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5.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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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4주일이자 전례력으로 ‘나’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전례색은 ‘백색’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로 시작한 한 해의 결론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듯이 우리도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복된 신자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 주님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하시나이다. 구하오니, 죄로 인해 갈라진 이 세상을 주님의 온유한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다니 7:9-10,13-14
  • 시편 – 93
  • 2독서 – 묵시 1:4하-8
  • 복음서 – 요한 18:33-37

교회력으로 ‘나’해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는 축일입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왕국(하느님 나라)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평화롭게 살아가는(회복되는, 구원사업이 완성되는) ‘그 약속의 날’이 속히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축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해를 살아온 내 삶의 모든 지향이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하며 살아왔는지 성찰하면서 성찬례를 봉헌합니다. 사실 매주일 성찬례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영광송’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성부의 영광 안에 성령과 함께,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고, 홀로 높으시다”고 찬미합니다. ‘니케아 신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실 것이고, 그분의 나라(왕국)가 끝이 없을 것이라” 고백합니다. 전례독서는 이 같은 찬미와 고백의 주인공, 왕이신 그리스도께 맞추어 배정되었습니다.

1독서는 다니엘서입니다. 지난 주일에 <다니엘>을 개괄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2세기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름을 숨기고 있는 저자가 자신이 받은 ‘묵시’(예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옛 시대의 인물인 ‘다니엘’의 이름으로 기록했습니다. 형식에 있어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1-6장이고, 후반부는 7-12장입니다.

전반부인 1-6장은 주전 6세기에서 5세기에 해당하는 과거의 역사로 저자가 자신이 살던 그 ‘암울한 시대’(주전 2세기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 회상한 기록입니다. 유다 멸망 후 포로로 끌려가 살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느님께 충실함을 입증한 이야기가 회상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로 대변되는 제국의 문화와 종교를 거부하고 하느님께 충성했으며, 마침내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맛보았다고 전해줍니다. 이러한 과거 역사의 회상 후에 저자는 자기 시대에 겪고 있는 암울한 사건들이 ‘곧 실현될 하느님 나라’를 앞두고 벌어지는 ‘역사의 마지막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묵시’(환상)를 전합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두 번째 부분인 7-12장입니다. 이 두 번째 부분에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많은 ‘환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환상들은 묵시문학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상징적 언어입니다.

7장 첫머리는 ‘다니엘’이 보았다는 ‘네 짐승들’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합니다(7:2-8). 그 짐승들은 고대 근동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제국을 상징합니다(7:17). 특히 네 번째 제국인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제국’이 가장 강력합니다(7:7-8,19,23). 이전의 제국들이 멸망했듯이 제 아무리 강력한 그리스제국이라 할지라도 멸망할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 사후(주전 323년) 그리스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셋으로 분할되었습니다(마카베오상 1:1-10). ‘그리스’(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한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레우코스 왕조’입니다.

 

<다니엘>은 이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7:9-12). 특히 본문은 주전 2세기 중엽 ‘셀레우코스 왕조’의 잔악한 박해자 ‘안티오쿠스 4세’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7:7-8,11,21,24-25; 마카베오상 1:10-15). 그는 유대 민족에게 ‘그리스문화’와 ‘관습’을 강요했습니다(7:25-26; 마카베오상 1:20-64). 유대교 행사를 금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도 금하고 거기에 ‘제우스’ 신상(神像)을 세웠습니다(8:11-12; 마카베오상 1:54). 이 일이 나중에 ‘마카베오 혁명’(주전 166년)의 계기가 됩니다(마카베오상 2:1-28).

