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25. 연중12주일 / 맥추감사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2주일이며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올 상반기 동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가족과 일터를 지켜주시며 소득을 얻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바쳐 올립시다. 또한 오늘은 한국전쟁 6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남북이 오랜 적대관계를 끝내고 용서와 화해, 협력과 평화 통일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러 한국전쟁 중 순교한 분들, 마리아 클라라 수녀, 윤달용 모세 신부, 조용호 디모데 신부, 이원창 미카엘 신부, 찰스 헌트 신부, 윌리엄 리 신부님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인자하신 하느님,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나이다. 비오니, 이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마음과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계절에 따라 우리에게 땅의 소출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삶이 어려울 때에는 변함없는 주님의 은혜를 신뢰하게 하시고, 풍요로울 때에는 힘겨웠던 시절을 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감사성찬례 본문

성서정과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1:8-21
  • 시편 – 86:1-10,16-17
  • 2독서 – 로마 6:1-11
  • 복음서 – 마태 10:24-39

여러분의 유아 시절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몇 살 때 젖을 떼셨다고 들었습니까? 초등학교 시절 가장 걱정스럽고 힘들었던 날은 언제였습니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저는 제법 늦게 젖을 뗐다고 합니다. 옆구리까지 불러와야 먹는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아마 젖을 떼기 위해 쓴 약을 발랐을지도 모릅니다. 안 그러면 어머니 젖에서 결코 손을 놓지 않으려 했겠지요. 초등학교 시절 가장 걱정스럽고 힘들었던 날은 부모님이 싸우신 날입니다. 그런 날이면 싸우는 이유가 저인 것 같아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꼭 어딘가 진짜 부모님이 계시다가 데리러 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동경(憧憬)을 갖기도 했습니다. 자녀 앞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부 싸움입니다.

오늘 창세기에도 ‘이유기’(離乳期)와 ‘부부싸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아이가 대략 3살 무렵이 되면 젖을 뗐습니다(마카베오하 7:27). 젖을 떼면 새로운 발달 시기로 들어가기에 가정마다 큰 잔치를 베푸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또 다른 가족이 있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그들은 모자(母子)입니다. 하늘과 땅만큼의 신분상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갈은 이집트 노예출신으로 사라라는 주인을 섬기지만, 이스마엘은 언젠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상속을 받아 차세대 주인이 될 인물이었습니다. 한 가족이지만 이런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라는 나이에 하느님의 약속을 받고 가족과 함께 자기 삶의 근거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불임이었습니다. 당시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저주였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불임을 몸종인 하갈을 통해 해결하려 했습니다(창세 16:2). 입에 올리기 민망한 말이지만 하갈은 이제 소실(小室), 즉 ‘첩’(妾)이 되었습니다. 고대근동에서 첩(妾)의 역할은 ‘아들 상속자’를 낳는 일입니다. 비록 첩이 낳았다 하더라도 아들은 합법적으로 정실(正室)의 상속자가 되던 시절입니다.

Image: "Sarah Leading Hagar to Abraham" by Matthias Stom (1600-1652)

“Sarah Leading Hagar to Abraham” by Matthias Stom (1600-1652)

하갈은 태기(胎氣)를 느끼자 사라를 업신여기는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갈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소연 합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몸종’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남편에게서 힘을 얻은 사라가 이번에는 하갈을 ‘박대’합니다. 견디다 못한 하갈은 집을 뛰쳐나갑니다(창세 16:4-6). 아무런 감정 묘사 없이 덤덤히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하갈의 가련한 눈물과 서러움이 더 실감나게 전해옵니다.

임신부로 내쫓긴 하갈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길을 잃고 헤매는 인생입니다. 창세기 1장 첫 이야기에서 보았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이 하갈에게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의 천사, 즉 하느님이 나타나십니다. 하느님은 질문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하갈처럼 갈 길을 몰라 눈물 흘리며, 괴로운 시절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몰린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삶의 전체 진실인 것만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한 줄기 빛처럼 그런 우리를 방문하시어 말을 걸어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 창세 16:8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이 말씀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담긴 질문입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숨어든 ‘아담’을 떠올릴 것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과연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인생이 몇이나 될까요? 지금 하느님은 주소지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 질문’이 여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한 질문의 답을 얻고자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수행하는 이들이 오늘도 있습니다.

