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3. 대림4주일

  • by

오늘의 기도지향

대림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복되어라.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대림절기 전례독서는 해마다 한번은 반드시 ‘성모송가’를 부르도록 배정됩니다. 그만큼 마리아가 부른 이 ‘희망의 송가’가 대림을 지나는 우리 마음에서도 힘차게 울려 나와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마리아 같은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으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성자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은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그 복된 날을 맞이할 때 기쁨으로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미가 5:1-4상
  • 성모송가 – 루가 1:46하-55
  • 2독서 – 히브 10:5-10
  • 복음서 – 루가 1:39-45

대림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복되어라.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렀습니다. 올해도 세상의 소란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건 사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뿌리 깊은 안전 불감증이 다시 회자됩니다. 무책임한 인재(人災)들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들이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는 일상이 되었고, 최악의 경제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위험의 외주화’라 불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는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한반도 평화정착의 길이 열리는가 싶더니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서로를 경계하며 지나가는 두려운 얼굴들,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수척하고 분노에 찬 얼굴들이 우리 곁을 지나칩니다.

 

이런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회가 대림절기를 지키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저런 신학적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희망’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과 삶의 무게로 허덕이는 우리를 초대하여 ‘희망의 불씨’를 붙여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부서지고 망가진 세상을 고칠 수 없고, 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순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우리와 이 세상을 구원하실 ‘평화의 왕’이 오신다는 ‘약속된 희망’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에 의지한 그 ‘희망’은 무력감을, 걱정을, 절망을 극복하는 참된 힘입니다. 그 ‘희망’은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힘입니다. 사실 ‘희망’은 아무리 작아도 상관없습니다. 마치 실체가 없는 어둠이 한 줄기 빛만으로도 물러가듯이 우리에게 작은 희망만이라도 있다면 그 어떤 어둠도, 두려움도 진짜 문제는 아닙니다. 분명 ‘희망’은 평범한 낙관주의나 긍정 마인드 그 이상의 삶의 태도입니다. 낙관주의는 단지 과거에 경험했던 것에서 위안을 발견하도록 자꾸 뒤돌아보게 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과거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희망들’이 모여서 ‘큰 희망’을 이루면 우리를 짓누르고 두렵게 해 온 억압과 불의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촛불 혁명’에서 보았듯이 ‘함께 모아진 큰 희망’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제 대림초의 모든 불빛이 밝혀졌습니다. 성탄절이 그야말로 코앞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송가’(Magnificat, 첫 구절이 이 라틴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찬양하다’는 뜻입니다)를 듣습니다. 대림절기 전례독서는 해마다 한번은 반드시 이 ‘성모송가’를 부르도록 배정되었습니다(가해 대림 3주일, 나해 대림 3,4주일, 다해 대림 4주일). 그만큼 마리아가 부른 이 ‘희망의 송가’가 대림을 지나는 우리 마음에서도 힘차게 울려 나와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대림절기를 순례해 왔습니다. 우리는 오실 주님을 ‘희망’하며 이 기다림의 여정을 잘 걸어왔습니까? 전례독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 예고와 ‘희망의 노래’로 가득합니다.

1독서는 <미가>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장차 탄생하실 ‘메시아’와 그 ‘사역’에 대한 예언의 노래가 배정되었습니다. ‘미가’는 ‘미가야’의 단축형으로 이름의 뜻은 “누가 야훼와 같은가?”입니다. 그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다의 예언자입니다(기원전 750-690년). 동시대를 살았지만 둘은 출신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 ‘이사야’는 정치 상황에 비교적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왕족 출신이거나 상류층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반면에 ‘미가’는 ‘모레셋’ 출신입니다(미가 1:1; 예레 26:18). 그는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저지르던 탐욕과 불의, 거짓예배, 가난한 이들이 당하던 착취를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미가 2:1-2,7-9). 이점은 그가 가난한 농가(農家) 출신임을 말해줍니다. 아모스처럼 권력가들의 탐욕과 그들이 저지르던 불의, 거짓예배, 불의한 사회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미가 3:10-11; 6:10-12).