그 암울한 시기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저자는 4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인 ‘다니엘’을 다시 등장시킵니다. 하느님이 심판하실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다가왔다고 환상을 통해 선포합니다(7:10-12, 22-27). ‘태고적’부터 계신 이가 ‘하늘 옥좌’에 앉아 ‘우주적인 심판’을 진행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7:9-10). 하늘 옥좌의 모습과 그 옥좌를 둘러싼 천사들, 심판의 장면은 묵시 언어로 새 세상을 기록한 책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에제 1:15-21,26; 묵시 1:14; 4:2-6; 5:11; 20:4,12). 재미있게도 여기 묘사된 하늘 옥좌와 바퀴의 모습에서 외계인들이 타고 다니는 ‘우주선’을 상상하는 유사 종교도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분명 이 장면들을 사실적으로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특히 이 환상들이 말하려는 핵심은 하느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법정을 열고 ‘조서’를 펼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심판할 준비’가 다 되어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기록한 ‘책들’을 펼치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느님 앞에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알려줍니다(묵시 20:12). 생명책(출애 32:32-33; 시편 40:7; 69:28; 루가 10:20; 필립 4:3; 히브 12:23; 묵시 3:5; 13:8; 17:8; 20:12,15; 21:27), 기념책(말라 3:16) 등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 심판이 자기 앞에서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먼저 ‘네 번째 짐승’이 심판을 받습니다(7:11). 그 짐승은 ‘그리스제국’으로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를 가리킵니다. 나머지 짐승들도 그들의 권세를 빼앗깁니다(7:12). 하느님께서 그리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제국들의 권세를 빼앗으십니다.

이어서 저자는 또 하나의 환상을 전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다니 7:13-14

이 환상은 세상이 인간의 지배에서 하느님의 지배로 ‘이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행은 “사람의 모습을 한 이”(사람의 아들 같은 이, 인자)가 와서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실 때 일어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을 한 이”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세’를 주십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갑니다. 네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왔지만(7:2-3) 그 분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13절). 여기서 그 분이 ‘짐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임이 증거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그 분이 ‘하느님의 영역’에서 나오신 분임을 증거 합니다(참고, 요한 3:13). 성경에서 ‘구름’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하기에 그렇습니다(출16:10; 19:9,16; 24:15). “사람의 모습을 한 이”는 가장 강력하다던 네 번째 짐승의 ‘권세’를 계승합니다. 하느님께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주권’을 위탁받은 그 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최고의 권세’를 주신 “사람의 모습을 한 이”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그 “사람 모습을 한 이”를 <다니엘> 저자는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풀이합니다(7:18, 27). 그들이 겪고 있는 암울한 사건들은 곧 실현될 하느님 나라를 앞두고 벌어지는 역사의 마지막 사건입니다. 이제 곧 그 ‘억압자’(안티오쿠스 4세)는 마지막을 맞을 것입니다.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도래 할 것입니다. 그 새 시대의 주인공은 ‘자신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니 겁내지 말고 악의 화신인 억압자 안티오쿠스 4세에 맞서 싸우라는 격려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향한 충실을 보이라는 격려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묵시(예언, 환상)를 통해 고난 속에 있던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곧 도래할 ‘새 시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사람 모습을 한 이”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아닙니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왕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위광’(威光)을 떨치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선포합니다(마르 2:10,28, 13:26; 14:62; 마태 24:30; 26:64; 28:18-20). 예수님은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시며 다니엘의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도 ‘수태고지’ 때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여(14절) 그 ‘왕국’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마리아에게 확인해 주었습니다(루가 1:33). 이런 점에서 <다니엘>의 저자는 ‘묵시의 한계’를 보였고, 그리스도 교회는 이것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이”, 다시 말해 이천년 전 하늘로부터 ‘첫 번째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위탁과 전권을 받아 몸소 마지막 심판을 주재하러 ‘두 번째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의 첫 번째 오심과 사역들, 죽음, 부활, 승천에 대한 구약성경의 다른 예언들은 다 성취되었습니다. 한 가지만 빼고 말입니다. ‘영광 속에 최후 승리의 왕으로 다시 오신다’는 이 예언만은 아직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날’이 오면 우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완성(만물이 회복)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왕국’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력을 마감하는 오늘, 최후 승리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다니엘>을 전례독서로 배정하였습니다.

시편 93편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이 우주의 왕이시고, 통치자이시라고 찬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위엄’(1-2절)과 ‘능력’(3-4절)과 ‘거룩하심’(5절)에 대한 대담한 찬미입니다.

