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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6. 공현대축일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공현 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오라, 빛의 아들 , 빛의 전사들이여입니다. 공현일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새 빛을 이 세상에 비추시고, 세상 만민을 어둠에서 주님 ‘영광의 빛’으로 인도하심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성탄절기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공현일은 ‘신성의 드러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를 한 가족으로 불러주신 그 큰 사랑이 온 세상에 드러났음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우리 역시 ‘거룩한 신성’(영광스러운 형상)에 참여하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되새기는 대축일입니다. 이 은총을 받은 우리가 세상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가져오는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동방박사를 별빛으로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참 빛으로 인도하시어 온 인류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0:1-8
  • 시편 – 72;1-7,10-14
  • 2독서 – 에페 3:1-12
  • 복음서 – 마태 2:1-12

우리는 ‘성탄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구세주의 ‘성육신’을 묵상하며 기쁨으로 이 절기를 지키라고 안내합니다. ‘성탄일’은 우리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로고스 찬가’처럼(요한 1:1-18), 예수님을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참 빛,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펼치신 영원한 말씀이 성령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하늘과 땅의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기념하는 성탄절기입니다. 동정 마리아에게 나시어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되심’을 경축하는 성탄절기입니다.

‘전례독서’도 ‘성육신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안내합니다. 구세주의 오묘하신 성탄, 그 기쁜 소식을 첫 번째로 전해 받은 목자들의 경배, 우리와 같은 성장과정을 거치셨음을 전하는 <루가복음>, ‘로고스 찬가’를 전하는 <요한복음>이 복음서로 배정되었습니다. 1독서는 이와 상응하여 메시아 탄생과 주님 백성에게 도래할 구원의 날을 예언하는 <이사야>, 성가정의 예형인 <사무엘상>에서 배정되었습니다. <시편>은 메시아 예언시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시가 배정되었습니다. 2독서는 성육신의 의미를 설명하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배정되었습니다. 전례독서를 따라 걸으며 우리는 ‘성육신의 신비’를 묵상하고, 우리를 ‘새로운 구원 생활’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기뻐했습니다.

전례력으로 오늘은 성탄절기 안에 있는 ‘공현일’입니다. ‘공현’(公顯, Epiphany)은 그리스어 ‘에피파네이아’(ἐπιϕάνεια)를 번역한 말입니다. ‘에피파네이아’(ἐπιϕάνεια)는 ‘접촉’(on)과 뒷말을 ‘강조’(fitting)하는 전치사 ‘에피’(ἐπι)와 ‘밝게 하다’(lighten), ‘빛나다’(shine), ‘보여주다’(show), ‘나타나다’(appear)란 뜻의 동사 ‘파이네인’(φαίνειν)의 합성어입니다. 고대에는 ‘새벽이 옴’(동이 틈), 전쟁 중 ‘적의 ‘출현’, 도시를 방문하여 위세를 과시하는 ‘왕의 출현’, 특히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신들의 영광스런 출현’에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빛’이 있어야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빛과 관련되며, “빛 속에서 확실히 눈에 보이게 나타남”(conspicuous appearing, appearance)을 뜻합니다. 교부들은 이 말을 가져다가 ‘성육신’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지켜 온 성탄절기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공현일’(공현절기)은 성탄절기 안에 있지만,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빛’, 즉 공공연하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을 맞추어 기념합니다.

교회사에는 ‘신성의 드러남’인 공현일 ‘시점’을 두고 결을 달리하는 두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성공회, 로마카톨릭, 기타 개신교회들처럼 ‘서방교회’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은 ‘동방박사의 베들레헴 방문 일’을 그 시점으로 삼아 기념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모든’ 민족을 상징하는데, 그들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심으로 아기 예수의 ‘신성’이 밝히 드러났다는 뜻에서입니다. 이처럼 동방박사의 방문으로 왕의 탄생, 빛의 강림이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빛의 축제일입니다. 반면에 정교회로 대표되는 ‘동방교회’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예수의 ‘신성’이 세상에 공공연히 드러났다고 여기기에 ‘주의 세례일’을 ‘공현의 시점’으로 기념합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공현절기를 출발하든지 ‘가나의 혼인잔치’를 ‘신성의 드러남’에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특히 그 빛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기념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

