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17. 연중6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행복하여라.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서는 ‘행복과 화(禍)선언’입니다. 전반부는 가난, 굶주림, 슬픔, 미움, 배척, 모욕, 누명 때문에 약한 내가 넘어질까 안쓰러워서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는 주님의 행복선언입니다. 따뜻한 심장으로 우리를 관계하시는 주님의 공감입니다. 후반부는 자기 잘 낫다고 건방을 떨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주님이 ‘불행’을 선언하시는 모습입니다. 살아있는 심장으로 공감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아픈 마음들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로 살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정의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불의한 권세를 심판하시며 억울한 이들을 돌보아주시나이다. 비오니, 의로움을 분별하는 지혜와 실천하는 용기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17:5-10
  • 시편 – 1
  • 2독서 – 1고린 15:12-20
  • 복음서 – 루가 6:17-26

연중 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행복하여라.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살아있는 람들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쌍을 이루는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열거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들과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들, 복과 천벌, 불모지에 자라난 덤불과 물가에 심은 나무, 의인과 악인(죄인)들, 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바람에 까불리는 겨, 참 증인들과 거짓 증인들, 행복과 화(禍, 불행), 가난한 사람들과 부요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과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과 웃고 지내는 사람들, 누명을 쓴 사람들과 칭찬 받는 사람들, 참 예언자들과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이러한 대조를 들으면 출발부터 달랐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쓴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들은 ‘같은 삶의 자리’에 있다가 갈라진 이들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몰아붙이며 박해한 청중이 그랬고, ‘영지주의’에 물들어 몸의 부활을 부인한 바울로의 청중이 그랬으며, 자신의 탐욕에만 몰두하고 형제의 가난에 무관심한 채 살아가던 루가의 청중이 그랬습니다. 성령께서 듣는 귀를 일깨워주셔서 무감각해진 마음을 되살려주시기를 소망하면서 말씀 나눔을 시작하겠습니다.

1독서는 <예레미야>입니다. ‘환난의 때’(삶이 불안정한 때)에 생명과 열매의 근원이신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권고입니다. 예레미야는 “야훼가 하는 말이다”라고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5절a). 이어서 신명기(11:26-31; 30:15-20)와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인간 앞에 놓인 두 가지 길을 예시합니다. 하나는 ‘천벌’(저주)을 받는 ‘악인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복’을 받는 ‘의인의 길’입니다.

먼저 ‘악인들의 길’을 보겠습니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예레 17:5

‘악인들’은 누구입니까? ‘환난의 때’(일상에서도)에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멀어졌다’는 표현을 통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레브’(leb)는 ‘심장’(heart)을 가리킵니다. 이 말이 구약성경에서는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뜻으로 더 많이 쓰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마음(심장)이 멀어졌다’는 은유는 무슨 뜻일까요?

자주 쓰면서도 ‘마음’처럼 정의하기 힘든 말도 없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말의 어원은 알 수 없는 세계, 알아낼 수 없는 대상, 보이지 않는 세계,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영혼’(psyche, 마음)을 ‘이성’(logos)을 사용해 알아내려고 시도한다는 자기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심리학의 정의를 참고하면 ‘마음’은 지각, 사고, 기억,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련의 ‘의식의 흐름’이며, 뇌의 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연구합니다. 잘 사용하는 말로 하면, 우리에게서 지성(知性)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가 일어나는 ‘근원’이고, 그 일어남과 움직임이 만들어낸 ‘정신상태의 총체’를 ‘마음’이라 부른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여기 이렇게 살고 있는 ‘존재 전체’가 마음입니다.

‘뇌과학자들’(신경과학자들)은 ‘마음’을 더 ‘물질화’해서 표현합니다. ‘뇌의 전기 · 화학적 활동이 일으키는 현상’이자 ‘뇌의 기계적인 기능’(brain function)을 추상화시켜 놓은 말이 ‘마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마음’은 ‘뇌’(뉴런의 네트워크)에 있고, ‘뇌’는 ‘마음’이라고 하는 소프트웨어가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하드웨어’인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뇌 역시 몸의 일부’이기에 결국 ‘마음’은 ‘몸을 추상화해서 표현한 말’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공부해 온 바에 따르면 마음은 결국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의 구조와 기능을 가리키는 총칭이고, 뇌가 신체 어느 장기보다도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의학적 사실입니다.

