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 주의 세례 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주의 세례 축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너,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아, ‘의’(義)를 위하여 살아가라”입니다. 연중시기 전례색은 ‘녹색’이지만 ‘주의 세례’는 연중시기 주일보다 우선하는 ‘주요축일’이기에 ‘백색’을 사용합니다. 공현일 후 첫 번째 오는 주일에 기념하는 ‘주의 세례 축일’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심(公顯, Epiphany)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세례 언약’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새롭게 출발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으니 하늘의 소리를 알아듣는 영의 귀가 열려 날마다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우리로 성장해 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3:1-7
  • 시편 – 29
  • 2독서 – 사도 8:14-17
  • 복음서 – 루가 3:15-17,21-22

오늘은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주의 세례 축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너,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아, ‘의’(義)를 위하여 살아가라입니다. 공현일 후 첫 번째 오는 주일에 기념하는 ‘주의 세례 축일’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심(公顯, Epiphany)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세례 언약’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새롭게 출발하는 날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1-39장, 40-55장, 56-66장).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1독서는 <제 2이사야>에 속합니다. 시대 배경은 유다 백성의 바빌론 귀양살이가 끝나갈 무렵입니다. 그들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바벨론에서 두 세대 이상을 포로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에 지쳐 더 이상 구원도, 하느님도 희망할 여력조차 없습니다. 총체적 절망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그들을 향해 ‘하느님의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이사 40:1). 절망 속에 있는 그들을 격려하여 ‘죄의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도록 선포합니다(이사 40:2). 지금까지의 귀양살이면 충분히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고, 이제는 위로와 구원을 받을 때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이사 42:13-14,16). 심판과 분노, 저주와 절망의 관계는 청산되고, 해방과 구원, 자유와 회복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한마디로 ‘제 2출애굽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이 해방과 구원은 그들이 회개했다거나 정의롭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와 언약의 신실함이 그들의 운명을 반전(反轉)시킬 것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에게로 ‘얼굴’을 향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될 것입니다. 제 2이사야는 이 ‘해방과 구원의 일’을 성취할 ‘야훼의 종’, 즉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제 2이사야에는 4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사 42:1-9; 49:1-6; 50:4-11; 52:13-53:12). 특히 세상을 위하여 ‘대신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사 50:4-11; 52:13-53:12)의 노래가 유명합니다.

이 4개의 노래 중에서 ‘가’해는 ‘야훼의 종의 첫 번째 노래’(이사 42:1-9)가 1독서로 배정됩니다. 해방과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기뻐하고 선택하여 세워주실 메시아의 성품, 그가 성취하실 사역,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듯이 해방과 구원도 반드시 현실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사 42:1)이란 구절과 <복음서>의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가 메아리처럼 완벽히 상응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하느님이 직접 ‘드러내시는’(公顯, Epiphany) 말씀입니다. 공현 절기에 어울립니다.

‘다’해는 해방과 구원이라는 주제는 ‘가’해와 같지만 하느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와 근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는 오늘 본문이 1독서로 배정됩니다. 하느님은 야곱(이스라엘)을 향해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 43:4a)라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과 <복음서>의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가 메아리처럼 완벽히 상응합니다. 역시 공현 절기에 어울립니다. 놀라운 점은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이 선택하신 백성과 예수님 둘 다에게 ‘동등하게’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가’해나 ‘나’해 전례독서와의 차이점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신 백성을 예수님처럼 그토록 ‘지극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것일까요? 그들이 그런 지극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점을 밝히고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를 연결하는 것이 ‘다’해 전례독서의 핵심입니다.

