6:12-13; 9:18-20; 11:1-4; 18:1; 22:39-46; 23:34,46). 기도 중에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눈부시게) 빛이 났습니다.” 이 순간을 묘사하면서 마태오나 마르코는 ‘변화하다’, ‘변형하다’는 뜻의 동사 ‘메타모르푸’(metamorphoo)를 사용했습니다. 루가는 ‘질적으로(형태적으로) 다른’이라는 뜻의 형용사 ‘헤테로스’(heteros)를 사용했습니다. 사용한 단어는 차이가 나지만 ‘그 전과 달라졌다’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옷이 하얗게 빛이 났다”는 묘사도 예수님이 천상의 존재로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달라진’ 예수님을 그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난데없이 두 사람이 “영광에 싸여” 나타납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났다”는 말은 그들 역시 하늘로부터 온 이들임을 알려줍니다. 공관복음서는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였다고 공통으로 전해줍니다. 루가는 ‘엘리야와 모세’라고 적은 마르코와 달리 ‘모세와 엘리야’라고 바꾸어 적었는데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1독서 <출애굽기>가 전하는 것처럼, 그는 ‘출애굽의 지도자’이자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이 적힌 ‘증거판’ 두 개를 받아가지고(오늘 시편 말씀처럼 ‘거룩하신 하느님’과 대화하고) 내려옵니다.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보니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영광을 덧입었다는 뜻입니다. 그의 ‘빛나는 얼굴’이 복음서의 배경독서로 채택된 이유입니다.

재미있게도 “빛나게 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카란’(qaran)은 ‘뿔이 나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4대 교부 중 한 사람이자 ‘불가타성서’(구약성경을 라틴어로 옮김)의 역자로 알려진 ‘예로니모’(Jerome, 347-420) 성인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이 대목을 “얼굴에 뿔이 났다”로 변역했는데 “얼굴이 빛나게 되다”의 ‘오역’(誤譯)입니다. 사실 ‘빛나게 되다’란 뜻의 히브리어 ‘카란’(qaran)과 ‘뿔’이란 뜻의 히브리어 ‘케렌’(qeren)은 어근이 동일합니다. “얼굴에 뿔이 났다”란 구절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는 뿔이 난 ‘모세상’을 조각했을 정도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시나이 산에 이른 1세대들인 그들은 ‘빛나는’ 얼굴의 모세가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할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장면을 오늘 2독서에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 매여 살아가는 유다인들의 무지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3:14-16).

그 1세대들은 40년 광야여정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둔 새로운 시대의 주역들에게 모세는 설교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 지켜야할 하느님의 율법을 ‘거듭(重) 강조하여 명령’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申命記)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1세대에게 전해준 ‘하느님의 율법’을 가나안 입성을 앞둔 2세대에게 ‘다시 해석하여 전해주는 설교(말씀)’라는 뜻입니다. 설교 속에서 모세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미래에 세워주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명 18:15

이 예언의 당사자인 모세의 출현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실 과업’(사명)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설교로 예언한 ‘예언자’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과 따라나선 몇몇 떠돌이들을 노예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이끌었지만,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하실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정체성과 사명은 너무나 고귀하기에 루가는 마르코와 달리 ‘엘리야’보다 ‘모세’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Giuseppe Angeli (Italian, 1712 – 1798 ), Elijah Taken Up in a Chariot of Fire, c. 1740/1755, oil on canvas, Samuel H. Kress Collection

또 한 사람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모세와 달리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승천’한 사람입니다(열왕하 2:1-12).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했다”는 확신은 그가 ‘메시아가 오시는 종말 사건들’이 있기 전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낳았습니다(말라 4:5-6). 따라서 예언자들의 대표인 엘리야가 그 자리에 출현한 것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있을 예수님의 ‘죽음’이 ‘종말 사건들’과 결정적으로 관련 있음을 나타냅니다. 더욱이 ‘승천한’ 그의 출현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늘로’ 오르실 분이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께 사로잡힌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상적 자기’에서 ‘신적 변화와 변형’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독특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갔고, 세상의 종말에 돌아올 것으로 기대된 인물들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대화 내용을 ‘명확하게’ 전해 줍니다.

