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8. 연중33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종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하느님 나라)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시오.’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은 종말론적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례독서가 진정으로 말하려는 바는 ‘종말’이 아닙니다. 그 ‘너머’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간, 영원한 기쁨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자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그 초대에 온전히 응답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소외된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다니 12:1-3
  • 시편 – 16
  • 2독서 – 히브 10:11-14,19-25
  • 복음서 – 마르 13:1-8

연중 3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종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하느님 나라)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시오.’입니다.

<성공회 기도서>는 ‘교회력’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억하고 경축한다. 하느님의 구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시간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에 새로운 기준이다. 이 기준에 따라 교회는 교회력(전례력)을 마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시간을 다시 설정하여 지킨다. 또한 성서와 교회 역사의 성인과 사건을 기념하여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깨달아 살아간다.
성공회 기도서 24 쪽

 

성공회를 ‘기도서의 교회’라 부릅니다. 기도서는 교회력이 갖는 의미를 친절히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력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사건 속에서 살아가도록 철저히 설정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이야기를 중심으로 우리의 삶이 빚어지도록 교회력은 이끌고 있다는 뜻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어떤 ‘원리’나 ‘강령’,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성서의 이야기를 배정하고 언제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철저히 그분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올해도 교회력을 따라 걸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더 성장하셨는지요?

다음주일은 나해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한해의 모든 것이 왕이신 그리스도께로 수렴되는 마지막 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종말론적인 분위기로 채워진 전례독서를 듣습니다. 그러나 전례독서가 진정으로 말하려는 바는 ‘종말’이 아닙니다. 그 ‘너머’의 일입니다. 그 너머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례독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간, 영원한 기쁨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자는 초대입니다.

1독서는 <다니엘>입니다. 문학적 관점에서 다니엘서는 요한묵시록과 함께 ‘묵시문학’으로 불립니다. ‘묵시’(默示, 아포칼뤼프시스)는 “은밀한 것을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문학’을 붙였으니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 그 ‘묵시를 문자로 담아낸 문서’란 말입니다. 주전 200년경부터 주후 100년경까지 이스라엘에서 유행한 문학양식입니다. 간단히 언급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고난과 죄악으로 가득 찬 현재의 세상(옛 세상, 옛 시대)을 하느님께서 장차 오시어 ‘끝내신다’는 미래의 전망입니다. 하느님께서 ‘새 시대’, ‘새 세상’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절절한 ‘희망’과 ‘격려’를 적은 신앙의 책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새 시대’나 ‘새 세상’이 아니란 점입니다. 물론 그 날이 오기 전 이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대격변의 여러 징조가 있을 것이니 잘 알아차리고 대비해야 합니다. 그 징조들은 주로 비유 언어와 상징 언어로 기술되고, 특히 숫자 상징이 메시지를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옛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여시러 오시는 그 심판의 날, 악인은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들, 즉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던 의인들은 구원을 받고 ‘새 세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다니 12:1-3). 이처럼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며, 고난에 찬 난세(亂世)가 끝나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기를 염원하는 ‘종말사상’이 담겨있기에 ‘이원론’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또 역사의 ‘모든 비밀’을 자신들은 꿰뚫고 있고, 하느님께서 은밀히 나타내주신 것 전부를 가감 없이 전하는 양 묘사했지만 좀 지나칩니다. 아무래도 인간은 무색투명하거나 영점조준 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주전 2세기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름을 숨기고 있는 저자가 자신이 받은 묵시(예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옛 시대의 인물인 ‘다니엘’의 이름으로 기록했습니다. 형식에 있어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1-6장이고, 후반부는 7-12장입니다.

전반부인 1-6장은 주전 6세기에서 5세기에 해당하는 과거의 역사로 저자가 자신이 살던 그 암울한 시대에 회상한 기록입니다. 유다 멸망 후 포로로 끌려가 살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느님께 충실함을 입증한 이야기가 회상됩니다. 그들은 제국의 권력에 맞서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느님께 충성했으며, 마침내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맛보았다고 전해줍니다. 이러한 과거 역사의 회상 후에 저자는 자기 시대에 겪고 있는 암울한 사건들이 곧 실현될 하느님 나라를 앞두고 벌어지는 역사의 마지막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묵시를 전합니다. 그것이 7-12장입니다. 이 두 번째 두 부분에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많은 환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환상들은 묵시문학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상징적 언어입니다. 바빌론제국, 메대제국, 페르시아제국, 그리스제국,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 사후 ‘시리아’(안티오키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조’까지의 고대근동 역사를 알고 있으면 <다니엘>을 이해하는 큰 도움이 됩니다. 4제국이 잇달아 일어남을 네 짐승을 통해 묘사합니다(7:2-8). 그 4제국은 바벨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제국입니다. 특히 네 번째 제국이 가장 강력하지만(7:17-21), 하느님이 심판하실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다가왔음을 강조합니다(7:9-14, 22-27).

