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1. 연중2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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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주님을 닮아 사랑의 섬김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제자도’를 교훈하시며, ‘자신의 사명’과 ‘수난의 목적’을 밝혀주십니다. 그 수난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섬김의 길을 가자’고 우리를 초대하시며, 우리의 섬김을 기억하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섬김의 주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그리스도인들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섬기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3:4-12
  • 시편 – 91:9-16
  • 2독서 – 히브 5:1-10
  • 복음서 – 마르 10:35-45

연중 2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주님을 닮아 사랑의 섬김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은 ‘섬김’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인물들은 ‘특별한’ 섬김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성인’(聖人)은 하나 같이 ‘특별한’ 섬김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 ‘특별한’ 섬김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경지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바친’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삶과 신앙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르코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번’이나 ‘수난예고’를 하십니다(마르 8:31-32; 9:31-32; 10:32-34). ‘수난예고’ 후에는 공통적으로 ‘제자들의 몰이해’(8:32-33; 9:32-34)가 따르고, 그들에게 ‘제자도’(8:34; 9:35-37)를 교훈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서는 세 번째 수난예고(10:32-34) 직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전반부는(35-40절) 야고보와 요한으로 대변되는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후반부는(41절-45절) 예수님이 ‘섬김의 제자도’를 교훈하시며 ‘자신의 사명’과 ‘수난의 목적’을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물론 두 번째 수난예고 직후처럼 ‘섬김의 제자도’를 교훈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 세 번이나 예고하신 ‘수난의 목적’이 명백히 밝혀집니다. 그 수난은 모든 사람의 ‘몸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代贖, 희생제물)입니다. 오늘 배정된 전례독서들은 이 ‘섬김’과 ‘속죄’(贖罪)의 수난예고와 상응(相應)합니다.

1독서 이사야는 제 2이사야(40-55장)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제 2이사야 본문이기에 시대 배경은 바빌론 포로생활이 끝나갈 무렵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바벨론에서 포로로 두 세대 이상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에 지쳐 더 이상 구원도, 하느님도, 희망할 여력조차 없습니다. 총체적 절망입니다.

제 2이사야는 바로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40장). 이제 그들은 모든 ‘죄과’(罪科)를 용서받았습니다. 심판과 분노, 저주와 절망의 관계는 청산되고, 자유와 회복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한마디로 ‘제 2출애굽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뭘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그들의 운명을 반전시킬 것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에게로 얼굴을 향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운명의 ‘반전’(反轉)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와 언약의 신실함 덕택입니다. 제 2이사야는 절망 속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을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의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포로생활이면 충분히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고, 이제는 구원과 위로를 받을 때라고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이스라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이렇게 이사야 40장부터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전환되고, 이것이 55장까지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점 때문에 구약학자 ‘버나드 둠’(Bernhard Duhm)은 이사야 예언서를 3부분(1-39장, 40-55장, 56-66장)으로 구분했고, 대부분의 구약학자들도 그의 구분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제 2이사야를 시켜 그 모든 ‘임무’를 성취할 ‘야훼의 종’, 즉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특히 제 2이사야에는 4개의 ‘종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42:1-4; 49:1-6; 50:4-9; 52:13-53:12). 본문은 그 중의 하나로 ‘종의 노래’ 중에서도 ‘절정’(climax)입니다. 흔히 ‘고난 받는 종의 네 번째 노래’라 불립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이사 53:7; 예레 11:19

