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6. 대림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대림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임마누엘, 이미 시작된 오래된 구원의 기초, 곧 완성될 오래된 래’입니다. 전통적으로 대림 3주일을 ‘기쁨의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전례독서들 속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빛나고 있기 때문이고, 성탄절도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중심에 ‘임마누엘’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마누엘의 기쁨으로 교회인 우리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죄악으로 인해 선이 가려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자를 보내셨나이다. 비오니, 모든 불의와 부정을 성령의 불길로 정결하게 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스바 3:14-20
  • 이사야 첫째 송가 – 이사 12:2-6
  • 2독서 – 필립 4:4-7
  • 복음서 – 루가 3:7-18

대림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임마누엘, 이미 시작된 오래된 구원의 기초, 곧 완성될 오래된 미래’입니다.

전통적으로 대림 3주일을 ‘기쁨의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전례독서들 속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빛나고 있기 때문이고, 성탄절도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기쁨의 메시지’를 대림초에 담아 시각화합니다. 기다림과 회개를 상징해 온 두 개의 짙은 ‘자색’(紫色) 초를 밝혀왔는데 오늘은 ‘밝은’ 장미색(Rose) 초 하나를 더 합니다. 본래 색채가 갖는 상징은 ‘지리와 역사, 종교와 문화, 심리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으니 지나친 의미부여는 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밝은 장미색’ 초를 하나 더 밝힘으로써 그만큼 ‘빛’이 어두운 세상에 가까이 오고 있음을 상징하는 정도로 여기면 무난하겠습니다.

이제, 참 빛이신 하느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심을 기뻐하는 성탄절을 몇 걸음 앞두고 있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도 부릅니다. ‘임마누엘’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이 선물하신 최고의 사랑 사건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구원은 ‘임마누엘’로 이미 시작되었고, ‘임마누엘’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임마누엘’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처럼 임마누엘의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종종 ‘임마누엘의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걱정, 염려로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웁니다. 현실과 환경에 대한 불평, 지나친 자책, 원망으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우울, 수치심, 패배감, 슬픔, 불안,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잘 살아야지’ 이러면서도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주변을 기웃 거리기도 합니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이들의 삶을 흉내내보기도 하지만, 어느 것도 자기다운 삶이 아니기에 결국 허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 중의 하나가 자기 안의 ‘빛’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일입니다. 이 질문이 목구멍에 탁 걸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이지 ‘어떻게’만 알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공부를 해 오면서 조금이라도 눈을 뜬 바에 따르면 진실은 이렇습니다. 좀 단순화시킨 면이 있지만,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싶지만(어떤 삶을 살고 싶지만) ‘안 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방법을 몰라서’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이것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 그 일을 하는(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방법도 수단도 알지만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즉 하고 싶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부모나 교사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명확합니다. 자녀나 제자에게 어떤 일이나 삶에 대한 ‘지식과 정보’만 줄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의 상태가 만들어지도록 돕는 일입니다. 물론 그런 상태도 결과적으로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지만 우리는 분명 상대방이 그런 일을,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의 상태가 되도록 영향력은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림절기를 순례하고 있습니다. ‘기대’, ‘기억’, ‘준비’의 시기입니다. 이 대림절기에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와 성탄 준비의 마음이 안 든다는 점이지요. 이런 삶의 진실을 꿰뚫었는지 전례독서는 ‘마음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말씀이 먼저 배정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에 해당하는 정보와 지식을 주어서 행동으로 이끄는 말씀들이 배정되었습니다. 정말 탁월한 배정입니다. 다시 말해 ‘임마누엘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걱정과 염려, 원망과 불평, 우울과 슬픔,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임마누엘의 선포로 시작합니다. 그 임마누엘의 회복이 일어나면 마음에서 감탄과 감동, 즉 기쁨이 터져 나옵니다. 그 기쁨은 감사로 표출되고, 종국에는 행동마저 바꾸어냅니다.

설교를 듣기에 앞서 오늘 들었던 전례독서를 다시금 내면에서 들어보십시오. 어떤 낯빛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고 말씀하는지 잘 들어보십시오. 하느님은 우리의 누구시고, 우리는 하느님께 누구인지 잘 들어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예비하셨는지 보십시오.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 내미시는 그 따스한 손길을 느끼십시오. 우리가 이 임마누엘을 온전히 체험한다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불평이 아니라 감사가, 불안이 아니라 평화의 울림이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이제 ‘임마누엘’이라는 이 주제어를 가지고 대림 3주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겠습니다.