시인은 <다니엘>과 <요한묵시록>처럼 하느님께서 ‘위엄’을 옷으로, ‘능력’을 띠로 동이시고 ‘왕위’(왕좌)에 앉으심을 봅니다(1절a). 하느님께서 가장 강력한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찬미입니다. 하느님의 위엄과 능력은 창조세계에 드러나 있습니다(1절b). 하느님은 지금껏 창조하신 우주를 붙들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강력한 주권은 ‘왕좌’(옥좌)가 나타내줍니다(2절). 그 왕좌는 고대 근동이나 그리스 신화처럼, 하느님이 신들의 싸움을 통해 나중에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확립되어 있었고,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통치하지 않으셨던 시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이 세상은 ‘홍수’(물결소리, 술렁대는 강물)와 ‘바다의 강한 파도’로 상징되는 ‘혼돈의 세력들’이(폭군과 독재자) 역사를 파괴하고, 하느님의 창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3-4절). 그러나 하느님이 나서시면 그 혼돈의 세력들마저 평정됩니다(3-4절). 사실 하느님은 혼돈의 세력과 싸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저 ‘말씀 한마디로’ 세상에 ‘질서’와 ‘생명’과 ‘구원’을 가져오시는 전능하신 창조주십니다(창세 1:1-2:4a). 그 누구도 하느님의 전능함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지혜’(전지함)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느님의 ‘율법’(말씀, 증거)을 찬미합니다(5절a). 하느님의 위엄과 능력이 율법(말씀) 속에, 율법을 통하여 증거되고 있음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거룩함이 하느님의 집에 제격”이라고 찬미합니다(5절b).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와 달리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은 하느님만의 속성입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거룩한 능력이고, 하느님의 주권도 거룩한 주권입니다. 하느님이 거하시고 행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장식됩니다. 사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니 모든 곳이 거룩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들어가 예배하고 있는 ‘성전’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들어갈 ‘하늘의 성소’(히브 9:24)에도 해당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성전’(1고린 3:17)과 ‘거룩한 겨레’(1베드 2:9)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도록 선택받은 우리, 즉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교회인 우리가 명심해야할 ‘거룩함’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송영으로 찬미를 끝냅니다. “야훼여, 길이길이 그러하소서”(5절c). 우리가 시편 후에 바치는 ‘소영광송’(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입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을 마감하면서 바친 마지막 송영이 떠오릅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6절).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영원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에 꼭 맞는 시편입니다.

2독서는 요한묵시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많은 칭호들이 바쳐집니다. 그 많은 칭호들 중에서 오늘이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이니 ‘왕’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은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왕들의 지배자’라는 말은 ‘황제’, ‘왕들의 주인’,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에야 이런 고백이 자유롭지만 묵시록을 기록하던 당시는 어땠을까요? 그 당시는 로마의 황제를 ‘모든 왕들의 지배자’(주님)로 섬기던 시절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왕들의 지배자’(주님)라고 선포했습니다. 그의 선포를 따라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며 기꺼이 박해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왕들의 참된 지배자’(주님)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더욱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왕국이 1독서 말씀처럼(14절), ‘영원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 알파(처음)와 오메가(마지막)”이시기 때문입니다(4절하, 8절). 이렇게 오늘 전례독서는 예수님의 왕국에 대해 ‘영원’이라는 시간을 공통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원한 나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특권을 선물’(은총)로 주셨습니다(5절b-6절). 분명 ‘홀로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영광과 영예, 생명과 기쁨을 독차지하시기보다 우리와 함께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누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왕국)과 ‘사제’로 삼아주신 일입니다(6절; 묵시 5:10). 이것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리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만들어주셨다는 뜻이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릴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특권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십자가 희생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희생은 1독서 말씀처럼(14절), 그리스도께서 ‘태곳적부터 계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주권과 영화와 나라를 계승 받으시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에게 ‘왕과 사제’가 되는 축복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자기희생’, ‘자기봉헌’은 세상 어느 왕(권력가)도 하지 않는 거룩한 일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안전과 안위를 위해 다른 이들의 목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왕국답게’, ‘하느님의 사제답게’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선한 책무를 다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때 사탄의 소유였습니다. 어둠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택에, 그 보혈 덕택에,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5절c). 우리를 사랑하신 십자가 희생 덕택에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 왕의 사제들,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1베드 2:9-10). 지금 봉헌되는 성찬례가 우리와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축복의 확인입니다. 이제 할 일은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널리 전하며, 우리 자신도 왕의 사제답게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일입니다(로마 12:1-2).

