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 2. 대림1주일

  • by

오늘의 기도지향

대림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려라’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다해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4개의 대림초를 준비하여 매주일 한 개씩 차례대로 밝히며 올바른 마음으로 기쁜 성탄을 준비하게 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항상 깨어 기다리는 삶으로 안내합니다. 우리가 이 기억과 기다림의 순례길을 지금 여기서부터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밤이 깊을수록 새 아침이 더 가까워지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항상 깨어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경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33:14-16
  • 시편 – 25:1-10
  • 2독서 – 1데살 3:9-13
  • 복음서 – 루가 21:25-36

대림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려라’입니다.

교회력(전례력)으로 한 해를 출발하는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待臨, Advent)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본래 Advent는 그리스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에서 유래합니다.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특정한 장소에 ‘실물로’ 모습을 나타내어 함께 있는 ‘현존’(presence), ‘도착’(arrival)을 가리키는 말입니다(2고린 7:6; 10:10; 필립 1:26). 문자 그대로 중요한 존재가 몸으로 직접 출현하여 함께 있는 ‘공식적 방문’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강림)’을 가리킬 때는 꼭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마태 24:3; 1고린 15:23; 1데살 2:19; 3:13; 4:15; 5:23; 2데살 2:1,8; 야고 5:7-8; 2베드 1:16; 3:4; 1요한 2:28). 이처럼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현존’, ‘출현’, ‘도착’, ‘방문’, ‘재림’의 다양한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단어에 주목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재림뿐 아니라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까지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풍부한 뜻을 갖는 그리스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가 라틴어 ‘adventus’를 거쳐 영어 ‘advent’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advent’(출현, 도래)를 그리스도가 다시 임하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의 ‘대림’(待臨)으로 번역하여 사용합니다. 대체로 ‘성탄절기’가 시작되기 전 4주간으로 11월 30일에 가까운 주일부터 12월 24일까지 계속됩니다.

교회력은 두 큰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활일’과 ‘성탄일’입니다. 이 두 축일을 기준으로 앞에 영적 준비기간을 두었습니다. 사순절기와 대림절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영적 준비기간인 이 두 절기는 ‘참회’(금식, 기도)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대림절기는 참회뿐 아니라 ‘기쁨’이라는 요소가 준비에 추가됩니다. 그것은 대림절기가 두 사건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첫 번째 오심인 ‘성탄’(성육신)이고 다른 하나는 ‘재림’입니다.

우리는 대림절기에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인 성탄을 ‘기억’하고 기쁨(기대, 희망)으로 준비합니다. 또한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희망)하고 사순절기처럼 참회 속에서 ‘준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을 대림절기에 ‘기억’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미 시작하신 그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러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착’을 ‘기대’합니다.

이처럼 기억과 기대가 대림절기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이 메시지가 대림절기의 본질입니다. 실제로 대림절기 동안 전례독서들도 이 두 요소의 균형에 주안점을 두어 배정되었습니다. 전반부인 대림 1,2주일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날에 대한 ‘기대’를 보다 중점적으로 묵상합니다. 후반부인 대림 3,4주일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기억’을 보다 중점적으로 묵상합니다. 심판하러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약속)하는 독서들,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는 구약의 예언(약속)들, 세례자 요한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복음서의 본문들이 배정되고 있습니다.

이제 ‘기다림’의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기에 교회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됩니다. 그들은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될 날을 고대했습니다. 선조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은혜의 하느님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다시금 그들을 위해 행동하실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교회도 죄와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에 마치 포로처럼 존재합니다. 교회는 이런 세상 속에서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교회를 위해 행동에 나서실 것을 부르짖습니다. 이 불의한 세상을 끝내고 이미 시작하신 그 영원한 왕국, 즉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실 그 마지막 날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기다림의 기도를 가장 잘 표현한 찬미가 “임하소서. 말씀의 하느님. 온 천하 만민 구원하소서.”로 시작하는 성가 139장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 기다림을 시각화하여 4개의 대림초에 담았습니다. 제단에 대림초를 준비하고 매주일 한 개씩 차례대로 밝혀 갑니다. 우리의 참 빛, 우리의 참 희망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억하고 기쁨으로 준비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이사 9:1-2). 또한 천사들이 전해 준 대로 날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항상 깨어 기다리게 하려는 의도입니다(사도 1:11). 우리는 대림초를 보면서 번잡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주님의 사랑과 기쁨이 지펴져야 한다는 진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는 이 기다림의 순례길을 지금 여기서부터 잘 걸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대림 1주일의 전례독서를 살필 차례입니다.