이 네 번째 ‘종의 노래’는(52:13-53:12) 크게 ‘여덟 개의 구성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종의 ‘외모’입니다(52:14, 53:2). 둘째, 종이 당하는 ‘고난’입니다(53:3-4). 셋째, 종의 ‘태도’입니다(53:7).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깍이는 어미 양처럼 종은 결코 입을 열지 않습니다.” 넷째, 고난의 ‘이유’(목적)입니다(53:5-6,8,10-12). 한마디로 ‘대속적 고난’입니다. 다섯째, 종의 ‘죽음’입니다(53:9). 여섯째, 종의 ‘부활’입니다(53:10b).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이 구절은 구약에서 다니엘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찾아 볼 수 있는 ‘부활의 암시’입니다. 일곱째, 종의 ‘영광’입니다(52:13,15; 53:12). 여덟째, 마침내 종이 ‘하느님 뜻을 성취함’입니다(53:10c).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이처럼 고난 받는 종의 네 번째 노래는 여덟 개의 구성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문제는 이 고난 받는 종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먼저 ‘종’에 대한 일반적인 은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부르는 특별한 명칭이 있습니다. 바로 ‘야훼의 종’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 이사야, 욥, 즈룹바벨이 그렇게 불렸습니다(창세 24:14; 26:24; 출애 14:31; 32:13; 신명 9:27; 34:5; 여호 1:1; 8:31; 2사무 3:18; 7:5,8; 열왕상 8:24,25; 욥기 1:8; 2:3; 42:7-8; 시편 78:70; 132:10; 이사 20:3; 44:1-2; 48:20; 에제 37:25; 하깨 2:23; 즈가 3:8). 심지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론 제국의 ‘느브갓네살’도 그렇게 불렸습니다(예레 25:9; 27:6; 43:10). ‘여호수아’처럼 위대한 ‘지도자’도 생전에 이 명칭으로 불리지 못하고, ‘죽음의 기록’에서야(여호 24:29) 그렇게 불렸던 점에 비추어볼 때 ‘느브갓네살’의 경우는 놀랍기만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로가 그렇게 불렸습니다(사도 4:27; 디도 1:1).

이렇게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종’으로 성경에 등장하기에 제 2이사야가 예언한 이 ‘야훼의 종’, 특히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을 누구로 볼 것이냐를 두고 논의들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이는 ‘예언자 자신’으로, ‘이스라엘 전체’로, 이스라엘 중의 ‘경건한 소수의 남은 자’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므기또’(Meggido)에서 전사한 유다의 왕 ‘요시아’로(열왕하 23:29-30), 아시리아 제국 산헤립의 침공을 받고도 살아남았던 ‘히즈키야’로(이사 36-37장), 구약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던 예언자 ‘예레미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또 바빌론 포로로 잡혀가 40여 년 간 포로생활을 한 ‘여호야긴’으로, ‘즈룹바벨’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전통적으로 ‘바빌론 포로들’이라 해석해 왔습니다. 여전히 장차 올 ‘메시아적 인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노래’를 읽던 내시는 필립을 마차에 태웁니다”, 사도 8:26-38

그러면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해석해 왔을까요? 초대교회로부터 그리스도교는 ‘고난 받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고난 받는 야훼 종의 노래’가 십자가에서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성취되었다고 해석해 왔습니다(사도 8:26-36). 그렇습니다.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대속적(代贖的) 죽음, 부활의 영광은 완벽하게 성취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입니다. 1독서로 배정된 이유입니다.

시편 91편은(9-16절)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거나 기도를 바치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하느님께 ‘신뢰’를 고백하도록 권고하는 말만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학자들은 이 시편을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시(詩)의 배경은 ‘성전’ 안으로 피신해 들어와 안전과 보호를 요청하는 ‘어떤 사람’을 마주한 제사장으로 시작합니다(1절). 분명 피신해 들어온 그 사람은 ‘정의롭게’ 살아 온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그에게 하느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도록 권면합니다(2절). 이어서 제사장은 연속된 비유와 약속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그 ‘도피자’에게 교훈합니다(3-16절). 이처럼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거나 기도를 바치진 않지만, 시인은 제사장의 입을 빌어 ‘성전’으로 피신한 이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느님의 권능을 신뢰하고, 성전을 찾아 나와 기도해야 합니다(14-15절). 하느님은 시인(제사장)을 통해 ‘성전’으로 찾아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를 지속적으로 돌보신다고 말입니다(16절).

그러면 어째서 이 시편이 전례독서로 배정되었을까요? 11절, 12절, 13절, 16절이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11절, 12절은 약간 수정된 형태로 복음서에 인용됩니다(마태 4:6; 루가 4:10-11). 악마는 바로 이 구절로 ‘하느님을 시험’하도록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뛰어 내려서 하나도 다치지 않는 기적을 행해보라고 유혹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적용하는 오류입니다. 악마가 참 말씀이신 예수님을 유혹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 즉 기록된 말씀(율법)을 인용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하지만 ‘참 말씀’이신 예수님은 자기 생각으로가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그 유혹을 겸손히 ‘식별’하십니다. 그 만큼 예수님이 ‘야훼의 법’을 가까이 하시고 밤낮으로 깊이 되새겼다는 뜻입니다(시편 1:2). 우리도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하느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일상의 일들을 잘 식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53

13절의 “사자와 독사”는 ‘위험스러운 대적’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을 짓이긴다.”라는 표현은 ‘승리’를 나타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고 증언합니다(마르 1:34).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부터 ‘승리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파송하신 72명의 제자단도 사탄의 지배를 위협하는 승리를 거두고 귀환합니다(루가 10:17-20). 이것은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거두실 승리의 자그마한 표지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을 ‘완전히’ 짓이기셨다고 신약성경은 증언합니다. 끝으로 16절은 1독서 이사야서의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이사 53:10c)와 연결됩니다. 한마디로 ‘부활의 암시’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하느님 나라 운동, 그리고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와 부활까지를 통째로 꿰뚫고 있는 셈입니다.