성경 속 고대인들은 ‘마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심리학이나 뇌과학이 발달하기 전이었으니 그 눈으로 성경을 비판할 일만은 아닙니다. 성경 속 고대인들은 지성(知性)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가 일어나는 근원인 ‘마음’을 상징하는 장기로 ‘심장’을 주목했습니다. ‘심장’에서 공급되는 ‘피’가 모든 ‘생명 활동의 근원’(중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서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심장’을 ‘신체의 중심’, ‘존재의 중심’, ‘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게서 마음(심장)이 멀어졌다”는 은유는 “그 존재가 하느님을 떠났다”, “자신을 존재케 한 은총의 하느님을 떠났다(밀어냈다)”는 말입니다. ‘존재 전체’가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길’로 가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무엇에 의지해 살아갑니까?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 즉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예레미야는 ‘환난의 때’에 하느님을 떠나 ‘사람’(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육신’(사람)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이들은 ‘천벌’을 받을 것이라 ‘책망’(쓴 소리)합니다. 이 책망은 일차적으로 예레미야가 살던 ‘풍전등화’(환난의 때) 같은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남왕국 유다는 예레미야의 외침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향한 심판의 도구로 ‘바빌론’을 사용하시는 중이라 알려주었고(예레 27:6-22), ‘바빌론의 우산’ 속에 들어가서라도(바빌론의 ‘멍에’를 메고서라도) 민족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알려주었지만(예레 27:2,8,11) 그들은 ‘이집트’를 의지했습니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상’의 상징입니다. 그 세상(이집트)을 의지하고, 언젠가 무너질 권력을 신뢰하는 일은 ‘저주’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세상 권력에 자신의 ‘궁극적 믿음’을 갖다 바치고, ‘궁극적 희망’을 걸며, ‘궁극적 사랑’의 지위를 부여하는 행태는 어리석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는 결국은 스러져갈 세상 권력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우상숭배’입니다.

예레미야가 책망한 ‘환난의 때’(풍전등화)에 “사람(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육신(사람)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일”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상과 이념’, ‘과학기술과 군사력’, ‘조약과 동맹’이 ‘삶의 안녕’을 보장해 주리라 굳게 믿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마음’(나 자신)을 내주기 쉽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타고난 ‘재능과 체력’, 쌓아올린 ‘지식과 정보’, ‘인맥과 부’(富)처럼 자신에게 있는 ‘자원들’을 과신하기 쉽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사람과 세상을 의지하는 이들이 받게 될 천벌”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6절). 그들은 ‘사막’(광야, 벌판)에 자라난 덤불(로뎀나무)처럼,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고, 소금기가 있어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 같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모지’(不毛地) 신세입니다. 이러한 사막과 황무지는 언젠가 해결 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런 ‘불모지’에서는 생산을 위한 변화가 전혀 없듯이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진” 인생도 전혀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복을 받는 의인의 길”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삶의 어떤 순간이든 하느님께만 존재의 소망을 둡니다. 생각, 감정, 기억에 창조주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지성(知性)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 즉 ‘존재의 중심’에 자신을 창조하시고 빚어 가시는 은총의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누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지를 선언하는 ‘복음서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인이 받게 될 복을 ‘시편 1편’을 가지고 그림처럼 보여줍니다(7-8절).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는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물’어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습니다. ‘볕’과 ‘가뭄’은 ‘역경’을 상징합니다.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역경이 와도 ‘생명수’ 가까이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처럼 ‘안정’되고 ‘생산적’일 것이라는 은유입니다. 극명한 그림 대조를 통해 예레미야는 “하느님만을 마음에 모신 의인의 길을 가라”고 선포했습니다. 안전과 생산을 보장하는 ‘복의 길’을 선택하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다음 어째서 사람(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육신(사람)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이들이 어리석은지를 적나라하게 들려줍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예레 17:9

예레미야는 처음에 언급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여기서는 ‘마음’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 이유는 ‘죄성’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마음, 즉 지성(知性)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는 오염되고 손상되었습니다. 다른 번역들을 참고하면 그 의미가 더 와 닿습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만물 중에서 가장 교활하고도 병들어 있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선포 말고도 ‘죄성에 물든 악한 마음’(악한 생각)이 유다 백성을 어떻게 타락시켰는지를 지적했습니다(예레 11:8; 14:14; 16:12). 기억하십시오. “사람의 마음은 거짓되고, 썩었으며, 교활하고, 병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들려주는 우리 안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인간의 지성(知性)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는 죄로 인해 심각하게 오염되고 손상되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아는 것은 어렵고 불가능합니다. 자기 마음에 속는 경우도 많고, 죄성에 물든 마음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 때도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무조건 신뢰하기 전에 한 호흡 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에 먼저 귀 기울이는 일이 현명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장담했다가 3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떠올려보십시오.

