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1. 연중32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신의(信義) 지키시는 하느님이 가치를 알아주시는 봉헌을 사시오.’입니다. 복음서는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봉헌하는 사람들을 보시는 예수님을 전해줍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봉헌하는지 주목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예물을 바치느냐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동기로 봉헌하는지 더 관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장 값진 봉헌으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나이다. 비오니,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의 삶을 봉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으로 다시 오실 때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열왕상 17:8-16
  • 시편 – 146
  • 2독서 – 히브 9:24-28
  • 복음서 – 마르 12:38-44

연중 3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신의(信義) 지키시는 하느님이 가치를 알아주시는 봉헌을 사시오.’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 ‘진보’(進步)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의 균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그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특권과 반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선포였습니다. 참 세련된 문구이지만, 그 문구로부터도 소외되는 이들에게 자꾸 눈이 갔습니다.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과정에조차 들지 못하며, 결과를 기다릴 여유조차 없는 ‘가난한 이들’ 말입니다. 본래 문구가 지나치게 세련되면 체감되는 현실성은 떨어지는 법입니다. 동사(動詞)를 명사(名詞)로 바꿀 때의 한계입니다.

성경의 정신에 따르면, ‘진보’(進步) 세상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사회, 사회적 약자들을 편애하는 사회’입니다. 부자나 많이 배운 사람들보다 가난한 이들(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더 많이 반영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어린이(고아), 여성(과부), 한부모 가정,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나그네), 다문화, 난민 등이 살기에 더 안전한 사회입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명예든, 신앙이든 ‘가진 이들’이 삶에서 받은 은총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사회입니다. 더욱이 가난한 이들이 섬김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사회입니다. 가진 이들이 자기 삶의 ‘불편한 진실들’에 눈을 떠서 구원을 얻도록 가난한 이들이 봉사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한마디로 가난한 이들도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회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사회’는 가장 진보한 사회인 ‘하느님 나라’를 닮았습니다. 선포하신 말씀의 ‘신의’(信義)를 항상 굳게 지키시는 하느님은 오늘도 그런 사회,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은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는 소중한 이야기들입니다. 1독서는 서로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감동스런 예시입니다. 시편은 그런 세상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신의’(信義)를 찬미합니다. 2독서는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바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우리도 서로의 구원에 봉사하는 값진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율법학자들과 부자들, 그리고 신의(信義)를 지키시는 하느님이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봉헌을 바치며 새 세상에 기여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는 열왕기상입니다. 하느님이 가난한 ‘과부’를 시켜 예언자 ‘엘리야’를 먹이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봉사를 통해 도리어 가난한 과부가 ‘화수분’ 같은 음식 기적을 경험하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BC 9세기 중엽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야훼 신앙’을 버리고 ‘바알’로 대표되는 ‘다신’(多神)을 섬기던 ‘암흑기’였습니다. 바알의 사제들은 왕가의 비호(庇護)를 받으며 야훼의 예언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오직 7천명만을 제외하고(열왕상 19:18) 모두가 ‘바알숭배’로 넘어갔습니다. 야훼 신앙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암흑기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자신의 이름으로 웅변하던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엘리야’(EliJah, Eliah) 입니다. 그의 이름은 “나의 하느님은(Eli) 야훼이시다(Jah)”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십자가의 예수님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절규하시는데(마태 27:46), 그 ‘엘리’가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또 ‘레마 사박타니’는 ‘아람어’로 “왜”(why), 나를 버리셨습니까?”(you have forsaken me)라는 뜻입니다.

17장부터 갑자기 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요르단강 동쪽에 위치한 ‘길르앗의 티스베’ 출신입니다(열왕상 17:1). 그곳은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는 촌사람입니다. 어느 날 ‘기도’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그는 ‘길르앗’을 떠났습니다. ‘야훼 신앙’을 버린 왕국의 중심부 ‘사마리아’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도시민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세벨’이 저지른 학살에 모두가 침묵할 때(열왕상 18:4) 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암흑을 불러들인 ‘아합’ 왕 앞에 서서 자신이 기도한 내용대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
열왕상 17:1

