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6. 부활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영생의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주일 감사성찬례 본문

성서정과 본문은 여기

  • 1독서 – 사도 10:34-43
  • 시편 – 118:1-2, 14-43
  • 2독서 – 골로 3:1-4
  • 복음서 – 요한 20:1-18(마태 28:1-10)

 

오늘 시편 기자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이 날은 야훼께서 내신 날,
다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그렇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법칙을 바꾸러 개입하신 날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던 죄와 죽음은 ‘오늘’ 무효화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죄와 죽음을 완전히 정복한 사랑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 준 이 은혜로운 구원을 무엇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3주기입니다. 사랑하는 임의 시신을 잃어버린 마리아를 통해 세월호 미수습자의 가족을 봅니다. 마리아는 다만 그 시신만이라도 되찾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지막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시신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찾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은 것 같은 그녀를 부활하신 주님이 되살려 주셨습니다.

희생당한 영혼들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생존자들, 여전히 고통에 내몰려 있는 유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미수습자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시신 확인이 안 돼 유가족으로도 불리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은 것 같은 그들을 되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유가족과 희생당한 모든 이들을 부활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니, 주님께만 맡겨 둘 일이 아니라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 일이 뭘까요?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사실, 부활이란 진실이 밝혀진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그렇게 증언 했습니다. 대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이 옳았음을 하느님이 부활로써 밝혀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오늘부터 50일 동안 이 ‘위대한 신조’를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우리 전례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모인 목적을 명확히 정의합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이자 교회의 존재 근거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영광의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영생의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본기도는 이 세상의 현실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 받은 은혜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영생의 문에 들어선 부활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죄와 죽음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전쟁, 테러, 폭력, 기근, 가난, 차별로 가득한 부조리한 세상, 구조악이 지배하는 세상 말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우리보다 더 신음하며 아파하는 이들을 봅니다. 그들을 주목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의 이유를 묻게 됩니다. 거짓과 불의에 저항하다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삶에 동참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그 묵상을 통해 부활이란, 삶의 진실을 위해 부조리와 구조악에 항거한 이의 차지임을 발견합니다. 비로소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에 동참함 없이 부활도 없습니다. 진실에 대한 추구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조리와 구조악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들과의 연대로 나아갑니다. ‘이미’ 영생의 문에 들어선 부활의 사람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걷다 핍박을 받아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거짓과 불의를 선동하는 세력의 힘에 굴복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이긴 싸움이고, 그런 삶이야말로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삶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서서 ‘진실의 승리’를, ‘생명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성가 578장을 아십니까? 첫 소절을 불러봅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을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좋아하시는 곡입니까? 저는 2015성가개편위원으로 5년여를 일했습니다. 새 곡 선정을 확정한 뒤로는 ‘가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 성가 가사 전체를 검토했습니다. 외국곡은 위원들에게 무작위로 분배하여 가사 번역을 했습니다. 작사를 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노래로 불릴 수 있도록 운율을 갖추는 일은 피를 말립니다. 이렇게 검토된 가사는 음악소위원회를 거쳐 분류색인 소위원회로 넘겨졌습니다.

개편 막바지, 같이 일하던 이한오 사제가 돌연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그 바람에 저작권 단체에 서신 보내는 일까지 대신했습니다. 더욱이 ‘주일 권장성가’ 작업까지 추가로 맡았습니다. 그 일이 끝나야 최종판을 출판사에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 해 인생의 봄날들을 딴 짓 않고 오롯이 주님께 바치게 해 주신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외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위원장의 탁월한 섬김과 위원들의 사명감이 오늘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성가를 사용할 때마다 개편위원들의 수고를 기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부활’로 분류된 2015성가를 재음미해 보았습니다. 가만 들여다보면 ‘에제키엘’이 봤던 마른 뼈들처럼, ‘음표’들이 골짜기에 걸려서 으스스 해 보입니다. 그 뼈들에 입김이 가 닿을 때 살아 움직이는 군대가 되기도 하고, 춤추는 나비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영화를 찍다가 손길이 머문 곳이 578장입니다. 흥얼거려보다가 ‘어!’ 하고 귀가 밝아집니다. 이 곡 분류는 ‘일반’입니다.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일반’보다는 ‘부활’이 적절해 보입니다. 가사를 음미해 보십시오. 누가 떠오릅니까? 그렇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인생 여정의 어느 시점에 ‘그 신비한 사건’을 회상합니다. 1절은 장미 송이들이 아직 이슬을 머금고 있는 새벽입니다. 새벽은 늘 신비롭고 신성합니다. 대지는 새 날을 맞이하기 위해 잠에서 깨어납니다.

하지만 그 새벽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잃은 슬픔에 잠긴 그녀는 그 무덤이 있던 동산을 홀로 찾습니다. 도착해 보니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고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절망의 어둠이 짙어집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갑자기 빛줄기가 쏟아져 내려와 그녀의 영혼과 대지를 깨웁니다.

2절은 울던 새도 잠잠케 할 정도로 청아한 주님의 음성이 쟁쟁하다는 회상입니다. 감미롭게 속삭이는 주님과 함께 장미가 만발한 동산을 거니는 그녀의 기쁨에 찬 얼굴이 보입니다. 보금자리를 찾은 새처럼 의심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동산은 평화가 가득합니다.