게다가 두 전통은 성탄일과 공현일 날짜에 있어서도 차이가 납니다(관련 글은 여기를 보십시오). ‘서방교회’는 12월 25일을 성탄일로 기념하기에 공현일은 1월 6일입니다. 반면에 ‘동방교회’(특히 러시아 정교회)는 1월 7일을 성탄일로 지키기에 공현일은 1월 19일입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좌(座) 아래에 있는 동방교회들 중에는 서방교회처럼 ‘그레고리력’을 따라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또 ‘서방교회’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라 하더라도 ‘공현절기’를 지키는 기간이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로마카톨릭은 공현일을 성탄절기의 마감으로 보기에 그 주간 토요일까지만 지키고, 공현일 후에 오는 첫 주일을 ‘연중시기’의 시작인 ‘주의 세례 주일’로 지킵니다. 반면에 세계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3년 주기 ‘개정 공동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 전통에 참여하고 있는 개신교회들은 공현일인 오늘부터 사순절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일까지 무려 8주간을 ‘공현절기’로 지킵니다. 이 전통에서도 ‘주의 세례 주일’을 기념하지만 ‘공현절기’라는 흐름 속에서 묵상하고, 재의 수요일 직전 주일을 공현절기를 마감하는 ‘주의 변모 주일’로 지킵니다.

성공회는 공현절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요? 현행 <성공회 기도서>에는 ‘공현절기’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의 세례 주일’까지를 성탄절기에 포함시키고, 그 이후 주간부터(월요일) ‘연중시기’의 시작으로 삼습니다(기도서 25페이지). ‘주의 세례 주일’을 ‘연중 1주일’로 명칭 한 로마카톨릭과 결을 다소 달리하는 부분이 발견됩니다. 사실 ‘연중시기’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기(節氣)가 아닌 때’라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 ‘작은 부활절’이기도 한 매주일의 기쁨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더욱이 성공회도 함께 사용하는 ‘개정 공동전례독서’(RCL) 복음서 본문들은 ‘빛(신성)의 드러남’이라는 ‘공현일의 주제’가 사순대재 직전 주일인 ‘주의 변모 주일’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간혹 ‘연중 2주일’까지는 ‘공현 주제’가 분명하지만 그 이후부터 ‘주의 변모 주일’ 전까지는 특별한 의도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공현일’ 이후의 주일을 밋밋한 ‘연중(年中)주일’로 부르기보다 1965년 <공도문>을 따라 주제가 보다 선명한 ‘공현(公顯) 후(後) 주일’로 회복하면 좋겠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내리신 진리의 큰 빛이 만방에 힘차게 비추어서 온 세상이 주님을 믿게 된다.”는 주제가 명확히 드러나는 주일들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회복하면 ‘공현일’이 단 하루의 대축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성탄팔일부’처럼 ‘공현팔일부’로 되살아납니다. 결국 사순대재 전일까지 지속되는 ‘공현절기’가 되는 셈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면, 연중시기로 규정한 성령강림주일 이후 주간부터 대림절기 전 주간까지도 1965년 <공도문>처럼 ‘성삼위일체 후 주일’(과거에는 성삼후 주일로 불렀습니다)로 부르는 전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이기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깊이 음미해 보시면, ‘연중시기’ 전례독서(복음서와 구약)는 모두 ‘신성의 드러남’(예수님이 세상의 구세주, 참 빛으로 드러나심)이라는 ‘공현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다해 연중시기 후반부인 7, 8주일로 가면 다해 <복음서>가 ‘공현 주제’와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중 6주일에 이어지는 ‘평지설교’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지 그 속에서도 세상에 내리신 참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빛납니다. 다만 2독서(서신)는 복음서와 무관하게 그 해에 해당되는 책의 처음부터(복음서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도록 배정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준계속 병행’입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설교를 준비할 때 무리하게 서신을 ‘공현’ 주제에 결부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준계속 병행’을 제외하면 전례독서는 모두 ‘공현’에 어울립니다.