끝으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와 우리의 마지막 승리를 예고합니다.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어 ‘심판과 구원 사업을 완성’하실 것입니다(7절). 그렇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점점 가까이 오고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왕의 사제답게’ 우리는 힘을 내야합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다시 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96

복음서를 살필 차례입니다.

복음서는 요한복음 ‘수난이야기’ 중에서 배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왕’을 묵상하는 축일이니만큼 ‘부활’이나 ‘승천’ 본문을 배정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세상의 왕권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왕권이 계승되는 첫머리를 보십시오.

첫머리는 빌라도의 심문과 예수님이 답변하시는 장면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빌라도가 심문을 주도합니다. 하지만 갈수록 상황을 주도하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빌라도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 수난이야기에서 빌라도를 ‘종교적인’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대답보다는 ‘질문’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짧은 구절에서 연거푸 질문 공세를 펼칩니다. 하나같이 ‘의미심장’합니다.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33절)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35절)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입니다. 하나같이 종교가 다루는 ‘궁극적 질문’입니다. 종교적 인간의 갈망이 그의 질문 속에서 빛났던 셈입니다. 오늘 복음으로는 독서하지 않았지만, 그는 심문 말미에 절정에 해당하는 ‘궁극적(종교적)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가 무엇인가?”(38절)

먼저 그는 예수께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라고 심문합니다. 그의 질문은 예수께서 고발당한 이유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대사제들로 대변되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국사범’(정치범)으로 고발당했습니다. 대사제들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 운운하면서 ‘자신을 왕(메시아)이라’ 자처했다”고, “반란을 선동하는 수괴(首魁) 역할을 했다”고 빌라도에게 고발을 넣었습니다. 과월절 축제기간은 그 작은 땅에 30만 가까이 순례자가 넘치는 극히 민감한 시기이고, 질서유지는 그의 책무였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말을 믿고 그 위험인물을 체포하도록 군인들을 파견했습니다(요한 18:3).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 만나본 적은 없지만, 기세등등한 반란군의 수괴(首魁)에 대한 인상이 스쳐갔습니다. 이것이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 듣고 가졌던 첫 번째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예수를 만난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질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직접 예수님을 대면해보니 체포해야 할 만큼 정치적으로 위험인물이었는지 의심스럽다는 뜻입니다. 군인으로 살아온 그가 보기에 예수는 척 보기에도 반란을 주도할 혁명가나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조용하면서도 위엄에 찬 한 인간을 발견합니다. 자기 앞에 있는 그 죄인에게 명명된 혐의와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할지 당혹스럽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이것을 보신 예수님이 질문하십니다.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
요한 18:34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명확히 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정말 알고 싶어서 스스로 던지는 질문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로부터 유도된 질문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질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 질문이 빌라도 자신으로부터 나왔다면 그는 이렇게 질문한 셈입니다. “너는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꾸민 ‘정치적’ 왕인가?” 만일 대사제들의 충동에 의해 나온 질문이라면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라 대사제의 것입니다. 그 때는 이런 질문인 셈입니다. “너는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인가?”(루가 22:67,70) 첫 번째 질문이라면 “아니다”입니다. 두 번째 질문이라면 “그렇다”입니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90

예수님의 질문에 빌라도는 갑자기 흥분합니다.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너를 내게 넘겨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요한 18:35