‘엘리야’는 죽은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긴다”고 당당히 외칩니다. ‘섬긴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지상의 왕 앞에 서 있기는 하지만 아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명백히 합니다. 그 하느님이 그가 그토록 용기를 내어 외칠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이 죽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생생한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맹세한다’는 말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가뭄’의 원인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기도의 사람인 자기 자신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고보서 기자는 ‘엘리야’가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간절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기도하자 하늘은 비를 내렸고 땅에서는 곡식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야고 5:17-18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엘리야는 ‘가뭄’을 기도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 이집트에 내린 심판의 경우처럼, 다른 많은 방법들이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하느님은 ‘가뭄’을 기도하는 엘리야에게 응답하신 것일까요?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어쩌다 북왕국에서는 ‘바알’이 득세하고 ‘야훼 신앙’이 사라질 위기를 맞았던 것일까요?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 북왕국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는 암흑기였지만, 물질적으로는 최절정의 풍요와 안정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정착한 약속의 땅 ‘가나안’(Canaan)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서쪽 끝에 위치합니다. 최절정의 번영을 누리던 통일왕국은 ‘솔로몬’ 왕 사후 남북왕조로 갈라집니다(BC 931년경). 유다와 베냐민 지파 연합의 남왕국 유다와 그 외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입니다. 북왕국은 ‘비옥한 땅’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안정된 주변정세는 북왕국에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를 새로운 수도로 건설한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 시절이 그랬습니다. 더욱이 이 시기는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교류를 통해 ‘야훼 신앙’이 극도로 약화되었다는 점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토록 경고하고 혐오하던 일이 후대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아합’이 자리합니다.

‘아합’은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시돈’ 출신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적 결혼을 합니다(열왕상 16:31). ‘페니키아’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국가 연합’으로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한 ‘해상강국’입니다. 성경을 ‘바이블’(BIBLE)이라고 하는 데 페니키아의 고대 도시국가 ‘비블로스’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비블로스’가 쇠퇴한 후 ‘띠로’와 ‘시돈’이 가장 큰 도시국가로 성장했습니다. ‘띠로’보다 ‘시돈’이 먼저 생긴 도시국가였기에 페니키아 사람을 ‘시돈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결혼으로 북왕국은 안정과 번영을 더욱 누립니다. 동시에 그 결혼은 ‘가나안의 문화’를 대량으로 불러들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열왕상 16:31-33). 왜냐하면 시돈인들도 계보(系譜)로는 ‘가나안 족속’(族屬)의 한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반복적으로 ‘가나안의 문화’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고 백성들을 경고했습니다. 어떤 성격이기에 그랬을까요? 그 문화는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다신(多神)축제’로 대변됩니다. 가나안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위치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절기에 맞춰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이 비옥해 지는 일은 ‘풍작’(豐作)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런 자연현상을 그들은 종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 해의 풍작(豐作)을 ‘바알’이 지배한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만물에 ‘생명’을 주는 ‘비’는 ‘하늘의 신’(神)이자 ‘기후’를 주관하는 신(神)인 ‘바알’이 배우자인 ‘땅의 신’(神) ‘아세라’(아스다롯)와 성적결합을 할 때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성적결합을 통해 ‘생명’ 같은 비가 제때에 내려 땅이 비옥해져야 ‘다산’(多産)이 가능합니다. 이 일을 위해 함께 모여 ‘제의’(祭儀)를 지냅니다. 그 제의의 가장 중요한 순서가 ‘바알과 아세라’를 모방한 남녀의 ‘성적결합’입니다. 다시 말해 바알을 상징하는 남성과 아세라를 상징하는 신전(神殿) 창기 간의 집단 혼음(混淫)이 행해집니다. 그들의 행위가 바알과 아세라의 성적결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던 셈입니다. 모두가 물질의 풍요를 꿈꾸는 욕망의 투사입니다.

이처럼 바알에게 ‘생명’과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가나안의 ‘부도덕’을 따르는 일은 하느님의 속을 썩여 드리는 ‘역겨운 짓’이었습니다(열왕상 16:33). 한마디로 야훼 신앙을 배반한 ‘우상숭배’입니다. 더군다나 사악한 ‘이세벨’은 ‘바알’을 가져온 것도 모자라 야훼의 예언자들을 ‘학살’까지 하였습니다(열왕상 18:4). 이런 암흑기에 기도의 사람 ‘엘리야’가 등장해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열왕상 17:1).