올해가 교회력으로 ‘다’해이고, ‘다’해는 <루가복음>이 주로 복음서로 낭독되기에 개괄적으로 공현절기로 볼 수 있는 이유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현행 <성공회 기도서>를 존중하여 ‘공현일’ 다음주일부터를 ‘연중시기’라 부르기는 하지만 ‘공현 후 주일’로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연중 2주일’(공현후 2주일)은 가, 나, 다해 모두 ‘요한복음’이 배정됩니다. 그 주제도 공통으로 ‘공현’입니다. 특히 ‘다’해는 ‘가나의 혼인잔치’인데,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공현’에 잘 어울리는 독서입니다.

‘연중 3주일’(공현 후 3주일, 루가 4:14-21)부터는 순차적으로 앞에서부터 <루가복음>을 낭독하도록 배정됩니다. 본문은 ‘갈릴래아 전도의 시작’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빛이신’ 예수님의 소문이 두루 퍼져 나가며 칭송을 받으십니다. 역시 ‘공현’에 잘 어울립니다. 더욱이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신 후에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하십니다.

‘연중 4주일’(공현 후 4주일, 루가 4:21-30)은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언자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공현’이라는 주제를 찾을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예로 드신 엘리야와 엘리사가 기적을 베푼 이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인도하는 영광의 빛을 거절한다면 그 빛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간다(이방인들 사이에서 빛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역시 ‘공현’에 잘 어울립니다.

‘연중 5주일’(공현 후 5주일, 루가 5:1-11)은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특히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영광의 빛이신 주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은 두려움 뿐 아니라 자신의 죄성과 무가치함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주님은 베드로를 ‘빛의 전사’로 부르십니다. 여기서 비로소 ‘공현절기’를 기념하는 참 의미가 드러납니다. 공현절기는 빛이신 예수님의 신성, 즉 하느님이심이 드러나심을 증언하는 절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공현절기는 부르심 받은 제자들 역시 ‘거룩한 신성’(영광스러운 형상)에 참여하도록 초대되었고, 그들의 후예인 우리 역시 ‘거룩한 신성’에 참여하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연중 6주일’(공현 후 6주일, 루가 6:17-26)은 어둠 속을 헤매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 곁에 찾아오신 ‘빛이신 주님께로 몰려드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빛이신 주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관심과 애정을 표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이들이 간직해야 할 가르침, 즉 평지설교를 들려주십니다.

‘연중 7주일’(공현 후 7주일, 루가 6:27-38)과 ‘연중 8주일’(공현 후 8주일, 루가 6:39-49)은 평지설교의 계속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이들은 세상 속에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이 어둠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빛의 전사’임을 증명합니다. 빛이신 주님의 초대에 신앙으로 응답하고 눈을 뜬 사람은 다른 이들도 ‘빛의 축제’로 초대합니다. 자신이 빛의 전사인지는 말의 고백이 아니라 그 행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 행실을 보면 그가 반석 위에 지은 집인지 아니면 기초도 없이 지은 집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추신 아기 예수의 빛과 영광은 두루 퍼져나갑니다. 그러나 그 빛은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의 방문 때처럼 사람들이 다가올 때까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어두운 곳으로 ‘열정적으로’ 찾아 가시고 영광의 빛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결정적으로 ‘연중 8주일’(공현 후 8주일)을 ‘주의 변모 주일’로 지킬 경우(루가 9:28-36) ‘빛의 드러남’, 즉 ‘신성의 드러남’이라는 ‘공현의 주제’는 절정에 이릅니다.

아무튼 ‘공현절기’는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그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와 우리 곁에 있는 교우들 속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현재, 즉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늘 보도록 초대하는 절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만민을 ‘거룩한 신성’에 참여하도록 ‘말씀과 성사’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공현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일과 비교하여 ‘공현일’이 전례에서 갖는 의미를 설명하려다 보니 도입부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공현일이 전례독서와 연결될 때는 어떤 주제로 묵상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이사야》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제 2이사야(40장-55장), 제 3이사야(56장-66장)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시간 관계상 신학적인 면 중의 하나만 간략히 살펴보면, 제 1이사야는 ‘예루살렘(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고발’과 ‘파국적 심판 선고’가 지배적입니다. 제 2이사야는 ‘심판’이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으로 전환됩니다. 다시 말해 제 2의 출애굽, 이것이 제 2이사야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재건될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와 흥분’, ‘희망과 위로’, ‘낙관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제 3이사야는 실망과 좌절,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의 분위기가 강합니다. 본문은 제 3이사야에 해당합니다.