우리는 주전 2세기 상황을 알려주는 ‘사건’을(7:25; 8:11-12) 통해 그 네 번째 제국과 왕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분할된 제국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잔악한 박해자 ‘안티오쿠스 4세’입니다(마카베오상 1:1-10). 그는 유대 민족 전체에게 ‘그리스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일환으로 유대교 행사를 금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합니다.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도 금하고 거기에 ‘제우스’ 신상(神像)을 세웠습니다(8:11-12). 그의 유대교 탄압이 나중에 마카베오 혁명의 계기가 됩니다(주전 166년). 따라서 <다니엘>은 외경(제2경전)인 <마카베오>와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다니엘>은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저자는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려고 하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다가왔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악의 화신이자 억압자에 맞서 싸울 용기를 갖고,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처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향한 충실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선한 싸움에 나서다 죽은 이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깊은 믿음의 확신이 본문에 녹아있습니다(2절). 구약에서 부활에 대해 명시적으로 표현한 유일한 구절입니다. 이처럼 고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 곧 도래할 ‘새 시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끝까지 신앙의 충실함을 지켜낸 이들이 차지하게 될 ‘부활’은 교회력을 ‘마감’하는 시기에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시편 16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시인은 먼저 깊은 신뢰 속에서 하느님의 보호를 간청합니다(1절). 하느님만이 자신의 주님이시고 행복이라 선언합니다(2절). 그가 그렇게 간청하고 선언하는 이유가 이어집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이 세상은 거짓 신들과 그들을 섬기는 이들로 뒤섞여 있습니다(3절). 그러나 자신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처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4절) 오로지 하느님께만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5-7절). 하느님은 그렇게 충성하는 이들에게 삶의 길을 몸소 가르쳐주시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십니다(8-11절).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는 각각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설교에 사용했습니다(사도 2:27; 13:35).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시인이 살아간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돈을, 권력을, 명예를 신(神)으로 떠받들고 삽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입증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자신을 바쳐 ‘오늘’ 사랑과 평화를 일구고, ‘오늘’ 나눔을 실천하는 삶은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행복의 근원이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죽음’(종말)도 끝낼 수 없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사귐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이들임은 말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드러납니다.

2독서는 히브리서입니다. 지난 연중 27주일부터 오늘까지 계속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연중시기 계속독서는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도록 배정되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오늘 배정된 본문은 계속독서인데도 복음서의 주제인 ‘종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하느님 나라)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시오.’와 상응(相應)합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
히브 10:12b … 23-25

이전 독서들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옛 계약의 대사제와 새 계약의 대사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해 왔습니다. 옛 계약의 희생제물과 새 계약(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대조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새 계약의 대사제야 말로 위대하시고, 새 계약의 희생제물이야말로 더 좋다고 교훈해 왔습니다. 오늘 독서는 옛 계약의 희생제물은 근본적으로 효력이 없으며, 오직 새 계약의 희생제물 만이 영원한 효력이 있음을 교훈합니다(11-12a).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완벽한 희생제물로 봉헌하시어 죄를 없애셨습니다. 죄를 없애셨기에 더 이상의 희생제물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 선포한 바 있습니다(예레 31:33-34).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덕택에 더 이상의 희생제물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희생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었고, 하느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14절). 이렇게 모든 사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시어 원수들이 발아래 굴복할 때까지, 영광스런 승리를 차지하시러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13절).

끝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같은 일에 근거하여 교회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격려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져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19-22절).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갔고,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1년에 한번 ‘대속죄일’(욤 키푸르, יום כיפור)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보혈의 공로로 그런 차별도 없어졌습니다.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지낼 것이 아닙니다.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미 현실이 된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하시니 성찬례 때마다 고백하는 이 희망을 굳게 간직해야 합니다(23절). 그뿐 아니라 그 같은 약속을 주신 분을 신뢰하도록 서로 격려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 할 수 있어야 합니다(24절). 그런 격려는 우리의 교회를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갈 것입니다. 특히 어떤 신자들처럼 나태해지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함께 있어야 비로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친교와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모든 희망을 완성하러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자로 다시 오실 것이고(13절), ‘그 날’이 날마다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마침 다음주일은 온 우주의 왕으로 다시 오실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이제 복음서를 살필 차례입니다. 마르코복음 13장은 복음서의 ‘소묵시록’(마태 24장, 루가 21장)이라 불립니다.

