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9. 대림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대림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소명의 발견과 실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최고의 준비’입니다. 오늘 성찬례는 우리 성당축성 5주년 기념(12월 8일)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이곳에서 첫 성찬례를 드러던 봉헌의 날을 기억합니다. 그 날 주님의 성전된 우리의 삶도 함께 봉헌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주님의 성전이 되게 하신 은총의 하느님께서 언제나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시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수행하는 건강한 지역교회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성전을 봉헌한 날을 기념하며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이곳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만나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친교와 봉사를 나누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게 하소서.

구원의 하느님,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행실을 올바르게 고쳐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하시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말라 3:1-4
  • 즈가리야 송가 – 루가 1:68-79
  • 2독서 – 필립 1:3-11
  • 복음서 – 루가 3:1-6

대림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소명의 발견과 실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최고의 준비입니다.

1독서는 <말라기>에서 배정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특사’를 보내신다는 예언입니다. 그 특사는 ‘엘리야’로 묘사됩니다(말라 3:23). 루가는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밝힙니다(루가 1:17). 1독서 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인 시편을 부르는 것이 정식입니다. 하지만 다해 대림 2주일은 성무일과 ‘아침기도’에 바치는 ‘즈가리야 송가’(루가 1:68-79)가 고정으로 배정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송가가 ‘준비’라고 하는 대림 2주일의 의미를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제 즈가리야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 1:76; 3:2).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보다 앞서 와서” 오실 길을 ‘준비’하고, 백성들에게 죄용서와 구원의 길을 알리는 예언자로 쓰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 1:76-77).

“아가야, 너는 지극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 되리라” – 루가 1:76

2독서는 <필립비서>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옥중에서 보낸 서신입니다. 그는 필립비 교우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필립1:3-5). 그들은 물질로도 여러 차례 바울로를 도우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왔습니다(필립 4:15-16; 사도 18:5; 2고린 11:8-9). 바울로는 자신에게 있어서 그들이 지극한 사랑의 대상임을 전합니다(필립 1:7-8). 그러면서 그들이 복음에 충실하기를 당부합니다(필립 1:9-10a)). 그들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준비’하라고 교훈합니다(필립 1:10b).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필립 1:6b,10b)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활동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을 나열함으로써 세례자 요한과 ‘예수 사건’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확인합니다(루가 3:1). 그는 말라기의 예언처럼(말라 3:1) 하느님께서 파송하신 ‘특사’이자, 이사야 예언서(이사 40:3; 52:10)의 성취입니다(루가 3:4-5).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 구원의 소식”임을 증언하러 왔습니다(루가 1:69; 2:30; 3:6). 오시는 주님에 앞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루가 3:3).

그림: 세례자 성 요한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James Tissot,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 받을 것이다.” – 루가 3:3

이처럼 전례독서는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는 ‘대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자신의 소명을 알아차린 전형적인 인물입니다(루가 3:2). 자신이 감당해야 할 그 숭고한 ‘소명’을 종말론적으로 충실히 실현해 간 전형적인 인물입니다(루가 3:3). 대림 2, 3주일에 교회가 그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숭고한 소명을 발견하고, 이제 곧 구원 역사를 완성하러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준비하라”는 의도에서입니다.

오늘은 복음서를 기준으로 이 묵상주제를 나누겠습니다.

루가는 자신이 증언하려는 한 인물이 한낱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상상 속 인물이 아님을 명백히 합니다. 그는 역사가처럼 시기를 특정합니다. 열거된 정치, 종교 권력가들을 통해 그 시기가 주후 27년부터 29년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상기시켜주는 당대 권력가들은 하나같이 잔인하고 가혹하며,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들입니다. 이것은 유대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야파의 장인인 ‘안나스’의 이름을 대사제로 먼저 열거함으로써 그가 은퇴 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나중에 있을 십자가 사건의 주동자였음을 고발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섬긴다는 대사제들의 이름을 잔혹하고 부도덕한 권력가들과 함께 열거함으로써 그들 역시 세상권력에 관심하던 부패한 인물들이었음을 고발합니다.