…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가 9:31

그 대화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수행하시려는 ‘공생애의 마지막’, 즉 ‘죽음’입니다. 본문에 수사학적으로 ‘죽음’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기본형은 ‘엑소도스’(exodos)입니다. ‘출애굽기’의 영어 제목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떠남(나가기), 탈출, 출발, 여행의 시작, 출구’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디서 어디로 ‘탈출’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자리에 서 있던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드러납니다. ‘지상’에서 ‘하늘’입니다. 이렇게 보면 ‘엑소도스’라는 단어는 ‘하늘로의 탈출’인 ‘승천’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루가 9:51). 더욱이 ‘예수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은총’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죄’(혼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인 ‘구원’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노예로 붙잡고 있는 ‘죽음’(불안, 절망, 염려, 걱정)으로부터의 ‘출구’이자 ‘해방’입니다. 이렇게 루가는 예수님의 죽음이 모세가 행한 ‘출애굽 사건의 재현’일 것이라 해석해 줍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하늘’로의 탈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시킬 그 구원의 과업이 이루어질 곳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은 우리 마음의 중심자리에 대한 영적 상징입니다. 인류 구원의 과업,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예루살렘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수난하시고 죽으실 것이지만 그곳에서 부활하실 것입니다. ‘변모사건’은 예수님과 예루살렘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공현절기 마감과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몇 걸음 앞둔 오늘 우리는 ‘주의 변모사건’의 중첩된 의미를 발견합니다. ‘일차적’으로 ‘변모사건’은 첫 번 수난 예고 후에 ‘혼란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 ‘계시체험’(신비체험)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이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인류를 해방시킬 ‘구세주’이시고, 어둠 속을 살고 있는 ‘인류의 참 빛’이심을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려는 ‘계시체험’입니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한 ‘동반자’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이 ‘변모사건’을 사순절기를 몇 걸음 앞 둔 오늘 기념하게 하는 보다 ‘직접적인 의도’를 발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격려”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순절기의 여정에 ‘용기’를 갖고 나서라는 초대입니다. 사순절기로 들어가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부활’과 ‘승천’도 바라보라는 은혜로운 초대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보여주신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 즉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존재 변용’을 희망하며(1고린 15:42-44, 52-53) ‘용기를 내라’는 은혜로운 초대입니다. 이 희망을 사도 바울로는 2독서로 낭독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도 교훈하고 있습니다(2고린 3:18b).

세 분의 대화가 진행 중인 동안 베드로와 동료들은 선잠을 깹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든 ‘의식’을 차려보려고 합니다. 깊이 잠들어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자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잠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 지 성찰해야 합니다. 물론 그들이 그 중요한 순간에 깊이 잠들었다는 것도 신비스럽지만 그 옛날 영웅인 두 사람을 베드로가 알아보았다는 사실도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천국에서는 그렇게 서로를 환히 알아볼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그가 갑자기 소리를 칩니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루가 9:33

웃깁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들이 천막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평소처럼 갈팡질팡합니다. 루가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베드로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고 전해줍니다(루가 9:33b).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상의 차원과는 다른 ‘신적 존재의 현존’ 앞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그곳에 ‘초막’을 지어서 ‘영광스러운 임재’를 ‘계속해서’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 영광의 현장이 멈추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초막’은 자신의 ‘신적 체험’을 ‘구체화’하고, 그 체험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상징물’입니다. ‘산 아래’ 세상이 상징하는 ‘일상의 문제들’로부터 ‘해방’(탈출)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입니다.

더욱이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관련짓자면 그의 말은 ‘예수님을 유혹’하는 말입니다. 수난하고,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는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영광스럽게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하고만 같이 있고 싶다는 집착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만 미래의 십자가를 피하라고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는 욕심입니다. ‘수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던 욕망입니다. 특히 그는 ‘천막 셋’이라고 말함으로써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대등하게 두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좌충우돌’ 베드로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오해했습니다. ‘신비체험’은 나중을 위해 저장해 둘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분명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 ‘천상의 영역’을 힐긋 보는 특별한 ‘신적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너무나 황홀합니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그야말로 ‘순간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순간적인 신비체험’이 아니라 ‘훨씬 긴’ 일상을 살아야 할 존재임을 알아차립니다.