본문은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1-2) 예루살렘 성전파괴 예언입니다. 후반부는(3-8절) 제자들이 재난의 시기와 징조를 묻자 예수께서 ‘묵시적’으로 대답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전반부부터 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
마르 13:1a

지난 사흘간 예수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동안 성전정화 사건이 있었고(마르 11:15-19), 유다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논쟁’도 있었습니다(마르 11:27-12:34).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대변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맞서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셨음에도 그들을 향한 ‘고발’과 ‘공격’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논쟁에서 탁월함을 보이셨습니다. 논쟁에 지친 예수님을 ‘위안’(慰安)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가난한 한 과부였습니다. 자신의 모두를 털어 넣은 과부의 봉헌은, 2독서 히브리서 말씀처럼, 완전한 희생제물로 자신의 전부를 봉헌하실 십자가 사건의 예시(豫示)였습니다.

사흘째 해질 무렵, 논쟁을 끝내신 예수님은 베다니아로 가기 위해 “성전을 떠나 나오십니다.” 우리는 이 평범해 보이는 구절에 좀 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때 “성전을 떠나 나오신” 다음 ‘다시는’ 그 성전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십자가 사건’ 후에도 그 성전은 40년이나 더 위용(威容)을 과시했지만, 더 이상 ‘주님이 찾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없는 성전이 다 무슨 소용이며, 그 많은 희생제물과 사제들, 화려함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것은 한국의 그 많은 성당(성전, 예배당)에도 진실이며, 특히 ‘주님의 성전’이라 불리는 우리 ‘마음’에도 진실입니다.

연중31주일, 예수께서 율법학자에게 ‘율법의 정수’(精髓, essence)인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지상의 중심’이라 믿었고, 현실적으로도 예루살렘은 유다 사회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추’였습니다. 특히 ‘성전’은 하느님이 임재 해 계시는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는 ‘중심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공생애 마지막, 예수님은 지상의 중심이자, 가장 성스러운 중심이 자리한 그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당당히 걸어가십니다.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세 차례나 예고하셨습니다. 수난입니다. 다시 말해 ‘중심’이라 불리는 그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곳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루살렘’(성전)을 차지한 종교·정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 인류의 완전한 대속(代贖)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존재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예루살렘(성전)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이 예수님께 그런 곳이듯이 우리에게는 그 예루살렘이 ‘마음의 중심자리’(왕좌)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세례 때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실 수 없어 떠나시면, 나는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사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가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여전히 내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대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과 그 자리를 내놓으라고 지속적으로 ‘논쟁’하고 있는 중입니다(관련 설교를 읽을 분은 2018.2.25. 사순2주일을 참고하세요). 그 논쟁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빚어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그들과의 논쟁은 나를 위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논쟁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대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은 어떤 ‘나’입니까? 여전히 내 마음의 왕좌를 놓고 ‘사랑의 예수께’ 그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고 논쟁하고 있는 그들은 어떤 ‘나’입니까? 내 마음에 있는 ‘대사제’는 ‘자기 주도성’을 상징합니다. 대사제가 제사의 우두머리, 대장 노릇하듯이 내 마음에는 ‘자기 뜻대로만’(자기 고집, 아집대로만) 하려는 ‘대사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원로’는 나의 오래된 ‘습’(習)을 상징합니다. 나에게는 과거로부터 형성된 오래된 자기 인식(생각, 세계관, 관점), 습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뿌리가 깊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율법학자’(당대의 지식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특히 ‘과거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나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이 참 많습니다. 그 지식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어느 때는 ‘안다’고 하는 그 지식이 나 뿐 아니라 ‘관계’를 죽입니다. 더욱이 그 지식으로 나는 ‘그리스도를 재단’(裁斷)까지 합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에 맞지 않는 그리스도를 만날 경우에는 여지없이 ‘처형’해 버립니다. 그 처형에는 ‘대사제’와 ‘원로’도 함께 합니다. 한마디로 대사제, 원로, 율법학자는 내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옛 자아’(ego)입니다. 그들은 똘똘 뭉쳐서 사랑의 주님께 마음의 왕좌를 결코 내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왕좌’ 내놓기를 끝내 거절할 때, 예수님은 연민 속에서 우리 마음의 성전을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새 생명’도 끝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의 성전에서 떠나시면 내 생명은 헛됩니다. 진정 그렇습니다. 사실 내 마음이 힘든 이유는 그 ‘마음의 왕좌’(성전)에 특권을 요구하는 대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눈을 감고 귀를 닫습니다. 깊은 침묵입니다. 기도의 시작입니다.