1독서는 <예레미야>입니다. ‘눈물의 예언자’로 알려진 예레미야가 암울한 시절을 살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다윗의 정통 왕손(메시아)을 일으켜줄 새 언약의 날”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오시어 세상에 ‘올바른 정치’(공정한 심판과 정의)를 펼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분이 어서 속히 오시어 구원의 새 세상을 완성해 주시기를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립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선포하는 복음서와 상응(相應)합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7세기 후반 ‘요시아’ 왕 때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후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에 이르는 4명의 ‘악한 왕’들을 거쳐 유다가 멸망한 6세기 초까지 약 40년 간 활동했습니다(예레 1:1-3; 열왕하 21-25장). 그 시기는 ‘바빌론제국’이 고대 근동의 최강국으로 자리잡아가던 무렵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집트, 바빌론, 기타 주변국들 사이에서 ‘정치력’을 발휘해 살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멸을 애도하는 예레미야> Rembrandt, 1630

예레미야는 민족의 살 길이 정치적 외교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정신’(신명 8:11-20; 27장; 28:15-68; 29:22-28)에 입각해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생활태도를 고치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다시 말해 “거짓 예배, 우상숭배라는 허영과 변절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손에 있는 심판 (예레 4-6장), 즉 바빌론이 유다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고된 재앙(예레 25:9-11)을 면하는 길이었습니다(예레 26:3,13). 하지만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예언자를 ‘매국노’ 취급하며 박해했습니다(예레 26:8-9). ‘여호야킴’ 통치시절 그는 예언자 ‘우리야’처럼 죽을 위협에 처했지만(예레 26:20-23), 사반의 아들 ‘아히캄’이 편을 들어주어 겨우 죽음을 면했습니다(예레 26:24).

이후에도 예레미야는 일관되게 ‘친(親)바빌론’적인 선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을 돌이키기 위해 바빌론을 ‘종’으로 사용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예레 25:9; 27:6-22). 비가 올 때는 처마 끝에서 잠시 쉬어가야 하듯이, ‘바빌론의 우산’ 속에 들어가서라도(바빌론의 ‘멍에’를 메고서라도) 나라가 보호받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외치고 다녔습니다. ‘여호야킴’은 그 충고를 무시하고 바빌론에 반기를 들다 민족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열왕하 24:1,10-11). 그 때(주전 597년) 유다의 첫 번째 귀양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열왕하 24:13-16). 바빌론은 ‘가난한 지방민’(영세민)만 남겨두고 예루살렘 전 시민과 고관들, 군인들, 기술자들을 다 사로잡아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열왕하 24:14-16).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요시아의 셋째 아들인 ‘시드키야’를 유다 지방을 다스릴 왕으로 세웠습니다(열왕하 24:17). 그러나 그 역시 ‘이집트’를 믿고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습니다(열왕하 24:20). 그의 신하들은 바빌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 외치고 다니던 예레미야를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습니다(예레 37:15). ‘시드키야’는 오랫동안 갇혀 있던 그를 구해 궁궐 근위대 울(뜰) 안에서 지내게 가두었습니다(예레 32:2; 37:21). 감금입니다. 예레미야가 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안 신하들은 백성과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죄인이라면서 왕의 허락을 얻어 그를 물 없는 진흙구덩이에 가두어 굶어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시드키야’는 그를 다시 구해 근위대 울 안에서 지내게 합니다. 그 즈음에 10년 전처럼,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城)을 포위하고 사면에 토성을 쌓았습니다(예레 32:1).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암울한 시기입니다.

그 암울한 시기에 ‘시드키야’는 근위대 울 안에 감금되어 있던 예례미야를 불러다 ‘비밀대화’를 시도합니다(예레 38:14-26). 자신과 나라의 장래를 물어봅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재차 그에게 충고합니다(예레 38:17). 하지만 후환이 두려웠던 그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거절했고(예레 38:19) 끝내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예레 39:4-7).

이처럼 유다의 마지막이 당도한 그 ‘암울한 시기’, 정확히 말하면 비밀대화가 있기 1년 전, 근위대의 울 안에 감금되어 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 내렸습니다(예레 33:1). 분명 유다는 망하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될 것입니다(예레 33:4-5,10).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놀랍게도 ‘희망의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서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시고 다시 싱싱한 도읍지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시민들이 해방되어 참 평화를 누리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예레 33:6; 예레 29:10). 새 언약의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신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 술렁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천하만민에게 찬양과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예레 33:9, 11).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에 놀라운 ‘회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예레 33:12-13). 여기까지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희망의 메시지, 즉 ‘회복의 약속’(약속한 복)으로 1독서의 배경입니다.