그 시기에 잔혹하고 부도덕한 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 숭고한 인물이 불현 듯 등장합니다.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특사’가 되라는 부름을 받기까지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루가 1:80). 이처럼 루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활동을 세계사 속에서 신중하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오는 그곳이 ‘유대 광야’(마태 3:1)라고 특정하지만 루가는 침묵합니다. 그는 정말 ‘광야’에서 살았던 것일까요?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어떤 상징일까요?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특별한 상징입니다. ‘불붙은 떨기’ 앞에 서 있던 모세처럼(출애 3:1-12), 자유의 땅을 향해 가던 출애굽의 선조들처럼, ‘광야’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신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곳”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이후에도 구약성경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났던 장소를 ‘광야’로 특정합니다(열왕상 19:4-19).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자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떠올려주는 곳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징’은 위험합니다. 누구에게요? 제도권 종교인들, 즉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다른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기득권자들에게나 좋은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계실 분이 아닙니다. 팍팍한 삶을 사는 이들, 화려함을 자랑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밀려난 이들은 다른 세상으로 눈을 돌립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면면히 전해내려 오는 ‘광야’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 세기를 이어온 ‘광야의 상징’은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더 공고해집니다. 따라서 자신이 참 예언자임을 주장할 수 있으려면 그는 반드시 하느님이 계신 광야로부터 와야 합니다. 이것이 공관복음서 모두가 공생애 첫머리에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배치한 이유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메시아’조차도 ‘광야’에서 온다고 믿을 정도였습니다(마태 24:26).

“바로 그 무렵에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 루가 3:2

이 모든 조건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잠깐 동안 광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살아왔습니다(루가 1:80). 이것은 요한이 하느님 체험 속으로 자신을 투신하며 수행해 왔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오랜 동안 광야에서 살아 왔는데,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표현은 그에게 특별한 ‘신적 체험’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표현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그가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체험하고 만났다는 뜻입니다. 그가 선포하는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그 소명(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삶)은 잠시 후에 진술됩니다.

이제 요한은 자신이 받은 ‘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나섭니다. 루가는 요한이 “요르단 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선포했다”고 기술합니다. 이 진술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루가의 신학이 반영된 독특한 표현입니다(비교 마태 3:5, 마르 1:5)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 소명을 능동적으로 실천해 갔습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 루가 3:3b

그가 들은 ‘한 말씀’은 아주 구체적이고 명백한 메시지였습니다. 한마디로 ‘죄를 용서 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죄’가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성경에는 ‘죄’를 가리키는 말이 참 많습니다. 총칭해서 “주어진 길에서 벗어났다”로 새기면 무리가 없습니다. 어떤 길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흔히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그 소명을 ‘망각’하고(벗어나서) 살아가는 삶이 ‘죄’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길을 알려하지도 않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 삶이 ‘죄’입니다. 알았다 하더라도 그 길 위에 있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망각한 삶이 ‘죄’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로 연결 되냐면, “본래의 나를 잃어버렸다”와 똑같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죄는 ‘본래의 나’, ‘소명의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인 ‘나’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나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그 성전에 하느님이 거하셔야 하는데 하느님이 없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하나임을 잊고 분리되어 살아온 삶입니다.