“우주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침묵 속에서 주님께 나를 묻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나를 듣습니다. 주님께 나를 묻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나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 고전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정화, 조명, 일치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가난, 정결, 순명입니다. 길, 진리, 생명입니다. 주님께 나를 한번 물을 때 나는 한 걸음 내 마음의 중심으로 향합니다. 있어야할 자리, 걸어야할 길 위에 있지 않던 내가 제자리를 향해 가는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는 나를 한번 듣는 일은 그 다음으로 무엇을 물어야할지 ‘빛을 선물 받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를 묻고 주님께 나를 들으며 깊이로 내려가다 보면 내 마음의 중심, 즉 예루살렘 성전(마음의 왕좌)에 가 닿습니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마음의 왕좌’(성전)를 차지하고 있는 대사제와 원로와 율법학자들이 거닐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자신이 아니라 대사제와 원로와 율법학자로 살아온 자신의 ‘불편한 진실’(옛 자아)들을 발견합니다. 왕좌의 진정한 주인이신 분이 왔으니 자리를 내드리라 말을 건네도 그들은 그 특권을 누려온 자리에서 좀체 물러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손을 잡고 계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주님으로부터 또 ‘한 말씀’ 선물 받습니다. 결코 물러서려들지 않는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님으로부터 명령을 듣습니다. “목을 치라.” 대사제의 머리, 원로의 머리, 율법학자의 “머리를 자르라”는 명령입니다. 한마디로 내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옛 자아’(ego)를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대사제와 원로와 율법학자로 살아온 자신의 ‘불편한 진실’(옛 자아)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순간입니다. “목을 치고, 머리를 자르는 일”은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진짜 자기 목을 쳐야합니까? ‘이냐시오’ 영신수행자들처럼 ‘상상력’을 동원해 그렇게 하는 일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습니다. 그러나 목을 치고, 머리를 자르는 일은 그런 상상력을 사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 ‘묻고 듣는 일’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온전한 신뢰 속에서 말입니다. 주님을 배제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과 아집으로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형성된 오래된 ‘인식의 습’(習, 관점, 세계관)대로 행하는 일도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처음의 자리에서 묻고 ‘한 말씀’ 들어서 살아가는 ‘지속적인 기도’를 뜻합니다. 듣기 전에는 행하지 않겠다고 침묵 속에 앉아있는 일,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이며,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깊은 침묵의 기도 속에서 자신의 ‘불편한 진실’(옛 자아)들을 직면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목을 쳐서 머리를 자르는 일, 그런 나를 죽여 제물로 바쳐야 하는 그 제사는 고통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 때문에 기도하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주님께 묻고 듣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자아의 죽음’을 통해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자기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의 왕좌’를 온전히 차지하셔야 만이 우리는 진정한 성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성전은 평화이지만, 그렇지 않은 성전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인다 해도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라는 그 한 구절을 붙잡고 우리가 묵상해 볼만한 충분한 이유입니다. 사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이 한 구절의 풀이입니다.

הַכֹּתֶל הַמַּעֲרָבִי, HaKotel HaMa’arav

그 때 제자 한 사람이 ‘성전산’에 세워진 그 위대한 건축물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 만합니까?
마르 13:1b

그는 ‘건축물’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유대교의 중심 역할을 해 온 곳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라 믿던 곳입니다. 그는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성전은 예수님이 탄생하던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헤로데’가 증개축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이 있던 그 때까지도 ‘헤로데 대왕’ 때 시작된 성전 바깥뜰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까지 걸린 기간이 46년이라고 말합니다(요한 2:20). 기록에 따르면 성전 총 공사기간은 80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그 때는 주후 65년경으로 헤로데 대왕의 증손자(헤로데 아그리빠, 사도 25:13)가 분봉왕으로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불과 5년만인 주후 70년, ‘유대독립전쟁’을 진압한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그 ‘헤로데 성전’을 바닥까지 철저히 파괴해 버립니다.

