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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0. 성탄1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성탄1주일입니다. 전례독서는 주제는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입니다. 오늘 전례독서에는 두 어린이가 등장합니다. 사무엘과 예수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바꾸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그 가정에 보내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본입니다. 우리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존재하게 하시고, 보내주신 선물임을 온전히 깨닫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진리의 빛을 밝혀주셨나이다. 비오니,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가 이 빛을 따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무상 2:18-20,24상
  • 시편 – 148
  • 2독서 – 골로 3:12-17
  • 복음서 – 루가 2:41-52

성탄1주일입니다. 전례독서는 주제는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두 어린이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사무엘과 예수입니다. 두 어린이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바꾸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그 가정에 보내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본입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각 가정으로 보내진 선물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임을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이웃의 변화와 구원을 위해 하느님이 존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가족임도 더욱 깊이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Samuel Presented to Eli I Samuel 1:24-25

1독서는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기도해서 얻은 아들입니다. 사무엘이 그 같은 이름을 가진 이유가 소개됩니다. 불임이었던 한나는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시면 그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사무상 1:11).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God has heard) 주신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한나는 젖을 떼자 서원대로 아이를 성소(성전)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칩니다. 하느님이 은총으로 주신 이 아이가 분명 주님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주님께 바쳐진 어린 사무엘이 성소(성전)에서 시중을 들며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에봇’을 입었다는 말은 장차 제사장이 될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소에서 시중드는 사무엘의 순결함이 대제사장 엘리 아들들의 사악함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주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포개지기에 복음서의 배경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시편> 148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흔히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146-150편)은 ‘대송영’(the Great Doxology)이라 불립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용기를 북돋는 “할렐루야”(야훼를 찬미하라)로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편(1-150편)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생살이의 다양한 면들을 공동체의 기도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기쁨, 애가(哀歌), 감사, 희망, 탄원, 확신, 회상, 지혜, 왕의 통치 등 그 상황도 다양합니다. 따라서 시편의 히브리어 제목인 ‘테힐림’(Tehillim, 찬가)이라 부르기에 어색한 시(詩)들도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편은 그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시인은 우주를 향해 “주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합니다. ‘하늘’(시편 148:1-6)과 ‘땅’(시편 148:7-10)에 있는 피조물들은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특히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시편 148:11-14).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찬양해야 할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명령으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시편 148:5). ‘창조주 하느님’입니다. 1독서의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님의 은총 덕택에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없지 않고 있다”는(시편 139:14) 이 경이로움의 근거는 ‘창조주 하느님’께 있습니다. 창조기사가 강조하는 것처럼(창세 1:4) 분명 시인은 ‘존재함’을 ‘선’(善)으로 보았습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복음서가 더 명백히 해 줍니다. ‘성육신’하신 주님 때문입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을 비우고 피조세계를 ‘집’으로 삼아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친히 ‘사람이 되시어’ 한 가정의 일원으로 태어나시고, 우리 똑같은 성장과정을 거치심으로써 ‘사람의 영광’을 드높여주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48:14).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늘과 땅에 가득한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과 사람의 존귀함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골로사이>입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의 모임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의 모임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소속된 ‘한 몸인 가족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바울로는 본문 바로 앞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삶’을 “옷을 갈아입는 것”에 비유했습니다(골로 3:9-10).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처럼(갈라 5:19-23) 본문에도 새 사람이 옷 입듯이 입어야할 ‘덕목들’이 열거됩니다. 이 덕목들은 1독서 사무엘이 해마다 갈아입었던 ‘두루마기’와 연결됩니다. 새 사람, 즉 그리스도의 사람은 동정심(자비), 친절,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화, 감사를 옷 입듯이 입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나타나야할 덕목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으로 살고 있다면 인간관계에서 이 덕목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유의할 점은 개인적인 부지런함이나 근면함,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는 능력이나 영리함 같은 자질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나열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또한 새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항상 살아있습니다. 자신이 읽고 묵상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걸으며, 언제든지 ‘지혜의 말씀’이 입술에서 흘러나옵니다. 새 사람은 혼자 떨어져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배’에 나섭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바칩니다. 새 사람은 한 평생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살아갑니다. 말에나 일에나 오직 주 예수가 살아있습니다. 예수께 힘을 얻어서 감사의 삶을 이어갑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은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복음서>는 루가복음에서 배정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바치신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41-45절)은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 갔다가 부모가 예수를 잃어버린 이야기입니다. 둘째 단락(46절-50절)은 성전에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예수를 부모가 찾은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단락(51-52절)은 예수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단락부터 보겠습니다. 어린 예수의 부모가 율법에 충실한 이들임을 증언하는 서술로 시작합니다. 우선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부모는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것일까요? 어떻게 부모가 어린 아들을 챙기지도 않고 하룻길을 그냥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들에 먼저 대답해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유대인 ‘남성’은 1년에 3차례 큰 명절(과월절, 맥추절, 추수절)을 지키러 ‘하느님 앞’에 나와야 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출애 23:14-17; 신명 16:16). 하지만 팔레스틴에 살던 유대인들이라면 몰라도, 타국에 살던 유대인들이 1년에 세 차례나 예루살렘을 순례한다는 것은 시간이나 재정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의논 끝에 예루살렘에서 하루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1년에 세 번 절기를 지키고, 그 이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만 지켜도 된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과월절을 지키도록 권했습니다. 이후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과월절 축제만큼은 꼭 예루살렘에 올라가 지키곤 하였습니다.