제가 춘천교회에 근무할 때, 지인 중에 한 분이 춘천 불교방송 PD를 소개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분도 불교 수행자 출신이었는데, 초대해 성당 텃밭에서 기르던 푸성귀로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대화중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그 분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 나눠봅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수행자들의 ‘하안거’(夏安居)가 끝났습니다. 자신들의 수행처로 돌아가는 수행자들의 길을 막고 큰 스님께서 차례로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어디로 가는고?” 어떤 수행자는 “전라도 구례로 갑니다.” 또 어떤 수행자는 “충청도 공주로 갑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대답하더랍니다. 큰 스님은 혀를 끌끌 차면서 다들 멀었다 야단하시더랍니다. 스님은 행선지를 물었던 것이 아니지요. 화두(話頭)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리나 성직자로부터 얻는 대답 말고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께 할 수 있는 대답이 있습니까?

드디어 하갈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의 자기 존재인식입니다. 하갈은 정직합니다. 숨김이 없습니다. 사실, 세상 모든 임산부는 정직합니다. 태중의 아기가 거짓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답 속에서 예언자 요나가 보입니다. 하느님의 눈앞을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하며 다르싯으로 도망가던 요나 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요나는 스스로 도망자가 되기로 선택했다는 점이고, 하갈은 타인에 의해 그리됐다는 점입니다.

요나에게 따라가신 하느님은 하갈에게도 따라가시어 말을 거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생명’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갈 때문일 수도 있고, 태중의 아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소수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생명’의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는지 성찰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갈은 하느님으로부터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대답을 듣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속을 헤맬 때, 하갈처럼 주님이 주시는 대답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대답은 질문한 이가 가장 잘 아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엉터리들에게 답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재밌게도 대화말미에 하느님과 하갈은 서로에게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질서, 평화, 빛을 뜻합니다.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이 그치는 셈입니다. 이제 하갈은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인생의 당당함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이 명령하신대로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으셨다)’이라 짓도록 당당히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다르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리’ 합니다. 이스마엘은 더 이상 몸종 하갈의 아들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사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합법적인 아들로 이스마엘은 성장합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갈의 눈으로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는 아니었습니다. 사라가 하느님의 약속대로 이사악을 낳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입니다. 분명 이스마엘은 사라의 합법적인 아들이지만, 이사악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 느꼈습니다. 사실, 해가 갈수록 연장자인 이스마엘은 이사악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유산을 함께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마엘은 사라에게 있어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친아들과 종의 아들을 서로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이스마엘과 하갈을 추방해야했습니다.

그 날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이사악의 젖을 떼던 잔칫날이 지나자 드디어 구실(口實)을 잡았습니다. 이스마엘은 15 – 17살이 되었습니다. 사라는 대뜸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해달라고 아브라함을 조릅니다. 경멸적으로 “계집종”이라는 호칭을 씁니다(10절). 하갈과 이스마엘 입장에서는 올 것이 왔습니다. 그 구실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공동번역 성서에는 “이스마엘과 이사악이 함께 노는 것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번역했습니다. 좀 의아스럽습니다. 단지 함께 노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새번역성경과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이스마엘이 이사악을 놀리는 것(희롱하는 것)을 보고”라고도 번역합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이 장면을 더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이스마엘을 약속 상속자의 원수라고 봅니다.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다. – 갈라 4:29

하지만 이스마엘이 한 일을 꼭 나쁜 짓으로 몰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창세기 16장에서 본 것처럼, 오락가락 질투하고 분노하는 사라의 샘 많은 ‘성격’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사라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라는 하갈이 이집트 출신이기에 그곳으로 돌려보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스마엘이 자기 혈육이라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사라와 아브라함 사이에는 다소 길고 심한 말다툼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천막을 뚫고 새어나오는 말다툼을 숨죽이며 듣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사라가 몹시 얄밉습니다.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정말 어려운 상황입니다. 불임, 질투와 분노 외에도 박해, 노예제도, 사회문화적 억압이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는 이 짧은 표현에 담긴 배경입니다. 창세기 1장 첫 이야기처럼 아브라함도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에 빠졌습니다. 그가 혼돈에 빠졌다는 것은 사라의 요구를 거절하고자 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대의 관습을 아는 이들은 하느님이 사라가 아니라 아브라함 편을 들게 되리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합법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어찌 전개되었습니까? 그들 사이에 하느님이 개입하십니다. 혼돈 속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지시하십니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마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에게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창세 21:12-13