이런 비극을 전혀 예상할리 없는 ‘헤로데’(헤로데 대왕)는 즈룹바벨이 소박하게 세운 제 2성전을 엄청난 크기로 증개축 했습니다. 그가 바깥뜰을 넓히기 위해 밑에서부터 쌓아올린 거대한 돌들의 일부가 여전히 ‘서쪽 벽’(western wall, 통곡의 벽)의 형태로 오늘날도 남아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고고학자들도 헤로데가 증개축한 성전이 예수님 당시 고대근동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을 것이라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감탄하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저 웅장한 건물들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르 13:2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지상의 중심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이 임재 해 계신 가장 거룩한 곳이라 믿던 곳입니다. 그런 성전이 파괴된다는 말씀은 ‘유대교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말이 새나가서 성전당국자들 귀에 들어갔다가는 큰일 날 소리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과월절 축제를 앞둔 그 시점에 성전파괴를 예언하신 것입니까?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야할 이유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틀째 되던 날 이미 밝히셨습니다. ‘성전정화’ 사건입니다(마르 11:15-17). 본래 그들이 성전에서 지키던 제의와 과월절 축제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들을 ‘선택’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고, 그 정신을 다시금 구현하고자 지키는 축제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의 축제(제의)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려야할 자유와 해방에 더 이상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축제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타락과 부패, 억압과 착취에 기여하는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그 ‘강도’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언뜻 듣기에는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깃털이고, ‘몸통’은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같은 유다 사회의 특권층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정치, 종교, 경제의 최대 수혜자들입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정치,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했습니다. 도시 전체의 경제가 ‘성전’에 의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해마다 3차례 의무적으로 ‘성전’을 순례하여 축제를 지키도록 명령합니다(출애 23:14-17).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다른 축제들도 지켜졌지만, 이 세 축제는 출애굽과 연결된 사건이기에 더욱 특별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기에 율법학자들은 내국인이라면 해마다 한 번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살던 일명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평생 한 번은 성지순례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물론 평생의 꿈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그 도시가 축제기간이 되면 30만 명까지 인구가 치솟습니다. 안팎에서 찾아든 순례자들 때문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순례자들이 축제기간 동안 유입되면 ‘숙박’과 ‘물’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물은 식수로도 중요했지만 ‘정결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한편, 그 많은 순례자들은 도시에 ‘부’(富)를 가져왔습니다. 축제기간 숙박비로 많은 돈을 썼고, 기념품도 샀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주요도로는 그야말로 도시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한마디로 ‘헤로데 성전’은 예루살렘에 엄청난 ‘수익’을 발생시켰습니다.

특히 대사제들은 해마다 열리는 연속된 ‘축제들’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습니다. ‘부’(富)를 축적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희생제물’ 거래입니다. 순례자들은 성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정결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연 ‘희생제물’이 필요합니다. 멀리서부터 ‘희생제물’을 가져올 수 없으니 ‘현지조달’ 해야 합니다. 바로 이 현지조달에 ‘성전상인들’과 ‘대사제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전세 환전’입니다. 로마는 세리를 통해 제국의 통치에 필요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세금에는 ‘속주세’(屬州稅)와 기타 ‘직접세’(인두세, 토지세, 소득세)와 간접세(관세, 통행세, 판매세)가 있었습니다. 이 세금 외에도 20세 이상의 유대 성인 남성이라면 일종의 ‘종교세’(성전세, 십일조 등)를 성전에 내야했습니다.

‘성전세’는 율법에 따라 반 ‘세겔’을 내야하는데(출 30:11-16), 오늘날로 치면 성인 이틀 분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성전세로 통용되던 ‘세겔’은 ‘띠로’에서 주조된 동전이었습니다. 그 동전에는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십계명에 어긋났지만 ‘무게’가 정확하고, ‘순은’(銀)에 가깝다는 이유로 율법학자들은 공식화폐로 인정했습니다. 성전세는 ‘거주지’에서 제사장들이 거두었고(마태 17:24-27), 종교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의 땅을 제사장들은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의 경우는 ‘세겔’로 ‘환전’해서 직접 성전에 내야 했습니다. 안 내고도 낸 척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처럼 순례까지 온 이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면서 거짓말 할리는 없습니다. 더욱이 성전세는 율법의 명령입니다. 여기에도 ‘환전상’과 ‘대사제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순례자들은 구제를 위한 헌금도 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과 순례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엄청난 양의 성전세와 십일조, 구제 헌금이 성전 경내 ‘여인의 뜰’에 있던 ‘성전보물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축제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사제 가문의 막대한 ‘부’(富) 축적의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몸통’의 하나인 대다수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거룩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백성은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며 신뢰했고, 존경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당시 ‘변질’되었습니다. 대사제 가문의 ‘이권 개입’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 역시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부과하고(마태 23:4), 말솜씨를 부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며(마르 12:40), 돈을 좋아하던(루가 16:14-15) ‘위선자들’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마태 23:2-39).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몸통’의 마지막은 ‘산헤드린’(최고법정, 최고의회)의 ‘원로들’입니다. 그들도 대제사장 가문과 한 통속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사두가이파 출신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주전 2세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을 쥐고서 세력을 키웠던 이들로 ‘제사장 조직이 정치화된 당파’입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 하고는 거리를 두었지만 ‘로마제국’과는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산헤드린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산헤드린의 ‘의장’이 바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현실 종교, 정치의 실세들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과부의 봉헌’ 이야기를 살핀 바 있는데, 생활비 모두를 봉헌한 그 과부의 믿음은 분명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상징되는 당시 ‘기득권세력의 착취’를 싸잡아 정면으로 비판하신 셈입니다. 헌금이라는 거룩한 명목으로 과부의 돈과 가산을 등쳐먹던 특권층들 말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체제’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려야할 자유와 해방에 기여하기 보다는 타락과 부패,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었습니다. 특권층만을 위해 봉사하는 성전이라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좁게는 ‘성전정화 사건’이었고, 넓게는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종식을 예고’하신 사건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웅장하고, 풍부한 전통을 자랑하며, 형식이 화려하다 하더라도,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성전’을 하느님은 혐오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서기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이유입니다.