연극을 보러 가면, 어둠 속에서 무대의 한 부분이나 특정 배우만을 밝게 비추는 조명이 있습니다. ‘스포트라이트’(spotlight)라고 합니다. 또 세간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는 사람이나 단체를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씁니다. 이 말의 원조 격인 장면이 1독서에 펼쳐집니다. 이사야는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실망과 좌절,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미래에 도래할 ‘예루살렘의 영광’을 찬란한 빛에 비유하여 노래합니다. 그 영광스런 변화는 하느님이 몸소 자기 백성에게 오실 때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은 꼭 여우주연상을 받아 빛나는 배우 같습니다. 히브리어 원어 명사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며 국가나 도시의 이름은 모두 여성형입니다. 본문에도 ‘예루살렘’이 여인으로, 특히 어머니로 인격화 됩니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있고,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을 때 ‘하느님의 빛’이 갑자기 ‘예루살렘’ 위에 ‘촤악’하고 쏟아져 내려옵니다. 일종의 ‘발현’(공현)입니다. 무질서와 혼돈,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는 창세기가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포로귀환 후 유다 백성들의 상태도 무거운 고통과 곤고함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위에 떠오릅니다. 하느님은 ‘예루살렘’에게 잠에서 깨어나 그 빛에 반응하라고 명령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일반적으로 밤(어둠)이 오면 잠자리에 눕고, 낮(빛)이 오면 일어나 활동합니다. 낮이 왔는데도 반응하지 않으면 몸이 아픈 겁니다. 빛이 왔는데도 빛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상태입니다. 예루살렘이 그 빛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일어나 빛을 발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반사하자 그 빛을 향하여 ‘어둠’(고통과 곤고함) 속에 살던 민족들과 제왕들이 모여옵니다. 그들은 낙타를 타고 오며 금(황금)과 향료(유향)를 싣고 찾아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몰려와 함께 하느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모두가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 뿐 아니라 이민족 가운데 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들도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보고 ‘어머니 예루살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고,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오를 것입니다. 이처럼 회복된 예루살렘은 ‘구원 얻은 모든 민족의 중심이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더욱이 모든 민족으로까지 구원이 확장됨을 예언하는 ‘보편주의’는 본문이 포로기 이후의 기록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찬란한 영광’을 예언하는 이사야서가 1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예언이 마태오복음서에 기록된 ‘거룩한 탄생’의 기본 시나리오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나리오에다가 마태오복음서 기자는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정교하게 녹여서 ‘거룩한 탄생’ 이야기로 신학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열거하자면 ‘발람과 발락’(민수 24:17), ‘미가 예언자’(미가 5:1; 사무하 5:2), ‘솔로몬 왕과 세바 여왕’(열왕상 10:2,10)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신성한 이야기를 통해 마태오는 아기 예수가 ‘구약을 성취한 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진 ‘메시아 왕국’을 성취하실 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사야 예언서가 공현일에 복음서의 배경 독서로 배정된 이유입니다.

<시편 72>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이상적인 왕, 즉 ‘메시아’를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로써 이스라엘이 현실에서 어떤 왕을 기대하고 있었는지가 명백해 집니다. 약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간직한 왕이 통치력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세상에 정의(인권존중)를 실현하고,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나라는 흥망성쇠를 반복하더라도 그의 왕조는 영원하기를 기도합니다. 왕이 올바르게 통치력을 행사하면 그 명성이 땅 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도 찾아와 경배할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진 ‘메시아 왕국’이 그 왕을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여 모든 민족이 섬기게 될 그 이상적인 왕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다고 믿습니다. 공현일에 시편으로 배정된 이유입니다.

2독서는 <에페소서>입니다. 하느님이 계시해 주신 비밀(심오한 계획, 복음)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이 비밀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을 빌려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바로 그 비밀을 이방인들에게 ‘알리도록’ 은총을 받은 ‘복음의 일꾼’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로 자신이 공현의 도구가 되는 셈입니다.