사도 바울로도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로마 7:15

바울로처럼 우리도 죄성에 물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충(相衝)되는 욕망으로 갈팡질팡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괴롭지만 안 그런 척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도 이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더욱이 나의 마음처럼 거짓되고, 썩었으며, 교활하고, 병들어 있는 다른 사람들의 죄성에 물든 마음을 의지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마음 속 깊은 ‘생각’과 ‘감정’을 ‘위장’(僞裝)하고, 관계에서 좋은 면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진짜 속마음을 내어 보이면 다른 이들이 관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나마 신뢰하는 친구, 상담자, 사목자에게 속마음을 열어 보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생각’과 ‘감정’을 ‘위장’(僞裝)하거나 ‘가면’(Persona) 뒤에 얼굴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물론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삶”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가면을 썼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가식’이나 ‘위선’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가면’(Persona)은 ‘사회적 인격’, 즉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일종의 ‘외적 인격’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가끔 부부 상담을 하다보면, “다른 사람에게는 상냥한 모습을 보이면서 식구들한테는 안 그런다”고 배우자 흉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누스’와 산다는 하소연입니다. 그럴 땐 뜨끔합니다. 저도 그런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라도 해야지 돈을 벌어서 아파트 대출금도 갚고, 자식들 학원도 보내고, 가끔은 외식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이 세상에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각 상황에 맞게 적절한 ‘가면’을 쓰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 인생발달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저도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버지로서, 교회에서는 사제로서, 동창들 사이에서는 친구로서 ‘역할’을 적절히 바꾸어 가며 사회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역할을 위해 쓴 그 ‘가면’이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 점을 놓칠 경우 ‘외적 인격’인 그 가면에 매몰되어(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의 팽창’이라고 합니다) 문제를 겪을 뿐 아니라 ‘진정한 자기’(융은 이것을 ‘개성화’라고 했습니다)를 탐색하고, 실현할 기회에서 조차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역할’로 살고 있는 ‘내 속의 수많은 나’가 아니라 ‘진짜 나’와 관계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 상징적 한 말씀이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입니다. 이 말씀은 삶의 궁극적 물음인 “나는 누구인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을 ‘위장’하기 위해, 또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가면’을 쓰기에 서로 속을 수 있어도 하느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성경에도 서로 속고 속이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평생을 하느님께 붙잡혀 살아왔으면서도 ‘위장’과 ‘외적 인격’에 속을 뻔한 대표적인 사례도 전해집니다. 하느님은 ‘사울’을 대신할 왕을 세우기 위해 ‘사무엘’로 하여금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를 찾아가게 하십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큰 아들인 ‘엘리압’을 보고 깜박 속았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사무상 16:7

예레미야도 이렇게 선포를 끝맺습니다.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예레 17:10