고요히 묵상해 봅니다. 나에게서 무너져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대사제, 원로,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옛 자아’에 대해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무너뜨려야 할 그 웅장한 건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화려하고 웅장하며 단단해서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그 건물… 각자 다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나오는 고집, 아집(집착, 세계관), 성질머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옛 자아…’ 한마디로 무너져야할 그 ‘웅장한 건물’을 자기 ‘바깥세상’으로만 한정해서 볼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 후반부는(3-8) 재난(종말)의 ‘시기’와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은 13장 끝에 가서야 나옵니다(28-37절).

예수님은 지금 ‘올리브 산’에 앉아 ‘성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성전이 세워진 ‘성전 산’과 ‘올리브 산’ 사이에는 ‘키드론’ 골짜기가 있습니다. ‘올리브 산’에서 보이던 성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요세푸스’는 성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대리석과 금으로 덮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눈 덮인 산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다는 그의 묘사는 신빙성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에는 대리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리석으로 지으려면 그리스나 터키 지역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대리석이 수입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요세푸스가 대리석으로 오해한 ‘돌’이 사실은 흰색 벽돌과 광택을 낸 치장 벽토 때문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아무튼 아침햇살과 석양이질 무렵이면 성전은 흰빛과 황금빛으로 빛났습니다.

성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제자들의 마음에 두 가지 질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역사의 종말’로 이해한 예루살렘에 불어 닥칠 ‘재난의 시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종말이 이루어질 무렵에 나타날 ‘징조’(sign)입니다. ‘언제’와 ‘어떻게’입니다. 사실 성전에서 나오시던 예수님이 성전파괴 예언을 하실 때 그들의 머릿속에는 옛날의 한 사건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바빌론제국’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파괴한 일과 선조들이 포로로 끌려간 일입니다. 자기종교와 민족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주님께 ‘처음으로’ 부름 받은 ‘네 명’의 제자가 ‘따로’(은밀히) 찾아와 묻습니다. 마르코의 문학적 솜씨가 참 뛰어납니다. 마지막, 즉 ‘종말’을 이야기하기 위해 ‘처음’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마르 13:4a

먼저 자신들이 ‘역사의 종말’로 동일시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재난의 시기’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오직 ‘아버지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3:32). 그러나 역사에서 이 권한을 넘본 어리석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날짜를 특정했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문자적으로 집착했습니다. 가령 구원받을 사람을 ‘십사만 사천’ 명으로 ‘제한’하여 주장하는 이들입니다(묵시 14:1). 1독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숫자 상징’은 묵시문학 뿐 아니라 성경이 메시지를 전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이 ‘숫자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숫자가 성경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쓰이면서 갖는 규칙적인 ‘의미’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반복성’과 ‘규칙성’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의 발견’입니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 상징도 그렇습니다. 이 숫자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구원으로의 초대가 ‘일부’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아전인수(我田引水) 해석을 하면서 문자적인 ‘십사만 사천’ 명에 들어야한다고 홀리는 집단이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날짜를 특정하거나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문자적으로 집착한 이들은 결국 실패했고, 실패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제자들이 묻던 그 ‘언제’(역사의 종말)를 예수께서 특정 날짜로 확정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권한으로 못을 박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위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무너져야할 그 ‘웅장한 건물’을 ‘바깥세상’으로만 한정해서 볼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웅장한 건물이 가리키는 속뜻은 우리의 ‘옛 자아’를 말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은 어찌 보면 우리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작은 종말의 순간’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시게 하는(성령이 오시는) 그 순간은 우리의 ‘옛 자아’를 왕좌에서 내쫓는 ‘종말의 순간’입니다. 그 종말은 먼 훗날이나 우리 종생(終生)의 순간에 가서나 일어날 일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야 합니다. 사실 우리 마음의 세계에서 무너질 것들이 무너지는 ‘종말’을 맞이해야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집’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종말은 새로운 시작의 처음’이기도 합니다.