끝으로 오늘 시편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성전 안으로 피신해 들어와 제사장에게 안전과 보호를 요청하는 어떤 사람은 바로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성전’이십니다(요한 2:13-22). 우리는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위로와 보호를 얻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성전이시기만 한 분이 아니라 오늘 2독서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는 분입니다.

2독서는 히브리서입니다. 나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전 연중 33주일까지 계속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연중시기 계속독서는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도록 배정되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오늘 배정된 본문은 계속독서인데도 복음서의 주제인 ‘섬김’, ‘속죄’(贖罪)의 ‘수난예고’와 상응(相應)합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 5:8-9

히브리서 기자는 옛 계약의 대사제와 새 계약의 대사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우선 둘의 ‘공통점’은 ‘사람’(2절, 7절-8절)이라는 점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입니다(4절, 5절, 10절). 아론의 후예인 옛 계약의 대사제 뿐 아니라 멜기세덱을 잇는 새 계약의 대사제인 예수님도 ‘사람’이셨습니다. 둘 다 사람이었기에 무지하거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할 수 있습니다(2절, 7절-8절). 또 둘 다 스스로 그 자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영예로운 직무와 영광스러운 자리를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둘의 ‘차이점’입니다. 대사제는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받고 죄를 짓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3절).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성육신을 통해 눈물과 고난과 죽음(7-8절), 즉 ‘생로병사’하는 인간의 삶에 들어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을 배우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히브 4:15)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셨기에” 자신을 위해서 아론의 후예인 대사제처럼 ‘속죄’의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인간처럼 고난을 겪으심으로써(자신을 제한함으로써) 하느님께 ‘복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8절). 특히 ‘십자가 수난’은 성부 하느님께 보이신 복종의 절정이었습니다. 그 복종을 통해 예수님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대사제’(大司祭)로 임명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성육신과 수난의 경험,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권위로 예수님은 ‘대사제’로서 오늘도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히브 7:23-28).

드디어 이 모든 전례독서들의 기준이 되는 복음서를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복음서 전반부는(35-40절) 야고보와 요한으로 대변되는 ‘제자들의 몰이해’를 전해줍니다. 거듭되는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과월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 입성은 축제참가보다는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결론으로 찾아낸 목적은 눈빛을 반짝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만면에 웃음기를 띠었습니다. ‘새 왕국.’ 상상만으로도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예수님은 거기 있는 축제참가자들과 더불어 로마총독과 괴뢰정부인 헤로데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옛날 다윗 왕처럼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새 정부를 구성하는 중심인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그들의 일반적인 믿음이었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비난하진 마십시오. 우리도 그들이었다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단연 ‘최고’가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눈부시게 빛나던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도록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선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마르 9:2-8).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좀 ‘불안’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영광’을 차지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보장’을 받고 싶었습니다. 수제자를 자처하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나서기 전에 ‘선수’(先手)를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여겼습니다.

마침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다른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눈치를 보다가 예수님께 다가가 그 ‘음흉한 야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우편에 앉는 ‘특권’을 청탁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새 왕국을 세우시고 정부를 구성하실 때 ‘일찍부터’ 고생한 자신들에게 ‘최고위직’(가장 명예로운 두 자리)을 ‘약조’(約條)하시라는 요청입니다. 사실 그들은 ‘최측근’이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청탁을 들으신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정말 황당하셨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마르 10:38a

잠시 후에 드러나겠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를 단지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수난예고’는 눈곱만큼도 알아들을 생각을 안 하고 그저 ‘자기 영광’만 구하던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이 아니라 ‘희생’의 관점에서 그들의 청탁을 생각해 보도록 먼저 이끄십니다.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마르 10:38b