이제 우리는 엘리야가 ‘가뭄’을 기도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이 ‘가뭄’을 심판으로 사용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생명 같은 ‘비’는 ‘바알’이 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할 목적입니다. 땅이 비옥해 지고 ‘소출’을 많이 얻게 되는 것은 다신(多神)들의 성적결합의 산물이 아님을 알게 할 목적입니다. 때마다 ‘비’를 내리시어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는 분은 야훼이심을 ‘예고된 가뭄’을 통해 똑똑히 알게 할 목적입니다. 오늘 시편의 노래처럼 야훼 하느님이 ‘창조주’(시편 146:6)이심을 알게 할 목적입니다. 바알이 아니라 야훼께서 비를 마음대로 부리시는 참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심판의 수단이 ‘가뭄’입니다. ‘삼 년 반’이 지나 가르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한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이것을 온전히 증명합니다(열왕상 18:20-40).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 야훼 하느님은 ‘가뭄’을 끝내는 ‘큰 비’까지 내려주심으로 온 백성에게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뭄이 시작되고도 ‘삼 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일어날 일입니다.

엘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왕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말을 자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저주’(詛呪)나 반란(反亂)으로 여겼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세벨도 콧방귀를 끼었습니다. 바알이 하늘의 비와 풍부한 소출을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물과 개울이 현저히 마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우연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여기저기서 ‘물’을 두고 다툼이 벌어집니다.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합은 이세벨과 더불어 바알의 신전을 찾았습니다. 소용없었습니다. 이 저주를 풀기 위해 ‘엘리야’를 지명수배 했습니다. 저주의 원인을 처형하려는 것입니다. 허사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로 하여금 요르단강 동편에 있는 ‘그릿’ 골짜기에 숨어 지내며 ‘까마귀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도록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열왕상 17:3-6).

얼마 뒤에 ‘그릿’ 골짜기의 개울마저 마르자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사렙다’로 거처를 옮기라 지시하십니다. 드디어 오늘 본문에 도달했습니다. ‘사렙다’는 어디입니까? 북왕국이나 남왕국에 속한 땅이 아닙니다. 바알숭배를 불러들이고, 야훼의 예언자들을 학살한 이세벨의 출신지인 ‘시돈’에 위치합니다. 야훼 신앙의 원수들이 살던 적지(敵地)입니다. 아마 엘리야는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말씀은 그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습니다.

거기에 한 과부가 살고 있는데 내가 그 과부로 하여금 너에게 음식을 주도록 해놓았다.
열왕상 17:9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사렙다’는 분명 ‘적지’(敵地)입니다. 게다가 과부는 고대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도 아니고 과부한테서 음식을 공급받느니 차라리 ‘그릿 골짜기’에서 버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기로 치자면 ‘까마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혹시 ‘살림이 넉넉한’이라는 말씀을 ‘과부’ 앞에 생략한 것인지도 모를 일일입니다. 그는 아합의 군사들이 지키던 국경초소를 피해 ‘사렙다’로 옮겨갑니다.

복음서에 보면 고향을 방문하셨다가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도 이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주셨다.
루가 4:24-26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찾아간 이유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놀랍습니다. 이방인 속에도 하느님의 백성이 있었다는 뜻인데, 사실 하느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보니 한 여인이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그 행동만으로도 가난한 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물 한잔 달라”고 말을 건넵니다. 먼 길에 목이 말라서 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분명 하느님은 ‘사렙다’에 한 과부가 살고 있고, 음식을 주도록 ‘명령’해 놓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별말 없이 그냥 물만 뜨러 갑니다. 그는 혹시 사람을 잘못 봤나 싶어서 확인에 들어가는 말을 합니다.

기왕이면 떡도 한 조각만 가져다주시오.
열왕상 17:11

무슨 말입니까? “오늘 사람이 찾아오면 음식을 주라고 하느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을 텐데, 그 사람이 바로 나요!”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반응합니다.