우리는 살아계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의 행실을 심판하실 하느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말라 3:5). 하느님은 우리 ‘영혼’(마음)을 환히 비추시고, 속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십니다(잠언 20:27). 마음의 ‘생각’과 ‘감정’(뱃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콩팥’이라는 장기이고, 고대인들은 콩팥이 감정을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까지 환히 들여다보십니다. 나만이 아는 비밀 장소에 숨으려 해도 하느님의 눈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시편 139:7). 하늘과 땅, 바다, 심지어 내 마음 속 어디를 가도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시편 139:8-9; 예레 23:24). 인간은 속을지 몰라도 하느님은 인간의 행실을 결코 묵과하시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의 이 같은 선포는 과거 역사와 우리의 현실에서 항상 진실이었습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면 지나친 불평일까요? 의인보다는 악인들이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았고,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긴 시편 기자도 이미 여러 번 이 고민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시편 37편). 그래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느님을 떠날 것입니까? 악인들처럼 살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보며 불평하고 시샘하는 일은 분명 유혹의 손길입니다. 그 손길을 단호히 뿌리치고 눈을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을 실천하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죄성에 물든 우리 심장과 뱃속은 거짓되고 교활하게 굴 때도 많아서 그 어떤 ‘장담’도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점을 압니다. 이런 우리에게는 심장과 뱃속을 정화하고 치유해 주시는 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서 전반부는 정화의 샘물이시고 치유의 샘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루가 6:17-26). 그리스도께서 죄성에 물든 이 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의탁합니다(로마 12:2-3). 마음을 몸소 빚어 주신 분,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느님께 이 몸을 의탁합니다(시편 33:15).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이 시간도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그 사랑만이 거짓되고, 썩었으며, 교활하고, 병들어 있는 지성(知性)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해 주십니다. 생명과 사랑의 영이신 성령만이 죽어있는 ‘심장’(마음)을 사랑을 실천하는 살아있는 ‘심장’(마음)으로 다시 살려내실 수 있으십니다(로마 8:2,9-11).

시편은 <1>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성찬례 구조는 큰 틀에서 말씀의 전례라는 ‘선포’와 성찬의 전례라는 ‘응답’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순서도 선포와 응답이라는 구조의 연속입니다. 시편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1독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오늘 시편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의인”(시편 1:2)이 받게 될 복을 설명하면서 이미 인용했으니 전례독서 해설은 생략하겠습니다.

2독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입니다. 우리는 연중 2주일부터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를 ‘계속독서’로 낭독 중입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은 전례독서 주제인 ‘행복하여라.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바울로는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선포가 그가 예루살렘과 안티옥 교회로부터 받아서 고린토교회에 전한 복음의 가장 중요한 진리이며, 믿음의 기초였습니다. 나무의 생명이 ‘물’에 달려있듯이 우리의 생명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뿌리내리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토교회 안에는 ‘영지주의’에 물들어 이 복음의 진리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 서신을 보냈습니다. “죽으면 끝이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다음이 있어! 우리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아!”라고 힘차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는 낮아지고 죽는 연속이었습니다(필립 2:5-8). 하느님은 그 분을 살리셨습니다(필립 2:9-11). 그대는 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나처럼 날마다 죽을 수 있습니까?(1고린 15:31) 그리스도교 신앙은 육체의 수명이 다할 때가 아니라 살아서 ‘자기’가 죽는 길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대는 살아서 죽는 이 길을 통해 부활을 ‘희망’하며 오늘도 걷고 있습니까?

인간의 위대함은 ‘보이지 않는 길’을 갈 수 있는 ‘영적 존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도 ‘보이지 않는 길’에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 본 적이 없는 길’로 들어서는 위대한 도전입니다. ‘보이지 않는 길’, ‘가 본 적이 없는 길’이기에 오염되고 손상된 지성(知性), 즉 ‘머리’(자기)에 의지해 걸어갈 수 없습니다. ‘기존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길이기에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고, ‘세상의 지식’으로 갈 수 없기에 ‘길 없는 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의지해 온 ‘지상의 빛’이 다 꺼져버리는 ‘어두운 길’로 가는 도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 믿음의 등불을 든 요셉, 희망의 찬가를 부른 마리아, 희망 속의 희망이 낳은 사랑 아기 예수

그러면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등불’이 필요합니다. 밝은 길을 갈 때는 굳이 ‘등불’이 필요치 않습니다. 보이는 길을 갈 때도 ‘등불’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길’, ‘길 없는 길’, ‘보이지 않는 길’, ‘가 본 적이 없는 길’,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등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믿음과 희망이라는 등불’ 말입니다. ‘세례’ 때 하느님께서는 ‘믿음과 희망’이라는 등불을 우리 손에 ‘선물’로 쥐어 주셨습니다(로마 5:2-5; 12:3; 에페 2:8-9). 어두운 밤을 걸어갈 때 ‘하느님의 말씀’이 등불이 되어주는 ‘믿음’이고(시편 119:105), 그 밤을 통과해 마침내 ‘하느님이 약속하신 말씀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입니다(시편 119:74; 로마 5:2).