본문(예레 33:14-16)은 ‘위로의 책’(30-33장)이라 불리는 장의 두 번째(32-33장)의 후반부에 위치합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복(회복의 약속)이 ‘실현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축복의 선포로 시작합니다(14절). 일종의 ‘새 언약이 성취될 날’의 선포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오늘 본문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70인역’에 이 ‘새 언약이 성취될 날’에 해당하는 본문이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새 언약의 완성은 약속된 사람, 즉 ‘다윗의 왕손’(의로운 가지)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다윗의 정통 왕손”(참목자, 의로운 가지, 햇순)을 일으킬 날을 이미 약속해 주셨습니다(예레 23:4-5a; 이사 4:2; 11:1; 즈가 3:8; 6:12). 그 왕은 이전의 왕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일 것입니다. 이전의 유다 왕들(특히 여호야킴과 시드키야)은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일으키실 “다윗의 정통 왕손”(메시아)은 현명한 왕으로서 유다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세상에 ‘올바른 정치’(공정한 심판과 정의)를 펼 것입니다(예레 23:5b).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 놓고 살게 될 것입니다(예레 23:6). 이 ‘새 언약이 성취될 날’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해 있는 현재의 그 황폐한 상태와는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을 ‘보장’하신다는 차원에서 오늘 본문에서 한 번 더 반복해 강조하십니다.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줄 그 날, 그 때가 온다. 그는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다. 그 날 유다는 살 길이 열려 예루살렘에서는 모두들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 그 때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가리켜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셨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 예레 33:14-16

이 ‘약속한 복이 성취되는 새 언약의 날’,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야훼 싣케누’(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셨음)라 부를 것입니다(대조, 예레미야 23장 6절에서는 ‘다윗의 정통 왕손’이 그렇게 불렸습니다). 쉽게 말해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평화의 도성’이라 불릴 것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될 날과 그 약속을 성취할 왕(메시아)이 오실 것이라는 희망을 그 암울한 시절에 선포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 약속의 날을 굳게 믿고 기다리며 암울한 시절을 견디어내야 합니다. 포로민들도 그 약속의 날을 성취하러 오실 메시아의 탄생을 굳게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역사에서 이 ‘회복의 약속’은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그들은 돌아올 수 있었고(예레 25:8-11; 29:10), 성전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에즈 6:1-18).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하신 복’은 부분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왕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다시 말해 하느님의 새 언약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왕은 누구입니까?

사실 구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새 언약을 성취하러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그 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로마 1:3-4).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완전히 실현하신 ‘새 언약’의 왕이십니다.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참 많은 상징들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만큼은 아니지만 <예레미야>에도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는 많은 상징들이 등장합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생수의 샘(예레 2:14), 참 목자(예레 23:4), 다윗의 정통 왕손(의로운 가지, 예레 23:5), 우리를 되살려주셨음(원문에는 주 우리의 공의(Righteousness), 예레 23:6), 내가 세워줄 다윗왕(예레 30:9), 구원자(예레 50:34) 등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들입니다.

시편 25편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다윗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중간에 약간의 불규칙이 있지만, 각 절의 첫 머리는 9, 10, 25, 34, 37, 111, 112, 118, 145편처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작됩니다. 원수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다윗은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영혼을 우러릅니다(1-2절). 동족들로부터 ‘매국노’라고 고발당하여 근위대 울 안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의 탄원을 듣는 듯합니다.

이제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께 간청합니다(3-5절). 지금 너무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하느님께서 길을 가리켜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특히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3절)과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5절b)가 대림절기와 어울립니다.

이어서 하느님이 기억해주시기를, 그리고 잊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6-7절). 무엇을 기억해 달라는 간청합니까? 영원 전부터 있었던 변함없는 그 ‘크신 자비’와 ‘약속해 주신 한결 같은 사랑’은 기억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그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시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금 베풀어달라는 간청입니다. 대단한 겸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공로를 하느님이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기초해 자신이 기억되기를 간청했습니다(7절b).

또 무엇을 잊어주시라 간청합니까? 젊어서 저지른 잘못과 죄입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양심에는 여전히 젊어서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회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림절기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회개’를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그 크신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는 순간,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신실하신 하느님이 그 크신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시는 순간 우리의 죄는 용서됩니다.