기원전 8세기 중후반,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5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열왕하 17:1-6, 24~41), 그 땅에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기원전 722년).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시작입니다. ‘미가’ 예언자는 이 ‘참상’(慘狀)을 다 보았습니다. 이후에도 아시리아는 계속해서 ‘서진’(西進) 정책을 펼쳤습니다. 남왕국 유다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유다의 왕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막대한 조공(朝貢)을 바치는 조건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열왕하 16:7-8). 아시리아가 서진(西進) 정책을 펼칠 때, ‘이집트’에서는 제 25왕조가 일어났습니다(기원전 716/5-663년). 25왕조는 에토피안 왕조(Ethopian Kush)로서, 영향력을 ‘시리아-팔레스틴’(Syria-Palestine) 지역으로 확장시키려 했습니다.

유다는 두 거대 제국 사이에 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왕실은 ‘동맹정책’이라는 외교술을 발휘해 안전을 보장 받으려 했습니다. 그 시기에 야훼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외세를 의지하지 말고(이사 7:4-9; 31:1-3), 야훼의 보호하심을 기다리라 명령하셨습니다(이사 28:16; 30:15,18; 31:4-5). 그러나 왕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아하즈 왕’은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가(이사 7-8장) 오히려 ‘속국’이 되었습니다. ‘히즈키야 왕’은 이집트 제국을 믿고 반(反) 아시리아 동맹을 주도했습니다(이사 30:1-7). 이 일로 아시리아의 ‘산헤립’은 유다를 침공하여(기원전 701년) 그에게 항복을 요구합니다(이사 36장).

미가는 이 같은 정치적 격동기와 자기 민족이 극심한 고난을 겪던 암울한 시기에 활동했습니다(미가 1:8-9). ‘산헤립’의 침공으로 유다 전역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수도 예루살렘도 포위당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입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재앙과 불행이 누구 때문인지 선포합니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들의 탐욕과 불의, 착취와 거짓된 예배를 고발합니다(2:1-11; 3:1-11; 6:9-16).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예루살렘 성전은 잡초로 뒤덮일 것이라” 예고합니다(미가 3:12). 게다가 “유다 백성은 바빌론으로 끌려 갈 것이라” 예고합니다(미가 4:10a).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희망의 미래’를 약속합니다(미가 4:1-4,6-8,10b,13). 특히 ‘메시아 탄생’을 콕 집어서 구체적으로 예고합니다. 본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 미가 5:1

미가는 그 ‘희망의 미래’를 실현할 ‘메시아’와 그 분의 ‘탄생지’를 예고합니다. 그 약속된 미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분이 성취하실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베들레헴’(벹+레헴)은 ‘에브랏’(에프라타) 사람의 거주지로(사무상 17:12, 룻기 1:2; 4:11-12)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은 왕의 명성과 달리 결코 크거나 영향력 있는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을 이스라엘의 통치자, 즉 ‘메시아의 탄생지’로 선택하셨습니다(미가 5:1b). 더욱이 ‘벹에브랏’(에브랏 집안)은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구약성경은 미가의 이런 예언이 있기 훨씬 전에 ‘다윗 가문’과 ‘베들레헴’이 누릴 영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창세 49,10; 2사무 7:12-16).

두 명의 복음사가는 미가의 이 영광스러운 예언이 7백년의 세월이 흘러 ‘성가정’을 통해 마침내 성취되었다고 서술했습니다(루가 2:4-7; 마태 2:5-6).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하는 ‘호구조사령’ 때문에 한 가정이 ‘등록’을 하러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을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무려 약 90km에 이르는 먼 거리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다윗의 후손인 ‘요셉’, 그와 약혼한 ‘마리아’입니다.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들은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달이차서 첫 아들인 ‘예수’를 낳았습니다(갈라 4:4). 이 분이 바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신 우리의 구세주십니다.