군 떡은 없습니다. 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워다가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열왕상 17:12

세상에나!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정말이지 찢어지게 가난한 처지입니다. 더군다나 굶어죽을 형편의 절망적 상태입니다. 그가 사람을 잘못 찾은 것입니까? 분명 하느님은 자신을 먹여 살릴 과부가 ‘사렙다’에 있다 하셨는데, 이 여인은 너무도 딱한 처지입니다. 혹시 하느님이 실수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비로소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아차립니다. 하느님은 그를 통해 여인에게 말씀하시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오.
열왕상 17:13a

걱정하던 여인에게 하느님이 엘리야를 통해 건네시는 ‘위로’의 한 말씀입니다. 삶의 위기와 절망 속에 있던 여인에게 건네시는 ‘희망’의 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여인이 자신의 걱정을 믿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집어 들어가서 방금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시오.
열왕상 17:13b

정말이지 잔인한 요구입니다. 아니 너무 뻔뻔합니다. 과부 모자가 이생에서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식사를 요청하다니… 도대체 그가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열왕상 17:14

이것이 그 억지스러운 요구의 이유였습니다. 그의 요구는 하느님의 위대한 말씀에 근거했습니다. 여인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의 한 마디 말씀을 신뢰할 것인지,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위대한 말씀을 신뢰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여인은 어떻게 합니까? 하느님은 순종할 마음, 즉 ‘믿음’을 여인에게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 과부는 곧 집 안에 들어가 엘리야가 말한 대로 하였다.
열왕상 17:15a

엘리야의 ‘한 마디 말씀’을 믿고 그 과부는 마지막 음식 준비에 들어갑니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합니다. 아들을 시켜 떡 한 조각을 먼저 그에게 갖다 대접합니다. 그의 ‘한 마디 말씀’을 믿고 바치는 인생일대의 ‘봉헌’입니다.

그리하여 엘리아와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열왕상 17:15b

그 때만 하더라도 여인은 몰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예정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엘리야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리하여 “사렙다로 가서 살라”고 명령하셨던 하느님의 말씀이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은 가난한 과부 모자를 향한 약속도 지키셨습니다. 엘리야와 과부 모자 모두를 살리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전한 야훼의 말씀 그대로 뒤주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다.
열왕상 17:16

그렇습니다. 과부는 가뭄의 시기에 예언자를 먹여 살리도록 선택되었고, 축복 받았으며, 그 축복대로 삼 년 반 동안 엘리야에게 봉사했습니다. 엘리야 역시 절망 속에 있던 가난한 과부 모자를 삼 년 반 동안 먹여 살리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서로를 향한 위대한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 주제처럼 하느님은 엘리야를 향한 ‘신의’(信義)를 지키셨고, 과부가 바친 봉헌의 가치를 알아주시어 ‘화수분’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는 병들어 죽었던 아들도 살림을 받습니다(열왕상 17:17-24). 엘리야뿐 아니라 과부의 믿음도 놀랍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서로를 위한 구원의 통로, 봉사의 통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느님의 ‘신의’(信義)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은 146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렙다 과부’의 찬미처럼 들립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권력가 ‘아합’을 두려워하지 않고 ‘야훼 신앙’으로 우뚝 선 ‘엘리야’의 선포처럼 들립니다.

흔히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146-150편)은 ‘대송영’(the Great Doxology)이라 불립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용기를 북돋는 “할렐루야”(야훼를 찬미하라)로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편(1-150편)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생살이의 다양한 면들을 공동체의 기도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기쁨, 애가(哀歌), 감사, 희망, 탄원, 확신, 회상, 지혜, 왕의 통치 등 그 상황이 다양합니다. 따라서 시편의 히브리어 제목인 ‘테힐림’(Tehillim, 찬가)이라 부르기에 어색한 시(詩)들도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편은 그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우리가 찬미할 수 있는 이유는(1-2절) 하느님께서 언제나 ‘신의’(信義)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6절). 세상의 권력가들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삶의 ‘희망’을 거는 이가 행복합니다(3-5절). 사람은 아무리 위세를 부려도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합니다(전도 12:7; 창세 2:7; 3:19). 그러나 하느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6절). 특히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시지 않고, 지금 여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현장에 현존해 계시며, 구원을 일으키시는 참된 임금이십니다(7-8절).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라”(이사 1:17)고 선포한 이사야 예언자를 이 시(詩)에서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에서 권력가들은(특히 정치인들은 선거철이 아니면)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지만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이들을 언제나 지독히도 ‘편드시는’(편애하시는) 자비하신 분입니다(9절). 참으로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들’을 편애하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신의’(信義) 가득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십니다(10절).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이 ‘신의’(信義) 가득한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된 것을 발견하였다고 증언합니다(루가 4:17-19).