“그는 요르단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선포하였다.” – 루가 3:3

그 다음 ‘회개’(μετανόια, 메타노이아)란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은 회개를 감정에 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후회나 유감처럼 말입니다. 물론 회개는 감정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회개는 감정을 넘어선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우리가 소명에서 벗어나 살아 온 일을 후회하라”거나 “유감으로 느껴라” 차원이 아닙니다. ‘회개’는 소명에서 벗어난 길에서 돌아서는 방향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며 안주해온 이기적인 세계관(신앙관)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과거와의 의도적인 단절입니다. 이기적으로 행위 해 온 자신의 오래된 자아를 과감히 버리고(자기를 비우고), 자신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자아로 대치하는 일종의 혁신입니다.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과 고집을 직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하지도 못할 지식(설명)과 정보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회개’란 당연시하며 타성에 젖어 살아온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고 지금까지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철저히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엇을 ‘기준’으로 그리 해야 하는지가 빠져 있습니다. 그 기준이란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심어주신 ‘소명’(걸어야할 인생길)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놓으신 하느님의 형상인 거룩한 씨앗입니다. 시시한 나를 넘어 위대함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씨앗입니다. 성찰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자기만이 이룰 수 있는 그 소명(거룩한 씨앗)을 발견하고 다시 회복하여 살아가는 삶이 ‘회개’입니다. 순간을 사는 우리가 나 자신의 삶을 통해 꼭 실현해야할 하느님의 요구,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의(義)가 있음을 자각하는 삶이 ‘회개’입니다.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한 하느님의 영원한 가치로 자신을 새로 보는 삶이 ‘회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소명을 찾아 나서라는 거룩한 물음, 영적 깨달음으로의 초대가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시한 삶을 살아가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위임 받고 살아가는 거룩한 존재라는 자각 없이는 진정한 회개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회개’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세례’입니다. 본래 세례는 물속에 몸을 완전히 담급니다. 물은 전통적으로 정화를 위한 중요한 의식의 도구였습니다. 혼돈을 상징하는 물에 자신의 과거의 몸을 담금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온 이전의 이기적 가치들을 모두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은 오래된 자아를 새로운 자아로 만드는 일종의 통과의례의 도구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상징입니다. 순간에서 영원에로 돌아서는 위대한 행위가 세례입니다. 자기 파괴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본능과 욕망을 넘어서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형상, 영적 가치를 회복하는 첫 걸음, 거기에 세례가 자리합니다. 나 아닌 나로 살아온 우리가 하느님의 소명 받은 나로 태어나는 그 첫 자리에 세례가 있습니다.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단지 동물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실현할 인간으로 태어나는 첫 자리가 세례입니다. 자신이 인생에서 꼭 수행해야할 가장 소중한 일, 자신이 걸어야할 자기 몫의 길, 하느님의 소명을 발견한 자의 첫 걸음이 세례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 루가 3:16

그러면 ‘죄를 용서 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활동을 루가는 어떻게 정의합니까? 그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온 것은 맞지만 ‘메시아’는 아니라고 명백히 증언 합니다. 그는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라고 하느님이 보내신 ‘특사’일 뿐입니다(사도 13:24-25). 이를 위해 루가는 ‘이사야’(40:3) 예언서를 인용합니다(루가 1:17; 3:4). 이제 그 부분을 살필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루가가 인용한 이사야 예언서를 어떻게 묵상하셨습니까? 중요한 상징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광야, 소리, 길, 골짜기, 높은 산, 작은 언덕, 굽은 길, 험한 길.” 도대체 이 상징들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저는 기도 속에서 여기 나오는 상징들이 ‘마음의 길 고르기’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여기 기록된 단어들을 바깥이 아니라 마음 안으로 가져오십시오. 우리 마음에는 주님께서 계시기에 이 모든 상징들을 통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듣는 일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사실 대림절기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성탄 메시지’를 내면에서 듣기 위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한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묻고 듣는 기간이 대림절기입니다. “주님, 올해 저희에게 주시는 성탄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주님, 올 해 저희에게 주시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한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이제부터 여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들을 ‘기도’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사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을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광야’가 유대인들에게 갖는 상징은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가 그 광야를 기도로 가져가 묻고 들으면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나의 ‘거친 마음 바닥’을 상징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있었다’는 말도 기도로 가져가면, ‘자신의 거친 마음의 바닥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은유를 통해 그 ‘거친 것들’에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들’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내 안에 들어가면 거기서 듣고 보는 ‘내면의 소리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운행하는 ‘날 것’ 그대로의 소리들, ‘생짜 감정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소리’, ‘감정의 소리’, ‘싫어하는 것들의 소리’, 이런 소리들이 ‘거친 마음 바닥’을 운행하는 중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세례자 요한’에 익숙하다보니,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하면 다 ‘좋은 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 소리들은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예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붙잡혀 살아 온 기억과 감정들, 기존의 인식, 지식, 관점들, 허상, 망상, 공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소리들을 그냥 버리면 안 되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기도’가 됩니다. 그러면 그 내면의 소리들의 ‘이면’(裏面)을 알게 됩니다. 절망이 오히려 희망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결국 긍정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죽고 싶다”는 소리나 감정이 들었다면, 그것은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잘 살고 싶어요.”라는 의미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갈망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하는 데, 그만 안타까운 시도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소리들’이 들릴 때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물으면, 그 소리들의 이면(裏面)인 ‘참된 갈망’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그 참된 갈망 때문에 그런 소리들을 말해 왔음을 기도 속에서 깨닫게 되고, 그 참된 갈망을 키워가게 됩니다.