1독서는 <스바니야>입니다. 예언자 ‘스바니야’(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숨기셨다, 지키셨다)는 주전 7세기 후반(BC 630년경)에 활동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은 쇠퇴하고 바빌론제국이 점점 커져가던 시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 보다는 나중이고 예레미야 예언자와는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그 위기의 시기에 예레미야에 바로 앞서 그가 예언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며 불순종한 유다 백성들, 특히 예루사렘의 정치, 종교 권력가들의 죄악을 심판하실 ‘야훼의 날’을 예언합니다(1:2-18). 사실 스바니야 예언자가 회개하라며 외치고 다닌 죄악들(2:4-3:8), 착취, 속임수, 부정부패, 탐욕, 돈을 사랑함, 우상숭배, 협박은 세례자 요한 시절이라고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큰 틀에서 복음서의 세례자 요한의 선포 배경 역할을 합니다.

스바니야가 그렇게 외치는 것이 쉬웠을까요? 그는 왕족(히즈키야 왕이 고조부입니다) 출신의 예언자입니다(스바 1:1). 그렇더라도 무서운 ‘야훼의 날’과 회개를 선포하는 그를 사람들은 ‘냉대’했을 것입니다. 그의 예언대로 회개하지 않는 유다 백성은 불과 50여 년 뒤 멸망하고 바빌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언서 후반부에 ‘희망’도 선포했습니다(스바 3:9-20). ‘기쁨’과 ‘회복’의 날입니다. 본문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다시 불러 모아지는 ‘기쁨’의 선포입니다. 학자들은 ‘보편주의’(스바 3:9-10)와 ‘새 시대의 희망’(스바 3:14-20)이 선포된다는 점을 근거로 본문이 ‘포로생활 후’에 덧붙여졌다고 주장합니다.

스바니야의 예언대로 유다는 멸망했고 그들은 바빌론에서의 오랜 포로생활 후에 귀환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루살렘을 재건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망막하기만 합니다. 그 시기에 예언자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전반부입니다(14-17절)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 스바 3:15

다른 이들은 볼 수 없지만,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된 그 ‘구원의 날’이 이미 완료된 현실처럼 보입니다. 야훼께서는 ‘원수들’을 쫓으셨고, ‘적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원문에는 “야훼께서 심판(판결)을 제거하셨고, 원수를 치우셨다”입니다. 지나간 모든 죄악은 용서받고 새로운 시대가 그들 앞에 펼쳐집니다. 이것은 분명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등극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그들 가운데 계시기에 더 이상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악’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선포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언자는 이스라엘(시온, 예루살렘)에게 지금부터 마음껏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벌이라고 명령합니다.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 스바 3:14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오시어 ‘그들’과 함께(안에) 계시는 그 구원의 날에 대한 선포입니다. 익숙한 용어로 하면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약속이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기에 오늘 복음서의 배경 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찾아오신 참 하느님이십니다(마태 1:23).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요한 1:14),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다 반대자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우리가 받을 죄의 심판이 영원히 제거되었습니다. 사흘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원수인 사망과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더 이상 불행한 삶을 ‘걱정하지’(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처럼 임마누엘은 힘이 나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언자도 현실 앞에서 망막해 하며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이 ‘임마누엘’을 믿고 “기운을 내라”(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위로합니다(스바 3:16).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은 구원하시는(승리하시는) ‘용사’이시기” 때문입니다(스바 3:17a). 이 구절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 “손에 키를 드신 분”과 상응합니다. 동시에 임마누엘은 그들이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 스바 3:17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첫돌이 갓 지났을 무렵의 자녀들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는 정말이지 그들의 모든 것이 기쁨이고, 사랑이고, 환호거리로 노래였습니다. 하느님도 ‘그들을’ 보고 크게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사랑으로 ‘그들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마치 명절이라도 된 듯이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십니다. 원문대로 하자면 “환성을 지르며 그들을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큰 소리로, 보다 정확히 문맥을 살리면, 노래를 불러주실 정도로 ‘그들은’ 하느님의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놀랍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잘 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잘 새겨들으십시오. 그들이 하느님께 예쁜 짓을 했다거나 찬미를 불러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인자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기뻐서 찬가를, 더덩실 춤을 추신답니다. 그 날이 온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이러니 그들이 기운을 내야할 이유는 명백합니다.