‘야훼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 이어지는 후반부(이사 42:18-25)와 43장 전반부(이사 43:1-7)의 분위기는 아주 다릅니다. 이사야 42장 후반부(이사 42:18-25)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귀양살이하는 그들에게 메시아를 세워주실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청각장애인처럼 그 희망의 약속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시각장애인처럼 그 희망 성취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자신들이 겪은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의 귀양살이는 바빌론 제국이 강대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억압과 착취와 폭력의 죄악을 돌이키고 정의의 길을 걷도록 줄곧 말씀하셨습니다. 외교력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의지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기보다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바빌론 제국을 그들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어 심판하셨습니다(이사 42:24-25). 그들은 비참한 신세가 되어 동서남북으로 흩어졌습니다(이사 43:6). 이 모든 일은 그들이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하지만 불타는 진노와 전쟁의 폭력을 겪었으면서도, 지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이사 42:18-25) 읽는 우리는 ‘하느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심판을 통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노략질 당하게 하시고, 약탈자에게 내 주신 분은 하느님입니다(이사 42:24). 거칠게 비유로 말씀드리면 ‘흠씬 두들겨 패서라도’ 그들을 돌아오게 만드시려는 하느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좀 세련되게 말씀드리면 ‘고난을 겪게’ 해서라도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 백성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돌아올 줄 모릅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지’합니다. 그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작전과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43장은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향해 ‘탄식’하시고 ‘책망’하시던 하느님의 마음은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자신의 작전과 계획이 실패했음을 인정하시기 때문일까요? 유다 백성에게 잔혹하게 보이던 하느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한 애절함, 간절함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완전히 관계의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정확히 말씀 드리면 하느님이 그들에게 간절히 빌고 비시는 장면입니다. 그들에게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제발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제발 해방과 구원의 약속을 믿어 달라”고 애걸복걸 매달리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에나!

하느님께서 그토록 애가 타도록 그들에게 끝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무지(無知) 속에서 귀양살이하는 그들이 해방과 구원을 확신해도 좋은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특별한 계약’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특별한 계약’ 관계란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어 한 나라로 만드셨습니다(출애 19:1-8). 그 ‘특별한 계약’은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 이사 43:1b,3a,7 –

 

그들이 하느님과 ‘특별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언급하시는 말씀들에서 하느님의 그 불타는 심장(심정)이 느껴지십니까? 먼저 하느님은 그들을 향한 ‘특별한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십니다. 하느님은 ‘정당한 대가(代價)를 지불’하고 그들을 사셨습니다. 구속(救贖), 즉 ‘속량’(贖良)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속량(구속)한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시고 친밀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과 이런 ‘특별한 사랑’, ‘특별한 계약’을 맺은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에 따른 선택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창조주와 구원자로서 본래부터 그들에게 ‘특별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점이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그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빌론의 막강한 힘 앞에서 그들은 비천한 포로 신세일 뿐입니다. 하지만 창조주요와 구원자이신 하느님은 그들의 눈을 귀양살이의 현실로부터 ‘귀향’이라는 ‘희망의 약속’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벌써부터 그들의 눈에다가 귀향하는 장면을 그려주십니다.

물론 그들은 귀향길에 ‘물과 불’의 위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물’은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을 가로막았던 홍해를 상기시킵니다(출애 14-15장). ‘불’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활활 타는 화덕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상기시킵니다(다니 3:19-25).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기에 귀향길에 있는 어떤 장애물과 고생도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로질러 탈출한 선조들처럼 물길 속을 통과할 것이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은 채 불길 속을 통과하여 고국에 다다를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느님은 아무도 자신의 ‘특별한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증명하실 것입니다(이사 43:3a). 이 약속의 말씀 안에서 그들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께 특별한 사랑과 가치를 갖는 존재임을 밝히는 표현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큰 나라 ‘이집트’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몸값’(속량물)으로 내어주고서라도 되찾아 오실 만큼 존귀합니다(이사 43:3b). 하느님은 그들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해안지방) 내어주실 것이고, 그들의 목숨 대신에 다른 민족들을(부족들) 내주실 만큼 ‘특별대우’를 하실 것입니다(이사 43:4).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어 보살펴 주시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져버린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실 것입니다(이사 43:5-6).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민족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하신 민족이며, 하느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이사 43:7). 한마디로 그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이사 43:4a).