“마시게 될 잔”과 “고난의 세례”는 일종의 ‘은유’로 문학적 표현입니다. 전후 맥락을 따져야하지만 성경에서 ‘잔을 마신다.’는 문학적 표현은 하느님의 진노를 받거나 고난의 형벌(수치, 능욕)을 가리킵니다(이사 51:17; 예레 25:15-16; 에제 23:31; 하바 2:16; 마르 14:36). ‘고난의 세례’도 복음서에서 ‘죽음’의 은유입니다(루가 12:50). 따라서 예수님이 “마시게 될 잔”과 “고난의 세례”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고난과 죽음, 즉 십자가 수난이 다시 한 번 문학적 표현으로 예고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예,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아마 그들은 ‘마시게 될 잔’과 ‘고난의 세례’를 ‘각오를 다짐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지 ‘의리’(義理)를 물으신 것으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확신에 찬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
마르 10:39

실제로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고백대로 각각 ‘잔’을 마셨고, ‘고난의 세례’도 동참하였습니다. AD 44년 ‘헤로데 아그립바 1세’가 팔레스틴을 다스릴 때 ‘야고보’는 순교자 명단에 오르는 ‘첫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사도 12:1-2). ‘사도 요한’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지는 고난을 당했지만, 살아남은 것으로 교회사는 전해 줍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잔’을 마셨고 ‘고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이 청탁한 그 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정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약간의 섭섭함이 밀려옵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돈주머니를 관리하던 ‘유다’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예수님이 점찍어 놓은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이 ‘십자가’이고, 좌우의 자리를 차지할 두 사람이 ‘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기에 좌우의 자리를 원한다면 그들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한다는 이 끔찍한 진실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탐하는 그들에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들이 듣기에 아직 그 자리는 ‘공석’(空席)인 것처럼 들렸습니다. 더욱이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여전히 예수님은 자신들의 ‘의리’를 굳게 신뢰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만면 가득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이 생각하던 그런 뜻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일종의 ‘보장’이라도 받은 냥 눈빛을 교환했습니다. 이것은 어느 새 그들 곁에 다가와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화’를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본래 사람은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향이 강하고, 전체가 아니라 남의 말을 일부만 듣고 판단하면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와 요한이 너무 주제넘은 짓을 한 것일까요? 그들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그들은 최고자리를 인정받고 싶어 그토록 안달을 떨었을까요? 또 두 사람을 질투하며 화를 내고 있는 열 제자들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복음서 후반부는(41절-45절) 예수님이 ‘섬김의 제자도’를 교훈하시며 ‘자신의 사명’과 ‘수난의 목적’을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아마 콧김을 내뿜으며 ‘여우같은 놈들!’이라고 질투의 눈을 부라렸을지도 모릅니다. 수제자를 자처하던 베드로는 선수를 뺏겼다고, 뒤통수를 맞았다고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릅니다. 다 똑같은 수준입니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야심을 들켰지만, 질투와 분노, 경쟁심의 노예자리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누구하나 스승의 마음을 고요히 헤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a

지난 연중 25주일 나누었던 복음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두 번째 ‘수난예고’였습니다(마르 9:30-32). 제자들은 수난예고를 알아듣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를 두고 길에서 서로 다투었습니다(마르 9:34).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모아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오만’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도를 교훈하셨습니다(마르 9:35). 그런 다음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품에 안으시고 그들이 ‘의도적’으로 섬겨야(환영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명백히 하셨습니다(마르 9:37).