물론 ‘옛 자아’를 무너뜨리는 일, 즉 자기를 ‘비우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무너뜨리는 방법은 ‘기도수행’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바에 따르면, 고통스럽지 않으면, 괴롭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께 묻고 듣습니다. 진짜 무너지기(비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진짜 종말을 맞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빚어지고, 다시 세워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무너짐, 자기 비움의 기도를 감행하여 ‘옛 자아의 종말’을 맞이하려는 ‘용기’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로부터 나옵니다. 다시 세워지고 빚어지는 숭고한 삶의 시작은 ‘사랑의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운명을 다했구나!” – 마태 23:37

이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 이루어질 무렵에는 어떤 징조가 나타겠습니까?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르 13:4b

예수님의 말씀을 역사의 종말로 이해한 그들은 ‘재난의 징조’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묵시문학적’ 색채를 띠고 나머지 부분에 이어집니다(5-27절).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재림)이 있기 전 일어날 전반적인 흐름을 알려주십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의 기록 연대를 주후 70-73년경으로 잡습니다. 그 시기는 ‘로마의 대화재’(주후 64년)로 야기된 ‘네로’(Nero,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주후 37년~68년)의 그리스도인 박해, ‘유대독립전쟁’(주후 66-73)으로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시기입니다. 시절이 몹시 혼란스럽고 어려우면 현(現) 세상이 어서 끝나고, 새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하곤 합니다. 묵시적 ‘종말론’입니다. 이 종말론의 영향을 받아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고난 속에 있던 교회에게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사후(事後) 예언’ 형식으로 대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복음서를 기록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역사의 종말’(재림)이 있기 전 일어날 전반적인 흐름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저는 주님이 말씀하신 무너져야할 그 ‘웅장한 건물’을 ‘바깥세상’으로만 한정해서 볼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습니다. 그 웅장한 건물이 가리키는 속뜻은 우리의 ‘옛 자아’를 말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역사의 종말’로 동일시한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는 ‘재난의 시기’는 자신의 ‘옛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왕좌에서 옛 자아를 내쫓고 마음의 왕좌를 주님이 차지하시게 하는(성령이 오시는) 그 순간이 ‘종말의 시기’라고 언급했습니다. 그 재난의 시기는 멋 훗날이나 우리 종생(終生)의 순간이 아니라 자신의 옛 자아가 무너지는 ‘오늘’로 볼 수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질문한 ‘징조’ 역시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러 오실 때, 다시 말해 성령(진리, 진실)이 오실 때 일어나는 일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르 13:6

예수님은 먼저 ‘거짓 그리스도’의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떠들어대면서 사람들을 홀릴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이들이 널렸습니다. 더욱이 ‘거짓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진짜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봉헌(희생)하지 않고 군림하는 자칭 ‘재림주’들은 결코 ‘사랑의 예수님’을 대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 ‘오늘’ 악에 침묵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기에 우리가 깨달아야할 진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우리가 속지 않아야할 그 ‘아무’는 과연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가장 잘 속을까요?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속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내 신앙’에 잘 속습니다.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다’는, ‘그리스도’나 ‘믿다’라고 하는 그 말의 ‘개념들’(논리)에 우리는 속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개념’들은 언뜻 듣기에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손에 잡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말, 그 ‘논리’에 우리는 스스로 잘 속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병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종말’이 있기 전 ‘난리(전염병), 전쟁, 지진, 흉년의 소문’이 들려올 것이라 상기시켜주십니다(7-8절a). 이런 재난들은 종말을 알리기 위해 묵시문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소재들입니다.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 난리, 전쟁, 지진, 흉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도 인간의 역사를 채워온 불행한 사건들입니다. 더욱이 복음서 독서로는 읽지 않았지만, ‘신앙’으로 인한 박해와 핍박, 정말이지 무서운 재난도 닥쳐올 것입니다(9-23절). 분명 그런 불행한 재난을 겪으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종말이 곧 세상의 종말은 아니었듯이 그런 재난들조차도 결코 ‘끝’은 아닙니다. 재난들은 단지 ‘종말’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음에 대한 ‘구체적인 징조’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재난들이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8절b). 다른 말로 하면 ‘해산’(解產)이 임박한 산모에게 진통의 주기가 반복되고 짧아지며 더 커지듯이 재난의 빈도는 잦아지고, 그 위력(威力) 역시 더 증가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종말의 징조 역시 바깥세상에 대한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날’이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시러 오는 ‘오늘’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늘’ 들어오시면, ‘진실’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성전에 ‘오늘’ 당도하시면, 내 안에서 벌어지는 ‘징조’들이 있습니다. 실상과 허상, 진상과 허상이 대판거리로 싸우는 일종의 ‘난리 상태’입니다. 옛 세계관과 새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는 ‘전쟁 상태’입니다. 그동안 자신을 안전하게 구축해왔던 ‘토대’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태’입니다. 자신을 지탱해 왔던 기존의 인식(관점)들이 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진 상태’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즐겨 먹어왔던 ‘음식’(돈, 권력, 명예, 성, 마약, 술 등등)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기근(흉년) 상태’입니다. 그 음식이 진짜 먹어야할 음식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그런 가짜들로부터는 먹을 수 없음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 가짜들이 더 이상 자기 인생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루가복음이 전하는 ‘되찾은 작은 아들처럼’(루가 15:11-32) 말입니다.