이어지는 후반부(18-20절)는 포로들의 귀환으로 ‘그들이’ 영예와 칭송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전반부는 화자가 예언자였는데, 후반부에서는 ‘하느님’으로 바뀝니다.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그들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하느님의 계획 속에 이미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예언의 형식으로 선포합니다. ‘그 때가 되면’, 야훼께서는 ‘그들을’ 억눌러 괴롭히던 모든 자들을 끝장내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야훼께서는 ‘장애인들’을 치유하시고, ‘길 잃은 자들’(쫓겨난 자들)을 찾아내어 고국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야훼께서는 ‘그들이’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야훼께서는 ‘그들을’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고국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야훼께서는 흩어진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시온)으로 모아들이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야훼께서는 ‘그들이’ 세상 모든 민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게 하실 것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미리 내다본 “임마누엘의 그 날, 그 때”를 놓고 고요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라는 자리에 ‘우리 교회’와 ‘자신의 이름’을 넣어도 진실입니다. 구원하시는(승리하시는) ‘용사’(스바 3:17a)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임마누엘을 잊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과대평가도 문제이지만 과소평가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스바니야의 말씀을 다시금 잘 새겨보십시오. 하느님은 우리를 보고 기뻐 반기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찬가’를 부르실 만큼 사랑과 기쁨의 대상임을 알아차리고 살아가는 이가 눈을 뜬 사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흠결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귀찮아하시거나 짜증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모든 흠결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이 더 크십니다. 굳이 세례자 요한과 관련하면 한마디 덧붙이자면, 우리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서면, 하느님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머지 침묵을 깨고 ‘기쁨의 찬가’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 오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쁨의 찬가를 부르시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해와 달과 별이 ‘신의 찬가’를 듣고 놀랍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천지창조 때도 노래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보시기에 좋다고만 느끼셨지 ‘찬미’는 천사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하신 그리스도 덕택에 우리는 하느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자녀로 돌아서는 회개를 감행할 때, 하느님은 기쁨의 찬가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성탄을 앞둔 이 대림절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들어야할 진실입니다.

성찬례에서 1독서 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인 시편을 부르는 것이 정식입니다. 하지만 다해 대림 3주일은 성무일과 ‘아침기도’에 바치는 ‘이사야 첫째 송가’(이사 12:2-6)가 고정으로 배정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송가’(canticle)가 ‘기쁨’이라고 하는 대림 3주일의 의미를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1독서에서 예언한 것처럼, ‘그 날’을 성취하러 오신 ‘임마누엘’을 향한 기쁨의 응답으로도 제격입니다. 구원하시는(승리하시는) ‘용사’(스바 3:17a)로 그 날 그들과 함께 계실 하느님을 향한 스바니야의 예언은 그의 선배인 이사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그들 가운데 힘으로, 노래로, 구원으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날을 먼저 내다보았습니다. 구원의 샘이신 분에게로 사람들이 기뻐하며 몰려오는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날 구원으로 초대된 이들이 바쳐 올릴 노래 제목은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구원의 큰 일을 행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송가입니다.

2독서는 <필립비서>입니다. 이 서신을 쓸 때 바울로는 옥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쓴 서신임에도 곳곳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1:4, 18, 25; 2:2,17-18,28; 3:1; 4:1). 본문은 필립비 교우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입니다. 그는 고난 속에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태도인지를 교훈합니다. “주님 안에서(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이라”고 당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현실에 굴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복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근거는 ‘오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곧 오시어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우리에게 ‘영원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은 “지금 여기 우리의 고난의 현실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대림절기에 이 ‘임마누엘의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처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함께 하시는 주님이 모든 일을 ‘항상’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우리 속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만 회복된다면 상황 따라 변하는 특정한 기분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이 내면에서 샘솟습니다. 그 기쁨은 ‘성령의 선물’입니다(로마 14:17; 갈라 5:22; 1데살 1:6).

이렇게 임마누엘의 믿음을 회복한 이들은 고난 속에서도 걱정으로 자신을 오염시키지 않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아룁니다.” 그러면 모든 마음을 능가하시는 ‘하느님의 평화’(로마 5:10; 2고린 5:18)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막처럼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너그러운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림: 세례자 성 요한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James Tissot,