그 ‘믿음의 등불’을 들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발자국들’을 찾아냅니다. 시련 앞에서 ‘믿음의 등불’이 희미해져 갈 때 ‘희망’은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는 힘과 용기가 솟게 합니다. 우리는 그 희망 때문에 다시 믿음의 등불을 들고 일어나 이미 나있는 ‘발자국들’에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포갭니다. 그 많은 발자국들이 앞서간 ‘사도들과 성도들의 발자취’이며, 종국에는 그 많은 발자취가 ‘그리스도의 발자국’과 포개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포개며 걷다보면 어느 새 그 길은 ‘어두운 길’, ‘길 없는 길’, ‘보이지 않는 길’, ‘가 본 적이 없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주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먼저 가신 ‘부활의 길’이고, 우리는 그 길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랑’ 속에서 ‘믿음’과 ‘희망’의 등불을 들고 그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 앞에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부활의 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진정 그리 될 것입니다.

복음이야기는 흔히 ‘평지설교’라 불리는 <루가복음>의  ‘행복과 화(禍, 불행)선언’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도 ‘산상수훈’(5-7장)이라 불리는 비슷한 단락이 전해지지만 차이가 많이 납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하나의 ‘전승 자료’에서 마태오와 루가가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편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루가의 ‘평지(평야)설교’는 세 단락으로(20-26절, 27-38절, 39-49절) 나눌 수 있습니다. 전례독서도 이 구분에 따라 복음서를 배정하고 3주 동안 나누어서 낭독하도록 배정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낭독한 전반부는 ‘평지설교’의 서두이고, 후반부는 ‘평지설교의 첫 단락’입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전반부 ‘평지설교 서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바로 앞 단락을 보면(12-16절) 예수님이 세우신 ‘열두 사도’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사도’(使徒, apostolos)는 ‘파견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뜻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내 뜻이 아니면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주님 뜻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뜻으로 살려면 무엇이 주님 뜻인지 먼저 ‘묻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들음의 삶’을 사는 이가 ‘사도’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면서, 들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이가 ‘사도’입니다. 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증언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러서 ‘제자’로 빚으셨고, 빚으신 제자를 ‘사도’로 파송하셨습니다. 우리도 ‘군중’에서 ‘제자’로 빚어지고, 제자에서 ‘사도’로 성숙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로 가는 ‘영성의 길’입니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많은 제자들과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세상의 빛’으로 ‘내려오신’ 예수님께로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통해 ‘공현절기’의 연속임을 확인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를 위해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늘 기억하는 삶입니다(필립 2:5-11). 여러 지역에서 온 그들은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기대를 갖고 온 사람들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렇지만 ‘기도의 언어’로 가져오면 그들은 1독서에서 언급한 ‘역할’로 살고 있는 내 속의 ‘수많은 나들’을 상징합니다. 심지어 ‘더러운(부정한) 영들’에 고통당하던 사람들도 왔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것을 꼭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만 이해할 것은 아닙니다. 정서 장애로 인한 병리적 현상을 겪는 마음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왜곡된) 인식(허상, 망상, 공상), 자기애, 강박, 학대, 죄책, 자존감 상실, 자기비하, 우울, 불안, 공포, 무력감, 냉소, 분노에 빠진 ‘사람들’ 말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따뜻한 심장’을 잃어버린 채 ‘머리로만’ 살고 있는 ‘오늘의 나’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고쳐주시고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루가의 이러한 증언은 과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치유자로 성령을 통해 이곳에 현존해 계십니다. 믿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님을 만집니다. 병든 내 영혼은 치유되고, 분열된 나는 통합이 일어납니다. 전인적 치유는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이의 것입니다.

이 치유의 장면을 통해 오늘 교회의 모습을 성찰합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모여드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열린 마음’으로 겸손히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은 율법규정, ‘정결법’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시고 병자들과 접촉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르침을 듣고자하는 이들과 기꺼이 하느님 나라의 정신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지 성찰합니다.