루가복음이 전하는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자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쥐엄나무 열매가 자신이 먹어야 할 양식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방탕하게 살며 먹어온 그 음식들이 자신이 먹어야할 참된 음식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많을 뿐 아니라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그가 진짜 먹어야할 음식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늘’ 들어오시면, ‘진실’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성전에 ‘오늘’ 당도하시면, 우리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즐겨 먹어왔던 ‘음식’들이 먹을 수 없는 가짜였음을 깨닫습니다. 더 이상 그런 가짜들로부터는 먹을 수 없음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먹어야할 ‘참된 양식’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찬례는 바로 이 ‘참된 양식’을 받아 모시는 순간이고, ‘기근’(흉년)에 시달리던 우리 영혼을 살리는 ‘한 말씀을 듣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왕좌에 당도하시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말의 징조는 우리 자신이 ‘새로 빚어지고 탄생하는 시작’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그런 종말의 징조들이, 다시 말해 ‘어둠’이 가장 깊었을 때가 ‘새벽’이 가장 가까운 시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복음서는 종말의 징조들을 알리는 재난들을 열거한 후에 그 재난들이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라는 말씀과 함께 끝이 납니다(8절b).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결론으로 안내하는 독서도 없이 중간에서 뚝 끝이 납니다. 어쩌면 의도된 배정(配定)일 수도 있습니다. ‘종말’은, 또 우리의 ‘종생’(終生)은 그렇게 불현 듯 찾아들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깥세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도 읽어보자고 지금까지 설명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옛 자아’가 종말을 맞고 ‘오늘’ 우리가 ‘새로 빚어지고, 세워지는 그 시작’이야말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흔히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는 미래의 종말보다는 ‘현재’를 사는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묵시’를 끝냅니다(28-37절). 그런 삶이 신자의 바른 삶이라는 교훈입니다.

송파교회 보물 1: 25년 전, 송파교회 어린이들이 찢어붙이기로 완성한 <승천하시는 그리스도>. 그 때의 어린이들은 다른 곳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이 남기고 간 그 때의 사랑의 흔적은 이렇게 남아 성당을 방문하는 이들을 반기도 있다. 올 여름에는 이 그림에 참여한 그 때의 어린이가 지나는 길에 들러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갔다. 성공회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어디 있든지 신앙생활 잘 하기를 축복해 주었다. 이 그림을 여러 이름으로 붙여 사용한다. <다시오실 그리스도>,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처럼 말이다(묵시 22:20).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난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시작된 종말을 상기시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중간기가 얼마나 지나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생의 기간’을 줄여주실 것입니다(마르 13:20). 참고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3절b). 해산이 임박한 산모의 빈번한 진통처럼, 거짓 그리스도는 더욱 빈번히 등장하여 사람들을 속이려 들 것이고, 재난은 더욱 빈번히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를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십시오. 이미 시작된 빈번한 진통 후에 결국 ‘새 생명’이 탄생하듯이, 어떤 재난이 불어 닥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영원한 생명)도 조만간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종말 시기와 그 징조 물음을 기록한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당시 공동체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공포가 아니라 ‘구원의 희망’을 드높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도록 격려하려는 의도에서 성령께서 마르코복음서 기자를 움직이셨습니다.

자, 이제 바깥세상과 내면세상으로의 종말의 진실을 알아차린 우리는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깥세상의 종말 시기나 징조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왕좌에서 ‘옛 자아’를 내쫓고 마음의 왕좌를 주님이 차지하시게 하는(성령이 오시는) ‘오늘의 종말’과 ‘징조들’을 알아차리는 일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안개처럼, 이슬처럼 사라질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집단들처럼 어차피 세상은 끝날 것이라면서 현실도피로 살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묵시는 항상 ‘현재’에 주목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서로 격려하고, 사랑과 좋은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삶의 자리마다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오늘’ 일구어야 합니다. 오늘 성령이 오시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늘 사람으로 새로 빚어주시고 세워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원한 대사제,
하늘 성전의 최고사제이신 주 예수님,
지금 여기 연약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찬미하나이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로 구성된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수험생과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홍비비안나, 임스텔라, 박창언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11.18. 연중33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18.11.25.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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