<복음서>는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의 복음(기쁜 소식)의 선포입니다. 지난주에는 세례자 요한이 역사적 인물임을 정치 종교권력자들의 이름과 함께 제시했습니다(루가 3:1-2a). 특히 그는 구약에 예언된 인물입니다(루가 3:3-6).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삶”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여기에 이어 그의 선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곧 심판을 시행하실 메시아가 올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절박감 속에서 요르단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어서 속히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합니다(루가 3:3).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자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사의 족속”이라고 욕을 합니다.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며 독설을 퍼붓습니다. 정말 기이한 예언자입니다. 어째서 그는 귀에 듣기 좋은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그런 가혹한 욕을 했던 것일까요? 아니, 어째서 사람들은 그런 가혹한 욕을 먹으면서도 그에게로 왔던 것일까요?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그런 욕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남아있을까요?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향해 가혹한 욕을 하고 있지만 ‘진짜’ 예언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충격을 주어서라도 바르게 살도록 하려는 ‘사랑의 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닥쳐올 심판을 피하도록’ 하려는 ‘진실한 마음’을 그가 갖고 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쭉정이가 맞이하게 될 ‘닥쳐올 징벌’의 무서움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는 말은 하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과 신분을 구원의 보장처럼 믿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할례’를 구원의 특권처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구원의 조건일 수는 없다고 경고합니다. 창조의 “하느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들의 특권의식과 오만함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립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다”고 경고합니다. 그만큼 ‘심판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회개했다는 증거가 행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즉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더 이상 그들이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니, ‘나’는 회개하라는 선포를 긴장감을 가지고 듣고 있습니까? 우리가 회개를 미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일이 또 올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한 몫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요한의 진실을 알아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기분 나빠하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겸손히 묻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행실로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야 하는지 말씀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다양한 그룹은 이 시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대림절기를 지키는 우리도 그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군중’을 향한 요한의 충고입니다. 그의 충고는 너무나 쉽고 평범하며 구체적입니다. 예수님처럼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마르 10:21). 그는 “가진 것을 나누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보다 적게 가진 사람들을 돌아보라는 충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했다는 표시로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엄청난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일상 속에서 실천되는 작은 나눔이 회개의 진정성을 나타냅니다. 오늘 집에 가시면 옷장도 열어보고, 냉장고도 열어보십시오. 열어보면 회개할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리들’을 향한 요한의 충고입니다. 그의 충고는 너무나 쉽고 평범하며 구체적입니다. 세리들은 로마제국의 고용인으로 동족에게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정한 것 이상으로 세금을 징수해 일정 액수만 로마에 내고 나머지는 착복했습니다. 그 일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정한 대로만 받으라.”고 말합니다. 공정하게 자기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끝으로 ‘군인들’을 향한 요한의 충고입니다. 그의 충고는 너무나 쉽고 평범하며 구체적입니다. 군인(경찰)은 공적인 힘(권력)을 가진 공무원들입니다. 그들은 권력을 남용해 협박, 속임수 착취를 저질렀습니다. 요한은 그런 식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자기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일러줍니다. 정직하고 영예롭게 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던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의 충고는 극적이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걸어가라고 충고할 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독사의 족속”이라고 가혹하게 욕했지만 그의 진짜 마음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특히 그는 세리나 군인들에게 직업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직업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직업 안에서 정직하게 행동하라는 충고입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나 군인은 구원의 희망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전의 행실을 회개하고, 지금부터 달라진 행실을 보인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물론 요한의 충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사실, 나눔과 공정과 영예를 추구하는 삶은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탐욕과 속임수와 착취의 삶은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혹시 그가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위대하게 보이는 대신 모든 것을 예수께 돌렸습니다. 자신은 단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오실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기 본분에 맞게 주님의 오실 길을 진실한 태도로 겸손히 준비하며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대림절기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천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어둡습니다.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가짜뉴스 등으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혼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 찬가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뻐 반기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노래이고, 하느님은 우리의 노래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진정한 회개의 행실이 있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폭력, 착취, 사기, 도둑질, 협박 등등을 꼽습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지 않은 일, 사랑해야 함에도 사랑하며 살지 않은 일, 특히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지 않은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 거기에 나 자신의 소명을 실현하지 않은 일도 해당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잘못된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주님으로 인해 세상 무엇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나무라면서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속없는 놈”. 생각해 보니 참 큰 욕이자 깨달음을 주는 경고였습니다. 속이 있어야 ‘알곡’입니다. 속이 없으면 ‘쭉정이’입니다. 임마누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로 한 해를 시작한 우리가 알곡으로 충실히 여물어서 하늘 곳간에 들어가는 영원한 기쁨의 주인공이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제 마음은 준비되었나이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몸이 아픈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수술 후 회복중인 홍경희(비비안나), 임스텔라, 박창언, 유복주 권사님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소방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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