그들을 향한 이 지극한 사랑 고백이 <복음서>의 예수님을 향해 선포됩니다(루가 3:22b). <복음서>의 배경 독서로 배정된 이유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이 절절한 ‘사랑의 심정’을 담은 전례독서를 우리가 오늘 묵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우 여러분,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이 같은 애절함과 특별함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름을 불러주신 하느님은 창조주와 구원자이시기에 우리에 대한 ‘특별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대가(代價)를 지불하고,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속(救贖)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도 이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도록 성령으로 우리에게 인(印)을 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이루어지기까지(갈라 4:19) 계속해서 우리를 빚으시고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통해 일어난 하느님과 우리의 이런 ‘특별한 관계’를 잊거나 거부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임을 아는 일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지극한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양육하고 계심을 안다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시작에 ‘세례’가 자리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생에서 통과해야 할 ‘물길’(강물)과 ‘불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말로 ‘시련’이나 ‘고난’이 빗겨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들 몫의 시련과 고난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 몫의 시련과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 물길과 불길 속을 걷기는 힘듭니다. 물론 우리는 위에서 ‘물길’은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을 가로막았던 홍해를(출애 14-15장), ‘불길’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활활 타는 화덕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다니 3:19-25) 상기시킨다고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이 물길과 불길은 거기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외부의 물길’도 위협이지만 ‘내면의 물길’도 위협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외부의 사건 사고’도 위협이지만 스스로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만들어내는 ‘생각이라는 물길’도 삶에 위협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가장 흔한 ‘내면의 물길’은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두려움’(무서움, 걱정)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 따르면(마태 14:22-33)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두려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어갑니다(마태 14:30). ‘거센 바람’이라는 외부의 현상 때문에 그가 물에 빠져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섭다’라고 의미주기한 생각의 ‘허상’을 바라본 겁니다. 없는 것을 스스로가 ‘있게 만들어’ 느낀 두려움입니다. 스스로가 빚어낸 두려움입니다. 사실 두려움은 우리 스스로의 의미주기와 해석주기가 만들어낸 정서적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그 두려움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거센 바람에다가 자기 생각의 허상을 덧붙여 바라보면서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십니다. “그런 것을 보지 말고 나를 봐라”, “자기 생각의 허상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향하는 믿음을 선택해라” 이런 뜻입니다.