외견상으로는 사라의 뜻대로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라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아브라함의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에 따릅니다. 사라는 단지 자기 아들의 미래만을 내다 볼 뿐이었다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더 먼 미래까지 가 닿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새겨야할 메시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개인의 성격적 결함, 즉 질투나 분노나 완고함을 통해서도 실현됩니다. 사회제도나 문화적 억압마저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결코 제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그 어떤 행위 속에서도 당신의 위대한 역사적 목표를 홀로 이루심을 믿으십시오.

결국,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16, 7년의 세월동안(16:9) 몸종과 첩으로 살았던 하갈과 10대 아들 이스마엘은 쫓겨납니다. 추방당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야했던 그들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그들은 약간의 양식과 물 한 부대를 가졌을 뿐입니다. 살아가기에 턱없이 모자란 양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의 감정은 전혀 보도되지 않습니다. 이런 침묵이 역설적이게도 읽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에 더욱 공감하게 만듭니다.

이제 나머지 이야기 속에는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으셨다)’이 그런 이름을 갖게 된 연유가 16장에 이어 좀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사실, 구약 성서학자들은 창세기 16장과 21장이 다른 전승을 갖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들었던 것처럼, ‘이사악(사람들이 웃는다)’이 그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언어 유희를 통해 밝혀주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Hargar and Ishmael Driven Away” by Fredrick Goodall (1822-1904)

집에서 추방당한 그들은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먹고 살 방법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길을 잃고 빈들을 헤맵니다. 물마저 떨어지자 그들은 죽을 위협에 처합니다. 창세기 1장 첫머리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이 그들 모자(母子)에게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감정에 대해 침묵하던 창세기 기자도 갑자기 하갈로 하여금 감정을 쏟아내게 합니다.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어머니의 심정이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이스마엘도 울고, 하갈도 웁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울었겠지요. 오늘 시편 첫머리의 애원이 그대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소서, 야훼여, 대답하소서.
불쌍하고 가련한 이 몸이옵니다.
– 시편 86:1

그 때 하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천사를 시켜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이르셨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어서 가서 아이를 안아 일으켜주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 창세 21:17-18

여기 ‘하느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란 말에서 이스마엘의 이름이 유래합니다. 하갈은 아들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그에게서 위대한 일을 의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하느님은 친 어머니조차도 포기해 버린 아이를 ‘큰 민족’이 되게 하십니다.

이사야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엽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 이사 49:15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많으십니다. 복음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 마태 10:30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섬세하게 돌보시는 분입니다.

Hagar giving Ishmael water from the Miraculous Well in the Desert. Charles Paul Landon (1760-1826). Oil on canvas, 75 x 103cm.

하갈은 돌보시는 하느님 덕택에 자신과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샘물’을 발견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느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주셨다”고 기록합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삶의 또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이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삶을 걸어갑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던 인생에서 자기 길을 걸어가는 당당함입니다.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는 경지입니다(마태 10:25).