자신은 ‘로마인’이라고 대답합니다. 유다인의 종교나 사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지금 ‘사형 죄’로 잡혀온 ‘속사정’을 밝힙니다. 동족과 대사제들이 그리하도록 강요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가 고발되어 왔는지 진짜 속사정이 궁금하다고 말합니다. 만일 예수가 사형에 처해지기를 동족과 대사제들이 원할 정도라면 그만큼 예수에게는 ‘명백한 잘못’이 있을 것이고, 그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신이 알아야겠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그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진짜 질문이 나왔습니다. 사실 죄인으로 체포했으면서 이제야 무슨 일을 했는지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우리는 예수님 대신 훌륭한 대답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착한 일을 해 오셨습니다. 병으로, 장애로, 차별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까지 행하셨습니다.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삶을 살아오셨고, 제자들 역시 섬기는 삶을 살라고 훈련시키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새롭고 권위가 있었기에 듣는 이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 제물로 주실 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고 복음서는 증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시지 않고 자신이 누구신지 대답해 주십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요한 18:36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고 확실히 밝히십니다. 그렇지만 빌라도가 생각하는 그런 ‘정치적 왕’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러 온 ‘군사적 왕’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경계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내 왕국’(나라)도 있다고 명백히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 왕국은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그 왕국은 ‘하늘’에 속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국과 자신의 왕국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간단히 말씀하십니다. 분명 그 왕국은 존재하지만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이 세상의 ‘정치적 왕국’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왕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됩니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국민, 주권, 영토’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나라들은 ‘영토’라는 경계와 공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은 공간적이지 않습니다. 흔히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뜻을 기뻐하고 그 뜻을 따라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다스림, 통치)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무튼 그 왕국은 기원을 ‘하늘’(하느님)에 두고 있습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왕국보다 ‘위에’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왕국은 그 토대를 ‘평화’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그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제자들이 유다인들의 손에 예수님이 넘어가지 않도록 ‘무력’을 동원하여 싸웠을 것입니다.

“가시관을 씌우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95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왕국은 ‘무력’, ‘무기’라는 ‘힘’에 토대합니다. 왕의 지배욕과 이기심에 기초합니다. 왕의 자존심과 그를 향한 ‘아부’(阿附)에 휘둘립니다. 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와 술수, 거짓과 모함에 좌우됩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이 세상 왕국은 ‘돈’을 통치의 수단으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은 다릅니다. 그 왕국은 온유와 겸손, 사랑과 희생, 섬김과 나눔을 토대로 합니다. ‘십자가’가 그 왕국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가 예수님이 왕으로 계신 그 왕국의 토대입니다(1고린 1:23).

정말이지 예수님은 거짓과 불의, 관념과 허상, 부정과 부패, 폭력과 억압에 토대해 있는, 겉껍데기뿐인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의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짓과 불의가 아니라 진리의 왕이십니다. 관념과 허상이 아니라 실상의 왕이십니다. 부정과 부패가 아니라 거룩함의 왕이십니다.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평화로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피상이 아니라 본질의 왕이십니다. 진리, 실상, 거룩함, 평화, 본질, 이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왕국의 모습들입니다. 이 두 왕국은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나란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통해 자신이 어느 왕국에 속한 사람인지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진실보다 거짓을, 실상보다 허상을, 거룩함보다 부정을, 평화보다 다툼을, 본질보다 껍데기를, 원본보다 거짓 위안을 주는 ‘모조품’에 빠져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는 예수의 대답에 빌라도는 안도(安堵)했습니다. 이 대답을 통해 판단하건데, 예수는 분명 ‘몽상가’입니다. 아니면 종교지도자가 되고픈 열망에 사로잡혔거나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예수와 그의 왕국은 로마의 경쟁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로마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쟁자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니 좀 확실히 이 문제를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말투로 꼬리를 잘랐습니다. 죄인으로 체포되어 온 주제에 말이 많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네가 왕이냐?
요한 18:37a

‘왕’으로 대변되는 ‘세속의 권력’,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가 관심했던 질문입니다. 사실 그는 로마제국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외치던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진실과 거짓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깨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예수가 종교지도자가 되고 싶어 하든, 아니면 좀 인기를 끌던 한낱 몽상가이든, 심지어 미친 사람이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듣고 싶은 한마디는 ‘나는 정치적 왕이 아니오.’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지금까지의 심문을 통해 이미 들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현듯 마음 한 쪽에서 이 ‘무력’한 인물을 돕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자기 동족과 대사제들로부터 고발을 당했으면서도 조용히 위엄을 지키고 있는 이 인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요한 18:37b