하느님이 성령의 힘을 빌려 계시해 주신 그 비밀은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약속을 나누는 공동 상속자와 한 몸의 지체(교회)가 되는 축복입니다(참고 에페 2:14-22).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을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8)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갈라 3:16) 우리에게 성취된다는 ‘복음’입니다(갈라 3:22,29). 그렇습니다. 공현은 이 비밀(심오한 계획)이 계시된 시작일입니다. 비록 십자가에서 그 ‘심오한 계획’은 완성될 일이지만, <마태오복음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아기 예수의 성탄이 “모든 민족들을 위한” 복음인 이유를 밝혀주는 본문이기에 배정되었습니다.

<복음서>는 마태오가 전하는 그 유명한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입니다. 마태오는 이 이야기를 통해 아기 예수의 성탄이 “모든 민족들을 위한” 복음임을 서술합니다. 사실 마태오는 ‘족보’(기원) 이야기로 이미 이 주제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발생, Genesis)를 마음에 두고 예수님(그 이름은 ‘야훼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이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려는 ‘신학적 의도’로 마태오는 족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새로운 창조’란 무엇입니까? 이미 서신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나라의 공동상속자가 되는 창조”입니다.

사실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은 다윗의 자손)이 되는 ‘복’은 이미 족보에 기록된 ‘4명의 이방 여인들’(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을 통해 예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마태오는 이 여인들을 ‘족보’에 기록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신분상의 우월성과 구원의 편협성을 깨부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습니다.

이제 마태오는 아브라함을 통해(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 만민이 덕을 입는다”, 즉 “복을 받는다”는 약속이 동방박사들의 방문으로 성취되었다고 서술합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그들은 분명 복음을 받아들인 ‘첫 번째’ 이방인이자, 구원으로 초대 받은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마태오는 자신의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찾아와 믿음을 고백한 ‘백인대장’을 통해서도 이방 민족의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서술합니다(마태오 8:5-13). 복음서의 끝에 가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움으로써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나라의 공동상속자로 참여하는 새로운 창조가 성취되었다고 서술합니다(마태오 28:19). 이처럼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분을 증언하려는 신학적 의도”에서 구약을 재해석해 엮어낸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나라의 공동상속자(교회)로 들어오도록 초대 받았음을 증언”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담긴 신성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세부사항들의 역사성’에 지나치게 집중합니다. 우선 우리는 동방박사들을 실존 인물로 상상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낙타를 타고 먼 길을 왔을 것으로 상상합니다. 이 이야기에 ‘낙타’라는 말은 단 한 글자도 없다는 것을 알면 당황스럽습니다. 또 그들이 ‘보물 상자’를 열어 봉헌한 예물들 때문에 그들이 세 명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나이 때도 같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겁니다. 심지어 교회사는 그들의 이름도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멜기오르’, ‘카스파르’, ‘발타사르’입니다. 이 이름들이 전부 사실일까요? 아니면 후대의 발전된 전설일까요? 상상력에 맡깁니다.

동방박사들을 실존 인물로 상상하고 싶어 하듯이, 17세기의 천문학자 케플러처럼, 천문현상을 연구해서 ‘메시아 별’의 역사적 실재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고대 사람들은 위대한 영웅의 탄생을 ‘별’이 알려준다고 믿었습니다. 민수기에 언급된 “야곱의 별”(민수 24:17)도 그 하나의 예입니다. 특히 고대로부터 내려온 가장 흔한 자료는 ‘물고기’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목성과 토성의 ‘이성상합’(二星相合)입니다. ‘이성상합’은 서로 다른 공전 주기를 가진 ‘목성’과 ‘토성’이 하늘에서 합쳐져 더 밝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케플러는 이 현상이 기원전 6년에 무려 3회에 걸쳐 일어난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 현상을 두고 ‘메시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하늘에서 별들이 춤을 춘 것이라 설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도 들려주어야 정직합니다. ‘이성상합’은 일회적인 천문현상이 아니라 854년마다 ‘물고기’자리에서 반복되는 현상임도 밝혀졌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854년마다 ‘메시아’가 계속해서 탄생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메시아 탄생’을 증명하려는 유력한 증거를 찾다 또 다른 ‘메시아’를 불러 온 격입니다. 다만 그런 천문현상이 일어난 기원전 6년이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여러 역사적 자료와 어울린다는 점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일치합니다.