2독서는 히브리서입니다. 나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전 연중33주일까지 계속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연중시기 계속독서는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도록 배정되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오늘 배정된 본문은 계속독서인데도 복음서의 주제어인 ‘신의(信義)를 지키시는 하느님이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봉헌을 사시오’와 상응(相應)합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히브 9:28

연중27주일부터 언급해 왔던 대로, ‘단 한 번’에 영원한 ‘속죄’(贖罪, 대속제물)를 완전히 이루시어 구원의 중재자 일을 하시는 완전하신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대속제물’로 자신을 바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우리 역시 서로의 구원에 봉사하는 값진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고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늦어지는 종말에 대해 회의를 품고 나태해지는 신자들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는 이 부분을 꾹꾹 눌러서 확신 있게 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를 향한 자신의 ‘신의’(信義)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기다림은 어떻습니까?

이제 복음서를 다룰 차례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다음 주일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십자가 수난이 있기 전까지 사건들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다 사회의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입니다. 성전 경내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거기서 ‘사회의 특권층들’, 즉 종교·정치 지도자들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논쟁을 벌이십니다(마르 11:27-12:34).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유다 사회의 가장 큰 수혜자들입니다. 그들은 지도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부과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던 위선자들입니다. 종국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잡아먹을 이리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맞서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셨음에도 ‘고발’과 ‘공격’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논쟁에서 탁월함을 보이십니다.

 

오늘 복음서는 그들과의 논쟁 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38-40)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탐욕’과 ‘위선’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율법학자들은 ‘특별한 임무’를 맡은 명예로운 사람의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어떤 임무냐면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침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임무’입니다. 그들은 당대의 ‘지식인’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며 신뢰했고, 존경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왜 이런 경고를 하신 것입니까?

먼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마르 12:38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대부분은 ‘속옷’ 하나와 ‘겉옷’ 하나를 평상복으로 입었습니다. 옷차림만 봐서는 누가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분간(分揀)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제사장이나 군인들의 복장은 달랐고, 부자나 귀족은 ‘채색’(彩色) 옷을 입었습니다. 오늘날도 복장이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전통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특히 ‘법복’(法服)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명예로운 법복 값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고 보도되면서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실 율법을 가르치는 일은 그들이 백성들로부터 물질적인 ‘선물’을 얻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율법학자들은 ‘가르침’을 대가(代價)로 돈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가가 아니라 ‘사례비’(謝禮費)처럼 일종의 선물로 주는 ‘돈’이라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호된 질책을 참고해 볼 때(40절), 그들은 ‘적은 돈’으로 사례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들을 훌륭한 말솜씨로 후려서 ‘큰 사례’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율법학자에게 돈을 주는 것이다.” 물론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퍼뜨렸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들은 ‘가르침’ 외에 ‘옷차림’까지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천주교 성당에 가보면 묵주를 든 기도 손을 모으고 관상에 든 ‘마리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머리를 덮은 채로 땅까지 길게 늘어져 끌리는(a long, flowing robe)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도 그런 식으로 길게 늘어지는 겉옷을 입었습니다. 율법에 명한 것처럼 네 귀퉁이에는 ‘옷단 술’을 달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들보다 더 ‘기다란 옷단 술’로 변했습니다(마태 23:5). 평상시에도 ‘기다란 예복’(그리스어로는 ‘스톨레’인데 말 그대로 ‘길게 끌리는 옷’입니다) 입기를 즐겼습니다. 그 옷차림새를 통해 자신들이 ‘경건하다는(구별되었다) 이미지’를 사람들 사이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만큼 ‘자부심’이 강했고, ‘자기 과시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면 ‘랍비’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사람들이 붐비는 ‘장터’에 나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인사하면서 대우합니다. ‘주목’받기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입은 채로 ‘바쁘게 살아가는’ 장터에 나타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이제 옷차림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권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나 ‘잔칫집’에서도 특권과 특전을 요구했습니다. 대접받기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회당예배’에 참석하면 그들은 ‘율법’(토라)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는 ‘장식장’ 바로 앞자리, 이른 바 ‘모세의 자리’(마태 23:2)에 앉는 것을 당연시 했습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모든 ‘경신례’(敬神禮)는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데도, 그 중의 한 사람, 즉 율법학자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잔칫집’에 가서도 제일 ‘윗자리’는 눈치 볼 것도 없이 그들의 차지였습니다. 당시 제일 윗자리는 주인의 옆자리입니다.