예수님은 재차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왕국이 ‘진리’의 왕국임을 밝히십니다. 하고픈 다른 말씀도 많으실 것 같은 데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죄나 자비도 간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으며, 무슨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빌라도가 던진 ‘종교적 질문’, 즉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대답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왕이 되실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지배욕과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권력을 휘두릅니다. 자신을 드높이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남용합니다. 자신의 불의와 거짓을 감추기 위해 권력을 오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그것 때문에 세상에 왔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진리를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 ‘영원한 생명’이라고 가르칩니다(요한 3:31-36).

“예수의 등에 채찍질하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93

자신의 안위를 꾀하는 세상의 권력자 빌라도와 수난 받는 왕으로 그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만남을 ‘디모테오전서’는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와 본티오 빌라도에게 당당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는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1디모 6:13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요한 18:37c

이 말씀은 대답이면서도 동시에 빌라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대는 진리 편에 선 사람인가? 그렇다면 내 말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를 이미 압니다. 그는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영적인 귀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진리의 왕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 왕국’에 속한 사람임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비록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이어서 질문했지만(요한 18:38), 진정으로 그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면 그는 예수를 보호하고 예수께 더 열렬한 관심을 표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본티오 빌라도’에게” 라는 ‘니케아신경이나 사도신경’의 내용이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관심했던 것은 ‘자신의 안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에 관심합니까? 진리를 앞에 두고도 다른 길로 걸어가 버린 빌라도를 보면서 나는 ‘진리’에 귀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지 고요히 성찰해 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는 기쁜 축일입니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는 축일입니다. 왕의 한 말씀을 귀담아 듣고 우리 역시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살고자 모인 성찬례입니다. 한마디로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의 길을 가자고 모인 성찬례입니다. 사실 교회가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그리스도뿐 아니라 ‘나 역시 왕으로서 나의 자유를 노래하자’는 의도입니다. 세상의 모든 싸움으로부터 자유로우신 예수님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당당한 나됨의 노래, 왕처럼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주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유자의 노래를 부르자는 목적입니다.

흔히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구원이다”, “부활이다”, “영생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아듣기에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자기비움’입니다. ‘비움’이 되어야 ‘채움’이(구원, 부활, 영생) 옵니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먼저 ‘죽어야’ 그 다음에 ‘사는’ 일이 일어납니다. ‘죽어야 산다’는 말을 죽음 빼고 사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비워야 비로소 채워집니다. 생명의 언어는 항상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대신 인간이 비웠다고 해서 ‘스스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채워주시는 일은 항상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은 단지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하여 비움의 길을 갈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끝까지 비워서 자유에 이르신 분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비운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는 죽음에서 일으키셨다고(수동태문장) 사도들은 증언했습니다(사도 2:30-36; 필립 2:5-11).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80

교우 여러분, 온 우주를 심판하러 오실 ‘왕이신 심판 주’께서 사람들의 법정에서 무기력하게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십자가 죽음은 그리스도와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주권과 영화와 나라(왕국)를 계승 받으신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는 사랑의 왕이 되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왕과 사제’가 되는 축복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덕택에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 왕의 사제들,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1베드 2:9-10). 주님의 왕국과 왕권이 영원하듯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도 영원합니다. 지금 봉헌되는 성찬례가 우리와 함께 자신의 승리를 나누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축복의 확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 감사는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널리 전하며, 우리 자신도 왕의 사제답게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산 제물이 되는 이, 자신을 온전히 비운 이는 왕이신 주님처럼 자신의 자유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점점 가까이 오고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왕의 사제답게’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갑시다. 십자가로 대변되는 온유와 겸손, 사랑과 희생, 섬김과 나눔이 예수님이 완성하실 영원한 왕국의 토대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왕국에 속한 이들은 예수님 말씀의 진리를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그 왕국에 속했음을 증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영원한 왕국의 주인공이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로 구성된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수험생과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홍비비안나, 임스텔라, 박창언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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