베드로가 부지불식간에 던진 ‘초막’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인 ‘초막절’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 34:22; 신명 16:16). ‘초막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매년 가을, 수확이 완료 될 때 1주간 지켰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 감사절’입니다. 이 초막절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는 절기”라는 점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초막’이란 말을 내뱉었지만, ‘변모사건’의 의미를 밝혀주는 대단히 중요한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눈을 통해 ‘변모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새 언약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물론 그 ‘새 언약’은 초막이 아니라 ‘골고타 산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됩니다. 그렇기에 루가복음서 기자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십자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셨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루가 9:31).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산상에다 초막을 치고 사시는 일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사이 ‘구름’이 일어나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구름’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출애 16:10; 19:9; 24:15-18; 33:9-11). 처음에 베드로는 자신들이 거기에 있는 것이 좋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그들을 감싸며 하느님 임재의 영광이 강렬해지자 ‘겁’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입니다.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루가 9:36

베드로는 세 개의 ‘초막’을 만들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굳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장면을 보고 계셨던 또 한 분의 대답은 “안 돼!”였습니다. 이것을 명백히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천사를 시키시지 않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회상시킵니다(루가 3:22).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시편 2:7; 이사 42:1). 지금 여기서는 ‘사랑하는’이라는 말은 생략되고, ‘택한 아들’이라는 ‘메시아’ 칭호로 불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 선택되신 ‘유일한’ 분으로 선포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수준이 아님을 명백히 들려주셨습니다. 분명 그들은 훌륭한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그들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초점과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신명 18:15). 수난과 부활과 승천으로 나아가는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구원 과업을 위해 선택된 예수님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변모사건’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강조’입니다.

그러면 제자들 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가 듣고 따라야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루가 9:23

부활절기를 준비하는 사순절기로 들어가는 우리가 ‘심장’에 새기고 있어야 할 한 말씀입니다. 그 소리가 그친 뒤 구름도 사라지고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제자들과 함께 홀로 남았습니다. 하늘의 음성 뒤에 오로지 예수님만 그들의 ‘시야에 남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율법과 예언은 마감되고(루가 11:13), 구약의 모든 약속은 복음이신 예수님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모세나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예비적(그림자) 존재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과 승천으로 구원을 완성하셨기에 그들의 역할은 모두 끝났습니다. 인류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변모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그런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한들 당시에는 믿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 사건을 또렷이 언급했고(2베드 1:16-18), 요한도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는 언급을 했습니다(요한 1:14).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분명 ‘변모사건’은 첫 번 수난 예고 후에 ‘혼란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하려는 ‘신비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희망을 위해서 베풀어주신 ‘신비체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그들이 겪게 될 고난에 대비시키는 일종의 준비였습니다. 고난과 죽음이 결코 마지막이 아님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기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수행’ 속에서 일어난 ‘주의 변모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궁극적 승리’를 보여주시어 제자들을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은혜로운 초대였습니다. 그들이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변모사건’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증언해 주시던 ‘하느님의 음성’을 떠올린다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신비체험’은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곧바로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만큼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 즉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변화이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영광의 가장 큰 표시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 ‘변화산’(변모산)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순절 기도 수행’을 통해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구원의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처럼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 전파의 삶’을 삽니다. 주님은 이런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를 보존하시기 위해 때로는 기도 수행 중에 ‘자신의 현존’을 우리 눈앞에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기도 수행 중에 ‘음성’을 우리 귀에 들려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신비체험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황홀한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베드로처럼 그런 체험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산 아래 세상인 일상이 있음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가난, 정결, 순명’이라는 ‘기도 수행’을 통해 ‘머리’로만 살려는 ‘이기적인 자기를 부인’해야 함을 기억합니다(루가 9:23). ‘가난, 정결, 순명’이라는 ‘기도 수행’을 통해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가슴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기억합니다(루가 9:23). ‘가난, 정결, 순명’이라는 ‘기도 수행’을 통해 자기생각, 자기감정, 자기문제에 붙잡혀 살아가는 ‘이기적인 나’는 죽고, 그 죽음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는 ‘존재변화의 길’, 즉 ‘자유의 길’로 나아가야 함을 기억합니다(루가 9:24).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우리가 ‘이마’(머리)에 재를 바르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죽음’으로 나아가는 ‘가난, 정결, 순명’이라는 ‘의식의 변화’ 없이 ‘존재 변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의식’(생각, 감정, 기억)이 바뀌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세상을 전혀 새롭게 ‘보고 들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변모사건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자기 죽음의 길을 걷는 이들은’ 사도 바울로가 2독서로 교훈한 것처럼, 언제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이 순식간에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순식간에 불사의 옷을 입고서 변모하여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42-44, 52-53; 필립 3:21). 진정 그런 복락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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