여담입니다만 ‘물고기’의 그리스어는 ‘익투스’(ΙΧΘΥΣ)입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도 나오듯이 이것은 박해시절을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비밀암호’였습니다.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라는 단어의 첫 글자 모음입니다. 귀가 솔깃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신앙을 과학으로 증명 받으려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하늘에서 목성과 토성의 ‘이성상합’이 관측되었다 하더라도 동방박사들에게만 보인 것으로 말해지는(동방박사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멈추었다고 하는) ‘드론’(drone) 같은 그 ‘별’의 정체는 이성상합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차라리 그 ‘별’을 언급한 마태오복음서 기자의 신학적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아무튼 이런 역사적 상상력은 마태오복음서 기자가 이 ‘신성한 이야기’를 서술한 본래 의도에서 좀 지나쳤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처럼 마태오에게는 그들의 역사적 실존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나라의 공동상속자로 참여하도록 초대 받았음을 증언”하려는 ‘신학적 의도’에서 이사야 예언서(이사 49:7; 60:1-6)를 기본 시나리오로 하고,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이야기들을(민수 24:17; 사무하 5:2; 열왕상 10:2,10; 미가 5:1) 여기에 정교하게 녹여서 ‘거룩한 탄생’ 이야기로 엮어냈습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려는 ‘신학적 의도’에서 구약을 재해석해 동방박사들의 방문이라는 신성한 이야기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마태오가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에 서술한 세부사항들 전부가 문자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이야기 속에 등장시킨 박사들의 사람됨과 상징적 행동은 우리에게 의미해 주는 바가 큽니다. 우선 ‘박사’로 번역한 그리스어 ‘마고스’는 오늘날로 말하면 ‘천문학자’입니다. 당시로서는 ‘현자’(賢者)들입니다. 탄생 이야기에 등장시킬 수 있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마태오가 그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태오는 예수님을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는 ‘스승’으로 묘사합니다(마태 7:28-29). ‘현자’와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은 참 잘 어울립니다.

또 마태오는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세바의 여왕처럼, 그들이 이스라엘 동쪽(바빌론이나 페르시아 지역) 먼 데서부터 왕을 만나리라는 ‘믿음’을 갖고 여행하여 왔다고 서술합니다. 어느 날 그들은 하늘을 우러르다 ‘이성상합’이라는 놀라운 천문현상을 목격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특별한 신호’로 알아차렸습니다. ‘왕의 탄생’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유다의 멸망과 포로생활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예언대로 유다는 멸망했고, 유대인들은 본토에서 추방당하여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로 살던 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 즉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따라서 동쪽에서 온 그들은 아마 그 추방당한 유대인들 사이에서 살다 왔을 것입니다. 그들도 그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새로 나신 왕”을 만나리라는 믿음으로 먼 길을 여행하여 예루살렘에 당도합니다. 이 상징적 행동은 우리의 구원이 믿음을 갖고 기나긴 여정을 감행할 수 있는 이들의 차지임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는 중요한 많은 상징들을 품고 있습니다. 위에서 ‘메시아 별’의 역사적 실재를 ‘이성상합’으로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별’을 언급한 마태오복음서 기자의 신학적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왔습니다. 그 ‘별’은 마태오복음서 기자가 ‘발람과 발락’(민수 24:17)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아래 서 있던 아브라함 이야기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창세 12:1-3; 15:5). 그 약속을 따라 그는 이방 민족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처음 부분에 등장시키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구세주의 성탄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온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복음, 구원의 보편성)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마태오 생각에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밤하늘의 ‘별들’이 제격입니다. 특히 발람이 예언한 “야곱에게서 솟는 한 별”은 이방 땅에 살던 동방박사들이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들어오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 별이 없었다면 이방 민족 출신의 천문학자인 그들이 갑작스레 유다 땅에 나타나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별’은 마태오가 자신의 신학적 목적을 위해 설정한 고도의 장치입니다. 한마디로 약속과 성취라는 신앙고백의 의도에서 재해석해 낸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께 봉헌한 보물 상자 속 ‘예물들’도 그렇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예물들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사람들이 세바에서 금과 향료를 싣고 야훼를 높이 찬양하며 찾아오리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이 ‘왕’이심을 온 세상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본래 예물은 존경의 표시이고, 모든 예물은 격에 맞아야 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도 그들이 동방에서 본 그 ‘별’이 세상에 오신 왕의 탄생을 알린다고 믿었기에 그에 맞는 예물을 준비해 와서 경배합니다. 결코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마태오복음서 기자의 신앙고백에 따른 재해석(신학)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예물들이 여행 경비로 쓰다 남은 황금과 상비약으로 쓰다 남은 것들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 예물들 덕택에 성가정이 돈을 마련하여 이집트에서의 피신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다들 상상력이 좀 지나칩니다.