‘불길’은 우리가 ‘불가항력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인생에는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상처, 아픔, 고통도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물길’도 종류에 따라서는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길과는 좀 다릅니다. 불길에 닿으면 우리는 반드시 뎁니다. 아플뿐 아니라 몸과 마음에 반드시 ‘외상’(trauma)을 남깁니다. 외부의 물길은 대부분 그렇게까지는 아닙니다. 강물에 닿았다고 해서 데거나 상처 자국이 남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길에 닿으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상처 자국으로 남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에서 통과해야 할 ‘물길’(강물)과 ‘불길’이 있음을 아심에도 하느님은 “네 앞에 물길이 없도록 해 주겠다. 네 앞에 강물이 없도록 해 주겠다. 네 앞에 불길이 없도록 해 주겠다”라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초대는 “꽃길만을 걷게 해 주마!”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가 그런 시련과 고난의 ‘한 가운데를 걷고 있을 때’ 홀로 있게 하시지 않고 “함께 해 주시겠다”(보살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이사 43:2,5). “두려워 말라”, “보살펴 주시리라”는 약속이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이 없도록 하시겠다는 뜻이 아님을 잘 기억하십시오. 특히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을 걷더라도 그것에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는 약속에 눈길이 머뭅니다.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 그 광경을 분노 속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고난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로마 8:39)는 고난의 신비는 여전히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하느님이 우리를 그토록 존귀하게 대해 주시는 겁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세례 성사를 통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느님의 귀염둥이, 하느님의 사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까요? 우리는 눈썹하나만 들어가도, 작은 먼지 하나만 들어가도 따갑고 아픕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눈은 우리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답니다. 도대체 어떤 눈이기에 그럴까요? 그 눈은 하느님이 가지신 큰 시각, 우주적 관점에 대한 은유입니다. 하느님의 넓으신 관점은 우리의 좁디좁은 관점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은유입니다. 그렇게 큰 눈을 가지신 하느님께는 인간의 죄, 허물, 약점, 이런 것들마저도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있어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인정하기가, 존중하기가, 수용하기가, 사랑하기가 너무나 힘들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 허물, 약점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어느 순간 우리의 죄, 허물, 약점을 더 큰 은총의 통로로 만들어내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능력에 대한 은유입니다. 우리 존재를 “사랑으로 관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땅 끝에 가서’ 처박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자리에 있지 않고 딴 데 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되찾고 빛으로 데려오셨는데도 우리는 그 자리를 벗어나 어둠 속에 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열심히 찾으십니다.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버린 우리 자신을 불러모아주십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수많은 나를 불러내신다는 말씀입니다. 통합된 자아를 말합니다. 오늘 하느님은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가 있느냐? 너는 어디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고 있느냐?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느님은 자신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행복은 자신의 꿈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의 창조 목적을 위해 살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시편 29편>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하느님을 지존하신 분으로 찬미하게 모이라고 초대합니다(1-2절). 특히 자연 현상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미합니다(3-8절). 자연은 숭배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하느님은 그 자연의 힘을 완전히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찬미입니다. 시인은 무려 일곱 번이나 ‘천둥소리’를 언급하며 그것이 하느님이 ‘발현’하시는 ‘목소리’라고 찬미합니다. 그 때 나타나는 자연현상이 하느님의 권능의 표현이라고 찬미합니다.

시인처럼 우리 역시 자연현상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눈과 귀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로마 1:20). 자연이 하느님을 계시하는 또 하나의 성서임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성전 안에 모인 하느님의 백성들은 천둥소리로 나타나는 자연현상에 두려워 떨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미합니다(9절). 우리도 천둥소리 치는 그 요란한 날에 나만이 하느님께 바쳐 올릴 수 있는 한 편의 시(詩), 한 곡조(曲調)가 있습니까?

시인은 하느님께서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라는 찬미로 끝을 맺습니다(10-11절).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평화를 주신다는 찬미에서 1독서 <이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시인이 언급한 자연계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와 <복음서>가 전하는 하늘이 열리며 내려오신 비둘기 형상의 성령, 그 부드럽고 사랑스런 음성이 절묘한 대비를 이루며 감동을 더합니다.

2독서는 <사도행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자 신도들은 유다와 사마리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사도 8:1-3).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인 필립보는 사마리아에서 전도 활동의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소식을 듣고 사마리아로 파송됩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그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합니다. 루가는 사도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러자 그들도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례자 요한의 선포대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열왕하 17:1-6; 24~41).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시작입니다. 남유다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을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면서 냉대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며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런 배제된 아픔을 간직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중재를 통해 이제 그들은 공식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환영되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뿐 아니라 사마리아 교회도 성령에 의해 탄생한 전체 교회에 소속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구절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 삶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복음서>는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3주일에 오늘 <복음서>의 전반부를 다룬 바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무려 400여년 만에 ‘광야’에 나타난 예언자였습니다(루가 3:2).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삶”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이러한 행위는 대단히 진보적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만이 ‘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로도 ‘정화’가 일어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그를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대사제 집단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질시 따위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물었고,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그들에게 맞춤식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혹시 그가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위대하게 보이는 대신 모든 것을 ‘오실 메시아’께 돌렸습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아의 사역을 두 가지입니다. 우선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루가 3:16a). 자신이 베푸는 물세례는 불완전하다는 선포입니다. 지금은 자신이 베푸는 물세례를 받지만 반드시 ‘성령과 불’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2독서 사도행전은 이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메시아의 사역이 ‘심판의 완성’이라고 선포합니다(루가 3:17).