끝으로 시인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올바르심을 찬미합니다(8-10절). 하느님은 죄인들을 멸망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은 죄인들이 가던 길을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시기를 더 좋아하십니다(8절).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은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9절). 다윗은 이 같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사랑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10절). 다시 말해 대림절기의 주제처럼, 다시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과 말씀’을 믿고,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이에게는 ‘모든 것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계속해서 보게 해 주십니다. 주님의 약속과 말씀 안에 거하는 이는 삶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대림절기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모두 그런 축복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2독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처음으로(주후 50년경) 쓰인 사도 바울로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세운 데살로니카 교회의 소식을 알기 위해 ‘디모테오’와 ‘실라’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1데살 3:6-8). 그 소식을 듣고 바울로는 기뻐하고 감사하면서(9절)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 속에 데살로니카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을 담았습니다. 본문은 그 감사의 요약과 더불어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제일 중요한 주제 물음중 하나인 ‘재림’과 관련됩니다(13절).

먼저 사도 바울로는 기쁨과 감사를 표한 후(9절),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10-12절). 편지도 도움이 되겠지만 자신의 방문이 훨씬 더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서였습니다(10절). 데살로니카교회가 사랑이 없는 교회가 아니었음에도 바울로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임을 강조합니다(12절).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도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표시임을 이미 가르쳤습니다(요한 13:35, 1요일 4:20). 특히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1데살 2:8)라고 언급함으로써 자신을 본받을만한 ‘사랑의 표준’처럼 제시합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로는 열렬히 데살로니카교회를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본문이 대림1주일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가 드러납니다(1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천사들) 함께 다시 오시는 날,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서와 상응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기도를 통해 대림절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배웁니다. 다시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자기의 삶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것 말고 그 무엇도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의 열망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들은 세상과 구별(분리)된 삶을 삽니다.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죄와 이기적 자아와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삽니다.

오늘날도 사도 바울로의 기도는 유효합니다. 그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방문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사도만이 줄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과 지혜, 위로와 격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기 살아가는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지혜, 위로와 격려의 영향력 하에 있어야 합니다. 그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삶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생활입니다. 비록 사도들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들의 가르침과 지혜, 위로와 격려는 여전히 우리 곁에 신약성경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가르침과 지혜, 위로와 격려를 신약성경 안에 보존하셨다고 믿습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교회 역사에서 사도들이 갖는 특별한 위치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 에페 2:20

또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주춧돌이 있었는데 그 주춧돌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 묵시 21:14

또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대림절기에 소홀히 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A.D. 70,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하다”, David Roverts

이제 복음서를 살필 차례입니다.

교회력을 시작하는 첫날 복음서로 공교롭게도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루가복음 21장은 복음서의 ‘소묵시록’(마태 24장, 루가 12장)이라 불리는 마르코복음 13장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나해 연중 33주일에 ‘사후 예언’에 해당하는 마르코복음 13장을 전체적으로 개괄한 바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미 실현된 과거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단 하나의 예언만 빼고 말입니다. 오늘은 ‘기도’라는 관점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 하나의 예언, 즉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루가 21:25-26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날을 ‘역사의 종말’로 동일시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지만 천체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은 ‘성전체제의 종말’일진 몰라도 ‘역사의 종말’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또 수많은 세대가 왔다가 사라졌지만 ‘세상의 종말’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때는 언제일까요?”

먼저 예수께서는 ‘그 때’를 예루살렘 멸망의 날로 특정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멸망은 종말에 내리실 하느님의 심판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더욱이 ‘그 날’(역사의 종말)을 예수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못 박았다는(마르 13:32; 마태 24:36) 사실은 미래의 어느 시기로만 ‘종말의 날’을 한정할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이, 지금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종말론적인 시간’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누구나 살면서 더 이상 해와 달과 별이 빛나지 않는 것 같고, 사납게 날 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며, 우주가 붕괴되는 것 같은 ‘어두운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숨은 쉬고 있으나 사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자기 존재가 온통 파괴되는 것 같은 실존적 고독,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감정적 ‘우울’ 상태를 겪습니다. 질병, 실직, 꿈꾸었던 일의 실패, 이혼, 이별, 사별 등 ‘어둡고 힘든’ 종말론적 순간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피하고 싶어 하지만 겪게 되는 순간들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바깥세상은 ‘불안’합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자연재해, 지진, 전염병, 테러, 전쟁,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삶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학교도, 일터도, 사회도, 국가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나만 잘하면, 우리 가족만 잘하면, 안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이상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국가재난시스템’은 불안합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땅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교회에게는 그 순간들이 전혀 다른 의미의 순간들입니다. 그 모든 어둡고 힘든 부정적 순간들은 또한 ‘사람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시는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어두운 왕국 안에 ‘오늘’ 침입해 들어오시면, ‘진실’이신 주님이 ‘지금’ 우리 마음의 성전에 당도하시면, 내 마음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징조’들이 있습니다.