“이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 요한 1:29

이제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이 들었던 그 모든 소리 이면(裏面)의 참된 갈망의 소리를 전해줍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주의 길’은 주님이 오실 ‘마음의 길’입니다. 그 길을 닦고 고르게 하고픈 ‘마음의 소리’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길을 어떻게 닦고, 무엇을 고르게 해야 합니까?

우선 “모든 골짜기와 높은 산, 작은 언덕”입니다. “메워지고 눕혀져야할” 이것들 때문에 마음의 길이 ‘굽은 길’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것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상징합니다. 신자들 중에는 감정과 기분을 따라 기도하거나 신앙생활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분(감정)이 나쁘면 골짜기까지 쳐 박힙니다. 그러다 기분(감정)이 좋으면 산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기도와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외쳤습니다.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언덕은 눕혀져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기도’로 가져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 속에서 ‘감정’이 ‘감동’이 될 때까지, ‘기분’이 ‘기쁨’이 될 때까지 주님께 묻고 들으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로 기분(감정)이 좋다면, 기도 속에서 주님께 그 기분을 묻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이 일로 왜 기분이 좋은가요? 이 일로 왜 기뻐하지요? 감정이 왜 이렇지요?’ 이렇게 그 기분과 감정의 일을 주님께 물어가면서 그 원인을, 그 이면(裏面)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아가야 합니다.

간혹 대화나 상담을 하다보면 어떤 중요한 순간에 피식 잘 웃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동안의 마음공부를 통해 갖게 된 성찰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자신의 불편한 진실들을 직면해야 하거나 그것들을 가리고 싶을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었습니다. 웃음이 가져다주는 ‘맹점’(모순)인데 정작 자신은 그 모순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순간들을 잘 알아차림하고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주님, 이 순간 제가 왜 피식 웃지요?… 이 웃음 이면에는 무엇이 자리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묻고 듣는 기도는 일상에서 감정을 감동으로, 기분을 기쁨으로 정돈시켜냅니다.

실제로 깊은 기도의 단계로 들어가려다 보면 오만가지 잡생각과 분심들, 잡감정이 갑자기 펼쳐지거나 떠오르는 단계들이 있습니다. 이런 단계들을 거칠 때, 기도 속에서 주님께 묻고 들어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신뢰’하는 이가 주님께 묻고 듣는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 속에서 그 생각과 감정들이 기도 속에서 정돈되는 일이 바로 주님 오실 길을 닦음이고, 길을 고르게 하는 일입니다.

“감정을 감동으로, 기분을 기쁨으로, 고행을 동행으로”

이어서 “곧아져야할 굽은 길”입니다. 이 ‘굽은 길’은 ‘고행’(苦行)을 상징합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은 ‘직선’입니다. ‘지름길’(곧은 길, 첩경)이라고 합니다. 길이 굽으면 그만큼 오래 걸리고 힘겹습니다. ‘고행’입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가는 길이 ‘고행(苦行) 길’이 됩니까? ‘혼자 가는 길’일 때 그렇습니다. 혼자가면 잘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어느 길 위에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잘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자기에게 속습니다.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빙 둘러서 돌아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굽은 길’은 머리를 써서 내 뜻대로 혼자 고집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고행 길’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그런 ‘굽은 길’을 갈 것이 아니라 ‘지름길’을 가야 합니다. ‘혼자’ 갈 것이 아니라 ‘동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름길’이고 ‘동행’입니까? ‘기도’입니다. 주님께 묻고 듣는 ‘기도’가 ‘지름길’이자 ‘동행’입니다. 주님과 같이 가야만이 빠른 길을 가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갈 때 길이 곧아지는 겁니다. 하지만 ‘굽은 길’은 혼자 가는 길이고, 고행 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마음의 굽은 길’을 ‘곧은 길’로, ‘혼자 가던 길’을 ‘동행의 길’로 바꾸라 외칩니다.