그 두 번째 수난예고와 ‘섬김의 제자도’ 후에 그들이 달라졌습니까? 오히려 그들 사이의 경쟁심이 더욱 가열되었음을 ‘분노’라는 말이 보여줍니다. 자리와 권력에 대한 야심, 질투와 분노, 경쟁심은 여전히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반영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섬김의 제자도에서 교훈하신 하느님 나라의 지도력과 참된 위대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갑니다. 그 경쟁의 이유를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민주시민사회에서는 경쟁을 통한 선발방식을 채택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선발방식은 주로 ‘공개 시험’이지만 때로는 공개 시험보다 외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인맥’, ‘학연’, ‘혈연’ 등과 같은 ‘특권’과 ‘반칙’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선서에서 이렇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취임선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고발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 당연한 원칙이 지속되도록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갖는 일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기회와 과정과 결과가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웠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합격했다 하더라도 새로운 경쟁이 다시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경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치열합니다. 더 좁아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미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눈물겨운 외침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렇게 치열하고 끊임없는 경쟁 속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이런 사회상은 자라나는 세대들의 정신과 태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어떤 강박에라도 사로잡힌 듯 1등이 되려고 애씁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강박’을 상황, 즉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회 경제적 원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성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어떨까요? 우리가 그런 강박에 사로잡히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경쟁의 뿌리에는 ‘빈약한 자아상’(자기 결핍)과 미래에 대한 ‘자기 불안’이 자리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렇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빈약한 자아상’과 미래에 대한 ‘자기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무엇을 잘 해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자신이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어려서부터 인정받아 본 경험이 없거나 적습니다.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스스로를 사랑스럽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간혹 무엇인가를 해내야 부모로부터 혹은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사랑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가치 있다는 점을, 사랑받을 만 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인정받기 위해 울부짖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경쟁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의 눈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을 향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깥세상을 향해 인정, 존중, 사랑, 수용을 절실히 외치고 있습니다. 그 외침은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자기 내면의 고인 진정한 눈물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깥으로부터 오는 인정, 존중, 사랑, 수용에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그것들이 주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관계에서 그 4가지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존중’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사랑’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수용’되고 싶습니다. 누구로부터요? 타인으로부터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권을 타인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갑니다. 모두가 ‘빈약한 자아상’(자기 결핍)과 미래에 대한 ‘자기 불안’속에 살아가는 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수용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저라면 차라리 그런 ‘구걸’을 그만 두겠습니다. 구걸하며 살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왼손 옷소매를 걷어서 팔꿈치까지 올려보십시오. 아마 팔뚝 안쪽에 금이 하나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바깥으로 돌아다니며 남들로부터 인정, 존중, 사랑, 수용을 채워달라고 들고 다닌 깡통 자국입니다. 이제껏 들고 다닌 허기진 마음의 깡통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복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복음’은 하느님이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인정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시며, 이 모습 이대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는 그대로 온전히 수용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온전히 믿는다면, 다시 말해 이 복음이 진실임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타인에게 인정을, 존중을, 사랑을, 수용을 구걸하러 다니는 대신 복음을 쫓아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과 화해하고, 기꺼이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복음을 믿을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지금까지 느껴온 내 안의 모든 ‘불안’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런 자신에 대해 잠시라도 웃을 수 있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리와 권력에 대한 야심, 질투와 분노, 경쟁심의 불길에 휩싸인 그들을 예수님은 가까이 불러들이십니다.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참된 위대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이 무엇인지 들려주실 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권력가들의 구린내 나는 속내를 꿰뚫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마르 10:42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의 통치자와 권력가들은 결코 ‘백성’을 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이익’을 위해, ‘자기가족’의 특권을 위해 가진 힘을 남용하기까지 합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생활을 꿈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따끔하게 책망하십니다. 그 따위 허망한 꿈에서 깨라는 질책입니다. 오히려 ‘자기’라는 울타리를 넘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일에 힘쓸 것을, 다시 말해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라고 교훈하십니다. 자기 한 몸, 자기가족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참된 위대함’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는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람들, 즉 교회로 모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배욕’과 ‘권력욕’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관계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자기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가진 사회적 지위, 돈, 인기가 ‘지도력’의 전제조건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섬김과 종으로서의 삶’이야말로 교회에 필요한 지도력의 전제조건이라고 교훈하신 셈입니다. 국가도 그렇습니다. 선거를 통해 지배욕과 권력욕에 붙잡힌 욕심덩어리를 지도자로 세울지, 아니면 겸손한 섬김의 종을 세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 마음의 왕국도 그렇습니다. 지배욕과 권력욕에 불타는 왕국으로 만들지, 아니면 겸손한 섬김이 강물처럼 흐르는 왕국을 만들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사역은 그런 ‘겸손한 섬김’과 ‘종인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못을 박으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르 10:45a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사명’과 ‘목적’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놀랍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우리의 섬김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명백히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섬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섬길만한 어떤 자격도 없고, 섬길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할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을 섬겨 무슨 ‘공로’라도 세울 수 있는 냥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무능한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섬김을 받고 있는 자신을 ‘자각’(自覺)하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다음 우리는 자신이 받은 섬김을 예수님께 되갚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511

끝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욱 공고히 못을 박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르 10:45b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 사역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한 번 더’ 명백히 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오늘 1독서 ‘고난 받는 야훼 종의 네 번째 노래’처럼, 죄인들을 대신해 자기 자신을 ‘대속물’, 즉 ‘몸값’으로 바치려는 봉헌입니다. 이처럼 ‘몸값’(대속)은 예수님이 목숨을 바치신 목적을 한 단어로 요약한 결정적 은유이며, 예수님의 ‘섬김’을 드러내주는 완전한 정의입니다.