하갈은 이미 자기 곁에 있었는데도 보지 못했던 생명의 물, 즉 삶의 진실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찾아와 말씀하시는 순간, 인간의 모든 비극은 단숨에 끝납니다(창세 21:19-20). 하느님이 우리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에 말씀하시는 순간 빛이 생겨납니다. 이후로도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은 계속됩니다.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창세기에 나오는 ‘이유기(離乳期)’를 단지 엄격한 신체 주기만으로 축소하지 마십시오. 이유기는 지금까지의 유대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은유’입니다. 인간 발달단계에서 다른 이들과 분리되는 모든 전이(轉移) 과정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전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의 전환(轉換) 과정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발단 단계로 편입되기 전 전환의 혼돈 속에 던져집니다. 심지어 그 전환은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형제 사이에 작용해온 그간의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유기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상관없이 골치 아픈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삶의 모든 종류의 관계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떼어놓아야 하는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Hagar in the Desert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시킨 일은 일종의 ‘이유기’에 해당합니다. 의존 상태에서 독립 상태로의 전환입니다. 물론 그들의 이유(離乳), 즉 가족으로부터 분리는 건강하고, 사랑스럽고, 지지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둘 모두에게 가혹하고 억압적인 추방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박대 받던 관계에서 빠져 나온 많은 사람들의 경우, 출발이 반드시 더 나은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돈도 없고, 음식도 없으며, 인맥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자신과 자녀를 부양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유 속에 있는 이들, 즉 내쫓긴 이들은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이라는 삶의 전환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빛이 찾아듭니다. 지난 2주간 우리는 창세기 말씀을 통해 무엇을 들었습니까? 삶이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느님을 찾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신호를 찾으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은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또 하나의 ‘기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더 높은 단계로 이끄시는 ‘이유기’입니다. 삶이 아무리 고생스럽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사실, 하느님은 때로 우리를 낭떠러지 끝에 세우실 때도 있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좀체 하느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젖가슴을 손에서 결코 놓지 않으려 들던 저처럼, 스스로는 손에 잡고 있는 ‘그것을’ 절대 놓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창세기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라와 아브라함, 하갈과 이스마엘을 향한 하느님의 응답 중 일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언뜻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비해 하갈과 이스마엘에 주신 축복은 ‘차별 대우’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런 면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부분 말입니다. 질투와 분노와 완고한 사라와 어찌 보면 우유부단한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명백한 지지(支持)’는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으셔야만 하는 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진실입니다. 물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더라도 인생에는 어려운 시기가 여전히 다가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가끔 일어납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하느님은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항상’ 막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하느님의 침묵이 이해하기 몹시 어려운 난제이자 신비입니다. 몇 가지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6.25 한국 전쟁으로 인한 분단 지속, 5.18 민주화 운동,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등입니다. 이 외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침묵과 신비들은 넘쳐납니다.

With her brother on her back a war weary Korean girl tiredly trudges by a stalled M-26 tank, at Haengju, Korea. June 9, 1951. Maj. R.V. Spencer, UAF. (Navy)

오늘 이사악 탄생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사라가 상황을 처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신뢰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갈을 통해 약속의 아들을 가지려한 사라의 불법적 행동을 아브라함이 지지한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약속에 어긋나는 그 끔찍한 일을 아브라함이 하지 못하도록 하느님이 막지 않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사라가 하갈의 가족을 향한 하느님의 목적과 비전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시기심과 분노에 빠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는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하는 것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동료인 인간, 즉 자신의 가족에게 조차도 비인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하느님은 분명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하느님이 막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침묵, 용인(容忍)을 접할 때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도무지 헤아릴 길 없고, 모를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그저 입을 다물고, 겸손히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주님이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몫만큼의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합니다(마태 10:38).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았노라고 고백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로마 6:3).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여전히 우리는 아직도 죽지 않은 이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부활하지 않은 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살지 않고 여전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 때도 많습니다(로마 6:11; 마태 10:37).

그러나 이제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순투성이임에도 항상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족이나 같은 교우들에게 조차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하느님은 우리를 격려하도록 “천사들”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주십니다. 하느님이 물으시는 그 어려운 질문, 즉 궁극적 질문에 참여하고, 우리의 죄를 인정하도록 “천사들”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회개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천사들”을 통해 격려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넘어지는 것마저도 허락하십니다. 우리에게 항상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그러한 실수들로부터 배우도록 촉구하시고 다시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는커녕 때로는 혼란스럽고 듣기에 곤란한 일들을 말씀하시고 행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항상 돌보시는 하느님은 마찬가지로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보살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타종교 사람들마저도 항상 보살피십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참새하고도 항상 함께 하신다고 오늘 복음은 가르쳐줍니다(마태 10:29).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의 이러한 인자하심을 점점 더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하갈처럼, 이스마엘처럼 눈물 흘리고 있습니까?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인생의 ‘이유기’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오늘도 하갈처럼 눈이 열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이 진실을 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찬미 받으소서. 주님 위대하시어 놀라운 일 이루시니,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월호 미수습자들과 가족들, 작업자들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 선원들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3. 남북의 용서와 화해, 협력과 평화정착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가뭄 해갈을 위한 비 내려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실직자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교우 가정과 자녀 양육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오종민(어거스틴) 교우와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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