이렇게 선포하면서 요한은 자신이 <이사야>의 예언대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손가락임을 분명히 했습니다(루가 3:4b). 더욱이 자신은 메시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을 표했습니다(루가 3:16b). 한마디로 자신의 메시아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발 끈을 풀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것이라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신발끈을 푸는 일은 비천한 ‘노예’나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선포를 듣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분에 맞게 주님의 오실 길을 진실한 태도로 겸손히 준비하며 여러 가지로 권하면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내신 하느님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복음서> 후반부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을 때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일인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세례 받은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그에게 물었고, 그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친절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 요한 뿐 아니라 누구도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분명 다른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친절한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가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는 죄인들의 세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서> 기자는 이 점을 명백히 하려고 세례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요한이 ‘사양했다’고 보도합니다(마태 3:14). 한마디로 예수님께는 ‘정화’되어야 할 죄가 전혀 없기에 세례가 필요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마태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마태 3:15)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요청했다고 보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은 다른 말로 ‘모든 의’(義)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최초의 말씀이기에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든 일”, 즉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풀이하면 ‘인류의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죄인인 우리와 완전히 동일시하시며 세례 받기를 허락하셨습니다. 더욱이 <요한복음서> 기자는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리기 위한 하느님의 방법이었다고 보도합니다(요한 1:31-34). 다시 말해 ‘성령과 불’로 진정한 ‘정화’를 이루실 분을 나타내려는 거룩한 수단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공적으로 드러나시는’(公顯, Epiphany) 장면입니다. 루가는 공관복음서와 달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아주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그만큼 루가가 ‘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어난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비둘기’ 같은 ‘물질적인 형체’로 예수님께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 물질적인 성령의 형상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표식이었습니다(요한 1:32-34).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음성은 ‘메시아’를 언급하는 <시편 2:7>과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야훼의 종의 첫 번째 노래’(이사 42:1)의 메아리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인의 세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들의 세례였습니다. 죄인인 우리와 처지를 같이하시어 ‘하느님의 의’를 이루시려는 세례였습니다. 그랬기에 하느님은 우리처럼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감동을 표현하셨습니다.

독특하게도 루가는 이 두 가지 사건이 예수님께만 보이고 들린 음성이 아니라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관찰되고, 들린 음성이었다고 묘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례자 요한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서술했습니다. 더욱이 기도 때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삼위일체를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를 전하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동일하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하시며, 하늘에서 음성이 드렸다”고 보도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인준과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서술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의 세례 축일’은 예수님이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날이 아니라 그 기원과 본질에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증거 된 ‘공현일’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사역의 목적 역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기 위한 구원의 일이 될 것임을 기뻐하는 ‘공현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세례’에 담긴 의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의 세례’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모든 교훈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은 축복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세례’에 담긴 의미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전례독서는 바로 이 주제들을 위한 배정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자신에게 대답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마음에서 ‘하느님의 아들(딸)이요’라는 음성이 들려집니까? 지금 나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은 나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내가 빚어져 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긴 했지만 장성한 사람으로 빚어지진 않았습니다. 태어나는 것, 즉 창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빚어짐도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빚어감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앙도 수행을 포함합니다. 루가가 강조하듯이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주님께서는 기도 속에서 우리의 진실을 보게 하십니다. 지금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나의 진실을 보는 순간이 ‘성령’을 받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항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바깥으로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이나 자신에게 속기 쉽습니다. 많은 경우 그렇게 밖으로 보여 지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령’은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마음에서 확실히 느껴지게 하십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나, 남이 볼 수 없는 나의 진실을 보게 하십니다. 물론 기도 속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런 자신의 진실을 보는 일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동시에 괴롭습니다. 거짓된 자신을 직면하는 일은 비참합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그 기도의 길을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도 시간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나로 성령께서 빚어 가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인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사람은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답게 날마다 하느님의 ‘의’(義)를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기도 속에서 성령의 숨결을 가득히 받아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웃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거룩한 봉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결심을 하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음성을 전합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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