오늘날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고대에는 전쟁 포로나 노예의 생명을 그 ‘몸값’에 해당하는 돈을 ‘대신 지불’해줌으로써 구원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몸값은 한 존재에게 있어서 새로운 생명의 기회이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값’을 치러 구원해 낸다는 ‘대체’(代替), ‘대리’(代理)의 개념은 성경에서도 ‘대속’(代贖)에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야훼는 거룩하다. 너희는 내 것이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뭇 백성 가운데서 갈라내어 내 것으로 삼았다.
레위 20:26

‘레위기’는 하느님의 고유한 ‘신성’(神性) 중의 하나를 ‘거룩함’(코데쉬)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피조물들은 ‘거룩성’이 없지만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을 때 사람은 하느님의 거룩성에 참여합니다. 그러면 피조물인 사람은 어떤 때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까? 죄를 지어 부정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끊어진 관계, 즉 사람이 죄를 지어 부정하게 된 대가는 ‘죽음’입니다(로마 6:23). 따라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죄값’을 치르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레위기는 그 ‘죄값’을 치르는 방법이 ‘나’를 대신해 희생동물을 잡고, 그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일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피는 그 동물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피가 생명이기에 ‘피를 바친다.’는 말은 ‘생명’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피’는 3가지 제의적 역할을 합니다. 첫째, 피는 관계를 굳건히 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피로 맺어진 ‘계약의 관계’라고 합니다(출애 24:5-8). 태극기부대들이 좋아하는 미국과의 ‘혈맹’이 그런 은유입니다. 둘째, 대상이 물건일 때 피는 거기에 묻은 더러움과 죄를 씻어내는 ‘세정제’ 역할입니다(출애 29:36; 레위 16:16). 셋째, 대상이 사람일 때 피는 ‘속죄’(贖罪)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속죄의 피’의 역할입니다. 희생동물의 피는 죄와 더러움을 씻어주고, 나의 죄값을 대신 물어주어 내 죄가 ‘속죄’(贖罪, expiation, atonement) 받게 합니다.

이처럼 희생동물의 ‘피’(생명)는 나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러 준 ‘대속물’(代贖物, 몸값, ransom)입니다(레위 17:11). 희생동물의 죽음은 내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代贖, redeem) ‘대속적 죽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정해주신 ‘제도’라는 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더욱이 구약에서 말씀하시는 ‘피의 역할’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신학적으로 직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씻어 주시고 속죄하셨으므로 그 피를 ‘귀한 피’, 즉 ‘보혈’(寶血)이라 불렀습니다(1베드 1:18-19). 예수님은 자신의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보혈’인가를 밝히는 말씀이 2독서 히브리서의 주요한 주제중의 하나입니다.

구약시대에 대사제는 ‘일 년에 한 번씩’ 희생동물의 피를 성전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서, 피를 뿌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贖罪) 받았습니다(레위 16장).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대사제’로 임명받으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히브 4:14; 5:5-6).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지상 성전’이 아니라 ‘하늘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가 희생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를 뿌리심으로 모든 인간들의 죄를 결정적으로 용서받게 하셨습니다(히브 9:12; 10:11-12).

이렇게 섬기는 분으로 세상에 오시어 자신을 ‘대속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생애를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5-8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닮아 ‘사랑의 섬김’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복음서는 우리의 섬김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명백히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기까지 먼저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의 섬김을 받는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성찬례’는 그 확인입니다. 우리는 성찬례가 ‘지배욕과 권력욕’, ‘경쟁심과 분노’에 끌려 다니는 우리 ‘마음’을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섬김의 왕국’으로 변화시켜 간다고 믿습니다. 또 일상의 ‘기도수행’이 ‘빈약한 자아상과 자기 불안’에 떠는 우리 ‘마음’을 ‘사랑과 평화의 왕국’으로 변화시켜 간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섬김의 길을 가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섬김을 받는 사람답게 겸손히 이웃을 향합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의 섬김을 세상으로 가져갑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섬김을 ‘기억’하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십니다(히브 6:10). 부디 성령께서 우리를 섬김의 주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그리스도인들로 이끌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로 구성된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수술 후 회복중인 홍비비안나 교우, 박창언님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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