나의 실상과 망상, 진상과 허상, 참과 거짓이이 대판거리로 싸우는 ‘전쟁 상태’가 벌어집니다. 새 세계관이 옛 세계관에 맞서는 ‘반란 상태’가 됩니다. 기존의 이해와 새로운 앎이 서로 문제를 일으키고 ‘충돌’하는 상태입니다. 그동안 자신을 안전하게 구축해왔던 ‘토대’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자신을 지탱해 왔던 ‘기존의 인식’(관점)들이 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진 상태’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즐겨 먹어왔던 ‘음식’(돈, 권력, 명예, 성, 마약, 술 등등)이 더 이상 먹을 양식이 되지 않는 ‘기근(흉년) 상태’입니다. 그 음식이 진짜 먹어야할 음식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그런 가짜들로부터는 먹을 수 없음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 가짜들이 더 이상 자기 인생의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되찾은 작은 아들처럼’(루가 15:11-32) 말입니다. 빛의 세계관이 어둠의 세계관에 퍼지기 시작하는 일종의 ‘전염병 상태’입니다.

내 마음의 우주에서 일어나는 이런 엄청난 징조들은 주님이 당도하시어 이 우주를 정리하시는 때입니다. 어둠이 가장 짙었을 때가 새벽빛이 오는 시점이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둠처럼 느껴지고 절망과 좌절이라고 느껴지는 그 혼란의 순간이, 그 부정적 순간이, 우리 속에 주님이 오시어 이미 활동하시는 순간입니다. 사실 긍정으로 어떤 사건이 표현될 때는 누구나 쉽게 다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느낌(감정)으로 그 사건이 다가왔을 때는 그것의 진짜 이면(裏面)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둠의 신비를 읽을 수 있는 눈을 떠가기 위해 성령께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주님이 오시는 그 때)가 오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도 같은 것을 말하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주님은 피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껍데기를 벗기면 다 같은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주님은 그렇게 다르게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의지해 온 ‘기존의 지식들’이 박살난다는 뜻입니다. ‘태양’은 항성으로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태양계 빛의 근원입니다. 반면에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어둠이고 거울처럼 태양 빛을 반사합니다. 따라서 철학자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면 ‘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의지해 왔던 가장 ‘환한 지식’을 상징합니다. ‘달’은 태양이 주는 빛을 받아 내 안에서 만들어 낸 ‘지혜’를 상징합니다.

쉽게 말하면 ‘해’는 직접적인 인식이고, 달은 간접적인 인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특히 여성) 달에 가깝습니다. 인간도 달처럼 ‘빛’(지식)을 받아들여서 자기의 빛(지혜)으로 만들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바깥세상으로부터 ‘지식’과 ‘정보’를 제공받으면 그것을 식혀서 내 안에서 ‘지혜’로 만들어냅니다. 물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지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해’는 일종의 지식과 정보이고, 우리는 그것을 내 안의 ‘어둠’ 속으로 가져와 식힌 후에 나의 빛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습니다.