3절은 그 평화의 동산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는 회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파송하십니다. 마치 모든 깨달음의 도는 저잣거리에서 완성된다는 교훈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그 날 일을 들려주다말고 그녀는 은근한 미소를 짓습니다. 주님과 나눈 기쁨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아마도 체험을 다 담아낼 수 없는 말의 한계 때문이겠지요.

성가를 부르는 동안 바로 그 마리아가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울림을 받습니다. 여기까지가 분류를 ‘부활’로 잡아야한다는 이유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요한복음서 부활이야기에 따르면 첫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반응과 일어난 일을 깨닫는 과정은 우리가 삶의 현실을 다루는 과정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우리도 종종 슬픈 마리아가 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의 갑작스런 별세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지금껏 일해 온 회사의 부도로 갑자기 일자리를 잃기도 합니다. 기침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예후가 좋지 않다는 갑작스런 진단을 받기도 합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별 탈 없어 보이던 관계가 갑자기 파국을 맞기도 합니다. 다 성사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틀어졌다는 연락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슬픈 마리아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무지와 억측과 분노에 빠진 마리아가 됩니다. 돌이 치워진 것은 하느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덤이 빈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 진실에 무지한 그녀는 달음질하여 자신의 억측을 퍼뜨립니다. “누군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억측을 진실인 것처럼 퍼뜨리고 모두를 당황케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가족, 이웃, 교우와의 관계가 힘들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주장, 자기경험을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억측에 불과한 생각을 진실이라 고집하며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을 때 분노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무지와 억측과 분노에 사로잡힌 마리아입니다.

또 우리는 도움의 손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리아가 됩니다. 우리가 슬픔과 무지, 억측과 분노에 빠져 있을 때 하느님은 그냥 보아 두지 못합니다. 천사들을 시켜 도우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방문을 놓칩니다. 기적의 손길이 바로 코앞에 있는 데도 신세 한탄을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리석은 마리아입니다.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이런 죄와 비극이 눈과 귀를 가립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냥 눈과 귀를 열어주시려 애쓰십니다. 물론 죄와 비극이 때로는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의 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찾아오신 주님을 낯선 사람 취급합니다. 틀림없이 ‘그 목소리’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그분은 ‘이미 죽었다’고 무시합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며 공감하시는 주님을 마리아처럼 오해합니다. 바로 코앞에서 ‘익숙한’ 음성을 들으면서도 말입니다. 찾고 있던 분이 바로 눈앞에 계신 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내 옆의 이웃이 내가 찾던 바로 그 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치곤 합니다.

그녀의 이름을 주님은 다정스레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정말 그 목소립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인 준 알지만, 너무나 ‘친숙한’ 목소립니다.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이건 불가능해!’ 그 다정스런 음성이 빛줄기처럼 마음을 관통해 들어옵니다. 순간,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세상에, 주님이 살아계시다니!’ 갑자기 그녀는 장미처럼 피어납니다. 타고 남은 재처럼 연기만 피우던 인생이 갑자기 불꽃으로 타오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그 ‘다정한’ 음성이 영혼을 비추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머리로만 알아왔던 진리를 가슴으로 생생하게 깨닫습니다. 체험될 수는 있지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부활의 기쁨이 노래로 터져 나오는 순간입니다. 그 기쁨의 노래는 마음을 좀먹는 슬픔과 절망, 무지와 억측의 소음을 삼킵니다. 분노와 고집스러움, 우울과 어리석음의 불협화음을 조율해냅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으로 가득 찬 날입니다. 그 음성은 크거나 거만하지 않습니다. 울던 새도 잠잠케 하는 ‘청아한 음성’입니다. 사랑스럽게 우리의 이름을 반복해서 속삭여주시는 ‘평화의 음성’입니다.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상은 소음과 불협화음으로 우리를 시달리게 함으로써 그 청아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 내면에서 생겨난 소음과 불협화음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자기 내면을 살피십시오. 외부의 소음과 불협화음을 차단하십시오. 우리는 소음과 불협화음에 시달리라고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승리의 노래를,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라고 창조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그 ‘익숙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성가’를 통해 그 ‘친숙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사제’를 통해 여러분을 불러주십니다. 서로 나누는 ‘평화의 인사’를 통해 이름을 ‘다정스레’ 불러주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완성했으니 “다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성찬례에 초대하십니다. 저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꽃들과 보도블록 사이 피어난 민들레, 날로 푸르러 가는 나무가 주님이 불러주시는 초대장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들 속에서 사랑스럽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을 알아차리고 마리아처럼 기쁨으로 깨어나십시오.

가서, 주님의 부활을 전하십시오. 가서, 마리아처럼 사순절 여정에 지친 이웃을 격려하십시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보듬어 주십시오. 그들의 오랜 피곤과 혼란과 의심이 사라지게 하는 또 다른 마리아로 손 내밀어 주십시오. 주님과 동행하며 나누는 기쁨의 노래를 천천히 들려주십시오. 그들도 마리아처럼 되살아나게 하십시오. 그들도 우리처럼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게 하십시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을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험한 세상에 할 일 많으니 너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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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개월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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