역사가들은 호적을 등록하러 선조들의 고향을 찾아갔다는 것은 ‘역사적 허구’라고 말합니다. 로마제국의 관례에 따르면 ‘인두세’ 징수를 위한 등록은 각자 거주지에서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신약성서학자들은 ‘나자렛’을 ‘역사적 예수’의 고향으로, ‘베들레헴’을 ‘신앙의 그리스도’의 고향으로 알아들으면 된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역사적 허구’라는 이유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전기(傳記)나 역사서(歷史書)가 아니라 ‘신앙고백서’입니다. 오히려 허구로 보일 수 있는 이런 약점마저도 복음서 기자들이 기꺼이 서술하고 있는 그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루가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증언하려고 해산날이 가까운 성가정을 그 먼 거리까지 여행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온 세상의 메시아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미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갑니다. ‘메시아’는 ‘베들레헴’, 즉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도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기원’(뿌리)은 베들레헴이나 야곱의 아들인 유다가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즉 태고(太古)부터이며 영원 전부터라고 올려다보았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예언자답습니다. 신약성경도 미가가 옳게 보았음을 서술합니다(요한 1:1-2:14). 그리스도 예수님은 ‘창조주’시고(골로 1:16-17),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으며(1요한 1:1-3; 1베드 1:20), ‘알파’(시작)와 ‘오메가’(끝)십니다(묵시 22:13). 그리스도 예수님은 태초(영원 전부터)부터 계셨으며, 존재하지 않으신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베들레헴’은 ‘빵 집’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생명의 빵’(양식)이십니다(요한 6:35). 성탄 밤 전례에 ‘구유축복식’이 있는데, 아기예수께서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곳도 마소의 밥통인 ‘구유’였습니다(루가 2:12). 어쩌면 ‘하느님의 뜻’을(사랑과 정의) 따르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마소처럼 제 본능을(탐욕과 불의) 따라 살아가던 이들이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참 사람이 되라는 은유일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미가는 그들이 겪는 고난과 불행(전쟁과 포로생활), 그 수고로움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예고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예고’입니다. 고난의 끝이 난다는 희망입니다. 언제입니까?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미가 5:2a)입니다(참고, 이사 7:14). 메시아 탄생으로 해석되는 이 구절은 임마누엘의 ‘성탄’을 예고하는 오늘 복음서와 상응(相應)합니다. 분명 메시아가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그 뿐 아니라 메시아가 예루살렘 왕실의 여인에게서가 아니라 복음서가 서술하는 대로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출신의 ‘처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다.”는 점도 놀랍습니다(루가 1:26).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곳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부족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여인의 몸을 통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하느님의 권능임을 나타냅니다(루가 1:37,45). 또한 하느님께서 자신의 계획과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나타냅니다(루가 1:45, 54-55).

야훼께서는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즉 메시아가 태어날 때까지 이스라엘이 고난의 시간을 겪도록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분명 미가는 미래의 시간을 그렇게 내다보았습니다. 훗날 바빌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중 일부가 본국으로 귀환한 것은 그가 예언한 ‘희망의 미래’(미가 4:1-4,6-8,13)가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같은 부분적인 미래를 예언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되는 ‘희망의 미래’를 기대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이 준비될 때까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다음 포로로 잡혀갔던 ‘남은’ 겨레들(메시아의 형제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로 돌아오면 ‘메시아’는 그 때에 ‘목자로 나설 것’입니다(미가 5:3). ‘메시아’가 목자로 표상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목자로, 이스라엘은 양떼로 비유되곤 합니다(시편 23; 예레 31:10; 에제 34:11-16). 이스라엘의 ‘고난의 시기’(야훼의 심판)가 다 차면, 메시아는 목자로서 영광스럽게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입니다.

끝으로 미가는 백성들의 눈을 ‘메시아의 통치’에 주목하게 합니다. 지금 그들은 고난과 불행 속에 있지만 곧 역사가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메시아, 즉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그 메시아는 야훼의 힘을 입은 ‘목자’가 되어, 양 무리를 이끌고 먹이실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착한 목자’로 이것을 성취했다고 보도합니다(요한 10:11; 마르 6:34-44; 8:1-8). 메시아는 그 위대한 힘을 땅 끝까지 떨치실 것입니다. 자신의 양떼들이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미가 5:4; 에페 2:14; 필립 4:7).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가 이 세상에 주실 수 있는 진정한 선물이 ‘평화’라는 예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이 땅, 우리들의 가슴에 사무칩니다. 이렇게 미가 예언자는 그 암울한 시기에 ‘평화의 왕’으로(이사 9:5) 오실 메시아를 ‘희망’ 속에서 내다보았습니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비천한 여종’을 통해(루가 1:48) 오실 구세주 예수의 탄생과 사역을 희망 속에서 노래했습니다.