마지막으로 “고르게 해야 할 험한 길”입니다. ‘험한 길’은 ‘상처가 많은 마음’을 상징합니다. 사실 상처가 많으면 길을 가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제 잘난 상담가라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너무 큰 사람, 즉 과거의 상처가 너무 큰 사람을 치유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지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사람을 치유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 상처에 대해 주님께 묻고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까지도 치유하시고 새로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3년후에도, 1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5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영원에 이르도록 의미가 있을까?”

이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시작하는 이사야 본문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 고르기’입니다. 자기 ‘가슴’으로 들어가는 ‘길 고르기’입니다. 감동과 기쁨, 감탄이 있는 가슴으로 살아가려면 우선 머리로부터 출애굽 해야 합니다. 본래 감정이나 기분은 가슴의 세계에 속합니다. 그런데 감정과 기분은 다른 것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이란 대부분 ‘과거의 기억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정이나 기분은 대부분 ‘과거의 사건들’에 휘둘립니다. 그래서 성탄일이 오기 전에, 다시 말해 이 대림절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호구조사’입니다(루가 2:1). 호구조사령이 내려지자 요셉과 마리아도 그때까지 살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루가 2:4). 이것은 자기감정과 기분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그 근원이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지 ‘일생 돌아보기’를 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뿌리를 다시 한 번 보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신이 붙잡혀 있는 그 감정이나 기분을 가지고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주님, 제 자신을 보여주세요. 이 감정(기분)은 뭡니까?” 그것이 기쁨의 감정이든, 슬픔의 감정이든 주님께 다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하는 진짜 중요한 이유는 ‘성탄 메시지’를 듣기 위함입니다. 그 메시지를 들어야 대림절기로 시작한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를 듣지 못하면, 그 듣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 시작한 올 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 농사를 짓기 위한 이 중대한 준비, 즉 ‘성탄 메시지’를 듣는 일과 관련된 본문이 오늘 이사야 예언서의 “광야의 소리”인 셈입니다.

대림절기를 살아가는 동안 틈틈이 묻고 들으십시오. “주님, 지금 제게 있어서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주님, 지금 제게 있어서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무엇입니까?… 제가 가진 어떤 관점이 굽어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주님께 물으면 우리는 분명 ‘한 말씀’ 듣고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이런 것을 곧게 보지 못하고 휘어서 보고 있구나…. 아, 내가 이런 것을 반듯하게 보지 못하고, 굽어서 보고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그 마음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면, 다시 말해 주님이 마음에 오시면, 모든 사람(내 안에 통합되지 못한 채 분열된 자아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는 소명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세례자 요한은 누구여야 합니까? 우리여야 합니다. 그는 자기 소명을 발견한 준비된 광야의 목소리였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자신을 준비해 가고 있습니까? 대림 2주일과 3주일 복음서는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 요르단강에서의 세례자 요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슨 의도로 두 주간에 걸쳐서 세례자 요한을 묵상하게 하는 것입니까? 고행에 가까운 그의 기인다운 남다른 수행 태도 때문입니까? 아니면 기득권에 저항하는 그의 반문화적인 태도를 존경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두 주간에 걸쳐서 그의 삶을 묵상하는 이유는 그가 ‘소명을 발견한 사람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소명이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삶이, 그의 소명이 의미 있는 이유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기에 예수님과 연결된 나 자신의 삶을 다시금 상기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 소명을 향해 새로 출발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또 한 사람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대림 2주간 사도 바울로의 기도처럼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할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되는 ‘준비’를 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들도 정성 모아 주님 맞을 준비하세
하느님이 계실 곳을 내 맘 속에 마련하세
– 성가 138장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몸이 아픈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수술 후 회복중인 홍경희(비비안나), 임스텔라, 박창언, 유복주 권사님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소방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