복음서 후반부는 ‘평지설교의 첫 단락’에 해당합니다. 마태오가 영적인 관점에서 ‘행복선언’을 서술하고 있다면, 루가는 사회경제적 언어로 ‘행복과 화(禍) 선언’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선언 속에서 ‘성모 마리아 송가’가 반복되고 있음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루가 1:46-55). 예수님은 행복에 대한 이전의 가치관을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이 행복의 근거로 제시하는 일반적인 기준들이 있습니다. ‘많은 돈’, ‘넓은 평수의 강남 아파트’, ‘사회적 출세와 성공’, 화목한 가족과 이웃관계라면 금상첨화입니다. 아무도 가난, 굶주림, 슬픔, 미움, 배척, 욕먹음, 누명을 행복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십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서두에 루가공동체의 청중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자신의 탐욕에만 몰두하고 형제의 가난에 무관심한 이들 말입니다. <루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깊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루가는 예수님을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신 분으로 서술합니다. 이 점은 루가 자신이 사회경제적 문제, 특히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복음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복음서 학자들은 이런 특징 때문에 루가공동체는 주로 가난한 이들로 구성된 교회이고, ‘빈부의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선언은 혹시 ‘예수님의 공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가난하고 약한 그들이 넘어질까 안타까워서 챙겨주시려 애쓰시는 예수님의 모습 말입니다. 가난, 굶주림, 슬픔, 미움, 배척, 모욕, 누명 이러한 것들 때문에 그들이 넘어질까 안쓰러워서 용기를 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 말입니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심장’으로 가난한 그들과 오늘의 우리를 관계하시는 주님의 ‘감수성’ 말입니다. “행복하다”는 말씀도 “너 얼마나 힘드니… 너 얼마나 아프니…” 이런 말씀 아닐까요? 때로는 ‘공감’해 주시는 ‘말씀 한 마디’가 돈이나 사회적 성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이들에게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그런 상태의 지속을 예수님이 결코 예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난과 굶주림, 울게 하는 일과 누명을 씌우는 일은 분명 악입니다.

‘화(禍) 선언’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이웃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데 책임 있으면서도 자기들만 ‘지금’ 행복해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십니다. 자기 잘 낫다고 건방 떨고 앉아 있는 이들에게 주님이 ‘회초리’를 들고 협박하시는 모습입니다. 협박하실 때 빨리 정신 차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주님의 협박 쯤’은 무시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협박’을 더 무서워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복음서 묵상으로 한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복음서를 묵상하면서 자꾸만 걸렸던 단어는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라 ‘예언자들’과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면 예언자이지 어떻게 ‘거짓 예언자’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난, 욕심쟁이야! 난, 내 욕심껏 살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속도 그렇고 겉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난, 예언자야!”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난, 거짓 예언자야!”라는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난, 예언자야!”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속에 ‘진짜 예언자’도 있고, ‘거짓 예언자’도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난, 예언자 안 해! 난, 예언자 아니야! 난, 욕심쟁이로 살 거야!” 이런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진짜 예언자인가? 가짜 예언자인가?’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미 자신은 ‘욕심쟁이’로 살겠다고 말하며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고민은 “난, 예언자야!”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서도 정작 ‘예언자’로 살지 않고 ‘욕심쟁이’로 사는 사람을 대할 때입니다. 남 얘기하는 것 같지만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난, 예언자야! 난, 예언자로 살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행복과 화(禍) 선언’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 묵상의 요점입니다. 여기 ‘예언자’라는 말을 ‘사제’나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도 같습니다. 우선 ‘거짓 예언자’는 ‘자기 논리’에 빠진 사람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욕심을 포장’하기 위해 열심히 자기 논리를 개발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 전통’까지 끌어다 자기 욕심을 포장하기 위한 논리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대화중에 더 이상 ‘하느님’을 발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추장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 당당하고 뻔뻔하게 ‘욕심’을 챙기기 위해 ‘자기 논리’를 펼칩니다.

우리가 대화중에 거룩하신 ‘하느님’을 언급한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상기하는 일이기에 소중합니다. 하느님은 ‘지존하신 주인’으로 위에 계시고, 인간은 ‘종’으로 낮은 자리에 있음을 고백하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나의 약점’을 인식하고 드러내는 중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대화에서 하느님을 빼버리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됩니다. 하느님을 빼버렸기에 자신을 겸손한 자리에 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대화에서 철저히 ‘거룩하신 하느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과 말과 행동에 초대할 때 인간이 상대적인 존재임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인간의 ‘절대화’입니다. 그렇게 해서 ‘히틀러’ 같은 사람을 역사에 또 낳는 법입니다.