2독서는 <히브리서>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명확히 밝히는 본문이 배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예수 어록’을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저자는 그 기록을 참고해서 세상에 첫 번째 오신 ‘성육신’의 목적을 그리스도께서 ‘시편’(40:6-8)을 인용하여 친히 가르쳐주셨다고 서술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노래’(시편은 본래 노래입니다)를 불렀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 히브 10:7

저자는 이 시편이 ‘새 언약’이신 예수님의 ‘완벽한 희생’을 가리킨다고 보았던 셈입니다. 이전 ‘장’(章)들에서(히브 4:14-5:10; 7장-9장) 저자는 옛 계약의 대사제와 ‘새 계약’의 대사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해 왔습니다. 옛 계약의 희생제물과 새 계약(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대조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새 계약의 대사제’야말로 위대하시고, ‘새 계약의 희생제물’이야말로 더 좋다고 교훈해 왔습니다.

본문은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 옛 계약의 희생제물은 하느님께서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다고 규정합니다(히브 10:5-6,8). 사실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 즉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어 살게 하시는 분’이 생명을 죽여야 하는 동물 봉헌을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옛 계약을 따라 제사를 바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겉치레뿐인’(형식적인) 예배, 거짓 예배를 향한 비판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죄를 끊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의도에서 제물을 바친 것이 아니었습니다(아모 5:21-23; 이사 1:11-15; 예레 7:3-11). 그들은 제물 봉헌 그 자체가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며,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게 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착각입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함으로써(순종함으로써), 즉 ‘사랑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거룩해진다고 예언자들은 선포했습니다(아모 5:24; 이사 1:16-17; 예레 7:23; 미가 6:8). 더욱이 히브리서 저자는 옛 계약의 희생제물은 근본적으로 ‘죄 사함’의 효력이 없다고 선언합니다(히브 10:11).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세상에 ‘성육신’하셔야 했습니다(히브 10:7,9). 계속해서 생명을 죽어야 하는 희생, 죄 사함(거룩함)의 효력도 없는 희생을 ‘그치게’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정화 사건도 이런 관점에서 묵상해 보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실 것입니다(요한 2:13-21). 스스로 하느님이 받으실 ‘참 제물’(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 성육신 하셨습니다(히브 10:5).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쳐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새 계약의 희생제물이라고 교훈합니다(히브 10:10).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없애버릴 수 있는’ 영원한 효력을 지닌 새 계약의 희생제물이라고 교훈합니다(히브 10:12a).

그렇습니다. 순간순간 ‘순종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요한 4:34; 6:38; 14:31; 마태 26:39; 마르 14:36; 루가 22:42), 예수님처럼 순간순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가 드리는 예배만이 하느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입니다(요한 4:24). 임박한 성탄을 앞두고 바치는 성찬례를 통해 이 같은 성육신의 의미가 온전히 되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서>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과 희망의 노래’입니다. 루가복음은 두 개의 ‘수태고지와 탄생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은 다 하실 수 있다”라고(루가 1:37)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분들에게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어난 사건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주의 사고에 물든 분들이 듣기에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그렇다고 루가복음서가 이렇게 시작되는 이유마저 ‘이성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동화처럼 들리는 잉태 사건이 이미 창세기를 통해 전해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사악입니다(창세 21:1-2).

사실 루가복음 이야기 순서는 창세기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술되었습니다. 잘 들여다보시면 1, 2장에서만도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리브가, 에사오와 야곱, 레아, 라헬을 익숙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이 됩니다(창세 11:30; 18:11,14; 26:5; 루가 1:6-7,37). 어느 때는 리브가의 태중에 있던 쌍둥이 ‘에사오와 야곱’이 태중에서 서로 만난 ‘아기 요한과 예수’가 되기도 합니다(창세 25:19-23; 루가 1:41-44). 어느 때는 야곱의 아내 ‘라헬’의 말이 ‘엘리사벳’의 입술에서 흘러나옵니다(창세 30:23; 루가 1:25). 어느 때는 ‘레아’가 말이 ‘마리아의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창세 29:35; 30:13; 루가 1:46,48). 찾아서 다시 묵상해 보시면 성경을 읽는 새로운 맛이 느껴질 것입니다.