이처럼 당시 율법학자들은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섬겨야 하는 그 위대한 종의 자리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家産)을 등쳐먹던 ‘파렴치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경건하게 보이려고, ‘기다란’ 예복처럼, 기도는 ‘오래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자기과시(교만), 명예욕, 특권, 특전, 탐심, 위선이 그들의 옷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더 큰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모습과는 완전히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되라고,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솜씨, 겉모습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실제보다 훨씬 더 포장된 그들의 삶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람들은 말솜씨와 겉모습에 속아서 그들이 대단한 줄 알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별 볼일 없습니다. 한마디로 서로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새 세상을 만드는 일과는 멀리 떨어진 이들입니다.

 

후반부는(41-44)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에 주목하시고, 감동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성전 경내 ‘여인의 뜰’에 있던 ‘성전보물창고’ 벽에는 ‘헌금궤’ 13개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깔때기처럼 입구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관이 좁아져서 통속에 떨어지는 구조였습니다. 동전만 있던 시절이니 통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통해 그 액수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헌금궤’들 맞은편에 앉아서 ‘돈’을 넣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봉헌하는지 주목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예물을 바치느냐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동기로 봉헌하는지 더 관심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채색’(彩色) 옷을 입은 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여럿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떠들썩하게 줄을 지어 ‘돈’을 넣기 시작합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통 속에서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이목’(耳目)이 그들에게 집중됩니다. 그 때 초라한 행색의 한 여인이 또 다른 ‘헌금궤’ 앞으로 다가갑니다. 이상하게도 이 대목을 읽을 때면, 그 여인이 ‘할머니’라는 상상이 듭니다. 저만 그런가요? 복음서 기자는 그 여인이 ‘가난한 과부’였다고 보도합니다.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습니다. 소리를 들어볼 겨를조차 없습니다. ‘렙톤’(lepton, 그리스화폐 단위) 두 개는 얼마의 가치일까요?

‘렙톤’은 그리스어로 ‘작은 것’을 의미합니다. 렙톤 두 개는 당시 로마 ‘동전’ 한 닢의 값어치입니다. ‘동전’(그리스어로 코드란테스)은 로마화폐 단위 ‘콰드란스’(라틴어)를 말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 본 로마화폐 ‘데나리온’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1콰드란스는 데나리온 1개의 64분의 1가치입니다. 따라서 ‘렙톤’(그리스화폐 단위) 1개는 ‘데나리온’(로마화폐 단위) 1개의 128분의 1에 해당합니다. 데나리온 1개는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2018년 최저시급이 7,530원이니까 8시간으로 잡으면 렙톤 1개는 대략 600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1,200원을 예물로 드린 셈입니다.

 

이제 그녀는 ‘헌금궤’에서 멀어져 갑니다. 여전히 부자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계속해서 돈을 넣는 중입니다. 제자들도 부자들을 주목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시선을 멀어져 가는 그 과부에게로 향하게 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르 12:43-44