‘거짓 예언자’도 그렇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묻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발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자기 욕심’을 마음에 두고, ‘자기 머리로만’ 해결하려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이득을 관철하기 위해 냉철한 머리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거짓 예언자’입니다. 차라리 “난, 마음이 없어! 난, 가슴이 없는 사람처럼 살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살고 있다면 오히려 정직할 텐데 “난, 따뜻한 마음이 있어! 난, 심장이 있어!” 이러면서 정작 ‘머리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옆에 있어 본 적이 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워서 자기 논리가 분명하고, 이치에 맞는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같이 있기가 싫습니다. 그 논리를 듣고 있으면 맞긴 맞는데 ‘마음’(심장)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따뜻한 ‘마음’(가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꼭 있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나면 넋두리만 하는 것 같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자꾸만 마음(심장)이 끌립니다. 그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심장’(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고, ‘마음을 없애버리고’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 관계 속에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다른 말로 마음을 두드리는 자와 마음을 없애버린 자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예언자’라는 단어에 주목해서 ‘행복과 화(禍) 선언’을 한 번 더 보십시오.

‘불행 선언’부터 보겠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마음’(심장)을 없애버린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외에도 의지할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에 희망을 걸고 사는 이들입니다. 먼저 부요한 사람들은 누굽니까? 그들은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저 없이 자기들 하고 싶은 데로 살지 ‘마음을 열고’ 살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마음을 없애버렸기에 배고파하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보이는 순간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웃고 지내는 사람들은 누굽니까? 그들은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우는 거 봤습니까? 항상 웃으며 앉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누굽니까? 그들은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칭찬 한 번 듣기도 그렇게 힘든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대접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앞에 서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앞에서 ‘쓴 소리’를, ‘불편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다들 그 앞에서는 “잘 하십니다”라고 칭찬 일색입니다. 자기 앞에 와서 ‘아첨’하고 있는 것뿐인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칭송’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 높은 사람이 아쉬운 것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송이 어떻게 칭찬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난, 예언자야!” 이렇게 말하며 살고 있는데,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내 앞에 와서 ‘쓴 소리’를 하는 이가 ‘진짜 예언자’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을 제발 알아들어야 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야말로 주님이 보내신 예언자입니다. 그렇지 않은 소리를 하는 이들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내 속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진실들’도 다 예언자입니다. 내 ‘불편한 진실’이 예언자입니다. 또 예언자라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려 할 것이 아니라 ‘쓴 소리’(불편한 진실)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행복 선언’을 보십시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있다는 것은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고 의지할 분이 오직 하느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들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배척을 받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사람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지칭하여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미움을 사고 누명을 쓴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운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기도의 언어로 가져오면 ‘사람의 아들’은 우리가 주님께 물어서 한 말씀 듣게 되는 ‘내면의 소리’를 상징합니다. 반면에 ‘내면의 소리’를 미워하고,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군중들’을 상징합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인 소문에 민감하고, 그 소리에 휘둘리며, 그 소리 때문에 죽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내면의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내면의 소리가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1독서에서 언급한 ‘가면’과 연결시켜서 말씀드리면 ‘역할’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요? 이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학생은 ‘머리로’ 따르지만, 제자란 ‘마음(심장)으로’ 따라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라고 하면서도 ‘마음으로’ 배우고 따르기보다 ‘머리로만’ 배워서 머리만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배우고 따르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마음’(가슴)이 살아있지 않는 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다”는 말씀은 ‘공허’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감동과 놀라움 뿐 아니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라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듣기에 참 좋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서 시작된 말들입니까? ‘마음(심장)이 살아있을 때 나오는 언어들’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가슴)의 언어들’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살아온 인생길을 돌아보십시오. 우리 마음은 주님께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느냐에 따라 생명과 행복은 달려 있습니다. 이만하면 ‘행복한 인생’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화’(禍)가 있다고,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지만 우리가 행복의 조건으로 붙잡으려는 욕망의 산물들은 오히려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가 보아야할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내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역행하여 자기들만의 왕국을 만들겠다고 고집부리는 권세자들에게 ‘저항’하는 일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 왕국을 허물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그들을 향해 초대하는 일에 행복이 있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심장으로 공감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공감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내밀며,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희망을 꿋꿋이 전하는 일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 일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행복이고, 하늘에서 상이 큰 ‘예언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깊이 뿌리내린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런 행복이 우리의 차지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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