두 개의 수태고지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 가정이 듣게 된 수태고지는 ‘수치심’(羞恥心)을 씻는 ‘기쁜 소식’입니다(루가 1:25). 또 다른 가정이 듣게 된 수태고지는 다른 이들이 알면 위험천만한 무서운 소식입니다. 전자는 나이 많은 여인 엘리사벳이고, 후자는 처녀 마리아입니다. 일이 어떻게 전개됩니까? ‘수태고지’를 처음 들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두렵고 당황했습니다(루가 1:28-29). 그 순간 천사는 ‘엘리사벳’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고 알려줍니다(루가 1:36). 단지 그렇게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사실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에게 가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신앙고백인 ‘성모송가’가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렀던 것일까요? 여러분이 마리아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저는 두 가지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우선 마리아는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비록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믿음으로 ‘순종’하긴 했지만 실존적 불안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불안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같이 있어 줄 사람을 찾습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체험을 이해할만한 사람과 가까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 체험을 이해해 줄 사람은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천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친척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를 가졌음에 틀림 없습니다. 찾아가서 하느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고백해도 “너 미쳤니?”라고 냉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과학적 사유나, 상상을 초월하여 기묘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믿어 줄 유일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녀와 함께라면 지금의 이 두려움과 불안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유다 산골의 한 동네까지 참 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마 일 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마치 구원이 필요한 인류를 위해 하느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마리아도 도움이 필요한 ‘엘리사벳’을 돕기 위해 먼 길을 서둘러 나섰습니다. 자신은 이제 막 성령으로 잉태했지만, 엘리사벳은 임신한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구원의 도구로 선택하신 하느님께 응답하는 마리아의 첫 번 선택이, 다시 말해 하느님의 영을 모신 이의 첫 번 결심이 다른 이를 돕는 ‘사랑의 행위’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불안하고 두렵기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님에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임신하였습니다(루가 1:24).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엘리사벳의 기쁨과 감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다산’(多産)을 최고의 축복으로 여기던 시절입니다. 드디어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루가 1:25). 달이 흘러 여섯 달이 되어 가자 심리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전 제사 당번으로 올라갔던 남편은 벙어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루가 1:20,22). 그를 보고 있자니 앞 일이 막막합니다. 그 늙은 몸으로 집안일과 커가는 새 생명의 약동을 지탱하는 것 자체가 점점 힘겹습니다. 마음은 기쁨과 감사, 불안과 두려움의 전쟁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사벳은 마당에 서 있다가 뜻밖의 방문을 받습니다. 친척 마리아가 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문안’(평화의 축복)할 때, 뱃속에 든 아기, 즉 요한이 기뻐하며 태동합니다. 놀랍습니다. 요한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의 ‘영’에 반응할 수 있는 영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천사는 성전에서 분향하던 즈가리야에게 “앞으로 ‘요한’이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와서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할 사람”이라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루가 1:17).

그 순간 엘리사벳은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혔습니다. 루가는 그것이 “성령을 가득히 받았기 때문”이라고 서술합니다. 성령께서 그녀(또는 그녀와 아기)를 사로잡자 엘리사벳은 비로소 지혜의 눈을 떴습니다. 자신이 잉태한 이유와 마리아의 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처음 아기를 갖게 되자 이것이 개인의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축복인 줄로만 알았습니다(루가 1:25). 그러나 성령을 가득히 받자 그 축복이 개인을 넘어 인류 전체로 향하는 일임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믿지 않았던 천사의 말이 비로소 아내에게서 결실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제야 지금까지의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완전한 기쁨 속에 마리의 방문이 뜻하는 바를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 루가 1:39-45