다시 잘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 중의 한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자들 ‘모두’ 보다도, 즉 그들이 넣은 것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다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그들의 풍부함이 타격을 입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꺼이 ‘생활비 모두’를 봉헌했습니다. 더 이상 갖고 있거나 남겨진 것이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완전한 희생입니다. 2독서 히브리서의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의 양’보다 ‘봉헌의 정신’이 그 ‘예물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불어 ‘예물의 가치’는 그 예물이 ‘봉헌자’에게 어떤 ‘대가’(代價)를 치르게 하는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봉헌의 정신, 봉헌자가 치르는 대가, 이것이 그 과부의 예물을 그토록 가치 있게 평가하신 예수님의 ‘기준’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 가난한 과부는 자신을 모두 바치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실 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은 우리의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돈의 양보다 그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분명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은 하느님께 유익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과부는 “다음에 돈을 많이 모으면 그 때 봉헌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과부였기에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정말이지 마음이 담긴다면, 희생이 담긴다면, 부자의 많은 예물이든 가난한 이의 적은 예물이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희생이 담긴다면 어떤 봉헌이든 하느님은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 과부에 봉헌에 감동하셨습니다. 그 과부의 예물은 ‘신의’(信義)를 지키시는 하느님이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봉헌’이었습니다. 생활비 모두를 바치는 ‘희생’이었습니다. 1독서의 사렙다 과부처럼, 렙톤 두 개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 전부’였습니다. 사실 1개는 자신을 위해 남기고, 1개만 봉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하느님을 향해 ‘관대함’을 보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봉헌이 가능할까요?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자기희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과부의 처지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동기를 보신다고 믿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예물에 어떤 사랑, 어떤 희생을 담고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은 개인차원에서 묵상하고 말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 또는 오늘의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요청하시는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흔히 과부의 봉헌 이야기를 성당건축을 앞두고 모금할 때 자주 언급합니다. 혹은 연 초 열리는 ‘교회위원 청지기 세미나’ 설교본문으로 자주 선정합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좀 민망하지만 봉헌생활 독려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건축헌금 모금이나 봉헌을 독려할 목적으로 그렇게 ‘따로 떼어서’ 설교할 수 있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런 목적으로 본문을 사용하는 것은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말하려는 주제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들었듯이 이 본문은 독서의 두 번째 단락입니다. 그 앞 단락과 연결해서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서 전반부는 후반부의 일종의 무대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그 무대를 설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인 자리에 기다란 예복을 입고 나타나고,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오래 기도하면서 경건한 척 합니다. 하지만 비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과부들의 가산(家産)을 등쳐먹었습니다.” 가진 것이 겨우 렙톤 두 개 뿐인 ‘가난한 과부’가 그 사회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후반부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위대한 봉헌이 있던 날 밤, 그 과부는 어찌 되었을까요? 굶었을까요? 아니면 ‘사렙다’ 과부처럼 어떤 ‘은총’을 맛보았을까요? 그 ‘구차’(苟且)한 과부를 돌봐주는 일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예수님이 그 봉헌을 알아보셨으니 책임을 지셔야합니까? 하지만 복음서는 그렇게 하셨다는 이야기 없이 열린 결론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제자들에게 그 일을 위임했다는 뜻입니까? 교회에게 그 일을 위임했다는 뜻입니까? 사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과부’로 대변되는 ‘가난한 이들’을 돌봤습니다(사도 6:1; 갈라 2:10). 그런 초대교회의 정신은 대한성공회 초창기부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대한성공회를 시작한 ‘찰스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주교는 5명의 사제, 미국인 의사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명 남득시) 박사와 함께 들어와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봤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이 땅에 봉헌했습니다.

그 선교정신은 오늘날도 각 교회와 나눔의 집, 사회선교기관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합니다. 갈수록 사회 양극화는 심화되어 갑니다. 가난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나서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저도 가난한 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러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가난하다고 해도 ‘사렙다 과부’보다는 많은 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렙톤을 하느님께 봉헌한 ‘그 과부’보다는 부자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과 어떻게 연대했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될 것이라는 ‘최후심판’의 말씀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마태 25:31-46).

간혹 신자들 중에 “종교가 사회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교회는 영혼 구원에나 충실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타락한 권력가들이 좋아하는 말입니다. 카마라 대주교는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가난의 문제’를 침묵해야 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전례독서 메시지를 듣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들을 시켜 ‘공의’(公義)를 외치게 하신 하느님 말씀에 입각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 정신에 입각해서,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특히 ‘가난’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사회, 사회적 약자들을 편애하는 사회’를 기뻐하십니다. 가진 이나 가난한 이나 서로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사회를 기대하십니다. 오늘도 그런 사회,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우리를 또 한 사람의 ‘엘리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 찬 교만과 탐욕과 위선의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과 희생의 마음을 담아 봉헌하는지 관심하십니다. 교회가, 우리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사회적 약자들)과 마음을 연대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 모든 ‘연대 행위’는 ‘신의’(信義)를 지키시는 하느님이 그 ‘가치를 알아봐주시는 봉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영광에 참여하는 봉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장 값진 봉헌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로 구성된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수험생과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수술 후 회복중인 홍비비안나 교우, 박창언님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11.11. 연중32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18.11.18. 연중 33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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