타국이나 먼 곳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왕 가는 길에 여러 가지 가족행사도 함께 치를 계획을 세웠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아들의 ‘성인식’(통과의식: 바르(아들) 미츠바(계약, 율법), 여성은 바트 미츠바)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대 나이로 ‘13세’(여성은 12세에 합니다.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발달이 빠르기 때문입니다)는 ‘성인식’을 치르고 ‘율법의 아들’(딸)로 축복을 받는 나이입니다. 왜 굳이 13살일까요?

유대 랍비 전통에서는 어린아이가 하느님과 ‘하나’ 되는 나이를 ‘13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알파벳은 우리말과 달리 그 자체로 고유한 숫자 값을 갖습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수비학 數秘學)’라고 합니다. 성경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에 어떤 낱말들은 ‘게마트리아’로 설명해 볼 수도 있지만, 성경은 항상 전체 ‘맥락’ 안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단들은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자기식대로 성서를 꿰어서 무슨 대단한 해석이라도 되는 냥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성공회에는 사제와 함께 하는 성서공부 말고 개인적으로 안내하는 성서공부 같은 것은 없으니 누가 어디서 성서공부하자고 꾀면 단호히 거부하시기를 당부합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라는 뜻을 갖는 ‘에하드(אחד)’를 ‘게마트리아’로 치환하면 뒤 알파벳부터 각각 숫자 1(알레프), 8(헤트), 4(달레트)에 해당하고 이것을 합치면 13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은 아이가 13살이 되면 ‘바르 미츠바’(בת מצוה: 바르는 아들, 미츠바는 율법이라는 뜻), 즉 ‘성인식’을 합니다. 그 때부터는 율법을 읽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명령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율법(계약)의 아들’이 되는 날이 ‘성인식’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율법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인식을 통해 비로소 아이는 유대 공동체의 정식 회원이 됩니다. 성인식을 갖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인식을 마치고 나면 ‘성전세’로 반 세겔을 내야하며, 율법준수의 책임과 그에 따른 상벌 역시 온전히 아들 자신의 몫이 됩니다. 성인식 준비는 보통 1년 전부터 했습니다.

과월절을 나흘 앞두고 나자렛에 살던 사람들도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해마다 과월절 축제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만큼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여성은 가지 않아도 되는 데 마리아는 해마다 요셉과 동행했습니다. 그 해에는 특별히 12살이 된 예수를 데리고 갑니다. 이유는 내년이면 예수도 13살이 되고, 성인식을 해야 하기에 미리 보여주려는 교육적 차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에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여행’이었습니다. 길에서 사나운 맹수나 도적 떼를 만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할 때는 일단 큰 ‘무리’(일행)를 지어 가는 방법이 가장 안전했습니다. 맨 앞에는 남성들, 중간에는 여성들과 어린이, 마지막에는 다시 남성들, 이렇게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여성들과 어린이를 보호하면서 가곤 했습니다. 특히 어린이는 어느 그룹에나(주로 중간) 끼어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성가정 역시 그런 일행에 끼어 길을 나섰습니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었기에 예수는 또래와 어울려 중간 그룹에서 걸어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보니 율법규정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유대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3만 명 정도 살던 도시가 명절이 다가오면 30만 넘게 모인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입니다. 성가정이 며칠이나 예루살렘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순례객들은 이틀정도는 의무적으로 머물던 관습이 있었기에 성가정도 큰 방을 하나 구해 일행과 같이 머물렀습니다.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성가정은 “명절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만일 과월절이 시작될 때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면 무려 7일간 그곳에 머물렀던 셈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기간입니다. 아무튼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어린 예수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크기가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희생제물로 바쳐질 양들을 모아놓은 우리 앞을 지날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눈물을 닦아주면서 성인식을 보러 가자며 손을 이끌었습니다. 성인식을 끝내고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년이면 예수도 성인식을 해야 합니다. 성가정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제사장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성전 경내를 따라 펼쳐진 기념품 상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게 명절기간이 다 끝나갈 무렵 예루살렘에는 현저히 인파가 줄어들었습니다. 순례객들이 하나 둘 고장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성가정도 일행과 함께 나자렛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부모가 출발한 후에 성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마리아’는 주위에 예수가 없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맨 앞이든 뒤든 어느 그룹엔가 요셉과 함께 예수가 가고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 역시 주변에 예수가 없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나 또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오고 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룻길’을 가다 밤을 보낼 장소에 도착한 부모는 그만 당황하여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마리아와 요셉의 힘겨운 ‘사흘’이 시작되었습니다.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밤길의 위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찾아 나섭니다. 첫째 날은 예수가 없는 줄도 모르고 걸어온 날입니다. 둘째 날은 내려오던 길을 거슬러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날입니다. 셋째 날, 즉 사흘째 되는 날은 예루살렘 성전 부속 건물에서 예수를 찾은 날입니다.