교회사에서는 마태오가 특별히 언급한 세 가지 예물들이 갖는 각각의 상징을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황금’은 변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왕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왕권’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유향’(乳香)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향’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에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에 쓰였기에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몰약’은 방향과 방부제나 약제로도 사용되었고, 나무에서 나온 응고된 수액(樹液)은 값비싼 향수로 유통되었습니다. 복음서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34kg쯤 가져왔다(요한 19:39)고 서술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몰약’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수도자들은 그 예물 봉헌을 ‘가난’, ‘정결’, ‘순명’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마태오가 그런 의도로 이 예물들을 언급한 것일까요? 은혜로운 설명들이지만 동방박사의 방문을 오늘날처럼 문자대로의 사실로 보고 싶었던 욕구의 투사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이런 미래를 내다보고 예물을 드렸다기보다는 아기가 ‘왕’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존경을 표하도록 당시로서는 가장 귀한 것을 마태오가 신학적으로 설정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진짜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황금도, 유향도, 몰약도 아닌 그들의 ‘믿음’이었음을 여러분이 발견한다면 이 거룩한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눈을 뜨신 겁니다.

더욱이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기였을 때 뿐 아니라 이후에도 경배를 받는 분으로 서술됩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8:2). 회당장이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9:18).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14:33).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15:25). 제배대오의 두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20:20).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29:9).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경배합니다(마태 28:17).

그러나 이런 모습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아기였을 때 뿐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배척을 받으십니다. 헤로데 대왕, 헤로데 안티파스, 대사제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꾸었던 과월절의 군중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그렇게 배척하고 거부했던 유대인들을 넘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경배한 동방박사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을 통해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전례력으로 공현일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빛,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공공연히 나타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를 한 가족으로 불러주신 그 큰 사랑이 온 세상에 드러났음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그러나 공현일이 전례독서와 연결될 때는 우리가 누리는 축복과 사명에 더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동방박사들 방문 이야기에 담긴 세부사항들의 역사성에 집중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아기 예수의 성탄이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쁜 소식”임을 증언하려는 목적으로 엮어진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약속을 나누는 공동 상속자와 한 몸의 지체(교회)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는 진실을 증언하려는 숭고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시 ‘거룩한 신성’(영광스러운 형상)에 참여하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되새기게 하는 신성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당황한 박해자 ‘헤로데 대왕’처럼 결코 ‘복음의 훼방꾼’이서는 안 됩니다. 왕의 탄생을 기뻐하기보다 술렁거렸던 ‘예루살렘의 시민’이어서도 안 됩니다. 하늘의 가치, 숭고한 가치를 쫓는다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처럼 무엇이 진리인지 알면서도 무관심하고 행동하지 않는 위선자들이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동방박사들처럼 영혼을 떨리게 하는 ‘별’을 찾고, 그 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모든 차별과 역경을 넘어 ‘진리’를 위해 ‘믿음의 걸음’을 옮기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동방박사들처럼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사도 바울로처럼, 교회인 우리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을 허물고 화해시켜,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드신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차별과 분열과 전쟁을 없애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화해와 일치와 평화의 빛을 비추기 위해 자기 자리마다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 그 심오한 구원 계획이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이웃들에게 실현되는 거룩한 사랑의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부디 우리가 가슴에 품은 성탄의 빛, 공현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빛의 전사로 잘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2019. 1. 6. 공현대축일”의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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