‘별’도 일종의 ‘작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좀 더 풀면 우리가 반짝이는 별을 보는 순간은 세상을 보는 눈이 내 속에서 떠지는 순간으로 지혜라는 하나의 ‘관점’을 얻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깨닫고 눈을 뜨는 그 순간은 마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보듯이 ‘아, 이것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라고 우리 속에서 ‘하나의 관점’이 반짝 터득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주님이 오시면 유한한 세상을 사는 데나 필요로 되었던 ‘기존의’ 나의 지식과 지혜와 관점들은 박살납니다. 죽어야할 운명 앞에서는, 영원 앞에서는 아무 힘도 없다는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된 상태를 상징적으로 ‘모름’, ‘없음’, ‘비움’,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앎의 종말 상태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관점을 내려놓고 ‘기도’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말로 ‘비움’입니다. 자신을 구원하는 ‘한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가장 낮아짐의 자리인 ‘묻고 듣는’ 기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모름’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분이 우리를 채워주시는 생명의 일을 창조하십니다. 그것을 복음서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구름도 ‘무지’(모름)를 상징합니다. 구름은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모름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무지하고, 모르기에 기도합니다.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변질은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무지’, ‘모름’이라고 하는 ‘기도’ 속에 들어갈 때 비로소 주님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무지’, ‘모름’, ‘비움’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출발입니다. ‘모름’이라고 하는 그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이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느님 나라는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가 17:21). 주님의 통치를 받는 ‘우리 마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이 우리 바깥 어디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 된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옵니다. 감동과 감탄과 경이로움이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기존의 지식과 지혜와 관점에서 얻었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기쁨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세상 그 누구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오직 체험하는 그 사람만이 살아가는 경지입니다. 비움의 일치이기 때문에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기존의’ 나의 지식과 지혜와 관점은 전혀 새롭게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신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이냐? – 루가 20:17b

그렇습니다. 나의 기존의 것이 다 부서지는 종말을 맞더라도 주님은 거기에서 돌을 취하시는 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기존의 지식도 지혜도 관점도 다른 방식으로 모양을 만들어 가시는 주님입니다. 나를 새롭게 쓰십니다. 주님은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지어 가십니다. 결국 종말이란 뭡니까? ‘옛 세상’이 끝나는 것입니다. 기존의 지식과 기존의 질서와 기존의 사고가 다 끝나는 겁니다. 다른 질서로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새 하늘, 새 땅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루가’가 바라본 것처럼 우리에게서 ‘사도행전’이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루가 21:29-33) 그 때의 징조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세상의 종말, 즉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 알라는 교훈입니다. 삶의 밝은 순간만이 아니라 삶의 어둡고 힘든 종말론적 시간들도 빛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왕국에 당도하시어 당신의 나라로 변화시키시는 종말의 징조임을 알아차리라는 뜻입니다.

끝으로 복음서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할지 교훈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34절). 흥청대지 말 것, 술 취하지 말 것,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 것입니다. 하나같이 우리 자신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일들은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뜨릴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걱정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걱정합니까? 재정 상태에 대해 걱정합니까? 자녀들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게 될지 걱정합니까? 암이라도 걸리면 어쩌지 건강 걱정을 합니까? 전쟁이 일어날까봐 걱정합니까?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환경오염을 걱정합니까? 미래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걱정합니까? 사실 고민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이 우리 마음을 빼앗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걱정은 우리가 가진 기쁨을 날려버립니다. 문제 해결 능력을 떨어뜨리고 우리 눈을 가려버립니다.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마비시킵니다.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이 갑자기 덫처럼 들이닥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눈을 뜨고서 보는 사람은 누구나 덫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는 사람,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은 덫에 걸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는 사람이 되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도하는 삶을 통해 자신이 그런 재난의 일을 피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마치 출애굽 전 날 마지막 재앙을 피했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말씀으로써 우리가 다가오는 재난을 굳이 겪을 필요가 없음을 복음으로 선포하십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 종말의 재난이 시작되기 전에 늘 깨어 기도로 준비한 당신의 사람들은 재난을 겪을 필요가 없기에 데려가실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파괴예고를 듣고 복종했던 사람들은 그 도시에 들이닥친 끔찍한 파괴를 피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루가 21:20-21). 분명 온 세상에 닥쳐오는 대재앙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다가올 끔찍한 파괴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미래를 궁금해 하면서도 희망과 기대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림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기다립니다. 대림은 기쁨을 주는 이미 알려진 기대와 함께 희망합니다. 하지만 걱정은 대림의 반대입니다. 걱정은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고민합니다. 대림과 걱정 둘 다 미래를 바라봅니다. 대림은 기쁨에 넘쳐 기도 속에서 바라봅니다. 걱정은 두려움 속에서 바라봅니다. 우리가 겪는 어둠과 혼돈의 일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 삶에는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온전히 이 마음을 기도로 주님께 내어드리면 우리는 구원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오시는지 보십시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몸이 아픈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별히 독감으로 고생하는 류호정(니콜라), 류호운(세실리아), 김계연(루시아)교우님과 수술 후 회복중인 홍경희(비비안나), 임스텔라, 박창언, 유복주 권사님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3일(월) 서울대에서 중요한 발표를 하는 류상윤(베다)교우에게 주님께서 지혜와 건강주시고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합시다.
  7.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소방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