 

둘째 단락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리아나 요셉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한 두 시간도 아니고, 무려 사흘이나 고생하면서 아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부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학자들은 ‘산헤드린’의 구성원이 될 정도로 학식이 높은 ‘율법교사들’을 말합니다. 과월절 기간 동안 ‘산헤드린’은 성전 부속 건물에서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만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고, 토론하게 하거나 대답해 주는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복음서는 12살인 예수님이 성전에 계시면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고 서술합니다. ‘즉문즉답’입니다. 마치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생이 대학 물리학과 교수와 대화하는 장면 같습니다. 그런데 어린 예수의 율법에 대한 대답을 들은 이들은 그 ‘이해력’(지능)과 ‘슬기로움’에 경탄했다고 서술합니다. 성인식을 치르기 전부터 어린 예수는 율법에 대한 이해력과 슬기로움이 탁월했음을 그런 식으로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너무나 낯선 모습에 부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마리아는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안도감과 질책이 교차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예수님의 상기된 반응입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가 2:49

이 말씀은 간단해 보이지만,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이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라는 말씀은 “어머니, 괜한 수고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답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의 ‘정체성과 사명의 자각’이자 부모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명을 상기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진짜 집은 나자렛이 아니라 여기 ‘아버지 집’이라는 뜻입니다. 일행이 나자렛으로 돌아갈 때 자신이 함께 가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거기 있으면서 학자들과 대화한 것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의지적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성전은 학자들이나 대제사장들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신 예수님이 ‘첫 번 하신 일’이 학자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12살 무렵이면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성인이 된 예수님도 목수로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자신과의 독특한 관계를 이미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양육했어야 한다는 일종의 지침입니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자신의 정체성을 부모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율법학자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심으로써 자신의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일을 이미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하러 오셨다는 사명을 부모에게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이 발견됩니다. 사무엘도 성전에 있었고, 예수님도 성전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부모는 성전(성소)이 사무엘의 집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돌보시는 사람임을 믿었습니다. 반면에 천사의 예언까지 들었던 예수님의 부모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하고 당황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딱합니다.

마지막 단락입니다. 예수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온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순종하며 살았다”는 말씀은 장남으로서 목수인 요셉의 직업을 이어받아 평범한 삶을 충실히 살아냈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 이후로 요셉은 사라집니다. 놀랍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으면서도 결코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자신의 부양의무를 다하며 평범한 목수의 삶을 감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스도’라고 해서 항상 특별한 일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스스로를 교만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해서 항상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평범한 일을 ‘특별한 방식’, 즉 새 사람의 방식으로 해 나가는 이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거룩합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고 마침내 루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루가복음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의 대단원을 결론짓습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루가 2:52

루가는 이미 “아기가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루가 2:40). 그 말씀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났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초능력자’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히브 4:15). 아기로 태어나셔서 보살핌을 통해 신체적으로 점점 자라나신 분이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신 분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정신적으로 ‘지혜’가 자라나신 분이셨습니다. 특히 ‘지혜’가 자랐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목수의 일로 가족을 부양하며 사셨지만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하느님과의 소통 속에서 계속해서 유지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루가는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았다”는 말씀으로 공생애 이전의 예수님의 삶을 끝맺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 속에 있었으며, 주위 사람들과 깊은 우정과 친밀을 나누었다는 강조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참 사람으로 성숙하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탄 1주일이자 2018년을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말 그대로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돌아보면 아쉬운 일도 있었고, 마리아나 요셉처럼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고통스런 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전례독서들을 다시금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냥 우연히 존재하게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도 사무엘처럼,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가도록 하느님은 일찍부터 아버지 요셉, 어머니 마리아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부모님이 그런 분들로 보이지 않았다 해도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실입니다. 그분들마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도구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을 위해 그들에 앞서 존재하는 거룩한 도구들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런 우리를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이라고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존재의 근거가 아닌 것처럼 불신앙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계획과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을 하느님의 집으로 만들기보다 우리가 있는 곳의 영향을 받아 우리 삶마저 퇴색시킬 때가 있습니다. 다시 힘을 내십시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자기 존재의 근거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을 어릴 때부터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친히 ‘사람이 되시어’ 한 가정의 일원으로 태어나시고, 우리와 똑같은 성장과정을 거치심으로써 ‘사람의 영광’을 드높여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나서야할 때가 차기까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로를 통해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교훈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존재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관계하면서 입고 있어야 할 옷들을 교훈 받았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께서 새로운 한 해를 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볼 수 있는 새 해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디 새해에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가 더욱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선물로 주신 그 거룩한 뜻이 우리 자신들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양육하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구원계획 속에 우리 가정에 보내졌음을 깊이 깨닫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존재하게 하시고, 보내주신 선물임을 온전히 깨닫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곳을 하느님의 거룩한 집으로 만드는 복된 인생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몸이 아픈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수술 후 회복중인 홍경희(비비안나), 임스텔라, 박창언, 유복주 권사님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소방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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