주님의 현존을 모신 마리아를 향한 엘리사벳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말이 창세기에서는 어디에 등장하는지 이미 언급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주님’, 즉 ‘메시아’란 뜻입니다. 이 축복이 교회사에서 마리아의 지위를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즉 ‘주님의 어머니’로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어머니’라는 이 축복은 그녀의 심장을 찌를 예리한 칼, 즉 십자가에 달릴 아들을 보는 것을 뜻하기도 했습니다(루가 2:35). 엘리사벳은 자신이 이런 방문을 받을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비천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태중의 아기인 요한도 너무나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절대적 믿음’을 칭송합니다. 그 믿음이 ‘주님의 약속’(메시아)을 받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하느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엘리사벳의 축복을 듣자 마리아의 마음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천사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나설 때만 해도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자기여야 하는지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그 모든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엘리사벳의 축복에 담긴 ‘성령의 음성’을 듣자 마리아도 자신의 잉태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인류 전체와 관계된 자비의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슴에서 ‘희망의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 시편 대신 노래한 그 유명한 ‘성모송가’입니다. 이 송가는 창세기에 기록된 ‘레아’의 고백 말고도(창세 29:35; 30:13)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와 비슷합니다(사무상 2:1-10).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약성경의 더 많은 인용문들이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만일 이 ‘희망의 노래’가 온전히 마리아의 것이었다면, 그녀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아는 여성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그녀의 입술에 담긴 것이라 해도 마리아가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감해지지 않습니다.

이 ‘희망의 노래’는 마리아의 시각에 따라 현재, 과거, 미래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단락(46-49a절)은 ‘현재’ 일에 대한 감격입니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뻐합니다. 이어서 찬미하고 기뻐하는 이유, 즉 감사의 이유를 말합니다. ‘비천한 자신’(구원이 필요한 자신)을 ‘선택’하시고 ‘돌보신’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주님, 구세주, 전능하신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여종’, ‘비천한’ 사람이라 부르는 ‘겸손’입니다. 이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감사의 이유를 말합니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큰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 ‘큰일’은 자신이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하게 된 일입니다. 인류 구원의 도구로 선택된 일입니다. 엘리사벳이 칭송한 것처럼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가 된 축복입니다. 이제부터 온 백성이 ‘복되다’ 칭송하는 축복입니다. 마리아에 일어난 일은 마리아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축복의 사건이기에 우리가 그렇게 칭송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락(49b-53절)은 ‘과거’의 일들에 대한 감격입니다. 하느님이 ‘온 인류’에게 행해 오신 구원, 특히 보잘것없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보이신 구원의 일들을 찬미하고 기뻐합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단순화하면 한 쪽은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쪽은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잘 나간다고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었던 사람들은 낮추셨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단락(54-55절)은 ‘미래’의 일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느님이 과거에도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이스라엘’을 도우셨듯이 미래에도 약속하신 그 자비를 ‘이스라엘’에게 충실히 이어갈 것임을 찬미하고 기뻐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은” 마리아의 ‘희망의 노래’는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대림절기는 하느님께서 모든 어둠을 뚫고 우리 곁에 오고 계시다는 ‘희망’을 상기시켜줍니다. 세상이 소란한 중에도 ‘새벽빛’은 지금도 오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된 희망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하고 있습니까?

복음이야기는 우리를 ‘희망’으로 초대할 뿐 아니라 우리 서로의 ‘만남’도 성찰하도록 초대했습니다. 본래 대림절기는 ‘만남’에 대한 ‘기다림’이기에 그렇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일깨운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영원토록 우리의 귀감이 됩니다. 그 만남을 통해 불안과 두려움은 ‘기쁨’으로, 의구심은 완전한 ‘희망의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만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만남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을 통해 엘리사벳에게 ‘지혜의 눈’을 갖게 하는 착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통해 마리아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착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주인공이 ‘베들레헴’에서 곧 탄생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느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은 없다”는 희망을 상기시키는 마리아의 용감한 송가를 함께 부릅니다. 삶의 어두운 순간에도, 일의 실패와 실망 속에서도, 세상이 구제불능인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이 ‘희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말씀과 “하느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이 ‘희망의 불씨’를 계속 살려냅니다. 오늘도 우리는 아침부터 ‘서둘러’ 유다 산골 같은 이곳으로 서로를 찾아 모여 들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주님이 약속하신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간직한 희망의 불씨를 크게 되살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사벳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은 마리아를 축복했듯이 사제인 저도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모인 여러분을 축복할 것입니다. 성취되지 않을 ‘희망’이란 결코 없다고 마리아가 노래했듯이 우리도 이 시간 서로에게 ‘희망의 노래’를 들려 줄 것입니다. 이제 일어나,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희망’을 노래합시다.

복되어라.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몸이 아픈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수술 후 회복중인 홍경희(비비안나), 임스텔라, 박창언, 유복주 권사님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소방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